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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노아와 방주(창 6:9-10) / 지용수 목사

by 【고동엽】 2021. 11. 26.

노아와 방주
창세기 6:9∼1


미국 시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의 가슴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 바로 며칠 전에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과 뉴욕에 있었습니다.
테러 분자들은 정말 악한 사탄의 일꾼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도적은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고 생명을 살리시지만, 악한 사탄은 생명을 죽입니다. 우리 혈관에서도 흰피톨과 병균이 싸우듯이, 우리 마음에도 선과 악이 같이 있으면서 싸우고 성령님의 뜻과 육체의 정욕이 싸우듯이, 이 지구촌에서도 의의 세력과 악의 세력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싸움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악의 세력에게 공격을 받지 않도록 날마다 마귀를 꺾고 대적해야 할 줄 로 믿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미국을 엄청 사랑합니다. 저희 아이들에게 비난 받을 정도로 미국을 사랑 합니다. 제가 미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가 굶고 있을 때, 우리를 먹여 살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방을 맞이한 것도, 6.25때 우리 나라가 공산화 되지 않고 이만큼 남은 것도 미국의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하지만, 어쨌든 미국의 도움으로 지금의 우리 나라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보다 더 고마운 것은, 복음의 불모지로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이 땅에 미국의 선교사들이 와서 복음을 전해 준 것입니다. 그 당시에, 백 년 전에, 우리는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그 똑똑한 젊은이들, 지성인들이 복음을 들고 여기까지 와서 거지같이 사는 우리와 더불어 살면서 우리에게 피 묻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 한국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빚을 지고 사는 우리가 미국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미국이 하는 일이 다 선하고 의로운 것은 아니지만, 비난받는 일을 한다할지라도 그 한 두 가지 일 때문에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해야 하고, 빚진 자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미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어려움을 당한 이 때에는 부시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미국의 지도자들을 위해 갑절로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금 미국이 저렇게 큰 상처를 받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약점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인 것 같다.'
미국 국민들이 '우리가 아무리 경제력이 있고 군사력이 강하다 해도, 초강대국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지 않으시고 지켜주지 않으시면 안전할 수 없구나. 우리도 무너질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 같습니다.
미국 국민들이 깨닫고 여기저기에서 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하고 미국의 전국민이 일어나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은 아픔이 크지만, 신앙이 회복되면 오히려 갑절의 은혜가 미국에 있을 줄로 믿습니다. 전화위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악한 마귀의 세력, 어두움의 세력이 예수님을 골고다로 끌고 가서 채찍질하여 상처를 입히고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워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마귀의 세력이 이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삼일 뒤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셔서 마귀의 권세를 꺾으셨습니다. 마귀의 무기인 죄와 사망을 꺾어버리시고 마귀의 허리를 부러뜨려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 미국의 상처를 통해서도 이 땅의 악의 세력을 꺾어버리시고, 우상의 세력을 꺾어버리시고, 악령들의 허리를 꺾어버리셔서 오히려 영광을 크게 받으실 줄로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세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우리가 꼭 종말과 연관시키고, 마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 것처럼 말해도 안 되지만, 이런 큰 사건을 뒤로 하고 오늘에 충실하자고만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절에서 3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우리는 이런 사건을 볼 때 시대의 징조도 분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날에 큰 환난과 큰 사건, 전쟁의 소문, 그리고 지진과 이변이 이 땅에 많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측 불허의 사건을 만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가서서 징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세상에 이런저런 뒤숭숭한 일들,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에 독일 신문들에 의하면 러시아 모스크바의 남쪽 하늘에 이상한, 신비로운 하얀 손이 나타나서 30분간 글을 썼답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라. 지금은 회개의 열매를 맺을 때다. 지금은 성도의 환난 때이다. 한 사람의 선한 심령도 악한 심령 중에 머무르지 못할 것이요 한 사람의 악한 심령도 선한 심령 중에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의인을 내가 구원하리라. 내가 상을 갖고 오리라. 담대하라.'
이런 내용의 글귀가 손과 함께 하늘에 3시간 동안이나 있었답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다 멈추어 서서 그것을 보며 두려워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우리가 듣고 본다 해도 마음이 흔들리고 동심해서는 안 됩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해야 될 일은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더욱더 하나님 앞에 다가서야 합니다. 이 땅의 종말이 오든, 사고나 죽음을 맞이하여 내 개인적인 종말이 오든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준비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자세를 지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시편 46편 1절에서 3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살면, 산이 날아가서 바다에 빠지고 바닷물이 산을 덮치는 일이 있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땅의 건물이 다 쓰러지고, 이 땅에 지진이 나서 땅이 다 갈라져도 하나님 앞에 바로 산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큰 환난 때에도 사는 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빌딩이 무너져도 그 사이의 공간에 있어서 살 사람은 살아나옵니다.
저희 조카는 뉴욕의 무역 센터에서 근무했는데, 두 달 전에 영국으로 출장가서 이번에 변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 센터에서 근무하는 제가 잘 아는 한 변호사 장로님도 서울로 출장을 와서 변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우연한 일이 아닌 줄로 믿습니다.
또 한 교민은 아침에 무역 센터로 출근하는데 도로가 막혀서 발을 동동 굴렀답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하기 전에 사고가 난 것입니다. 만일 길이 탁 트여서 일찍 출근했다면 자기도 죽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 우리는 일이 형통한 것만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막히는 것도 은혜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집에 좋은 일이 많은 것만이 복이 아닙니다.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도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건강한 것만 복이 아니라 병들어 누워 있어도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깨달으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만 명이 죽고 이만 명이 죽어도 살 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노아 시대의 하나님의 심판은 미국의 사건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사람을 살피고 계십니다. 불신자들이 죄를 짓고 방탕한 것은 그런 대로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불신자들과 똑같은 죄를 지으며 방탕한 것은 견디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경건해야 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름답고 성적인 매력이 있는 이방 여자들의 매력에 빠져 그들을 취해서 끌어 안고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 사람들, 이방인들과 똑같은 방탕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견디지 못하십니다.
'정도가 지나치구나. 내가 사람을 지었음을 한탄한다. 내가 그들을 다 멸하리라.'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잘못하고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대로 견디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잘못하는 것은 견디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40일간 하늘의 창을 열어 물을 그냥 부어버리시고 땅의 샘이 솟구치게 하셨습니다. 몇 시간만 소낙비가 쏟아져도 나라가 물바다가 되는데, 40일간 쏟아지니 제일 높은 산 꼭대기에서 7m 높이까지 물이 올랐습니다. 온 세계의 코로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방주에 들어간 노아와 그 가족, 또 거기에 들어간 동물들은 다 살았습니다.
앞으로 물 심판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무지개로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불로는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심판이 있어도 노아 같은 사람, 오늘 이 시대에도 노아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어떤 인품의 사람이었습니까?
예술인들은 자기 작품 하나를 만들 때마다 심혈을 쏟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예술인들이 몇 분 계셔서 때때로 제게 작품을 주시는데, 그 그림 한 장, 글씨 하나에 정성을 다 쏟으신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책 한 권을 만드는 데도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고의 작품은 자기 인품이랍니다.
설교 준비하는 것이 저의 필생의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설교가 되겠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전하시고 싶어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과 세계를 살리는 설교가 되겠나? 실제로 우리 교우들의 가정을 돕고 사업을 돕고 학생들을 돕는 설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불신자들이 들어도 도움이 되는 설교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이것이 제 필생의 사명입니다. 정성을 다 쏟아 설교 한 편 준비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제 인품 관리입니다. 목사로서의 제 생활, 제 인품의 관리가 설교 준비하고 설교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아내가 보는 남편으로서의 저, 아이들이 보는 아버지로서의 저, 교인들이 보는 목사로서의 저, 이웃 사람들이 보는 저, 하나님께서 보시는 저의 인품 관리가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아름다운 인품의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오늘 성경에 노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따라합시다.
"노아는 의인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Noah was a righteous man).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노아의 별명이 의인입니다.
이 말은 노아가 점도 흠도 없는, 죄가 없는 의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의인이라는 말입니다.
욥기 15장 14절에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그렇습니다. 깨끗하고 의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의인이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말씀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노아도 죄인입니다. 노아도 술을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술 주정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의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살펴보니 노아가 상대적으로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당시 최고의 의인, 의인의 챔피언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 시대의 최고 의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 천국은 가지만, 이 땅에서 보호와 사랑을 받으려면 생활이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 땅에서 우리가 존귀하게 살려면 생활이 의로워야 됩니다.
물론 악한 사람들도 나름대로 자기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사실, 그렇습니다. 길에서 소매치기를 하는 사람에게도 양심이 있어서 선함도 있습니다.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길의 여인들도 나름대로 착함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위해 몸을 팔고 동생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파는 여인들도 있는 것입니다. 깡패 조직 사회에도 의리가 있다고 합니다. 강도에게도 선은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인천의 한 강도가 어느 집에 들어가서 무서운 흉기를 주인에게 들이대니 심장이 약한 주인이 그만 심장 발작을 일으켜 죽어갔습니다. 강도가 놀라서 칼을 버리고 주인을 만져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만져도 안 되니 열아홉 살 먹은 그 집의 딸에게 말했습니다.
"빨리 119에 신고해라. 네 아버지가 살아야 된다."
그래서 119차가 왔습니다. 그러면 강도는 빨리 도망을 가야 하는데 자신이 강도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주인을 업고 119차에 실었습니다. 그때 경찰이 왔는데, 경찰의 눈은 보통 사람의 눈과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경찰님들이 계시는데 눈이 매섭습니다. 경찰이 보니 아무래도 한 사람이 이상합니다. 그 집 식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입고 있는 옷도 새벽의 복장이 아닙니다. 잡아서 조사하니 강도였습니다. 그래서 구속되었습니다.
그 강도, 비록 강도지만 착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강도를 의인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인이 되려면 객관적으로 볼 때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의인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사람의 체질을 아는데 노아 너 정도면 의인이야. 됐어."하고 노아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돈을 버는 것이 귀합니다. 직장 생활, 공부하는 것, 자녀를 기르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우선 순위는 의로움입니다. 우선 의로워야 합니다.
의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의인의 집에 기쁨의 소리를 주십니다. 의인의 장막에 복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먼저 의롭고 공부하고, 먼저 의롭고 사업하고, 먼저 의롭고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 큰 유리 항아리를 갖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상자에서 큰 돌들을 꺼내어 항아리에 집어 넣었습니다. 돌이 항아리에 가득 찼습니다.
"얘들아, 항아리가 돌로 가득 찼지?"
"예."
선생님이 또 상자를 열어 작은 돌, 자갈들을 꺼내어 큰 돌들로 가득 차 있는 항아리에 작은 돌들을 집어 넣었습니다. 작은 돌들이 다 들어갔습니다.
"얘들아, 꽉 찼지?"
"예."
선생님이 또 상자를 열어 모래 주머니를 꺼내더니 모래를 항아리에 넣고 흔들었습니다. 그 모래가 다 들어갔습니다.
"얘들아, 항아리가 꽉 찼지?"
항아리가 세 번이나 꽉 찼습니다.
세 번이나 꽉 찬 항아리에 물을 갖다 부었습니다. 물도 역시 항아리에 다 들어갔습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까?
삶의 우선 순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부은 다음에 모래를 넣고 자갈을 넣고 큰 돌을 넣으면 절대로 그것들을 다 넣을 수 없습니다. 밖으로 나오고 맙니다. 그러나 큰 돌을 넣은 다음에 자갈을 넣고 모래를 넣고 물을 부으면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살이, 간단합니다. 쉽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를, 의의 큰 돌을 내게 집어넣으면 하나님께서 축복의 자갈, 축복의 모래, 축복의 생수로 꽉 채워 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세상의 것으로 채워 놓으면, 세상의 것을 먼저 넣어 놓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의가 우리에게 축복의 문을 열어 줍니다. 할렐루야!
노력해야 됩니다. 적어도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의인이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네."하는 말을 들을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같이 걸었습니다.
노아가 무슨 재주로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같이 걸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노아와 함께 걸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노아를 건들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을 누가 해치겠습니까?
동행하는 것이 복입니다.
미국의 길은 얼마나 넓은지 모릅니다. 우리 나라의 길은 너무 좁습니다. 그래도 창원에 사는 우리는 복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창원의 도로처럼 넓은 도로가 우리 나라에는 몇 곳 안 됩니다. 특별히 창원 대로는 창원의 자랑, 한국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창원 대로도 이제는 복잡해져서 좁게 느껴집니다. 그 대로를 낸 담당 공무원이 그 당시에 길을 너무 넓게 만들었다고 책임 추궁을 당했답니다. 20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니 참 딱합니다.
미국은 이백 년, 삼백 년을 내다보고 도로를 만들어서 도로가 얼마나 넓은지 모릅니다. 그래도 출퇴근 시간에는 자동차들이 밀려서 거북이 걸음으로 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 도로에는 다이아몬드 레인이라는 길이 있습니다. 다른 길에는 자동차들이 밀려 있어도 다이아몬드 길의 차들은 쌩쌩 달립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 길은 다이아몬드를 낀 사람들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많이 태운 차들이 다닙니다. 그 차에 시장이 탔든 장관이 탔든 한 사람만 탄 차는 그 길로 다닐 수 없습니다. 둘, 셋, 넷,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운 차들만 그 길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약삭빠른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해서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서 파니 그것을 사서 옆 자리에 앉혀 놓고 다니는 사람도 있답니다. 어떤 사람은 개를 앉혀 놓기도 한답니다.
어쨌든 동행이 좋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동행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노아와 동행하셨을까요?
히브리서 11장 5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자녀를 낳고 살면서도 하나님과 한 걸음 한 걸음 같이 걸었습니다. 그런 에녹을 하나님께서 아예 데리고 올라가셔서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과 같이 걸어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할렐루야!
잘 들으세요. 지용수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저와 같이 걸어가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하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여러분과 같이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손대겠습니까?
인간 관계는 거울로 풀어야 합니다. 거울 앞에서 내가 웃으면 거울도 나를 보고 웃어 줍니다. 부부간에도 아내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지 마세요. 내가 아내를 기쁘게 해 주면 아내도 나를 기쁘게 해 줍니다.
우리 교회 주차장에 동시에 400대 정도의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데도, 주일 3부 예배 때와 저녁 예배 때에는 주차 공간이 조금 부족합니다. 그래서 새가족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주차할 수 있도록 저는 자동차를 갖고 오지 않습니다. 이른 아침마다 제 아내가 저를 태워 줍니다. 제 아내지만 이른 아침에 그렇게 태워 주는 것이 고마워서 오늘 아침에도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참 고마워요."
예의는 사랑의 꽃이고 행복의 꽃입니다.
부부간에도, 친구간에도, 부모자식간에도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예의를 지켜서 상대를 기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부부는 서로서로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해야 됩니다.
늦게 결혼해서 60세에 결혼 25주년을 맞이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 다 60세가 되었습니다. 가난해서 파티도 열지 못한 두 사람이 조촐하게 기념식을 갖고 뜻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당신들의 금실이 너무 좋아서 소원을 들어줄 테니 한 가지씩 말하세요."
먼저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난해서 여행다운 여행을 하지 못했어요. 세계 일주를 하게 해 주세요."
요정이 방울이 달린 지팡이를 흔드니 세계 일주 여행 비행기 티켓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제 할아버지의 소원을 말하세요."
"나는 나보다 30살 적은 여자와 살고 싶어요."
요정이 웃으면서 지팡이를 달랑달랑 흔들었습니다. 그러니 60세의 할아버지가 90세의 할아버지로 변했습니다. 마음을 잘못 쓴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구박을 얼마나 많이 받았겠습니까? 부부간에도 마음을 잘 써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랑스런 목사가 되고 싶어서 공부도 하고 조심합니다. 말도 조심하고 어디에 가서든 욕먹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저를 기쁘게 하는 교인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제 밤에 기독교 TV를 잠깐 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한 설교를 듣기 전에도 "하나님, 이 설교를 듣고 우리 민족과 세계가 살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합니다. 어제 밤에도 그렇게 기도하고 TV를 통해 제 설교를 들었는데, 제가 설교를 느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왜 저렇게 느리게 하나? 다음에는 조금 빨리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괜찮았습니다. 점점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제가 보아도 힘이 막 쏟아져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때 교우들이 막 웃는 모습도 비추어 주었습니다. 모두 "하하…"하고 웃는데, 한 사람은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할 때 웃어 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상대방을 기쁘게 해 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스코틀랜드 어느 교회의 아주 까다로운 한 장로님은 청년들만 보면 꾸중을 하고,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비판을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일꾼이 되면 안 됩니다. 몸에 때가 끼지 않는 사람이 없듯이 사람은 다 부족합니다. 저는 목사니까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기 위해 여러분을 책망하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인 우리가 다른 사람을 책망할 것이 뭐가 있다고 책망한단 말입니까? 우리 모두가 똑같은 형편인데 남을 비판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고, "이러면 안 돼. 저러면 안 돼."하는 까다로운 사람은 절대로 일꾼으로 세우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너무 까다로워서 교인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하루는 제직회를 하는데, 목사님이 그럴 수 있느냐며 목사님을 막 공격했습니다.
여러분, 목사님은 장로님에게 맞추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님이 장로님의 마음에 맞추어서 목회를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장로님의 마음에 들면 좋고, 장로님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여러분의 마음에 맞는 목사로 만들려 한다면 여러분은 나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용수 목사님이 내 마음에 쏙 드는 목사님이 되게 해 주세요."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이 하나님 마음에 쏙 들게 해 주세요." 라고 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목사님을 비판하면 목사님이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충격과 상처를 받은 목사님이 아픈 가슴을 안고 집으로 가셨습니다.
장로님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내가 너무 했구나.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목사님을 그렇게 공격하다니…. 내가 지나쳤어.'
밤새 잠을 자지 못하던 장로님이 새벽에야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목사님이 충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모님에게 사과하고, 교인들에게도 사과했습니다.
"내가 목사님을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죽었습니다. 천국에 가니 목사님이 천국 문 앞에서 활짝 웃는 얼굴로 "아이고, 장로님, 어서 오세요. 천국에는 싸움이 없어요. 장로님 얼굴을 뵈니 기쁘네요."하며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깨니 꿈이었습니다.
양심을 가책을 받은 장로님이 목사님께 사과하기 위해 사택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사모님과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교회에서도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두 주 뒤에 장로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꿈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순간을 잘못 살면 천당 가서도 미안합니다.
이 땅에서는 이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저 교회에 갈 수 있고 저 교회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다른 교회로 갈 수 있는데, 천국에서는 다 모여서 삽니다.
우리가 바로 살아야 그때 부끄러움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나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셔야지.'하는 마음을 갖고 살면 늘 주님께서 동행하시고, 환난 날에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인내했습니다.
따라합시다.
"인내했다."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세요. 노아가 되어 보세요.
"노아야, 방주를 만들어라."
그는 목수도 아닌데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방주의 크기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용적량이 14000 톤입니다. 과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기차 522대 분입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에 짐승 사만 오천 마리가 들어갔다고 봅니다. 코끼리, 소, 토끼… 등을 합하여 사만 오천 마리가 타도 기차 188대면 됩니다. 그러니 기차 522대 분이면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께서 그 큰 배를 노아에게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더 더구나 그 사만 오천 마리의 짐승이 먹을 양식을 노아에게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배 안에 1년 17일간 있었습니다. 사만 오천 마리의 짐승이 1년 17일간 먹을 양식을 준비하려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다른 사람들은 사업에 투자하고 집을 짓고 빌딩을 짓고 확장하는데, 노아는 돈만 생기면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시간과 땀을 거기에 다 쏟았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것도 1, 2년이 아니라 100년이 넘도록 말입니다. 비가 금방 오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려면 하나님께서 방주 하나를 만드시면 되지, 왜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시느냔 말입니다.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난했겠습니까?
"저 어른 참 좋은 분인데 살짝 갔나 봐."
배 안에 건초를 쌓을 때는 "저 어른이 정말 미쳤네. 배에다 건초를 쌓다니. 배가 창고인 줄 아나 봐."하며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참았습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아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주일에 마음껏 바다나 산에 놀러가고 골프장에 가서 골프도 하는데, 우리는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일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십일조도 드리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충성하지 않아도 잘 사는데, 우리는 십일조도 드리고, 교회도 짓고, 이렇게 충성하며 사는데, 이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하나님께서 직접 짓지 않으시려면 하늘에서 시멘트라도 내려 주시고, 벽돌이라도 떨어뜨려 주시고, 어려운 공사 때에는 천사라도 보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왜 우리에게 다 지으라고 하십니까?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모님께 옷 한 벌 해 드릴 돈도 없는데 말입니다.
우리 집사님 내외분은 우리 교회를 지을 때 전세금을 다 뽑아서 몽땅 드리고 월세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분들이 지금은 큰 집을 사서 살고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사니 감사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입니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지난 번 목사님들 모임 때에 한 분 목사님이 생일을 맞이해서 간단한 생일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아들이 대학 입학 시험을 치는 날, 미국 집회에 가 있었는데, 호텔에 돌아와서 시계를 보니 시험 시간이 딱 한 시간 남았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니 우리 아들이 의과대학에 합격해서 감사드렸습니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목사님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도 의과대학에 잘 붙는데…."라고 하셨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불신자들도 서울대학에도 잘 붙고, 하버드 대학에도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부잣집에서는 게 장조림을 만들 때 그냥 장조림하지 않고 바다 게든 강의 게든 살아 있는 게를 사서 단지에 넣은 다음에 쇠고기를 넣어 줍니다. 그러면 게들이 밤새도록 쇠고기를 뜯어 먹으며 즐깁니다. 그러나 그 쇠고기는 먹고 즐기라고 넣어준 것이 아닙니다. 게들이 쇠고기를 밤새도록 다 먹고 나면 거기에 간장을 붓고 뚜껑을 닫습니다. 그리고 그 게와 쇠고기를 사람이 다 같이 먹는 것입니다. 쇠고기는 게에게 상이 아니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은 아무리 잘 되어 본들, 노아 시대 때에 방주를 짓지 않고 세상에 투자한 사람들이 다 물에 빠져서 끝난 것처럼 다 끝납니다.
그러나 노아는 방주 속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바보처럼 시간과 땀과 우리의 모든 것을 교회에 다 투자합니다.
'이것이 잘 하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종해서 믿음의 배를 다 짓고 나면 이 세상이 불 탈 때 우리는 믿음의 배를 타고, 믿음의 비행기를 타고 우주 여행을 출발할 줄로 믿습니다.
인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저는 베드로후서 2장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노아가 아들과 며느리들에게 "얘들아, 쉿! 다른 집에 가서는 이야기하지 말아라. 방주를 만들어서 우리만 구원 받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증거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5절에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합시다.
"노아는 전도자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땅을 물로 심판하십니다. 여러분도 방주를 지으시오. 방주를 짓는 법이 여기에 있어요. 힘들어도 방주를 지어야 구원을 받습니다."하고 증거했습니다.
그렇게 증거한 노아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습니다.
지금 미국의 대통령인 부시 대통령의 부친인 조지 에이치 부시가 대통령으로 계실 때, 한 초등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어느 교실에 들어가자 한 코흘리개 어린이가 대통령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정말 우리 나라 대통령이세요?"
"그럼."
"진짜예요?"
"그럼."
"대통령 증명서를 좀 보여 주세요."
대통령이라고 증명할 만한 것이 없어서 운전 면허증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 어디에 대통령이라고 써 있어요? 대통령이라는 증거를 대 보세요."
난처해진 대통령이 크레디트 카드를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 어디에 대통령이라는 증거가 있어요?"
부시 대통령은 자기가 대통령이라는 것을 보여 줄 것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며 교실 문을 나왔습니다. 운동장으로 내려가자 새까만 안경을 쓴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에워싸면서 모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그 아이가 "진짜 대통령이네."라고 했답니다.
누가 진짜 교인입니까? 우리가 교인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일생을 두고 하신 말씀이, 지상 명령이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유언이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증거하라"는 유언을 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다면 진짜 교인인지 가짜 교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좍 깔린 경호원을 볼 때 진짜 대통령이라는 것을 안 것처럼, 내가 전도한 사람이 좍 깔려 있을 때, 나에게 전도 받은 사람이 내 주위에 많을 때 진짜 교인인 줄로 믿습니다.

 

노아는 의인이고, 하나님과 동행했고, 인내했고, 전도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오늘의 노아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노아와 방주
창세기 6:9∼1

 


미국 시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의 가슴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 바로 며칠 전에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과 뉴욕에 있었습니다.
테러 분자들은 정말 악한 사탄의 일꾼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도적은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고 생명을 살리시지만, 악한 사탄은 생명을 죽입니다. 우리 혈관에서도 흰피톨과 병균이 싸우듯이, 우리 마음에도 선과 악이 같이 있으면서 싸우고 성령님의 뜻과 육체의 정욕이 싸우듯이, 이 지구촌에서도 의의 세력과 악의 세력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싸움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악의 세력에게 공격을 받지 않도록 날마다 마귀를 꺾고 대적해야 할 줄 로 믿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미국을 엄청 사랑합니다. 저희 아이들에게 비난 받을 정도로 미국을 사랑 합니다. 제가 미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가 굶고 있을 때, 우리를 먹여 살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방을 맞이한 것도, 6.25때 우리 나라가 공산화 되지 않고 이만큼 남은 것도 미국의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하지만, 어쨌든 미국의 도움으로 지금의 우리 나라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보다 더 고마운 것은, 복음의 불모지로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이 땅에 미국의 선교사들이 와서 복음을 전해 준 것입니다. 그 당시에, 백 년 전에, 우리는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그 똑똑한 젊은이들, 지성인들이 복음을 들고 여기까지 와서 거지같이 사는 우리와 더불어 살면서 우리에게 피 묻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 한국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빚을 지고 사는 우리가 미국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미국이 하는 일이 다 선하고 의로운 것은 아니지만, 비난받는 일을 한다할지라도 그 한 두 가지 일 때문에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해야 하고, 빚진 자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미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어려움을 당한 이 때에는 부시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미국의 지도자들을 위해 갑절로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금 미국이 저렇게 큰 상처를 받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약점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인 것 같다.'
미국 국민들이 '우리가 아무리 경제력이 있고 군사력이 강하다 해도, 초강대국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지 않으시고 지켜주지 않으시면 안전할 수 없구나. 우리도 무너질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 같습니다.
미국 국민들이 깨닫고 여기저기에서 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하고 미국의 전국민이 일어나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은 아픔이 크지만, 신앙이 회복되면 오히려 갑절의 은혜가 미국에 있을 줄로 믿습니다. 전화위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악한 마귀의 세력, 어두움의 세력이 예수님을 골고다로 끌고 가서 채찍질하여 상처를 입히고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워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마귀의 세력이 이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삼일 뒤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셔서 마귀의 권세를 꺾으셨습니다. 마귀의 무기인 죄와 사망을 꺾어버리시고 마귀의 허리를 부러뜨려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 미국의 상처를 통해서도 이 땅의 악의 세력을 꺾어버리시고, 우상의 세력을 꺾어버리시고, 악령들의 허리를 꺾어버리셔서 오히려 영광을 크게 받으실 줄로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세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우리가 꼭 종말과 연관시키고, 마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 것처럼 말해도 안 되지만, 이런 큰 사건을 뒤로 하고 오늘에 충실하자고만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절에서 3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우리는 이런 사건을 볼 때 시대의 징조도 분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날에 큰 환난과 큰 사건, 전쟁의 소문, 그리고 지진과 이변이 이 땅에 많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측 불허의 사건을 만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가서서 징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세상에 이런저런 뒤숭숭한 일들,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에 독일 신문들에 의하면 러시아 모스크바의 남쪽 하늘에 이상한, 신비로운 하얀 손이 나타나서 30분간 글을 썼답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라. 지금은 회개의 열매를 맺을 때다. 지금은 성도의 환난 때이다. 한 사람의 선한 심령도 악한 심령 중에 머무르지 못할 것이요 한 사람의 악한 심령도 선한 심령 중에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의인을 내가 구원하리라. 내가 상을 갖고 오리라. 담대하라.'
이런 내용의 글귀가 손과 함께 하늘에 3시간 동안이나 있었답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다 멈추어 서서 그것을 보며 두려워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우리가 듣고 본다 해도 마음이 흔들리고 동심해서는 안 됩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해야 될 일은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더욱더 하나님 앞에 다가서야 합니다. 이 땅의 종말이 오든, 사고나 죽음을 맞이하여 내 개인적인 종말이 오든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준비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자세를 지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시편 46편 1절에서 3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살면, 산이 날아가서 바다에 빠지고 바닷물이 산을 덮치는 일이 있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땅의 건물이 다 쓰러지고, 이 땅에 지진이 나서 땅이 다 갈라져도 하나님 앞에 바로 산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큰 환난 때에도 사는 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빌딩이 무너져도 그 사이의 공간에 있어서 살 사람은 살아나옵니다.
저희 조카는 뉴욕의 무역 센터에서 근무했는데, 두 달 전에 영국으로 출장가서 이번에 변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 센터에서 근무하는 제가 잘 아는 한 변호사 장로님도 서울로 출장을 와서 변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우연한 일이 아닌 줄로 믿습니다.
또 한 교민은 아침에 무역 센터로 출근하는데 도로가 막혀서 발을 동동 굴렀답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하기 전에 사고가 난 것입니다. 만일 길이 탁 트여서 일찍 출근했다면 자기도 죽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 우리는 일이 형통한 것만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막히는 것도 은혜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집에 좋은 일이 많은 것만이 복이 아닙니다.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도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건강한 것만 복이 아니라 병들어 누워 있어도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깨달으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만 명이 죽고 이만 명이 죽어도 살 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노아 시대의 하나님의 심판은 미국의 사건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사람을 살피고 계십니다. 불신자들이 죄를 짓고 방탕한 것은 그런 대로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불신자들과 똑같은 죄를 지으며 방탕한 것은 견디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경건해야 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름답고 성적인 매력이 있는 이방 여자들의 매력에 빠져 그들을 취해서 끌어 안고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 사람들, 이방인들과 똑같은 방탕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견디지 못하십니다.
'정도가 지나치구나. 내가 사람을 지었음을 한탄한다. 내가 그들을 다 멸하리라.'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잘못하고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대로 견디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잘못하는 것은 견디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40일간 하늘의 창을 열어 물을 그냥 부어버리시고 땅의 샘이 솟구치게 하셨습니다. 몇 시간만 소낙비가 쏟아져도 나라가 물바다가 되는데, 40일간 쏟아지니 제일 높은 산 꼭대기에서 7m 높이까지 물이 올랐습니다. 온 세계의 코로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방주에 들어간 노아와 그 가족, 또 거기에 들어간 동물들은 다 살았습니다.
앞으로 물 심판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무지개로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불로는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심판이 있어도 노아 같은 사람, 오늘 이 시대에도 노아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어떤 인품의 사람이었습니까?
예술인들은 자기 작품 하나를 만들 때마다 심혈을 쏟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예술인들이 몇 분 계셔서 때때로 제게 작품을 주시는데, 그 그림 한 장, 글씨 하나에 정성을 다 쏟으신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책 한 권을 만드는 데도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고의 작품은 자기 인품이랍니다.
설교 준비하는 것이 저의 필생의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설교가 되겠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전하시고 싶어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과 세계를 살리는 설교가 되겠나? 실제로 우리 교우들의 가정을 돕고 사업을 돕고 학생들을 돕는 설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불신자들이 들어도 도움이 되는 설교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이것이 제 필생의 사명입니다. 정성을 다 쏟아 설교 한 편 준비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제 인품 관리입니다. 목사로서의 제 생활, 제 인품의 관리가 설교 준비하고 설교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아내가 보는 남편으로서의 저, 아이들이 보는 아버지로서의 저, 교인들이 보는 목사로서의 저, 이웃 사람들이 보는 저, 하나님께서 보시는 저의 인품 관리가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아름다운 인품의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오늘 성경에 노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따라합시다.
"노아는 의인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Noah was a righteous man).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노아의 별명이 의인입니다.
이 말은 노아가 점도 흠도 없는, 죄가 없는 의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의인이라는 말입니다.
욥기 15장 14절에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그렇습니다. 깨끗하고 의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의인이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말씀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노아도 죄인입니다. 노아도 술을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술 주정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의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살펴보니 노아가 상대적으로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당시 최고의 의인, 의인의 챔피언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 시대의 최고 의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 천국은 가지만, 이 땅에서 보호와 사랑을 받으려면 생활이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 땅에서 우리가 존귀하게 살려면 생활이 의로워야 됩니다.
물론 악한 사람들도 나름대로 자기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사실, 그렇습니다. 길에서 소매치기를 하는 사람에게도 양심이 있어서 선함도 있습니다.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길의 여인들도 나름대로 착함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위해 몸을 팔고 동생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파는 여인들도 있는 것입니다. 깡패 조직 사회에도 의리가 있다고 합니다. 강도에게도 선은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인천의 한 강도가 어느 집에 들어가서 무서운 흉기를 주인에게 들이대니 심장이 약한 주인이 그만 심장 발작을 일으켜 죽어갔습니다. 강도가 놀라서 칼을 버리고 주인을 만져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만져도 안 되니 열아홉 살 먹은 그 집의 딸에게 말했습니다.
"빨리 119에 신고해라. 네 아버지가 살아야 된다."
그래서 119차가 왔습니다. 그러면 강도는 빨리 도망을 가야 하는데 자신이 강도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주인을 업고 119차에 실었습니다. 그때 경찰이 왔는데, 경찰의 눈은 보통 사람의 눈과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경찰님들이 계시는데 눈이 매섭습니다. 경찰이 보니 아무래도 한 사람이 이상합니다. 그 집 식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입고 있는 옷도 새벽의 복장이 아닙니다. 잡아서 조사하니 강도였습니다. 그래서 구속되었습니다.
그 강도, 비록 강도지만 착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강도를 의인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인이 되려면 객관적으로 볼 때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의인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사람의 체질을 아는데 노아 너 정도면 의인이야. 됐어."하고 노아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돈을 버는 것이 귀합니다. 직장 생활, 공부하는 것, 자녀를 기르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우선 순위는 의로움입니다. 우선 의로워야 합니다.
의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의인의 집에 기쁨의 소리를 주십니다. 의인의 장막에 복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먼저 의롭고 공부하고, 먼저 의롭고 사업하고, 먼저 의롭고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 큰 유리 항아리를 갖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상자에서 큰 돌들을 꺼내어 항아리에 집어 넣었습니다. 돌이 항아리에 가득 찼습니다.
"얘들아, 항아리가 돌로 가득 찼지?"
"예."
선생님이 또 상자를 열어 작은 돌, 자갈들을 꺼내어 큰 돌들로 가득 차 있는 항아리에 작은 돌들을 집어 넣었습니다. 작은 돌들이 다 들어갔습니다.
"얘들아, 꽉 찼지?"
"예."
선생님이 또 상자를 열어 모래 주머니를 꺼내더니 모래를 항아리에 넣고 흔들었습니다. 그 모래가 다 들어갔습니다.
"얘들아, 항아리가 꽉 찼지?"
항아리가 세 번이나 꽉 찼습니다.
세 번이나 꽉 찬 항아리에 물을 갖다 부었습니다. 물도 역시 항아리에 다 들어갔습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까?
삶의 우선 순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부은 다음에 모래를 넣고 자갈을 넣고 큰 돌을 넣으면 절대로 그것들을 다 넣을 수 없습니다. 밖으로 나오고 맙니다. 그러나 큰 돌을 넣은 다음에 자갈을 넣고 모래를 넣고 물을 부으면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살이, 간단합니다. 쉽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를, 의의 큰 돌을 내게 집어넣으면 하나님께서 축복의 자갈, 축복의 모래, 축복의 생수로 꽉 채워 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세상의 것으로 채워 놓으면, 세상의 것을 먼저 넣어 놓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의가 우리에게 축복의 문을 열어 줍니다. 할렐루야!
노력해야 됩니다. 적어도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의인이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네."하는 말을 들을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같이 걸었습니다.
노아가 무슨 재주로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같이 걸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노아와 함께 걸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노아를 건들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을 누가 해치겠습니까?
동행하는 것이 복입니다.
미국의 길은 얼마나 넓은지 모릅니다. 우리 나라의 길은 너무 좁습니다. 그래도 창원에 사는 우리는 복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창원의 도로처럼 넓은 도로가 우리 나라에는 몇 곳 안 됩니다. 특별히 창원 대로는 창원의 자랑, 한국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창원 대로도 이제는 복잡해져서 좁게 느껴집니다. 그 대로를 낸 담당 공무원이 그 당시에 길을 너무 넓게 만들었다고 책임 추궁을 당했답니다. 20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니 참 딱합니다.
미국은 이백 년, 삼백 년을 내다보고 도로를 만들어서 도로가 얼마나 넓은지 모릅니다. 그래도 출퇴근 시간에는 자동차들이 밀려서 거북이 걸음으로 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 도로에는 다이아몬드 레인이라는 길이 있습니다. 다른 길에는 자동차들이 밀려 있어도 다이아몬드 길의 차들은 쌩쌩 달립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 길은 다이아몬드를 낀 사람들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많이 태운 차들이 다닙니다. 그 차에 시장이 탔든 장관이 탔든 한 사람만 탄 차는 그 길로 다닐 수 없습니다. 둘, 셋, 넷,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운 차들만 그 길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약삭빠른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해서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서 파니 그것을 사서 옆 자리에 앉혀 놓고 다니는 사람도 있답니다. 어떤 사람은 개를 앉혀 놓기도 한답니다.
어쨌든 동행이 좋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동행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노아와 동행하셨을까요?
히브리서 11장 5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자녀를 낳고 살면서도 하나님과 한 걸음 한 걸음 같이 걸었습니다. 그런 에녹을 하나님께서 아예 데리고 올라가셔서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과 같이 걸어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할렐루야!
잘 들으세요. 지용수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저와 같이 걸어가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하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여러분과 같이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손대겠습니까?
인간 관계는 거울로 풀어야 합니다. 거울 앞에서 내가 웃으면 거울도 나를 보고 웃어 줍니다. 부부간에도 아내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지 마세요. 내가 아내를 기쁘게 해 주면 아내도 나를 기쁘게 해 줍니다.
우리 교회 주차장에 동시에 400대 정도의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데도, 주일 3부 예배 때와 저녁 예배 때에는 주차 공간이 조금 부족합니다. 그래서 새가족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주차할 수 있도록 저는 자동차를 갖고 오지 않습니다. 이른 아침마다 제 아내가 저를 태워 줍니다. 제 아내지만 이른 아침에 그렇게 태워 주는 것이 고마워서 오늘 아침에도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참 고마워요."
예의는 사랑의 꽃이고 행복의 꽃입니다.
부부간에도, 친구간에도, 부모자식간에도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예의를 지켜서 상대를 기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부부는 서로서로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해야 됩니다.
늦게 결혼해서 60세에 결혼 25주년을 맞이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 다 60세가 되었습니다. 가난해서 파티도 열지 못한 두 사람이 조촐하게 기념식을 갖고 뜻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당신들의 금실이 너무 좋아서 소원을 들어줄 테니 한 가지씩 말하세요."
먼저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난해서 여행다운 여행을 하지 못했어요. 세계 일주를 하게 해 주세요."
요정이 방울이 달린 지팡이를 흔드니 세계 일주 여행 비행기 티켓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제 할아버지의 소원을 말하세요."
"나는 나보다 30살 적은 여자와 살고 싶어요."
요정이 웃으면서 지팡이를 달랑달랑 흔들었습니다. 그러니 60세의 할아버지가 90세의 할아버지로 변했습니다. 마음을 잘못 쓴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구박을 얼마나 많이 받았겠습니까? 부부간에도 마음을 잘 써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랑스런 목사가 되고 싶어서 공부도 하고 조심합니다. 말도 조심하고 어디에 가서든 욕먹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저를 기쁘게 하는 교인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제 밤에 기독교 TV를 잠깐 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한 설교를 듣기 전에도 "하나님, 이 설교를 듣고 우리 민족과 세계가 살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합니다. 어제 밤에도 그렇게 기도하고 TV를 통해 제 설교를 들었는데, 제가 설교를 느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왜 저렇게 느리게 하나? 다음에는 조금 빨리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괜찮았습니다. 점점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제가 보아도 힘이 막 쏟아져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때 교우들이 막 웃는 모습도 비추어 주었습니다. 모두 "하하…"하고 웃는데, 한 사람은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할 때 웃어 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상대방을 기쁘게 해 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스코틀랜드 어느 교회의 아주 까다로운 한 장로님은 청년들만 보면 꾸중을 하고,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비판을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일꾼이 되면 안 됩니다. 몸에 때가 끼지 않는 사람이 없듯이 사람은 다 부족합니다. 저는 목사니까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기 위해 여러분을 책망하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인 우리가 다른 사람을 책망할 것이 뭐가 있다고 책망한단 말입니까? 우리 모두가 똑같은 형편인데 남을 비판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고, "이러면 안 돼. 저러면 안 돼."하는 까다로운 사람은 절대로 일꾼으로 세우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너무 까다로워서 교인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하루는 제직회를 하는데, 목사님이 그럴 수 있느냐며 목사님을 막 공격했습니다.
여러분, 목사님은 장로님에게 맞추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님이 장로님의 마음에 맞추어서 목회를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장로님의 마음에 들면 좋고, 장로님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여러분의 마음에 맞는 목사로 만들려 한다면 여러분은 나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용수 목사님이 내 마음에 쏙 드는 목사님이 되게 해 주세요."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이 하나님 마음에 쏙 들게 해 주세요." 라고 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목사님을 비판하면 목사님이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충격과 상처를 받은 목사님이 아픈 가슴을 안고 집으로 가셨습니다.
장로님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내가 너무 했구나.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목사님을 그렇게 공격하다니…. 내가 지나쳤어.'
밤새 잠을 자지 못하던 장로님이 새벽에야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목사님이 충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모님에게 사과하고, 교인들에게도 사과했습니다.
"내가 목사님을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죽었습니다. 천국에 가니 목사님이 천국 문 앞에서 활짝 웃는 얼굴로 "아이고, 장로님, 어서 오세요. 천국에는 싸움이 없어요. 장로님 얼굴을 뵈니 기쁘네요."하며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깨니 꿈이었습니다.
양심을 가책을 받은 장로님이 목사님께 사과하기 위해 사택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사모님과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교회에서도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두 주 뒤에 장로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꿈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순간을 잘못 살면 천당 가서도 미안합니다.
이 땅에서는 이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저 교회에 갈 수 있고 저 교회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다른 교회로 갈 수 있는데, 천국에서는 다 모여서 삽니다.
우리가 바로 살아야 그때 부끄러움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나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셔야지.'하는 마음을 갖고 살면 늘 주님께서 동행하시고, 환난 날에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인내했습니다.
따라합시다.
"인내했다."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세요. 노아가 되어 보세요.
"노아야, 방주를 만들어라."
그는 목수도 아닌데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방주의 크기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용적량이 14000 톤입니다. 과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기차 522대 분입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에 짐승 사만 오천 마리가 들어갔다고 봅니다. 코끼리, 소, 토끼… 등을 합하여 사만 오천 마리가 타도 기차 188대면 됩니다. 그러니 기차 522대 분이면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께서 그 큰 배를 노아에게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더 더구나 그 사만 오천 마리의 짐승이 먹을 양식을 노아에게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배 안에 1년 17일간 있었습니다. 사만 오천 마리의 짐승이 1년 17일간 먹을 양식을 준비하려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다른 사람들은 사업에 투자하고 집을 짓고 빌딩을 짓고 확장하는데, 노아는 돈만 생기면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시간과 땀을 거기에 다 쏟았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것도 1, 2년이 아니라 100년이 넘도록 말입니다. 비가 금방 오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려면 하나님께서 방주 하나를 만드시면 되지, 왜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시느냔 말입니다.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난했겠습니까?
"저 어른 참 좋은 분인데 살짝 갔나 봐."
배 안에 건초를 쌓을 때는 "저 어른이 정말 미쳤네. 배에다 건초를 쌓다니. 배가 창고인 줄 아나 봐."하며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참았습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아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주일에 마음껏 바다나 산에 놀러가고 골프장에 가서 골프도 하는데, 우리는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일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십일조도 드리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충성하지 않아도 잘 사는데, 우리는 십일조도 드리고, 교회도 짓고, 이렇게 충성하며 사는데, 이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하나님께서 직접 짓지 않으시려면 하늘에서 시멘트라도 내려 주시고, 벽돌이라도 떨어뜨려 주시고, 어려운 공사 때에는 천사라도 보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왜 우리에게 다 지으라고 하십니까?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모님께 옷 한 벌 해 드릴 돈도 없는데 말입니다.
우리 집사님 내외분은 우리 교회를 지을 때 전세금을 다 뽑아서 몽땅 드리고 월세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분들이 지금은 큰 집을 사서 살고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사니 감사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입니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지난 번 목사님들 모임 때에 한 분 목사님이 생일을 맞이해서 간단한 생일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아들이 대학 입학 시험을 치는 날, 미국 집회에 가 있었는데, 호텔에 돌아와서 시계를 보니 시험 시간이 딱 한 시간 남았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니 우리 아들이 의과대학에 합격해서 감사드렸습니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목사님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도 의과대학에 잘 붙는데…."라고 하셨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불신자들도 서울대학에도 잘 붙고, 하버드 대학에도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부잣집에서는 게 장조림을 만들 때 그냥 장조림하지 않고 바다 게든 강의 게든 살아 있는 게를 사서 단지에 넣은 다음에 쇠고기를 넣어 줍니다. 그러면 게들이 밤새도록 쇠고기를 뜯어 먹으며 즐깁니다. 그러나 그 쇠고기는 먹고 즐기라고 넣어준 것이 아닙니다. 게들이 쇠고기를 밤새도록 다 먹고 나면 거기에 간장을 붓고 뚜껑을 닫습니다. 그리고 그 게와 쇠고기를 사람이 다 같이 먹는 것입니다. 쇠고기는 게에게 상이 아니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은 아무리 잘 되어 본들, 노아 시대 때에 방주를 짓지 않고 세상에 투자한 사람들이 다 물에 빠져서 끝난 것처럼 다 끝납니다.
그러나 노아는 방주 속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바보처럼 시간과 땀과 우리의 모든 것을 교회에 다 투자합니다.
'이것이 잘 하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종해서 믿음의 배를 다 짓고 나면 이 세상이 불 탈 때 우리는 믿음의 배를 타고, 믿음의 비행기를 타고 우주 여행을 출발할 줄로 믿습니다.
인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저는 베드로후서 2장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노아가 아들과 며느리들에게 "얘들아, 쉿! 다른 집에 가서는 이야기하지 말아라. 방주를 만들어서 우리만 구원 받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증거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5절에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합시다.
"노아는 전도자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땅을 물로 심판하십니다. 여러분도 방주를 지으시오. 방주를 짓는 법이 여기에 있어요. 힘들어도 방주를 지어야 구원을 받습니다."하고 증거했습니다.
그렇게 증거한 노아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습니다.
지금 미국의 대통령인 부시 대통령의 부친인 조지 에이치 부시가 대통령으로 계실 때, 한 초등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어느 교실에 들어가자 한 코흘리개 어린이가 대통령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정말 우리 나라 대통령이세요?"
"그럼."
"진짜예요?"
"그럼."
"대통령 증명서를 좀 보여 주세요."
대통령이라고 증명할 만한 것이 없어서 운전 면허증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 어디에 대통령이라고 써 있어요? 대통령이라는 증거를 대 보세요."
난처해진 대통령이 크레디트 카드를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 어디에 대통령이라는 증거가 있어요?"
부시 대통령은 자기가 대통령이라는 것을 보여 줄 것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며 교실 문을 나왔습니다. 운동장으로 내려가자 새까만 안경을 쓴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에워싸면서 모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그 아이가 "진짜 대통령이네."라고 했답니다.
누가 진짜 교인입니까? 우리가 교인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일생을 두고 하신 말씀이, 지상 명령이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유언이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증거하라"는 유언을 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다면 진짜 교인인지 가짜 교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좍 깔린 경호원을 볼 때 진짜 대통령이라는 것을 안 것처럼, 내가 전도한 사람이 좍 깔려 있을 때, 나에게 전도 받은 사람이 내 주위에 많을 때 진짜 교인인 줄로 믿습니다.

 

노아는 의인이고, 하나님과 동행했고, 인내했고, 전도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오늘의 노아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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