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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학(고광필) 부록 - 현대적 접근의 문제점

by 【고동엽】 2021.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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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에 대한 현대적 접근 방식의 문제점


칼빈의 성경해석 방법은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은 자타가 공인한 바이다.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자는 성령님의 가르침과 내적 조명을 받아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현대 해석학의 접근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해석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해의 구조와 지평을 넓혀 줄뿐이다. 여러 해석학적 접근방식 중에서 언어의 사용을 보는 문법적 언어 분석은 역사적 문법적 성경해석 방법의 깊은 통찰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성경해석에 대한 현대적 접근방식은 크게 두 조류로 나눌 수 있다. 유럽을 중심으로한 현상학적 실존적 접근방식과 영국을 중심한 일상언어 접근방식이다. 전자는 쉴라이허막허에서 시작하여 가다마(Hans-Georg Gadamer)에 이르는 해석학이며 후자는 비트겐슈타인(Luwig Wittgenstein)을 중심한 문법적 분석(grammatical investigation)을 통한 해석학이다.


세상학문은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모든 학문은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공부해야한다는 칼빈의 말은 옳다. 이 말은 모든 학문을 무조건 배타적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로 이해하고 싶다. 성경의 절대무오와 성령의 조명을 대 전제로 한다면 학문의 통찰력을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현대접근 방식은 인간 이해의 구조를 보다 잘 이해하고 지평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문법적인 언어분석 방법은 칼빈의 역사적 문법적 성경해석 방법의 통찰력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현대접근 방식을 간단히 설명하며 그들의 문제점을 칼빈의 성경 해석학적인 관점에서 고찰함을 주 목적으로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양 접근방식의 문제점을 살피며, 성경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방법은 역사적 문법적 해석이며, 핵심은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으로 믿으며 성령의 내적 조명과 가르침이 필수적임을 제 천명하고자 한다.

I.대륙적 접근방식(현상학적 실존적 해석학)

전통적으로 고대 해석학은 고대 문서의 이해를 위한 규칙들의 공식화에 있었다. 해석자는 문법, 어휘, 문체들을 포함한 텍스트의 언어로부터 출발했다. 즉 텍스트의 언어적, 문화적, 역사적 문맥을 조사함으로서 해석학이란 역사적인 맥락에서 조건 지워진다고 봤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 해석학이란 텍스트의 역사적 맥락이란 양면적 즉 해석자와 택스트간의 관계성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anthony C. 씨슬톤, <두지평>, 권성수외 역[총신대학출판부, 1995], 40).


종교개혁 이후 계몽주의 영향으로 오직 성경만(Scripture alone)으로가 아니라 오직 이성만(reason alone)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모든 것은 이성의 검증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고등비평이 등장하게 되었고 성경도 다른 문서와 동일하게 취급하고자하는 사조가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이 신학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신학의 유일한 규범인 하나님 말씀의 계시에서 신학을 시작하기 보다는 인간의 인식론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자는 하는 성향이 강해져갔다. 그래서 성경해석학도 철학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현대 성경 해석학의 선구자로 불리우는 쉴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는 “이해의 기술”(the art of understanding)로서 보편적 해석학을 시도했다. 이해하는 기술은 모든 학문에 다 적용할 수 있으며 성경도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 이해의 기술이라는 말은 화술적인 기술이 아니라 말해진 바(text)를 이해하는 기술인 것이다. 다시말 하면, 이해의 기술은 말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구별을 의미한다. 해석에 있어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해석학에 있어서 중요시하게 되었으며 이해의 기술로서 해석은 텍스트 저자의 정신적(심리적) 과정을 감정이입을 통해서 다시 체험(추체험)하는 것이다(리차드 E. 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이한우 역[문예출판사, 1993], 132). 여기서 문제점은 성경을 성령님의 조명이 아니라 감정이입에 의해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쉴라이에르마허 이후에 해석학에 획기적인 선을 그은 사람이 빌헤름 딜타이(Wilhelm Dilthey)(1833-1911)이다. 딜타이는 하이덱거, 불트만, 가마다머에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상가로서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en)과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을 분리 시켰다. 전자는 설명을 기초한 과학이며 후자는 이해를 기초한 학문이라고 했다. 딜타이는 정신과학에 기초한 해석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딜타이에 의하면 해석이라는 것은 사변이 그 출발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 출발점이라고 믿었다. 구체적인 경험은 역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기 성찰은 내면적인 것 뿐 만 아니라 실존의 역사성(geschtlichkeit)을 인식하는 것으로 봤다. 실존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로크와 흄 그리고 칸트에 의해 구성된 <인식하는 주관>의 혈관 속에는 살아있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딜타이는 비판했다(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154에서 재인용). 이해에 있어서 감정과 의지, 이성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고 구별하는 데서 오는 이해는 뜨거운 피가 아니라 냉냉한 피가 흘러서 생동감이 없는 이해와 같은 것이다.


딜타이에 있어서 역사성이란 인간의 자기이해(self-understanding)를 말한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한정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이해가 역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과거 사실을 오늘의 현재에서 이해할 수 있는가? 삶의 객관화(objectification of life)룰 통해서 이다. 따라서, 역사란 삶의 객관화(objectification of life)이다. 삶의 객관화란 인간 이해의 표현이요 그것이 역사에 대한 해석이다. 따라서, “역사의식은 자기 이해의 하나의 형태이다”(historical consciousness is a mode of slef-knowledge, Hans-Georg Gadmaer, Truth and Method[New York: Crossroad, 1892], 207). 의미가 역사성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시간의 변화에 따라서 의미도 변하는 것이고 인간 이해는 한정된 것이다. 틸타이는 해석학을 역사성의 지평 위에 놓음으로서 삶의 체험을 강조하는 해석학을 발전시켰다.


술라이에르마허나 딜타이에서 이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설명이 아니라 삶의 정황에서 오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래서 해석이란 텍스트와 해석자의 관계성이 중요하게 됨을 암시해 준다. 여기서 해석에 있어서 두 지평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된다. 여기서 지평이라는 말은 은유로서 무엇을 이해하는 틀(frame-work)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관점(view-point), 출발점(point of departure), 안경(spectakles)으로도 말하여질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텍스트와 해석자의 두 지평의 관계성을 강조함으로 현대 해석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하이덱거, 불트만, 가다머,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을 살핌으로서 해석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펴보고자 한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사용을 중요시한 문법의 개념과 해석의 관계성을 설명하고 성경해석에 있어서 역사적 문법적 성경해석 방법의 의미를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깊이 이해한 그의 중요성을 크게 부각시킬 것이다.

1.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해석학

하이덱거의 해석학에 있어서 그의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전기 하이덱거와 후기 하이덱거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i)전기 하이데거

하이덱거는 그의 명저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이라는 저서에서 존재에 대해서 연구(question of being)한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존재란 어떻게 이해되어지는가를 질문한다. 이런 점에서 하이덱거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아니라 존재론적 실존적인 질문이다. 하이덱거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단순한 이론적인 존재 의미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인 혹인 원초적인 존재론적인 구조를 실존적 현상학적으로 파헤친다. 하이덱거에서 존재란 그냥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하는 존재(question about one's own being)이다. 자기자신의 실존이 자신에게 문재가 되는 것이 실존 혹은 탈존(ex-sistere/come into existence)이다. 오직 인간만이 자기 자신을 벗어나서(exsist) 자신을 반성하며 의식하면서 존재한다. 이것이 현존재(dasein)이다.


현존재는 주객관을 떠나서 이미 세계 안에 주어진 존재(bing in the world)로서 시간 안에 존재 혹은 역사적인 존재이다. 여기서 세계 안에 주어진 존재라는 말은 세계와 존재를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존재가 아니라 현존재는 이미 세계 안에서 숨쉬고 살고 있는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현존재는 세계를 전제한다는 의미이다. 시간적 혹은 역사적인 존재란 존재의 유한성을 의미한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명저 <참회록>에서 시간과 존재에 대해서 아주 중대한 분석을 했다. 그에 의하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를 기점으로 해서 우리는 과거는 기억으로 현재는 직관으로 미래는 기대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결국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도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에서 현재를 직관하고 현재에서 미래를 기대하게 된다. 현재라는 시점이 대단히 애매모호하지만 현재를 기점으로 해서 시간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재라는 시점이 중요한 것이다.하이덱거는 시간을 과거(이미 있어-왔음), 현재(마주하고-있음), 미래(다가옴)는 하나의 통일성을 이룬다. 인간은 죽음을 예견하는 그 종말을 선취함으로써 있어-온 것을 간직하고 마주하고 있다. 그래서 현 존재는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재에서 결단을 함으로써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죽음의 가능성을 현재에서 바라보는 것이 인간이며 이것은 실존적인 상황에서 가능하다. 가령 우리는 교통사고를 통해서 죽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각오(마음 쓰임)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성에 의한 현 존재의 이해이다(발터 비멜, <하이덱거>, 신상희 옮김, 한길사, 94).

어거스틴은 시간은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다고 했다(<참회록>, 11권 30). 따라서, 인간은 시간내 존재가 된다. 시간을 “팽창”(distension/ distentio/ <참회록>, 11권 23,)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팽창이라는 말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상태인 혼란(distraction)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간 내에 존재하는 인간은 쉽게 이 세상에서 허무한 것들에 빠져들며, 세상 것에 애착심을 갖기 쉬우며, 세상 것에 정신을 잃어버릴 때가 많다고 했다(<참회록>, 11권 29장 39절). 때문에, 이 세상의 허무한 것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목적(intentio)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존재로 어거스틴은 봤다. 우리 인간의 영원한 목표인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 때 허무한 세상에서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세상 것에 대한 지나친 애착심을 버리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거룩한 나그네로 살 때 우리는 유혹 많고 부질없는 삶에서 벗어나 가장 의미 있고 감격에 찬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시간 내의 존재인 현존재가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 내에 있는 무엇을 두가지방법으로 이해 혹은 본다. 세상에는 사물이 그냥 놓여있는 상태로 보는 것과(present at hand)와 사용함으로 이해하는 것(readiness at hand)이다. 가령 망치는 팔기 위해서 놔두거나 혹은 집의 선반에 그냥 있는 것이다. 전자는 아무런 관심없이 그냥 선반에 놓여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후자는 망치를 가지고 못을 박으려고 할 때 그냥 놓여 있는 망치가 아니라 못을 박으려는 데 사용되는 망치의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후자적으로 망치를 보는 것은 망치의 원초적인 모습 혹은 망치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보는 것이다. 망치의 원초적인 의미는그냥 놓여진대로 망치의 의마가 아니라 못을 밖는 실존상황에서 사용할 때 망치의 의미가 발견되어진다. 이것이 현존재가 망치를 사용함으로 발견되어지는 의미이다. 쉴라이허막허처럼 감정이입에 의한 심리적인 이해가 아니라 실존적인 이해이다.


현존재가 망치를 가지고 못을 밖거나 무엇을 부수는 것은 이미 망치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게 된다. 하이덱거는 이것을 미리 봄(fore-sight), 미리 가짐(fore-having), 미리 이해(fore-conception)라고 한다. Martin Heidegger, Being and Time, Trans. John Macquarrie & Edward Robinson (New York:Harper & Row, Publishers, 1962), Sections:32-34.


현존재가 무엇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선 이해(vorverstandnis)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해 혹은 해석의 선구조(fore-structure)이다. 해석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통찰력이다. 가령 우리가 구원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사용하는 구원의 개념을 미리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구원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모든 이해는 선 이해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제 없는 해석은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선 이해(事前理解)라는 개념은 불트만의 성경해석학에 키의 역할을 하는 개념이 된다.


해석이나 이해에서는 선 이해를 전제한다. 이것에 근거하여 무엇의 ?미는 --로서(als/as) 이해하고 해석한다. 가령 망치를 사용하다가 “망치가 무겁다, 다른 것을 주십시오”라는 언명에서 무겁우니 다른 것을 주시오라는 언명은 의미는 망치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즉 이론적인 판단이 아니라 실존 가운데서 현존재가 망치를 사용하다가 발견되어지는 의미이다. 망치가 무거우니 가벼운 것을 주시오에서 우리는 망치를 --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존적 해석의 --로서 구조이지 단순한 현상적인 구조가 아니다. Heidegger, Being and Time, Section:32.

ii)후기 하이덱거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서 다르지만 하이덱거의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은 불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사상을 새로운 방법에서 보고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덱거 자신이 자신의 책<존재와 시간>을 펴낸 지 32년 후에 “그때, 중요했고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존재자들의 존재(the Being of beings)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일이다”라고 했다( 씨슬톤, <두지평>, 506에서 재인용). 새로운 방법이란 언어를 통해서 보려고 하는 방법이다. 하이덱거거는 <언어에의 도상에서>(On the Way to Language)라는 책에서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면서 Stefan George's “The Word”라는 시의 마지막 절을 인용하여 언어의 본질을 말한다. “So I renounced and sadly see: Where word breaks off no thing may be.” 하이덱거에의하면 이 시의 마지막 절은 언어가 무엇인지 즉 언어의 본질(the nature of language)을 잘 말해준다고 한다. Martin Heidegger, on the Way to Language(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82), 57-108.


번역한다면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부인하고 슬프게 본다: 언어가 결핍된 곳에는 어떤 사물도 없다.” 여기서 사물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하이덱거는 말했다. 다시 말하면, 언가가 없이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로 이해할 수 있다. 언가가 없이는 하나님도 말할 수 없으며, 언어가 있는 곳이 존재가 있다고 하이덱거는 말한다.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 존재(An “is” arises where the word breaks up)한다고 말할 수 있다. Martin Heidegger, on the Way to Languaage, 108.

하이덱거에 의하면 언어는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Martin Heidegger, Poetry, Language, Thought, Trans. Albert Hofstadter, 192


첫째, 언어는 표현이다(speaking is expression!). 여기서 표현이라는 말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언어를 통해서 밖으로 표출시킨 것이다. 그래서 말함이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포함한다.



둘째, 언어란 인간의 행위이다(speech is regarded as an activity of man). 언어란 인간을 처음으로 존재케 하는 것이다(It is language that first brings man about, brings him into existence). 다시 말하면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 말해진다(Man would be bespoken by language).


셋째, 언어는 사실이나 사실이 아닌 것을 표상(presentation)하거나 재연(representation)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덱거는 언어의 본질은 말함(language speaks)에 있다고 했다. 언어는 적막을 깨뜨리는 종소리처럼 말하는 것이다. 말함에 있어서 언어는 언어가 된다. 인간은 언어에 반응하면서 만이 말한다. 이미 말해진 것 안에서 말함은 우리를 위해서 말한다(Man speaks only as he responds to language. Language speaks. Its speaking speaks for us in what has been spoken). Martin Heidegger, Poetry, Language, Thought, 210.

언어는 우리를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듣고 반응한다. 언어는 우리를 반응하도록 부르고 우리는 듣고 반응하면서 말해진 것에 의해서 우리의 존재가 들어난다. 결국 언어는 존재를 발생케 한다.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 유한한 인간으로서 원초적인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가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다. 서로 사랑하라는 언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명령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이다. 우리는 이 명령의 말씀들 듣고 그렇게 살므로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나와 너 즉 우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듣는 것이 보다 원초적인 해석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의 자세는 아이 사무엘이 처음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와 같아야 한다.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Speak, Lord, for thy servant is listening 삼상3:9).



하이덱거의 언어에 대한 이해를 씨슬톤은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언어는 사건적 언어이다. 무엇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자기 것으로 만든 것(to make one's own)이다. 자기 것으로 귀속시키는 것(to appropriate)이다. 사건적 언어는 단순히 인간의 사고라기보다는 존재에 근거를 두고 있다.


In current views view, language is held to be a kind of communication. I serves for verbal exchange and agreement, and in general for communicating. But language is not only not primarily an audible and written expression! of what is to be communicated. It not only puts forth in words and statements what is overtly or covertly intended to be communicated; language alone brings what is, as something that is, into the open for the first time. Where there is no language, as in the being of stone, plant, and animal, there is also no oneness of what is, and consequently no openness either of that which is not and of the empty.
Projective saying is poetry: the saying of world and earth, the saying of the arena of their conflict and thus of the place of all nearness and remoteness of the gods. Poetry is the saying of the unconcealedness of what is.( Martin Heidegger, Poetry, Language, Thought, 73-74


다시 말하면, 언어는 단순히 사고와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라기보다는 존재의 존재방식이다. 언어를 가지고 존재는 말도 하고 사고하고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는 존재방식이다. “언어란 인간이 그것을 가지고 존재에 대해 말하는 원초적인 시이다”라고 하이덱거는 말했다(<두 지평>, 각주 65에서 재인용). 둘째, 언어는 모여있음으로서 로고스(logos as collectedness)와 관련하여 언어는 모으는 힘(gathering power)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존재자의 모여있음의 안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있게 한다. 그래서 말함(saying)은 모음의 소리가 된다. 하이덱거의 영향을 받은 에른스트 푹스는 “믿음의 언어는 믿음을 모음(gathering of faith)과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리스도가 말해지게 한다”라고 말했다(씨슬톤, <두 지평>, 521, 각주 86에서 재인용). 말씀의 선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한 공동체를 형성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동반존재성(togetherness)을 갖는다. 셋째,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das Haus des Seins die Hut des Anwesens)이다라고 했다(<두 지평>, 523, 각주 98에서 재인용).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말은 은유로서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 존재케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존재는 언어의 말을 듣고 반응함으로서 자기 존재를 이해하게 된다. 언어는 언어를 말하게 함으로서 언어를 말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존재는 언어를 말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있게 하고 이해하게 한다. 따라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에서 언어는 존재를 현존재로 있게하고 이해케 한 방식



(the mode of appropriation, ereignis/event or occurence)이다. "Language has been called 'the house of being.' It is the keeper of being present, in that its coming to light remains entrusted to the appropriationg show of saying. Language is the house of Being because language, as Saying, is the mode of Appropriation."( Martin Heidgger, on the Way to Language, Trans. Peter D. Hertz(New York:Harper & Row, Publishers, 1971), 135.

그래서 하이덱거에서 해석이란 존재가 존재로 즉 현존재의 드러남(the mode of disclosure)이다. 하이덱거의 언어에 대한 관심과 그의 통찰력은 게오르그 가다머를 비롯하여 후기 신 해석학(the new hermeneutics)의 주자인, 에른스트 푹스, 게하르드 에벨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비신화해석
(Entmythologiert/Demythologizing/탈 신화/비신화)

불트만은 후기 하이덱거보다는 전기 하이덱거의 사상에 영향을 입었다. 불트만은 신약학자로서 그의 비신화 성경해석학으로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신학자로서 그의 성경해석학에 대해서 동의를 하든 아니하든 간에 신학을 하는 사람이면 그를 무시할 수 없는 신약신학자이다.
불트만의 신학은 두가지 출발점을 갖고 있다. ?재, 케류그마에서의 신학의 출발점, 둘째, 실존주의 역사개념이다. P. 쉬툴마허, <신약성서 해석학>, 전경연.강한균역(대한 기독교출판사, 1986), 214.


불트만의 비신화성경해석은 케류그마와 실존적인 역사에해와 연관되어 있다.

i)케류그마적 신학의 출발점
불트만의 신학의 계보는 칼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루터쪽이다. 불트만의 케류그마는 성경 자체가 아니라 성경에서 증언되고 구술로 선포되어 교회를 형성하는 복음이다. 다시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행동의 선포가 하나님의 말씀이요 케류그마이다. 구원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객관화해서 증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선포되어짐으로서 그리고 받아드림으로서 증명되는 사건이다. 케류그마의 실존적인 이해인 것이다.

ii) 실존적 역사이해
불트만의 역사이해는 연대기적인 역사이해가 아니라 의미의 역사인 실존의 만남에서 이해되어지는 역사이다. “즉 역사의 의미는 과연 현재에 있으며, 또 그 현재가 그리스도교 신아에 의해 종말론적인 현재로 파악되는 때 역사의 의미는 실현된다”(<역사와 종말론>, 1958, 158). 케류그마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건--십자가와 부활--은 개관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 가운데서 말씀으로의 결단에서 구원의 역사와 만남을 갖게 되며, 이 만남에서 실존의 의미를 이해가 하게 된다. 즉 자기이해이다.

iii) 비신화해석
불트만의 비신신화 성경해석은 그의 신약의 우주론에 대한 이해에서 기인한다. 그에 의하면 신약의 우주론은 그 자체가 신화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신약성서 우주론(Weltbild)은 본래 그 특성이 신화적이다. 세계는 삼층적 구조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는데, 중심에는 땅이, 위에는 하늘이 아래에는 음부(지하세계)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늘은 하나님과 천사장의 것들의 거주지이고..., 지하세계는 지옥이며... 땅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초자연적 활동의 장이며, 다른 한편으로 사단과 그의 귀신들의 활동의 장이다. 이러한 초자연적 세력들은 자연의 순환과정과 인간이 생각하고 의욕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 속에 개입한다. 기적들은 전혀 드물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통하지 못한다(<두 지평>, 395, 각주 8에서 재인용).

불트만에의하면 신약성경의 우주론은 오늘날의 과학발전이 되기 전에 쓰여졌기 때문에 신약기자들의 표현방식이 원시적이고 신화적이어서 오늘의 첨단과학의 사고를 갖고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 신화적인 사건을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에의하면 신화란 믿을 수 없는 황당무괴한 이야기 아니다. “신화의 목적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얻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표현하는 데 있다. 신화는 우주론적으로가 아니라 인간론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하며 실존적으로 해석되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불트만은 말했다(<두 지평>, 398, 각주 15에 재인용). 신화란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이해를 신화적인 표현방식을 써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실존적으로 해석한다. 현대적인 상황에 맞추어 성경의 메시지를 재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On the Problem of Demythologizing, I) Term Demythologizing: "by demythologizing, I understood as a hermeneutical procedure that inquires about the reality referred to by mythological statement or texts." ii) the Presupposition of Demythologizing: It is presupposed that "myth indeed talks about a reality, but in an inadequate way. It also presupposes a specific understanding of reality." iii) The Characteristics of Myth according to Bultmann: a) "Myth intends to talk about a reality which lies beyond the reality that can be objectified, observed, and controled, which is of decisive significance for human existence. It is the reality that means for us salvation or damnation, grace or wrath, and that demands of us respect and obedience"(160, 252). Key is here that myth objectifies and thus speaks in objectifies and thus speaks in objective statements about a reality that is not an object and this mythological statement is of decisive significance for human existence. Example, NT world pictures, resurrection, etc. iv) The Human understanding: a)understanding "in which we find our selves in a world filled with enigmas and mysteries and in which we experience a destiny that is equally enigmatic and mysterious"(161, 253); b) "We are forced to recognize that we are not lords of our life, and aware of that the world and our lives have their ground and limit in a transcend power that lie (or powers that lie) beyond whatever we can reckon with and dispose of "(161, 253). v) The Problems of Myth: a) Myth talks about a reality, but in an inadequate way; b) Symbols and mythological pictures "conceal" a meaning; theological and philosophical task is to make it interpret clearly; c) the meaning of myth or symbols cannot be reexpressed only mythological language;" It must be interpreted. vi) Demythologizing, therefore is to seek to bring out myth's real intention to talk about our own authentic reality as human being"--existentiell interpretation, that is, self-understanding(161, 253-254).
Two modes of human existence: a)inauthentic existence, b) authentic existence. the former is "we understand ourselves in terms of the world that stands at our own disposal. "Thereby, this is: "We understand ourselves in terms of the future of which we can dispose." Thereby, this existence is characterized as "responsible decision."Here the two modes of human existence are dialectical. And existentiel which results from personal choice is derived from existential which is concerned with the structure of dasein, and lays ground for personal decision. Therefore, existentiel interpretation of the biblical texts makes possible authentic self understanding--understanding self before God. this self understnding presupposes the "preunderstanding" of God; therby, demythologizing makes the Bible sensible for modern people. In this respect, demythologizing is a hermeneutical method or a method of an exegesis of an exegesis of the Scriptures.
"Symbolum est collatio, id est coaptatio, visibilium formarum as demonstationem rei invisibilis propositarum."("a symbol is bringing together, that is, a harmonizing of visible forms for the purpose of demonstrating things that have been stated about what is invisible")[ Paul Ricoeur, The conflict of Interpretations, 59]. "The genesis of representation and the problem of motivation both arise in the passage from the act to its expression!."(Ricoeour, The Conflict of Interpretation, 215).


불트만은 자신의 철학적 제자인 유대인 한스 요나스(Hans Jonas)가 하이덱거에 관한 논문에서 신화의 실존적인 이해와 비신화의 필요성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요나스는 다음과같이 말한다. “최후의 신비는 사고의 개념에서보다는 신화의 상징에서 훨씬 더 잘 보호될 수 있을 것이다. 신비가합법적으로 제 고햐에 있을 때는 거기서 우리는 흐미하게 거울 소글 들여다 본다. ‘희미하게 거울 속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신화적 형태로라는 말이다. 모든언어가 반드시 그렇듯이 이 경우 결국ㅇㄴ 불투명한 개념의 외관상의 투명성보다는 명백하게 밀도 있는 신화를 어떻게 해서든지 말로 형언키 어려운 것을 나타내기 위해 투명하게 유지하기가 더 쉬운 거시다.--글자 그대로 이해되는 신화적 사고는 가장 조잡한 대상화이다. 우화적으로 이해되는 신화는 세련된 대상화이다. 상징적으로 이해되는 신화는 우리가 희미하게 들여다보는 거울이다”(쉬툴마허, <신약성서 해석학>, 236).

성경의 탈신화는 하이덱거 철학의 방법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 자체가 탈신화를 시도한다고 불트만은 주장했다. “탈신화는 성경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시대의 세계관인 성경의 세계관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거짓된 거침돌을 제거하고 참다운 거침돌, 즉 십자가의 말씀에 바로 초점을 맞추게 할 것이다”(<두 지평>, 402, 각주 29에서 재인용). 따라서, 탈신화란 성경의 메시지를 현대 우리가 살고 있는 실존적 상황에 맞추어서 재해석한다는 말이다.
불트만은 자신이 신약의 메시지를 하이덱거의 철학에 팔아 넘겼다는 비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변증한다. “어떤 비평가들이 내가 하이덱거의 범주들을 차용하여 신약성서에 억지로 적용하려한다고 반대해 왔다. 이것이 단지 그들이 진정한 문제에 눈이 멀어가고 있음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된다”(<두 지평>, 407, 각주 48에서 재인용). 따라서, 불트만은 성경자체가 실존적인 해석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첫째, 성경의 언어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말하고 있으며 새로운 자기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둘째, 신화는 인간 실존이해의 원시적인 표현방식이다. 셋째, 비신화의 과정은 신약자체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를 공중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살전4:15-17). 그는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막 14:62). 이러한 사건은 불트만에 의하면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인자가 구름 타고 돌아올 것을 바라서는 안되고 신실한 자들이 그를 공중에서 만나리라는 희망을 품어서도 안된다”라고 불트만은 말했다(<두 지평>, 408, 각주 52에서 재인용). 위의 성경 말씀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현재 우리에게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트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도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객관적인 역사적인 사실(ein objectives historiches faktum)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이해를 표출시킨 신화라고 했다.


불트만에 있어서 “택스트에 대한 모든 이해는 물음의 방향(woraufhin)에 의해 인도된다. 따라서 이것은 질문되어진 내용에 대한 전 이해를 전제한다. 이해는--또한 ‘객관적인’ 이해로서--저자와 해석자가 질문되어진 대상에 대해 삶의 관계를 가질 때,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가능하다”(발터 슈미탈스, <불트만의 실존적론 신학>, 변순환 옮김[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243). 여기서 물음의 방향에 인도된다는 말은 물음은 물음 자체에 대해서 전혀 알지못하면 물음을 제기할 수도 없으며 물음은 곧 실존적인 관심에서 울어나오는 것이다. 가령 사랑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관심이 있으며 사랑에 대해서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해석자의 관심과 질문이 해석하고자하는 작품에 대한 해석의 키가 된다.


불트만에게서 중요한 언어는 전이해(preunderstanding/vorverstandnis/nichtwissendes Wissen[의식되지 않은 지식])라는 말이다. 이 말은 하이덱거에 있어서 이해의 선 구조(fore-structure)를 의미한다. 무엇의 이해는 선 이해를 전제한다는 말이다. 가령 구원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은 이미 구원에 대해서 선 지식이 없이는 구원에 대한 질문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 해석은 해석자의 실존적인 전 이해가 성경의 해석의 키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성경의 메시지를 현 상황에 맞게 선포해야 성경의 메시지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의 메시지를 진공 속에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실존상황에 적용시킨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불트만의 실존적 성경해석은 성경 텍스트보다도 해석자의 실존적 지평을 중요시함으로서 성경을 일방적으로 또는 주관적으로 해석하게 됨으로서 성경의 본 뜻을 왜곡시키게 된다. 이것이 실존적 성경해석의 문제점이다. 따라서, 불트만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을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불트만이 성경의 특정 본문을 신화로 보려고 하는 것은 성경 언어를 실존적으로만 보려고 한 것에서 기인된다. 부활의 경우만 보더라도 성경의 저자들은 부활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말하고 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가르쳐 주시고, 함께 계시다는 언어를 보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그러한 언어를 사용해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 죽은 자가 살았다는 것을 이 이상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가? 일상언어를 인간의 자기이해를 표현하는 신화로 보는 것은 신화의 의미를 잘 못 이해한 것이며 불트만이 이해하는 자기 이해로서 신화적인 표현은 신화라기보다는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둘째, 불트만의 실존적 성경해석은 해석자의 지평을 강조함으로서 텍스트의 지평을 무시하는 성경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해석이다. 셋째, 불트만의 실존적 역사 개념은 실존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역사의 객관성을 무시하게 된다.


해석에 있어서 전 이해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은 불트만의 중요한 통찰력이다.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것의 인식이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전 이해를 갖느냐가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에 있어서 언어의 통찰력을 무시하고 한쪽만을 강조한 불트만의 실존적 성경해석은 절름발이 해석학이다. 이것을 보완하는 작업이 가다머의 “영향사적”(Wirkunggechichte/effective history) 해석이다.

3.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 Georg Gadamar)의 영향사적
해석학

가다머는 그의 명저 <진리와 방법론>(Truth and Method)에서 자기 저서의 목적은 일반적인 해석학의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을 발견하고 이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주어진 대상에 대한 주관적인 이해가 아니라 주어진 대상에 대한 영향사적인 이해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진리와 방법론>, xix). 그래서 가다마에 있어서 해석이란 선입견, 선입견의 영향사적인 영향, 그리고 섭입견은 언어를 통해서 형성되어짐을 강조한다.

I)선입견(Vorurteil/prejudice)
선입견이란 게몽주의 대두 전까지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졌다. 선입견이란완전한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내라는 판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거짖 판단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선입견은 부정적인면과 긍정적인면이 있다. 여기서 부정적인 측면은 완전한 판단을내리기 전의 판단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의미가 있지만 어느 누구도 섭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며 이것이 해석학적으로 중요한 측면이다. 인간이란 역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온 전통에 의해서 자신도 모르게 섭입견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선입견이란 불트만이나 하이덱거가 말하는 이해의 선구조이다. 불트만에서 선이해는 실존적인 것인 반면에 가다마에서 선입견은 포괄적인 역사적인 전통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선입견은 무엇을 해석하는 전제조건이다. 이것이 해석학적으로 중요한 통찰력이다.


ii)영향사(effective-historical consciouness)
가다머에 의하면 전 이해란 단순히 현재의 실존적인 것만이 아니라 전통에서 영향을 받으며 전통에 대한 영향은 결국은 언어를 통한 영향임을 말한다. 해석자의 선입견(Voruteile)은 전통을 통해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선입견이란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존재자의 역사적인 실재(die geschichtliche Wilklichkeit seines Seins)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통은 전통적인 관례, 가치, 풍습을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하므로서 존제자의 역사적인 실재에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하면, “이해는 우리의 주관적인 행위로서가 아니라 자신을 과거와 현재가 그 안에서 끊임없이 뒤섞이는 전통의 과정 속에 위치시키는 것으로서 여겨져야 한다. 이것이 해석학 이론에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라고 가다머는 말한다(<진리와 방법론>, 258). 따라서, 영향사란 전통과 시간적 간격이 미치는 영향들이 이해에 자체에 미치는 과정을 말한다.

iii)지평의 융합(The fusion of horizen)
해석이란 과거와 현재, 또는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의 지평의 융합이다(Horizontverschmelzung). 여기서 텍스트와 해석자의 지평의 융합은 비판적인 거리와 긴장의 동화가 아니라 “역사의식(historical consciousness) 속에 일어나는 전통과 만남은 모두 텍스트와 현재 사이의 긴장을 경험함을 의미한다. 해석학의 과제는 소박한 동화를 시도함으로써 이러한 긴장을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그것(긴장)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가다머는 경고하고 있다(Truth and Method, 273). 해석자의 지평은 혹은 해석자의 선입견은 전통과 현재 사이의 역사의식의 긴장 속에서 변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가다머는 해석에서 적용(Anwendung/application)이 이해와 해석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임을 강조한다(We consider application to be as integral a part of the hermeneutical act as are understanding and interpretation/ Truth and Method, 275). 해석한다고 하는 것은 텍스트의 의미를 현 상황에 적용시키므로서 해석은 완성된다는 말이다. 적용이 없는 해석은 추상적인 것이며 절름발이의 해석이다.

iv)언어를 통한 해석(텍스트와 대화)
가마다머의 해석학에 있어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크다. 이해와 언어는 분리될 수 없다. 언어란 나와 세계가 만나는 중심점이며 원초적인 통일성이다(Language is the cemtral point whwere 'I' and the world meet or rather, manifiests their original unity."(Truth and Method, 431). 그래서 “언어란 이해 자체가 그 안에서 실현되는 보편적인 전달매체이다. ... 모든 해석은, 대상이 말로 표현될 수 있게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해석자 자신의 언어이기도 한,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발생한다”



(Truth and Method, 350/ Rather, language is universal medium in which understanding itself is realized. The mode of realization of understanding is interpretation. This statement does not mean that there is no special problem of expression!. The difference between the lanaguage of a text and the language of the interpreter, or the gulf that seperates the translator from the original, is not merely secondary question. on the contrary, the fact os that the problems of linguistic expression! are already problems of understanding. All understanding is interpretation, and all interpretation takes place in the medium of a language which would allow the object to come into words and yet is at the same time the interpretor's own language.).


게하르트 에벨링의 말을 빌리자면 해석은 언어의 이해하기보다는 언어를 통한(through language) 이해라고 할 수 있다(<두 지평>, 477, 각주 80에서 재인용).

가다머에 의하면 해석이란 언어라는 보편적인 매개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가다머의 언어에 대한 이해를 볼 수 있다. 해석에 있어서 언어는 해석자의 사고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가다머의 언어의 개념은 삶의 형태(forms of life)의 표현으로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개념과는 다르다고 본다. 가다마는 언어 자체를 중요시한다. 언어 자체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경우는 언어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용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다머에 있어서 해석이란 두 지평의 융합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칼빈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제가 있다. 해석이란 해석자의 일방적인 이해가 아니라 전통에 의해서 형성된 선입견에 의해서 해석되어지는 쌍방적 즉, 텍스트의 지평과 해석자 지평의 융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중요한 통찰력이지만 두 지평의 융합에서 해석자의 지평이 항상 텍스트의 지평에 의해서 변화되고, 수정되고, 보완되어야만 한다. 성경을 예로 들면 성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치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의 지평은 항상 성령의 검으로써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내적 조명과 가르침을 받아서 해석자의 지평이 변화되고, 수정되고 보완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의 의미를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 속에 있는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성령님의 내적 조명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텍스트와 해석자의 지평이 동시적인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지평이 항상 해석자의 지평을 변화시키고, 수정하고, 보완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그대로 이해할 수 있고, 그대로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II. 문법적 해석학(일상언어분석 해석학)

루드위그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문법적
해석(Grammatical Investigation)

루드위그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을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서 다르지만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의 창시자라고도 하며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의 창시자라고도 하나 이러한 견해는 그의 사상을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그가 원치도 않았던 두 학파가 생기기도 했다. 하나는 빈(vienna)을 중심으로 한 논리적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요, 영국 옥스포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이다. 사실 이 두 학파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사상과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전자는 1920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일어난 비엔나(Vienna Circle)를 중심한 학파로서 경험주의 전통에 깊이 영향을 받았으며 이 경험주의 전통과 현대 논리적 수학적인 이론을 도입해서 특히 초기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과 버트란드 러셀(B. Russell)의 저작에 힘입어 경험주의 철학을 이론화한 것으로서 어떤 명제나 문장의 의미는 이의 검증방법(the method of verification)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믿었다. 환언하면 한 문장의 의미는 과학적인 관찰이나 경험에 그 진실성 여부가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학이나 형이상학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혹평했다. 후자는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언어는 불분명한 점이 많기 때문에 언어사용을 이론화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길버트 라일(G. Ryle)은 그의 유명한 저서인 마음의 개념(The Concept of Mind)이란 책의 서론에서

이 책은 몇 가지 유보조건 하에서 마음의 이론(혹은 정신의 이론)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마음(mind)에 관한 무슨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미 정신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갖고 있다. 이
정보는 철학자들의 논증에서 도출되거나 그런 논증에 의해서 반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책에 나오는 철학적 논증들은 정신에 관한 기존의 지식을 확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의 논리적인 지형도(logical map)를 올바르게 그리려는 데 그 본연의 의도가 있다. 길버트 라일 <마음의 개념>, 이한우옮김(문예출판사, 1994), 9.

서론에서 보는 바와 같이 Ryle은 언어적인 입장에서 서구 철학자들의 잘못을 수정하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 언어철학자들은 우리 인간을 고뇌케 하는 의미, 진리, 이성(mind)과 몸(body)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려는 경향이 짙다고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신학자라고 볼 수는 없으나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것을 종교적인 면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Ruth Rhees, Ludwig Wittgenstein: Personal Recollections, Totowa, NJ: Rowman and Littlefiled, 1981, 79. cited as LWPR.


그는 48세 때 다음과 같이 기독교에 대해서 말했다. 기독교는 철학적으로 이해되어 져야 하는 사변적인 교리가 아니며 인간에게 무엇이 일어났고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인간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묘사이다. 죄의식은 실제적인 사건이며 절망과 믿음을 통한 구원도 역사적인 사실이다.



“Christianity is not a doctrine, not, I mean, a theory about what has happened and will happen to the human soul, but a description of something that actually takes place in human life. For ‘consciousness of sin' is a real event, and so despair and salvation through faith”(Ludwig Wittgenstein, Culture and Value, ed. G. H. von Wright, trans. Peter Winch,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28). cited as CV.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기독교는 이론이 아니라 어떻게 구원받고 구원받은 신자로써 살아야하는 삶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기독교이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비트겐슈타인을 진정한 신자라고 하기는 어려울는지는 몰라도 그의 친한 친구인 폴 엥글만(Paul Engelman)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은 말없이 행동하는 믿음(wordless faith)을 가진 자라고 말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저서에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 저술의 목적도 기독교적이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그의 제자인 듀리(O. C. Drury)에게 말하기를 오스트리아에 있는 자기 친구인 한 신부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의 내용과 자기 자신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 편지에서 자기 친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비트겐스타인의 저작활동이 잘 되어져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Wittgenstein이 말하기를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하나님의 뜻이라면). 바하는 그의 Orgelbuchlein의 타이틀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나의 이웃은 나의 책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받을 것이다.’ 나도 나의 저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LWPR..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에는 기독교에 대한 짤막한 서술들이 많다. 그 중에 한 예를 들면 그의 후기 저서인 <철학적인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서 신학의 기능을 문법으로서 신학(theology as grammar)이라고 했다. 여기서 문법의 개념은 영문법이나 국문법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 언어의 사용을 지배하는 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환언하면 언어 논리(the logic of language)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입장에서 신학이란 이론적인 체계 아니라, 성경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성경의 의미를 파악하는 문법적인 탐구(grammatical investigation)라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문법의 개념은 언어 놀이(language game)와 삶의 형태(forms of life) 사이의 관계성에 의해서 파악되는 개념으로서 성경해석 방법으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1)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생애, 2)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전기 후기)을 소개하며, 3) 비트겐슈타인의 문법(grammar)의 개념, 4) 문법과 언어 놀이(language game), 5) 문법과 삶의 형태(forms of life), 6) 문법과 언어의 생명력, 7) 문법과 보여줌, 8)문법과 “으로서 봄”, 9)문법과 해석의 관계성을 설명함으로서 비트겐슈타인의 문법의 개념이 해석학적 방법으로서 매우 중요함을 역설할 것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문법적 탐구가 성경해석에 대단히 유효한 방법임을 보여줄 것이다.

i).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생애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1889년 4월 26일에 오스트리아 빈(vienna)에서 당시 오스트리아 철강산업의 회장이며 억만장자의 칼 비트겐슈타인(Karl Wittgenstein)의 팔 남매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로마 카톨릭 신자로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카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14살까지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의 집안은 고도의 교양을 갖춘 분위기였으며 또한 음악을 열정적으로 좋아했으며 집의 내방객 중에는 클 라라, 슈만, 브람스가 있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클라리넷 연주에 재능이 있었고 그의 음악성은 친구들에게 교향곡이나 협주곡 전 악장을 휘파람으로 연주했으며 한 때는 지휘자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는 공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베를린에 있는 공과대학에 입학 후 새로운 재봉틀을 만들 정도로 공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 후에 그의 아버지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서 영국 만체스터에 유학시켰으며 당시 실험단계에 있는 프로펠러 항공학에 관심이 많았고 수학에 관한 그의 관심은 이 때에 싹트게 되었다. 처음에는 순수 수학에서 수학의 근원(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적인 문제로 그의 관심이 바뀌었다. 그후 독일 Jenna에 있는 새로운 논리학(new logic)의 거장인 프라게(G. Frege)의 충고로 화이트헤드(A. Whitehead)와 러셀(B. Russell)의 공저인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을 통해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철학을 시작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그의 나이 23세 때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들어갔고 그 다음 바로 대학원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Russell이 지도 교수였다. 그 곳에서 수학 논리를 세 학기 정도 공부하다가 1914년 8월에 세계 제 1차 대전을 만나게 되었으며 탈장이 되어 군에 입대하지 않아도 되었는데도 자원 입대하게 되었다. 군 입대 동기는 잘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의 나이 17-28세 사이에 그는 인생의 위기와 갈등 가운데 있었다. 그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풀어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전쟁의 와중 속에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생명에 대한 위협과 동료들의 죽음 속에서 인생의 허무와 종교성이 싹트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철학적으로는 프라게 러셀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종교적으로는 톨스토이, 도스도엡스기, 킬케고올, 성 어거스틴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름끼치는 고독과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끝없이 흔들거리다가 넘어지고 또 흔들거리다가 넘어진다. 오직 혼자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더 나아가려고 애쓸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전 생애를 걸고 행동해야 했다” 빌헬름 바이쉐델, 철학적 뒷계단, 강혜경 옮김, 시간과 공간사, 1990, 315.
전쟁중의 생명의 위협 속에서 그는 인생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모든 것을 종교적인 면에서 봐야만 한다고 고백했다. 궁극적인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를 성실한 신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아버지로부터 억대의 재산을 물려받아서 그의 누나와 당시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기부금으로 주었다. 그 중에는 유명한 마리아 릴케, 트라켈이라는 시인도 있었다. 자신은 국민학교 선생이 되었다. 한때는 수도원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는 일생동안 검소한 생활(의자하나 책상 그리고 책 몇 권)을 했다. 이와 같은 결단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인격과 그의 기독교적인 삶에 대한 열정을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전쟁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1918) 그의 유명한 전기 저서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를 그의 나이 29세 때 완성하게 되었다. 당시 독일 저명한 논리학자인 프라게(G. Frege)와도 친분과 연락이 있었지만 프라게(Frege)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책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말했고 그의 선생이요, 친구인 러셀(B. Russell)도 그 책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고백했다. 특히 러셀과 친하게 되었는데 러셀은 말하기를 “Wittgenstein을 알게 된 것은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정신 체험 중의 하나였다”고 고백하면서 그를 “천재의 완벽한 전형”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켐브리지 대학에서 그의 초기작품인 <논리철학논고>로 1929년에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비트겐슈타인은 강의안 없이 고뇌와 열정을 가지고 질문과 답변으로 특이한 강의로 학생들을 사로잡았으며 정교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었으나 나중에 포기하고 노르웨이의 자기가 만든 오두막집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기 생전 한 권의 책만을 발행했는데 그 한 권의 책이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학문에 대한 열정과 진실된 인간 됨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는 성경 말씀을 깊이 이해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러셀의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이 고백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젊은 나이인 때였다. “그는 열 두시가 되면 나의 방에 찾아오곤 했다. 그는 수시간 동안 울안에 갇혀있는 사자처럼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잠이 오기도 했지만 나는 그를 나가도록 하지 않았다. 한 저녁 수시간의 죽음 같은 침묵 후에 나는 그에게 말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당신은 지금 논리학에 대해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당신의 죄에 대해서 생각합니까? 둘 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침묵으로 되돌아갔다.”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일생동안 고민했던 문제는 언어논리. 좋은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봤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죄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에게서 죄란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하고 진실되게 살려고 하는 피나는 윤리적 종교적인 투쟁이었다. 그는 참 인간이 되는 길은 자기와 피맺힌 투쟁(blood way)의 길이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라이트(G. H. von Wright)은 말하기를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두 형태의 독특한 성격이 있는데 하나는 확고한 신념(strong principles)이요, 다른 하나는 불타는 정열(passionate heart)이라고 했다. 전자는 윤리적인 것이요, 후자는 종교적인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했다. Norman Malcolm, Ludwig Wittgenstei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4, 17-18.

루터가 은혜스러운 하나님을 만나고자 투쟁했던 것처럼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철학의 근본문제 뿐만 아니라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서 투쟁하고 일생동안 그 작업에 전념했던 사람이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어떠한 진리도 가르칠 수 없다” K. T. Fann, Wittgenstein's Conception of Philosophy, Berkel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nia Press, 1971, 109.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Ibid., 109.


그 방법은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문제를 조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독신으로서 일생(62년)을 한 목적을 가지고 인생의 근본문제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서 고뇌와 피눈물나는 일생을 아낌없이 바친 인류의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에는 그의 남긴 작품이 20여 권에 달하며 그는 죽으면서 “나는 가장 감격과 환희에 찬 인생을 살았노라”고 고백했다. Norman Malcolm, Ludwig Wittgenstein, 81.


감격과 환희에 찬 삶이란 한 가지 목적에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삶에서 발견되어지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ii).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사상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저서가 많지만 그의 생존시에 발행된 저서는 한 권이다. 이 책이 그의 전기 작품인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이다. 후기 저서인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는 사후에 출판되었다. 이 두 저서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본 논문의 핵심인 문법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자 한다.
전기 저서인 <철학적 논고>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이론이성(theoretical reason)과 실천이성(practical reason)을 구별함으로서 이성의 한계성을 그었다면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언어를 통해서 인간의 사고의 한계성을 기술했다. 그는 이 책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이 책의 내용과 목적에 대해서 기술했다.

이 책은 아마도 이 속에 표현된 생각들 - 또는 적어도 그와 비슷한 생각들 - 을 그 자신이 이미 해본 사람에게만 이해될 것이다. - 그러므로 이 책은 교과서가 아니다. - 만약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이 책의 목적은 달성될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 내가 믿기로는 - 이 문제들이 제기되는 것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전 책의 전 의미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clearly)하게 말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생각에, 아니 그보다는 - 생각이 아니라 생각들의 표현에 한계를 그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에 한계를 긋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한계의 양편을 모두 생각할 수 있어야(그리하여 생각될 수 없는 것도 생각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계는 오직 언어에만, 그어질 수 있을 것이며, 한계의 다른 한편에 놓여 있는 것은 단순히 비의미적(none-sense)인 것이 될 것이다. L. 비트겐스타인, 論理的哲學論考, 朴영식, 최세일 옮김, 정음사, 1987, 3-5.

서문을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사상을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철학적 논고는 철학의 이론을 소개하는 교과서가 아니며 자기처럼 언어논리에 대해서 피나는 투쟁이 없이는 그의 깊은 사상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이 저서는 철학의 근본문제들은 철학적인 이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언어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된다는 것이다. 셋째,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게 말해야 하며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닥쳐야 된다는 것이다. 넷째, 우리 인간 사고의 표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이 한계성은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보여진다.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있다는 것은 단적으로 인간 사고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다섯째, 설명 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넌센스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언어의 논리 즉 문법을 잘 모르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후기 저서인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는 그의 저서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말한 대로 이 책은 그가 지난 16년 동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철학적인 문제들의 탐구이다. 이 문제들은 의미의 개념, 이해의 개념, 명제의 개념, 논리의 개념, 수학의 기초, 의식의 개념, 다른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중요한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다. 그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짤막한 질문 혹은 그에 대한 묘사로 되어 있다. 환언하면 이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문법적인 탐구(grammatical investigation)라고 말할 수 있다. 환언하면 문법적 탐구란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철학의 제 문재를 해결하고자 한 시도이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철학적 탐구>를 사고에 대한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통찰력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하도록 자극을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저서를 깊이 이해하려면 비트겐슈타인이 가졌던 열정과 피맺힌 투쟁이 있어야 한다.

iii). 문법의 개념(the Concept of Grammar)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문법의 개념은 그의 전기 저서나 후기 저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개념은 철학적인 문제들을 조명하고 명료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전기와 후기에서 아주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철학적 논고에서 문법이라는 말은 “논리적 구문”(logical syntax) 혹은 “논리적 문법”(logical grammar)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불렉(Max Black)은 논리적 문법이란 문장 속에서 의미를 주는 문장의 구조의 배열을 말해 주는 룰이라고 했다. Max Black, A Companion to Wittgenstein's Tractatus,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64, 133.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에 의하면 우리 일상 언어는 이 논리적은 문법을 숨기고 있으므로 철학적인 문제가 생긴다고 봤다. 예를 들면 “이다”(is)라는 단어는 수학에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라고 할 때 “=”는 동등하다는 의미, 무엇이 존재한다는 의미, 자동사로서 존재한다(to exist)처럼 “간다”(to go) 형용사로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 “is”는 콘텍스트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다른 심볼이다. Ludwig Wittgenstein, Tratatus Logico-Philosophicus, trans. C.K.Ogden, London ; Roultedge & Kegan Paul LTD., 1981, section, 3.323. cited as TLP.


이와 같이 일상언어는 논리적 문법을 숨김으로서 근본적으로 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혼동을 가져오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이상적이고 인위적인 언어(ideal sign language)를 통해서 언어의 불 명료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논리 체계가 럿셀과 Frege의 견해이다. 논리적 문법을 좀 더 자세하게 알기 위해서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그림이론(picture theory)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언어는 세계의 현실을 묘사한다(language pictures a realty of the world). 인간과 세계는 언어를 통해서 연결된다는 말이다. 세계와 언어의 관계성은 논리적인 관계성(logical grammar)인데 이 관계성은 1:1의 관계성 가운데 있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1914년 가을에 자동차 사고에 대한 재판기사가 실린 잡지를 통해서 갖게 되었다. 변호인이 사고가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그림으로 그리면서 설명한 것을 통해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그림과 실제 사고 상황이 서로 상관관계에 있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언어로 표현된 문장(문장의 구조)은 실제로 세계 속에 존재하는 구조와 같으며 이는 더 나아가서 문장의 구조(logical grammar)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진다는 통찰력을 갖게 되고 이 통찰력은 나중에 보여지는 것(showing)과 말할 수 있는 것(saying)을 구별하게 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1919년 8월 19일 러셀(Russell)에게 보낸 편지에서 철학의 근본 문제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보여 주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기 저서에서는 문장의 구조와 요소를 알게 되면 그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견해는 언어가 쓰이는 상황, 사용하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언어와 세계만을 말한다. 후기에 이러한 사상이 바뀌게 되었다. 전기 저서 발표 후 16년 후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그의 전기 사상의 잘못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나의 전기 저서에서 아주 중요한 잘못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논리적 문법이 문장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과 과학자처럼 논리적인 분석에 의해서 감추어진 문법을 조명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grammar, ed. rush Rhees, trans. Anthony Kenny, Oxfor : Basil Blackwell, 1974, 210.

후기 저서인 철학적 탐구에서는 문법의 개념은 전기와는 아주 다르다. 전기에서는 우리 일상언어 속에 문법을 감추어져 있다고 했는데 후기는 그와는 정반대이다. 문법은 일상언어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보여 진다고 봤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말하기를 “논리(문법)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는 것이다(logic must take care of itself. All we have to do is to look and see how it does it).” Ludwig Wittgenstein, Notebooks 1914-1916, 2nd ed. trans. G. E. M. Anscombe, 2e, lle.


이 말은 아주 깊은 의미가 있는 말이다. 후기에 있어서 언어의 개념은 언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며 몸의 언어까지도 포함(눈물, 제스처, 눈짓, 목소리의 강, 약, 옷차림 등)한다. 언어는 단순히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체라기보다는 삶의 표현이다.

문법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후기 사상의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서 그에 의하면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는 언어 사용의 혼동에 있다고 봤으며 이의 해결점은 언어의 사용(the use of word)을 재배열하거나 그대로 봄으로써 문제의 혼동하는 점을 조명하여 문제가 안되게(to dissolve)함으로 철학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 언어의 사용이 바로 문법 혹은 언어논리이다. 그래서 문법은 언어의 사용을 지배하는 룰(rule)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언어의 사용과 룰이라는 말에 있다. 문법의 중요한 점을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문법은 언어의 사용을 묘사한다. Wittgenstein에 의하면 문법은 다른 방법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언어를 묘사할 뿐이라고 했다(Philosophical Investigations, 3rd ed. Rush Rhees, trans. G. E. M. Anscombe,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 1958, section, 496, cited as PI).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청춘남녀의 사랑, 자식과 부모간의 사랑 등을 들 수 있다. 똑같이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만 예수님의 사랑과 청춘남녀의 사랑은 차원과 질이 다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각 사랑의 문법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으며 문법이 다르기 때문에 그 의미도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문법은 언어의 의미를 결정한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한 단어의 의미는 그 언어의 사용에 있다” PI., section, 43.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법 자체가 그 단어의 의미라는 말은 아니다. 그 단어의 사용이 어떤 상황에서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에 하나가 사랑이라는 언어일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얼른 대답하기가 어렵다. 왜 그렇게도 우리 인간이 원하고 많이 쓰는 단어인데도 왜 우리는 그 의미를 얼른 알기가 어려운 것인가? Webster's English-Korean Dictionary는 사랑은 애정, 좋아함, 연애, 자비, 무득점(정구)이라고 정의했다.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고 해서 우리는 사랑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인가? 사랑의 명작을 읽었다고 해서 사랑의 의미를 깊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라이그린(Anders Nygren)의 Agape & Eros라는 사랑의 고전적인 책을 읽었다고 해서 우리는 사랑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Anders Nygren, Agape & Eros, trans. Philips Watson, 1953. Nygren에 의하면 사랑에는 세 가지 종류의 motive가 있는데 첫째는 아가페로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며 기독교에서 볼 수 있으며, 둘째는 Nomos(율법)로서 도덕적인 무엇을 성취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자세로서 유대인들에 해당하며, 셋째는 에로스로서 영원을 향한 사랑으로서 희랍사상에 속한다.

이러한 책들을 읽으면 사랑에 대한 지식은 습득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사랑의 깊은 의미는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왜 그런가? 언어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사랑이란 정의를 내리거나 책을 많이 읽었다 해서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보여 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한일서 4장 7절에 보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η αγαπη εκ του θεου)이라고 했다(love comes from God).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성경에 의하면 진정한 사랑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이다.


인간의 사랑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야속한 것이기이다. 오늘날에 많은 사람들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감정적이고 야속한 사랑으로 인간관계를 갖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에로스의 사랑은 상대방에게서 무엇인가 좋아하는 점을 발견했을 때 인간의 사랑은 싹이 튼다. 왜 내가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내게서 결핍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핍된 것은 바로 다른 “나”이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은 소유에 있다. 이것이 인간 사랑의 본질이다. 그러나 참 사랑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 요한일서 4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바(εφανερωθη)되었으니”(this is how God showed his love among us). 하나님의 사랑은 보여졌다 혹은 계시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어떤 때 보여준다는 말을 쓰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보여준다”는 말을 잘 모를 때 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συνιστησιν)하셨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확증”했다는 말(God demonst rates his own love)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말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이게 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랑을 “말과 혀로만”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직 기독교의 사랑의 문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언어적인 면에서 볼 때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요일 3:18). 요한일서 4장 10절이나 로마서 5장 8절 말씀에서 보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은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는 데 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말하여 사죄의 은총이라 부른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에 의하면 무엇의 에센스는 문법에 의해서 보여진다고(essense is expressed by grammar) 했다. PI, No. 371.


그렇다면 기독교의 사랑의 본질은 용서의 사랑에 있다. 용서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배우지 못한 신자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려면 이 사랑을 덧입을 때만이 가능하다. 셋째, 문법에는 두 종류의 문법이 있다. 하나는 표층문법(surface grammar)이요, 다른 하나는 심층문법(depth grammar)이다. PI., section, 664.


전자는 단지 문장의 구조만을 말하며 후자는 문장의 구조뿐만 아니라 의미를 말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유병헌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두 문장에서 문법적으로는 주어, 타동사, 목적어를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표층문법(surface grammar)은 같지만 심층문법(depth grammar)은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말했느냐가 중요하다. 넷째, 문법은 명령적인 힘(imperative force)을 갖고 있다. 가령 축구경기를 한다고 가정하자 축구경기를 하고 안하고는 나의 결정에 달려있지만 일단 경기를 하고자 하면 그 경기의 룰을 따라야만 한다. “따라야만 하는” 명령적인 힘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사용이 가지고 있는 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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