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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신학(김세윤)

바울신학 제 19강 (김세윤 교수)

by 【고동엽】 2021. 11. 12.

바울신학 제 19강

 

영지주의-태초 인간의 신화,구원자 신화-에 호소하는 신학자가 E.Brandenvurger가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책에서 주장하기를 ‘원래 아담기독론은 바울의 창작이 아니고 고린도 교회가 그들의 영지주의적 배경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을 해가지고 두 인간-Anthroper-에 대한 교리로 발전을 시켰는데 그래서 타락한 첫 인간과 우리가 연대해서 영혼이 육신속에 갇힌 상태로 살았는데 이것이 그리스도-마지막 애인간-와 연대해서 우리가 이미 세례를 통해서 영혼이 이미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더 이상 부활이 필요없다고 고린도 교인들이 주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주장-두 인간의 교리-을 그리스도 사역을 그리스도 안의 구원을 해석하려고 하면서 틀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대해서 일부 교정을 가한 것이 ‘바울의 아담 기독론이 시발이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것은 내 책에서 그렇지 않다고 굉장히 비판했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예수의 자기 칭호-그 사람의 아들-에서 바울의 아담기독론이 나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아람로어 한 사람이란 뜻인데 이것을 헬라어로 고치면 ανηρωπος이고 이것을 다시 히브리 말로 바꾸면 םדא이다. 이래서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에서 바울이 힌트를 얻어 가지고 예수를 아담이라고 부르고 최초의 아담과 비교 대조했다. 이런 것이 보수주의 학자들의 견해인데 이것도 별로 옳지 않다. 왜 그러냐면 이러한 증거도 없고 바울 서신에서도 증명하기도 어렵다. 또 종교사적으로 단7:13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창세기 아담과 관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별로 신통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해결책을 좀 다르게 찾아보자 해서 먼저 아담 기독론의 기원은 해결되지 않았다고 보고 더불어서 항상 기독론의 기원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형상 기독론이 어디서 나왔느냐? 아담 기독론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그러면 아담 기독론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해결이 안되었다. 그래서 이 순서를 뒤집어 가지고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형상 기독론이 먼저 발생하고 그것이 바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으로 비교하게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형상 기독론이 먼저 성립이 되고 그것에 연이어서 아담 기독론이 성립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가지고 형상기독론의 기원부터 규명을 하고자 한다. 그라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들을 관찰해 보아야 한다.

 

2.언어

 

1)형상(εικων)-Image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고후4:4/골1:15)

 

여기에 εικων, μορφη 라는 말은 빌2:6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συνμορφη-form-이것은 image(형상)이라고 번역되는데 형상(εικων)이라는 말은 비슷한, 유사한 대표,겉으로 나타나는 모습,본질의 틀(form)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감추어진 본질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μορφη라는 말은 보통 form 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말도 본질의 외적 표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εικων과 μορφη는 뉘앙스에 있어서 조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경우 상호 교환용으로, 동의어로 쓰인다. 뉘앙스에 조금 다른 εικων은 모습을 겉으로 드러냄의 뜻이 조금 강하고 form은 본질의 외적 형태라는 뜻이 조금 강하고 εικων은 둘다 비슷함을 전제하고 있다.

 

εικων이 비슷하다는 뜻을 조금 강하게 나타낸다고할 수있다. 뉘앙스가 조금 다르기는 다른데 고대 문서에 보면 서로 상호 교환적으로 쓰이고 있고 바울의 편지에도 이 두말이 보통 같이 한꺼번에 나온다. 가령 롬8:29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들의 εικων에 συν μορφη 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하나님 아들-가 하나님 형상이다. 하나님 아들에 εικων(Image)에 συν μορφστα같은  μορφη가 되게 했다고 εικων과  μορφη를 항상 같이 쓴다. 그래서 이 말이 뉘앙스가 조금 다르지만 아주 유사하다.

 

그런데  μορφη라는 말과 εικων과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말이 ʿο μοιομαι(εις)와 비슷하다. 또  μορφη와 같이 쓰이는 말이 σχημα-외적인 형태(form)-이다. 바울도 συν μορφη도 쓰고 συ σχημαται-롬12:2/고전11:13ff/빌3:21 등-라는 말을 쓴다. 이런 말들이 다 동의어들이다.

 

εικων은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םלצ이다-이말을 보통 번역한다. 그러나 가끔  μορφη가지고 이 말을 번역할 때도 있다. 그런데 םלצ라는 말은 항상 תומד(비슷한)라는 말과 같이 쓴다. 어떤 때는 εικων이 보통 םלצ만 번역할 때도 있다. 그래서 μορφη과 εικων가 거의 동의어이듯이 םלצ와 תוםד는 항상 같이 쓰이는 말이다.

 

תומד는 사실은 비슷하다는 추상명사이고 םלצ은 드러난 모습-동상-을 말하고, 항상 비슷함을 전제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원래 비슷하다는 추상명사로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두 단어가 사실은 창 1:26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슷한 곧 자기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두 단어가 같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어 내자고 한다(창1:26/5:3).

 

그런데 εικων과 μορφη 두 언어는 헬라 종교에서도 중요하고 철학에서도 중요하고 특히 나중에 영지주의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특히 εικων이라는 말은 유대 랍비 문서에도 아예 헬라어로 빌린 말 זינוהיא로 히브리말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서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는 Theophany-하나님의 나타난 때에 인간이 실제로 모는 것-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זינוהיא을 본다. 헬라어 εικων을 이런 식-זינוהיא-으로 히브리말로 표현했다. 즉 빌려온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환상 가운데 볼때 하나님을 볼 수 가 없어서 하나님을 보는게 아니고 실제로는 하나님의 זינוהיא를 본다는 식인 헬라 사고방식으로 표현한다. 이때의 זינוהיא 는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지혜가 물체화하고 인격화했다고 했듯이 물체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하나의 구체성을 띄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런 말-μορφη ,εικων 또는 이말을 번역하는 히브리말들-이 중요핟. 이런 말들과 또 같이 쓰는 말이 있다.

 

2)דובכ/δοξα(하나님의 영광)

 

דובכ와 δοξα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이다. 또는 같이 쓰는 말이다. 또는 하나님의 얼굴-פנה/προσωπον-도 늘 같이 쓰는 말이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토론은 내 책에 다 있다. 이런 언어들-μορφη, εικων,δοξα-과 또는 도의어-ομοιομαι(σις)-들이 어떠한 상황속에서 주로 쓰이느냐 하면 주로 Epiphany 주로 Vision의 상황 속에서 많이 쓰인다21).

 

구약과 유대 묵시문학 또는 랍비문학들을 보면 하나님의 나타남 또는 다른 하늘이 존재가 나타남을 그릴 때 위에 말한 언어들이 주로 많이 쓰인다. 환상 가운데 체험되는 존재를 그리기 위해서 이런 말들이 많이 동원된다. 제일 쉽게 볼 수 있는게 겔1:26이다.

‘사람의 모양 같더라’가 사실은 이렇게 되어 있다. 사람의 나타남-הא רב-,같은(כ),또 한번 같은(תומד)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럴때 תומד라는 언어가 쓰인다. εικων , μορφη 라는 말에 히브리적 상대어인 תומד라든지 הארמ-εικων과 동의어-라는 뜻이 있다. 이런 말들이 하나님이 나타남을 그릴 때 이렇게 쓰인다.

 

םדא הארמןכ תומד

사람 나타남 같은 같은

 

단 7장도 마찬가지이다. ‘옛적부터 계신 이’ 여기에서 하나님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나타나고 또 하나의 신적존재가 인자같이 나타난다.(שׁנא רבכ) 즉 사람의 아들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 네번째 에스라 13:3에 보면 ‘인자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여기서도 תובד라는 말을 쓴다. 또 계1:13ff를 보면 요한이 환상 가운데 ‘인자 같은 이’를 본다. ‘Ομοιν υιον ανθρωπος ομοιον ομοιομαι ομοιομαι(σις) 등의 εικων의 비슷한 말을 쓴다.

 

또 유대묵시문학의 the testament of Abraham(아브라함의 유언)이라는 책이 있다. 여기에 보면 영광된 아담이 ‘만유의 주재인 ομοιμαι모습으로 나타나고 아벨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모습-ομοιον υιον θεου-과 μορφη와 같이 동의어로 쓰인다. 그러니까 영광된 아담은 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벨은 바로 하나님 아들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삼상 28:13f에 있는 사울이 엔돌의 무당에게 찾아가서 사무엘을 불러 내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무당이 사무엘을 불러내어서 사무엘을 본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를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그이 책 ‘안티쿠티스’에서 ‘사무엘이 하나님 같은 인간으로 나타난다’ 또는 하나님과 같은 form(μορφη)로 나타난다.

 

그가 하나님의 iamge(εικων)를 가지고 하나님의 몸체(σχμα)-εικων, μορφη, ομοιομα -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래서 죽은 사무엘의 영이 무당에 의해서 이런 형태로 보여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형상-εικων-으로냐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다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결론)

①초월적인 존재를 환상 가운데 볼 때에 보는 자는 보통 보이지 않는 하나님,또는 하늘의 존재를 히브리 말로는 הארב, תובד로 본다. 헬라어로는 σχμα, εικων, μορφη, ομοιομα 등을 본다.

 

②하늘의 초월적인 존재가 항상 지상의 유비 형식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럴 때에 הארב, תובד, כ 이런 언어가 쓰이고 헬라어로는 σχμα, εικων, μορφη, ομοιομα 언어가 쓰인다.

 

하늘의 실재는 그 위인데 지상의 유비를 들어서 그릴 때 하늘의 실재가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갈 때 σχμα, εικων, μορφη, ομοιομα등의 언어가 쓰인다.

 

③신적 존재가 나타날 때는 인간과 같은 형상 또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반면에 하늘에 높임받은 인간-Adam,Abel,Abrahm등-이 환상 가운데 나타날 때는 거꾸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신적 존재가 나타날때는 인간(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늘에 높임받은 인간-아담,아벨,아브라함-이 나타날 때는 하나님의 모습 또는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럴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말이 되는가? 이것은 이른바 논리에서 토톨로지-영이 흙이다라는 말과 같다-와 같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나타났는데 사람같이 나타났다고 하면 아브라함이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같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영광스런 형체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것이 유대 묵시문학이나 랍비 신비문학에서 초월적인 존재의 나타남을 그리는데 있어서 정규적으로 쓰이는 언어들이다. 지금 모습,형상,비슷함 등은 초월적인 존재들의 나타남을 환상 가운데 보여줄 때의 context에서 쓰인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령 에스겔 1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아담(사람)의 겉모양 같은(השׁרב) 같은(תומד)모양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높임(영광)받은 인간이 나타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아들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언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겔1:16에 하나님이 사람의 הארב 또는 사람과 비슷함(תובד)으로 나타났다고 했는데 창세기 1:26은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םלצ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תומד로 만들어었다. 그래서 독일의 유명한 구약학자 G.Von.Rad는 영국의 구약학자 J.Barr같은 사람은 주장하기를 ‘창세기의 하나님 인간을 자기의 형상과 자기의 모습대로 지었다 하는 위대한 신학적 천명은 에스겔서 1장에서 그려진 것과 같은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모습)으로 체험한 계시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구약의 문서설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창세기 이 부분-창1:26-도 제사장적 문서(P)로,에스겔서-겔1:26-도 물론 제사자적이었기 때문에 소위 P문서이다. 그래서 주로 하나님은 구약의-이사야 6장도 마찬가지-성전에 나타난다. 성전이 하나님의 거처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통 하늘에 계시나 지상에 계시면 성전에 계신다.

 

성전에 하나님의 어좌가 놓여 있다. 그래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체험한다(사6장,겔1장). 이것이 이른바 제사장적 문서(P)라고 하는데 창1:26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주장은 창 1:26에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Theophany-하나님의 나타남-을 보는 환상 가운데 사람의 형상(모습)으로 보는 계시의 체험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곧 하나님과 인간에는 외적인 모습에 비슷함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분이다. 보인다면 우리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분이다. 그러면 그 분은 우리 이성보다 작은 분이다. 그런 분은 하나님이 하나님이 될 수가 없고 구원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이성보다 크다. 인간의 지각을 뛰어 넘는다. 그래서우리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이성에 자기를 계시-보여줌-한다. 그러니까 더 크신 분으로서 우리 이성에게 자기를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서 깨닫게 하느냐면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이것이 구약과 묵시문학에서의 언어이다.

 

그런데 지혜 문서-솔로몬의 지혜라는 책 7장에서 그렇고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철학자 Philo의 글등-에서 보면 하나님의 지혜 또는 하나님의 말씀-λογος-이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자 노릇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 노릇한다. 그런데 바로 이 계시의 중보자 노릇함이 하나님이 스스로를 보여주실 때-Theophany-에 실제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지혜라는 거이다. 또는 λογος라는 것이다. 왜 그러냐면 지혜와 λογος가 하나님의 εικων이기 때문에 실제로 Theophany할 때 인간이 보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고 지혜나 λογος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나 λογος를 보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또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지혜나 λογος가 하나님의 εικω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형상을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긴지 안다.

 

지혜/λογος⇨하나님의 아들(딸)⇨하나님의 사자 노릇

창조,계시,구원

계시의 중보자

Theophany

 

이럴때-Philo나 지혜문서의 솔로몬의 지혜라는 책-에는 이런 의미로 지혜나 λογος를 하나님 εικων, μορφη라고 할 때 지혜문서-묵시문학서와 마찬가지로-도 Theophany상황을 염두해 두고 이런 언어를 쓴다. Philo의 책 중에서 재미 있는 것이 있는데 ‘꿈에 관하여’-de Somnis-에서 제 1장 227절에서 241절까지 보면 ‘벧엘에서 야곱이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보았다.’그런데 Philo는 이 사실은 야곱이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고 λογος-하나님의 천사,사자-를 보았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느냐면 λογος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Philo나 지혜문서도 묵시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출현상황에서 본다. 그런데 지혜문서나 Philo에게서 중요한 것은 지혜나 λογος가 하나님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의 중보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εικων 이라고 한다. 이처럼 εικων(형상) 언어를 하나님의 나타남-Theophany 또는 Euiphany-의 현상에서 그릴 때에 하나님 형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하나의 가설을 쓸 수 있는데 바울도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사이라고 하면 εικων, μορφη 언어를 Eupihany 현상에서 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ㅇ다. 앞에서 말한 묵시문학-하나님이 나타나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그러나 하늘에 높임받은 인간이 나타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났다-에서나 Philo도 하나님 아닌 하나님의 λογος 즉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나니까 하나님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염두해 두고 위의 가설을 좀더 정확히 말할 수 있다.

 

바울이 혹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아서 하나님 영광 가운데 나타난 나사렛 예수-바울에게는 인간-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나타날 때에 그를 유대 묵시문학의 언어료 표현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는 인식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나타남을 체험한데서 나왔을 것이다는 가설을 성림시킬 수 있다.

 

그래서 바울도 유대의 묵시문학,지혜문학적 전통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아마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서 높임받은 상태로 그의 영광의 광채에 나타났을 때에 그를 두고 ‘그가 하나님 같이 생겼다 하나님 비슷하다, 하나님의 형상이다’하는 이런 언어를 썻을 것이다. 이런 가설을 가지고 그러면 바울의 서신에서 실제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지칭한 구절들을 해석해보면 다메섹 도상의 Christophany 현상을 지적하는 요소들이 있는가를 찾아 보아 가지고 그런 요소들이 있으면 위에서 말한 가설들이 확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언어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고전 15:47을 보면 첫 아담은 흙에 속한 자라고 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첫 아담과 연대에 있어서 흙에 속한자의 형상을 입었는데 마지막 아담의 형상을 입게 된다고 말할 때 마지막 아담을 하늘에 속한자라고 한다. 즉 ‘του επουρανιον’-하늘의 인간,하늘의 존재-의 형상을 입는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늘의 존재로 말하고 있다. 하늘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Christophany를 연상하게 한다. 왜 그러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은자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형상(εικων)이라는 말을 하늘과 연결시켜서 보면 다메섹 도상에 체험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빌3:20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기의 영광된 형상(형체)-εικων, μορφη, μορφη의 동의어인 αχμα가 쓰임-으로 바꿀 것이다. 그런데 그 분이 하늘에서 오는 분이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하늘보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아들’을 체험한 것은 하늘로부터 올-재림-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른바 성취-prolepsis-라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로부터 하나님 영광가운데 계시되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가 종말에 재림할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는 것을 빌 3:20-21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후 3:1-4:6이 이주 중요하다. 특히 3:16-18까지를 보면 18절에 ‘우리 모두가 얼굴에 씌운 것을 벗은 상태로 주의 영광을 바라본다’ 그런데 어떻게 바라보냐면 거울에 반사된 것을 바라보듯이 주의 영광을 바라봄으로서 그 형상으로-την αυτην εικνα-변화되어 간다.-μετα μορφουμεθα-모습이 변화한다는 말이다. μορφη가 변한다고 바울이 여기서 쓰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εικων으로 우리의 형태가 변화되어간다는 말이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봄으로서 변화되어 간다. 지금 바울은 자기가 주의 영광을 본 다메섹 도사에서의 Christophany를 염두해 두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드러나느냐면 고후 4:4,6까지가 그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에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광채를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하기도 하고(고후4:4) 그리고 고후 4:6에서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반사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복음은 무엇이냐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을 선포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함이 빛을 비춤이다. 이 말은 인식하게 하고 깨닫게 함이라는 뜻이다. 고후 4:4,6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영광의 빛’ 이런 언어로 강력하게 다메섹 도상의 그리스도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context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서슬러 올라가서 보면 고후 3:18에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일반화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체험-구원의 체험-을 18절에서 ‘주의 영광을 거울을 들여다 보듯이 보며’ 거울에 들여다 보듯이 보면 주의 영광의 빛이 반사된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그의 형상으로 닮아간다. 사실 고후3:1-4:6까지는 장,절이 잘못되어 있다. 사실은 4:6까지는 3장에 같이 붙는 것이다. 고후 3:1-4:6까지는 바울이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 있어서 Christophany의 체험과 모세에게 주어진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출현-Theophany-을 비교 대조하는 것이다.

 

모세는 옛 언약의 사자로서 율법의 계시를 받았다. 이 계시를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런데 이 영광은 사라지는 영광이다. 그래서 사라지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까봐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는말이다. 그런데 수건은 율법에 가려짐을 상징하고 또 율법을 읽는 유대인들의 심장이 완악해짐-영적인 눈이 못뜨게 됨, 가려짐-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아무리 회당에서 읽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유댕니들은 시내의 계시에 근거해서 회당에 모여서 예배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의거해서 그렇다. 그런데 바울은 새언약의 사자이다. 복음을 계시받은 것에 근거해서 그렇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할 뿐만 아니라 쳐다보면 볼 수록 더욱 더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이 그리스도의 영광된 형상으로 우리가 변화된다는 대조를 하고 있다. 왜 이런 대조를 하고 있느냐면 고린도 교회에 모세의 율법에 호소하는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이 모세 율법을 존중하지 않은것을 시비함으로 바울이 대조하면서 그렇게 하는 자들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것인데 모세가 벌써 속임수를 썼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져가고 있는데 이것은 종말에 그리스도 안에서 메시야 안에서 완성될 영광에 겨우 pointing하는 정도인데 그것을 절대화해가지고 그것이 사라져가는 것을 덮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후 4:1에서부터 읽어가면 바로 모세에게 호소하는 유대주의자들이야말로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그래서 속임수를 써서 주의 일은 한다고 하는 자들이라고 이들을 공격한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복음의 내용으로 선포한 자이기 때문에 전혀 속임수를 쓸 필요가 없다(고후4:1-6).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자들’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자들이다. 모세가 감추었다(속임수를 썼다)는 말이다. 이들은 바울이 속임수를 쓴다고 했다. 그런데 바울은 거꾸로 말하고 있다. 내가 속임수 쓸 이유가 없다. ‘나는 하나님의 드러난 영광을 그대로 쓴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복음에 무슨 궤휼을 쓰고 숨기고 속임수 쓰지 않는다고 한다. 바울의 복음은 가려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환히 드러난 하나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이기 때문에 이것은 재창조의 사건이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하는 것은 창조의 사건이다. 이 하나님이 다시 종말에 하나님의 얼굴에 자기 영광의 빛을 드러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재창조의 사건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린도후서 3:1-4:6

 

유대인 그리스도인
Sinai Theophany
(모세)
옛언약의 사건
Torah
하나님의 영광
수건(가려짐)
Damacus Christophany
(바울)
새언약의 사자
Gospel
그리스도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된 형상⇨변화

 

 

그리스도의 영광된 형상이 변화되는 context에서 고후 4:4에서 그리고 고후 3:18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같이 쓰는 말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영광 가운데 나타나는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다22).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지칭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형상으로 변화되어가는 자들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이래서 형상 기독론과 형상 구원론이 발생을 했다. 형상 기독론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남의체험을 두고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두 단계로 논증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는 형상이라는 말이 종교사적으로 어떤 context에서 쓰이는가? 그래서 여기서 가설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신전 존재의 나타남의 visions을 그릴 때 형상이라는 말이 쓰인다. 그러니까 바울도 신약성경에서 독특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의 vision체험과 형상 기독론이 연결되었다는 가설을 얻은 뒤에 실제로 바울을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부르는 본문들을 관찰함으로서 거기에 vision의 체험의 요소들이 있느냐를 보니까 ‘하늘’‘영광’‘그리스도 얼굴에 반사한 영광’ 하는 것들은 ‘하늘로부터 영광 가운데 나타남,영과의 광채로 덮혀 나타난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을’우리에게 연상케 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한번도 자세히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고후3:18/고후4:4-6까지 또 빌3:20,21/고전15:49 등을 보면 자연히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을 연상하게 된다. 이처럼 세번이나 그로진 다메섹 도상의 사건이 그려져 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바울이 다메섹에 당도하기 전에 ‘하늘에 엄청난 빛이, 하나님 영광의 빛이 하늘로부터 내려쬐서 바울이 거꾸러지는 장면이다’그래서 그리스도-높임받은 주-를 본다. 그래서 누가가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에서 그리는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Christophany현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빛의 현상이다.

 

빛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다. 그래서 바울은 한번도 사도행전적으로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 Christophany현상을 그리지 않지만 반면에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신학적으로는 설명하다. 그 언어들-하늘,영광,빛,εικων-이 우리로 하여금 사도행전에서 그리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Christophany현상을 완벽하게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그러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는 깨달음을 알았다. 신학자 바울에게도 이 인식-다메섹 도상-이 무엇을 생각하게 했는가? 우리 성경에 의하면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창1:26). 그런데 아담이 계속 하나님 형상으로 머물렀느냐? 유대 랍비들에 의하면 두가지 사상이 있다. 하나는 아담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문장은 유대문서에 안나온다. 아담이 타락하므로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우리는 많이 쓰는데 유대인들은 이런 말을 않는다. 왜냐하면 G.Von Rad나 J.Barr같은 사람의 견해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창 1:26에 인간이 하나님 형상이다는 신학적인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주해함에 있어서 많은 학자들이 도대체 인간의 어떤 면이 하나님의 형상이냐?’를 가지고 많이 토론해왔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학자만이 아니라 랍비들도 엄청나게 토론했다. 또 영지주의자들도 엄청나게 토론했다23).

 

요즈음 조직신학에서는 주로 관계론적-인간이 하나님과 관계할 수있다는 관계,fellowship 으로서 인간을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상당히 추상화해서 생각한다. 그런데 G.Von Rad나 J.Barr같은 사람은 형상이라는 말이 도대체 어떻게 쓰이고 어느 상황에서 쓰이고 하는 것을 감안해서 이런 깊이까지도 형상이 의미를 하겠지만 적어도 하나님 형상이라는 개념 한 단면은 외형적인 모습이 비슷함이다. 지금가지 전통신학에서 이면을 무시해 왔는데 이것은 구약과 유대교 전승에 의해서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다.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원론적으로 생각해서 내적 본질은 중요하고 외적 형상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고정관념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형상도 없는 분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면 무슨 외적인 모습은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인간이 존재론적인 본질적인 무엇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추상적인 의미로만 생각하게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전체를 두고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그 중에 적어도 한 면은 외적인 모습에 비슷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초월자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할 때에 인간의 이성에 알 수 있게 계시한다. 그래야 계시가 일어난다.

 

이럴때 하나님이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외형적인 모습의 비슷함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 형상이라는 말의 한 요소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랍비들은 아담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러냐면 아담이 원래 사람 모습이었는데 범죄한 뒤 벌레같이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진 것은 아니다. 원래 사람이었는데 뱀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아담이 범죄한 후 6가지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①얼굴의 광채-하나님 영광을 반사하는 자-을 잃어버려서 추남이 되었다. 하나님과 굉장히 비슷했는데 이제 조금 비슷해졌다.

②키가 줄어 들었다. 키가 엄청난게 장대여서 사방을 덮고 남을 정도로 키가 컸는데 이제는 조그만 해졌다.

 

③땅의 열매를 잃어버렸다. 땅의 소산이 풍부해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아무 결핍이 없이 살았는데 이제는 피땀흘려 농사해도 겨우 굶어죽을지 먹고 살지 모르는 상황이다.

 

④나무 열매를 잃어버렸다. 포도 한송이가 그때는 장정 열대명이 들어도 못들었는데 이제는 조그만해졌다. 그래서 배고프게 되었다.

 

⑤하늘의 별(광채)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암흑과 혼돈의 세계에 살게 되었다. 빛을 잃어버렸다. 무질서와 암흑과 혼돈이 되어 버렸다.

 

⑥영생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잃어버렸다. 여섯가지를 잃어버렸다고 하면서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인간이 하나님 형상됨을 말한다. 가령 창5:3-범죄 이후-에도 아담과 그의 자손 셋의 하나님됨을 천명한다. 유대 랍비들은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학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하나님 형상됨에 인간의 존엄성(dignity)-가치-을 근거하고 도덕을 근거했다. 그래서 인간이 서로에게 상해-죽이다,살인-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 형상을 헤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계속해서 하나님 형상임을 천명했다. 이것에 근거해서 인간의 가치와 도덕성을 천명했다. 이 두가지 사실이 바울에게도 그래도 나타난다.

 

가령 고전11장에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아라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한다. 그래서 랍비들도 마찬가지로 바울도 인간이 계속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롬3:21 ‘범죄해서 하나님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하나님 영광은 하나님 형상과 거의 동의어이다. 아담이 잃어버린 것이 하나님 영광이고 얼굴의 광채이고 키가 줄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M.Smith-유대 신학자-는 ‘정확히 말하면-유대 랍비들의 견해-아담이 범죄하므로 하나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형상이 굉장히 줄어든 상태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형상됨이 완전히 부정되지-인간이 하나님 형상 됨이 완전히 부정되버리면 하나님과 fellowship도 못한다-않지만 그 관계가 굉장히 약화되고-아담의 하나님 형상됨이 약화되고-줄어들었다고 보았다고 해야할 것이다. 여섯가지 잃어버렸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랍비들이 말한대로 아담이 하나님의 광채를 잃어버렸다고 했듯이 바울도 우리 인간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하지 형상(전체)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 신학에서 Endzeit-종말,구원의 시대-는 태초의 회복-Urzeit-이다라는 역사관에 있어서 기본원칙-유대 신학에서는 항상 자기들의 역사 속에서 구원의 체험-에 따라 항상 태초의 완전한 상태와 견주어서 생각했다. 그래서 유대 신학에 있어서 구원의 사건은 출애굽 사건이다. 이 때의 Exdus라는 말은 애굽에서 도망해서 홍해 건너는데 까지만 아니고 가나안의 정착까지 전체의 사건을 출애굽사건이라고 한다. 그때에 Sinai 광야에서 모세가 하ㅏ님의 영광을 보았다. 시내광야에서 율법이 계시되고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또 그때 시내에서 만나를 먹고 영적인 물-브리바의 바위에서-을 공급받았다. 이럼 체험들을 태초에 아담의 낙원회복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재창조로 보았다. 출애굽의 구원의 체험을 태초에 아담의 창조와 견주어서 재창조라는 범주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때 나타난 하나님 영광이 창조 때의 하나님의 빛이 나타남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암흑과 혼돈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빛을 비췬다. 그때 먹었던 만나가 아담의 타락으로 궁핍해진다. 또 그때 마셨던 물-생명수-생명력을 샘솟게 한다. 그래서 아담이 잃어버렸던 영생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출애굽해서 이런 것을 체험한 이들이 금 송아지를 섬겼다. 그래서 아담과 똑같은 짓을 했다.

그래가지고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다 잃어버렸다. 그래서 종말에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18:15에 근거-로 제2의 출애굽을 한다. 이것이 종말의 구원이다. 그러니까 종말의 첫 구원은 출애굽과 같고 그것은 그러므로 출애굽 당시에 모든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것이고 만나와 물을 다시 회복하고 이것은 즉 태초의 풍요로움을 회복하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회복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때 시온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계시되는 것으로 유대신학에서는 생각했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자-모세-는 자연히 아담과 비교,대죠된다. 그러면 이 때 메시야도 자연히 모세와 비교,대조되고 그렇게 하여 아담과 비교 대조된다. 그래서 람비문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한 랍비가 하루는 아담과 모세의 무덤에 갔다. 그랬더니 둘이 열심히 논쟁을 하고 있었다. 누가 더 위대하냐? 아담이 더 위대하다고 하면서 내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모세가 말하기를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 형상에 머무르지 못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한 내가 더 위대하다고 하면서 둘이 싸웠다”

 

이 이야기는 위와 같은 것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즉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 영광,하나님 형상을 모세가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모세 세대-금송아지 섬김-가 또 잃어버렸다. 그래서 이제 종말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 메시야가 다시 나와서 구원의 삶을 삶으로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역사관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첫 구원의 사건을 높이 평가하면 평가할수록 아담에 의해서 잃어버린 것을 더 나쁘게 평가해버릴 것이다. 종말에 구원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면 할 수록 태초 아담의 상실을 더 나쁘게 말할 것이다. 이러한 context에서 간혹 유대 신학에서는 차마 아담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는 못하나 이런 context-당신 보다 내가 더 위대하다. 왜? 당신은 형상을 잃어버렸지만 나는 그것을 회복했다-에서는 거의 이런 말을 할 정도가 된다. 마찬가지로 종말에 구원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아담을 더 나쁘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아담이 하나님 영광을 잃어버리고 형상도 거의 잃어버렸다. 그래서 종말에 메시야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난다.

 

바울이 이와 같은 신학의 후예이다. 이러한 역사관,구원관,종말관을 가진 바울에게-고후4:6/고후3:18-반영된 체험-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남-을 했다. 이러한 신학적인 배경에서 바울은 예수가 아담이 잃어버렸던 영광과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 형상을 회복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고 예수의 마지막 아담의 역할을 대초에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대조하기도 한다. 여기서 비교는 인류의 조상이다. 아담은 첫 창조에서 인류의 조상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재창조에서 인류의 조상이다. 둘다 하나님 형상이다. 그리고 둘다 조상으로서 Stamvater-후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는 가지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둥지이다. 이런 점에서 아담과 예수가 비교되고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대조되는 아담을 하나님 형상(영광)을 불순종으로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후손들을 불순종-범죄함-에 동참케 해서 그들을 죄와 죽임의 권세 아래 있게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 그의 순종으로 아담의 죄를 속죄해서 그와 연합하는 자들을 구속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한다. 이것이 롬5:12ff에 아담이 마지막 아담의 비교,대조이다. 또 고전 15장에 나오는 아담과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의 비교,대조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으로 체험하고 이 체험은 곧 바울에게 창1:26에 비추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과 비교, 대조하게 하고 이와 같은 유대교의 종말론,역사 이해에 비추어서 아담 기독론,아담구원론을 이루게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에게서만 형상 기독론,형상구원론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혜기독론의 일부 또한 여기에서 나온다. 지혜 문학에서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다. 그래서 지혜기독론은 일부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라는 인식에서 나온다. 아담기독론은 예수의 인성을 주로 확인한다. 지혜기독론은 예수의 하나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자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로 천명한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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