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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의 에센스 (행 2:22-36)

by 【고동엽】 2021.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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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의 에센스  (행 2:22-36)

  오직 예수!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에 이렇게 원근각처로부터 한 자리에 모여 큰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께 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에 부활하신 것을 믿는 부활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신약교회가 구약 성경을 받아들이고 십계명을 순종하는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유독 제 4계명인 안식일 성수의 명령을 토요일에서 주일로 바꾸어 지키는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이날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다른 어떤 종교에도 없는 오직 기독교의 핵심 사상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이성으로나 과학으로 입증하거나 추론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면서도,  2,000년 전에 실제적으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이 없었으면 기독교도 없고, 믿음도 없으며, 미래도 없고, 소망도 없었을 뻔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교회 제자들에게 엄청난 소망이 되었고, 교회를 번성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유대교의 율법으로 살려고 했던 것에 비하여,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와 부활 신앙으로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이나 헬라 지방의 이방인들이 자기들이 만든 우상 신을 섬기며 육체의 쾌락을 좇아 살았던 것에 반하여, 이방인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승리를 외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살고 있습니까?  사람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하는 근본적인 동기가 되는 것들로는 본능, 의무감, 신념, 취미 등이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하는 경우도 있고, 체면 때문에 행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원리로 믿는 성도들은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입니까?  
  성도는 본능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도덕적인 기준에 의해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의무감이나 신념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성도는 오직 신앙에 의해서, 믿음에 의해서 살아가기를 다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최고의 삶인 줄 알고 그 믿음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에 의해 행동하며 살고 있습니까?  많은 경우 세상 사람들처럼 본능과 취미와 두려움과 신념 등에 의해 행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된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에 의해 그런 것들이 조절을 받으며 통제를 받으면서 신앙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베드로는 이런 점에서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던 겁쟁이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의 설교는 당시로서는 위험천만한 주제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이 눈이 시뻘개져서 나사렛 예수의 추종자들까지 죽이려고 하는 판입니다.
  그런데 공개적인 장소에서 예수님을 주제로, 그것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그분이 그리스도와 주가 되셨다’ 고 외치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이런 용기가 어디서 났을까요?  영적인 경험에서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고 경험하였습니다. 부활 신앙은 그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인이 되게 했습니다. 부활 신앙이 그의 삶을 180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경험적인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의 삶은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경험한 부활 신앙의 본질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이것을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고, 이 신앙에 의해서 행동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본문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부할 신앙의 에센스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부활 신앙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다’는 것입니다.
  
  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본절은 베드로 사도의 설교의 절정 부분입니다. 사도가 본 설교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다윗의 예언이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글 개역성경은 원문의 어순을 충분히 살려서 목적어(‘이 예수를’)를 맨 앞에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이 메시야의 부활을 예언한 것도 중요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부활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부활의 주님이시고 예수께서 바로 복음 그 자체이십니다. 사도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묻어 있는 표현입니다.
  과거에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의미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베드로(마 16:21-24), 목숨이 위태로울 때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했던 베드로(막 14:72) -- 그가 이런 놀라운 깨달음과 확신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 진리를 전파하게 된 것은 실로 성령의 강력한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다음 구절에서도 사도는 그가 가진 확고한 부활 신앙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원문으로 볼 때 본문은 매우 강조된 문장입니다. ‘우리가’에 해당하는 1인칭 복수 대명사 ‘헤메이스’는 보통은 생략되는데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성령 충만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의 증인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다’에 해당하는 ‘판테스’란 단어도 ‘우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만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의 성실한 증인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 이름 ‘예수’는 22절에서는 ‘나사렛 예수’로 표현되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비하하기 위하여 ‘나사렛’이란  지명을 흔히 사용했습니다(요 18:5, 76; 19:19).
  그런데 베드로가 여기에서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고난당한 사실을 강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수난을 강조하여 말하는 것은 주로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청중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베드로의 의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숫자가 삼천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 사도 베드로가 본문을 통하여 강조하고 있는 부활 신앙의 에센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신 것은 예수님이 사망의 세력 아래에 매여 있을 수 없는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24절,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주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모든 인류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지만, 예수님만은 죽음의 법칙에 굴복될 수 없는 존재이십니다.
  그는 죄가 전혀 없으므로(히 4:15) 죽음이 그를 예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무죄함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들에게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롬 6:5-11).

  성도 여러분!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을 믿는 자를 마지막 날에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주님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재림 시 예수 믿은 자들을 먼저 부활시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부활 신앙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처럼, 우리도 장차 죽음에서 다시 산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활 신앙은,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죽음에서 다시 살 줄을 믿습니까? 영원히 주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 줄을 믿습니까?

  진정한 부활신앙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이 세상이 끝난 후에 또 다른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 그 세상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위하여 준비되었다는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가지고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그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부활 신앙의 핵심 내용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온 천하 만민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36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여기 ‘주’에 해당하는 ‘퀴리오스’는 히브리어로는 ‘아돈’입니다. 이 말은 믿음의 조상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사용하던 의미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재(主宰)라는 뜻입니다(창 15:8; 9:26).

  ‘그리스도’는 ‘기름을 붓다’라는 뜻의 ‘크리오’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어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이며,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입니다.

  이로 보건대 본절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를 덮어씌워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그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승천하게 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이 바로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이 대망하던 메시야이심을 실증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 외침은 매우 담대한 선포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주’(主, the Lord)는 오직 로마의 황제 한 사람이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는 스스로 자신이 ‘주’라고 하면서, 자신을 주님으로 섬기며 충성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황제 숭배 사상에 거역하는 자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시대에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죽음을 각오한 순교적인 신앙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참 주님은 로마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고백으로 인하여 어떠한 시련이 온다하더라도 이를 감수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하던 당시의 비겁했던 종교인들과는 달리, ‘예수님 외에는 우리에게 주가 없다’고 고백하면서 부활의 주님을 전파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1513~72)는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칼빈으로부터 개혁주의 원리를 배운 낙스는 엄청난 용기와 믿음으로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을 추진한 사람입니다.
  그를 통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세워졌고, 이것이 미국으로 전해져서 미국 북장로교가 되었고, 북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전해져서 오늘의 한국 장로교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장로교의 정치, 제도, 조직, 예배모범 등은 그 근간이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로부터 온 것입니다.

  존 낙스는 당시 박해의 상징인 메리 여왕의 불의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여왕의 비위가 몹시 상했습니다. 결국 낙스는 왕정파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지휘관이 매섭게 쏘아보며 추궁합니다.
  “그대의 신앙과 그대가 말한 것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가?”
  
  이때 존 낙스는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나의 마음이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입이 말했고, 손이 그것을 썼습니다.
   만일 그것으로도 모자란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피로써 그것을 증명하겠습니다.”
  
  낙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고, 그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따르는 어떤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정한 부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의 주님이시며 구주가 되심을 확고히 믿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성도는 부활신앙으로 사는 존재임

  성도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굳게 믿는 자이고,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자신도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의심 없이 믿는 사람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분은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도는 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분의 뜻을 받들어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피흘릴 것을 각오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을 믿기 때문이고, 장차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히 11:35,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히브리서 기자기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물론 구약의 성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래전, 아직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목격하기도 전부터 믿음의 성도들은 부활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엄청난 일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부활신앙 때문이었습니다.
  히 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들을 바치는 일은 의무감으로도 할 수 없고 도덕적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부활 신앙,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부활  신앙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었던 본 회퍼 목사님을 아십니까?  1943년, 조국 독일에서 포악한 히틀러 정권과 맞서 자유와 평화를 외치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본 회퍼 목사님은 2년 후 프로센부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했습니다.
  1945년 4월 9일, 그는 동료 죄수들과 지상에서의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격려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광명과 소망의 세계가 있습니다.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배 후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그는 고개를 돌려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새 생명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부활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신앙에 의해 어떤 영향이든지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으로 삽니까?  
  성도는 부활 신앙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 되심을 굳게 믿습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 하나님께서 나도 부활시키시리라. 그리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되리라’.
  이 믿음으로 예수님만을 자신의 주님으로 섬기면서 사는 자가 참 성도입니다.

  이 일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장차 누릴 영광은 오늘의 어려움을 능히 보상하고도 남습니다.

  우리 모두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여 승리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박순호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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