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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테어도르 베자 (Theodore Beza, 1519-1605) (스위스)

by 【고동엽】 2021. 11. 13.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는 칼빈의 후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명이 Besze인 그의 이름은 근대 프랑스어로는 Beze이고, 영어와 독일어로는 라틴식인 Beza를 사용합니다.) 칼빈은 평생 동안 염원하던 제네바 아카데미를 마침내 1599년에 창설하게 되었을 때, 학장으로 평소부터 가장 적절한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던 베자를 지명했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감치 그를 위대한 종교 개혁자 칼빈의 사명을 계승할 자로 선택하셨고, 따라서 어려서부터 그가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환경을 조성하셨다.

 

베자가 어려서부터 가르침 받았던 선생들 중에서 특별히 멜키오르 볼마르를 빼놓을 수 없다. 칼빈의 오를레앙 대학 시절의 스승이었던 사람으로 잘 알려진 볼마르 교수는, 칼빈을 가르칠 당시 9살 소년이던 베자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여서 역시 개인적으로 그를 가르치고 있었다. 베자의 천재성을 알아본 그의 삼촌 니콜라스 베자가 파리 의회 의원으로서의 영향력과 자금을 활용하여 볼마르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조카를 그의 문하생으로 맡겼던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볼마르 밑에서 배울 때, 그의 스승이 데리고 있던 9살 짜리 천재 소년 베자를 볼 수 있었지만, 훗날 자신들이 종교 개혁의 최전선에서 동역하게 되리라고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베자는 자신의 여러 가지 필요한 학문을 마쳐가던 시점인 1548년에 그의 유명한 시 모음집인 ‘유베닐리아’(Juvenilia)를 출간함으로써 학계에 데뷔하게 된다. 베자는 이 책을 발행하면서 잊지 못할 스승 볼마르에게 헌정했다. 유베닐리아의 출판으로 말미암아 베자는 일약 당대에 제일가는 라틴 시인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유명해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동시에 정적들을 만나게 되는 보편 섭리(?)는 베자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베자는 온갖 비방과 모함에 시달려야 했고, 심지어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에 대한 비판들도 달라붙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베자는 중병을 앓게 된다.

 

이런 일련의 시련들을 겪으면서 베자는 이 세상이란 것이 얼마나 공허한 세계인가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하고 바라보았던 칭송과 명예가 조금씩 진절머리 나기 시작하고, 정상의 세계에 서기 위해서라면 필연적으로 아귀다툼의 싸움 속으로 빠져들어가야만 하는 이 세상의 실상을 알아갈수록 그의 가슴은 더욱 텅 빈 허무로 가득 채워질 뿐이었다. 더욱이 이런 과정 속에서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양심의 가책은 육신적으로 앓고 있던 질병 이상으로 그를 힘들게 했다.

 

결국 베자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4년 전(1544)에 비밀리에 결혼했지만, 대중 앞에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데 대한 양심의 가책은 견딜 수가 없었고, 또한 내심으로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추구하고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로마 카톨릭의 예비 사제로서 성직록을 받고 있었던 이중성에 대한 양심의 고통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위대한 종교 개혁의 한 페이지의 역사 속으로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츠빙글리도 육신의 병마를 겪으면서 그랬던 것처럼, 베자의 회심을 이런 식으로 이루시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마침내 프랑스의 전형적인 상류 귀족 계급의 멋쟁이 신사요 르네상스 시인인 베자는 결심한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직 병으로 시달리는 힘든 몸을 억지로 이끌고, 부친과 고국을 뒤로하고, 젊음의 야성으로 용기 백배하여 한 순간에 움켜쥐려는 듯이 달려들었던 부귀와 명예와 영광도 뒤로 하고, 4년 전에 비밀리에 결혼했던 아내 클로딘 데노즈(Claudine Denosse)의 손을 다정히 붙잡고, 그렇게 마침내 스위스 국경을 넘었다. 때는 1548년 10월 23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베자는 로마 카톨릭에 남아 있던 찝찝한 인연들과 영원히 결별하게 되었다. 제네바에서 칼빈을 만나 본 후, 베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회당에서 클로딘 베노즈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생계를 위해서 직업을 찾아 나섰다. 옛 스승 볼마르의 조언을 듣기 위하여 튀빙겐도 방문하였다. 귀로에 로잔에 들렀다가 피에르 비레(Peter Viret, 1511-1571)에게 설득 당하여 그곳 대학에서 그리스어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칼빈과 합류시키실 때까지 좀더 필요한 준비를 시키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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