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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의 7가지 주제들

by 【고동엽】 2021. 11. 10.
★ 조직신학의 7가지 주제들


조직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며, 기독교 복음의 자세한 해설이다. 조직신학의 7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서 론--기독교 교리의 기초가 되는 성경에 관하여(신학의 개념, 역사, 방법)


1. 신학의 개념과 분야들

1-1. 신학의 개념

신학(神學, theology)은 말 그대로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학(學) 혹은 학문(science, 과학)이란 "체계적 연구에 의해 얻어진 사실들이나 원리들에 대한 지식" 즉 어떤 주제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학이란 하나님과 그의 진리들에 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엄격한 의미에서 신학은 조직신학을 가리킨다.

기독교 정통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진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인 성경에만 명확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라고 좀더 자세히 서술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신학을 단순히 신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신앙이나 종교 경험의 학으로 정의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관적 개념을 배격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객관적 성경 말씀에서만 찾는 것이 바른 태도이며 역사적 개신교회의 입장이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신학의 목적은] 성경의 사실들을 체계화하고 그 사실들이 내포하는 원리들이나 일반 진리들을 확증하는 것이다"고 했다(Charles Hodge, Systema- tic Theology, I, 18).

오늘날, 신학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학의 다섯 분야라고 말하는 구약신학, 신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등에 신학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정치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 소위 상황신학의 개념들이 유행하고 있고 심지어 통일신학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신학'은 어떤 특정 주제 혹은 분야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이라는 말의 정확한 용법은 아니다.

신학을 때로는 교의학(dogmatics) 혹은 교의신학(dogmatic theolo- gy)이라고도 한다. 교의학이란 교의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교의(敎義, dogma)라는 말은, 신학에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 진술을 가리킨다. 그것은 니케야 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과 같이 교회의 공식적 신조[신경]나 신앙고백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의란 교리(敎理, doctrine)와 구별된다. 교리란 단순히 하나님의 진리를 말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바른 교리는 진리와 같다. 그러나 교의는 교리보다 공식적이고 권위적인 진술이다.

로마 천주교회는 교의가 교회의 회의나 전통에서 나온다고 가르치고,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이 인간의 주관적 신앙이나 종교적 경험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지만, 역사적 개신교회는 교의가 오직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고 확신한다. 반틸은 바르게 말하기를, "교회의 신조들은 그 내용에 관한 한 성경 진리의 조직적 진술에 불과하다"고 했다(C. Van Til, Introduc- 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3).

이와 같이, 교의는 성경 진리의 체계적 진술이므로, 교의신학은 내용적으로 신학 혹은 조직신학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바빙크는 교의학을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학문적 체계"로 정의했고, 박형룡 박사는 "바른 교의신학은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는 바의 질서 있는 논술을 제출하기를 추구한다. . . . 교의학은, 즉, 성경 진리의 조직적 진술이다"고 말했다(교의신학, 1권, 21, 44쪽). 오늘날 신학, 조직신학, 교의학은 다 동의어로 사용된다.

교회 역사상, 기독교 진리들의 체계를 가리키는 용어들은 센텐디아에(sententiae), 수마(summa), 로키 콤무네스(loci communes), 인스티투티오(institutio) 등 다양했다. 그러나 12세기에 피터 아벨라드는 최초로 '신학'(데올로기아)이라는 말을 이러한 의미로 사용했다. 종교개혁 이후 신학이라는 말이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서 점차 많이 사용되었다. 17세기에 라인하르트(L. Reinhardt)는 최초로 '교의신학'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의 저서의 이름은 교의신학 대의(Synopsis Theologiae Dogmaticae)이었다. 오늘날에는 교의학보다 조직신학이라는 말이 더 사용된다.

오늘날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된다. 성경신학, 즉 구약신학 혹은 신약신학이란 무엇인가? 성경신학은 18세기 후반 J. P. 게이블러에 의해서 한 독립적 분과로 시작되었다. 그것이 조직신학 혹은 교의학과 다른 점은 연구 방법에 있었다. 조직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을 주제별로, 논리적으로 정돈하려고 하는 반면, 성경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을 역사적으로, 연대순으로 정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둘은 다 성경을 자료로 삼고 성경에 충실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성경적' 신학이며, 그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조직적' 신학이었다.

그러나 게이블러의 성경신학의 개념은 즉시 합리주의자들에 의해 채용되었고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성경신학은 대체로 자유주의자들에 의하여 교의신학과 대립하고 그것을 비평, 수정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특히 오늘날 자유주의적 성경신학들은 성경의 중심 주제도 파악하지 못한 채 초보적 단계에서 방황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성경의 중심 주제는, 조직신학이 정리해온 바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이 구원의 대주제 아래 하나님의 계시 진리들이 정돈되어 왔다. 왜 구원이 필요했는지, 어떻게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구원의 결과, 즉 구원받은 자들의 삶과 소망은 무엇인지 등의 소주제들이 그 안에 포함되었다. 예수께서는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말씀하셨고(요 5:39),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쓰기를,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했다(딤후 3:15).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이다.



1-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

신학이 하나님에 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될 때,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제기된다. 거기에 대하여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 다 알 수 없다고 대답한다. 사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완전하고 무한하신 분이시지만 사람은 피조물이요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 다 알 수 없다는 대답은 당연한 것이다. 욥은 "내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고백했고(욥 11:7), 또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고 했다(욥 36:26). 아다나시우스는 말하기를, "사람은 능히 하나님의 옷자락을 알 뿐이요, 그 나머지는 그룹들이 날개로 가리웠다"고 했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나,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더구나, 사람이 범죄한 이후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지식은 매우 제한되어졌고 또 왜곡되어졌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창 1:26, 27), 그리고 이제 성경 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하여, 비록 부분적이고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씀했고(호 6:3), 이사야 선지자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을 예언했다(사 11:9). 주 예수께서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啓示)하실 수 있음을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세계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단정하는 칸트의 철학 사상이나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들의 회의주의(懷疑主義)는 정당하지 못하다. 회의주의자들은 흔히 자기모순적이게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확신을 나타낸다. 사람이 신이나 실재(實在)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확신하는 것이다.



1-3. 신학의 분야들

넓은 의미에서 신학은 다섯 분야들로 나뉜다. 첫째로, 구약학은 히브리어, 구약사, 성경 고고학, 구약개론, 구약석의, 구약신학 등이 포함된다. 둘째로, 신약학은 헬라어, 신약사, 신약개론, 성경해석학, 본문비평학, 신약석의, 신약신학 등이 포함된다. 셋째로, 조직신학은 조직신학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과 더불어 현대 신학, 변증학, 윤리학 등이 포함된다. 역사신학은 초대교회사, 중세교회사, 종교개혁사, 근세교회사, 한국교회사, 교리사, 신조학 등이 포함된다. 다섯째로, 실천신학은 목회학, 설교학, 예배학, 교회행정학, 교회정치학, 선교학, 기독교 교육학, 교회음악학 등이 포함된다. 구약학과 신약학은 조직신학을 위해 성경 자료를 제공하고 역사신학은 역사 자료를 제공한다. 또 구약학부터 역사신학까지는 이론신학이고, 실천신학은 적용신학이다. 전자는 신앙 사상에 관해 논하고, 후자는 목회 실제에 관해 논한다.

넓은 의미에서의 신학의 다섯 분야들 중에서, 본래의 신학이 의미했던 조직신학은 일곱 주제들로 구성된다. 첫째로, 조직신학 서론은 기독교 교리의 기초가 되는 성경에 관하여 논한다. 거기에는 신학의 개념과 성격, 신학의 필요성과 분야들, 신학의 역사, 신학의 방법; 종교와 계시, 특별계시와 성경, 성경의 정경성, 성경의 신적 권위성, 성경의 본문 문제, 성경의 명료성과 해석 원리들 등이 포함된다.

둘째로, 신론은 하나님에 관하여 논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속성들, 삼위일체; 작정과 예정, 창조, 섭리 등이 포함된다.

셋째로, 인간론은 사람에 관하여, 특히 사람의 죄에 관하여 논한다. 거기에는 인간의 기원, 인성의 구성 요소, 하나님의 형상, 행위언약; 죄의 기원, 죄의 본질, 죄의 전가(轉嫁), 원죄와 자범죄, 죄의 형벌, 하나님의 법; 구속언약, 은혜언약 등이 포함된다.

넷째로, 기독론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논한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일인격성(一人格性); 그리스도의 생애--낮아지심(성육신, 율법에 복종, 고난, 죽으심, 장사되심), 높아지심(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재림); 그리스도의 선지자직, 제사장직 및 속죄 사역, 왕직 등이 포함된다.

다섯째로, 구원론은 성령께서 죄인을 실제로 구원하심에 관하여 논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 부르심, 중생, 회개와 믿음, 칭의, 성화, 영화 등이 포함된다.

여섯째로, 교회론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 관하여 논한다. 거기에는 교회의 본질, 교회의 속성, 교회의 권세와 임무, 교회의 조직, 말씀, 성례, 기도 등이 포함된다.

일곱째로, 종말론은 성도들의 소망에 관하여 논한다. 거기에는 몸의 죽음과 영혼 불멸, 죽음 후의 상태;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과 휴거, 천년 왕국, 마지막 심판, 천국과 지옥 등이 포함된다.



1-4.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

신학과 다른 학문들과 관계는 어떠한가? 신학과 변증학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것은 변증학의 성격에 의해 설명된다. 워필드 같은 이는 변증학이 신학체계의 서론적 분과로서 하나님, 종교, 계시, 성경 등 기독교의 기초적 원리들에 대한 이성적 변호의 학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카이퍼와 바빙크 같은 이들은 변증학이 기독교 진리들에 대한 공격에 대항한 성경적 답변의 학이라고 이해했다.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철학과 신학은 우주의 근원, 인간의 존재 의미, 도덕적 선 등의 공통적 주제들을 취급하지만, 그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 경험, 혹은 직관에 의존하지만,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존한다. 그러나 철학이 신학에게 어떤 도움을 주기도 한다. 칸트는 양심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영생의 존재를 논증했다. 또한, 철학은 인간의 이성이 우주의 기본적 난제들을 해결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신학과 심리학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심리학은 사람의 행위의 동기와 방식 등 사람의 심리 작용을 연구한다. 심리학도 종교 경험의 현상을 연구할 수 있으나, 빈번히 종교 현상을 단순히 자연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며, 특히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의 죄악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 진리들과 일치하는 심리학의 연구 결과들은 신학의 보조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과 윤리학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윤리학은 사람의 올바른 행동과 생활의 원리들을 연구한다. 이것은 무엇이 선인가 하는 철학적 문제와도 관계된다. 기독교 윤리학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계시하신 올바른 행위와 생활의 원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가리킨다. 역사상, 신학자들이 교리적, 신학적 논술에서 십계명의 해설 등 윤리적 주제들을 다루기도 하였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촬스 핫지와 로버트 댑니의 조직신학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조직신학은 윤리학과 구별된다. 조직신학은 믿음의 내용들을 논하고, 윤리학은 행위의 원리들을 논한다.



2. 신학의 필요성과 성격

2-1. 신학의 필요성

신학은 필요한가? 신학의 필요성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신학은 인간 속에 있는 체계적 지식에 대한 기본적 욕구 때문에 필요하다. 지식의 체계화는 사람의 기본적 욕구이며, 진리의 지식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단편적으로가 아니고 전체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여기에 신학의 필요성이 있다. 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을 추구하므로 모든 진지한 성도들의 기본적 욕구에 충족이 된다. 반틸은 말하기를, "성경의 내용을 연구하여 체계적 총전을 조직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의무이다"고 했다.

둘째로,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의 효과적 전달을 위하여 필요하다.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나 새 신자에게 가르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그것을 효과있게 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논리 정연하다. 그것은 앞 뒤가 모순된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혼동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논리 정연한 제시는 설교를 더욱 힘 있고 효과적이게 만들 것이지만, 혼란한 개념이나 모순된 논리는 그것의 능력을 감소시킬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단순히 사람의 논리로만 활동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인간의 논리를 거슬려 활동하신다고 상상해서도 안된다. 건전한 설교와 교훈은 반드시 건전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훌륭한 설교가 촬스 스펄젼은 말하기를, "대 신학자들이 있기 전에는 대 전도자들이 결코 있지 못할 것이다. . . . 천박한 학생들 중에서 영혼을 움직이는 대 전도자들이 나오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세째로, 신학은 교회의 사상적 일체성을 위하여 필요하다. 교회의 일체성[하나됨]은 유형적이기 전에 먼저 영적이며 교리적이다. 교회는 공통적 기독교 신앙 위에서 한 몸을 이룬다. 정통 신앙을 가진 자와 이단자가 하나를 이룰 수는 없다. 바울 사도는 "다 같은 말을 하라"고 권면했고(고전 1:10), 또 "믿음은 하나이요"라고 말씀했다(엡 4:5). '같은 믿음'(코이네 피스티스, common faith, 딛 1:4)은 온 세계의 기독교인들의 연합의 기초이다.

비록 신학들의 불완전과 상호 간의 차이가 교파들의 형성의 주요 원인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참된 신학은 교회의 일체성의 방해물이 아니고 오히려 그 매개물이요 접착물이다. 사실, 사상적 일치가 없는 외형적 일치는 공허하며 위선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한 성경 연구를 통하여 신학적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사도신경,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은 교회의 공동적 신앙고백과, 핫지의 조직신학, 벌코프의 조직신학, 박형룡의 조직신학 같은 교회의 신학들은 교회의 일체성의 표시요 증거이다.

넷째로, 신학은 이단들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진리들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사실, 이 목적은 역사상 신학 정립과 발전에 매우 중요하였다. 이단들은 성경의 일부분을 잘못되게 해석하거나 적용함으로써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단들이 성경을 완전히 저버리는 경우는 쉽게 식별될 수 있겠지만, 성경을 가지고 잘못 해석하여 강조하거나 적용할 때 그들을 막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체계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단들의 교묘한 오류를 분별하고 폭로하고 물리칠 수 없을 것이다. 이단들의 도전 앞에서, 교회는 성경의 부분적 지식이 아니라 체계적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들에게는 물론이요 일반 신도들에게도 체계적 성경 공부와 교리 공부, 즉 신학 공부가 필요하다.



2-2. 신학의 성격

신학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신학의 몇 가지 성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신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들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고, 신학은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성경에서 나오며 성경에서만 나와야 한다. 성경밖의 자료들은 단지 성경의 진리들을 확증하는 보조물에 불과하다. 신학은 성경적이어야 하며, 성경적인 신학만이 신학이다. 성경을 떠나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논하는 모든 개념들과 사상들은 바른 신학이 될 수 없고 오류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을 불신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그 시작부터가 잘못이요 따라서 그 결론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코 기독교 신학이 될 수 없다. 성경이 파괴되는 곳에서 신학을 논할 수 없고, 성경 없이 논의되는 신학은 기독교 신학이 될 수 없다. 또한, 자유주의 신학은 그 대신 신학의 문화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교회가 진리를 표현함에 있어서 혹시 어떤 시대의 철학적 용어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러한 용어들은 표현 형식에 불과하고 그 내용에 관한 것은 아니다. 신학은 순전히 성경의 계시 진리들을 조직화하는 것이어야 하며, 어느 시대, 어느 문화의 사상을 혼합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어느 신학이든지 비성경적 사상이 섞여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비평하고 배제하여 순수한 성경적 신학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신학은 권위적이다. 신학이 성경적이라면, 그것은 또한 권위적이다. 기독교회는 성경을 신적 권위를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른다. 성경의 신적 권위성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의 신적 권위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한 신학도 당연히 신적 권위를 가진다. 만일 신학이 성경의 진리들을 바르고 충실하게 제시하고 반영한다면, 그 신학은 성경과 같이 신적 권위를 가질 것이다.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지듯이, 성경적 신학은 신적 권위를 가질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오직 성경만 오류 없는 최종적 권위를 가짐을 믿는다. 우리는 신학이 성경과 달리 오류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오류에 떨어진 부분들은 언제든지 성경에 의해 교정될 수 있고 교정되어야 함을 믿는다. 오직 성경만 교회의 오류 없는 최종적 권위이다. 그러나 신학이 성경에 충실하고 그 진리를 바르게 제시하는 한, 교회는 성경을 신적 권위의 말씀으로 존중하듯이, 신학도 신적 권위의 진술들로 존중해야 할 것이다.

세째로, 신학은 불변적이다. 물론 신학의 불변성은 신학의 기본적 내용에 관한 것이고, 그 정돈 방식에 관한 것은 아니다. 신학의 정돈 방식은 변할 수 있으며 역사상 실제로 변해 왔다. 신학적 방식의 이러한 변화는 일종의 신학적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주후 2세기는 기독교 변증학의 시대이었고, 3세기와 4세기는 신론, 5세기는 인간론과 기독론, 그리고 중세 시대에 이어 종교개혁기에는 구원론과 교회론, 그리고 오늘날에는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토론이 많다. 이런 과정들을 통하여 신학의 정돈 방식은 다듬어져 왔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보다 촬스 핫지의 조직신학은 더 정리되어 있고, 핫지의 책보다 루이스 벌코프의 것은 더 정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의 기본적 내용에 관한 한, 그것이 신적 권위를 가진 한, 그것은 또한 불변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성경의 내용이 변할 수 없듯이, 성경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인 신학의 기본 내용은 변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20세기 말에도 초대 교회의 사도 신경이나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믿고 고백하며, 17세기의 정통적 신앙고백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문답이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믿고 고백하며 사랑한다. 또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칼빈과 핫지 등의 정통적 개혁 신학자들의 글들을 사랑한다.

오늘날 유행하는 바와 같이, 신학이 시대마다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적 개념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신학의 근본적 내용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은 성경 진리들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므로, 그것은 실로 이단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불변적임과 같이, 성경적 신학은 그 기본 내용에 있어서 불변적이어야 한다. 시대는 변해도, 신앙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진리의 정돈 방식 즉 신학의 제시 방식은 변할 수 있을지라도, 그 근본 내용들은 결코 변할 수 없다.

네째로, 신학은 교회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비록 처음에 개인이 깨닫고 믿고 고백하기 시작할지라도,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구약의 이스라엘이든지 신약 교회이든지 간에--공동적으로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선언하고 체계적으로 진술할 권세를 주께로부터 받았다.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른다(딤전 3:15). 이 교훈의 권세는 단지 어느 시대까지의 교회나 교회 회의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와 교회 회의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어떤 개인의 사사로운 견해에 그쳐서는 안되며 교회의 공동적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신학의 교회적 성격은 이와 같은 공동적 신앙고백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 전통적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신학적 활동은 모든 시대의 교회들이 많은 힘을 기울여 왔다. 오늘 우리들이 가진 신앙 고백들은 전시대의 신앙 선조들의 기도와 수고의 결실이며, 그 배후에 성령의 섭리적 지도와 후원이 있었음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역사적 신조들과 신앙 고백들을 중시해야 한다.

이와 같이, 신학은 교회적 성격을 가지며, 따라서 바른 신학의 정립과 성실한 전달은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이다. 특히 신학들이 난립하며 성경적 신학이 없는 것과 같이 보이는 오늘 시대에, 성경적 믿음과 확신이 없고 신실함과 충성심이 없어 보이는 이 시대에, 교회의 신학적 사명 곧 바른 신학의 정립과 전달은 더욱 절실하다.



3. 신학의 역사

3-1. 구 카톨릭 시대

오리겐(182-251년경)의 제일 원리들에 관하여(페리 알콘)는 교회 역사상 최초의 신학적 문서라고 생각된다. 그는 다룬 주제들은 1권에서 하나님, 말씀, 성령, 및 천사; 2권에서 세계와 사람; 3권에서 죄와 구속; 4권에서 성경 및 전체 요약 등이다. 오리겐은 대 학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에 이단적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의 책에서 그는 영원 전의 창조, 영혼의 선재(先在) 및 선재 상태에서의 범죄, 보편적 구원(심지어 사탄도 회복된다고 봄) 등을 주장하였다. 이 외에도, 그의 풍유적(allegorical) 성경 해석 방식은 후대에 큰 해가 되었다.

어거스틴(353-430년)은 초대 교회에서 사상적으로 대체로 건전하였다고 본다. 비록 그가 교회에 관하여 감독교회적인 견해를 가졌고 성례에 대하여 그것을 구원에 필수적이게 보는 로마 천주교회 사상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의 죄악성과 은혜의 구원에 관한 그의 사상은 매우 성경적이었다. 그러므로 신학에서 어거스틴주의는 원죄, 인간의 전적 부패성, 하나님의 절대적, 이중적 예정,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 사역을 믿는 입장을 가리킨다.

그는 라우렌티움을 위한 안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관하여(En- chiridion ad Laurentium: De Fide, Spe, et Caritate)라는 책을 썼다(엔키리디온은 교본, 안내서라는 뜻임). 그는 이 책에서 믿음의 제목 아래 믿음의 주요 조항들을 논했고, 소망의 제목 아래 기도를, 사랑의 제목 아래 윤리 문제들을 각각 논했다. 이 외에도,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에 관하여(De Trinitate),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De Civitate Dei) 등 교리적인 저술들을 남겼다.

다메섹의 요한(700-760년)은 고대 동방교회의 최대의 신학자이며, 그의 정통신앙정해(Ekdosis Akribes tes Orthodoxou Pisteos)는 동방 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책이었다. 이 책은 그의 지식의 원천이라는 책의 제3부인데, 그 주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권--하나님과 삼위일체; 2권--창조, 사람의 본질; 3권--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음부에 내려가심; 4권--그리스도의 부활, 다스리심, 믿음, 세례, 성상 숭배 등. 그의 책은 고대 동방 교회의 특징을 반영하는데, 사색적이며, 신학적으론 반(半)펠라기우스주의 혹은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이며, 성례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3-2. 중세 스콜라 신학 시대

안셈(1033-1109년)은 이태리 출생으로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이었으며 '스콜라 신학의 시조' 또는 '제2의 어거스틴'이라고 불리웠다. 그는 경건과 지식을 겸비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의 독백(Monologium)과 대화(Proslogium)는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관해 논한 책이다. 이 외에도, 그는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교리를 다룬 삼위일체의 믿음과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De Fide Trinitatis et de Incarnatione Verbi)라는 책과, 예정론을 다룬 조화에 관하여(De Concordia), 그리고 속죄론을 다룬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나?(Cur Deus Homo?) 등의 저서를 남겼다.

피터 롬바드(1100-1160년)는 이태리 출생으로 파리의 대주교를 지낸 자로서 서방 교회의 최초의 대 교의학자이었다. 그의 선언서(Sententia- rum Libri IV)라는 책은 스콜라 시대의 최초의 주요한 교의학서로서 중세 시대 여러 세기 동안 신학 교본으로 사용되었다(센텐티아룸이라는 말은 문제들에 대한 결론들이라는 뜻임). 그의 책의 주제들은 1권--하나님(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 삼위일체 등); 2권--창조 세계, 천사; 3권--기독론, 구속(아벨라드의 영향을 입음); 4권--성례(최초로 일곱 성례로 분류함), 종말 등이다.

헤일스의 알렉산더(1180-1245년)의 신학대전(Summa Universae Theologiae)은 롬바드의 선언서에 대한 주석으로서 많이 읽혀졌다.

토마스 아퀴나스(1221-74년)는 이탈리아의 신학자로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최대의 인물이며, 천주교회의 대 권위자이다. 그의 신학은 천주교회의 표준적 신학이었다. 그의 신학대전(Summa Totius Theologiae)은 미완성 작품이었고, 그것의 성례와 종말에 관한 부분은 다른 곳에서 그의 글들 중에서 발췌하여 추가한 것이었다. 그 책의 주요 주제들은 1권--하나님과 그의 사역들; 2권--사람, 윤리학; 3권--그리스도, 은혜의 수단 등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의 신학의 형식으로 삼았고, 어거스틴주의를 그의 신학의 기본적 내용으로 삼았으나 중요한 많은 점들에서 그것을 수정하였다.



3-3. 종교개혁 및 신조 작성 시대

개혁파

죤 칼빈(1509-64년)은 마틴 루터와 마틴 부처(1491-1551년)의 영향 아래 성경적인 어거스틴주의를 부흥시켰다. 바울 사도의 은혜의 복음을 핵심으로 하는 성경적 정통 신학은 고대에 어거스틴을 거쳐 칼빈에게서 밝히 정리되었다. 그의 기독교 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는 개혁교회의 쑤마[신학대전]라고 불리웠다. 그의 책에는 특히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이 강하게 흐르고 있고 교리와 윤리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의 책의 주요 주제는 1권--하나님; 2권--그리스도; 3권--성령과 구원; 4권--교회와 성례 등이다. 칼빈은 또 많은 성경 주석들을 남겼다.

라이덴 대학의 네 명의 교수들이 쓴 순수신학개요(Synopsis Purio- ris Theologiae)라는 책이 개혁 교회의 세계에서 많이 읽혀졌다.

이태리 출신 스위스 신학자 프란시스 투레틴(1623-87년)의 신학은 권위 있는 정통 개혁파 신학이었고 그 후 미국의 프린스톤 신학에서 계승되었다. 그의 논변신학강요(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iae, Insti- tutes of Elenctic Theology)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중요한 신학 참고서가 되었다. 칼빈의 개혁파 정통 신학의 흐름은 투레틴과 같은 인물을 통해 이어져 내려왔다.

코체유스(1603-69년)는 전통적 개혁파 신학의 형식과 내용으로부터 이탈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맺으신 언약들을 중심으로 진리를 정리하려고 하였다.

프랑스의 소우물 신학교의 아미랄더스(1596-1664년)는 가설적(假說的) 만인 구원설을 주장했다. 개혁교회는 그의 견해를 이단으로 정죄하지는 않았으나 경계할 오류라고 판단하였다. 그의 견해를 아미랄더스주의 혹은 소우물학파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화란에서는 기스베르트 보에티우스(1589-1676년),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는 청교도적 대 신학자 죤 오웬(1616-83년)과 리차드 백스터(1615-91년) 등이 있었다. 죤 오웬은 가장 엄격하였으나 '신학자들의 신학자'로 알려진 자이었고, 리차드 백스터는 가장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들은 다 경건하고 정통적인 신학자들이었다.

이 시기에 작성된 주요한 개혁파 신조들로는 스위스의 제1 스위스 신앙고백(1536년)과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년), 네델란드의 벨직 신앙고백(1561년)과 도르트 신경(1619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 영국 교회의 39개 신조(1563년),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문답(1647년) 등이 있다.

기타

필립 멜랑톤(1497-1560년)은 루터의 제자이었고 그의 저서 신학통의(通義)(Loci Communes)는 최초의 루터교 신학서이었다(로키 코뮤네스라는 말은 공통구절들[common places]이라는 뜻임). 그는 이 책에서 로마서의 순서를 따라 기독교 교리 체계 속에 성경의 기본 구절들과 그 해석을 모았다. 초판은 루터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며 어거스틴주의적이었으나, 그 후의 판들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반(半)펠라기우스주의로 변질되었다.

죤 게하르트(1582-1637년)는 17세기 루터파의 가장 훌륭한 신학자로서 신학통의(通義)(Loci Communes Theologici)라는 책을 썼다. 그는 멜랑톤의 입장에 반대하였고, 루터의 사상과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 초판(1530년)의 사상인 어거스틴주의에로 돌아갔다.

이 시기에 작성된 주요한 루터파 신조들은 루터의 요리문답(1529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1530년), 일치 신조(the Formula of Con- cord, 1577년) 등이다.

에피스코피우스(1583-1643년)는 화란 라이덴 대학교의 신학교수 제임스 알미니우스(1560-1609년)의 영향을 받아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해설하였으나 실상 그의 선생보다 더 나아갔다. 그는 신학강요(Institu- tiones Theologicae)라는 책을 썼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돌트 대회의 결정들에 항거하였으므로 항론파(Remonstrants)라고 불리웠고 후에는 알미니우스파로 불리웠다.

파우스터스 소시너스(1539-1604년)의 라코 요리문답(Rakow Cate- chism, 1605년)은 소시너스주의의 신학서이다. 그는 삼위일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성, 타락과 원죄 등을 부정하였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희생적 사랑의 모범으로 보았다. 그는 근대 유니테니안(Unitarian, 일위신론자[一位神論者])들의 선조(先祖)이었다.

추기경 로버트 벨라민(1542-1621년)은 이 시대에 로마 천주교회의 대변자이었다. 기독교 신앙 논쟁에 관한 변론(Disputationes de Con- troversiis Christianae Fidei)이라는 그의 책은 로마 카톨릭 신학의 완성된 해설서이었다. 그는 교황지상주의를 옹호했고 인간의 죄와 구원에 관하여는 반(半)펠라기우스적이다.



3-4. 근세 시대(18세기 이후)

개혁파

촬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년)는 구 프린스톤 신학교의 조직신학자로서 그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871-73년)은 오늘날까지 개혁파 정통 신학의 표준적 신학서로 인정받고 있다. 그 책의 주요 주제들은 1권--서론, 1부(신론); 2권--2부(인간론), 3부(구원론; 기독론 포함); 3권--3부(계속)(구원론 계속; 성화론에 십계명 해설과 성례론을 포함함), 4부(종말론) 등이다.

에이 에이 핫지(A. A. Hodge, 1823-86년)는 신학 개요(Outlines of Theology, 1879년)라는 그의 책에서 부친 촬스 핫지의 신학 사상을 이어서 신학을 평신도들을 위해 평이하게 문답식으로 정리하였다.

로버트 댑니(Robert Dabney, 1820-98년)는 미국 남장로교회의 조직신학자이었다. 조직신학강의(Lectures in Systematic Theology, 1871년)라는 그의 책은 그의 사후에 그의 강의록을 정리한 것이다(수정판, 1927년).

윌리암 쉐드(William G. T. Shedd, 1820-94년)도 근대에 탁월한 조직신학자이었다. 그의 교의신학(Dogmatic Theology, 3권. 1888- 94년)은 1권--서론, 성경론, 신론; 2권--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성례론 포함), 종말론; 3권--보충 설명 및 교리사적 참조 등을 다루었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년)의 개혁파 교의학(Gereformeerde Dogmatiek, 1895-1901년)은 지금까지 화란에서 표준적 신학서로 인정받고 있다.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년)는 훌륭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939년) 책을 썼는데, 그것은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 책의 기초가 되었다. 벌코프는 전통적, 정통적 개혁 신학을 그의 선배들보다 잘 정돈하여 전달하였다.

헤르만 훽스마(Herman Hoeksema, d. 1965년)는 미국 프로테스탄 개혁교회의 학자로서 개혁파 교의학(Reformed Dogmatics, 1966년)이라는 깊이 있는 정통적 신학서를 남겼다.

박형룡(1897-1978) 박사는 벌코프의 책을 기초로 하여 여러 개혁파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참조하여 교의신학(7권. 1964-1973년)이라는 역작을 남겼다. 그는 그의 책 서문에서 그 책의 성격을 '편집'이라고 겸손히 표현하였지만, 그의 책은 실로 '편집 이상'이다. 그 책은 한국의 장로교회를 위한 귀한 신앙의 유산이다.

기타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소위 '경건주의'라는 한 운동이 일어났다. 스페너(P. J. Spener), 프랑케(A. H. Francke), 랑게(J. P. Lange)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교의학을 스콜라주의적 형식에서 해방하여 성경적 단순성으로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쉴라이엘마허(1768-1834년)는 근대 자유주의의 시조로서 사람의 종교적 감정, 자의식, 경험을 교리체계의 기초로 삼으려 했다. 그는 종교에 관한 강연(Reden uber die Religion)과 신앙의 교리(Glaubens- lehre) 등의 책을 썼다.

릿츨(1822-89년)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을 교리 체계의 기초로 삼으려 했으며, 윤리적 기독교를 주창했다. 그는 삼위일체를 부정했고,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하여 도덕 감화설을 취하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는 기독교의 칭의와 화목의 교리(Die Christ liche Lehre von der Recht- fertigung und Versohnung)다.

프란시스 피이퍼(Francis Pieper, 1852-1931년)의 기독교 교의학(Christliche Dogmatik, 1917-24년)은 루터파의 정통적 조직신학이다(영역, Christian Dogmatics, 1950년).

루이스 쉐이퍼(Lewis S. Chafer, 1871-1952년)는 미국의 달라스 신학교 창설자이며 그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947-48년)은 세대주의를 반영한다.

칼 바르트(1886-1968년)는 신정통주의의 시조로서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 13권. 1936-1962년) 등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객관적 기록으로 보지 않으며, 성경의 유오성(有誤性)을 주장하고,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의 진실성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폴 틸리히(1886-1965년)는 매우 자유주의적 신학자로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3권. 1963년)을 썼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개념은 매우 철학적이다. 그는 인격적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부정하며, 하나님을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라고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의 속성, 그리스도의 성육신 등을 명백히 부정한다.

밀라드 에릭슨의 기독교 신학(Christian Theology, 1983-85년)은 가장 최근에 복음주의 진영에서 쓰여진 조직신학이다. 그는 신복음주의의 입장을 취해 왔다. 그의 입장에 맞게, 그는 그의 책 첫 페이지에서 그 책을 신복음주의자 버나드 램과, 자유주의자 윌리암 호던과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에게 바친다고 썼다.



4. 신학의 방법

신학의 방법은 무엇인가? 즉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지식을 체계화 시킬 수 있는가?

4-1. 바른 방법--세 가지 원리들

신학의 바른 방법은 세 가지의 기본 원리들에 의해 나타난다. 첫째로, 신학의 '존재의 원리' 혹은 신학의 본질적 기초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는 자신과 온 세계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는 학자 중에 학자시요 과학자 중에 과학자이시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의 모든 지식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일반 학문도 그러하지만, 신학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7).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하나님께 대해 확실하게, 무오(無誤)하게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또 바울 사도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복음 진리]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했다(고전 2:10).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지식이란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을 닮은 지식이요, 그 지식을 조금 나누어 가진 부분적 지식에 불과하다.

둘째로, 신학자들이 '지식의 외적 원리'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이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리킨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신학의 유일한 원리라고 보았다(투레틴, 바빙크). 그러나 다른 이들은 성경을 신학의 일차적, 중심적 원리로 보고, 자연 계시, 하나님의 섭리, 그리스도인의 경험 등을 신학의 이차적, 부수적 원리로 보았다(워필드).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여러 가지 특별한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 내용을 성경에, 그리고 오직 성경에만, 기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들과 그 유일한 저장소인 성경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의 객관적 자료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충분히 파악하든 못하든 간에, 하나님의 진리들은 성경에 객관적 형태로, 완전하게 제시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말씀하셨다(요 5:39). 또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씀했다(딤후 3:16).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께 대한 확실하고 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고, 기독교 진리를 논하거나 기독교 신학을 정립할 수 없다.

셋째는 '지식의 내적 원리'이다. 그것은 성령의 증거에 의거한 믿음과 이성이다. 죄인은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를 믿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 믿음은 거듭남의 증거이다. 누구든지 참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 믿음은 참 지식의 시작이다. 이것이 주께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고 하신 의미이며, 또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고 하신 뜻이다.

믿음의 지식은 성령의 내적 활동에 의해 생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말씀과 함께 활동하셔서 그러한 지식을 주신다. 성령의 내적 활동이 없이는 아무도 참된 믿음과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기독교 신앙과 지식은 단순히 인간에게 내어 맡겨진 어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은혜로운 사역이다. 성도의 확신의 근거도 성령의 내적 활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 속에 그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면적 활동에서 온다."

예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고(요 14:26), 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하셨다(요 16:13).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고(고전 2:12), 또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고전 12:3).

요한 사도도,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라고 말했다(요일 2:27).

그러나, 이미 믿게 된 자들, 즉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는 이성(理性)이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기본적 수단이 된다. 이성은 우선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을 이해한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내용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은 이성의 작용이다. 백치(白痴)는 하나님에 대한 원만한 지식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이성은 진리의 이해를 위한 기본적 수단이다.

이성은 또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정당성을 판단한다. 하나님의 사역과 성령의 증거는 사람의 이성의 판단이나 논증을 배제하거나 배격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일반적으로 그것을 사용하신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다(행 17:2, 3). 그는 다른 곳들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다(행 18:4; 19:8; 20:7). '강론하다'나 '증명하다'는 말은 이성의 판단이나 논증 등 이성의 활동을 가리키거나 내포한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성경은 도무지 상당한 이유에 의함이 없이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Hodge, I, 53). 워필드도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를 믿는 것이 합리한 때문이요 불합리할지라도 믿는 것은 아니다. . . . 믿음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불합리한 믿음, 즉 정당한 이유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이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다"고 했다(B. B. Warfield, Bibli- cal and Theological Studies, pp. 45, 46).

이성은 마침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들을 정돈한다. 하나님의 진리들을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돈하는 것은 이성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이성의 작용과 활동이 없이는 신학을 포함하여 어떤 학문도 있을 수 없다. 학문은 정돈된 지식 혹은 지식의 체계화이기 때문이다.



4-2. 잘못된 방법들

기독교 역사상 신학의 몇 가지 잘못된 방법들이 있었다. 첫째로, 신학의 방법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교권주의적 방법이다. 이것은 교회의 권위를 신학의 궁극적 원리로 보는 방법이다. 대표적 예는 로마 천주교회의 입장이다. 로마 교회는 이론적으로 교회의 전통과 성경을 함께 신학의 원리로 보지만, 실제적으로는 교회를 성경보다 더 궁극적 원리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교황과 회의들)가 성경을 포함한 모든 진리의 최종적인, 무오(無誤)한 해석자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다. 교회 혹은 교황이 무오(無誤)하다는 교리는 성경적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실제로도 무오하지 못했고 또 못하다. 예수께서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고 말씀하셨다(마 15:3). 또 그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기도 하셨다(마 16:23). 이 말씀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잘못을 범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앙 생활의 표준으로 삼아야 할 것을 보인다.

사실상 로마 천주교회의 역사는 교황이 무오하다는 교리에 반대된다. 예를 들어,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마리아의 무죄 잉태를 선언했고, 1950년 피우스 12세는 마리아의 승천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교리들은 다 비성경적이다. 또 그레고리 1세(590-607년)는 '전 세계의 감독'이라는 칭호를 가지고자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불렀으나, 보니페이스 3세는 그런 칭호를 받았다(607년). 또 씩스투스 5세(1585-1590년)는 성경 읽기를 권장했으나 피우스 7세(1800-23년) 등 여러 교황들은 그것을 정죄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사상들은 서로 충돌하였다.

교회의 권위는 무오하지 않고 오직 성경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영감과 배려로 사도들을 통하여 신약성경을 오류 없이 기록되게 하셨다. 성경은 스스로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그러므로 교회와 교회의 교훈은 스스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오직 성경적일 때만 권위를 가진다. 성경만이 교회의 최고의, 최종의 권위이다. 따라서 신학은 단순히 교회와 교회의 교훈들의 권위에 의존되어서는 안되고, 오직 성경의 권위에만 의존해야 한다.

둘째로, 신학의 잘못된 방법들 가운데 또 하나는 이성주의적 방법이다. 이것은 사람의 이성을 신학의 궁극적 원리로 보는 방법이다. 이것은 순전히 연역적 방법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성은 진리의 최종적 판단자로서 이성에 맞는 것은 진리가 되고 이성에 맞지 않는 것은 비진리가 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다수가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짐에 있어서 사람이 궁극적 원리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창조주시며 사람은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위해 겸손히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존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실제로 사람의 이성은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다 파악할 수 없다. 사람이 우주와 우리 자신의 구조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우주와 사람의 창조자이신 완전자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욥기 11:7은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말씀한다. 예수께서도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고 책망하신 적이 있다(마 22:29).

더욱이, 자연 이성 즉 타고난 대로의 이성은 죄로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의 바른 원천이 될 수 없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고(고전 1:21), 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별됨이니라"고 했다. 또 그는 "저희[이방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고 말했다(엡 4:18).

사실, 이성주의는 신학과 철학을 혼동하여 신학을 철학화 하려 한다. 그러나 철학은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지만,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근거해야 한다.

셋째로, 신학의 잘못된 또 하나의 방법은 경험주의적 방법이다. 이것은 사람의 종교적 경험, 감정, 및 의식(意識)을 신학의 궁극적 원리로 보는 방법이다. 이성주의와 정반대로, 이것은 순전히 귀납적 방법이다. 이 견해는, 사람이 경험할 수 없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을 진리에서 제외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나머지 다수가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슐라엘마허는 신학을 종교적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경험하는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릿츨은 신학을 사람의 종교 도덕적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다. 유한한 존재인 사람이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원리 혹은 원천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위해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겸손히 의존해야 한다.

또한 사람은 실제로 현재 하나님의 진리들을 다 경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천지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 밖의 과거의 특별계시의 일들, 그리고 장차 마지막 날에 있을 일들 등을 경험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다(요 20:27-29).

더욱이, 사람의 종교적 경험이나 감정은 진리와 오류, 하나님의 계시와 계시 아닌 것을 혼동하기 쉽다. 이방 종교인들도 매우 종교적일 수 있다. 구약의 바알 숭배자들도 매우 종교적이었다. 열왕기상 18:28에 보면,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였다.' 아덴 사람들도 매우 종교적이었다. 사도행전 17:22에 보면, 바울은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고 말했다. 종교적 감정이 종교에 필수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단순히 종교적 감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

사람의 도덕 의식도 그러하다. 양심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반영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의 양심은 죄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무디어졌기 때문에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 의식에 기초한 도덕적 신관, 도덕적 종교는 완전치 못하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했다(롬 3:10-12).

실상, 신학의 경험주의적 방법은 신학과 종교 심리학을 혼동하고 있다. 경험주의가 종교 심리학은 될 수 있으나, 신학은 될 수 없다.

넷째로, 신학의 잘못된 또 하나의 방법은 신비주의적 방법이다. 이것은 경험주의의 한 형태로서,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통을 신학의 원리로 보는 방법이다. 이 견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하시고 전달해 주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내적인 빛 혹은 내면적 음성이라고 부른다. 교회 역사상, 많은 신비주의자들이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별계시들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했다(딤후 3:16). 또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라고 했다(사 8:20).

또한, 신비주의적 방법론은 이성의 정당한 기능을 무시한다. 그러나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정당하고 정상적인 인식과 판단의 도구이다. 덧붙여, 신비주의적 방법에서는 하나님의 음성과 마귀의 음성을 명확히 분별하기 어렵다. 따라서 빈번히 탈선에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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