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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위한 세 가지 유의할 점(전 11:9-11) / 지용수 목사

by 【고동엽】 2021. 11. 26.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유의할 점

전도서 11:9∼11

 

 

저는 스펄전, 웨슬리, D.L 무디가 최고의 설교자인 줄만 알았는데, 그보다 더 뛰어난 설교자 한 분이 계셨습니다. 휫필드입니다. 그는 마이크 없이 삼만 명에게 육성으로 설교를 해서 다 듣게 한 분입니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 사람들이 대부분 복음으로 돌아오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몸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오라는 곳마다 다 갔습니다. 미국에서 오라 하면 미국에 가고, 좌우간 오라는 데는 다 갔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절제를 많이 합니다. 장로회 신학대학에서도 수련회를 해달라, 영남 신학대학에서도 해달라, 여러 곳에서 요청을 해도 "안 됩니다. 안 됩니다."하며 가지 않습니다. 저는 제 몸을 알고, 제 힘을 알고, 제 에너지를 알기 때문에 줄여서 나갑니다.

 

그런데 휫필드 목사님은 죽도록 일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죽도록'이란 말씀은 죽을 지경이 되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죽음의 포인트까지(The point of death), 죽음의 그 시점까지,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충성해도 죽도록 충성하다가 여기에 쓰러지고, 저기에 쓰러지고, 교사하다가 쓰러지고, 그러면 안 됩니다. 죽을 때까지 마라톤으로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마라톤 선수는 자기가 달려야 될 거리와 시간과 자기 에너지를 압니다. 자기 건강을 알아서 그것을 잘 배려해서 달립니다.

 

목사님이 40세에 쓰러져 죽고, 장로님이 35세에 죽는 것은 별로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충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휫필드 목사님은 성경 해석을 잘못해서 죽도록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참 안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있었으면 그분한테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저처럼 이렇게 하면 저는 99세까지 살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설교가 너무 귀해서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무신론자가 '휫필드 목사님이 설교하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 몇 만 명이 모여서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을까?'하고 궁금해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자기도 예수님을 믿게 될까 봐 겁이 나서 무리 속에 들어가지 않고 멀리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숨었습니다. 그리고 귀를 꽉 막고 어떻게 설교하는가 눈으로만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무엇을 아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로마서 10장 17절에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

 

말씀을 들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교회에 놀러온 사람도 떠나갈 때는 예수꾼이 되어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두 손으로 귀를 꽉 막고 있었는데,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서 콧등에 앉았습니다. 간질간질해서 코를 아무리 흔들어도 파리가 날아가지 않았습니다. 파리를 쫓는다고 귀를 막았던 손을 잠깐 떼었습니다. 그때 휫필드 목사님의 설교가 들렸습니다.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아이고, 저 휫필드 목사님이 내가 나무에 숨어 있는 것을 다 아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네.'라고 생각하고 벌벌 떨면서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구원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이 지역의 하나님 백성은 다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오늘 밤에 오신 분도 하나님의 백성은 다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도 귀 있는 자, 여러분, 잘 들으시고 은혜와 기쁨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어제 미국 보스톤에 계신 한 목사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무척 오랜만에 받은 전화라 기뻤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그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었는데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아이고, 목사님. 야위셨던데요?"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잘 모르는데, 보스톤의 TV에도 제 설교가 나온답니다.

 

야위었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제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야기 중에 그 목사님의 아기가 생각났습니다. 아주 예쁜 사모님 품에서 재롱을 떨던 아기 메튜가 생각나서 물었습니다.

 

"아, 참! 목사님, 매튜가 몇 학년이에요?"

 

"6학년이에요."

 

"걔가 6학년이 됐어요?"

 

벌써 6학년이랍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다시 한번 '쏜살같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가 갔을 때 코흘리개였는데, 벌써 6학년이 되었답니다. 그러니까 세월이 벌써 11,2년은 흘렀나 봅니다. 이제 내일 모레면 장가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일생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청년이여' 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청년은 청년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편 110편 3절에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거룩한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이 주께로 나오는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도 청년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이 새벽 이슬 같습니다.

 

청년은 인생의 한 장입니다. 군에 갈 때는 청년이지만 제대하면 벌써 늙는 것입니다. 그 청년이 잠깐입니다. 새벽 이슬 같습니다. 새벽 이슬이 무엇입니까? 새벽에 내린 이슬이 아름답고 예쁘고 영롱하고 깨끗하고 좋지만 햇살이 비치면 사라지고 맙니다.

 

'청년, 청년이다.' 싶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이 아닙니다.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는 것입니다. 청년의 때가 새벽 이슬같이 순간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생이 그런 것입니다.

 

시편 90편 10절에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제가 저희 아버님 추도일이었습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렸는데,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8주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어머니께 말했습니다.

 

"어머니, 아버님께서 세상 떠나신 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8주년이 됐어요. 우리도 내일 모레면 아버님을 뵈러 갈 거예요. 내일 모레예요. 이렇게 어머니랑 같이 살아도 좋고, 세상을 떠나면 아버님이랑 같이 사니 또 얼마나 좋아요?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 가족이 다 아버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게 될 거예요."

 

어머니께서 혹 죽음에 대해 부담을 가지실까봐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어머니 모시고 아버님 추도 예배를 드렸지만, 언젠가는 어머니를 천국으로 이사 보내고 저와 아내와 남은 식구들이 모여서 예배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떠나가는 식구가 있습니다. 형제들도 가버리게 됩니다.

 

인생은 새벽 이슬입니다. 여러분의 생애, 저의 생애가 새벽 이슬입니다.

 

인생의 소중한, 새벽 이슬 같은 짧은 이 때를 후회하게 살면 안 됩니다. 행복한 삶,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이 불행하게 살기를, 다투고 싸우며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모든 부모는 자기 자녀들이 행복하고 복되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부모님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잠깐 살다가 가는 세상에서 아웅다웅 다투며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십니다. 고생하며 사는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33절에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짤막한 인생, 이슬 같은 인생을 살다가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남은 생애를 행복하게 살기를 축원합니다.

 

이슬같이 잠깐만에 말라버리는 인생을 복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먼저는 설정을 해야 됩니다.

 

제가 오래 전에 미국의 한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그 목사님의 차가 링컨 리무진이었습니다. 그런데 24시간을 달려도 엔진이 열을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우리 나라의 자동차도 좋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 나라에는 자동차가 많지 않을 때였습니다. 제가 아는 자동차가 포니와 스텔라 정도였는데, 그 차를 보았으니 얼마나 좋아 보였겠습니까?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저보고 운전을 해보라고 해서 두 시간 동안 운전을 했는데 어찌 그리 승차감이 좋은지 미끄러지는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속도까지 설정할 수 있는 차였습니다. 액셀레이터를 조금 강하게 밟으면 너무 빨리 달려서 불안해 하니까 속도를 설정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55마일로 설정해 놓으니 액셀레이터를 아무리 강하게 밟아도 또 밟지 않아도 항상 55마일로만 달렸습니다. 오르막 길에서도 55마일, 내리막 길에서도 55마일, 설정한 대로만 달렸습니다.

 

요즈음에는 우리 나라에도 그런 차가 나옵니다. 100km, 80km로 속도를 설정해 놓으면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설정을 해야 됩니다.

 

어떤 설정입니까?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따라합시다.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나는 즐겁게 산다. 나는 내 인생을 즐겁게 산다.'라고 설정해야 됩니다. 즐거움의 기어를 넣고 아예 설정을 해야 됩니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낮에도 밤에도 무조건 '나는 기뻐한다.'라고 설정해 놓는 것이 새벽 이슬같이 잠깐 살다가는 찰나 같은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지름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 어린 때'도 청년의 때입니다.

 

'청년의 때를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라. 네 눈이 원하는 대로 하면서 기뻐하며 살라.' 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는 기쁨의 강이 흐릅니다.

 

빌립보서 3장 1절에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사도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기뻐하라.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절에도 기뻐하라고 해 놓고 또 빌립보서 4장 4절에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핍박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감옥에 가고, 순교도 당하고,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도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기쁨의 기어를 넣고 설정하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왜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과 18절에도 『항상 기뻐하라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슬퍼하고 화내고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마귀의 뜻입니다. 아웅다웅하고 싸우는 것은 마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어디에서나 싸우고 다투는 것은 마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하고 찬송하는데, 그 뜻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추운 감옥에서 얻어 먹지도 못하여 배가 고팠지만, 설정을 기쁘게 해 놓으니 기뻐하며 찬양했습니다.

 

왜입니까? 기뻐만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결혼한 후 11년간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아내한테 얼마나 나쁜 남편이었는지 모릅니다. 김치 맛이 없다고 수백 번 말하고, 아내에게 얼마나 불평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정말 나쁜 남편이었습니다. 그때는 '아내가 왜 저러나?'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철이 드니 아내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제 아내는 천사였습니다. 제가 나빴습니다. 그때는 제가 설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년이 지난 다음에 제가 설정을 했습니다.

 

'나는 희극만 한다. 나는 아내를 기쁘게만 한다.'

 

물론 지금도 제 정신이 아닐 때는 가끔 아내를 아프게 하지만, 제 정신이 들면 아내에게 나쁜 말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슬퍼할 말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즐거워할 말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내를 붙여 주신 것은 싸우라고 붙여 주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보석이 흐르는 강을 만들어 주시고, 지구촌에서 최고로 좋은 파라라이스, 낙원, 최고로 행복한 환경을 만들어 주시고 거기에 아담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행복해 하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혼자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자가 있으면 말도 많지만, 여자가 없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곳에 있어도 여자가 없으면 답답합니다. 군대에 가 보십시오. 군에서 훈련 받는 군인들은 치마 입은 할머니만 지나가도 "야!"합니다.

 

'세상에 돈만 있다고 뽐내지 말라 … 돈 돈 하지만 여자가 최고야' 하는 노래도 예전에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먹고 마실 것을 다 있고, 보석 강이 흘러도 아담이 행복해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아주 쓸쓸해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하!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구나.'하시며 만들어 주신 것이 여자입니다. 즐겁게 살라고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담이 흥분해서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내 뼈 중의 뼈! 내 살 중의 살!" 하며 기뻐하고 좋아했습니다.

 

즐겁게 살라고 하나님께서 여자와 남자를 결혼시켜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서로 다투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11년간 다투었습니다. 그러다가 11년이 지난 후에 설정했습니다.

 

'나는 희극만 한다. 아내가 싫어하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혹 아내가 제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을 해도 말하지 않고 제가 아내를 위해 봉사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좋습니다. 제가 즐겁습니다.

 

즐겁게 사는 것이 최고입니다.

 

잠언 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 15장 13절에도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즐거워하는 부부는 얼굴에 빛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햇빛이 있고 그림자가 있습니다. 늘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좋지 않을 때도 좋게 산다.' 라고 생각하면 즐겁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기쁨의 기어를 넣고 살기로 설정했다. 나는 어쨌든 기뻐한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기 반찬에 밥을 먹다가 사업이 망해서 죽을 먹어도 죽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하루에 세 끼를 먹지 못하고 두 끼를 먹으며 살아도 먹을 것이 있으니 감사하지 않습니까? 삼백 평 저택에서 살다가 열 평 집에서 살게 되어도 열 평 집이 있으니 감사하지 않습니까?

 

생각만 좋게 하면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아이 중에 두 아이가 죽어도 두 아이가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면 감사한 것입니다.

 

내게 불행한 조건이 아무리 많아도 '나는 기뻐한다.' 고 마음을 먹으면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또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기가 막히는 불행한 일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겨 나가야 됩니다.

 

바닷가의 한 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남자들이 고기를 잡으러 가면 몇 주 뒤나 몇 달 뒤에 오니까, 혼자 사는 부인들이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그만 이웃 남자와 정을 통하여 가정이 파괴되는 일이 자주 생겼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규칙을 정했습니다. 남편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 사이에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는 여자는 남편 앞에서, 벼랑에서 밀어 바다에 빠져 죽게 했습니다. 그래도 가끔 남편이 없는 몇 달 사이에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는 실수를 해서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 죽음을 당하는 여자가 있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타처에서 배를 타고 온 낯선 남자와 정을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남자와 정을 통하면 소문이 날 것이지만 타처에서 온 사람은 떠나면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정을 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입니다. 그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결국 남편이 돌아왔을 때 벼랑에서 떨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돌아와서 사실을 확인하고, 이제 아침에 해가 뜨면 벼랑에서 떨어져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그날 밤에 그 남편이 고민을 했습니다.

 

'내 아내는 천사가 아니지 않은가? 사람인데 약할 수 있지. 내가 몇 달 간 집을 비운 사이에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면 그럴 수 있지.'

 

아내를 이해하고 용서해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고기 잡는 그물을 절벽 밑에 깔아놓고, 거기에 짚단과 해초 말린 것을 더 깔아서 아내가 떨어져도 다치지 않도록 해 놓았습니다. 아내를 용서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사랑의 그물을 펴놓은 것입니다.

 

다음 날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왔습니다. 간음한 여자를 벼랑 끝에 세워 놓고 남편이 보는 앞에서 밀었습니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물에 첨벙 하고 빠져 죽어야 하는 여자를 그물이 척 받아서 그네를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여자가 사랑의 그네를 타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벌을 주었는데 죽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여왕에게 갔습니다.

 

"여왕 폐하, 우리 마을의 법이 이런데, 글쎄 그 남편이 속도 없이 그물을 쳐 놓아서 아내를 살렸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편이 용서한 것을 너희가 왜 그러느냐?"

 

그 남편의 사랑에 감동을 받은 여왕이 보석으로 그물 면류관을 만들어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부인이 그 보석 면류관을 쓰고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아내가 돈 몇 천만 원을 손해보인 것은 남편이 이해해도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한 것은 견디지 못하는 법입니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다면 저라도 칼을 뽑을 것입니다. 찌르지는 못할지 몰라도 뽑아서 휘두르기라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때라도 '나는 행복하고 기쁘게 살려고 했다.'면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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