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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부활

부활신앙의 예표 (요나 2:1~10)

by 【고동엽】 2021.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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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의 예표   (요나 2:1~10)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님입니다. 로마 군병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삼일 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도록 재판한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삼일 동안 군병들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께서 살아나시는 것을 그들은 막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천사가 내려와서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길 때 군병들은 죽은 듯이 기절해 버렸습니다(마 28:4).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교조의 무덤이 있지만 기독교는 자랑스럽게도 예수님의 무덤이 없습니다. 생명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죽음의 권세가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사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은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임을 증명하는 절기입니다.
본문 말씀은 구약시대 선지자 요나가 밤낮 삼 일간 큰 고기 배속에 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된 신비로운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찌기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 12:40). 여기 이 요나의 사건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시고 부활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상징적 계시입니다. 오늘 뜻 깊은 부활절을 맞이하여 요나의 사건을 예수님의 부활과 비교하며 신령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Ⅰ. 음부의 고통


본문말씀 2절에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배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어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고통 중에 부르짖은 기도 내용입니다. 그가 고통당한 그곳을 “스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음부”라는 뜻입니다.

1) 스올의 실제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을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합니다. 성경에는 천국을 “낙원”이라고 표현하고(눅 23:43), 또 지옥을 “음부”라고 하였습니다(눅 16:23).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공로로 사죄함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 백성이 되지만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람은 심판을 받고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히 9:27).
지옥은 가장 고통스러운 곳이며 그 고통은 언제까지나 그치지 않는 곳입니다(눅 16:23). 성경은 지옥을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로 표현하였습니다(계 14:10). 구약에서는 지옥을 “게헨나”(Gehenna) 또는 “힌놈의 골짜기”라고 하였는데 이곳은 각종 더러운 것과 쓰레기를 태우는 곳으로 밤낮 불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뜻합니다. 마가복음 9:48-49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2) 죄와 형벌의 결과입니다.

요나는 본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였으나 그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는 선지자로서 사명을 망각한 행동이며 나아가서 하나님께 대한 반역행위입니다(욘 1:1-3). 이에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배를 타고 도망가는 바다 위에 풍랑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배에 있던 선장과 선원들은 요나를 잡아 바다 물속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준비해 두셨다가 요나를 산채로 삼키게 하였습니다. 고기 뱃속에서 밤낮 삼 일을 지내는 동안 요나는 스올의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음부의 고통은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이 겪게 되는 지옥의 형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그들에게 죽음을 선언하셨고 그 결과 육신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것을 예고 하셨습니다(창 3:19).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보통사람들 같이 죽음을 당하시거나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이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셨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 겪게 되는 죽음과 무덤의 고통을 겪게 된 것입니다.

3) 자연인의 죽음

에스겔 18:20에 “범죄한 영혼은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에게 오는 죽음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은 죄와 죽음에서 예외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로마서 5:12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에게는 죽음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다가왔습니다. 옛날 다윗은 죽음을 앞두고 “내가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간다”고 하였습니다(왕상 2:2). 결국 죽음 앞에 노출된 모든 사람은 다 요나가 겪는 것 같은 음부에서의 고통을 예견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2. 부활의 신비

그리스도인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요 11:25). 죽음에서 다시 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밤낮 삼 일간이나 있었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두고 오래도록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사건을 두고도 여러 가지 학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도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신비요 이적입니다.


1) 주권자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며 또한 주권자입니다. 창세기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주권성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그의 뜻대로 다스리시며 주관하십니다. 인간을 비롯하여 지음 받은 모든 사물은 주권자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고 있습니다. 바다도, 바람도, 바다 속의 생물들도, 심지어 요나를 삼켜버린 큰 고기까지 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필요에 따라 그의 뜻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요나의 사건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를 잡아서 길들이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늘날 일부 불건전한 사람들의 말처럼 과연 사람을 통째로 삼켰다가 그냥 토해내 버리는 물고기가 있을 것인가? 또는 고기뱃속에서 삼 일 동안 어떻게 숨을 쉬고 살았을 것인가? 등의 의구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그대로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 부활의 예표

물고기에게 삼켜져 삼 일 동안 그 뱃속에 있다가 살아난 요나의 사건이 이적인 것처럼 무덤 속에서 삼 일 만에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도 이적이며 신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기 뱃속에서 살아나온 요나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하여 생명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자 의도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실례는 구약성경에 여러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할 때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죽음에서 살아나는 부활의 상징입니다(출 14:21-25). 이스라엘의 광야 여행 중 회막에 넣어둔 열 두 개의 지팡이 가운데 레위지파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 것도 죽음에서 살아나는 부활의 예표입니다(민 17:8). 포로시대의 선지자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환상 곧 마른 뼈들이 소생하게 하는 것도 역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고하는 상징적 계시입니다(겔 37:7-10).


3) 생명의 신비

지혜자 솔로몬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한번 낳았다가 죽는 것은 일반이지만 사람이 짐승보다 나은 것은 영혼이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서 3:20-21에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육체를 만드시고 그 속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창조의 원리에 기인합니다. 사람들은 육체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움직이는 영혼에 비중을 둡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생명인 경우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사는 신령한 생명으로 그 가치가 인정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신비를 설명하면서 땅에 떨어지는 곡식에다 비유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36-45에 말하기를 곡식의 종자를 땅에 뿌리면 거기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싹이 나서 자라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부활도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곧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5:42-44).
3. 부활 신앙의 능력

대부분의 인간 종교들은 신앙을 통해서 선량한 사람이 되게 한다거나 사후 문제를 말할 때는 막연하게 좋은 곳으로 가게 한다는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계시 종교인 기독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천국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과 또한 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부활신앙이 생명 종교인 기독교의 능력입니다.

1) 성경 예언의 성취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가령 구약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예표들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과 또한 부활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두고 처음에는 제자들마저 이를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받아 죽음을 당하겠고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하였을 때 베드로가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6:21-22). 제자 중 한사람인 도마는 예수님이 살아나신 다음에도 자기는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직접 확인하고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요 20:28).
사도 바울은 성경의 약속대로 예수께서 살아나신 사실을 보고 의심했던 베드로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나 심지어 바울 자신까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임을 확신하였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5:3-8). 그는 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증인으로 발견되었을 것”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14).


2) 신비로운 소망의 확증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들의 부활과 직결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잠자는 자들도 분명히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후서 4:14에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에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있어서 숙명적인 결과이며 이는 또한 가장 큰 절망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사는 부활의 도리를 믿기 있기 때문입니다.


3) 승리적 삶의 원천입니다.

부활신앙의 위대함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증거가 됩니다. 누구나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닥쳤을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담담하게 인내하면서 이를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같은 소년들은 뜨거운 풀무불 앞에서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단 3:18).
또한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은 온갖 죄와 유혹 가운데서도 자기를 지키며 경건하게 살아갑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논증하면서 그 자신은 이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수없는 유혹과 시험들을 거뜬히 이겨내었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5:30-34).
그는 또 부활의 신앙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승리적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57-5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처/손상률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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