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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기쁨의 노래(시 27:1-4 ) / 지용수 목사

by 【고동엽】 2021. 11. 26.

기쁨의 노래
시편 27:1-4


에브라임 레슬러 박사는 "사람은 일생 아무리 노력하고 머리를 써도 자기 두뇌의 7%밖에 쓰지 못하고 93%를 사장시켜 놓고 세상을 떠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연구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뇌의 능력을 다 활용하지 못하고 그저 7% 정도만 쓴다는 것입니다. 93%가 한 번도 쓰이지 못하고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에디슨이 한번은 바다를 보고 통곡을 했답니다.
"저 큰 바다의 에너지를 활용하면 엄청난 힘을 얻을 텐데…."
저 에너지를, 저 바다의 에너지를 그냥 사장시켜 두는 것이 원통해서 통곡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다 활용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들을 볼 때, 때로는 통곡하고 싶습니다.
말씀 앞에서 말씀을 연구하여 말씀을 전해야 하는 분들이 이 회의에 참석하시고 저 회의에 참석하시고, 여기에 불려 다니시고 저기에 불려 다니시느라, 모든 분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그냥 말씀을 전하니 통곡할 일이 아닙니까?
제가 어느 곳에 집회를 갔을 때입니다. 그 교회 사모님이 제게 와서 무릎을 꿇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제발 우리 목사님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면해 주고 가십시오."
대단히 조심스런 말입니다만,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이 성경을 안 읽으세요?"
"성경 읽는 걸 볼 수 없습니다. 한 주간 같이 살아도 우리 목사님이 성경 읽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답답한데 우리 교인들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목사님, 제발 우리 목사님에게 성경을 좀 읽게 부탁해 주세요."
"사모님이 말씀하세요."
"제가 수없이 말씀 드렸지요. 제 말은 듣지 않습니다."
"왜 안 읽으세요?"
"목사님이 바빠요."
여기 저기 다닌다고 바빠서 그렇답니다. 한 주간 계속 바빠서 성경을 읽지 못하신답니다.
"사모님, 그래도 저는 목사님께 그런 말씀을 올릴 수 없습니다."
젊은 제가 연세 드신 목사님께 어떻게 그런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젊다고 하니, 속으로 '젊기는 뭐가 젊어?' 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저보다 이십 세가 더 많으신 목사님이니 제가 젊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지 않으시는 목사님이 많이 계시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더러 계신가 봅니다. 결국 그 목사님은 3년도 안 되어 배척 당하시고, 3년도 안 되어 또 배척 당하시고, 지금은 어느 조그만 개척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는데, 잘 안 되나 봅니다.
말씀의 능력을 사장시키고는 되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뛰어 다니고 저기 뛰어 다니고, 그러면 안 됩니다.
조용히 살아도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살면 승리하고 성공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이 최고입니다.
우리 양곡교회는 오직 말씀이 강하기를 원합니다. 말씀 하나만 든든해도 다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실 때 정말 엄청난 에너지를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아이작 뉴톤이 말했습니다.
"인생살이 중에 가장 급한 일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일이다. 이보다 더 급한 일은 없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어서 듣고 구원받고, 구원받은 사람도 계속해서 들음으로 더욱 든든하게 되고, 또 구원받은 자로서 승리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의 찬송, 다윗의 노래인데, 그 배경에 대해 여러 가지 엇갈리는 해석이 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난을 만나 도망가는 그 어려운 중에 울면서 읊은 시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고, 사울 왕의 특공대한테 쫓겨다니면서 지은 시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 27편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어떤 환난이라고 찍어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환난은 환난입니다. 다윗이 좋은 환경에서 이 기쁜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마치 요나가 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처럼, 캄캄한 가운데에서, 흑암에 처해 길이 없는 데에서 이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정말 환난이 에워싸고 흑암이 에워싸서 다윗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동쪽을, 서쪽을, 남쪽을, 북쪽을, 사방을 다 돌아봐도 다윗에게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캄캄한 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니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오. 아! 빛 되신 하나님께서 계신다. 오늘 내가 흑암 중에 있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밝혀주시리라.'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시편 112편 4절에도 고백합니다.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할렐루야!
캄캄한 밤에도 우리가 운전해 가는 것은 전조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캄캄한 밤에 전조등이 없다면 운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캄캄한 밤에도 이렇게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보면서 찬송하고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은 불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이 없으면 피차에 얼굴을 대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캄캄해도 전조등이 있으면 달릴 수 있고, 아무리 캄캄해도 불이 있으면 공부할 수 있고, 서로 바라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환경이, 우리의 그 모든 상황이 아무리 캄캄해도 여호와, 빛 되신 하나님을 모신 자는 빛 가운데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서 2장을 보면, 요나는 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빛을 발견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전을 볼 것이다."라고 합니다.
고기 뱃속에 있을 때, 캄캄한 데에서 소화가 되어지고 있을 때, 그가 고기 벽만 보았으면 '이제는 고기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되네.'하다가 망했겠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니 빛을 얻게 된 것입니다.
'나의 빛이 되신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에서 구원해 주실 수가 있다.'
그는 그가 본 대로 밖에 나가서 다시 하나님 일을 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이런 요나를 고기가 소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을 흑암이 집어삼키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흑암이 가득한 세상에 빛이 환하게 비쳤습니다. 그 빛은 태양도 아니고 별도 아니고 달도 아닙니다. 빛의 근원입니다.
또 "태양이 있으라. 별이 있으라. 달이 있으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햇빛, 별빛, 달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태양을 지으시고 달과 별을 지으신 빛의 근원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빛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두움을 밝혀주는 태양의 빛만 비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어두움, 내 마음의 어두움, 영혼의 어두움을 비추어 주시는 빛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경제의 앞이 보이지 않고, 정치의 앞이 보이지 않고, 언제 전쟁이 있을지 군사적 사회적인 면에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계가 휘청거리고 소용돌이칩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납니다.
'아니, 이러다가 지구촌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앞길이 캄캄하지만, 이 흑암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빛이십니다.
이 빛은 인도하는 빛이십니다.
또 흑암은 공포와 불안을 주지만, 이 빛은 평안을 주는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평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숨어서 덜덜덜덜 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그들은 로마 군인들의 말발굽 소리만 들려도 자기들을 잡으러 올까봐 불안과 공포 속에서 덜덜 떨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손의 못 자국,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 주시니, 제자들이 기쁨이 넘쳐서 overjoyed 평화가 넘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예루살렘은 아직도 캄캄한 흑암이지만, 예수님께서 그 방에 계시니 빛이 환하게 비쳐서 어쩔 줄 모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과 실라는 캄캄한 감옥에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시니 거기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아무리 캄캄한 흑암 중에 계시고, 병중에 계시고, 가난 중에 계시고, 어떤 어려움 중에 계셔도 빛 되신 주님을 앙망하면 밝은 빛 가운데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이 빛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한 분은 심장판막증으로 거의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천육백만 원을 수술비로 계약하고 죽어도 좋다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삼일 간 금식 기도를 하는 중에 어머니가 수술을 받으면 세상을 떠나실 것 같아서 전화했습니다.
"어머니, 수술 받지 말고 내려오세요. 수술 받으면 돌아가실지 몰라요."
어릴 때부터 믿음 생활을 하던 딸이 울면서 그렇게 말하니, 그때 새 신자인 어머니가 의사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 내려왔습니다.
그 다음 날이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감사절 헌금을 드리고 밀감 한 개를 갖고 왔는데, 거기에 있는 말씀이 요한복음 8장 12절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분이 '생명의 빛'이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생명의 빛은 나를 살려주시는 빛이구나.' 라고 믿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할렐루야! 저는 살았어요. 저는 살았어요."
새 신자가 할렐루야를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놀랐습니다.
"왜 그러세요?"
저는 그분이 환상을 보신 줄 알았더니, 환상을 보신 것이 아니라 밀감에 있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 수많은 말씀 중에 생명의 빛을 제게 주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살려 주시는 빛인 줄로 믿습니다."
저는 믿어지지 않았는데, 그분은 믿어진 것입니다. 그분이 수술을 받지도 않았는데, 지금도 건강하게 잘 사십니다.
하나님의 빛은 능력이 있습니다.
태양 빛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태양 빛도 능력이 있어서 풀을 자라게 하고 꽃을 피우게 합니다. 우리를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빛은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무리 캄캄해도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고 노래할 수가 있습니다.
시편 30편에 11절에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고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내가 아무리 기막힌 슬픔 중에 있고 환난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바꾸실 수가 있습니다. changing power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밤에도 여러분의 어려운 환경을, 곤경을, 흑암을 빛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빛의 능력이 여러분을 구원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하나님께서는 또한 구원자이십니다. 할렐루야!
"The Lord is my salvation(나의 구원이시다)."
여러분, 내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그냥 있으면 죽습니다. 하지만 건져줄 자가 있으면 사는 것입니다. 내가 빚을 져서 망하게 되었지만, 재벌이 도와주면 사는 것입니다. 내가 병들어 죽게 되었지만 훌륭한 의사를 만나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의사 선생님은 병에서나 도와줍니다. 돈 있는 사람은 가난에서나 구해 줍니다.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조금 도와주는 것뿐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2000년 4월 14일, 영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안젤센이라는 여자는 자기 남편 가비가 폐암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서른 한 살인 안젤센은 남편이 폐암에 걸려 일 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하늘이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잉태했습니다. 아기를 낳으려면 한 달이 남았을 때, 이제 남편은 보름도 못 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안젤센은 아기를 앞당겨 낳기로 했습니다. 아기의 뼈가 덜 여물었지만, 그는 출산 예정일 14일 전에 유도 분만을 해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남편이 죽기 전에 아기를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낳은 그는 두 시간만에 몸을 추스려 친히 아기를 안고 남편에게 갔습니다.
"여보, 이 아기가 당신 아들이에요."
"얘야, 내가 네 아빠다."하며 가비가 아기를 품에 안고 너무 좋아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가비는 3일 후, 아기가 태어난 그 시간에 죽었습니다.
안젤센은 남편 가비를 사랑하지만, 자기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저 유도 분만으로 아기를 일찍 낳아서 죽기 전에 보여주는 일밖에 못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사랑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Almighty God,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십니다. 죽을 자를 살리실 수가 있으십니다. 구원자이십니다. 가난에서도 일으키시고, 병에서도 일으키시고, 죽음에서도 일으키시고, 영원히 살게도 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다윗이 생각합니다.
'사울이 특공대를 풀어서 아무리 나를 에워싸 죽이려 해도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는데 내가 왜 두려워하겠나? 내게는 구원자가 계신다.'
그러니 기뻐하며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찬양한 대로 되었습니다.
톤이라는 목사님의 아들은 미국의 유명한 배우이자 가수입니다. 명예와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미국의 최고 미인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아들인 그는 주님의 교회를 떠났습니다. 배우 생활에, 가수 생활에 젖어서 세상을 enjoy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통 사고를 당해 갈비뼈 일곱 개와 두 다리가 부러지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잠깐 의식이 돌아왔지만, 다시 곧 의식을 잃은 채 삼십 일이 지났는데 계속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온 몸은 깁스를 했고 의식이 없으니 식물인간입니다.
그제서야 그 아름다운 부인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이제까지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하나님 없이 못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하며 남편을 붙들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때까지 그 사실을 시아버지께 숨겼는데,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님, 이 사람이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멀리 계셔서 금방 오지 못하시니 아들의 귀에 전화를 대라고 했습니다. 아무 의식이 없는 아들의 귀에 수화기를 갖다댔습니다.
목사님인 아버지가 세 시간 반 동안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내 아들을 용서하여 주세요. 내 아들을 용서하시고 살려 주세요. 의식이 돌아오게 해 주세요."
세 시간 반 동안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아들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몸이 회복되었습니다.
지금 그는 죄악된 생활, 세상 쾌락의 접시를 핥아먹던 생활을 끊어버리고 하나님만 찬양하며 목사님 아들다운 신앙인이 되어서 귀하게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어. 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어."라고 큰 소리 치는 사람이 많아도, 그러나 언젠가는 하나님 도움 없이는 살지 못하는 때가 옵니다. 특별히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직면하면 죽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사망이 내 앞에 다가올 때는 내 힘으로 사망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볼테르가 아주 큰 소리를 쳤습니다.
"하나님 같은 것은 없어. 천국은 없어. 지옥도 없어. 우리 이성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다 해결할 수 없어. 이성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큰 소리를 쳤지만, 그가 죽을 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아! 나는 지옥으로 떨어진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며 큰 소리 친 인간도 마지막에는 후회하며 비통하게 죽었습니다.
하지만 최권능 목사님은 무슨 말을 했습니까?
여러분, 최권능 목사님을 아시지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예수 천당!"이라고 외쳐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그 목사님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 천당!"이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린 목사님입니다.
한 번은 목사님이 길을 가는데 신사들이 줄을 지어 왔습니다.
"예수 천당! 예수 천당!"
그러니까 그 신사들이 "우리도 목사요."라고 했습니다.
최 목사님이 그 목사님들에게 말했습니다.
"벙어리! 벙어리!"
앞뒤 좌우로 인사합시다.
"벙어리가 되지 맙시다."
최권능 목사님이 돌아가실 때 말했습니다.
"아, 전보가 왔다. 천국에서 전보가 왔다. 빨리 오라고 하네. 잘 있어라."
그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사람은 큰 소리 쳐 보았자 죽음 앞에 서면 덜덜덜 떱니다. 그러나 구원의 주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세상 사는 동안에도 어려움에서 구원받고, 세상 떠날 때도 천국가게 됩니다.
「세상 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 가는 날 천국 가게 하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지금 하루에 이백만 명이 죽습니다. 어제도 이백만 명이 죽었고, 오늘도 이백만 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Every day 날마다 하루하루 지구촌에 이백만 명이 되는 도시가 하나씩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사람들이 죽었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그 이백만 명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와이에 사는 우리 교포 한 분이 생명보험에 가입하기 위해서 보험회사를 찾아갔습니다. 생명보험에 가입하면 죽었을 때 많은 돈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가족들이 도움을 받으니 보험에 가입하는 것입니다. 그분도 자기가 죽으면 큰 돈을 받을 수 있는 보험을 가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사인을 하기 직전에 매달 내는 보험료가 조금 많은 것 같아서 "아이고, 조금 부담이 되는데, 내가 집에 가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오후에 오겠습니다."하고 그냥 나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다가 교통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 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자가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사인이나 해 놓고 나왔으면 가족들이 덕을 보았을 텐데.'
그분이 삼십 분 뒤를 모르고 그냥 집으로 가다가 죽었습니다.
사람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예배당에서 예배 드리고 집으로 가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예배 드리고 집으로 가다가 죽는 것은 좋습니다. 술집에 갔다 오다가 죽는 것보다는 교회에 갔다 오다가 죽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하루에 이백만 명이 죽는데, 그 이백만 명 속에 내가 언제 들어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의 주님을 모신 사람은 걱정이 없습니다.
여러분, 어느 비행장에 가도 천국 가는 비행장은 없습니다. 어느 역에 가도 천국 가는 역은 없습니다. 어느 고속버스 정류장에 가도 천국 가는 길은 없습니다. 지금 550명이 타는 비행기, 누워서 가는 비행기가 나오는데, 그러나 아무리 큰 비행기라도 천국 가는 비행기는 없습니다.
천국 가는 정거장은 양곡교회입니다. 천국 가는 비행장, 천국 가는 터널은 양곡교회입니다.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은 다 믿음의 티켓을 가지고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땅에서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고, 또 죽어도 천당 갈 것이니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제 마음은 15세 같고 소년 같습니다. 그래서 달밤에 혼자 스텝을 밟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스텝을 탁탁 밟으니까 한번은 성찬이가 "아빠, 사람들이 보면 웃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은 아직 소년입니다.
우리 팽 장로님도 보십시오. 연세가 얼마인지 공개하지는 않겠지만, 옛날 같으면 할아버지인데 저렇게 팔팔하십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구십 세가 되셔도 마음은 여전히 청춘인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연세가 드셨어도 지팡이를 짚지 않으십니다.
"어머니, 그러지 마시고 다리도 안 좋으시니 지팡이를 짚으세요." 하면 "내가 할머니라?"고 하십니다.
내일 모레면 팔십이 되시는 어머니가 "내가 할머니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무엇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어머니 마음은 아직도 십칠 세입니다.
사무엘하 21장을 보면, 다윗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노인이 되었는데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처음에 부하들이 말렸습니다.
"아이구, 왕이시여, 계시소서."
"아니야, 내가 너희들 열 몫은 한다."
성경에 열 몫이란 말은 없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는데 힘이 빠졌습니다. 적장 이스비브놉, 놋창과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 장군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십 년 전 만해도 다윗은 명장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이스비브놉을 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비브놉의 칼을 막다가 막다가 힘이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장면을 아비새가 보았습니다. 다른 적병과 싸우다 돌아보니 자기 왕이 죽게 되었습니다. 아비새가 달려가 이스비브놉을 쳐 죽여서 다윗이 살았습니다.
그때 참모들이, 장군들이 다윗 왕에게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왕이시여, 이제 다시는 전장에 나오지 마시옵소서. 자칫하면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질 뻔했나이다."
그 이후에 다윗은 전장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전장에서 죽게 되었을 때, 사실 아비새가 도와준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비새의 마음에 '아비새야, 돌아봐라.'는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교회 한 집사님, 병원 원장 집사님의 아들이 배가 자꾸 아파서 병원에 가니 위궤양으로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담당 의사 선생님이 편히 집에 가서 부인의 생일 잔치를 했습니다.
'happy birthday to you.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이 험한 세상에 왜 태어났니?
잘 태어났다. 잘 태어났다.
이 좋은 세상에 잘 태어났다.
happy birthday to you.'하고 있는데, 아찔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원 원장님인 우리 집사님의 아들이 걱정되었습니다.
'위궤양 정도인데 왜 그렇게 아파할까?'
그래서 달려가니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이 되었습니다. 조금 늦었으면 생명까지 잃었을 텐데, 생일 잔치를 다 끝내지 않고 달려가서 아이가 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런 생각이 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명,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 주십니다. 마지막에 천성까지 가도록 구원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려 드립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또 다윗은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무슨 말입니까?
'내 생명은 사울 왕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내 생명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다. 내 생명은 어떤 사람이 죽이고 살리지 못한다. 내 생명의 끝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다. 내 생명의 능력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죽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천만 인이 나를 에워싸도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할렐루야!
이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우들이 혹 병들면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병이 집사님의 생명을 좌우하지 않습니다. 집사님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십니다. 병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실 사람은 하룻밤에 데려 가시고, 병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살려 주실 사람은 살리십니다."
내 생명의 능력이, 나의 생명이 나에게 달려 있다면, 우리는 불안해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앞 차의 타이어에서 튀어나온 돌에 맞아 죽기도 하는데 말입니다. 그저께 제가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데, 쇳덩어리 하나가 툭 떨어졌습니다. 달리는 자동차에 철판이 떨어져 차가 부숴지기도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건강해도 죽는 것은 순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죽을 병에 걸려도 하나님께서 살리실 사람은 살리시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내 생명은 하나님께 달렸다."
염려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좀 아프면 "아이고, 암인가?" 머리가 조금 아프면 "아이고, 뇌종양인가?" 하면 정말 암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암이, 어떤 것이 나를 죽이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계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카운트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생명이 되신 여호와! 나의 생명의 능력이신 하나님!'
여러분, 지금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까? 죽을 때도 편안하게 죽어야 됩니다. 할렐루야!
왜입니까? 우리는 천당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소원은 본문 4절에 보면, 한 가지뿐입니다.
"내 소원은 하나님 전에 나가서 하나님을 앙망하고 사모하며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의 집, 교회에 다니지 못하는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얼마나 있고 싶은지 모릅니다. 그는 지금 환난 가운데에서 쫓겨다니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지 못합니다. 산 속에 있는지, 산골짜기에 있는지, 바위 굴에 있는지 몰라도 지금 교회를 떠나 있습니다.
그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의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것인데,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어서 성전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니 소원을 아뢰는 것입니다.
"나의 한 가지 소원, 내가 청했던 일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나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앙망하며 예배 드리게 해 주세요. 이것이 하나뿐인 나의 소원입니다."
다윗의 소원은 그것뿐이었습니다.
시편 23편에도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유로워서, 또 건강해서 마음놓고 우리 발로 걸어와 이렇게 예배 드리니, 예배를 별 것 아닌 것같이 생각할지 모르지만,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나오지 못할 때 교회가 얼마나 그리워지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어떤 환난 속에 있어서 교회에 오지 못하는 신세가 될 때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일생을 예배 드리고 또 예배 드린 목사님이 병상에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소원이 있으십니까?"
"있지, 있지."
"뭐예요?"
"한 번만, 한 번만 더 내 아버지 하나님의 전에 나가서 예배 드리고 싶다."
이것이 하나님을 참 사랑하는 자의 소원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집이 그립고, 하나님의 집에 오면 좋고, 하나님의 집을 떠날 때는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예배 드릴 날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마음은 하나님의 집, 교회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가슴이 바로 기쁜 노래를 부르는 자의 가슴인 줄로 믿습니다.
늘 이런 가슴으로 주의 전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으로 여러분을 태우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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