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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광맥 [2부 제1장 개혁파 스콜라주의 정통신학의 흐름]

by 【고동엽】 2021. 11. 10.

개혁신앙의 광맥 2부 제1장 개혁파 스콜라주의 정통신학의 흐름http://cafe.daum.net/CPI2002/aFf/44

 

종교 개혁 이후부터 계몽주의 사이에 발전된 신학을 ‘종교 개혁 후기 정통신학’이라 부르며, 이 시대에 개혁신학은 가장 학문적으로 발전하지만 동시에 종교 개혁을 주도했던 처음 제1세대들이 가졌던 역동성과 영향력이 서서히 감퇴되는 시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는 종교 개혁자들이 제시했던 신학을 기초로 정통신학을 수립하고, 순수하고 가장 고전적인 신앙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자 노력했던 시대이다. (시기:16c~17c 중엽까지, 명칭:스콜라주의, 정통신학, 스콜라적 정통신학) 스콜라적이고 하는 말은 교리의 체계를 중시하는 신학 방법론을 채택하면서, 이성과 철학을 사용하는 독특한 특징을 갖고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16세기 전반기 종교 개혁 초기의 신학은 체계적인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로마 가톨릭의 논리적 체계에 대한 반감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의 후계자들은 첫 세대의 신학적인 공헌에 근거하여 다시 한 번 후기 르네상스 시대 때 채택했던 아리스토텔레서의 사상을 재생시켜 체계적인 조직화를 시도 하였다. 하지만 종교 개혁 후기 스콜라적 정통신학은 그들이 표현하려는 방법론에서는 논리성과 체계적인 이성 중심의 전개 방식을 채택하였다 하더라도 내용은 여전히 종교 개혁의 신학을 따라서 발전시켰음을 유념해야 한다.

정통신학이라는 말은 바른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정통신학의 시발점은 1564년 존 칼빈이 서거하고, 1563년 젊은 학자들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출간하는 시기로부터이다. 이 시기에는 확실히 신학의 진술 형식과 체계가 달라졌다. 이 시기는 제2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1640년대부터 1700년까지는 정통신학의 전성기로 본다. 그 이후 1700년에서 1790년까지는 정통신학의 후기 시대로 규정한다.

 

초기 개혁파 정통신학

종교 개혁의 신학이 초기 정통신학으로 전환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다.

1. 트렌트 선언에 대흥하기 위해서 개신교 진영의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다시 한 번 종합적으로 재구성하는 노력을 경주하였던 것이다.

2. 종교 개혁 이후 세대가 앞 세대의 신앙을 계승하고 다시 한 번 개신교의 정통성을 확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신학 전반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규정하고, 논리적 체계적 기술을 개발하여 좀 더 명확한 신학을 구성하려는 토론과 교육적 방법론을 채택하였고, 이를 ‘스콜라주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중세 스콜라주의와 구분)

 

초기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문을 연 작품은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이다. 우르시우스는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을 해설하면서 더욱 정교한 체계를 시도하는 신학적인 진술 방식을 강조하였다. 그의 후게자인 제롬 잔키우스에 의해서 스콜라적 방법론은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독일 개혁신학은 칼빈의 신학과의 사실적인 차이는 전혀 없고, 단지 형식과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 제롬 잔키우스 :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용했던 형식을 채택하였는데, 삼위일체의 속성과 외적 사역간의 관계를 종합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들 초기 정통신학의 주도적 신학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스콜라적인 방법론을 채택한다고 해서 성경적인 교리를 약화시키거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중세 말기에 사용했던 스콜라주의자들의 질문을 그대로 다루면서, 개혁신학 내에 스콜라주의적인 방법론을 가져온 장본인이 되었다. 그의 책, ‘세 엘로힘에 대해서’,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성육신에 대해서‘ 등은 모두다 제네바에서 출간되었다.

- 유니우스 : 스콜라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여 초기 개혁신학 형성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서 하이델베르크와 라이덴에서 정교한 체계적 사유와 논지를 펼쳤다. 훗날 알미닝우스의 사상은 거의 대부분 유니우스의 사상을 확대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종교 개혁신학의 첫 세대에서 초기 정통신학으로 변환되는 전환점에서 무엇이 그 특징으로 등장하였는가를 살펴보자. 그 전환기에는 단순히 교회의 개혁에 머무르지 않고, 개혁된 교회를 옹호하고 신앙 고백의 진리성을 지키기 위해서 신학의 진술 방식과 방법에 있어서 더욱 체계적인 형식을 정립시키고자 노력하고 개혁 교회를 확고히 정통화하려는 것이었다. 경건한 설교와 강의는 초기 정통 신학자들이 기술적인 신학을 개발하여 가르치는 신학교 교리 훈련과 교육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 폴라누스 : 폴라누스의 영향으로 베자의 신학과 돌트 총회 사이에 정통 신학의 발전이라는 중요한 시기가 채워지게 된다. 폴라누스는 아리스토텔레서의 네 가지 인과율과 삼단논법을 채택하였다. 그는 신학은 믿음과 선행이라는 두 가지 내용으로 나눠지고, 윤리적인 열매를 맺게 해 주려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실천을 중시하는 라무스의 영향이 매우 깊이 배어있다. 그는 이성을 성경보다 중시하지 않았으며, 논리적 이론이나 형이상학적인 회의를 중시하지도 않았다. 그의 사상의 후계자 볼레비우스와 발라에우스에 의해 폴라누스의 신학 체계의 대한 종합적인 서론이 매우 체계적이고도 광범위하게 시도된다.

 

이런 발전이 이루어진 이유 중 하나는 초기 개혁주의 정통 신학자들의 참여하고 대처해야만 되었던 논쟁적인 시대 상황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를 들면, 초기 정통신학의 시대는 라미즘의 시기였다. 그러나 모든 개혁자들이 다 라미즘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 정통 신학자들은, 그들이 라무스의 이분법을 채택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모두 다 성공적인 신학 체계를 남기려는 의도를 가지고 보편적인 진술 체계를 사용해서 교회를 옹호하고 보호하는 교과 과목을 만들고자 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방법론은 ‘이론’과 ‘실제’의 구별과 구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론적인 부분은 체계화를 꾀하는 종합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연역적인 접근과 목적론적 접근이 그 특징이다. 실제적인 부분은 귀납적인 접근으로 분석이 주로 사용된다.

초기 정통신학은 로마 가톨릭의 논쟁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가운데 스콜라적인 접근이 오히려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또한 루터파 신학자들의 혼돈을 명쾌하게 지적하고 대처하는 데 있어서 종합과 분석이 진가를 발휘했다.

그밖의 정통 신학자들...요한 하인리히 알스테드, 베네딕투스 아레티우스, 부타누스, 샹디외와 물랭, 랑베르 디노, 고마루스, 요한 폴리안더, 루카스 트렐카티우스, 룹베르투스, 마코비우스, 바도로메 케커만(책 p.274~276 참조)

 

스콜라주의 정통신학의 절정기

신학의 발전과 성숙은 결코 그 시대의 사조와 정치와 사회 상황을 벗어나서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개혁 신학의 정통성 확보에 노력해야만 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전체 개신교 진여에 불어 닥친 불안한 그림자를 목격하면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종교 전쟁과 이후 지역별 국가 체계 등장) 정치 격동기에는 신학도 역시 영향을 입어서 이 시기에는 매우 논쟁적으로 바뀌었다. 격동의 시기가 지나고 난 후, 1640년대부터 17세기가 끝나는 무렵까지를 정통신학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 비로써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많은 저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방법론이 제기되었다기 보다는 좀 더 정교한 신학의 세분화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초기정통 신학자들의 논쟁 대상이 주로 가톨릭의 신학이었다고 한다면, 보다 정확하게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에 대항하고 루터파의 모순과 제세례파 같은 전통적인 이단들에 대한 논쟁이었다면, 후기 정통신학은 자체 내의 신학적 이질감을 해소하고 개혁신학의 핵심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쟁이 많았다.

정통신학의 절정기는 개신교 신학의 최종 발전 단계이자 꽃이 핀 시기로서, 18세기에 새로운 계몽철학이 등장하여 신학의 체계를 완전히 철학적 사고에 의존하게 되기 직전까지 지속적으로 논쟁적이요 종합적인 체계를 발전시켰다. (프랑수아 뒤르땡, 베네딕트 삑테, 존 오엔, 토마스 왓슨, 에드워드 라이흐 등)

 

초기 정통신학은 논쟁적이 아니었고, 주로 조직신학의 각론과 특히 신론을 집중적으로 발전시켰고, 성경의 권위와 삼위 일체론은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논쟁적으로 발전시켰고, 반삼위일체론자들의 이단에 대항해서 많은 저술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1640년대 이후 스콜라적 정통 신학자들은 일종의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독일 출신 요한네스 코케이우스는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개혁 교회의 입장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성경을 전제 없이 주어진 상황과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직신학자들이 채택하는 용어를 기피하고 오직 성경에서 나오는 용어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엄격하게 성경적 해석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성경의 문맥화, 상황화는 문제를 일으켰다.(무리한 풍유적 해석, 성경을 지나치게 역사화해서 해석, 안식일의 문제 - p.282~283) 네델란드 대학의 대부분은 코케이우스파가 교수직을 차지하였다. 대체적으로 정통신학의 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세밀한 부분에서는 다른 점도 많았다. 코케이우스는 예정론에는 별로 강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에티우스파는 점차 약화되었고, 침묵하였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신학자은 벤데린과 보에티우스 두 사람을 손꼽을 수 있다. 보에티우스는 탁월한 언어 실력을 바탕으로 거의 30년도 더 넘게 국제적으로 스콜라적 칼빈주의 대변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교회론에 앞장 서서 공격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국가나 세속 권력이 교회의 독립성을 훼손해서는 안될 것을 주장하였다. 국가의 보호 아래서 교회가 신학적인 이견이 있을 때에는 서로 관용해야 한다는 것도 반대하였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잘못된 사조가 널리 퍼져서 국가와 교회 모두에 대한 약화를 가져 온다고 반박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매우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진력하였고, 개혁주의 경건과 실천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코케이우스와 보에티우스와의 논쟁을 언약신학 대 예정론 중심의 스콜라주의 간의 대결로 설명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오히려 코케이우스는 언약 개념의 해석학적 의미를 강조한 반면에, 보에티우스는 개혁주의적 전통의 해석법으로 고수하려는 차이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 밖의 신학자... 마르키우스(성경 주석), 헤르만 위시우스(교의학 체계의 정점), 브라이언 왈톤(런던 성경), 이드분드 카스텔(어휘 사전), 하이데거(역사 신학과 윤리학, 신학총론), 루이 까펠(성경 권위에 관한 문제는 성경비평학의 발전을 가져옴).

 

개혁주의 정통신학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을 때에, 독이에서 루터파 정통주의에 맞서서 새로운 경건주의 운동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목회하던 필립 야콥 쉬페너와 헬라어 교수 아우구스트 페르만 프랑케의 선도하에 일어나면서 양측이 격렬한 논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루터파 교회는 칭의론을 잘못 이해하여 호화롭고 방탕한 귀족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건주의 운동은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신학 교육의 갱신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경건주의는 요한네스 벵겔에게 깊은 영향을 미쳐서 풍부한 자료를 근거로 한 신약주석을 저술케 하였다. 반면에 경건주의 운동에는 개인의 주관에 빠질 위험성이 있으며, 내세 지향적이요, 교회 속의 교회를 부르짖는 분리주의적 요소가 있으며, 금용적이자, 반율법적이요, 반지성적이라는 평가였다. 경건주의는 정확한 교리와 신학의 정립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갱신에 초점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모습은 경건의 정신에 항상 부합되는 것이 아니었다. 계몽주의 확산으로 18세기 전반에 이르면 경건주의 운동도 역시 밀려나게 되었다.

정통신학의 절정기에 일어난 중요한 변화중 하나는 신학과 철학과 자연 과학을 함께 아우르는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종합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후기 스콜라 정통신학과 이성주의

1700년에서 1739년까지를 후기 스콜라주의적 정통신학의 시대로 볼 때, 두 가지 기본적인 역사적 변화가 있었다. 앞선 세데에서 과학과 천문학의 관점이 달라졌고, 철학의 방법론이 완전히 새로워졌다는 점과 이제는 교의학이 모든 신학의 중심에 서게 되고, 교리 중심의 성경 해석이 압도적이 되었다는 점이다. 1700년 이후에도 스콜라주의 개혁신학이 존재했지만, 일부에서는 경건주의자들의 도전에 밀리게 되고, 사회 전반적으로 교리적 무관심과 이성주의가 압도하게 되어 영향력이 서서히 퇴조하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유럽의 정통 개혁신학은 완전히 쇠퇴기에 접어들며, 정체화에 빠져들고 만다. 경건주의는 신앙의 생활화와 교리의 실제적인 적용을 강조하면서 스콜라적인 신학에 비판을 가하였다. 이 당시에 상당히 호흥을 얻었던 교리에 대한 무관심주의는 일부 신학자들이 교리의 차이에 대해서 매우 관용적이요 자유스러운 견해를 발펴함으로써 ‘라티튜디내리언이즘’(범교파주의)이 더욱 확산되었다.(윌리엄 칠링워드, 듀리)

 

정통신학의 마지막 세대는 1740년에서 1790년으로 볼프 교수가 할례 대학으로 복귀하던 시대로부터 칸트의 영향력이 증대되던 1790년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볼프는 라이프니츠의 원리들을 체계화하면서 자신의 종합적인 철학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볼프는 연역적인 이성보다는 역사를 그 아래 단계의 지식으로 규정한 것이다. 볼프가 이성에 최대의 신뢰를 두는 점이 개인의 역사적 체험과 실천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자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볼프는 임마누엘 칸트의 비판 철학을 태동시킨 사상적 기초이자 배경적인 인물이 되었다.

볼프의 개혁신학적 방법로은 여전히 스콜라적이었지만, 전통적인 교의학에서 다루어지던 내용이 완전히 제거되고, 그의 신학 저술은 새로운 신학 체계로 대체되어 버렸다. 그래서 성경적인 원리라든가, 계시에 대한 이성의 복종이라든가 하는 일반적인 신학의 체계가 없어져 버렸다.

이성의 시대에, 참례교 칼빈주의자 존 길은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하면서, 초자연주의에 대해서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며, 기울어져 가는 정통신학을 옹호하였다.

 

칼빈주의와 루터파의 중요한 차이점 (p.292~298참조)

루터파와 개혁파 양 진영이 모두 다 종교 개혁의 주요 교리에 대해서는 일치한다. 그러나 좀더 세부적인 사항으로 들어가면 성경의 핵심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차이가 드러난다.

 

개혁 교회 내의 신비주의

정통신학의 발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비주의가 개혁교회에도 소개되어 일부의 영향을 미쳤다. (졸 라바디, 피터 뽀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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