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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은 청교도 신학이었다: 성령의 역사, 주일 성수/ 김홍만

by 【고동엽】 2021. 11. 17.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은 청교도 신학이었다:

성령의 역사, 주일 성수/ 김홍만

 

박형룡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 청교도 신학임을 지지하였다. 그는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중요시하고 선교사들의 안식일 준수를 강조했는데 이것이 바로 청교도 신학이라고 말했다. 이는 매우 정확한 지적이다. 청교도들은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이론가였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실천가들이었다. 마치 청교도들의 회심 신학을 조나단 에드워즈가 전도 신학으로 사용한 것처럼 초기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은 청교도 회심 신학을 전도 신학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미 미 장로교 역사 속에서 청교도 회심 신학은 전도 신학으로 18세기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19세기의 북 장로교 선교사들의 전도 교범으로 널리 사용된 청교도들의 책은 리처드 백스터의 ‘회심치 못한 자들을 향한 부르심’, 존 플라벨의 ‘은혜의 방편’, 매튜미드의 ‘유사 그리스도인’, 조셉 얼라인의 ‘회심치 못한 자들에 대한 경고’, 필립 도드리지의 ‘영혼의 일어남과 회심 과정’ 들이다. 이것뿐 아니라 특별히 19세기의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 가방 안에는 청교도 신학자들인 존 오웬, 스테판 차녹, 존 번연, 사무엘 러더포드, 토마스 보스톤, 조나단 에드워즈, 존 플라벨의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따라서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 가운데 한국 장로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존 네비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성경 다음으로 실천적인 종교에 초점을 두고 있는 리처드 백스터의 ‘성도의 안식’, 필립 도드리지의 ‘영혼의 일어남과 회심 과정’ 그리고 존 플라벨의 작품들을 중요시합니다”라고 했다.

 

이러한 역사적, 교단적 신학 배경에 의해 청교도의 전도 혹은 성령 신학이 그대로 한국교회에 들어와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실제적 전도 방법과 메시지가 되었다. 그래서 장로교 선교사들의 전도는 회심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내용상으로는 매우 교리적이고 경험적이었다. 청교도의 회심 신학은 선교사들의 세례자 교육과 문답에서 그대로 나타났으며 그 신학에 따라 반드시 진정한 구원의 은혜와 회개의 증거가 확인될 때까지 세례를 미루었다. 이것은 교회의 회원권과 교회에서의 징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안식일(주일) 준수에 대한 강조는 바로 이것이 청교도 개혁운동의 수단이 되어 위선자를 가려낸 것처럼 그리고 미국 북 장로교 역사 속에서(18-19세기) 영적 온도계의 수단으로서 그 영혼이 진정 깨어져 있는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데 사용되어졌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청교도 신학적 배경에 대해 경건주의로 해석하려는 학자들이 있다. 초기 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 경건주의자들의 후예들로서 “감정적이고 체험적이며 죄와 심판과 그리스도의 속죄와 영생을 강조하는 개인 구원과 교회 설립을 위주로 하는 정신이 투철하였다”라고 한다. 이는 경건주의와 청교도주의가 경험적인 것을 강조한다는 유사성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청교도주의와 경건주의는 뚜렷이 구별된다. 즉 청교도주의는 경건주의보다 매우 교리적이며 지적 요소를 강조한다. 실례로 초기 장로교 전도 문서를 보면 너무 무거울 정도로 교리적이다. 이는 청교도의 전통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경건주의와 뚜렷이 구별되어진다.(한철하, 홍치모의 곡해)

 

1909년 당시 40명의 북 장로교 선교사들의 출신 신학교를 볼 때 프린스턴 출신이 16명, 매코믹 출신이 11명으로 구학파의 배경이 지배적이었다. 이렇게 뚜렷한 구학파의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신학파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고, 구학파와 신학파의 중간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가 있고 구학파와 신학파의 중간 견해를 취하는 학자도 있다. 이는 부흥이 신학파의 배경에서 온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제1차 영적 대각성 때(1730-1747) 신파가 부흥동을 주도했다. 제1차 영적 대각성 가운데(1741) 장로교는 부흥에 대한 태도로 인해 신파와 구파로 갈라졌다. 신파가 영적 대각성과 부흥을 지지한 반면 구파는 반대했다. 영적 대각성 초기에 부흥운동을 주도한 목회자들은 통나무 대학((Log Collige) 출신의 뉴브런스윅 노회였다. 이들은 신파로 구성되었는데, 1742년부터 뉴욕노회와 장로교 신학자 조나단 디킨슨이 이 신파를 지지하고 부흥운동에 동참하면서 영적 대각성은 1745년에 고조에 달했다.

 

구파가 목회자의 교육적 수준에 대해 비난했던 신파의 뉴브런스윅 노회 목회자들은 존 테넌트의 통나무 대학에서 개인적 신학 훈련을 받았는데 이들은 청교도 신학의 깊은 곳까지 정통한 자들이었다. 그 예로 통나무 대학에서 아버지에게 훈련 받은 길버트 테넌트 같은 경우는 그 학문성을 인정받아 예일 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까지 수여했으며, 이들의 설교는 매우 교리적이고 지적이어서 마치 신학 강의와 같았다. 그러나 구파는 뉴브런스윅 노회의 목회자들이 유럽의 유명 대학 출신자들이 아니라 사설 개인 교습소 출신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들의 순회전도를 방해하였고 부흥을 반대하였다.

 

이렇게 구파의 목회자들은 신파를 비웃었지만 실상 신파의 활동은 구파를 훨씬 능가했다. 그래서 신파의 활동 1세기 후에 프린스턴 신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아키발드 알렉산더는 통나무 대학 출신 목회자들을 추억하면서 그들의 활동과 설교를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그는 제1차 영적 대각성 당시의 일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 외에도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파를 지원했고 영국의 전도자 조지 휫필드 역시 이들을 지원했다. 또한 신파는 1747년 통나무 대학을 흡수하여 뉴저지 대학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은 나중에 프린스턴 대학이 된다. 결국 1758년 신파와 구파가 연합할 때 신파의 교회 수는 22개에서 72개로 늘어난 상태였고, 구파는 24개에서 오히려 하나가 줄어 23개였다. 그리하여 신파는 장로교의 주류가 되어 인디언 선교를 주도하고 미국의 독립 전쟁 때 사상적 지주가 되었으며, 1812년에 이르러서는 프린스턴 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따라서 부흥 운동을 주도한 신파는 교육, 지적 수준은 물론이거니와 영적 수준이 매우 높았다. 한철하 교수는 부흥운동을 주도한 신파가 교육 수준도 낮고 정적인 것에 치우쳤다고 잘못 알고 있다.

 

1837년 미국 장로교가 구학파와 신학파로 분리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이슈는 펠라기우스 신학으로 기울어져가는 뉴헤븐 신학(New Heaven Theology)을 신학파가 적극 옹호하였고 이에 따른 찰스 피니가 감정주의를 수단으로 해서 부흥주의를 인도한 것이었는데, 구학파는 이것에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교회 정치와 선교 문제로 분리된 것이다. 이때 구학파이며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들이었던 아키발드 알렉산더, 에쉬벨 그린, 사무엘 밀러는 잘못된 신학과 부흥주의를 계속 경고하였다. 이러한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들과 구학파의 목회자들은 제1차 영적 대각성 때(1730-1747)의 신파의 청교도 신학과 부흥 신학으로 돌아갈 것을 신학파에게 말했지만 신학파는 듣지 않고 결국 분리되었다.

 

여기서 부흥과 부흥주의는 구별해야 한다. 부흥주의는 인간의 감정을 부추겨 마치 그것이 성령의 은혜인 것처럼 하여 집회를 인도하였다. 인간의 감정을 부추기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들을 동원했는데 집회 가운데서 이름을 부른다거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좌석을 만들어 그곳에 사람을 앉히기도 했고 때로는 비정상적인 영적 현상(웃음, 쉴새없이 춤추는 것, 고개를 쉴새없이 끄덕이는 것)을 은혜의 수단으로 간주하여 장려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구파가 구학파와 연결성을 갖고 신파가 신학파와 연결성을 갖는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구학파는 신파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부흥 추구는 신파로부터 내려와서 구학파의 참된 부흥을 추구하는 신학적 전통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연결고리가 바로 청교도 신학이었다. 교회 안에서 청교도 신학이 재차 강조될 때 부흥을 경험했다. 또한 부흥은 선교의 힘을 제공했으며, 한국에 온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이러한 청교도 신학을 가지고 들어와 부흥을 추구한 것이다.

 

김홍만,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청교도 신학’, pp 13-26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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