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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엘리자베스와 청교도주의

by 【고동엽】 2021. 11. 16.

1. 반대된 법의(法衣)와 의식(儀式)들

1. 엘리자베스의 즉위의 기쁨


엘리자베스가 왕좌에 오른 것은 겨울이 시작되는 1558년 11월 17일이었지만, 그녀의 즉위는 겨울의 음울을 뒤로하고 모든 생명이 봄의 도래를 기뻐하는 기쁨과 희망의 느낌으로 가득차 있었다.

2. 예시된 그녀의 종교정책


그녀의 통치가 진행되는 초기에 로마 카톨릭주의는 여전히 법정종교로 남아 있었다. 여왕과 그녀의 목사들은 조심스럽게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한 종교정책의 중요한 표징이 즉시 나타났다. 그녀는 런던으로 입성하는 길에 그녀에게 제시된 성경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말하자면, 보너(Bonner)의 입맞춤을 무의식적으로 피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메이트랜드(Maitland)가 서술한 바와 같이, "그녀는 그녀의 손 끝에 신경을 쓰는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등단했을 때 영어로 된 기도문이 읽혀졌고 (그것은 합법적인 것으로 보인다) 복음서와 서신들이 역시 영어로 읽혀졌다. 직무를 행하는 감독은 주인을 높이는 행동을 못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충분히 볼 수 있으니 저 횃불들을 치워 버려라."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들의 손에 촛불을 들고 나타난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의 수도승들과 대수도원장에게 그녀는 외쳤다.


3. 수장령(Act of Supermacy)


변화를 반대하여 교황의 주권과 미사를 인정하는 대주교교구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의회는 엘리자베스를 속세의 문제들에서는 물론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유일한 최상의 통치자'라고 선언하는 수장령을 통과시켰다(1559년 4월 29일). 헨리 8세의 법령은 모든 교회의 사법권과 함께 영국교회의 '지상의 최고 우두머리'로서의 권세를 선포하면서 재현되었다. 그녀는 그녀의 권세를 위원들에게 위임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녀의 그 법정은 고등위원회의 법정(Court of High Commission)으로 또한 억압과 독재의 기구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4. 기도방식 통일법령의 통과


이때의 의회의 같은 회기 동안에 기도방식 통일법령이 통과되었는데 그것은 에드워드 6 세의 법령을 재현시킨 것으로, 그것을 보다 중세적이고, 복고적으로 변경하여 일반 기도서를 만든 것이다.


여왕의 의뢰로 교황을 향한 열심을 강조한 모든 문구들은 제거되었다. 그 제목은 성찬식에서 무릎을 꿇는 행위에 의하여 예배의 구성 요소들이 원래 품고 있었던 경배가 올려지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이 이제는 삭제 되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에드워드의 개정되어지지 않은 기도서에 전술된 옛 축제들과 교황적 법의는 채용되었다. 그리고 형식에 따라 예배를 드리기 위한 엄격하고도 고통스러운 형벌도 인정, 요구하였다. 이런 것들은 감정적으로 여전히 로마주의자인 교회권위의 강한 반발에 대비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기도서는 1552년의 원래의 형태에서나, 1559년의 개정된 형태에서도, 어떤 종류의 교회적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Wakeman)

5. 임명된 감독들


로마교에 속한 감독들은 하나만 제외하고 모두가 수장령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고, 그 성직을 박탈당하였다. 텅빈 주교관할구는 늙은 감독들이 곧 순응하여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 속에 그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완고한 상태였다. 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 자리는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의 궁정목사로 있어온 데이비드 화이트헤드(David Whitehead)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공회적 교회정치나 의식들을 모두 반대했고, 위엄을 지켰다. 에드워드 치하에서 감독직을 맡아왔고, 제네바의 녹스의 회중에서 장로를 맡았던 마일스 커버테일(Miles Coverdale)이나 버나드 길핀(Bernard Gilpin), 토마스 샘슨(Thomas Sampson) 등도 비슷한 이유로 감독직을 거부했다.


6. 만족하지 못한 진보적 개혁자들


항상 사려깊은 작가인 린드세이 박사(Dr. Lindsay)는 "기도방식 통일법령이 통과되었을 때 진보적인 개혁자들은 흐믓해 했었다"고 말했다. 또한 불링거가 "에드워드 왕의 종교개혁은 신령스럽게도 만족스러운 것이었다"고 말했을 때, 그가 말한 그 문장의 문맥이나 그가 쓴 다른 논문들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이 제안하여 순결한 교회들에게 괴로움만 더하여 준 아우그스부르그 신조(Augsburg Confession)에 비교해 볼 때, 기도방식 통일법령은 비교적 그들에게 만족감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에드워드의 기도서는 린드세이 박사가 말한 것과 같이 불링거가 말한 "그들 앞에 놓여 있는 목표"는 아니었다. 반면에 1559년 11월 4일 법의에 관해서 쥬리히에서 토마스 샘슨에게 글을 쓴 피터 마터는 말하기를, "그것들은 단지 교황의 유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는 불링거 선생은 당신이 그것들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했다. 1560년 2월 1일에 다시 글을 써보내면서 그는 샘슨에게 "그것들을 치워 없애기 위해 모든 방면에서 힘써 노력하시오...." "아모리 족속의 유물과도 같은 그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겠습니다"라고 강조하면서 덧붙이기를, "그는 불링거와 모든 문제에서 동의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린드세이 박사는 엘리자베스의 결정에는 그린달(Grindal)이나 쥬웰(Jewel), 샌디스(Sandys) 같은 사람들의 만족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어떤 것들이 있었다고 했다. 사실상에 있어서 그 일 속에는 그들이 '만족'하지 않았던 많은 증거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교황권이 붕괴되고 신교주의가 자리를 차지하는 상황에 매우 기뻐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먼거리에 그들은 놓여 있었다. 스트라이프는 그린달에 대해 말하기를, 그가 런던의 주교관할구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감독같은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습관들이나, 어떤 의식들"을 비롯한 몇가지 문제점들에 관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다.


쥬웰은 새 감독들의 임명에 앞서서 피터 마터에게 편지를 쓰면서 말하기를 "거룩한 예배의 배경적 설치는 혼란 가운데 놓여 있으며, 당신과 내가 가끔 조소를 띄우게 되는 그 문제들은 우리가 관심을 두지도 않는 어떤 인물들에 의하여, 마치 기독교는 천박한 어떤 것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종교인듯이 이제 엄격하고도 장중하게 받아 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1559년 11월 5일에 쓴 그의 글 속에서 그는 그들 천박한 종교인들을, '이 우매한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말하기를, "당신이 저술한 주시할 만한 종교와 가식적인 관습들에 관해서, 나는 진심으로 그것이 이루어 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일들을 수행하는 데에 기쁨을 가지는 그 무리들은, 내가 믿기로는 사제들이 스스로가 재능이 없고, 학식이 없으며, 도덕성이 결핍되어 있거나, 그들 자신들은 숲 속의 통나무 보다 낫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기껏해야 바로 그 우스꽝스러운 옷으로 대중을 지배하려고 생각하는 사제들의 무지를 뒤따라가는 무리들인 것입니다." "이 가소로운 천박한 무리들은 정말로 당신이 아주 합당하게 관찰하셨듯이 아모리 족속의 후손들입니다. 누가 그 말을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이제나 저제나 그들이 사라지고, 그들의 가장 깊숙한 뿌리까지도 근절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1559년 11월 16일 다시 쓰기를, "여왕의 그 교리 주장은 어느 곳에서나 흠잡을 데 없이 순수한 것입니다만 예식들과 예식을 위한 가장에 대해서 볼 때에 거기에는 너무나 우매한 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불건전한 징조가 되는 그 작은 은십자가는 여전히 여왕의 예배당 속에 남겨져 있습니다. 비참하게도! 이것은 너무나 조속히 전례에 기울어질 것입니다. .... 그러나 내가 알아차리고 있는한 그것은 이제 희망이 없는 일입니다. ... 세실(Cecil)은 매우 열렬하게 우리의 동기를 지지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여왕의 예배당 안에 있는 십자가에 대한 논쟁이 최고점에 달해 있을 때 쥬웰은 편지를 써서 말하였다. : "내가 그 은십자가와, 어느 곳에서나 부러져 동강이 나 있는 양철들의 조각들이 다시 수축되어지거나, 우리의 감독직이 양도되어지는 그런 형편의 일들이 닥쳐 왔다고 추측하는한 나는 다시는 감독으로서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없을 것입니다." 1562년 2월 7일에 그는 편지쓰기를, "이제 복음의 충만한 광명이 비추어졌습니다. 가능한한 그 오류의 흔적들은 말하자면 먼지와 같은 자주색 법의들과 같이 모두어 버려져야 할 것입니다. 내가 바라기는 우리가 그 린넨천의 백의에 대해서도 이런 영향을 끼쳐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성상이 마리아와 요한의 상들과 함께 교회의 가장 잘 보이는 장소에 놓여져야 한다는 여왕의 소망에 관해서 샌디스 감독은 이 일에 대한 그의 열정 때문에 말하기를, "나는 내 직책에서 거의 물러나게 되었으며, 여왕의 불쾌함을 초래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며 덧붙여서, "교황적 법의는 우리 교회 안에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매우 오랜 시간 동안 머물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1560년 8월 23일 파크허스트 감독(Biship Parkhurst)은 불링거에게 편지를 쓰면서,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이룬 것보다 더 큰 진정한 종교의 진전을 불과 몇 달 동안에 이룬" 스코틀랜드인들에 대한 질투를 표현했다. 후에 필킹톤 감독은 편지에서 말하기를, "내가 고백하기로는 우리는 우리의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그리고 만약 우리가 어떤 것을 매우 원했다해도 그런 소원의 간청이 하나도 받아들여질수 없는, 그들 아래서 내뱉아야만 하는 신음소리의 고통을 참아나갔다. 우리는 권위 아래에 있었고, 영왕의 인가없이는 어떤 개혁적인 일도 할 수 없었다"고 햇다. 콕스 감독 조차도 이렇게 썼다. " 우리는 모두, 우리의 커다란 마음의 실망 속에서, 우리의 교회들에 걸려잇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분과 그의 십자가의 성상들을 용납하도록 강요되어졌던 것이었다. "처음에 되어진 첫 번째 감독들과 콕스,그린달, 혼, 샌디스, 쥬웰, 파크허스트, 벤담 처럼 망명지에서 새로 돌아온 사람들은 그들이 처음 돌아와서 아직 그들의 사역에 임하기 전에, 교회 안에 교황적 관습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항하여, 그리고 의식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그들은 모두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왕과 의회의 승인을 받을수가 없었으며, 그 습관들은 명문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웨이크맨이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오기 까지는 여왕의 마음을 생각하여 기도서를 잠시동안 그것의 카톨릭적 가르침과 의식들과 함께 용납하는 데에 불과했던 것이었다."고 했다.


이제 감독들이, 게다가 나아가서는 화이트헤드(Whitehead) 같은 사람들이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면 카버데일, 길핀, 그리고 샘슨 같이 양심 때문에 감독직을 거절한 사람들이나, 그들에게 동정을 갖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확실히 "진보된 개혁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드디어 매튜 파커(Matthew Parker)가 1559년 12월 17일에 캔터베리의 대주교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몇 일 후에 그는 열 한 명의 감독들을 임명했는데, 다는 아닐지라도 그들 중의 대부분은 대륙에 있는 개혁교회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고, 보다 큰 개혁을 원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로 그들은 그 일을 받아들이기에 많이 머뭇거렸었고, 그것을 하기 전에 대륙의 성도들의 충고를 구했다. 쥬리히의 문서들이 보여 주는대로 그들은 개정된 못마땅한 의식에 대한 희망과 영국교회를 다른 개혁교회와 밀접하게 연결시키려는 희망을 가지고 그 일을 맡았던 것이다.


7. 보다 발전된 진보가 시도됨


샌디스 감독과 노웰 목사(Dean Norwell)에 의해 인도되는 보다 다른 개혁을 향한 불굴의 노력이 1563년의 대주교 교구회의에서 기울어졌다. 성찬식에서 임의로 무릎을 꿇고 백의와 코우프(Cope : 승려가 입은 망토 모양의 긴 외투)와 세례 때에 사용하는 십자가의 모양을 폐기하며, 성자의 날들과 축제들을 폐기하도록 고안된 결의가 적은 무리의 사람들에 의해 거부되어졌다.


8. 종교개혁이 폭 넓게 확산되기를 바라는 소망


종교개혁을 통해서 그 소망이 얼마나 폭넓게 확산되어진 것이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충분한 설명이 되어졌으리라고 생각한다. 버넷(Bishop Burnet)은 말했다. : "엘리자베스 통치의 초기에는 바다 너머로 추방된 많은 학식있고 경건한 성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수치스러운 소문이 나도는 사람들을 책망하기 위해 성직자와 평신도들을 같이 취급하여 재판하는 재판소의 새로운 형태가 제네바와 다른 곳에 정착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이것들을 에드워드 시대에 보편적으로 불평의 대상이 되어온 생활의 극심한 방임에 대해 적용시키면서, 그러한 처사가 불순종자들 같은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성당 참사위원인 페리(Canon Perry)가 "엘리자베스 시대 감독들의 주된 중심은 교리적인 면에서는 칼빈주의자들이며, 질서에 있어서는 장로교에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라고 확인한 말은 결코 과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9. 민중 가운데서의 여왕의회에 나타난 종교개혁


궁중에서도 라이체스터의 권세 있는 얼(Powerful Earl of Leicester), 프란시스 놀리스경(Sir Francis Knollys), 바이스 첸버라인(Vice Chanberlain), 세실(Cecil), 트레쥬어러경(Lord Treasurer), 프란시스 윌싱햄경(Sir Francis Walsingham) 그리고 몇몇의 다른 사람을 포함하는 개혁자들에게 동정하는 유력한 당파가 있엇다. 그리고 민중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메리의 치하에서 있었던 박해에 의해 매우 격분하고 있었으며, 모든 것을 주관하는 교황권에 대해 그들의 증오심이 불붙어 있었기 때문에 권위의 강한 손길까지도 폭동으로부터 그들을 제지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위원들에 의해 끌어내려진 성상들과 십자가상 뿐만 아니라 사제들의 법의, 코우프, 백의, 제의들, 책들, 그리고 깃발들까지 그들은 칲사이드(Cheapside), 바울교회의 마당, 그리고 후대의 순교의 형장이었던 스미스필드(Smithfield)로 가지고 가서 불태워 버렸던 것이었다. 그들은 채색된 창문들을 파괴했으며, 교황적 상징이 새겨져 있는 유물들을 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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