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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신학(김세윤)

바울신학 제13강 (김세윤 교수)

by 【고동엽】 2021. 11. 12.

바울신학 제13강

 

서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바울의 기독론을 설명하고 그 다음에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 마지막 아담이다. 하나님의 지혜이다 등의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론을 좀 살펴보고 그 다음에는 바울의 구원론으로 들어가서 구원론의 여려 개념들 또는 그림 언어들 등을 차례로 살펴보고 또 시간이 허락하면 구원론 전에 인간론을 한 두 시간하고 구원론을 하고 또 시간이 허락하면 바울의 교회론을 다루려고 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

 

참고서적

M.Hengel “The Son of God”

I.H.Marshall “Origins of NT Christology”

E.Schweiber “ο υιος του Θεου TDNT Ⅷ”

O.Cullmann “NT Christology” 하나님의 아들 장 참조

J.D.G.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pp12-64

 

1.배경

 

1)헬라적 배경

 

종교사학파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신앙고백은 헬라 사상에서 왔다. 헬라 사상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신과 인간)의 차이가 크지 않아서 인간 중에서 조금 힘이 세고 인간중에 탁월하면 그래서 가령 이적을 행한다든지 또는 훌륭한 철학자라든지 그래서 많은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칭호했다. 그리고 신격화했다. 이러한 전통에서 예수가 지혜로운 가르침을 하고 특히 이적을 베풀고 그러기 때문에 가령 마가복음을 필두로 해서 헬라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유행했던 학설이 헬라 세계에서는 지혜가 많은 철학자든가 또는 이적을 베푸는 즉 영적 힘이 있는 자를 신적인 인간(Θειος ανηρ)이라고 했다. 그래서 신격화 했다. 그런데 마가복음이 이렇게 지혜로운 가르침을 하고 특히 이적을 행하는 예수를 헬라 사상의 Θειος ανηρ 어의 카테고리로 묘사를 하고 그래서 막 1:1에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마귀들에 의해 선포되기도 하고 그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마가복음 마지막에 백부장이 심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이런 식으로 마가복음이 예수를 헬라 사상의 이적 베푸는 자로서 Θειος ανηρ로 그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했고 마가복음의 그림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이 발생하게 된 아주 좋은 모범을 보여준다고 하는 것이 종교사학파들의 전제였다.

 

M.Hengel의 책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TDNT Kittel 사전에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헬라어 부분을 쓴 Von Martitz가 헬라 문서들을 열심히 뒤져 보았지만 인간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흔치 않다.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 자체가 아주 드물게 나온다. 그리고 Θειος ανηρ라는 말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이것은 최근에 Bieler라는 사람이 지어낸 문구라는 것이다. 그래서 헬라어의 Θειος ανηρ의 사상 여기서 이런 자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가설이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M.Hengel의 ‘신비 종교’라든지 또 영지주의 신화에 대한 자세한 survey도 마찬가지 결론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한마디로 헬라 사상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에 대한 배경을 찾을 수가 없다. 종교사학파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이 헬라 사상에서 나왔다고 주장을 하면 서 바로 바울이나 요한이 예수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고백함으로서 종말에 올 인자 또는 그 사람의 아들에 관한 기대를 중심으로 했던 원래 예루살렘에 초대교회의 신앙을 헬라식으로 탈부꿈 시켰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은 ‘예수가 주다’는 신앙고백과 함께 기독교의 헬라화의 한 현상으로 보았다. 그런에 앞애서 말한바와 같이 헬라 사상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상이 흔치 않다. 그래서 이것은 배경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또 하나 관찰해 보아야 할 현상은 바울 서신에 있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칭호가 주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어떤 편지냐면 유대교와 논쟁을 담은 편지이다. 반면에 헬라 사상과 논쟁을 담은 편지인 고린도 서신들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만큼 그렇게 자주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유대교와의 논쟁에 있어서 ‘예수가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사상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상이 헬라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고린도전,후서에 더 훨씬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유대교와 논쟁할 대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상이 헬라교에서 나왔다면 유대인과 싸우면서 예수가 자꾸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면 그것이 훌륭한 논쟁이 되겠는가? 유대교 쪽에서 그러니까 틀렸다고 그럴 것이다(헬라 사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반면에 고린도서에 있어서는 너희들의 옛종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있고 그러는데 그런게 다 아니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고린도서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그런데 비교적 드물다). 또 복음서도 마찬가지이다. 헬라적 성격을 더 많이 띤 누가복음 보다는 유대교적 성격을 더 많이 띤 마태복음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가 더 많이 나온다. 이것은 무슨 가능성을 제시해주냐면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칭호가 헬라 배경보다 유대교와 관계있다는 가설을 가능케 한다.

 

2)구약의 배경

 

그래서 구약과 유대교를 살펴봄으로서 거기에 배경이 이루어졌나를 본다. 구약에 있어서는 세가지 종류의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부여된다.

 

첫째는 천사들

 

천사들은 하나님의 하늘에 있어서 궁정의 신하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운다. 그래서 창세기 6장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인간의 딸들과 결혼해서 이상한 존재들을 낳게 되었다’

 

둘째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집합명사로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개별화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언약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노릇해주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의존해서 살 수 있는 그런 관계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 수 있는 그런 관계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 수 있는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 아버지의 자원으로 상속받아 사는 아들의 관계로 비유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 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한다.

 

가장 중요한 구절은 출4:22-23 ‘이스라엘이 나의 첫 아들(맏아들)이다’

 

세번째 이스라엘의 왕에게 특별한 관계에 있는 왕으로 나타나는데 왕은 두 가지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과 같다. 하나는 하나님 대신에 그의 백성을 통치하는 자로서 하나님 아들이고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서 보나 인간편에서 보나 특별한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왕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고대문화나 종교에서나 어디에나 다 있던 사상이다. 우리 한국에도 단군 신화가 그런 것이다 중국의 천자사상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천황사상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고대 근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애굽에서도 왕을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그랬고 바벨로니아에서도 왕을 ‘신의 아들’.

 

이것은 통치권의 정당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집트에서는 왕이 신의 아들이다 했을 때는 일본인들과 비슷하게 진짜로 육신적으로 신에게서 탄생된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바벨로니아에서는 육신적인 생성보다는 하나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림으로 보았는데 구약에 있어서는 왕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함은 바벨론 사상과 비슷하다. 우리 단군 신화도 애굽쪽에 가깝다. 신의 육신적인 후사로 나타나 있다.

 

왕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함에 있어서 특별히 유의해야 할 것은 이른바 나단의 예언(삼하7:12-16)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늙은 다윗에게 보내 가지고 성전을 지을려고 애썼던 다윗에게 너는 성전 짓지 말라고 하면서 이와같은 약속을 준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나단의 약속,나단의 신탁’이라고 한다. 그 내용인 즉 ‘다윗의 수가 다하면 (그의 생명이 다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다윗의 아들 하나를 택해서 다윗의 왕위에 앉힌다는 것이다. 그래가지고 다윗 가문을 세우겠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 아들로 만들겠다(나의 아들로). 그로 하여금 나를 위해서 집을 짓게 하겠다’는 약속을 준 것이다. 즉 나단의 신탁은 다윗왕조를 세우는 것이다. 다윗이 이제 사울을 쓰러뜨리고 왕이 된 것인데 그 다음부터는 다윗 가문에서 왕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다윗의 씨로서 다윗의 왕위를 잇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택하여서 왕으로 세운 합법적인 정통성있는 왕이라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그를 나의 아들 만들겠다. 왜냐하면 왕이 하나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로하여금 나를 위해서 성전(집)을 짓도록 하겠다. 그래서 이것이 다윗 왕조를 세우는 형식이다. 보는바와 같이 다윗의 씨가 곧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유대교에 있어서 메시야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이다.

 

나단의 신탁은 솔로몬에 의해서 일단 성취가 되었으나 구약의 여러 곳에서 누차 재해석이 되어가지고 메시야적으로 재해석이 된다. 시89:4f,27f/대상 17:13/22:20/28:6/사9:5 등등 예레미야서 등에서 이 신탁이 메시야적으로 재해석이 되어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왕위를 재건할 사람에 대한 기대의 근본으로 사용된다. 특히 슥4:6-10/6:12-13 까지를 보면 바빌로니아에서 포로로 잡혀 갔다고 되돌아 오는 유대인들 가운데 그 지도자가 다윗 가문의 마지막 왕자였던 스룹바벨이었다.

 

그래서 고레스다 유대인들을 바빌로니아에서 팔레스틴으로 귀환하여 새롭게 나라를 세우도록 허락하므로 유대인들은 다윗 가문의 마지막 왕자인 스룹바벨이 다윗 왕조를 재건해서 왕이 되어가지고 하나님 아들로서 다윗 왕조의 태평성대를 다시 열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스룹바벨을 주심으로 메시야 사상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것도 그럴 것이 스룹바벨이 바로 바빌로니아에서 돌아오는 사람들과 더불어 성전 짓는 일을 했다. 그러니까 나단의 예언이 다윗의 아들(씨)이 성전을 짓는다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들은 다윗 왕조가 재건되는 줄로 알았다. 다윗의 시 스룹바벨이 다윗을 왕위에 앉고 하나님 아들로서 선포되고 성전을 짓고 하면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망했던 유다 왕조가 다시 독립국가가 되느구나 하는 등이ㅡ 메시야 사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렇게 하여 나단의 신탁은 구약과 유대교에 있어서 다윗의 아들, 왕,메시야 사상에 가장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

 

또 시2편과 110편을 보면 나단의 신탁에 의거해서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왕위를 잇는 대관식의 의식이 행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왕위에 오르는 자로 하나님 아들로 선포한다. 그래서 가령 시 2:7에 보면 “내가 오늘 너를 낳아싿”고 한다.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왕위에 오르는 자로 유다의 왕을,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로서 자기 백성을 합법적으로 정통성을 가지고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의 세례 때 바로 이 말이 울려퍼졌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나단이 신탁에 근거하고 있다. 다웃의 아들로서 다윗의 왕위에 오르는 자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로 낳은것으로 선언한다. 시 110편도 마찬가지이다. ‘내 우편에 앉으라’ 하나님 우편에 등극하는 것이다.

 

3)유대교의 배경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의 구약적 사용방법이 유대교에서도 계속되나 천사들을 하나님이 아들로 부르는 경향이 조금 약화된다. 그러나 계속한다. 가령 philo의 글 같은데 보면 계속 나온다. 그런데 유대교에 있어서 두가지의 중요한 전승사적 발전이 이루어진다.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 또는 이 세상 사이의 중개자에 대한 사상이 발달하고 신 개념에 있어서 이른바 binitarianism(이위 일체론)적인 신 개념이 발전하고 그것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신격화의 전통이 발달한다. 그것이 두가지 갈래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지혜문서 그리고 또 하나는 문시 문서에서 이루어진다. 가령 에디오피아 에녹서 같은데는 묵시문서라로도 할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또 지혜문서적인 요소가 많다. 항상 딱 뗄수가 있는게 아니다.

 

①지혜문서

 

지혜문서에 보면 하나님의 한 속성이라고 볼 수 있는 지혜가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하나의 물체와 같은 주체성을 띄게 된다. 이런 것을 hypostatized(헬라말로 견고한 것)했다고 한다.

 

이렇게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형체와 시공을 차지하지 않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시공을 차지하는 지혜를 물체화 한다. 그리고 인격화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 하나의 인격체로 상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가지고 이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제일 먼저 창조된 하나님이 자려로 사실은 하나님이 딸로 인식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사업에 있어서 일군(agent) 노릇함으로 상상이 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자기의 팔 즉 지혜를 일군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지혜의 발자국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서가 있고 조화가 있고 합리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들에게 계시하는데 지혜를 통해서 계시한다고 한다.

 

지혜가 인간들이 머리 속에 들어가서 인간들로 하여금 이성을 갖게 해서 하나님을 알아보게 한다. 하나님을 인식하게 한다. 그래서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 수단으로 본다. 또 하나님이 인간들을 구원하는데 지혜를 통해서 한다. 인간들의 머리 속에 들어가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뜻을 헤아릴 수 있도록 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해서 구원을 받도록 한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일군 노릇한 것으로 상상한다. 이런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솔로몬의 지혜라는 책-알렉산드리아에서 주전 160년쯤 쓰여짐-에서 9장 4절 10절에 보면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의 어좌에 하나님과 같이 앉아 있다.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가지고 시온에 내려온다.

 

시락서 24:1-12 “하나님의 지혜가 어디에 정착을 할꼬” 하고 방황했다가 가장 열려진 하나님을 따르려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내려오신다.(시온) 그래서 모세 율법에 담긴다. 모세 율법이 하나님의 지혜를 담은 것이다. 그래서 모세 율법과 하나님의 지혜가 동일시 된다(시락서 24장). 왜 그러냐면 모세 율법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유대인들이 모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다.

 

그리고 모세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계시와 구원의 수단인 지혜가 모세 율법에 담겨 있다. 그래서 모세 율법을 지혜를 담는 그릇으로 보고 율법과 지혜를 하나로 본 것이다.

 

지혜가 하나님의 일군이다 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딸이라고 불리운다. 가령 philo는 그의 여러책에서 ‘하나님의 딸’이라고 그런다. 잠언 8:30에도 딸이라고 나온다. 지혜가 하나님의 딸이라고 나오는데 특별히 선재하는 딸이다. 이 말은 태초(우주가 창조되기 전에)에 이미 존재함을 말한다.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는다는 말이다. 왜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딸이라고 하느냐면 지혜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חמקה(호크마)도 그렇고 헬라어의 σοφια도 다 여성 명사이다.

 

그러니까 지혜를 여성명사를 차마 아들이라고 못해서 딸이라고 그런 것이다. 반면에 지혜와 거의 동의어인 λογος는 남성 명사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본다. 하나님이 말씀,하나님의 지혜라고 한다.

 

λογος도 선재하고 하나님 아들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는다. 보냄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일군 노릇을 한다는 말이다.

 

또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므로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사(εικων) 이라 한다. 지혜가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래서 지혜를 보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이말은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지혜 신학이 발달을 한다. 그런데 지혜신학의 발달은 동시에 하나님의 초월 사상의 발달과 더불어 일어난다. 이것은 하나님이 초월해서 하나님 위에 계신다고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직접 이 세상을 빚으시고 이 세상에 자기를 계시하시고 이 세상 역사에 직접 개입하셔서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시고 이 세상에 자기를 계시하시고 이 세상의 역사를 다스리셔서 우리를 구원한 것은 사실인데 그것을 그냥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의 초월 사상이 약해지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는 즉 하나님은 내재하신 것만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초월해야 한다. 초월해야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주보다 더 커야(초월) 고장난 우주를 고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주가 비슷하거나 똑같으면 어떻게 고장난 우주를 고치느냐 하고 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주를 고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하려면 하나님이 초월하시고 해야 한다.

 

즉 초월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저 하늘위에 꼭대기 혼자 앉아 초월하기만 하면 구원이 일어나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동시에 내재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분이 초월하셔야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분이 또 우주속에 관심을 갖고 역사에 개입하시고 내재하시는 분이어야 구원이 실제로 일어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동시에 강조된다. 그래서 이것-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펴현할려고 하는 언어 수단이 바로 지혜신학(지혜사상)이다. 하나님이 초월하시기 때문에 우주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초월하신 분이 어떻게 세상에 오시고 세상 역사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직접 구원하시냐면 그의 딸 즉 지혜를 통해서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천명하기 우해서 지혜 사상이 발전했다. 이것이 하나의 언어 수단이다.

 

이런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의 언어로 말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신학언어를 대할때마다 말하려는 의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나를 헤아려야 한다. 말하려는 의도(aussageabsicht)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지혜가 초월 하나님과 이 세상과의 중보자로 상정이 되어 있다. 초월하신 하나님이 세상과 역사 속에 내재하심을 천명하고자 하는 하나의 신학언어적 수단으로 지혜사상이 발달하였다.

 

②묵시문서

 

묵시문서에 있어서는 앞에 말한 바와 같이 binitarianism(이위일체론)과 이스라엘의 신격화 사상(apotueosis of Israel)이 발달하는데 이것에 대한 context는 하나님의 출현에 대한 vision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출현을 보는 theophany-vision tradition에서 나타난다. 에스겔 1:26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םדא תומד הא רמכ)으로 전차(הבכרמ)-불이 활활 타오르는 전차-위에 하나님의 어좌가 놓여 있고 거기에 하나님 나타나는데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에스겔이 보니까 사람과 비슷한 겉모양으로 나타났다. םדא תימד הארכ은 창1:26을 뒤집은 말이다. 거기에 תומד המלצב으로 되어 있다.

 

즉 “하나님과 비슷함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그러니까 창 1:26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비슷한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겔 1:26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비슷함과 형상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유명한 구약학자 G.Von Rad라든가 또는 jwmes Barr같은 사람들은 모세오경의 문서설을 받으들이는 사람들에 의하면 창1:26은 소위‘제사장 문서(P)'라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들은 창1:26의 그 위대한 신학적인 천명-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음-은 제사장 전통에 있어서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보는 전통에서 나왔다고 그런다. 대개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성전에 나타난다. 왜 그러냐면 이 땅위에 하나님이 거처지가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성소에 하나님의 어좌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기에 앉아 계신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도 이사야 6장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는 장면이나온다. 그래서 제사장 출신인 이사야나 에스겔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타날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나타나서 스스로 계시할 때 인간과 비슷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거기가 받은계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형상에 있어서의 비슷함이다. 이처럼 겔 1:26에 쓰이는데 겔1:28쯤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과 비슷하게 나타났다고 하는데서 발전을 해가지고 하나님의 영광(הוהי דובכ)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가지고 에스셀을 쭉 읽어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실체를 갖게 되는 인상을 받는다. 앞의 하나님의 지혜와 실체를 같는다. 하나님이 지혜와 같이 즉 hypostatized그런다. 그리고 인격화되고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고 시공을 차지하고 인격화되는 하나의 실체로 상상이 된다고 그랬는데 마찬가지로 에스겔내에서 하나님 영광이 하나님을 드러내는-하나님을 계시-하나님 대신 보여주는 실체로 나타난다. 그래서 보통 하나님의 영광을 빛으로 선지자들에 의해서 체험된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도 하나님의 빛이 내리 쬐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래서 예스겔에서 영광이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 주는 실체로 상상이 된다.

 

단7:9-14 이 본문은 다니엘이 환상을 보는 것이다. 처음에 흉안한 제 짐승이 차례로 일어나서 서로를 잡아 먹고 하나님 백성을 짓밟는 것이 나타난다. 이 네 짐승들을 네 이방 왕조를 나타낸다. 9절에 보면 “왕좌-우리말에는 단수 복수가 없는데 여기에서는 복수이다-들이 놓이고 그 왕좌위에 백발이 성성한 옛적부터 계신이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아주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책이 펴지고 즉 대 심판이 벌어진다. 그래가지고 하나님 백성을 짓밟는 흉악 무도한 자가 불에 태워죽는 대 심판이 벌어지고 하는 내용이 9절에서 12절까지의 내용이다. 13절에 “또 내가 보니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옛적부터 계신이에게 나아간다.” 그래서 14절에 보면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았다. 즉 왕권을 받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를 받았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 우편에 왕으로 등극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받았다. 단7:9이하도 에스겔서 1장과 마찬가지로 theophany이다. 그런데 단 7:9이하는 신적인 존재가 둘이다. 옛적부터 계신이하고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다.

 

에스겔서 1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같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것이 어덯게 분리되기 시작하냐면 하나님 영광이 사람과 같이 나타났다. 그런데 다니엘 7장에서는 하나님이 마치 백발이 성성한 노일같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또 한사람-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셈족 언어의 숙어로서 그냥 한 사람이라는 소리-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셈족 언어의 숙어로서 그냥 한 사람이라는 소리-과 같은 형상을 한 또 하나의 존재가 구름을 타고-구약에서는 구름타고 오는 것은 theophany 현상에서만 나타남-왔다.

 

그러니까 두번째 신적인 존재인데 이 존재가 사람과 같은 형상을 한 것처럼 생겼다. 그가 하나님게 나아가서 왕좌들이 놓인 그곳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신 행사하는 자로 등극하는 장면이다. 그러면 노인같은 하나님과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의 관계를 구약적인 언어로는 부자-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처럼 다니엘서 7장에서 제2의 신적인 존재,theophany 현상에 하나님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행사하는 제2의 신적인 존재가 상정이 되었다.

 

그런데 다니엘서 7장과 에스겔서 1장을 언어적으로 자세히 분석해 보면 아주 유사점이 많다. 여기서 전승사적으로 발전했다고 본다. 그래서 곧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에 상응한다. 이것이 발달한 모습이다. 전승사의 좀 더 발달한 모습은 랍비문서 중 바빌로니아판 탈무드 Hagiga라는 문서가 있다. 가령 b(Bt)__Hagiga,b__Shab,j__hagiga 이런 말이 나오는데 앞에 b 약자가 나오면 b 약자는 바빌로니아판 탈무이라는 말이다. 바빌로니아판 탈무에 shab라는 책자,Hagaga라는 책자이고 j는 예루살렘 Hagiga라고 한다. 탈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조금 길다. 예루살렘판 탄무드를 또 팔레스틴판 탄무드라고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P라고도 쓰기도 하고 PT라고도 한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도 때로는 Bt라고도 한다. 하여간 바빌로니아 탈무드 Hagiga라는 책 15장에 보면 AD2세기 초에 당시유명한 랍비 세사람-아키바,엘라이자 벤 아브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세 랍비가 하늘에 가서 궁정의 여러곳을 구경하고 관광을 하다가 제일 마지막에 제일 높은 하늘에 하나님의 어좌가 있는 곳에까지 갔다. 가서 숨죽이고 있는데 엘라이자 벤 아브야가 “하늘에 두분이 계시는구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것을 소위 ben abuya 의 Two Powers(두 이단) 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 한 힘(Power)-하나님에 대한 호칭-만이 있다.

 

유대교는 전통적으로 아주 극단적인 절대 유일신론이다. 그런데 하늘에 두분이 계신다고 부르짖은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단이라고 파문이 되었다. 즉 유일신론을 부정했다. 그런데 또 어떤 문서가 있냐면 제3 에녹서라는 책이 있는데 이것은 Beb Enoch 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 보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AD 4 세기 이후에야 글로 완성이 되어 쓰여진 책이다. 그 전승은 상당히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본다. 거기에 “Metatron” 이라는 존재가 나타나는데 제 3에녹은 주로 신비문서이다. 그래서 주로 하늘의 궁정에 관한 것이다. 또 하나님 나타남에 보는 것에 관한 것이다. Hagiga도 마차가지이다.

 

그런데 거기에 Metatron 이라는 존재가 나타나는데 Metatron이 누구냐면 야웨 어좌 뒤에 앉는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권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군 노릇을 한다. 그래서 Metatron을 소야웨라고 부른다.

 

tron은 헬라어의 θρονος 로서 영어로는 throne(왕좌)라는말이다. 하나님의 어좌 뒤에 앉는 자이다.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일군으로 하나님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소야웨라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출현을 보고 세계를 보는 묵시문학에서 두번째 신적인 존재의 전승이 점차 발달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스겔 1장에서부터 시작해서 다니엘 7장으로 또 앞의 Hagiga 이야기로 제 3에녹서에 있어서 Metatron으로 점차 발달한다. 이런 현상을 묵시문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출현의 vision전승에서 하나님이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와 나타나는 즉 하나님이 대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 일군 노릇하는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와 같이 나타남의 전승을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이위일체론의 발달이라고 한다. 이때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분신과 같이 나타나는 두번째의 존재가 하나님 아들이다. 즉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다. 이런 전승이 발달을 한다.

 

그런데 이것도 지혜신하고가 마찬가지로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함을 천명하고자 하는 언어 수단이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단7:9-28가지 보면 특히 13-14에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 우편의 왕좌에 등극해서 하나님의 왕권(하나님 나라)을 받아서 통치하는 것을 본 것이 다니엘의 환상이다. 그래서 단 7:15부터 읽어가면 다니엘이 이것이 무슨 뜻인가 걱정한다. 그러니까 18,22,28절에 보면 천사가 와서 해석을 해준다. 뭐라고 해석해 주냐면 이 환상은 “종말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고 해석을 해준다. 단 7:13-14은 vision이고 단 7:18f은 해석이다. 곧 마지막까지 남는 종말의 하나님의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다니엘의 환상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다. 구원의 계획은 이런 vision으로 계시되었는데 그 뜻은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 그래서 하나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종말에 대한 구원의 계획으로서 다니엘에게 계시된다. 이런 현상을 두고 앞에서 말한 것 같이 Apothiosis of Israel 이라고 한다. 즉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왕권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그래서 신과 같이된다. 즉 인간이 신이 된다는 것이다. 곧 종말에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왕권을 받고 하나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은 출 4:22f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하나님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에 의존해서 사는 자들이다. 아들일고 한 말의 가장 기본의미는 ‘상속자’라는 말이다. 아들이 나타내는 그림의 가치는 상속자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의미이다. 하나니의 부요함을 상속받아 사는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성을-영혼을,지혜를,능력을 -상속받아 사는 자라는 뜻이다. 이것이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숙명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현실은지금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아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영원,지혜,능력,사랑-속에 살기는 커녕 계속 외세에 짓밟히는 상황읻.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제이다.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 계시한 것은 “지금 현재는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하는 이방 민족에게 짓밟히고 있지만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숙명을 궁극적으로 달성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들됨이 실제로 나타나게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요함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받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 Apotheosis 라고 한다. 이것이 묵시문학에서 구원의 궁극적인 모습니다. 묵시문학에서는 구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됨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성 안에 있는 한 이것은 구원이 아니다. 인간의 한계성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 같이 됨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에게로 올림-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가 점차 이렇게 묵시문학에서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을 일군 노릇하는 자로 쓰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의 종말에 있어서의 궁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전승의 선상에서 창 28;12에 나오는 야곱의 벧엘에서의 꿈 이야기에 대한 랍비들의 주석이 흥미롭다. 창 28:12에 나오는 야곱의 벧엘에서 꿈 이야기는 유대 랍비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야곱에 벧엘에서 잠자다가 꿈에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자기 몸에 내려와 가지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낟. 이것에 대한 랍비들의 주석이 아주 황당무게하다. 이 이야기는 여러 랍비책에 다 나온다. 구약의 아람어판인 탈굼-네오피트,후드 죠나판,옹겔로스-의 모든 판에 장황하게 설명되어 나온다. 내용을 살펴보면 야곱이 에서한테 쫓겨 가지고 아비집을 떠나서 지금 어머니 고향으로 도망가는 중에 벧엘에서 잡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아비집을 떠날 때부터 천사들이 야곱을 호위한다. 그러다가 벧엘에서 잠이 들엇다.

 

그러니까 야곱을 호위했던 천사들이 야곱을 쳐다보고는 사다리를 하늘에 놓고는 빨리 올라가서 하늘에 있는 자기 동료 천사들에게 “야 너희들 야곱을 볼려면 빨리 내로오라”고 했다. 왜 그러냐면 하늘에 가장 높은 곳-하나님 어좌-에 야곱의 형상(본상)이 앉아 있기 때문이다. 땅에 있는 야곱은 모조품이다. 그런데 야곱이 어떤 판에는 하나님 어좌에 앉이 있다고도 하고 어떤 판은 하나님 어좌에 야곱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하도 거룩해가지고 천사들이 감히 못쳐다보게 하나님께서 만들었다. 그래서 부복하고 천사들이 하나님 어좌에 앉아있는 야곱이 어떻게 생겼나하고 아주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마침 동료 천사중 야곱을 호위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야곱이 걸어다닐 때는 차마 못 쳐다보고 야곱이 잠잘 때 얼른 훔쳐보고 궁금증이 풀리니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너희들 하나님 어좌에 앉아 있는 야곱의 형상을 볼려면 빨리 내려와서 지금 잠자고 있는 야곱을 보면 안다고 하는 내용이다’

 

야곱의 꿈 이야기를 랍비들이 이렇게 주석했다. 이것이 바로 요1:51에 나오는 말이다. 거기에서 예수는 나다나엘에게 약속을 하다. 네가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다.

 

여기서 예수의 말씀에 있어서는 야곱을 인자로 대처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예수께서 자기를 통하여 이 이야기가 성취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무슨 뜻이냐? 앞의 다니엘 이야기와 똑같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들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상속받는 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당연히 하나님 세상에 속하고 하나님 어좌에 높인임받는 것이 그의 숙명이다. 하나님 어좌에 높임받아서 신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의 숙명이다.

 

그런데 야곱의 지상에서 실제는 에서에게 열심히 쫓기는 존재이다. 야곱은 이스라엘인데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야곱에 함축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지금 이방 민족에게 짓밟히는 상황이 그의 조상 야곱이 쫓기는 상황과 똑같은 것이다. 그런데 야곱-이스라엘-의 진정한 숙명은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 하나님 어좌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영광에 부요함에 참여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랍비들의 창 28:12-야곱의 벧엘의 꿈에 대한 주석-은 이스라엘의 숙명에 대한 식학적인 표현이다. 동시에 자기 민족에 종말론적인 구원에 대한 소망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 어좌에 높임받아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았다.

 

신적인 존재들이 되나. 이것을 예수께서 요 1:51에서 바로 이것이 자기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야곱-이스라엘-이 그 사람의 아들과 대치된다. 단 7장에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symbols이라고 한다. (단7:14-18 이하에서).단 7:13-14의 성취로 오신 예수가 인자로서 또는 그 사람의 아들로서 새로운 종말의 하나님 조상으로서 옛야곱-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은 불신앙으로 끝난다. 그런데 예수가 다니엘서에 예언된 ‘그 사람의 아들로서 종말에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음,하나님 나라를 받음의 역사를 이룬다’ 하는 것이 나다나엘에게 주는 약속이다.

 

나다나엘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는 예수의 약속이다. 지금까지 유대교에 있어서 하나님 아들에 관한 전승사적 발달을 보았는데 하나는 지혜문서에 있어서의 지혜신학의 발달-하나님 아들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딸-과 또 하나는 묵시문학에 있어서의 이위일체론적인 발ㄷ라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의 대표로서의 신적인 존재가 하나님 어좌에 등극함.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백성에 하나님 아들로서의 하나님과 같이 됨. 즉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예해서 곧 하나님 왕권을 받아서 하나님과 같이 됨이라는 종말에 구원의 소망을 본 것이다. 이런 것이 신약에 있어서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아들들 된다는 믿음이 배경이다.

 

예수가 하나님 앋르이라는기독론적인 신앙고백은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아들들 된다-입양 양자-는 구원론과 직결된다는 것이 바로 지금까지 배경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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