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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신학 / 합신대 정승원교수

by 【고동엽】 2021.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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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신학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신학정승원 합동신학대학교수의 현대신학해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바르트 以後 신학계에 그와 견줄만한 학자는 판넨베르크 외에는 없다고 이야기들 한다.그의 신학의 독창성과 깊이에 따른 칭찬의 소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예를 들어, 부활의 역사성)이나 보편적 진리의 탐구를 강조하는 그의 신학적 방법 때문인지 보수 신학계에서도 그를 환영하는 편이다. 그러나 한편 그의 신학에 매우 위험한 요소들이 숨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판넨베르크 역시 다른 현대 신학자들을 대할 때와 같이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되 배울 점은 배우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판넨베르크를 희망의 신학자로 분류한다. 물론 그의 신학에 종말론적, 미래적 특징이 다분히 있지만 그 자신이 몰트만을 비판했던 터이요, 그의 역사 개념은 희망의 신학자들의 그것과는 다르므로 단순히 그를 희망의 신학자로 분류하는 것은 정확한 진단이 아니라고 하겠다. 그는 바르트와 같이 공부도 했고 여러 성서 학자들과도 많은 교제를 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신학적 틀은 헤겔 사상에 의해서 짜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그를 칸트의 사상적 틀에 기초한 이전 현대 신학자들과 다르게 보는 이유일 것이다. 칸트적 이성 비판을 넘어서 새로운 이성의 합리성을 찾으려는 그의 신학적 방법은 헤겔에서 왔다고 하겠다. 특히 마지막 종말이 될 때까지는 우리는 절대적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부분적 진리도 진리로 주어지지만 절대적 진리는 항상 전체에 담겨져 있다는 헤겔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 하겠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살펴보도록 하자.먼저 그는 믿음(faith)과 이성(reason)의 관계를 나름대로 정립했다. 그는 믿음을 일종의 결단(commitment)으로 보면서 그 결단의 유효성은 그 대상, 즉 그 진리성이 얼마나 믿을 만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즉 신뢰라는 것은 단지 이론적 인식이 아니라 어떠한 사실이 진리라는 것을 믿는 것과 관련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역사적, 자연적 사실이 그 믿음을 얼마나 잘 받혀주느냐에 따라 그 진리성이 좌우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것을 근거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재(reality)를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고백서 같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재란 미래에서부터 혹은 종말에 가서 밝혀지는 실재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판난베르크는 주장하기를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우리는 해답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의 진실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 삶에 혹은 자연 속에서 절대적 기준이나 법을 성취할 수 없고 어떤 이론적 확실성을 찾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현 제한된 세상과 실재를 더 확실한 방향으로(미래적으로) 이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믿음에 관한 판난베르크의 주장은 단지 믿음을 이성과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란 합리적 증명에 맞추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진리란 단지 우리 의해서 혹은 우리가 믿으려는 의지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관찰을 통하여 세워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믿기 때문에 혹은 우리의 주장에 의해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진행 혹은 관찰을 통해서 진실 된 사실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을 들으면 마치 우리 개혁주의가 믿는 부활 개념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찌 모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과거의 사실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사실적 증명이 역사속에서 진행되고 그것이 종말에 가서 밝혀지는 것으로 그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과거 사건으로서 예수의 부활은 그렇게 믿기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부활과 상반된 주장인 것이다.


바르트가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고 했지만 그가 말하는 부활은 참 실재적 역사(Geschichte)와 직접적 관계가 없는 차원의 부활이었다. 즉 믿어도 손해볼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판넨베르크가 주장하는 부활도 과거 역사 속에 확실하게 발생된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종말에 가서 밝혀지는 부활로 지금 믿어도 손해볼 것은 전혀 없다는 식이다. 이러한 역사적 진행 혹은 과정 속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합리적 증명이요 비판적 관찰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판넨베르크는 믿음과 이성의 관계를 정립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적 역할을 멀리하고 어떤 도그마로 혹은 고백서로 혹은 전통으로 기독교 믿음을 유지하려는 것은 참다운 믿음의 특징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의 믿음의 참다운 특징은 현시적 연약성을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역사적 과정에 맡기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특징은 바로 이성의 합리성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판넨베르크 신학의 역사적, 비판적, 합리적, 과정적 틀 속에는 기독교의 역사성이 강조되고 심지어 명제적(propositional) 계시의 특징도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도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역사성과 성경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계시가 출발점이 되고 있지만 판넨베르크 신학은 헤겔적 역사 개념의 틀에서 출발한 것이며 하나님과 그의 계시는 이 틀에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인정되는 것뿐이다. 모든 진리는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해답을 얻게 되고 진실성이 밝혀진다는 판넨베르크의 주장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리는 현 삶에 혹은 자연 속에서 절대적 기준이나 법을 성취할 수 없고 어떤 이론적 확실성을 찾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그의 주장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현 제한된 세상과 실재를 더 확실한 방향으로, 즉 미래적으로 이끈다고 주장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 증명에 맞추어 진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이야기했다. 이러한 미래적 세계가 인간의 합리적 증명과 연결된다는 신념 하에 판넨베르크는 그의 신학을 펼친 것이다.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인간, 교회 모든 신학적 잇슈들을 그 신념을 가지고 펼쳐나간다. 그는 하나님을 역사의 ‘마지막’(eschaton)과 동일시한다. 공간적으로 말하면 ‘전체’가 하나님 자신이면 ‘부분’은 하나님의 표출이요 인간 역사인 것이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마지막’이 하나님이요, ‘현재적 미완성’은 인간 세계의 모습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그러한 ‘전체’ 혹은 ‘마지막’의 예기적(proleptic) 존재 혹은 상징일 뿐이다. 그리고 성령은 그런 종말론적 하나님의 인간 세계를 향한 영향력 내지는 그 하나님의 활동의 장(場)에 불과하다.


사실 우리가 판넨베르크의 글들을 읽노라면 우리의 신학과 비슷하게 들리는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그의 신학적 틀을 모르는 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아무리 말이 같고 설명이 같아 보여도 실재적 의미가 다른 경우는 우리가 좋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그의 신학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도록 하자. 판넨베르크는 사실의 진리성을 역사의 과정을 통한 이성적 관찰을 통해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중립적 증거가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성적 관찰이나 증거가 어떻게 중립적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결국 인간 개인의 자율적 판단에 의해 좌우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이 오기까지는 우리가 가진 지식은 부분적이고 예비적(provisional)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적 진리는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지식이 부분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불확실한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을 모든 존재론적, 지식론적 근거로 삼고 해결하려는 판넨베르크의 사고의 틀은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별 다를 바가 없다. 가깝게는 몰트만과 비슷하다. 또한 바르트의 실존주의적 틀이나 판넨베르크의 미래 중심적 역사의 틀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면 둘 다 인간의 자율성에서 투영(projection)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의 부활 개념을 예를 들어 어떻게 그가 인간의 자율성을 주장하는지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부활을 마지막 날(eschaton)과 연결시켜 마치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본다. 그러나 이 말은 정말 부활이 역사적으로 발생되었는지 아닌지 모른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가 말하는 부활의 역사성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과거에 발생된 사건으로서의 부활이 아니라 마지막 날과 연결되는 사건이다. 부활이 마지막 날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그 부활의 사건을 역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님의 부활 개념은 우리의 구속(redemption)과 연결시키기가 어렵다. 비록 마지막 때(eschaton)에 그 부활의 능력 혹은 효과가 주어진다고 하지만 그 마지막 때는 우리에게 알려진 영역이 아닌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께도 ‘아직은’ 알려진 영역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영역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실재적으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인간의 자율성을 확보해 줄뿐이다. 사실 판넨베르크의 종말론적 사고 틀은 칸트가 역사와 자연 세계인 현상적 세계를 위해 그리고 인간의 자율성 확보를 위해 본체론적(noumenal) 세계를 만들었던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그리고 칸트 철학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인간 역사 속에 돌입되고 모든 인간의 부분적인 것과 미완성적인 것의 원체(原體)가 되는 헤겔의 ‘절대적 정신’(Geist)과는 거의 같은 사고의 틀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절대적 정신’도 우리에게 모르는 세계나 다를 바 없다.


그 이유는 진리라는 것은 사실 ‘전체적’이어야 하고 ‘알려진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부분적이고 미완성적인 것을 아직 진리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그 ‘전체’가 그리고 그 ‘완성’이 현재적이어야 한다. 즉 미래적이거나 종말론적인 것은 우리에게 실재로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가르치는 종말론적 신앙은 언뜻 부분적이고 미완성적으로 보이지만 이미 과거에 발생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근거한 신앙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현재 우리에게 완성된 진리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분명 예수님의 부활은 마지막 날과 연결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가 주장하듯이 마지막 날에 그 부활의 역사성 혹은 진리성이 밝혀지는 의미로서의 연결이 아니라 바로 과거 발생된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의 능력이 성도들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연결인 것이다. 또 한가지 지적할 것은 판난베르크는 마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듯이 하나님의 존재적 근거를 미래에 두었지만 사실 이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미래에 의존케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하시는 분이 아니라 역사와 같이 존재하는 범신론적 하나님 아니면 미래가 속해 있는 시간에 갇혀진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사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부인하는 것이요 그의 神格(person)을 부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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