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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와 근본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 김명도 교수

by 【고동엽】 2021. 11. 10.
span>개혁주의와 근본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튤립 교육선교회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많은 분들이 근본주의 (Fundamentalism) 와 개혁주의(Reformed Faith) 의 차이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좀 자세히 말씀드리고 저 합니다.

18세기에 독일에서 일어난 계몽주의, 이에 따른 합리주의 (Rationalism), 그리고 경험주의 (Empiricism) 등은 기독교계에 일대 변혁을 초래 했습니다. 종전의 정통적인 기독교에서 떠나서 무엇이든 새로운 관점에서 이성적으로 비판하여 믿겠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사실을 판단하기보다 주관적으로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토대로 판단하겠다는 것이며 신학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독일의 고등비평 (Higher Criticism) 이고 기독교에서 유대교적인 색체를 부인하고저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같은 차원에서 연구하겠다고 나선 종교사학파 (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 History of Religion School) 가 18세기에 생겨나서 기독교는 독특한 계시의 종교가 아니라 중동지방의 다른 원시 종교를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들은 창세기의 천지 창조를 바벨론의 신화에서 빌려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바벨론의 설화집인 Gilgamesh 라는 책에 의거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성경대로, 즉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특별계시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사람의 작품으로 믿으려 했으며 헬라 로마 문화권속에서 그 문화를 모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마에서는 이상한 풍습이 있었는데 로마의 황제들은 사람이면 Olympus 산에 살고 있는 신들이 인간 여성과 혼인하여 출생했다고 가르쳤습니다. 황제는 신성하다는 가르침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로마 황제의 막강한 권력을 인정하려는 소수의 무리들이 만들어낸 황제 숭배 사상에서 비롯됩니다. 물론 양식이 있는 로마시민은 이것이 날조된 이야기 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국의 처벌이 무서워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지요

종교사학파 학자중의 Albert Schweitzer 는 그의 ”역사예수 탐구, A Quest of Historical Jesus" 라는 책에서 예수님이 현세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꿈꾸었으나 실패로 십자가에 달렸다고 말할 정도입니다(그의 명저 이 책에서 Herman Samuel Reimarus에서 Wilhelm Wrede 에 이르기까지 50명에 달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예수님이 생애에 관한 신학을 평가한 다음 마지막 100 페이지에서 장황하게 예수님은 복음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해석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목적은 기독교를 하나님의 계시의 종교로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류애은 남달라서 그가 J. S. Bach 음악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고 의학을 전공하고 신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세 개나 취득한 후 Africa Gabon 이란 나라의 Lambarene 라는 마을에 들어가서 “생의 경외” (Awe of Life) 를 못토로 50년을 토인들과 같이 보낸 것은 가상하지만 그의 신학은 개혁주의와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잘못된 신학 사상이 나중에 미국으로 상륙하여 미국에 신신학으로 범남하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PCUSA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아직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의 미국 장교 교단명칭) 이 총회에서 1810년 만장일치 결의로 1812년에 세운 프린스톤 신학교에도 이런 신신학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비로서 자유주의를 모르던 미국에 자유주의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니, 이로 인하여 미국의 교계는 <성경을 성경대로 믿자>는 무리와 <성경을 고등비평에 맟추어서 믿자> 는 무리들 간의 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경을 성경대로 비판 없이 바로 믿자>는 무리가 힘을 합하여 초기의 <근본주의> 가 시작 되었습니다. 근본주의를 “초기의 근본주의” 와 “신 근본주의” 로 구별하는 일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 글을 계속 읽으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근본주의는 여러 시대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의 근본주의는 초기의 근본주의와 달라진 점이 많이 있기 때문이지요. 1910년에서 1915년까지 5년간에 걸쳐서 이라는 책이 나올 무렵과 오늘의 신학은 크게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사수하려는 열정으로 시작한 운동이지만 요즘은 상당히 폐쇄적이며 독선적인 신학 사상으로 발전했는데 가장 좋은 예는 과거의 Bob Jones 대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교단보다 배타성이 강한 것이 근본주의 입니다. 물론 기독교 자체가 어느 종교보다도 배타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어느 다른 종교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는 조물주 <야웨>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분을 두지 않기 때문이며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 4:12). 이것은 철칙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서의 강단 교류는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행해 질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폐쇄적성찬식 Closed Communion Service> 이 아니라 <통제적 성찬식, Restricted Communion Service>을 행합니다.

<폐쇄적 성찬식> 이란 자기 교회 교인들만,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주의 몸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 만 성찬에 참여하게 하는 제도이며, 반면에 <통제적 성찬식> 은 본 교회 교인이 아니라도 본 교회와 같은 신앙노선을 갖고 있는, 즉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성도라면 다른 교회 교인이라도 누구나 성찬에 참여케하는 제도입니다. 물론 본 교회 성도라도 회개하지 아니한 사람은 성찬에 참여함을 금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미국의 정통장로교단 (OPC) 는 이런 “통제적 성찬식” 제도를 따르는 대표적인 교단입니다.

우선 1910년대부터 시작하지요. 앞서 언급한대로 자유주의 신학의 침투로 미국 교회의 신앙이 변질되어가자 당시 Scotland의 Glasgow 출신의 James Orr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국제 표준 성경 백과사전 편찬자) 와 R.A.Torrey 가 중심이 되어 미국, 카나다. 영국에 있는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공회 등 초교파적으로 성경대로 믿으려는 학자들을 총망라하여 37명의 학자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수호하며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을 근절하기 위해 책을 집필하게 했는데 그것이 1910년부너 1915년 사이에 300만부를 발행하여 무료로 배포한 이른바 라는 12권으로 된 책입니다. 이 책은 지금도 빨간 hardcover 를 한 12권의 책으로 판매되고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 20세기 초 그 당시 미국에 상륙한 자유주의 신학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처음 9권은 별로 남을 공격하는 것이 없이 자유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일부 교리를 인정하는 온화한 태도로 집필했지만 나중 3권은 기독교의 진리를 바로 전하며 자유주의의 오류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내용입니다. 이 책은 당시에 상당한 환영을 받았는데 장로교나 침례교나 감리교나 성공회나 모두 성경의 권위를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보급하여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많이 보급하여 상당한 효과를 보았습니다. 출판비용은 자유주의를 배척하고 보수주의를 주창하는 신실한 교인들이 희생적인 헌금으로 가능했습니다.

이런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해오자 성경을 지키려는 보수주의 교파들은 신학교들을 많이 세웠고, 또한 사경회 (Bible Conferences)를 많이 가졌습니다. Princeton 신학교에서는 J. Gresham Machen 박사 같은 분이 중심이 되어 이 운동을 주도했고 그는 1924년에 라는 책을 저술했고, 이어서 이라는 책, 또 라는 책 (그가 당시 여러 교회에서 인도했던 사경회 내용을 요약한 책)을 썼습니다. 이런 책들은 지금 절판되다 싶이 했지만 구할 수 있으면 꼭 사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옥같은 명저들로 오늘날 이런 책들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Machen 박사는 옛 프린스톤 신학교 (1920년대 이전을 이라고 하고 그 이후를 이라고 하는데 New Princeton 이란 자유주의가 감염된 이후를 말함)에서 신약을 가르치던 학자로 자유주의가 프린스톤 신학교에 들어오자 Independent Board for Presbyterian Foreign Mission 이라는 선교기관을 별도로 조직하여 선교에 힘을 썼는데 당시 북장로교회 본부가 이를 못 마땅하게 여겨 그 단체와 손을 끊을 것을 명령했으나 이를 단연히 거부한 John Gresham Machen 박사는 UPCUSA (미국 북장로교)를 탈퇴하여 1936년 를 창립했으나 이번에는 그 교단 이름이 와 유사하다고 하여 소송당하여 재판에서 패소하여 그 이름을 오늘의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OPC 미국 정통장로교단) 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릅니다.

2011년 6월에 OPC 는 교단 창립 75주년을 맞았습니다. 이 방면의 연구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부연하고 싶은 것은 Machen 박가사 독립 외지 선교단체를 조직한 직접적 이유는 당시 UPCUSA 의 총회가 자유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목사들을 대거 외지 선교부 요원으로 혹은 선교사로 파송함에 이를 부당하게 생각한 Machen 박사는 이에 협력을 거부하고 따로 Independent Board for Presbyterian Foreign Mission (장로교 독립 외지 선교부) 를 창설했는데 이를 해체하라는 총회의 명령에 불복하여 총회를 탈퇴하게 된 것입니다 (HIstory of OPC, 란 책 참고).

OPC 가 창립되기 몇 년 전인 1929년 Machen 박사와 그 외에 쟁쟁한 프린스토의 엘리트 교수들이 모두 프린스톤 신학을 떠나, 그로부터 약 40 마일 서편에 있는 Pennsylvania 주 Philadelphia 시 중심부친 Pine Street 에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창립하고 1929년 가을 학생수 30여명으로 옛 프린스톤 신학교의 명맥을 이어 받아 개혁주의 신학을 전해왔습니다. 이 신학교는 그 후 밤마다 귀신이 출몰한다고 알려져 싸게 내놓은 필라델피아 근교 Chestnut 이란 동리의 큰 개인 저택을 아주 싸게 구입하여 그리로 이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2010년 현재 학생수 800 명이 공부하고 있으며 교파에 가입함이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신앙노선은 옛 프린스톤 신학을 따라 고전적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초기의 근본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성경에는 잘못이 있다는 주장, 성경에 고등비평을 적용해서 해석해야 하고, 복음서는 재해석해야 한다> 고 주장하면서 침투해오는 독일과 영국의 자유주의> 를 막기 위해서 오직 성경의 기본교리를 수호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습니다. 전에도 언급한 것처럼 1910-1915년 어간에 나온 12권 짜리 “근본주의 교리, The Fundamentals" 라는 책에는 90개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논조가 모두 성경의 기본교리를 수호하자는 것입니다.

당시 Charles A. Briggs 목사 (뉴욕 유니온 신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성경해석에 고등비평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로 인하여 학교와 노회간에 충돌이 생겨 그 교수를 해고하기를 거부하는 학교측과 해고하라는 노회가 맞서 결국 학교가 노회를 탈퇴하게 됨) 가 가르치던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침례교에서 안수 받고 잠시 뉴욕의 First Presbyterian Church에서 목회하던 Harry Emerson Fosdick 라는 침례교 목사가 노골적으로 1922년 5월21일에 라는 역사에 남는 설교를 하므로 정면으로 충돌하여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는 Auburn Affirmation을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얼마나 위험한 시기 입니까? 오늘과 꼭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교계에도 “목사” 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중에 Fosdick 과 같은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Fosdick 목사는 그의 설교에서 세 가지를 종용했는데, 즉, 1. 성경의 무오설 은 믿을 수 없다. 2.동정녀 탄생은 기독교의 본질적 교리가 아니다, 그리고 3 예수님의 문자적 재림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며 재고해야 한다는 등 세 가지인데 그의 주장은 근본주의자들이 시야를 넗혀 쟈유주의 자들의 성경관을 용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이 세 가지는 Fosdick 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독교에서 거치장스런 부속물>이 아니라 기독교의 존폐를 가름하는 가장 핵심적인 교리 이므로 그 핵심적 교리들을 직키기 위해서 근본주의자들은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그 싸움은 치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의 상황과 비교 해 보십시오. 뉴에이지 운동 (New Age Movement) 과 포스트모터니즘 (Postmodernism)이 주도하는 오늘의 기독교는 부패할대로 부패해가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바로 잡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개인의 명예와 권세를 위해서 잘못된 신학 사상들을 두둔하거나 외면하거나 심지어 그런 저주 받을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교회성장이라는 미명으로 교회에 가만히 도입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닙니까? 교회는 나라의 등불입니다. 교회가 타락한다는 말은 성직자가 성경의 교리를 떠난다는 말이요 성직자가 성경적 진리를 교훈하지 아니하면 교인들이 성경에 무식해 지고 성도들이 성경에 무식하면 도덕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그 다음은 사회가 병들고 사회기 병들면 나라는 망합니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본 <튤립교육선교회> 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신학을 바로 잡아주고, 일반 성도들을 계몽하며 개혁주의로 무장시키려는데 그 목적을 두고 눈물과 땀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자 Fosdick (포즈딕) 목사는 이 설교를 한 후 하도 유명해져서 여기저기에서 장로교단 교회에서 조차 목사로 청빙을 받았으나 그는 침례교 목사인 그가 장로교에 갈수 없다고 하면서 그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 그가 임시로 설교하던 뉴욕의 제일장로교회 (First Presbyterian Church) 에서도 이 설교를 끝으로 사임했습니다. Fosdick의 좋은 면은 이런 결단력, 즉, 초지를 굽히지 않는 그런 결단 말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위해서는 순교도 마다 하지 않는 그런 신앙을 끝까지 고수해 나가는 위대한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개혁주의 신앙가는 신앙의 <절개>를 죽을 때까지 지켜 나갸야 합니다. 환난과 핍박과 조롱과 협박이 온다고 중지해서는 안 됩니다. Nederlands 과 Scotland 의 목사들은 모두 그랬습니다. 이것이 칼빈의 후예들이 신앙철학 입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순교까지 가는 것입니다. 마틴루터는 1521년 4월 17일 Worms 성에서 재판을 받고 그 다음날 자기 숙소에 찾아 온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머리가 천개가 있어 그 머리가 모두 잘려 나가도 진리는 지켜나가겠다” 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교계는 모두 무사안일주의, 1955년 Fuller 신학교안에 “세계 선교대학” 을 세웠던 Donald McGavran 목사의 전도방법, 즉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을 교회안에 끌어 모으라“ 라는 전도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고, 이런 물량주의 일변도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듣지 못하여 영혼이 굶주린 사람들이 대거 교회를 떠나자 이번엔 이 기회를 약용하여 퀘이커 교 출신의 lRichard Foster 목사 의 "Renovare 운동" 이 2005년부터 한국에 들어와서 “내적 치유와 부흥” 을 내세우면서 동양종교와 기독교를 혼합한 Spiritual Formation (영적 형성) 일색으로 교회를 바꾸어 버려 진리의 말씀은 훼방을 받고 있는 것이 오늘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기현상입니다.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근본주의 등장의 배경에서, 자유주의 물결이 너무도 거세게 미국을 점령하자, 1910년에 당시 미 북장로교 (UPCUSA) 총회는 모든 목사들과 목사 후보생들이 반드시 믿어야 할 “근본주의 5대 교리”를 정식으로 결의했습니다. 그 다섯 가지 교리란 1. 성경의 모오성, 2.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3.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4. 예수님의 기적의 역사성, 그리고 5. 예수님의 육적 부활 등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1925년에 Auburn Affirmation (오번 선언)을 야기하게 된 직접적 동기가 되었는데 1925년 1월 New York 주 Auburn 에 있는 Auburn Theological Seminary (오번 신학교) 강당에 모인 목사들은 총회가 결의한 이런 다섯 가지 기본 교리를 반드시 믿을 필요는 없다는 내용의 결의를 했습니다. 이는 통탄할 일입니다.

몇 달이 지나서 1925년 5월에 다시 모인 회의에서는 이 문서에 서명한 목사의 수가 도합 1,274명이 되어 큰 물의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미국 교회사에 남을 유명한 “오번 선언” (Auburn Affirmation) 사건입니다 (1925). 또한 이 다섯 가지 교리는 근본주의자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핵심 교리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다섯 가지 교리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프린스톤 신학교 신약학교수 였던 Machen 박사가 1924년에 펴낸 “기독교와 자유주의” (Christianity and Liberalism) 이라는 책에서 “자유주의 자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라고 한 말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오늘 날에도 이 다섯 가지를 믿지 않는 타 종교 와도 “하나" 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단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 어디에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과 하나가 되라“ 고 가르칩니까? 성경은 오히려 그 반대로 가르칩니다 (고후 6:14절 이하).

<근본주의, Fundamentalism> 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침례교 목사인 Curtis Lee Laws 라는 분으로 그는 당시 침례교 잡지인 에서 1920년에 근본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습니다. 그 무렵 같은 침례교 목사인 John Roach Straton 은 새로운 신문을 발행하면서 그 이름을 라고 명명한 일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인하여 근본주의는 이제 도처에서 <성경을 성경대로 바로 믿자>는 사람들 속에서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근본주의를 말함에는 여러 가지 단계를 언급해야 하는데, 처음에 이렇게 건전하게 시작된 근본주의가 1950년대를 거치면서 그 색상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초기의 근본주의가 주장하던 교리, 이를테면,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기적의 역사성, 그리고 그의 대속의 죽믕, 그의 육적인 부활 등은 모두 개혁주의와 일치하는 교리들입니다. 그래서 초기의 근본주의는 아무것도 잘 못된 것이 없습니다. 훌륭한 성경 수호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시대를 거치면서 점점 양상을 달리합니다. 성경을 수호하려는 목적으로 저작된 “The Fundamentals” (근본주의 교리) 라는 12권짜리 책을 앞서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그 책에 기고한 사람들은 모두 개혁주의자들이 아니고, 아르미안주의자, 세대주의자, 천천년주의자, 후천년주의자, 무천년주의자 등 실로 salad bowl 처럼 다양한 색깔의 신앙이 총망라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공동의 적 (Public Enemy)> 이 <자유주의> 라서 성경의 기본 교리를 수호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뭉쳤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요소의 크고 작은 교리의 혼합으로 인하여” 근본주의 신학에는 개혁주의처럼 <확고하고 일정한 교리>를 정립하지 못한 것이 결점입니다.

이 말을 좀더 설명하자면, 근본주의는 장로교만 아니라, 침례교에서 더욱 열심이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침례교 내에서의 근본주의자들의 신학은 오늘까지도 미국 남 침례교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타락한 장로교 교회 보다는 차라리 건전한 침례교에 출석하는 편이 훨씬 성경적입니다. 근본주의는 다른 교파에게도 전수되어옵니다 근본주의는 Dwight L.Moody 같은 분에게도 전수되어 Chicago 에 Moody Bible Institute 라는 신학교를 세우기도 하고 Moody Press 라는 춮판사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Moody 는 근본주의 자이면서 세대주의자 였고, 무디 성경학교나 무디 출판사도, 또 그들의 월간잡지 도 모두 세대주의 신학을 가르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Moody 는 세대주의를 믿는 부흥사 였고 Moody 성경학교도 세대주의를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또한 Dallas 신학교, Bob Jones 대학, 필라델피아 성경대학 (PBU Philadelphia Bible University=PCB 의 후신), Grace Theological Seminary(Winona Lake, Indiania, 또한 남가주에 있는 BIOLA (Talbot) 등이 세대주의를 가르치면서 근본주의를 따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Pat Robertson, Carl MacIntyre, Jerry Falwell 등이 모두 근본주의자 들입니다. Ronald Reagan 대통령이 출마할 때 근본주의자들의 활동이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운 누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근본주의는 1910년에 UPCUSA 교단 총회에서 결정한 다섯 가지 교리 1. 성경의 모오성 2.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3 예수님의 기적의 역사성 4.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그리고 5 예수님의 육적인 부할 등으로, 근본주의자들이 믿는 교리인데 이런 교리라면 아르미니안주의자 (Arminians) 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Arminian 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 가 아님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가 근본주의 의 교리를 믿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주의가 개혁주의 의 신조 전부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참고로 개혁주의가 믿는 교리를 말씀드리지요
<개혁주의의> 란 의미는 사회전반에서와 우리의 믿는 교리와 사회생활을 성경의 가르침으로 개혁해 날마나 계속해서 나가자는 것입니다 (Reforma Semper Reformanda)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의 신앙면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시회 전반을 개혁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만 묵상하고 가만 교회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에 열심히 참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복음주의 (Social Gospel) 과 다릅니다. 사회복음주의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사회개량 (social amelioration) 을 추고하고 개혁주의는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회개시켜 그런 사람들이 정직한 사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회로 마들자는 것입니다.

마치 칼빈이 프랑스 Strassburg에서 스위스의 Geneva 로 가면서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만들자” 고 외친 것과 같습니다. 개혁주의는 적극적으로 인간의 심성을 개혁하며 적극적으로 성도의 생활을 개혁하고, 결과로 사회를 개혁해 나갑니다. 신비주의자처럼 신속에, 혹은 사막에서 운둔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목적으로 개혁주의는 세 가지 원칙을 세웁니다. 1. 하나님의 절대주권, 2 성경의 절대적 권위, 3. 생활의 성경화 입니다. 이 말을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높이어 순종한다는 것과, 성경은 신구약성경이 통일된 일관성이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원본에 있어서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것과 성경의 필요성necessity), 명료성(perspicuity), 그리고 충족성(sufficiency)을 믿는다는 것인데 <충족성> 이란 옛적에 성경이 완성되기 전, 기록과정에서 하나님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주셨던 <계시>, <환상>, <꿈>, <천사의 방문> 등의 현상이 성경이 완성된 지금은 그쳤고 완성되어 기록된 성경만 인정한다는 것이며, 구원의 도리가 모두 성경에 기록어 있어서 더 이상의 계시가 필요 없으니 사람은 이미 기록된 성경의 가르침대로 생활해야 한다는 의미 입니다.

이상과 같은 원칙을 가지고 있는 개혁주의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교리를 믿습니다.
1. 인간의 완전 타락 (Total Depravity of Man)
인류의 시조이며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이 타락하여 그 타락한 성품이 후손에게
유전되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에게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

2.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지옥에 들어갈 인생 중에서 하나님은 구원 얻을자를 창세전에 택해 주셨는데 우리가 믿을 것을 근거로하여 택해 주신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의 공로 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기쁘신 뜻대로 그의 백성을 무조건적으로 택해 주셨다는 말씀. 이는 같은 근본주의를 믿는다고해도 아르미니안 주의 와는 정반대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아르미니안 주의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을 뿐>, 우리의 구원을 완성했다고(accomplishment of Redemption)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 므로 저들의 선택설도 “예지예정론”입니다. 즉 인간의 편에서 믿을 것을 아시고 이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택애 주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지 않고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아르미안주의자와 개혁주의 자는 서로 합의할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개혁주의자는 <독력구원설, monergism>을 믿고 아르미니안주의자는 <협력구원설, synergism>을 믿습니다.

3. 제한된 속죄 (Limited Atonement)
예수님의 죽으심의 효과의 능력은 온 세상을 덮고 남음이 있지만 그 효과가 적용
되는 대상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에 한합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 아르미니안 주의는
예수님의 죽음은 온 세상을 위한 죽음이고 그 죽음의 효과를 얻는 것은 내가
나의 자유의지로 예수를 믿을 때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저들에게는 인간의 행위가
앞섭니다.

4. 무저항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한번 구원의 특별은혜를 받으면 거역할 수 없이 구원을 반드시 받게 된다는 가르침, 이것도
구원 은 내게 달려 있다고 믿는 Arminianism (아르미니안 주의) 와 다릅니다

5. 성도의 궁극적 인내 ( Perseverance of the Saints)
한번 구원을 얻은 사람은 구원을 영원히 상실하지 않는다는 가르침.
1618-1619 화란의 도르트 공회 (Council of Dort) 에서는 <아르미니우스>의 제자들이 이 교리에 정
반대를 주장했습니다. 성도는 한번 구원을 얻어도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가르친 Lyden 대학 조
직신학 교수 James Arminius 교수의 제자들이 이 소송을 1610년에 화란정부에 제기했으나 (이 제소
자들을 remonstrants 항의자 라고 함) 총 87명이 모여 153차에 걸친 회의 결과 아르미니안 주의들
의 주장이 그릇된 것이 판정되어 유명한 (드르트 신경, 1619) 이 나오게되어 오
늘 세계 에셔 개혁주의를 믿는 교단들은 <사도신경> 과 같이 모두 <도르트 신경> 을 받아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교리를 가지고 있는 개혁주의는 다음과 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주장합니다.
1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성경의 필요성, 명료성, 권위, 충족성)을 믿습니다 따라서 직통계시, 환상, 꿈, 천사 의 내방 그밖의 초자연적 현상등이 성경완성된 이후에는 종결되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오늘 대부분의 교회의 가르침과 현저하게 다른면입니다.

2. Sola Fide (오직 믿음)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수단이며 방편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 지는 것입니다. 영어로 나타낸다면, 꼭 외워 두시기 바랍니다.

3. Sola Gratia (오직 은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의 공로는 조금도 가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창조부터 타락한 우리가 재창조에 이르기까지, 그 리고 우리의 생활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에게서 그의 전제주권 (Sovereignty)에서 오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선물입니다.

4.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우리의 구주는 바로 “참 인간” 이시며 “참 하나님” 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마리아가 우리의 구주가 아닙니다. 그도 우리와 같이 구주가 필요한 분입니다 (눅 1:46 참고).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 습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의 신앙임니다.

5.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 인 생이 사는 목적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그에게 순종하면서 살아가자는 교리 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요즘은 교회마다 제멋대로 자기 편한대로 교인들이 원하는대로 예배를 드리지만 개혁주의자들은 성경대 로 예배를 드립니다. 성경에서 지시한 대로 예배합니다. 성경에 하라는 말도 없고 하지 말라는 말도 없으면 하지 않는 것이 다른 신학과 개혁신학의 다른 점입니다. 다른 신 학에서는 하라는 말도 하지 말라는 말도 없으면 자행합니다. 이것이 예배에 있어서 개혁주의와 다른 교파와 다른 차잇 점입니다.

지금까지 개혁주의 신학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근본주의 와 개혁주의는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가? 이런 관점을 생각해 봅시다. 신근본주의란 초기의 근본주의에 근거를 두지만 1940년대 Carl McIntyre, Pat Roberton, Jerry Falwell 등을 중심한 후기 근본주의를 말합니다. 현대 교회는 대부분 신근본주의를 따르면 초기의 근본주의 (Machen 막사나 침례교의 Laws 목사가 주장했던) 를 믿는 교회는 드믑니다.


1. 신근본주의가 성경의 기본 교리를 옹호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개혁주의와 같지만
개혁주의가 성경의 가르침을 남에게 전파하려는 사역에 더욱 중점을 두는 반면 신근 본주의는 말씀을 전파하기보다 오히려 자신들의 신앙을 사수하려는 일에 더욱 중점을 두며 공격적이라는 점이 개혁주의와 다릅니다

2. 성경의 진리를 사수한다고 하지만 신근본주의자들은 <다섯 가지 기본교리> 이외에 다른 교리의 차잇점은 무시하고 외면하는데 반하여, 개혁주의는 성경의 모든 가르침 을 모두 균형 있게 가르치면서 다른 교리를 비판하여 토의하려는 태도를 가진다는 점에서 서로 입장의 차이를 보입니다. 아마도 신근본주의가 이런 면에서 어두운 것은 개혁주의가 순수한 하나님의 주권주위를 우선순위로 하는 반면, 신근본주의 안에는 아르미니안 주의, 세대주의 등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세대주의 와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이며 근본주의가 전천년설을 믿는 것과 같이 세대주의자 (Dispensationalists)는 모두가 전천넌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전천년설을 믿는다고해서 모두가 세대주의자는 아닙니다. 전천년설에는 “역사적 전천년설” 이 있고,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이 있는데 <역사적 전천년설>을 믿는 사람은 세대주의자가 아닙니다. 근본주의는 전에도 언급한 대로 다섯 가지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세상을 개혁하기 위한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대한 교리는 그들의 문헌에서 비교적 언급이 적습니다. 반면에 개혁주의는 하나님이 주신 세 가지 제도 즉 가정, 교회, 극가 에 대해서 모두 개혁을 주장합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전체가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3. 신근본주의는 1675년에 독일사람 Philip Jacob Spener 가 쓴 이라는 책으로부터 비롯된 이른바 “경건주의, Pietism) 의 영향을 받아서 경건주의 의 특성인 성경연구, 기도회, 교회 출석, 음주 금연, 극장출입 금지 등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감정주의 (Emotionalism)를 중히 여기고 이를 충실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등 개인의 경건한 신앙생활에 역점을 두며, 사회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다는 면에서 개혁주의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 의 이른바 ”보수교회“ 가 대개 이런 신 근본주의 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먼 거리에 사는 성도가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뼈스를 이용했다하여 중징계를 받은 사례가 과거 한국의 모 <보수 교단>에서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개혁주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음주 금연 문제는 신근본주의가 특히 강조하는 면입니다

개혁주의는 물질 자체를 나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모두 선하지만 사람이 그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물질이 죄를 짓는데 사용될 수도 있고 우리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같은 테이불이라도 거기에 둘러 앉아 도박을하면 그 테이불이 나쁜 것이 아니고 사람이 나쁜 것이며 그 테이불에 학생들이 앉아서 공부를 하면 그 테이불이 좋은 것이 아니고 학생들이 좋은 것입니다. 물질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없습니다. 그 물질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이 문제가 됩니다.

4. 신근본주의는 교회론 (ecclesiology)에 특히 관심을 가지는데, 교회의 성격면에서 무형 교회와 유형교회를 논함에 있어서 무형교회의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유형교회와의 연합은 등한시합니다. 따라서 신근본주의 교회는 고립된 상태에 있게 됩니다. 같은 신근본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어도 서로 반목 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개혁주 의 자는 개혁주의 신조들을 믿는 교회들이라면 그들과 연합하여 강단 교류나 선교활동이나 사회 윤리를 바로 잡는 활동에 동역합니다. 개혁주의 기본 원칙만 지 키는 교단 이라면 손잡고 일을 하며 배척하지 않습니다. 예룰 들어 설명하자면, 개혁교단은 순 복음이나 감리교나 천주교 사람들과는 같이 일을 못하지만 예배시에 악기를 도무지 인정치 않고 사용하지 않는 교단인 RPCNA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 북미주 개혁장로교단 Pittsburgh, PA 소재)라도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 즉 베르기 신앙고백서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나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를 받아 드리고 1560년의 스콧틀란드 신앙고백서, 1569년의 프랑스 유그노 사람들의 프랑스 신앙고백서, 또 1619년의 도르트 신경이나 1647년 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등을 믿는 교단과는 강단교류는 물론이고 협력 선교를 합니다. <유그노 사람> 이란 프랑스에 있는 킬빈주의 성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 Huguenots 들이 1572년 8월 24일 “성바돌로메오의 날”(St. Bartholomew's Day) 에 프랑스 전국에서 칼빈주의자 성도들 10만 내지 20만명이 천주교에게 학살 당했던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를 부르짖는 J.I.Packer 목사가 개신교와 천주교가 연합하여 선교한다는 이른바 (개신교 천주교 공동 선교기구) 에 가임하여 서명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1994년 이 운동이 태동하던 무렵에 Canada Vancouver 에 있는 Regent 신학교로 J.I.Packer 교수에게 이에 대한 해명요구 편지를 보냈었는데 그는 필자에게 보내온 회신에서 “그 일은 Charles Colson 이라는 감옥 선교 하는 분이 시작한 것을 측면에서 도와준 것 뿐이며 직접적인 책임은 없댜“ 고 말했지만 그 문 서에 Packer 가 서명한 것이 사실이고 보면 어디까지 그 말을 믿어야 할지 모릅니다. 이에 대해서는 John Ankerberg 와 John Weldon 두 사람이 공저한 책을 보시 면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있는데 그 책의 이름은 이라는 paperback 으로 Eugene, Oregon 에 있는 Harvest House Publishers 에서 1995년에 펴냈습니다. Ankerberg 와 Weldon 은 배교의 현장을 답사하여 연구하는 신학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신 근본주의> 는 개혁주의와 외견상 닮은 점이 많이 있지만 내용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상당히 다른 검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도움이 되셨는지요?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 에 속한 교회들은 모두 신근본주의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경건주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구라파에서는 개혁주의는 고사하고 기독교 교회 자체가 점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슬람교 회당이 점점 늘어나며, 교회는 공장으로 변신하는 형편이고 Scandinavia 반도의 나라들에서는 동성 연애하는 목사들의 수가 늘어만 갑니다. 개혁주의의 보루였던 화란의 GKN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화란개혁교단) 은 아주 좌경되어 VGKN (Vrije Kerken in Nederland, 화란 자유개혁교단) 이라는 새로운 교단과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전자는 극좌이고 후자는 개혁주의 교단입니다.

2011년 5월, 미국의 PC(USA) 라는 교단에서는 동성연애하는 여자들도 목사 장로로 안수하도록 결의했습니다. 배교는 끝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운 줄 모릅니다. 성직자들이 소곰과 고모라를 잊었는가요? 요다단 에드위즈가 1741년 7월 8일 Conneticut 주 Enfield 의 회중교회에서 신명기 32:35 을 본문으로 “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들어있는 죄인들‘ 이란 설교의 마지막 구절은 “Remember Lot's wife." (롯의 처를 생각하라) 였고 청중은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가슴을 치며 회개하며 통곡하는 바람에 30분 짜리 설교가 1시간을 훌쩍 넘겨 끝났던 일이 있습니다. 오늘 이런 설교를 하는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가슴을 치면 통곡하는 교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때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통회 자복하여 교회가 살았고 오늘의 우리는 통회 자복이 없이 “웃음” 과 “만담” 만 추구하여 교회가 병들어 갑니다.

개혁주의는 한국에서는 생소하고 한국에서 개혁주의를 가르치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미국에서도 점점 개혁주의 신학은 자취를 감추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마지막 때의 징조는 사람들이 진리에서 떠나간다는 것입니다(딤후 4:1-5; 눅 18:8, 딤전 4:1-2). 목사도, 교회도, 심지어 신학교도 모두 진리에서 떠나갑니다. 문화에 동화되어 갑니다. 타협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에는 타협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한 길만 달려갈 뿐입니다. 주님 재림시까지...

참고로 개혁주의에 대한 책을 보시려면 Gordon Clark 박사가 집필한 <장로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What Do the Presbyterians Believe?> 라는 책을 보시면 좋고 신앙고백서로는 1559년의 French Confession (프랑스 신앙고백서), 1561년에 나온 Belgic Confession (베르기 신앙고백서), 그에 입각해서 만든 1563년의 Heidelberg Catechism (하디델베르그 요리분답), 1566년의 Second Helvetic Confession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1619년의 Canons of Dort (도르트 신경), 1647년의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996년의 Cambridge Declaration (케임브릿지 선언) 등을 보시면 우리가 믿는 개혁주의 신학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은 신학 부재 시대, 복음 부재 시대입니다. 복음이 널리 전파된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이 아닌 거짓 복음, 왜곡된 복음이 독버섯 처럼 온 천하를 휩쓸고 있습니다. 바로 믿고 바로 생활하는 것은 성도로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신앙을 생명보다 더 귀합니다. 개혁주의와 신근본주의의 차이, 개혁주의와 순복음교리의 차이, 개혁주의 와 세속주의, 기복신앙, 사회복음주의, 레노바레 운동, 알파 코스, 빈야드운동 과의 차이들을 바로 알아 속지 말아야 합니다. 모르면 속습니다. 사장에서 물건을 살때도 식견이 부족하면 거짓말하는 장사꾼에게 속아서 거짓 상품을 사게 됩니다. 영계에는 거짓이 횡횡하고 양의 옷을 입은 이리떼들은 여기저기에서 어수룩한 교인들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입니다.

개혁주의와 신근본주의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바른 믿음을 지키려는 교단들입니다. 물론 세대주의나 순복음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요즘 등장하는 Brian McLaren, Doug Pagitt, Tony Jones, Rob Bell, Rick Warren, Richard Foster, Joel Osteen, Bruce Wilkinson, Thomas Keating, Pierre Teilhard de Chardin, Gerald Jampolsky, Abraham Maslow, Helen Schucman, Joseph Price, C. Peter Wagner, Henri Nouwen, Robert Funk 등과 같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신학들을 눈을 똑바로 뜨고 경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영의 눈을 떠야 할 때입니다. 평신도가 목사보다 더 똑똑해야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의 차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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