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른이해 〓/조직신학I(서철원교수)

현대신학 / 서철원 교수

by 【고동엽】 2021. 11. 7.

 

 
 

현대신학


- 서철원 교수 -
제1강 (2002년 3월 12일)


현대신학은 통상 20세기라는 시간적 공간에서 일어난 토론을 말한다. 이것은 정통신학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신학이 주를 이루는 신학이다.
이 강의는 두가지 목적을 두고 있다. 첫째, 현대신학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며, 둘째, 여러분들이 새로운 신학을 만날 때 그것을 식별해 내도록 하는데 있다. 현대신학은 새것이라서 재미는 있을 줄 몰라도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교회를 교회되지 못하게 하는 신학이다. 독일을 가보라. 이것이 살아있는 교회인가 죽어있는 교회인가를 판별하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현대신학의 문제점, 특히 배우는 학생들의 문제점이 무엇이냐면, 일찍부터 신앙을 가지고 그렇게 자라면 그 표준으로 인해서 이것이 잘못된 것이구나 라고 알게 되지만, 늦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것이 진짜인줄 알고 받아들이다 보니, 처음 믿을 때의 신앙은 다 없어지고, 현대신학이 다 옳은 것인줄 알게 된다는 말이다.


현대신학은 칼 바르트에게서 시작된다. 칼 바르트는 1919년 로마서 주석을 썼다. 스위스산골의 작은 교회에서 박사학위도 없는 그런 목사가 로마서 주석을 썼던 것이다. 1922년 다시 개정하였는데, 개정된 내용은 이전의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이것이 큰 반향을 일으켜서 유명하게 되었다. 1924년 궤팅겐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최고의 신학자가 되었다.
칼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신학을 하게 되었다. 경험이나 감정에 근거한 슐라이어막허의 신학을 반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르트가 아무리 슐라이어막허에 반대하여 매개신학에서 초월신학을 하고, 말씀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그의 아버지가 바로 슐라이어막허이다. 아버지를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 테두리 안에 있다. 그러므로 바르트를 하기 전에 슐라이어막허를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슐라이어막허는 독일 개혁파 신학자였다. 그는 루터파 신학과 개혁파신학을 합칠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책을 적을 때나 토론을 할 때, 먼저 루터파 신학을 언급하고 그 다음 개혁파 신학을 말한 다음 토론을 하였 던 것이다. 그는 경건주의와 모라비안의 영향을 아주 깊이 받았다. 그래서 그는 종교를 하나의 감정이고 그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삼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그는 철학적 묵상을 많이 해서 낭만주의에 속하게 된다. 그가 친하게 지냈던 괴테가 낭만주의였던 것처럼, 낭만주의는 이성에 반대하여 감정을 강조한 철학적 사상이었다. 그는 플라톤을 독일어로 번역을 했다. 플라톤의 원전 - [아티카 반론]에 적힌 최고의 코이네 헬라어를 번역했던 최고의 헬라어 학자였다. 그래서 성경신학자가 될 줄 알았는데 조직신학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자 뿐 아니라 칸트에 대해서도 많이 공부를 했다.
그는 결혼을 할 때, 유태인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의 아내는 그의 신학을 반대하였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듣지 않아서 근세신학의 시조가 되고, 19세기의 교부가 되었다. 교부라고 하면 5세기에서 7세기동안 말씀을 정리하고 재구성했던 역할을 했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의 신학으로 그는 19세기의 교부가 되었던 것이다.


루터파 신앙고백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따라서, 맨 처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신학의 시작이고, 그것이 모든 교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아야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종교 감정, 절대의존의 감정... 종교라는 것은 지식이나 행동의 영역이 아니고 감정이라고 했다. 슐라이어막허는 종교의 영역을 감정의 영역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그가 처음 신학을 시작할 때 정통적인 방법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당시의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바로 칸트의 철학, 헤겔의 철학이다. 칸트의 영향으로 모든 것에서 철학적으로 하지 않는 영역이 없었다.
슐라이어막허가 베를린 대학 신학부에 있을 때, 그가 학위라고 하는 것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을 신앙으로 재구성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교수들이 이야기했다. “슐라이어막허가 김나지움을 나오고 대학도 나왔을 텐데... 저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슐라이어막허도 신학을 함에 있어서 학(學)을 하고 싶었다. 신학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의 종교경험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 바로 신학이라고 했다. 이성으로 출발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자기의 경험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중세 철학에서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과 지식은 이성에서 얻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지식을 얻는 방식이 인간 바깥, 즉 외부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근세에서는 인간 내부에 있다고 했다.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에서 논리적인 법칙을 따른 추론을 통해 나온다고 하는 것이 바로 합리론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이성의 논리적인 추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경험론이었다.


지식을 얻는 방법이 인간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근세철학을 내재철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이냐 악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 표준이 된다. 확실성의 문제도 전부다 인간의 이성의 문제이다. 인간이 아름다운지 아름답지 않은지에 대한 것도, 아름다움의 표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그렇다.
제일 아름다운 꽃이 무엇인가? 장미, 수선화, 백합....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서 아름다움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주관적인 판단 기준에 의해서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아름답다는 판단의 기준도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표준이 인간 내부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영국 사람들은 이것이 학적인 지식이 못된다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성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그런데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사물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직접적인 감각기관을 통해서 얻지 않고서 얻는 것은 없다고 했다.
즉 인간의 이성에 오성의 법칙을 집어넣게 되면, 인간의 이성이 감각기관을 빼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던 것이다. 거기서 바로 출발해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영역은 없다는 것이다. 지식을 세우는 것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전통적인 방법처럼,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존재에서 시작한다면, 그것은 학(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학함에 있어서 그 출발점이 인간의 종교감정에 두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내재신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에서 신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주어진 것에서 출발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방법론에서 모든 신학을 완전히 재구성한다. 용어는 “하나님” “예수” “성령” 등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게 된 것이다.
“위대한 사람은 학파를 만들지 않고, 시대를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슐라이어막허는 개혁파 신학자였다. 개혁파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주권”하니까 우리는 물리적인 힘을 자꾸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체험에 구체적으로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 개혁파에서 말하는 절대주권이라는 개념을 절대의존이라는 것으로 바꿔버렸다. 절대자가 계신 것처럼, 절대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식론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내가 사물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나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다. 윤리는 더 그렇다. 윤리는 나가야 된다. 행동해야 된다. 그러나 감정은 수동적이다. 이 영역은 외부와의 연결이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감정이 종교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는 교양인으로서 종교를 무시하는 이들에게 글을 적어서, 독일 등지의 예술이 발달한 지역에 그 본질을 가르쳐 주었다.




제2강 (2002년 3월 19일)


지난 시간에는 슐라이어막허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슐라이어막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칸트철학의 도식에 의해서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존재이다. 이 모든 현상 전체를 만드신 이가 있다면, 그런 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식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종교 경험과 의식 속에서 만나야 된다. 종교적 감정은 절대자가 있어서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이에 매달리는 것이다.


우리의 종교 감정이나 의존의 감정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독립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런 하나님은 창조의 주가 되지 못한다. 창조에 대해서 말하기를 한다. 우리의 의존의 감정이 어떻게 이 세계에 미치는 가에 대해서 창조를 말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를 만드시고 동물을 만드시고... 이런 창조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해서도 그렇다. 신론에서 말하지 못하고, 부록에 실어놓았다. 유대교에서 유일신론에 대해서는 절대의존의 감정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귀신들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가? 절대의존의 감정이 의존하는 대상이 많으면 다신교이고 하나로 고정되어 있으면 유일신이 되는 것이다. 로마교는 다신교이고 유대교는 유일신교이니까 이것을 합치기 위해서 삼위일체를 말한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창조의 중보자라고 한다. 중보자란 창조가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아들이 창조했다고 하는, 실제 창조자라고 이해한다. 아버지에서 뜻해진 창조를 아들이 실제로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보자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규명을 못하는 가운데서,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말할 수 있겠는가? 슐라이어막허에게서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육신이라고 하는데 왜 그런가? 예수도 인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 예수는 신의식이 있다. 우리에게는 신의식이 별로 없다. 우리는 주일날도 너무 바쁘다. 예배도 많고 사역도 많다. 우리는 하나님 생각이 별로 없다. 밥 먹을때도 그냥 아멘만 한다. 그런데 예수는 신의식이 충만하다. 고정이고 불변이다. 우리는 연애할 때는 온통 여자생각 뿐이다. 여자생각이 고정이고 불변이다. 그런데 예수에게는 하나님 생각이 고정이고 불변이다. 그래서 그것이 신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신이다. 그래서 예수를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 없을 때는 돈 생각만 고정이고 불변이다. 예수에게는 하나님 의식이 충만할 뿐만 아니라 고정이고 불변이다.


왜 구주라고 부르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예수에게서 전달되어 졌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구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슐라이어막허에게서는 십자가가 없다. 의미가 없다. 죄에서 구원되는 것은 없다. 다만 신의식이 전달되어 져서 우리가 갖게 되는 것으로서 구원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예수는 신의식이 충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행복을 갖고 살았다. 애인들은 만나면 그냥 좋다. 생각만 해도 좋다. 길에서 걸으면서 생각만 해도 좋다. 애인생각을 하면 너무 좋다. 이처럼 예수도 하나님 생각만 하면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다. 우리도 이렇게 예수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생각을 하고 기쁨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고난 주간이 다가오고 있다. 슐라이어막허는 성경을 하나의 참조사항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동정녀 탄생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믿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조지 오웬의 [1984년]에 보면, 포드총재 밑에 일하는 모든 사람은 모두 부화장에서 목적을 따라서 길러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 제임스는 정상적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얼마나 더러운가? 양수가 터지고 피도 나오고.... 더럽다고 이야기를 자꾸 들었다. 그래서 탈출했다. 현대문명이 가는 추세를 말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처럼, 예수라고 하는 하나님의 인격이 나오는데, 사람들끼리의 남녀의 관계를 통해서 나왔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더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정녀 탄생이 나왔다는 것이다. 부활은 성경에 씌어 있기 때문에 있다고 말할 뿐, 그것을 믿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승천도 마찬가지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참조사항일 뿐이지, 그것이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의 예수의 신의식을 가져서 예수의 행복을 얻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19세기는 기독교가 성할 때인데, 범죄가 드러날 수가 없었다. 죄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구속을 말해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물을 가지고 성찬식을 해도 괜찮은 것이다. 개혁파는 성찬식을 1년에 4번 이상 실시했다.


성령론에 대해서 말해보자.
각 민족마다 특성이 있다. 한국민족은 “빨리 빨리” 정신이다.
교회도 예수믿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공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성령이다. 고대교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성령은 인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교회가 혹은 믿는 자 전체가 가지는 특색이 있다. 성령은 교회가 공통으로 나타내는 특색이다. 실제로 성령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2002년 3월 26일


지난 시간까지는 근세신학의 아버지 슐라이어막허에 대해서 배웠다. 슐라이어막허는 교회에서 시작해서 신학을 재구성했기 때문에 교회의 필요에서 시작한다. 절대감정, 종교의존의 감정을 다룬다. 창조도 무에서의 창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현상이 절대의존의 감정과 어떤 관계를 이루는가에 대해서만 창조를 다룬다. 절대의존을 감정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가 될 수가 없게 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예수에게는 신의식이 무한하고 충만하고 고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왜 구주냐? 우리는 신의식이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의식을 나눠 가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애인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듯이,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이런 신의식에의 동참이 우리를 구원하게 하는 것과 동일하게 만든다.
내세가 있고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좋은 감정 -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는 신의식이 가득하도록 해주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말을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공통으로, 또는 교회가 공통으로 나타내는 특성이다.
19세기의 교회는 종교경험에서 절대의존을 감정에서 시작하게 되니까 이런 결과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리츨은 슐라이어막허의 자유주의를 완전히 내재화 했다. 그래서 종말론까지도 내재화했던 것이다. 리츌은 슐라이어막허의 틀에 위배되는, 그냥 자기 조상만 생각하는


20세기의 신학은 칼 바르트에게서 시작한다.
바르트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신학책의 시작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했다.
그는 독일에서 신학적 자유주의학자들에게서 직접 배우게 된다. 하르낙... 바르트는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자유주의신학으로는 하나님을 믿기는 하되 구원은 없다"고 보았다. 하르낙은 역사적 과학적으로 신학을 정리했다. 선포하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고 했다.
슐라이어막허는 인간의 종교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했다.


지난 200년 동안 역사적 비평에 의해서, 성경속에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있다...라고 한 것이 구자유주의이다. 이에 대해서 프린스턴이 대응하면서 정리했다.
바르트신학은 이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신학을 시작했던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라고 했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이 좋아했다. 프린스턴에서도 바르트의 신학을 환영했다.






2002년 4월 2일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칼 바르트 신학까지 왔다.
구원도 말하고, 화해도 말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을 강조하고 반복한다. 그런 신학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단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만 틀리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했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가장 중요한 교리로 생각한다.
바르트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언약을 중요시한다. 언약에 있어서
이신론이다. 理神論이 아니고 二神論이다. duotheism
삼위일체는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계시에서 시작한다.


계시자가 있고, 계시의 작용 혹은 행동이 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다. 스피커다. 여러분은 듣는다. 내가 왜 말하는 사람인가? 말하는 동작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입만 벌려서 중얼 중얼거리기 위해서 말하는가? 아니다.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서다. 계시의 내용이 있다. 말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 - 말하는 작용 - 말하는 내용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작용이 있으면 말하는 내용이 있는 것이고, 이것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계시자다. 무얼 전할 내용이 있기 때문에 계시의 행동을 한다. 이 셋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삼위일체다. 삼위일체는 그렇게 계시에서 보아야 된다.
하나님은 계시자를 하나님의 거룩에. 계시작용을 자기, 계시내용을 ____ 에 적용시킨다. 이것은 구분되기는 하지만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 개를 합쳐서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이다.
persona는 어떤 의미일까?
위격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이것을 인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양사람들에게는 각각 세 개의 인격이 존재하게 되기도 한다.
칼빈은 위격이라는 말을 무엇이라고 했느냐면, subsistance라고 했다.
마주 서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두 인격이 서로 마주 서있는 것...


예수 그리스도도 인격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영원하시다.




우리는 지금 바르트의 신학을 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기독론에 있어서 그냥 삼위일체라고 말할 수 없다. 창조를 빼고 삼위일체를 말할수 없다. 그런데 바르트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에서 벗어낫다. 그래서 그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과 다르다.
삼위일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방식이다. 位라고 해서 잘못 오해할 수 있다. 존재의 방식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양태론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고대의 전통적인 양태론과 다른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이 다르고 신약에서 다르고 성령시대에 또 다르다는 것이 양태론이다. 바르트의 것은 계시의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양태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구주는 성육신하신 말씀이라고 했다. logos en sarkos 그러니 저 하늘에 계신 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의 아니다. 그게 무슨 하나님인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그 분만이 진정 우리의 하나님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또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왜 그런가?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기 때문에 교제가 있다. 삼위간에 서로 교제가 있다. 사랑의 표현 방식이 있다. 그런데 바르트에게서는 그런 교제가 없다. 하나님은 한분이시기 때문에 교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 사랑의 교제를 원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이다. 교제를 원하셨는데 그 교제의 상대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언약이다. 교제의 대상을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언약이 곧 창조가 되는 것이다. 언약에 의해서 창조가 이루어진다. 언약이 없으면 창조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약이 이루어질 내적근거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피조물을 끌어 올려서 자기의 존재에 동참하도록 하셨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했다. 하나님은 이 파트너를 만드셔서 언약의 당사자가 되도록 하셨는데, 이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게 하셨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계획을 영원 전부터 하셨다. 그래서 예수는 영원전부터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향하여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케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에서 나서 살다가 죽었던 사람이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게 되었으니, 그가 우리의 구주가 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logos a sarkos는 우리와 관계가 없는 하나님이다. 그런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 logos en sarkos 성육신 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하나님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부활은 과거의 한 식간에 일어난 것이지만, 시간내의 현존이 바로 부활이다. 인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좌에 앉히는 것이 부활이다. 보좌가 무엇인가? 인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좌에 앉히는 것이 부활이다. 인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다.
부활은 예수가 정말 살아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살아있다고 한다.
내가 69년에 군목이 되어서 저-- 해안 부대에 있다가 누군가가 죽어서 국립묘지에서 추모예배가 있는데... 기장 목사님이 하는 말이 그것이었다. 우리 아들이 죽었는데, 그 아들이 부모의 마음에 계속 살아있는 것... 그것이 부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타락-구속의 순서인데, 바르트에게는 다르다. 하나님은 교제/ 즉 언약을 원하셨기 때문에 창조를 이루셨다. 즉 언약은 창조의 내적근거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여기서 우리가 바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이런 것이 없다. 하나의 하나님에게서 운동이 일어나서, 대칭이 생겼다. over against 이것이 대칭이다. “마주섬”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래서 나와 너가 생겼다. 이것이 관계이고 창조이다. 하나님을 보고 당신이라고 말하고, 하나님도 우리를 너라고 당신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결혼하기 전에도 남녀가 마주섬, 결혼후에도 부부의 마주섬으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디에서 창조했는가? 그것은 chaos에서 나온 것이다. chaos는 하나님이 지나쳐버리고 배척한 실재이다. 이것이 바로 어둠이다. 이 혼돈을 실재의 가장자리까지 밀어내셨다. 창조의 가장자리까지 간 것이다. 태양이 빛을 비추이면 어둠이 물러간다. 촛불을 피우면 그 빛의 거리만큼 어둠이 물러간다. 창조 자체가 은혜이지만, 창조를 어둠에서 바로 Das Nitie에서 보호하신다.
그러면 이런 창조는 실제 창조인가? 아니다. 창조기사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바로 낙원의 실재에 대한 의문에서 드러난다.
에덴동산이 어디에 있는가? 그 위치가 대충이라도 어디인지 알고 있는가? 그 위치를 잘 모른다. 아라랏산 부근인가? 가까울 수는 있겠는데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낙원이 어디인지 잘 모른다는 말이다.
환타지의 랜드가 있다. 노동자의 천국이다. 일하면 안 된다. 먹고 자고 놀고 자고... 일하면 안 되는 곳이다. 그런 곳이 노동자의 천국이다. 그곳이 어디 있는가? 크리스마스 25마일 뒤에 있다고 한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낙원인 환타지일 뿐이라는 것이다.
에덴동산은 이스라엘의 경험을 역투사한 것일 뿐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에덴동산을 역투사 해서 만든 것이 그것이 바로 낙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왜 이런 게 생겼는지를 말해주는 신화일 뿐이다. SAGA다. saga가 무엇인가? saga를 무엇이라고 번역하면 좋을까? 선사시대의 영웅담을 saga라고 한다. 신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창조 신화...
에덴동산의 역사는 점(占) 하는 역사라고 한다. 점을 치면 몇 % 이루어지는가? 그의 점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점인가? 역사인가? 실재인가?




2002년 4월 16일 화요일


점... 운명적 신앙... 운명적 구원에 대해서... 이것이 바르트 신학의 핵심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구원을 화해라고 본다. 왜 화해라고 하는가? 화해는 두 사람이 싸워서 뒤틀어진 사이에서.. 술로 풀고 화해하자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화해를 구원이라고 한다.
우리는 구원이 죄와 사망에서의 구원이라고 하는데, 바르트는 구원이란 존재에의 동참이라고 한다. 피조물이 죄의 한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이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기 때문에... 예수는 참 하나님이고 참 사람이다.
logos en sarkos : 성육신에 있는 구주...
화해 = 구원 = 존재에 동참함
하나님은 이 일을 창조하신 다음에 정하신 것이 아니다. 이 일을 창조전에 언약전에 영원에 작정하셨다. 신존재의 동참을 영원전에 작정하셧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교제하고시고... 창조보다 앞선 것이 구원이요 이것을 영원에서 정하셨다. 누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래서 그는 모든 만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다. 하지만 그는 시간 내에서 나서 우리와 꼭같이 살다가 죽으셨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개념은 없고,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함을 구원이라고 한다.


미국 북장로교회가 이러한 바르트 신학에 근거해서 신앙고백서를 다시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서 한국에서도 1960년 말에 회의를 열었다,.


칼빈은 이중 선택을 말했다. 이중 예정이요 이중 선택이다. 칼빈은 좁아서 그랬다. 바르트는 이에 대해서 더 확대해서 만인 구원설을 택했다. 결국 바르트가 더 큰 인물이라는 것이다.
선택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 존재에 동참하도록 미리 선택하셨다. 다 선택하셨다. 그러니 만일 구원이다. 왜 이것을 은혜라고 하는가? 피조물인 우리는 이것을 요구할 수도 없는 처지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로 미리 미리 정하셨으니... 우리가 바랄 수도 없는 일이 이루어졌으니, 이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 선택되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은 선택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서 선포해주어야 된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대해서 질문 있으면 하세요.




2002년 4월 23일


현대신학은 그의 아버지 슐라이어마허를 벗어날 수 없다.
오늘 부터는 불트만을 보자.
불트만은 바르트보다 나이가 2살이 더 많다. 바르트는 개혁파지만 불트만은 전통적인 루터파다. 92세의 나이로 죽었다. 자유주의자도 장수해요..(하하하)
불트만은 바르트가 신학운동을 펼쳤을 때 합세했다. 하지만 불트만은 과격하게 자유주의신학을 배운 사람이어서 바르트 정도의 수준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서 독립해서 자기만의 방법을 세웠던 것이다.
궁켈을 이어서 성경학을 공부했고, 그래서 신약학을 전공했다. 헤르만 궁켈에게서 배워서 종교사적인 방법을 이어갔다.
신약학은 희랍어만 잘하고 구약학은 히브리어만 잘해서는 안된다. 그 정도만 한다면 신학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구약을 해도 희랍어에 라틴어도 하고 그 외에도 고대 근동어도 해야 된다. 신약학도 그렇다. 여러분 중에서 좋은 성경학자가 나오면 좋겠다. 그래서 바르게 신학을 하는 사람이 나와야 할 것이다.
말부르그에서 신약학 정교수로 가르치고 있을 때, 28살 먹은 하이데거가 들어왔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이라는 강의를 했고, 그의 강의를 듣고 불트만은 그것이 바로 신학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이데거라고 한다면, 철학에서도 존재 문제를 다루어야 된다. 이제까지는 존재자만 다루었다. 존재자의 특성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존재는 못 다루었다. 바로 존재자의 존재를 다루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존재자의 존재를 어디에서 접근하느냐 하면, 인간에게서 접근해야 된다는 것이다.


현존재..
존재자의 존재를 접근할 때, 인간- 즉 존재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의식할 수 있는 존재에게서 접근한다. 사람이 존재 방식은 관심(sorge)이라고 한다.
여러분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인가? 빨리 큰 교회를 맡아서 부흥하는 목사가 되는 것이죠? 아이를 데리고 백화점을 가면, 엄마는 옷에 관심이 있고 아이는 장난감에 관심이 있지요. 사람은 이렇게 관심에 의해 살아간다. 일상적인 삶... 이것도 현존하는 존재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언제 본래적인 자기 존재로 돌아오는가? 죽음에 이르면... 돌아온다. 죽음 앞에서는 이제까지 의지했던 재산이 아무런 힘이 안 된다. 도움이 안 된다. 이게 진짜 아무것도 아니구나... “無”를 깨닫는다. 본래적인 자기 존재 - 실존으로 돌아온다.
이거로구나... 신약이 말하는 것이 바로 저것이구나...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불신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십자가의 선포로, 믿음으로, 영원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렇게 “得道”했다. 그래서 불트만은 신학작업을 하기로 했다.
비신화화 작업과 실존주의적 해석을 했다.
불트만은 과격하게 자유주의 신학에 젖어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본래의 자유주의신학으로 신학작업을 수행하기로 했다.


성경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관으로 되어있다. 그 안에 신약이 현대인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을 현대인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신화적인 부분을 벗겨내고 번역하면, 현대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된다는 것이다.
병들면 병원에 안 가고 기도부터 하는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 보라. 그런데, 기도하고 귀신 쫓아내서 병 나았다고 하면, 누가 그걸 믿겠는가? 그것은 신화다.


1세기 사람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신화를 믿고 있었다. 선이 있고 악이 있고, 선한 영이 있고, 악령들이 있었다. 양 영역에 있는 영들이 가운데 있는 세상의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이끌려고 대결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상계 - 위가 어딘가? 그런 데에 선한 영이 있기는 한가? 하계는 어디 있는가? 지옥이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와서 순회전도자가 되어서 전도하다가 잡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런 게 어디 있느냐? 다 신화다.
귀신이 있는가? 어떻게 귀신을 추방하는가?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은 몸이 무덤 밖으로 나왔는가? 한 개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승천으로 올라갈 곳이 어디인가? 인공위성을 타고 지구를 돌아보면,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밑인가? 지옥은 어디에 있는가?


현대인의 과학적 사고로 배양된 틀에 의하여 보면, 신약은 비신화화가 필요한 글일 뿐이다. 받아들일 수가 없다.
비신화화 하면, 그 껍질을 벗기면, 그 안에 남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인간이해이다.
이런 신화적 세계로 포장된 이유는, 교회가 예수가 했다고 하는 자기 주장들과 칭호들을 만들어서 그에게다 덧붙였던 것이다. 실제로 예수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교회가 이스라엘에서 희랍-로마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다른 종교에서도 그러는데, 우리가 경배하는 예수에 대해서, “구주”나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못 붙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방종교와의 교류에서 교회의 신앙이 자라간다. 그래서 교회의 신앙이 예수에 관한 것들을 만들어서 예수에게 넣었다.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예수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다. 교회가 만든 것이다. 교회가 그 신앙에 대해서 예수에게 투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예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신앙고백일 뿐이다.


이것이 구 자유주의이다. 그 이후가 신현대주의-신신학이다.
구자유주의- 헤르만과 하르낙에 의하면, 비평적 방법으로 분석하면 역사적 예수, 즉 순수한 예수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신앙진술 뒤에 있는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를 분석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불트만은 “No”라고 대답한다. 모든 성경은 신앙진술이지, 그것이 사실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약의 복음에서에서도, 역사적 진술과 신앙의 진술을 분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신앙의 진술이다. 단지 실제는,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알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 외의 것은 모두 신앙진술이다.
그런데 신앙진술을 할 때, 모두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신화적 틀에 들어있다. 이걸 다 벗겨내어야 된다.
人間理解는 1세기 γνοσις의 인간이해를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해도 이 틀을 벗겨내야 된다.
십자가의 사건을 선포한다. 선포하면 변화가 일어난다. 십자가를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 만드는 것은 선포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불신앙에서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다. 선포의 능력이다.
부활은 십자가의 의미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았는가? 누가 보았는가? 그런 기사를 사실이었는지...
죽은 사람이 시신을 끌고 밖으로 걸어나온다... 무슨 의미인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십자가를 하나님의 구속의 사건으로, 마지막 사건으로 규정짓는 의미이다. 신자유주의는 비신화는 다 없애버리지만, 신자유주의에서는 이것에다가 모두 의미를 덧붙인다. 부활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와 함께 한다고 선포한다. 그러니까 아멘 한다. 부활은 선포가 일으킨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 맘속에 살아있다.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말이 일으킨 사건이다. 믿음으로 부활을 받아들이면, 예수를 믿는 사람의 마음에 부활하여 함께 계신다.






2002년 4월 30일


우리는 아직 불트만 토론 가운데 있다.
불트만에 의하면, 복음서가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의 기록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에게 붙어있는 칭호들은 예수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아니고 교회의 신앙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교회의 신앙이 자라감에 따라 랍비로 주로 그리고 하나님으로 된 것이다. 복음서는 하나님의 역사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은 역사고 어떤 것은 신앙이고.. 이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자유주의다. 그것이 1920년대까지 구자유주의가 했던 역사적 비평적 방법이다. 역사적 요소와 신앙적 요소를 구분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불트만은 모두가 신앙에 의해서 각색된 것이라고 했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 예수를 구분해 낼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복음서 뒤로 돌아가서, 여기에서 예수상을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있는 것은 선포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왜 죽엇는지에 대해서 불트만에게서 설명은 없다. 다만 선포가 부활사건을 만들 뿐이다. 선포가 일으킨 사건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죽음앞에 직면하면 세상에서 의존하고 의지하던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불트만은 신앙인이다. 죽음앞에서는 십자가를 붙든다. 십자가의 선포를 받아들이면, 그것이 믿음으로 살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와 부활은 별개의 사건인데... 십자가는 역사적 사건인데,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그런 의미의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의미이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자기들과 같이 살아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살아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는 부활은 언제 이루어지느냐? 선포할 때 이루어진다. 죽은 자 예수가 부활했다고 할 때 그것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있는 것이다.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선포가 일어난 사건이다.
이것이 제일 걸려 넘어지기 쉬운 점이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골고다 언덕에서 살아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활이 사건으로 발생하는 것은 선포의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허공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시간과 장속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이다. 선포가 일으킨 사건이다.
그래서 신약의 사건들은 선포가 일으킨 사건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런 것에서 당대 랍비들과는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케제만이 불트만 학파인데.. 불트만에게 물어보기를... 복음서에서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전혀 알수가 없다고 하는데... 분명히 당대의 랍비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새역사적 예수탐구”를 이루었던 것이다. 예수 자신이 자기 자신을 신앙의대상으로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믿음의 증인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른 믿음의 자세라고 증거했던 것이다. 그런데, 복음서를 잘 보면, 기독론을 알수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간접기독론”이 나온다. 이를 간접기독론이라고 한다. 이것은 콘첼만에 의해서 시작된다. 복음서는 학파의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불트만과의 차이다.
이것은 기독론이 될 수 없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의 기록이 아니라, 학파의 신앙이라는 말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십자가와 부활은 어떻게 된 것인가?


불트만은 선포가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말이 일으킨 것이다. 언어가 일으킨 것이다. 언어 사건이다.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것이다. “야..! 너는 오늘부터 내 동생이다...” 실제로 동생은 아니지만 오늘부터 그렇다고 말하니까, 그렇게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부활은 없었지만, 부활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언어가 된다. 언어사건이 된다.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했다고 하는 것에서 언어사건이 된다.
구자유주의에서는 순수한 예수상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편집비평에서 불트만은 있는 것이라고는 선포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포뒤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도, 언어사건이다
이 언어사건은 틸리히로 연결된다. 하나님도 언어사건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비평이론은 구비평이론에서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문서설에서 종교사적 비평, 전승사적 비평으로 이어진다. 벨하우젠 - 궁켈... 이런 비평은 다양성에는 기울이기는 하지만 통일성은 없다. 그런 상황에서 통일성을 이룰 방법은... 기존의 재료에서, 신화, 민요, 소설, 법조항, 법체계 등을 합쳐서, 비록 무명의 저자라도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소설식으로 창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기존의 비평학에서 가질 수 없었던 성경의 통일성을 찾아낼 수 있게된다. 그것이 바로 문학비평이다. 이전의 비평에서는 헬라-로마문학을 표준으로 삼지만, 문학비평에서는 고대중동의 문학이나 작품에서 그 표준을 삼는다.


언약과 율법의 전수가 나오는 것도 다 소설이요 창작이다. 그런데 왜 모세가 등장하는가? 모세의 이야기도 소설이다. 요셉의 이야기? 룻기... 연대가 사사시대라고 되어있다. 소설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소설이다. 노아의 이야기도 소설이다.
이스라엘에 남북으로 갈라질 때 제일먼저 북쪽 이스라엘의 선동으로서야 될 지파가 베냐민 지파다. 그런데 그렇지 않는다. 유다지파에 붙어 있는다. 왜? 그 옛날 유다가 베냐민을 감싸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을 만든 것이다.
무명의 저자가 비록 저술했어도, 이 사람은 큰 신학자다. 뒤에 모세의 이름을 등장시킨 것은 율법의 권위를 더 강화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도 문학비평이 들어와서 보편화되어있다. 웨스트민스터도 받아들였다...문학비평의 특징은 소설로 창작한 것이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5월 7일 화요일


사회과학적 비평(socio-scientific criticism)
고대사회는 patron - client 의 관계다. 하나님은 patron이 되고, client는 이스라엘이다. 옛날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patron과 client의 관계다. 그런데 예수가 와서는 new patron으로서 broker가 된다. 일반적으로 broker는 얼마를 받는가? 중개의 비용으로 5%를 받는다...? 이러한 patron과 client의 관계는 “명예와 수치”의 관계다. 그런데 예수는 성전에서 화를 내기도 하고 뒤집어엎기도 했다. 왜 그랬는가? new patron 개념이다. 성전을 훼방하는 일은 성전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out-cast 추방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위상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사용된 일이다.
회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야이로의 사건에서도 그렇다.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들, 가난하고 볼 품없는 사람들이 명예의 공간, 사회적 공간을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회당에는 우리같은 일반인들은 참여할 수가 없다. 예수와 같이 바울도 이렇게 노력했다. 소외계층을 위해서 사회적인 공간을 마련해주는 일을 했던 것이다.


틸리히를 하자(1886-1965)
이는 먼저 철학박사가 되고 그 이후에 신학박사가 되었다. 종교철학을 연구했고, 종교사회주의에 가담하고 활동했다. 결국 나치에 의해 교수직에서 해임되자,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는 1차대전 때 군목을 했다. 1886년의 일이었다. 한번을 깨어 일어나 보니 자기가 시체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관념론을 버리고 실존주의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도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영향을 받았다.
“존재에의 동참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왜 신문제가 나왔느냐? 절대자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실존이다. 존재다.




2002년 5월 14일


틸리히... 우리는 지금 틸리히의 신학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신 창조주로서 인격적인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생긴다. 우리는 존재다. 있음이다. being “있음”이라는 말이 더 낫지 않는가? 우리는 자기가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존재에 부딪히게 된다. 죽게 된다. 우리는 비존재에 둘러싸여있다. 그래서 불안하다. 불안은 우리의 심리적인 느낌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적인 본질에 해당되는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언제 존재가 끝날지 모른다. 비존재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불안한 삶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존재로 있는데, 비존재의 충격에서 자기의 존재의 문제를 문제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문제다.
우리는 존재자로 존재한다. “있는 것”이다. 존재자로 있는 것은 개별자로 있는 것이다. 하나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궁극적인 존재라고 하는데, 존재자는 궁극적인 존재가 못된다. 틸리히는 깨어 일어나보니 시체가운데 있었다고 한다.
종교 사회주의에 가담했다. 라인홀드 니버가 틸리히를 청했다.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 그런데 이 사람이 존재 문제에 대한 심각한 고뇌가 있었다.


개별 존재자는 궁극적인 존재가 못된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공간에 존재한다. 개별자로 존재한다. 끝이 있으니까 궁극적인 존재가 못된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 무, 비존재에 의해서 위협 당하면서 존재한다.
그때 신이 발생한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 누가 보았는가? 아니다. 존재의 깊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발견하게 된다. 미소짓고 웃는 여공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라고 할 때의 그 하나님이다. 아내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우리는 시적으로 표현하지만 이것이 바로 틸리히의 신개념이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존재의 힘이다. 존재의 기반이다. 모든 존재가 있게되는 기반이 바로 하나님이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궁극적인 관심사를 대변하는 것이 하나님이다.


죽고사는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나깨나 문제가 된다. 나한테 죽고사는 것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문제가 있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다. 자나깨나 고민하는 문제가 있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다. 여자문제? 그게 하나님이다. 박전도사에게는 학생부 부흥이 바로 하나님이다. 그래야 연말에 쫓겨나지 않고 교회에 계속 붙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조는 무엇인가?
슐라이어마허가가 창조를 종교의식과 관련해서 설명했다. 독자적인 창조는 없다고 했다. 그러니 그의 후예들도 똑같다. 틸리히에게서 창조는 괴물들이 존재에 동참해서 있는 것을 창조라고 부른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타락은 무엇인가?
타락이라는 말은 소외다. 하늘에서 갑자기 뭘 하나 따먹고 타락했다고? 아니다. 그런건 신화다.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이 바로 소외고, 그것이 바로 타락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시작부터 본래 존재의 근원에서 떨어져있다. 존재의 근원에 합쳐야 된다. 그런데 존재의 근원이 별도의 존재로 있어서 그것에 합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본래 있어야 할 존재의 기반, 근원에 합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왔다. 그러니까 새존재를 바라는 것이다. 예수에게서 새 존재가 있었다. 없던 존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존개의 기반에 서 있는 것이 새존재다. 한 사람이 예수를 가리켜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으로 그리스도가 되었다. 존개의 근원에 합쳤다. 똑같은 실존의 상황에 종속되었지만, 존재의 근원에 합쳤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그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해서 그리스도가 되었고, 그에게서 새존재가 나타났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에게 합쳤을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
내세를 보았는가? 못 보았다면 내세는 없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에 합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2002년 5월 21일 화요일


기독교는 하나님이 있든 없든 간에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된다. 용어가 있으니까 그 용어에 대해서 설명은 해야 된다. 영에 대해서 틸리히는 이야기한다. 영이 무엇이냐면, 생명과 의미를 합친 것이라고 한다. 슐라이어막허는 삼위일체가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이를 안 할 수가 없다. 성경비평이 왜 생겼는가? 삼위일체를 해체하는 데서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은 없다. 예수는 사람이다. 우리와 똑같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결혼을 안해서 아이가 없다는 것이다.
삼위일체가 무엇이냐? 신에게서 로고스가 나와서 그게 예수에게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삼위일체다. 신이 무엇인가? 존재의 힘이다. 그게 무엇인가? 그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다. 힘을 내어서 무엇을 한다고 할 때, 그 힘이 바로 로고스의 원리다. 그게 예수에게 임했다. 이게 삼위일체다. 삼위일체라는 말을 쓰니까 기독교가 된다.


칼 라더를 하자.
바티칸 공의회에서 신학을 결정한 사람이다. 20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를 능가한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한다. 그의 책은 16권이 연속으로 나오고 있는데, 아티클을 모아놓은 글이다. 그의 조직신학 - 신론은 틸리히와 똑같다. 바티칸공의회에서 종교다원주의를 교리화할 때 라너의 신학을 채택했다.
우리는 종교다원주의라고 할 때, 기독교에도 구원이 있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이해한다. 이슬람은 원래 너무 비슷하니까 구원이 있고, 다른 종교에서는 상징의 빛이 있으니 영원한 구원을 이루도록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라너의 신학은 그런게 아니다. 무신(無神)신학이다. 예수는 사람이다. 그런데 결혼을 안했고 아이가 없으니 우리와 다르다. 그런 것 뿐인데 구원이 무슨 구원인가? 구원이 없는 것이다. 기독교에 구원이 없으니, 다른 종교와 차이가 있을 것이 없는 것이다.




2002년 6월 4일 화요일


라너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주의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 그 오메가 포인트는 예수 그리스도다.
인간은 하나님이 허공에다가 자기를 발설하심으로 생겨난 것이다. 자기를 비움으로 생겨난 것이다. 자기 초월과 하나님의 존재 통보가 합치된 것, 이것이 역사내에서 한 시점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이렇게 말하면 전통적인 신으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게 보면 또 안된다. 하나님은 신이 아니다. 이 시간내에서, 시간의 한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구주다. 하나님의 존재 통보와 인간의 자기 초월이 합쳐져서 생겨난 것이다. “왜 그일이 예수에게만 일어나는가? 그건 정당하지 못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면에서 절대적인 구주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죽었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자기 존재를 통보해주신 것이다. 인격적인 존재가 성육신 한 거? 이런 거는 신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엇인가? 예수는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러면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가? 부활은 가능하지 않다.
로마교회에 의하면 예수가 교회를 세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교회가 예수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교회에서 예수를 만난다.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필요한 것이다.
시간이 없으니까 몰트만으로 가자.


2차대전에서 독일이 패하고 마샬 플랜에 의해서 60년대에는 미국의 경제가 엄청 좋아졌다. 그때 독일에 간 사람들은 엄청 부자가 되었다.
1960년 《소망의 원리》를 펴냈다. 이는 결국 “소망의 신학”의 글이 되었다. 근세를 움직인 동기는 “자연과 자유”다.
van Riessen이 적은 책이 있다. 그 책의 예언대로 거의 다 일어졌다.
그 자유를 실현하는 데는 이 부로리한 사회가 그런 것을 정당화 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


몰트만도 개혁파 출신이다. 그의 자전적 길에 남
정통적인 율법의 해석과 이해에 거슬리니까, 하나님 모독자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었다
예수는 로마의 권력에 대항했다가 반역자로 죽은 자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신 모독자로 죽었고, 반역자로 죽었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들이 못박혀 죽는데, 아버지가 그것을 본다. 아버지가 아들을 버림으로 하나님 자신도 버리고 있다.
죽음은.... 아들이 당하는 고통... 아버지는 그런 고통을 함께 당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아들을 죽음에 내어준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버림받아 죽었지만만, 하나님이 아들도 죽이고 자기도 고통을 다루j고../ 십자가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이냐? 인간의 인간성이다.
삼위일체는 우리의 전통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있다.
부활은 오고있는 하나님의 본체이고, 예수가 그것을 입었던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