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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1536년 판 기독교강요가 나오기까지(1)

by 【고동엽】 2021. 11. 7.




서 론
Ⅰ. 1536년 판 강요가 나오기까지
(1532-35)
A. 기독교 강요 초판의 전주곡
1.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의 딜레마
기독교 강요가 쓰이게 된 이면에는 프란시르 1세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버티고 서 있다. 존 칼빈이 프란시스1세의 진노에 처음으로 직접 맞닥뜨리게 된 것은 1533년11월 1일 ‘모든 성자들의 날’(All Saint' Day)이후였다. 그 날 파리에서는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의 파리대학 총장 취임이 있었다. 그때 그가 행한 연설은 사실상 마태복음 5:1-12에 관한 강해 설교였다. 칼빈이 그 설교를 작성했는가 혹은 최소한 그것에 일익을 담당했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이다. 칼빈이 당국자들에 의해 그 설교문 작성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갑자기 파리에서 도망해 버렸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콥의 연설 말미쯤에 다음과 같은 복음에의 초청이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마5:11).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 진리를 담대히 말하지 않고 감춥니까?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몸은 죽이되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옳습니까? 몸은 죽이되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옳습니까?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피흘려 우리를 영원한 죽음과 사탄의 결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그분의 이름 때문에 가장 미미한 고난을 받는 것조차도 꺼려하는 인류의 배은망덕함이여! 세상과 사악한 자들은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으로 순수하고 진지하게 침투하려고 하는 자들을 이단, 미혹케 하는 자들, 악한 말을 하는 자들, 그리고 사기꾼이라고 불어 왔습니다...그러나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모든 것을 태연히 견디는 자들은 복 있는 자들입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이러한 연설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콥과 칼빈은 파리에서 도망쳤다. 12월 10일 프란시스는 이처럼 성동적인 멧세지의 장본인들인 이단 종파를 어떻게 체포하여 처벌할 것인가에 관한 교서를 파리 의회로 보냈다. 프란시스는 콥 사건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충성스러운 친구들이여!...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도시, 파리, 우리 왕국의 수도에서 일어난 사건에 의해 심히 불쾌하고 심기가 불편합니다. 우리 왕국의 최고의 대학에는 저 저주받을 루터파 이단들이 득실거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 하여 그것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든 대책을 강구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본보기로써 유감스러운 처벌이 행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짧은 서론에서 칼빈이 프란시스 1세에게 호소하는 글을 쓰게 된 배경이 되는 정치적 사건들과 교회와 국가 관계의 그 복잡한 역사를 상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단지 우리는 그 배경과 정치적 주역들의 성격을 대충 훑어 볼 수 있을 뿐이다.
프란시스 1세는 자신의 통치 기간 전체에 걸쳐 계속적인 공격을 당한 군주였다. 그는 자기 왕국의 총화를 위해 우유부단하고도 일관성 없는 방식으로 투쟁했다. 몇 안 되는 자신의 통치 기반들 가운데 하나인 교회체제에 대한 프로테스트가 자신의 왕국 한 가운데에서 점증하게 되었을 때 그와 그의 중요한 종교 자문관들은 그것을 선동으로 간주했다. 황제로 선출되지 못하는 바람에 좌절하고, 세 번씩이나 이탈리아 원정에 실패하고(그 중 한번은 로마시를 야만적으로 약탈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첫 번째 라이벌인 찰스 황제에 의해 한동안 마드리드에 투옥 당하기도 하고, 끊임없는 침략의 위협에 시달리고, 자신의 영토 일부를 잃어버리기도 하는 동안 프란시스 1세는 정말 처절한 정도로 도움을 필요로 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한편으로 자국 내에서는 “루터 잔당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1534년 1월에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군주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1515년 레오 10세와 종교 협약을 체결했으며 1533년 마르세유에서 클레멘트 7세와 협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 때문에 그는 한 때 자신과 찰스 사이의 결투에 의해 제국의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제안하기까지 했으며 자신의 기독교 대적들에 대항하여 술탄과 동맹을 맺기까지 했던 것이다. 프란시스 1세의 통치는 전반적으로 우유부단하고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종교정책이라고 해서 어떻게 자신의 성격을 반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프랑스의 복음주의자들이 다루어야할 했던 사람은 이처럼 불안정한 군주였다. 프랑스 왕의 집요한 외교활동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1534년이었다. 1월에 프란시스와 독일 프로테스탄트 군주들 사이에 은밀한 조약이 체결된 후 5월과 8월 사이에는 독일 스위스 신학자들과 교회의 재연합에 관한 협상이 있었다. 프란시스의 수행원인 길롬 뒤 벨라이(Guillaume du Bellay)가 협상했던 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도들 중에서 프랑스 왕의 거짓된 평화 제의에 의해 좀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것은 스위스 개신교도들이었다. 종교개혁은 이미 스위스 도시들로 전파되었고 드디어는 서부에 있는 불어권 지역에까지 파급되었다. 비록 아직 제네바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많은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고국에서의 죽음의 위협을 피하여 스위스로 가서 거기서 피난처를 찾았다.
이제 화체설의 발전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화체설은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실제로, 육체적으로 느껴지게 임재하신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화체설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Lateran Council)에서 최초로 공인되었다. 그것은 중세 교회, 특별히 프랑스 교회에 위협이 되고 있던 알비겐파들(Albigensians)의 반(反) 성직, 반(反) 성례 교리들에 대항하기 위해 공식 채택되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는데는 두 세대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는데 그것이 공식화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두 대전(Summae) 에서였다.
미사와 그것에 수반되는 사제들의 기적은 사방에 있어 모든 중세 교회 체제의 기둥이 되었다. 병제(Concomitance)의 교리에 따라 평신도들로부터 성찬시에 잔을 박탈하게 되자 교회와 국가의 미묘한 역학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떠한 도전도 받지 않고 견고히 서 있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것의 성경적 타당성과 그것에 수반되는 측면들-일곱 가지의 성례제도, 면죄부, 공덕사상, 성자들의 기도 등등-에 대해 의심을 픔게 되면 교회와 국가에 의해 벌 떼 같은 공격을 받게 되었다.
14세기 말 화체설에 대항한 위클리프의 용감한 반대 운동은 당시 교황권이 약화되고 분열된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저지를 받았다. 심지어 성만찬을 개혁하려는 후스의 온건한 노력조차도 정죄를 받아 후스는 1415년 콘스탄스에서 순교 당해야 했던 것이다.
1517년 루터의 논문들이 이 성역을 문제 삼게 되었을 때 그리고 1520년에 그가 「교회의 바빌론 유수」를 통해 중세의 교회 체제에 결정적인 일격을 날렸을 때 억압적이고 비성경적인 교회의 중심 교리에 대한 비평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비평에 있어 상당히 온건했다. 그것은 그의 동반자인 스위스의 쯔빙글리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견해는 벽보의 선언문에 부분적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개혁파들이 수행했던 가장 필요하고 가장 위험한 비평 행동은 미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점이라는 것이다. 이 인기 있는 문서가 급속도로 유포되는 중에 그것의 저자들은 당장 여러 곳으로부터 반격을 받기 되었다. 이를테면 로버트 세노 같은 소르본느의 신학자는 그것이 프랑스에 나타난 이후 줄곧 루터주의를 진압하려고 애를 썼다(그러나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했다). 또한 고위직에 있는 카톨릭 인본주의자들은 왕과 함께 경고의 깃발을 쳐들었다. 왕은 자신의 정치적 계획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민중들은 미신적인 정통적 신념에서였든지 혹은 교회의 개혁에 흥미가 있어서였든지 그것에 반응을 보였다.
2. 칼빈의 세네카 주석(1532)-프란시스 1세이게 보낸 최초의 변증서인가?
칼빈이 복음적 그리스도인으로 중생한 것은 프랑스 역사가 이처럼 소용돌이치고 있던 때였다. 이제 우리는 그의 처음 살펴보기로 하자. 1532년 4월에 그는 최초의 저서를 출간했는데 그것은 「세네카 주석」(the Commentary on Seneca's De Clementia)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그의 종교적 순례의 첫 번째 발걸음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 인본주의자 주석과 그리스도인인 칼빈의 관계에 관해 쓰인 글들이 많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 있게 그것을 그의 신앙과 관련시켰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실상 거기에는 종교적인 언급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한 가지 난점은 칼빈의 신학적 견해가 절대 변하지 않았으며 그가 1559년의 「기독교 강요」최종판에서 기록한 내용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구별 없이 적용된다는 오래 묵은 인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의 신앙을 표현한 문헌들 전반에 걸쳐 일관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의 사상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변화되고 재고되고 개조되었다. 그의 「강요」의 주요한 다섯 개 개정판들을 잠시만 비교해 보더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직접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의 칼빈을 회심하기 전의 칼빈, 즉 세네카 주석을 썼을 때의 칼빈과 비교해 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1536년 판 강요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켜서 그것의 빛 속에서 세네카 주석을 고찰한다면 색다른 면모가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강요」는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저 유명한 편지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칼빈이 프랑스에 있는 개혁주의 동포들을 대신해서 1535년의 격랑기에 왕에게 보낸 유창한 호소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편지와 그 뒤에 나오는 신학 논문, 특별히 마지막 장은 프란시스에게 그리스도인 군주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관원들을 위한 거울”, “그리스도인 군주를 위한 교훈”등을 위한 이러한 연구는 16세기에 가장 흔했던 문학 장르들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 치고 자신들의 학자적 탁월성과 정치적 혜안을 군주들에게 과시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프란시스 1세에게는 길롬 뷰데(Guillaume Bude)가 있었고 필립에게는 에라스무스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국내의 혁명적 기운들과 타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의 위협이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겁을 집어먹은 통치자들의 억압적 폭정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민감하고 온건한 사람들은 정치적 처신의 모델을 찾기 위해 고대의 문헌들을 샅샅이 뒤지게 되었다.
로마 제국 역사를 통해 네로보다 더 악한 폭군은 없었지만 그가 황제로 즉위할 때에 즈음하여 그 보다 더 훌륭한 정치적, 도덕적 교훈들을 소유했던 황제도 없었다. 칼빈이 인문주의자들 사이에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또한 어쩌면 프란시스1세에게 올바른 통치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옛날 스토아 학자들 가운데 네로의 자문역을 담당했던 사람의 저술에 손을 대 보려 했다는 것은 있을 법 한 일이 아니겠는가? 최소한 이미 상당한 윤리적 민감성을 소유했던 명목적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마도 칼빈은 자신의 온건하고도 박식한 작은 주석이 왕의 주의를 끌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3. 칼빈의 신학적 순례의 첫 단계
우리는 이미 칼빈의 세네카 주석에는 뚜렷이 종교적인 교훈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 초기의 저서를 가지고서 칼빈의 회심을 논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주제를 취급하는 것이 심히 주저된다. 왜냐하면 이 주제는 많은 위대한 학자들을 곤혹케 한 문제이면서도 아직까지 이렇다할 해답을 얻지 못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한 칼빈 자신의 침묵, 그 자신의 저술들 속에 직접적인 자료들이 빈곤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생애 가운데 이 결정적 시기에 있어 그의 행적에 관해 우리가 가진 정보들 속에 있는 신비한 차이들로 인하여 그의 회심 일자를 정확히 계산하는 것은 불가은한 일이다. 존 맥네일(John T. McNill)은 아마도 그것이 1534년 4월 5일과 1534년 5월 4알 사이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것은 칼빈이 자시에게 주어지던 성직록(benefice)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그것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추측이다. 그러나 가장 최근의 학자인 카노지(Ganoczy)는 그 보다 더 늦은 연대를 주장한다. 다행히도 연대 추정은 우리의 목적을 위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의 회심의 내용과 구조가 중요할 따름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견고한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그의 회심에 관한 우리 지식의 원천들을 공식적으로 검토하기 전에 그의 세네카 주석 속에 있는 종교적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근본적으로, 그가 회심하기 직전에 세 가지의 종교적 질문이 이 젊은이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첫째는, 이교와 기독교 사이의 차이점, 더 광범위하게 말한다면, 미신과 진정한 종교의 차이점이다. 둘째는, 인간 영혼의 기원과 성격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통치에 관한 질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섭리적 틀 속에서 인간 권위의 위치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B. 칼빈의 회심의 내용과 성격에 관한 고찰
1. 문헌에 나타난 그의 현실


칼빈은 어디서 자기 자신의 회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가? 다소 후대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가장 주요한 저술들 가운데 하나인 그의 시편 주석에서 아주 간단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회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 1539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있는 복음주의적 평신도들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회심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추기경 사돌레(Sadolet)가 제네바 시를 향해 진정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호소를 한 것에 대한 칼빈의 유창한 반론 속에 나타나 있다.
추기경 사돌레는 제네바 시민들에게 향한 자신의 호소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있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했는데 거기서 한 충성스러운 카톨릭 교도는 자신의 마지막 신앙고백을 하는 반면 한 프로테스탄트 교도는 헛되이 마지막 호소를 하고 있다. 칼빈은 그것을 교묘하게 역전시킨다. 사돌레에 의해 묘사된 분리주의자들의 입장에서 그는 자신을 회심 후에, 오류에 대항해 투쟁하는 성직자로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이상이 칼빈의 회심에 관한 자료로 흔히 인용되는 두 개의 문헌이다. 나는 여기에다가 내가 “칼빈 신앙의 핵심”이라 부르는 것을 첨가시키고 싶다. 그것은 1536년 판 강요의 제 1장 처음 몇 페이지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아마도 「삐에르 로버트의 신약에 대한 서문」을 전체적으로 첨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독교 역사에 기록된 많은 위대한 회심들 속에는 그 체험의 “계기가 된” 어떤 특별한 성귀가 있다. 그처럼 권능 있는 본문들의 긴 목록을 열거할 필요 없이 루터에게 그러한 작용을 했던 로마서 1장 17절만 생각해도 충분한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칼빈에게는 그처럼 분명한 기록이 없다. 어떤 특정 구절이 칼빈을 그처럼 움직였는가 어떤가를 논하는 것은 아마도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도 바울의 로마서가 그의 기독교 신앙을 형성하고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의 신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구절이나 혹은 최소한 한 본문을 뽑아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물론 로마서 1장리 그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롬1:18-25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한 구절만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롬1:18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히도 아니한다”는 구절인 것이다. 혹은 아마도 롬1:21을 제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하는 것이다.
왜냐고? 칼빈의 경건의 중심 되는 면모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중심 되는 지식이다. 그것은 1536년 판에 처음으로 언급되었지만 1559년에는 그것이 그의 사상의 조직 원리가 되다시피 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요약하여 칼빈을 하나님의 탁월성 혹은 능력들(“virtutes")을 열거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역동적인 것이여서 속성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1536년판 강요의 1장 서두에 나타난 이 목록은 로마서 주석(1540) 1장 21절에 나타난 것들과 거의 동일하다. 로마서에 있는 동일한 본문은 칼빈의 「추기경 사돌레에 대한 답변」(1539) 속에서도 암시되어 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진정한 신앙 고백을 제시함으로써 사돌레가 자신의 편지 속에서 칼빈의 고백이라고 모함했던 그 거짓 고백을 대체하고자 했던 것이다. 칼빈은 그가 반발했던 그 거짓 신앙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은...실로 그분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부르지만 그들은 당신께서 당신의 위엄에 합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셨던 그 영광을 다른 것들에게 돌리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자기들이 경배하는 성자들만큼이나 많은 신들을 상상했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것에 대한 강조 이야말로 칼빈의 경건에 있어서 중심 되는 주제들인 것이다.
칼빈의 회심을 가능하게 한 성경적 근거를 보다 광범위하게 살펴보자. 루터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칼빈에게 있어서도 그의 신앙의 비결을 지탱해준 것은 시편과 로마서의 주옥같은 글들이다. 루터가 쓴 최초의 주석은 시편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의 두 번째 주석은 로마서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1517년의 체험이 있기 수년 전에 쓰여진 것들이지만 그 체험의 준비 단계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이 쓴 최초의 수적은 로마서 주석이었다. 사실상 「기독교 강요」 그 자체가 로마서 주석을 확대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의 시편 주석은 그보다 훨씬 뒤에 쓴 것이지만 그것은 가장 뚜렷이 개인적인 주석이다(때로는 다윗의 입을 빌어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를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것은 소문에서 칼빈의 회심에 대한 명백한 언급을 하고 있는 유일한 문헌이기도 하다. 동시에, 통계적으로 말하자면, 단순한 양이 종교적 작품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건 간에 로마서와 시편은 「강요」속에 종교적 작품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건 간에 로마서와 시편은 「강요」속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성경이기도 하다.
라틴어 최종판에서 로마서는 최소한 598번, 시편은 580번 인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칼빈이 시편을 ”영혼의 모든 부분을 해부한 것“으로 표현할 때 우리는 그가 시편에 얼마나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시편을 개혁교회의 찬송가로 삼고 있다. 루이 구마(Louis Goumaz)는 「강요」의 신학을 그의 주석들의 해석과 상호 관련시키는 틀을 제시하면서 칼빈의 회심에 있어서의 성경의 결정적 역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성경은 칼빈의 회심을 위한 도구였다...그 속에서 자신의 종교적 성품을 형성한 양식과 그의 인문주의적이고 법률적 정신에 공감되는 문서를 발견했다.”
2. 신학적으로 재조명해 본 그의 회심-구원의 역사
부처와 파렐의 격려를 얻은 칼빈의 사촌 삐에르 로버트는 1535년 2월 12일에 신약 성경을 불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끝마쳤고 1535년 6월 4일에 노이샤텔에서 그것을 출판했다. 칼빈은 그 책을 위한 두 개의 서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하나는 라틴어로, 하나는 불어로 된 서문이었다. 우리가 그의 회심 체험에 대한 신학적 재조명의 초고라 부르는 것은 불어로 된 서문이다. 1535년 1월경에 칼빈은 바젤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늦게 잡더라도 그 서문은 그 해 초로 연대를 잡아야만 한다. 그때 그는 모든 정력을 「기독교 강요」초판을 저술하거나 완성하는데 쏟고 있었다(그것은 1535년 8월 23일에 완성되어 1536년 3월에 출판되었다).
신약에 대한 서문은 인간의 역사에 대한 바울-어거스틴의 요약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인간의 창조...양심(이방인들)과 율법(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자비...계속적인 배도...구주의 오심...복음의 부르심이 그것이다. 이 서문은 왕들과 관원들과 주교들과 목사들에 대한 호소로 끝을 맺는다. 그들이 복음의 올바른 전파와 교회의 건전성을 지지하라는 호소인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칼빈의 회심에 대한 신학적 재조명으로서 이 짧은 논문의 중심 되는 부분은 우리가 “복음의 요청”이라 이름 붙인 부분이다. 칼빈의 사고 방식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 즉 그를 이끌어 철학자들의 지혜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도록 만든 그 통찰은 인간의 타락이 차지한 결정적 위치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의 지혜를 찬양하고 영혼에 대해 명상하는 철학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타락(강요1, 15, 8)은 연약한 인간의 지혜가 그리스도의 신적인 지혜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칼빈은 다른 곳에서 후자를 그리스도의 철학(Philosophia Christi)이라 불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을 주어 핍박의 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한 추구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약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의 표상이 수렴된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바라는 모든 것, 우리가 표현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모든 성경은 우리를 불러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한다.”
이처럼 복음을 읽음으로 칼빈은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모든 구원의 역사를 묵상하는 대로 나아간다. 그것은 모두 이 간단한 서문, 즉 자신의 회심에 대한 칼빈의 최초의 신학적 반성 속에 포함되어 있다. 칼빈이 왜 인문주의자로서의 경력을 포기했는가 하는데 대한 이유를 자기 자신의 말로 들어보자.
그리하여 진정한 경건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감각을
가지게 된 이후,
나는 갑자기 진보에의
커다란 욕망으로
불붙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내가 다른 공부들을
전적으로 버리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훨씬 느슨한 태도로
그것들에 임하게 되었다.
[칼빈의 경건, p. 8]
칼빈의 회심 전체에 대한 신학적 재조명의 “제2탄”은 1535년 상반기 중에 불과 몇 주 혹은 몇 달 간격으로 제1탄을 뒤따라 나왔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칼빈 신앙의 핵심”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1536년 판 「강요」 제1장의 처음 아홉 페이지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신약에 대한 서문」과 동일한 기반 위에 서 있지만 그 강조점에 있어 보다 덜 성경적인 첫 번째 문서보다 훨씬 더 신학적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두 종류의 지식들”로 시작되어 율법-성문이든 불문이든-으로 옮겨갔다고 “다른 길”, 즉, 그리스도로 결론을 맺는다.
칼빈의 회심을 요약함에 있어 그 후의 모든 칼빈주의를 위해 중요한 구절이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살펴보거나
혹은 내 눈을 당신에게로
향할 적마다...
인간 정신의 이 두 가지 움직임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대조적인 지식, 오직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연결할 수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타락한 죄인 사이의 간격을 일깨워 준다. 칼빈은 자신의 회심을 통해 그 사실을 깊이 깨닫고 율법에 관한 자신의 비평을 담은 장의 처음 몇 페이지에서 그것을 집중된 형태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후에 출간된 「강요」의 개정판들은 이러한 사상들이 중보될 강요의 전체에 확산되어 일종의 중심 원리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 오직 여기에 칼빈의 종교적 체험에 대한 일관성 있는 신학적 요약 속에 그것들이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자비로우시며, 진실하시며, 능하시며, 살아 계시는 분이다. 모든 것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분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그는 인자하시며 온유하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의 조상인 아담은 모든 덕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가 타락하여 죄에 빠짐으로 그 형상은 지워지고 말소되었다. 그는 모든 덕을 박탈당하고 대신에 그것에 상응하는 악들을 가지게 되었다. 아담에게서 태어난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어 그의 뜻을 행하기에 무력하며 영원한 죽음을 받기에 합당하다.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자비로우신 아버지는 율법을 가져다주신다. 기록되지 않은 율법을 양심에 주시고 다음에는 기록된 율법을 주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우리가 그분에게 빚지고 있는 것에 대한 증인을 주셨다. 그것은 양심인데 마음에 새겨진 율법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자기 사랑에 의해 눈이 가리워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의에 이르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기록된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는 고로 우리는 여전히 영원한 죽음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이와 같은 두 번째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한 자비로 또 다른 길을 제시하신다. 절망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영역에서 도움을 찾아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 힘으로 얻을 수 없는 선물들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선물을 받기 위해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아야만 한다. 그분은 통해서만 아버지 안에 있는 영원한 축복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약은 칼빈의 신선한 상경 연구의 결과일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통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바쳐진 깊은 신앙의 고백이 있으며 또한 여기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주석과 설교와 종교개혁을 위한 k방면의 활동들의 원천이 있는 것이다.
Ⅱ. 기독교 강요 초판(1536년)
A. 교리문답서인가 혹은 변증서인가?
1. 원래의 의도는 교리문답서


칼빈이 회심한 후 새로운 성경연구에 착수했을 때 즉시 그가 직면한 임무는 참된 신앙을 갈구하는 자들을 지도해야 하는 것이었다. 참 교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별반 경험 없는 자신에게로 모여들자, 그는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서도 나를 조용히 있도록 두지 않으신다”고 결론지었다.
프랑스에서 행한 그의 초기 설교에 대해서는 자료의 불충분 때문에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없으나, 그의 마음이 훌륭한 교리 문답서를 작성해야 할 필요성에 쏠려있었음은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1535년과 1536년 초기 사이 바젤에서의 짧은 체류 기간에 자신의 신학적 연구의 첫 결심을 저술했다. 책의 긴 부제가 그 내력을 나타내 준다: “기독교 강요, 구원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제반 사항과 경건의 개요를 거의 망라하였다. 경건에 열심히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저서이다... .”
칼빈이 고안한 교리문답서 중 어느 만큼을 문서화했는가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일치된 견해가 없으며, 또 이 문제는 여기서의 당면문제가 아니다.
프랑스의 개혁주의적 전통에서 교리문답서 저술가는 칼빈 이전에는 드물었다. 루터의 책을 번역한 것 이외에 불어로 된 것으로는 기욤 파렐(Guill aunme Farel)과 프란시스 랑베르(Francis Lambert)의 개요서들이 있었다. 파렐의 저서는 바젤의 개혁주의자 외코람파디우스(Oecolampadius)의 권유로 1525년 바젤에서 초판된 후, 재판을 거듭했다. 두 번째인 랑베르의 책은 1529년에 저술되었다.
그러나 파렐의 저서가 불어판 개혁신앙 문답서의 효시이며, 칼빈의 신학적 입장이나 관심을 도일하게 내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저작은 문체나 구성이나 내용 어느 것에서도 파렐의 것과 유사한 점이 없다. 칼빈은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서한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저술 의도를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오로지 본인의 목적은 종교적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확실한 기본원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간단하고 초보적인 교리의 형태로...
이것이 칼빈이 교리문답서를 만들려던 의도였다. 그가 박해받는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위하여 외국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려고 당시 공용어인 라틴어로 썼기는 했으나, 분명히 동포들에게 적합하도록 불어판을 속간할 작정이었다. 현존하는 기독교강요의 첫 불어판은 1541년에 출판되었다. 이것은 1539년의 라틴어 제2판을 번역한 것으로서, 제네바에서의 목회 경험을 살려서 저술한 질의. 응답식의 교리문답서였다.
2. 기독교강요가 변중서로 되다.
그러나 간단한 교리문답서를 만들려던 계획은 뜻대로 될 수 없었다. 이 의도를 변경시킨 학살사건의 중심에는 매우 기독교적인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기에는 기존의 교회 내에서 정화운동을 하려는 온건한 노력에서부터 사회의 전 구조를 공격하는 급진적인 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운동이 분출되었다. 그러나 온건과 과격을 엄밀히 분류하기란 사실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 1세는 당시 프랑스에서 발홍 하고 있었던 모든 혁신적인 경향이 국가와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적인 것이라고 단정하는 소르본으 대학 측의 견해에 동의했다. 이간을 숙청함으로써 자국 내에 거주하는 독일인 개신교도들에 대한 처리문제로 외교상의 난처함에 봉착하더라도, 정책적으로 모든 문제를 국가의 안전과 연관된 문제로 상정하고, 프랑스의 복음주의자들과 외국의 복음주의자들을 격리시키고자 했다.
이런 방안의 지지자들은 프랑스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을 재세례파로 몰아 부치거나, 무식한 오합지졸로 보았다. 또는 그들의 운동은 국가의 내적 질서에 대항하는 무정부적 행동과 반란으로 정죄 했는데, 이 관점은 프란시스 1세가 독일 개신교도 군주에게 보낸 각서에 잘 나타나 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독일 개신교도 군주에게 보낸 각서에 잘 나타나 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독일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재세례파와 똑같아서 선동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이 각서는 독일인들의 염려나 불안을 진정시키기보다는, 프랑스의 온전한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급진적 개혁가들로부터 신학적. 정치적으로 자진 이탈하여 여타의 동료들과 구분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면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은 더 급진적인 복음주의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해 칼빈은 두 가지 형태로 응답하였다. 먼저 그는 1534-5년에 써서 1542년에 출간한 <사이코파키니아, Psychopannychia>에서 가장 위험스런 국면의 신학적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 다음에 더욱 포괄적인 저술 작업을 하여 1536년에 기독교강요를 펴냈다. 이 두 저서를 차례로 살펴보자.
칼빈은 자신의 첫 신학적 논문인 <사이코파니키아>의 주제로서, 죽음으로 인해 야기되는 영혼과 육체의 문제를 택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죽음과 마지막 부활 사이에 영혼은 잠들어 있거나 죽는다고 하는 교리의 신봉자들이 많았다. 따라서 칼빈은 이 잘못된 교리로부터 동포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 프랑스의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은 이 이단적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카톨릭교도들에게 확증시키기 위하여 이 교리를 반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같은 카톨릭교리를 거부하는 것이 압제적인 면죄부제도를 극복하는 열쇠이듯이, 영혼불멸설을 표방하는 것은 영혼사멸설을 주장하는 광신적 경향으로부터 복음주의자들을 구별짓는 필수요건이었다. 그리고 칼빈은 영혼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이 영혼불멸교리의 신학적 전제로 삼았다. 하나님께서는 향존하시듯이, 그 형상인 영혼 역시 잠시라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이코파키니아> 자체는 몇 단계를 거쳐서 저술되었다. 초고는 1534년 오를레앙에서 익명의 친구에게 헌정한다는 서문을 담고 있다. 이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글이 교회의 통일성과 사랑을 교란시킨다는 오해를 받게 될 것임을 내다보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통일이 있으며, 사랑을 유지하는 관건은 신앙을 신성하고 순전하게 보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해에 그는 초고를 복사하여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개혁주의자 볼프강 카피토(Wolfgana Capito)에게 보내어 출판 여부를 문의했다. 1534년 말에 칼빈에게 보낸 답장에서 카피토는, 종교분쟁이 들끓고 있는 때인 만큼 이 논문은 접어두고 건설적인 성경 주석을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다고 제안했다. 칼빈은 <사이코파니키아>에 대한 카피토의 충고를 받아들였다(기독교강요를 완성한 후 1535년 바젤에서 이 논문을 개정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칼빈은 자신과 동포들이 프랑스의 정치 질서를 파괴하고자 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문인 프랑스 왕에게 보내는 헌사에서, 원래는 교리문답서를 작성할 의도였음을 시사한 후, 그는 제2의 목적을 추가하게 된 까닭을 직접적이고도 열정적으로 피력했다. 여기에서 그는 사악한 무리들의 횡포에 직면하여 그들에게 건전한 교리의 본질을 가르쳐 교훈 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시편 주석에서도 더욱 날카로운 어조로 동일한 내용을 서술했다. 그러므로 칼빈으로 하여금 그 유명한 기독교강요를 쓰게 한 동기는 두 가지였다. 즉 신앙의 형제들을 위한 교리문답서의 필요성과 박해를 중단하도록 하기 위해 형제들의 실상을 왕에게 탄원해 알려야 하는 필요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목적 때문에 칼빈은 이중의 신학적 대응자세를 취했다. 제도화된 로마 카톨릭을 거부함과 동시에 극단적 분파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칼빈의 향후 신학의 행로가 결정되었다. 그것은 좌단과 우단 사이의 중도를 견지하는 것으로써, 현명한 절충이 아니라 독자적인 성경연구에 근거한 확신이었다. 이후 그의 신학체계상의 발전은 이 초기의 경향을 확대하고 완성해 가는 것이었다.
B.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헌사
1. 기독교 변증들 가운데 하나
그 초창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와 유대인의 배척 그리고 이단의 위험에 부딪혔을 때, 교부들은 기독교를 위한 변증서들을 저술하여서 신학에 창조적 자극을 주었다. 또한 변증가들은 로마의 국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불복종은 정치적 반동심이나 전복의지가 아니라, 창요적 특색일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여야 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고대 철학의 모조품이라고 하는 비방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오히려 후대에 파생된 이교들의 원형임을 증명했다. 칼빈 역시 초대교회시대의 변증가들 처럼, 변증적 노력으로써 실제로 신앙을 새롭게 종합하였다. 자신이 체계화한 신앙을 신종(新種)이라고 하는 소르본느대학 신학자들의 악평에 대하여 그는 이것이 진정한 사도적 메시지이며, 그들의 신학이야말로 말기적 변종이하고 주장했다.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은 군주정체를 전복하고자 획책한다고 하는 트집에 대해서는 복음주의의 정치적 충절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프란시스Ⅰ세에게 보내는 서한은 저스틴과 터툴리안, 오리겐, 그리고 유세비우스의 변증서들과 나란히 둘 수 있는 것이다.
2. 헌사의 내용
서한의 구성을 살펴보자. 칼빈이 처음에는 단락을 나누지 않았으나, 1559년 판에 따라서 여덟 부분으로 나룰 수 있다.
(1) “본서를 쓰게 된 배경”으로서, 두 가지의 저술 목적을 기술한 후, 왕의 관심을 촉구한다.
(2) 박해받는 복음주의자들을 위하여 탄원한다.
(3) 카톨릭교도들이 개혁신앙을 비난하는 네 가지-새로운 것, 미지의 것, 불확실한 것, 기적에 의해 확증되지 않은 것- 반론에 대해 논박한다.
(5) 교회론에 대한 카톨릭의 오류들을 열거하고, 교회의 본질을 논증한다.
(6)그러면 교회는 어디서 발견되는가? 카톨릭교회가 자기들만이 참 교회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칼빈은 순수한 설교와 합법적 성례의 바울적 표지를 주장한다.
(7) 복음전파로 인해 소란과 변혁이 일어났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답변한다.
(8) 마지막으로 칼빈은 자신의 호소가 실제로 왕에게 전달되거나 왕을 움직일 가망성을 재어 본다.
기독교강요의 맨 끝에서도 세상의 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사람에게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이것이 기독교강요의 “정치적 뼈대”이다. 요컨대, 본서는 서로 대립되는 종교적 두 경향들, 즉 복음주의 신앙과 로마 카톨릭의 교리 및 관례 사이의 긴장, 그리고 복음주의자들과 극단주의자들 사이의 신장 가운데서 형성되었다. 이제 1536년 판에 실린 여섯 장들을 살펴보자.
C. “교리문답식” 장들(1-5장)의 분석
중세 말시의 문답식 문헌의 관례에 따라서 칼빈도 기독교강요를 십계명(1장), 사도신경(2장), 주기도문(3장), 성례(4장)의 순서로 구성하여 설명했다. 여기에 카톨릭의 미사에 대한 논박을 추가하고(4장 끝부분), 소위 다섯 가지 하는 “거짓 성례”를 부정했다(5장). 마지막 장에서는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의 권능, 그리고 정치적 권력에 관한 논문들을 실었다.
1. 1장: 율법에 관하여. 십계명을 해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제 3.4.5.10계명은 적용하거나 실례를 들어서 더 충분히 논의하고, 나머지 계명들은 간략하게 의역하고 있다. 결론부 에서는 율법의 효과와 칭의 문제로 연결시킨다.
2. 2장:믿음에 관하여. 이 장은 후속판들에서는 주로 빠졌는데, 믿음의 본질과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 논문, 사도신경의 해설,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의 관계에 관한 부분으로 짜여졌다. 로마 카톨릭교도들과 재세례파와 반(反)삼위일체론자들에 대한 강한 대비가 장 전체에 걸쳐 있다.
3. 3장:기도에 관하여. 이 장은 마틴 부쳐(Martrn Buccer)의 <복음서 주석, 1530>에 크게 힘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전체의 대조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수다한 인간 중재자 사이의 대조이다. 전반적으로 카톨릭 예배의 허구와 복음주의 예배의 순수성 사이에 있는 일반적인 대조 점들이 다루어졌다.
4. 4장:성례에 관하여. 이 장은 네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세 단락은 1559년 판의 성례장의 순서(4. 14-18)와 대개 일치한다. 먼저 성례를 개괄적으로 다루고, 세례와 성찬 그리고 결론부로서 두 가지 주(主)의 성례의 집행을 짤막하게 논의한다. 성례 전반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쯔빙글리와 카톨릭의 견해 중간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성례를 믿음의 증서에 찍힌 “봉인들”이라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박약한 이해력을 고려하셔서 조정하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세례에 관해서는 재세례파와 도나투스파적인 주장 킻 카톨릭의 견해를 모두 반박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상징이며 표식”이라고 하는 쯔빙글리식의 견해를 암시하고 있다. 한편 성찬에 관한 논의에서는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첫째로 그것은 성찬에 대해 그 때까지 있었던 무수한 논점들을 섭렵하여 나름대로 소화했음을 보여준다. 둘째로는, 미해결의 문제들을 오랫동안 토론해 온 것처럼 곧바로 논쟁에 들어간다. 셋째로, 칼빈은 다양한 분파들을 잘 알고 있으므로, 별도의 더 충분한 신학적 논쟁을 앞질러간다.
성찬에 대한 기존의 두 이견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성례의 존엄성을 지나치게 찬양하면 미신에 빠지기 쉬우며, 반대로 성례의 가치와 유익을 냉랭하고 시시하게 다루면 성례를 경멸하게 된다. 칼빈이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성찬에 대한 논쟁을 야기 시킨 주 원인은 사람들이 잘못된 관점으로 의문을 품은 데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가?”라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것으로 되는가?”라고 의문했어야 했다. 그는 미사숭배를 거부하며, 완전한 속죄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재세례파나 카톨릭식의 고행 또한 거부한다. 그리고 쯔빙글리의 합리적인 축소론(the rationalistic reductionosm)에는 반대하지만, 실제적 현현과는 달리 영화롭게된 몸의 축약이라는 의견에는 찬성한다. 칼빈은 천상과 지상 사이에 있는 무한한 심연을 기이하게 연결한 이 하나님의 능력의 편재를 “마치” 육체적 현현인 것 “처럼” 받아들인다. 성례는 단순히 믿음과는 별개인 표적도 아니며, 성례 자체가 믿음의 역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믿음과 성례는 협력한다. 이러한 논거는 칼빈 당대나 이전의 신학적 주장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의 근저에는 신학과 기독론상의 상이점이 내포되어 있다. 칼빈은 신자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어떤 신학적 견해나 예배의 관례를 거부하는 강한 목회적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올바른 성례의 집행에 관해 논의한다. 성례 신학과 관례상의 정오(正誤)를 갈기는 시금석은 성경의 권위인 것이다.
5. 5장: 다섯 거짓 성례에 관하여. 이 장은 후속판들에서도 거의 전부 수록되었다. 물론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성례론과 의식들을 비판하는 데 주력한다. 시헹 중인 각 “성사”의 전거를 조사한 후, 그것의 실제 내력과 올바른 지침을 가르쳐 준다. 견진례와 종부성사, 혼인성사에 관해서는 간략하게 논의하고, 고해성사와 신품성사는 길게 다룬다. 이 장과 6장의 중간부인 교회의 권능 편에서 칼빈은 중세 교회체계의 토대를 핵심적으로 상세하게 논파한다.
D. 6장: 프란시스Ⅰ세에게 보내는 서한의 결론인가?
1. 개괄적인 고찰
프란시스Ⅰ세에 대한 헌사와 1536년의 기독교강요의 최종 장을 비교해 보면, 이 장이 왕에 대한 탄원의 사실상의 결론임을 알 수 있다. 1-5장은 칼빈의 원래의 의도대로 근본적으로 교리문답서이나, 세 단락으로 구성된 6장은 특별히 왕에 대한 호소와 관련된 것이다. 첫 단락인 ‘기독교인의 자유’에서는, 이 자유가 세속적 영역이 아닌 영적 영역에 속한 것임을 성경의 근거를 들어서 설명한다. 둘째, ‘교회의 권능’부분에서 칼빈은, 인간이 고안한 교회법과 관습은 이 자유를 침해하므로 거부하며, 또 카톨릭의 제도가 세속 권력의 일부분까지 탈취하였다는 사실을 왕에게 논증해 보이고자 한다.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자기 영내를 다스리는 세상 군주라는 두 왕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권세와 관련된 세 번째 부분인 ‘세상정치’에서는,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충성, 그리고 재세례파의 잘못된 견해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전적인 거부를 왕에게 확신시키며, 궁극적인 영적 결정권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6장에서 칼빈은 특히 프란시스 왕에게 복음주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또 소르본느대학 신학자들의 악영향으로부터 왕을 분리시키기 위해 그들의 신학을 반박한다.
2. 세부적인 내용
A. 기독교인의 자유
자유의 문제는 6장의 중심적 주제라고도 할 수 있다. 전장에 걸쳐서 칼빈은 법률조항을 계속 늘려가는 것과 법은 모두 거부하는 것 사이의 중도적 방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불법적인 규제에 묶이지 않음과 동시에 무질서한 방종으로 치닫지도 않는 영적 자유를 변론한다. 기독교인의 자유는 세 가지를 의미한다. 법으로부터의 자유, 법의 강제가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양심의 자유, 그리고 “아무래도 좋은 것들”에 대해 처신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연약한 형제나 이웃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절제하며 사용해야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인습으로부터의 자유를 언급하는 가운데서 영적 통치와 세속적 정치적인 통치를 구분하였고, 이로써 ‘기독교인의 자유’부분은 두 왕국에 대한 논의의 서론 격이 되는 셈이다.
B. 교회의 권능
교회의 규율에 대한 칼빈의 관점은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급진적 재세례파나 무조건 수용하는 카톨릭교도들의 관점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 그는 주로 카톨릭의 주장에 대해 성경적. 역사적 반증들을 제시하면서 반박한다.
C. 세상정치
본서의 마지막 주제인 ‘세상정치’에서는 재세례파를 훨씬 더 현저하게 다룬다. 이 종결부를 보면, 칼빈은 프랑스의 충성스런 복음주의자들의 신앙이 어떤 것이며, 또 군주로서 직무상 처신하는 방법을 프랑스 왕에게 가르치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는 먼저 세상 정치의 필요성을 논의한다. 이미 언급하였던 영혼과 육체에 관한 재세례파의 오류는 정치적 영역의 구별은 모두 동일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칼빈이 참 신앙을 확립하고 보호하는 것이 세속 권위의 역할이라고 했을 때, 이는 모든 통치체제를 거부하는 재세례파와 또 이 역할을 횡령하는 카톨릭을 의식하고 기술한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 자신이나 제네바 시(市)의 문제에 있어서나 그는 정교하게 교회가 정부의 균형을 유지시켰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세상 정치를 다루는 둘째 항은 ‘관원’과 ‘법률’과 ‘백성’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가 관원들을 지칭하여 “신 같은” 지배자들이라고 한 것을 보면 놀라운 일이지만, 한편으로 관원에 대해 고도의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그에게 “통치하는 권위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성스런 소명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소명 가운데서도 가장 영예로운 것이다.” 기독교의 교리와 경건에 이반하여 이 거룩한 일꾼을 대적하는 혁명분자들은 바로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다. 칼빈은 재세례파의 잘못된 성경의 유추 및 적용을 분석하면서, 관원과 법률과 백성의 상호작용을 구별하는 근본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뒷부분을 채운다. 관원의 임무는 공공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임무 수행을 위해 합법적인 사형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올바르게 지도하려면, 과도하게 엄격하지도 않으며 관대함을 과장하지도 않아야 한다. 왕은 분노나 탐욕을 조절해야 하는데, 국고는 “대개가 바로 백성들의 피”이기 때문이다. 세상 정치와 법률 편에는 <세네카 주석 Seneca Commentary>의 내용과 유사한 것이 많다. 이것은 칼빈이 이 주제들에 대한 정통적 견해를 복음주의적 견지에서 재정립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법률 편에서는 먼저 일부의 과장된 견해를 논박한 후, 그 대안으로써 유명한 구분을 제시한다. 도덕법과 의식법, 그리고 재판법의 세 층이다. 도덕법은 자연법과 양심의 법을 천명한 것이며, 의식법은 1장, 5장, 6장 2부에서 이미 다루었기 때문에, 재판법을 주로 설명한다. 공정이 모든 법률의 목표요 한계이다. 최후의 주제는 백성인데, 관원과 법률은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의 지나친 소송욕과 재세례파의 재판 경시의 두 극단적 예를 든 후, 하나님께서 주신 관원과 법정을 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위하여 공정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라고 권면한다. 기독교강요의 말리에서 칼빈은 신민이 군주에게 어떻게 복종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언급한다. 여기서 그는 프란시스Ⅰ세와 자기 동포들에게 동시에 말하고 있다. 관원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므로, 그가 어떠하든지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사악하거나 압제하는 지배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보복하신다. 그러나 결국 칼빈은 프란시스Ⅰ세와 박해받고 있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진정한 왕은 오직 한 분뿐임을 상기시킨다. 지배자에 대한 복종 때문에 하나님께 불복종하게 되는 경우라면, 그 때 “우리는 마땅히 사람에게보다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 책의 마지막 몇 줄은 헌사의 종결부를 배반향시키고 증폭시키고 있다.
헌 사
지극히 위대하시고 지극히 영명하시며 지극히 기독교적인 프랑스의 왕 프란시tm 폐하에게 존 칼빈은 주안에서 평강과 문안을 드립니다.
1. 이 책이 쓰여진 배경
지극히 영광스런 왕이시여, 제가 처음 이 저술에 손을 댔을 때 폐하에게 바쳐질 어떤 것을 쓴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던 일이었습니다. 나의 목적은 단지 어떤 기초적인 사실들을 전달함으로 그것에 의해 종교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특별히 우리 프랑스 사람들을 위하여 이 일에 착수하였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제가 보기에 그리스도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라도 가지고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 책 자체도 그것이 나의 의도였다는 것을 증거하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가르침의 형태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악한 사람들의 격노가 당신의 영토에서 너무나 멀리 파급되었기 때문에 건전한 교리가 발붙일 장소가 없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만일 내가 가르치기에 착수한 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동시에 폐하 앞에 신앙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것으로부터 폐하는 오늘날 칼과 불로써 폐하의 영토를 교란시키는 저 미친 사람들이 불같은 성화로 반대하고 있는 교리의 속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저는 그들이 투옥, 추방, 재산 몰수, 그리고 화형에 처해야 하며 육지와 바다에서 박멸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바로 그 교리의 대부분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주저 없이 고백하는 바입니다.
정말이지 너는 그들이 우리의 명분을 당신에게 가능한 한 혐오스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끔찍한 보고서들로써 당신의 귀와 마음을 가득 채웠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자비하심에 합당하게, 만일 단순히 고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면 말로나 행위로나 무죄한 자가 남아 있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당신은 고려해야만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증소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이 교리 즉 제가 지금 당신에게 말씀드리려 하고 있는 내용이 오래 전부터 모든 계층의 표결에 의하여 결정되었으며 많은 법정의 판결에 의하여 대적들의 맹종과 능력에 의해 격렬한 배척을 받아 왔으며 부분적으로 그들의 허위, 트집, 중상에 의해 날치기로 또한 음흉하게 억압을 받아 왔다는 것을 말할 뿐일 것입니다. 한번 들어보지도 않고 기 교리에 대하여 피비린내 나는 선고를 내리는 것은 순전한 폭력인 것입니다. 부당하게도 그것을 반역과 악행으로 고발하는 것은 사기인 것입니다.
지극히 존귀한 왕이시여, 아무도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불평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중상 모략들이 매일 당신 앞에 고해지고 있는지 당신은 증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이 교리가 모든 질서와 시민의 정부를 전복하고 평화를 깨뜨리고 모든 법률을 폐기하고 모든 신분과 재산을 박탈하려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려는 것 외에 어떤 다른 목적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은 고발의 극히 적은 일부만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끔찍한 소문들이 널리 유포되고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그 교리와 그것을 만든 자들은 수천 번 화형과 십자가형을 당해 마땅하다고 세상은 판단할 것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사악한 비난들이 믿기워지고 있는 때에 그 교리에 대한 일반의 증오심이 일고 있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협력해서 우리와 우리의 교리를 정죄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재판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자기들이 집에서 가져온 편견들을 판결로서 선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신의 고백에 의해서나 혹은 확실한 증언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사람을 아무도 처벌하지 않는다면 자기들의 직무를 완전히 유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슨 죄에 대해서 입니까? 이 정죄된 교리에 대해서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무슨 권리고 그것이 정죄 되었습니까? 이제 그들의 변호의 핵심은 바로 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심지어 속삭일 수 있는 권리조차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2. 박해받는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탄원
이러한 이유로 인해, 무적의 왕이시여, 저는 정당하게 당신에게 이 송사를 충분히 심리해 주시기를 청원하는 바입니다. 이 송사는 지금까지 적법한 절차 없이, 사법적 엄숙함보다는 폭력적인 열기에 의해 취급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서 개인적인 변호를 함으로써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비록 제가 저의 조국을 지극히 사랑하는 인지상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 속에서는 추방되어 있는 것이 크게 유감스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모든 신자들의 공통된 주장, 즉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을 기꺼이 붙들고자 합니다. 이 주장은 현재 폐하의 왕국에서 완전히 짓밟히고 철저하게 버림받은 상태에 놓여 있는데 그것은 폐하의 승인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바리새인들의 폭정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주장이 수난을 받고 있다는 그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경건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크게 득세를 해서 그리스도의 진리가 추방되고 흩어져서 비록 소멸까지는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가려져 있고 묻혀져 있으며 빛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련한 교회는 잔인한 살육에 의해 피폐되거나 혹은 추방을 당해 유배 중에 있거나 혹은 협박과 공갈에 압도당하여 감히 입도 열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경건한 자들은 광분해서 이미 기울어 가고 있는 벽을 강타하고 그들이 악착같이 추구하고 있는 박멸 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무도 그러한 광분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키고자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무지한 자들의 오류와 경솔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온건한 사람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오류와 경솔을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진리라 부르고 있으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지혜의 신비를 부여해 주시지 못할 만큼 야비한 자들은 아니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현명하신 왕이시여, 그처럼 정당한 변론에 대해 당신의 귀나 마음을 닫아버리지 않는 것이 당신을 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아주 중요한 문제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땅위에서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진리가 어떻게 그 영예로운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왕국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에서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걸려 있을 때에는 말입니다. 실로 이 문제는 당신이 듣고 인지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당신의 왕관의 영광에 어울리는 일입니다. 정말이지 이러한 생각이 진정한 왕을 만드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왕국을 통치하는데 있어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식하는 것 말입니다(롬13:3).
만일 자기의 왕국을 통치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왕이 있다면 그는 왕의 법도를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산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왕국이 하나님의 홀, 즉 그의 거룩한 말씀에 의해 통치되고 있지 않는데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번영하기를 바라는 자는 스스로 속고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이 없으면 백성이 흩어진다”(잠29:18, 한글 성경에는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로 번역되어 있음: 역자주)고 선포하는 하늘의 음성은 거짓말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비천함에 대한 경멸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러한 노력을 단념하도록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천하고 낮은 미미한 존재들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물론 비참한 죄인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도 우리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고전4:13 참조)이거나 혹은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천한 것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는 그의 자비 외에 자랑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으며(고후10:17-18참조) 그것에 의해 우리는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공로는 전혀 없이 말입니다(딛3:5참조).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라고는 우리의 연약함뿐인데(고후11:30; 12:5, 9참조) 그들에세 있어서는 단지 고개짓으로 인정하는 것 조차도 커다란 불명예기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리는 기가 꺾임이 없이 세상의 모든 영광과 능력들 위에 우뚝 솟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왕으로 삼으셔서 “바다에서 바다까지 그리고 강들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시 72:8; 71:7, 벌게이트역) 그리하여 그는 그 철과 놋 같은 힘으로, 그 금은 같은 광채로 전세계를 쳐서 그 입의 막대기로 마치 토기를 부스러뜨리듯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그의 통치의 장엄함에 관해 예언했던 것처럼 말입니다(단2:32-35; 사11:4; 시2:9종합). 사실 우리의 대적들은 우리가 거짓되이 하나님의 말씀을 핑계삼아 사악하게도 그것을 더럽힌다고 소리칩니다. 폐하께서 소유하신 분별력을 발휘해서 우리의 고백을 읽어보시면 그것이 얼마나 악의에 찬 무고이며 파렴치한 말들인지를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당신의 열심과 주위를 끌기 위해, 혹은 최소한 당신께서 우리의 고백을 읽을 수 있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 어떤 것을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바울이 모든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롬12:6), 그는 성경의 모든 해석을 시험하는 아주 명백한 규칙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제 만일 우리의 해석이 이 믿음의 규칙에 의해 평가된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옷을 입기 위해 우리는 미덕이 전혀 없는 벌거숭이이며, 하나님에 의해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는 죄의 종들이며, 그분에 의해 비췸을 얻기 위해 눈먼 자이며 그분에 희애 교정을 받기 위해 절름발이이며, 그분에 의해 지탱되기 위해 약한 자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모든 영광 돌릴 기회를 제거하여 그분 홀로 영광스럽게 부각되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영화로워하는 것보다 더 잘 부합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고전1:31; 고후10:17 참조)? 우리가 이러한 것들이나 이와 유사한 것들을 말하면 우리의 대적들은 참견을 하면서 불평하기를 이런 식으로 우리가 자연의 맹목적인 빛과 가상의 준비들과 자유 의지와 영원한 구원을 받을 만한 공로가 있는 행위들, 심지어 그들의 적선을 통한 구원까지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찬송과 영광, 덕, 의, 그리고 지혜가 하나님에게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생수의 샘물을 너무 많이 마셨다고 책망 들었다는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요4:14). 오히려 “자신들을 위하여 웅덩이를 팠는데 물을 저장할 수 없는 터정 웅덩이를 판” 사람들이 심하게 책망 받았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입니다(렘2:13).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형제요 구속자로 인식되는 곳에서 하나님이 구속해 주시는 아버지가 되심을 확신하는 것보다도 더 믿음에 가깝고 좋은 것이 아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롬8:32) 그분으로부터 모든 행복하고 성공적인 것을 자신 있게 기대하는 것 보다 더 좋고 믿음에 가까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그들은 우리를 공격하면서 소리치기를 그러한 확실한 신뢰는 교만과 자만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자랑해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안에서 자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외에는 허세를 극복할 방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고후 10:17; 고전1:31; 렘9:23-24참조).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왕이시여, 우리가 주장을 전체적으로 간단히 검토해 보시고 만일 “우리가 수고하고 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두기”(딤전4:10) 때문이며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요17:3)임을 믿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분명히 발견하실 수 없거든 우리를 사악한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사악한 자들로 여기십시오. 이러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곤장을 맞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조롱을 당하면서 끌려 다니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추방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도망을 다녀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난에 찌들리고 무서운 저주를 받고 중상모략을 받기도 하고, 가장 치욕스러운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대적들을 보십시오(나는 사지들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시와 의도에 따라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적대적인 행위를 일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잠시동안 어떠한 열심히 그들은 움직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종교를 등한히 하고 멸시하도록 즉각 허용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에서 전수되어 내려오는 것이며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인정받는 자리를 차지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무슨 신념을 견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떤 신념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그가(그들이 일컫는 바) 맹목적 신앙으로 자기의 마음을 교회의 판단에 맡기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명백한 불경에 의해 더렵혀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도 그들에게는 별로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교황청의 수위성과 거룩한 어머니 되시는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여 손가락을 드는 자만 없다면 말입니다. 왜 그들은 미사, 연옥, 성지순례 따위의 시시한 문제들을 위해서 그토록 모질고 독하게 투쟁하는 것입니까? 아주 분명한 신앙이 없이는 그러한 것들 속에 참된 경건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말입니다. 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저희 신은 배요”(빌3:19) 저희 부엌이 저희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제거된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심지어 사람도 아니라고 믿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는 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겨우 부스러기만을 씹고 있다 할지라고 역시 그들 모두는 한 솥의 밥을 먹고 있으며 그 솥은 그러한 연료가 없으면 단지 식을 뿐 아니라 점점 얼어붙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자기 배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진 자가 자기 신앙을 위한 가장 열성적인 옹호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모든 사람이 한가지 목표를 향해 진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지배권을 보존하거나 혹은 자기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진지한 열심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3.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한 논박-새로운 것, 불확실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과 기적들의 가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의 교리를 공격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비난하며 거기에 온갖 이름을 붙여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그것이 증오와 의심의 대상이 되게 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새롭고” 또 “최근에 생성된” 것으로 부릅니다. 그들은 그것을 “의심스럽고 불확실한”것으로 비난합니다. 그들은 그것이 무슨 기적에 의해 뒷받침 되는가를 묻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그토록 많은 거룩한 교구들의 동의와 아주 오래된 전통에 대항하여 전통을 부정해 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고 묻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교회에 대항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종파 분리의 죄를 범하는 것임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도무지 그런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던 수세기 동안 교회가 죽어 있었던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인정하라고 우리를 몰아 칩니다. 드디어 그들은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것은 열매에 의해서 정체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 종파들과 아주 많은 불온한 소란들과 터다란 무질서를 낳았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실로 그들이 속기 잘하고 무지한 대중들 앞에서 버림받은 주장을 매도하기란 극히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도 말할 기회를 얻에 된다면 방종하고도 낯두껍게 거리낌없이 쏟아 붓는 이 비난들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먼저, 그것을 “새로운”것이라 부름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 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새로운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새롭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도 가의 복음도 다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는 바울의 설교가 고대의 것임을 나는 사람은 우리에게서 아무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알려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던 것은 인간의 불경건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우리가 그것을 되찾았으므로 그것이 오랜 약사를 가진 것이라는 주장이 마땅히 인정되어야 합니다. 동일한 무지가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으로 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께서 자기의 선지자를 통해 탄식하신 것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그것의 불확실성을 조롱할지라도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의 파로써, 또한 그들 자신의 생명의 대가로 그들의 교리를 인쳐야 한다면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적을 요구함으로써 부정직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복음을 날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확정해 주고 있는 진리의 복음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비교할 때 그들은 이상한 능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의 신앙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의 신앙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온했을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기적을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그것들이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호는 기적에 의해서든지 혹은 사물들의 자연적 질서에 의해서든지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는 안성마춤의 것입니다(살후2:9-10참조). 마술사와 요술쟁이들은 항상 기적으로 유명했습니다. 우상숭배도 놀라운 기적들 때문에 더욱 조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들에게 마술사들이나 요술쟁이들의 미신을 재가해 주지는 않습니다. 옛날의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파성수조 단순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즉, 그들도 기적에는 능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어거스틴이 그때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 대적들에게 대답합니다. 거짓 표적과 기사를 가진 거짓 선지자들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러 올 것임을 주께서 예언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기적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마24:24). 그리고 바울은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사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살후2:9).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이 기적들은 우상이나 마술사나 혹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 사탄의 궤계임을 모르기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고후11:14). 옛날 이집트인들은 예레미야를 경배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때 이집트에 장사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그에게 제사도 드리고 신적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를 오용한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처럼 그의 무덤을 숭배함으로써 뱀에게 물려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 “유혹을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살후2:11)하는 것이 지금까지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아주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대적들이 자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리키는 “기적들”은 순전한 사탄의 미혹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로부터 허망한 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신13:2이하).
4. 교부들이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반대한다는 부당한 주장들
게다가 그들은 부당하게도 고대의 교부들이 우리를 반대한다고 주장합니다(나는 보다 나았던 교회시대의 고대 저술가들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그들 자신의 불경건에 대한 지지자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일 교부적 권위에 의해 승부가 결정된다면 승리는 우리편에 있습니다. 이 교부들은 현명하고 우수한 글들을 많이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경우에는 그들에게도 일어났었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경건하다고 하는 그들의 후손들이 지혜와 판단력과 정신력을 총동원하여 교부들의 결함과 오류들만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부들이 썼던 훌륭한 글들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설명하거나 혹은 왜곡시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황금 가운데에서 쓰레기를 모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를 교부들의 대적이요 교부들을 멸시하는 자라고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부들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만일 그것이 우리의 현재 목적이라면, 나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있는 대부분일 교부들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만물이 우리의 것이며(고전3:21-22) 우리를 섬겨야 하며, 우리를 주관할 수 없으며(눅22:24-25) 우리는 모든 일에 예외 없이 순종해야 하는(골3:20참조) 그리스도 한 분에게 속해 있다(고정3:23)는 것을 항상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교부들의 저술에 정통해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을 준수하지 않는 자는 종교에 있어 어떤 확실한 것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거룩한 사람들도 많은 것을 몰랐으며, 종종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서로 의견이 대립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우리 조상들에 의해 설정된 경계를 범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하는 것은 공연히 한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합니다(잠22:28). 그러나 동일한 규칙이 전답의 경계와 신앙의 순종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시45:10)란 말로 기준을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풍유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왜 옮기면 불법인 지 계표를 설정한 “조상들”로서(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사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까(잠22:28)? 제롬은 이 구절들을 이렇게 해석했으며 그들은 그의 말들을 그들의 교회법전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대적들이 그들의 이해력에 따라 조상들이 설정한 한계를 보전하고 싶어한다면 왜 그들은 그것들을 그처럼 멋대로 범하는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마시지도 막지도 아니하시며 따라서 쟁반도 컵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교부는 신성한 의식에는 금이 필요 없으며 금으로 산 것이 아닌 것들은 금으로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그들이 의식을 행할 때 금이나 은이나, 상아나 대리석이나 귀한 돌이나 비단을 즐겨 씀으로써 이 한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모든 것을 사치스럽게 장식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기 먹는 것을 삼가는 날에 자기는 자유롭게 고기를 맛본 어떤 사람을 저주했을 때 그들은 경계를 범한 것입니다. 한 교부는 자기 손으로 일하지 않는 수도승은 살인 청부업자 같은 자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한 교부는 수도승들이 비록 명상과 기도와 공부에 열심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수도승들의 게으른 창자들이 매춘 굴 즉 수도원에 두고 다른 사람들의 물질을 포식하게 했을 때 그들은 또 경계를 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에서 새긴 형상을 보는 것은 몸서리칠 끔찍한 일이라고 말한 것은 한 교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교회 안에 형상이 없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을 때 그것은 그러한 한계 안에 머무르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일이었습니다. 또 어떤 교부는 말하기를 장례식에서 죽은 자에 대해 인간적 도리를 다한 후에는 그들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계속적인 염려를 부추김으로써 이 한계들을 범하고 있습니다.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은 말하기를 진짜 몸이 성찬식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몸의 신비가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말씀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것을 진짜의 실제로 간주할 때 그들은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은, 어떤 종류의 성찬에는 참석하고 다른 종류의 성찬에는 불참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찬으로부터 완전히 제외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교부는 강력히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고백함에 있어 자기들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강요를 받더라고 주의 보혈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앞의 교부가 출교의 벌을 내리고 뒤의 교부가 타당한 이유로 책망한 바로 그것을 불가침의 법률로 권장했을 때 그들은 이 지계표를 옮겨 버린 것입니다. 어떤 애매한 문제를 판단한 때 분명하고도 명백한 성경의 증거 없이 이편이나 저편을 드는 것은 경거망동이라고 단정한 분도 교부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없이 수많은 제도들, 교회법들, 그리고 교리적 결정들을 제정했을 때 그들은 이 한계를 망각한 것입니다. 다른 이단들 가운데서 모타누스가 최초로 금식법을 강요했다고 해서 몬타누스를 꾸짖은 것도 교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주 엄격한 법률로 금식을 명령함으로 그러한 한계를 훨씬 지나쳤던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고서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 순결이라고 선언한 것도 교부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다른 교부들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제들에게 독신을 심하게 강요함으로써 이 한계를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성경이 “그를 들으라”(마17:5)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만 귀를 기울여야 하며 우리 앞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거나 행한 것에는 신경 쓸 필요 없이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에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 것도 교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 위에 그리스도 외에 어떤 주인들을 세움으로써 자기 자신들이 이 경예안에 머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도들은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궤변론자들의 궤사에 의해 더럽혀지고 변론자들의 언쟁에 말려드는 것을 혐오했습니다. 궤변론자들의 변론보다 더 악하고 끝없는 논쟁으로써 성경의 단순성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외에 평생을 아무 하는 일없이 보내는 그들은 이 경계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교부들이 다시 살아나서 이러한 자들이 사변적 신학이라 부르는 그러한 논쟁을 듣는다면 그들은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들이 얼마나 제멋대로 교부들의 멍에를 거부해 버렸는지를 일일이 열거하려 한다면 내 이야기는 끝이 없어질 것입니다. 비록 그들은 자신들이 교부들에게 잘 순종하는 자녀들로 보이기 바라지만 말입니다. 정말이지 몇 달 몇 년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너무나 비겁하고도 썩어빠진 뻔뻔함으로 감히 우리를 책망하기를 우리가 옛날의 경계를 침범해 나아갔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진리에 반대되는 “관습”에의 호소
비록 그들은 “관습”에 호소하지만 그것도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관습에 굴복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를 아주 부당하게 취급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실상 사람들의 판단이 정확하기만 하다면 관습은 선한 사람들에게 찾아져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종종 그 반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일이 제대로 퍼리되어서 보다 나은 것이 다수를 기쁘게 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적인 약이 종종 공적 오류 혹은 악에 대한 일반적 동의를 야기했는데 그것을 이제 이 선한 사람들이 법률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구에 범람한 것이 어느 한 악의 바다가 아니라 많은 위험한 역병들이며 모든 것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간사에 대해 완전히 절망하는지 혹은 이 거대한 악들과 맞붙어 싸우든지 혹은 차라리 그것들을 강력하게 진업해버리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치유책은 우리가 그러한 악에 오랫동안 익숙해 왔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거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공적 실수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그의 영원한 진리만이 청종되고 준수되어야 합니다. 그 진리는 세월이 많이 지나갔다고 해서, 혹은 어떤 관습이 오래 계속되었다 해서, 혹은 인간들의 음모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사야는 옛날에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이 백성이 음모라 부르는 모든 것을 음모라 부르지” 말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백성들의 음모에 가담하지 말며 그것에 동의해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거룩하다 하고 그로 그들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로 삼으라”(사8:12-13)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대적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예들을 제시하게 버려 두십시오. 만일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거룩하게 한다면 우리는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많은 세대가 동일한 불경건에 동의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심지어 삼 사대까지 보복하실 만큼 강하십니다(민14L18; 출20:4 참조). 비록 전 세계가 동일한 사악함으로 음모를 꾸민다 할지라도 그분은 우리에게 대중과 함께 범죄하는 자들의 최후가 어떠한지를 경험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는 홍수에 의해 모든 인류를 멸망시키셨으나 노아만은 그의 가족과 함께 살려 주셨을 때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믿음에 의해, 즉 한사람의 믿음이 온 세상을 정죄했던 것입니다(창 7:1; 히11:7). 요약하면, 악한 관습이란 것은 일종의 전염병 외에 아무 것도 아닌데 사람이 그 병에 걸리면 비록 대중과 함께 멸망한다 할지라도 멸망하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6. 교회의 본질에 관한 오류들
저들은 양도 논법에 의해 교회가 잠시동안 생명을 잃었다든가 혹은 우리가 지금 교회와 갈등하고 있다든가 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억지로 인정하게 할만큼 그토록 심하게 우리를 압박하지는 못합니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교회는 살아 왔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우편에서 통치하시는 한 살아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의 손에 의해 지탱되며 그의 보호로 q장하고 그의 능력으로 강화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번 약속한 것을 틀림없이 지키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세상 끝 날까지 자기 백성과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마28:20). 우리가 지금 이 교회에 대항해서 논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믿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한 목소리로 한 분 하나님과 그리스도 주를 경배하고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분이 항상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 의해 찬양을 받아 오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육안으로 교회를 보지 않으면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결코 한정시킬 수 없는 한계 내에 교회를 두려고 하는 점에서 진리로부터 멀리 이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논쟁은 다음과 같은 점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형태는 항상 드러나 보이고 관찰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둘째, 그들은 이 형태를 로마 교회와 그 계급제도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대로, 교회가 어떤 가견의 외형 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외형은 그들이 바보스럽게 흠모하는 저 외적 장엄함 속에 담길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주 다른 표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는 것과 성례를 올바르게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손가락으로 교회를 꼬집어 지적할 수 없으면 격분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 가운데서 교회가 너무나 자주 손상을 입어 그 외형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자기 혼자 남았다고 불평했을 때 우리는 교회가 어떤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왕상19:10, 14)?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는 형체없이 감추어져 있었습니까? 그 후로도 얼마나 자주 교회는 전쟁과 폭동과 이단의 압제 밑에서 전혀 빛을 발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습니까? 만일 그들이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들은 어떤 교회가 존재했다고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야는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선지자 칠천명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신자들이 그때 어떤 가견적 형태를 요구했다면 그들은 당장 낙심하지 말았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누가 그의 것인지 아시기” 때문에(딤후2:19) 때때로 자기 교회의 외적 표시를 인간의 시야에서 제거해버리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맡겨둡시다. 그것은 지상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임을 필자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만일 인간의 불경건함이 그러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배반하려고 애를 씁니까? 그러한 식으로 옛적에 주께서는 인간의 배은망덕함을 처벌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의 진리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그분의 빛을 소멸시켜 버렸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마비된 감각들이 어리석은 거짓말에 의해 속아넘어가고 깊은 어두움 속에 내던져지도록 허용함으로써 진정한 교회의 형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데 그는 비록 오류와 흑암의 와중에 흩어지고 감추어지기는 했지만 자기 자녀들을 보존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벨론의 혼란 중에서와 이글거리는 용광로의 불꽃 속에서 그들을 보존하는 방법을 아셨기 대문입니다(단3장). 이제 나는 어떤 종류의 헛된 자랑에 의해 교회의 형태를 판단하려는 그들의 소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나의 논의를 끝없이 계속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것을 장황하게 설명하느니보다 간단히 묘사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사도적 지위를 가진 로마 교황과 나머지 감독들이 교회를 대표하며 교회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고로 그들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교회의 목자들이며 주님에 의해 성별 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대답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비록 지명된 제사장들이었으나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오류를 범했습니다(출 32:4).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아합을 속인 사백명의 선지자들은(왕상22:12) 왜 교회를 대표하지 못했습니까? 그리고 교회는 단 한사람의 멸시할만한 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할 한 사람, 미가의 편에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렘18:18)라고 자랑하면서 예레미야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선지자들이 교회의 이름과 형태를 지니지 않았습니까? 모든 선지자 반열에 대항하여 예레미야는 홀로 주님의 파송을 받아 “율법이 제사장으로부터, 모략이 지혜로운 자로부터 말씀이 선지자로부터 끊어지게 될 것”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렘18:18; 4:9참조). 그리스도의 처형에 관해 모의하기 위해 모였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공회에 그러한 허세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요11:47)? 이제 그들로 하여금 가서 이러한 외적 가면에 매달리게 버려두십시오. 즉 그리스도와 상아계신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들을 종파 분리주의자로 만들고 반대로 사탄의 종들을 성령의 도구로 만드는 가면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마음으로부터 말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선한 믿음 안에서 나에게 대답하게 해 보십시오. 바젤 공의회의 결정에 의해 유게니우스(Eugenius)가 교황직에서 물러나고 아마데우스(Amadeus)가 대신 그 자리에 않은 후 교회는 어떤 지역에 혹은 어떤 사람들 가운데 존재하였다고 그들은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그 공의회가 외견상으로는 합법적이었으며 한 명의 교황이 아니라 두 명의 교황에 의해 소집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게니우스는 그와 함께 공의회의 해체를 모의했던 모든 추기경들과 감독들과 함께 교회분열의 죄, 반역 죄, 그리고 완고의 죄로 정죄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후들의 호의에 후속적인 지원을 받아 그는 자기의 교황직을 고스란히 회복했습니다. 거룩한 총회의 권위에 의해 엄숙히 행해졌던 아마데우스의 선출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마데우스는, 마치 짖는 개가 한 점의 고기로 달램을 받는 갓처럼 추기경의 감투를 쓰는 것으로 달램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반역적이고 완고한 이단들로부터 미래의 모든 교황들, 추기경들, 주교들, 수도원장들, 그리고 사제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발뺌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편에 교회의 이름을 부여할 것입니까? 외적 장엄함을 완벽하게 갖추었고 두 개의 교서에 의해 엄숙하게 소집되었고 로마 교황청의 주재 대사에 의해 성별 되었고 어느 모로 보다 질서정연했고 마지막까지 동일한 권위를 보유하고 있는 그 공의회가 총회였음을 부인할 것입니까? 그들은 유게니우스와 그의 모든 동료들에 의하여 성별 되었는데 그들이 분파주의자들이었음을 인정할 것입니까? 그런고로 그들로 하여금 교회의 형태를 다른 말로 정의하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짐짓 그리고 의도적으로 이단에 의해 안수 받은 저들을 분파주의자들이라고 규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사실이 전에 한번도 밝혀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비록 교회에 대한 치명적인 재앙이었지만 “교회”라는 미명하에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들을 세상에 오만하게 선전해 온 그들은 교회가 외적 허식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풍부한 증거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도덕이나 비극적 비행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비록 그들의 모든 삶이 그러한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말입니다. 저들 스스로 말은 듣되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할 바리새인으로 자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23:3). 만일 폐하께서 잠시만 틈을 내어 우리의 글들을 읽어보신다면 저들이 교회라고 주장하는 그것, 바로 그 교리 자체야말로 영혼을 죽이는 도살장이요 교회의 선동자요 파멸자며 파괴자임을 틀림없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7. 개혁 교리 때문에 가게 되었다는 소란들
끝으로 우리 교리의 전파가 수많은 소요와 소란과 다툼들을 불러 일으켰으며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가져다준 해로운 결과들을 열거할 깨 그들은 충분히 정직하게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악들이 부당하게도 우리의 교리 탓으로 도려지고 있으나 사실은 사탄의 악의 탓으로 간주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여기 사실상, 하나님 말씀의 어떤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면 사탄도 반드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 교리들과 구별하는 가장 확실하고 믿을 만한 표지입니다. 거짓 교리는 쉽사리 그 모습을 드러내며 모든 사람들이 귀 기울여 받아들이고 세상이 박수갈채와 함께 청종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깊은 흑암 속에 잠겨 있던 수세기 동안 인간들은 이 세상 주관자의 농담거리와 농락거리에 빈둥거리면서 깊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평온하고 고요하게 자기 왕국을 차지한 채 노닥거리는 것 외에 달리 무슨 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위로부터 비치는 빛이 어느 정도 그의 흑암을 쫓아내었을 때, “더 강한자”가 그의 왕국을 공격하여 괴롭혔을때(눅11:22) 그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 무기를 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함으로써 동터오는 진리를 폭력으로 눌러 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그는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재세례파들과 괴상한 악한들을 통해서 불일치와 교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진리를 희석화 시키고 마침내는 말살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그는 두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줄기차게 포위하게 있습니다. 인간의 폭력적 수단을 통해서는 참된 씨를 뿌리 뽑아 버리고 자기의 가시덤불로써(할 수 있는대로) 그것을 질식시켜 버림으로써 그것이 자라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지도자되신 주님께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오래 전부터 사탄의 간계들을 우리 앞에 펼쳐 놓으심으로써 사탄이 우리를 부지중에 사로잡지 못하게 하셨으며 강력한 방어물들로 우리를 무장시키셔서 사탄의 계교를 물리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게다가 사악하고 반역적인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해서 일으키는 폭동이나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분파들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얼마나 사악한 일입니까? 사실 그 양자는 둘 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자기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왕상18:17).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선동가였습니다(눅23:5; 요19:7). 백성들을 소란케 하는 자라는 고발이 사도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행24:5). 우리를 향해 들꿇고 있는 그 모든 소요들과 소란들로 인해 현재 우리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는 자들이 그 외에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엘리야는 우리가 그러한 고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류를 널리 퍼뜨리거나 소요를 불러일으키는 자는 우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저들이라는 것입니다(왕상18:18). 그러나 저들의 무모함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 한가지 답변으로 족한 것처럼 종종 그러한 중상모략에 의해 동요되고 혼란에 빠지는 자들의 어리석음에 대처하는 데에도 그 한가지 대답으로 족할 것입니다. 이러한 동요에 굴복해서 자기들의 입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사도들도 그 시대에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일들을 경험했다는 것을 알게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바울이 쓴 거룩한 말씀들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을 자초한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자들이 있었습니다(벧후3:16). 그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을 듣고 즉시 결론짓기를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자”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멸시했던 자들이었습니다(롬6:1). 신자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는 당장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짓자”고 지껄였던 것입니다(롬6:15). 바울이 악의 사주자라고 비난했던 자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거짓 사도들이 몰래 들어와서 바울이 설립한 교회들을 파괴하려 했습니다(고전1:10; 고후11:3; 갈1:6).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빌1:15), “순전치 못하게”, 심지어 악의를 가지고, “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했던 것입니다(빌1:17). 어떤 곳에서는 복음이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빌2:21), 어떤 이들은 “개가 토하였던 곳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처럼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었습니다(벧후2:22).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자유를 육신의 방종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벧후2:18-19). 많은 형제들이 몰래 기어 들어와서 경건한 자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고후11:3-이하). 바로 이러한 형제들 가운데에서 여러 가지 논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행6,11,15 장). 여기서 사도들은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잠시동안 복음을 위장하거나 혹은 제쳐두거나 떠나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이 그토록 많은 논란거리와 위험의 원천 그리고 중상모략의 원인이 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환난 속에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롬9:33; 벧전2:8참조. 사8:14)이며 “많은 사람이 폐하고 흉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으셨다”(눅2:34)는 말씀을 생각하여 도움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으로 무장하고서 그들은 모든 소요와 모욕의 위험을 헤치고 담대히 전진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한 생각으로 힘을 얻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바울도 복음의 이 영원한 성격에 대해 “복음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고후2:15)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2:16)라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8. 왕은 고소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것을 조심하소서: 무죄한 자들은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왕이시여, 저는 당신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대적들이 당신 속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려고 애써 만든 거짓된 고소에 조금도 동요하지 마소서, 즉 이 새 복음에 의해(그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단지 소요와 모든 범죄에 대한 면책을 찾고 있다는 고소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고전14:33)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짓게 하는 자”(갈2:17)가 아니요 “마귀의 일을 멸하려”(요일3:8)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최소한의 혐의도 준 적이 없는 일을 의도했다는 부당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짐작컨대 우리가 나라들을 전복시키려는 모의를 꾸미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도 선동적인 발언을 해 본 적이 없으며 폐하의 치하에 살고 있었던 동안에도 항상 고요하고 단순한 생활을 추구했으며 고국으로부터 피신해 있는 지금도 폐하와 폐하의 왕국의 번영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도덕적 행위들 속에 비난받아 마땅한 일들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그토록 심한 비난은 천부당 만부당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복음의 혜택을 적지 않게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이러한 중상자들에게 순결, 관용, 자비, 절제, 인내, 정절 그리고 모든 다른 덕들의 모범이 되지 못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바든 것을 소원한다는 것만 봐도 너무나 분명합니다(빌1:20 비교). 그리고 비범한 찬양을 받았어야만 할 저 한 가지 사실로 인해 사형의 처벌이 가해진 우리들 중 몇 사람의 무죄한 시민적 결백에 대해 증오 그 자체가 증언을 하도록 강요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핑계로 소요를 일으킨다면-지금까지 당신의 왕국에서 그런 사람이 발견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만일 어떤 자가 자기의 방종한 사악들을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은혜로 미화한다면-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저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만-그들은 법률과 법률의 처벌조항에 의해 자기들의 죄에 상응하는 엄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단지 그 와중에 파렴치한 자들의 사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음이 모독당하지 않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 지극히 고상한 왕이시여, 저는 폐하께서 너무 쉽게 저들의 중상모략에 귀를 기울이시게 되지 않도록 우리를 중상하는 자들의 사악한 계획들을 자세히 개진해 올렸습니다. 너무 지엽적인 것까지 포함되지 않았나 염려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서문이 이미 거의 완전한 하나의 변론서의 분량에 이르러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하려고 했던 것은 변명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송사에 대한 실제 형편에 폐하께서 귀를 기울이시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폐하의 마음은 사실상 우리에게서 떠나 있으며 등을 돌린 상태이며 심지어 진노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만일 폐하께서 고요하고 안정된 기분으로 우리의 이 고백을 한번 읽어 주신다면 우리는 폐하의 은총을 되찾을 자신이 있음을 첨언합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변명 대신으로 폐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 악으로 충만한 자들의 속삭임들만이 폐하의 귀를 가득 채워 피고인들은 자기를 위해 변론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단지 저들의 미친 듯한 격노만이 폐하의 묵인하에 투옥, 채찍질, 고문, 절단형, 화형 등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도살당할 운명에 처한 양처럼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될 것입니다(사53:7-8; 행8:33). 그러나 우리는 “인내로 우리의 영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눅21:19) 주의 강한 손이 때가 되면 틀림없이 나타나 가난한 자들을 그들의 환난에서 건져내시고 그들을 멸시하는 자들을 처벌하실 것을 기다릴 것입니다. 왕 중 왕이신 주께서 폐하의 보좌를 의(義) 가운데(잠25:5 참조). 폐하의 통치를 공평 가운데 견고케 하시기를 기원하나이다. 지극히 강하고 영명하신 왕이시여.
바젤에서
8월 23일

율 법
십계명 해설 포함
A. 하나님에 대한 지식
1. 거룩한 교리의 대부분은 다음의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다. 확실히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다음의 사실들을 배워야만 한다. 첫째로, 그분은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자비로우시며, 진실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생명이 풍성하시다는 것을 확실한 믿음으로 붙잡아야만 하는 것이다(바룩2:12-14; 약1:17).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 나타나든지 그것은 그분에게서 온 것이다(잠16:4). 둘째로,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이다(시148:1-14; 단3:59-63). 오직 그분의 성품 때문에 그분을 섬기는 것, 그분의 규칙을 지키고 그분의 위엄을 수락하고 순종 중에 그분을 주와 왕으로 인정하는 것(롬1:20)-이 모든 것이 그분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이다. 셋째, 그분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며 그런고로, 그분의 계명에서 벗어나서 매사에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고 그분의 영광에 관계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자들에게 단호한 보복을 감행하실 것이다(시 7:9-11; 롬2:1-16). 넷째로, 그분은 자비로우시며 온유하셔서 그분의 자비 아래로 도망쳐서 그분에게 의탁하는 가련하고 비참한 자들을 영접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이 그분의 은총을 구하면 그분은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며 누구든지 그분의 도움을 요청하면 기꺼이 도움을 제공하고자 하시며 그분에게 전적으로 의탁하고 매달리는 자는 누구나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B. 인간에 대한 지식
2.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실한 지식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 모두의 조상인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포착해야 한다(창1:26-27). 말하자면 그는 지혜와 의와 거룩함을 부여받았으며 이 은혜의 선물에 의하여 하나님께 너무나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의로움 속에 굳게 서 있었더라면 영원히 그분 안에서 살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실족하여 죄를 범했을 때,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은 취소되고 지워졌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의 은헤가 주는 모든 혜택을 상실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있었더라면 그는 생명의 길로 재인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창3). 게다가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옮기워져서 완전한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인간은 모든 지혜, 의, 능력, 생명을 박탈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그러한 것들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무지, 죄, 무능, 죽음, 그리고 심판 외에는 아무 것도 그에게 남아있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롬5:12-21). 이것이야말로 “죄의 열매들”인 것이다(갈5:19-21). 이러한 재앙은 아담에게만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씨요 자손인 우리에게도 흘러내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아담에게서 난 우리 모두는 무지하며 하나님에게서 떨어졌으며 사악하며 부패했으며 모든 선을 결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모든 종류의 사악함에 이끌리며 부패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것들에 중독 되어서 하나님을 향해서는 완고한 마음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렘17:9). 그러나 만일 우리가 겉으로 어떤 선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마음은 여전히 오염되고 왜곡된 내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 혹은 모든 사람의 최대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것인데 그는 외모를 따라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외적 위용을 높이 평가하지 아니 하시며 마음의 비밀을 감찰하신다(삼상16:7; 렘17:10). 그런고로 사람이 아무리 많은 외적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위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심지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럽기까지 한 것이데 그것은 여전히 부패하고 타락한 마음의 생각이 그 아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3. 비록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우리 힘으로는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을 행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이기 때문에 그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봉사하시고 그의 계명에 순종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으며 파산한 빛장이처럼 빛을 갚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변명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를 묶는 죄책은 우리 자신의 것이며 우리 자신의 죄로부터 생겨나서 우리에게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나 능력을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요8:34-38; 롬15:25). 이제 하나님께서는 공의대로 죄를 벌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저주를 받아야 하며 영원한 사망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사실상 우리 가운데 자기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C. 율법
4..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라 부르고 있으며 우리는 사망과 파멸로 달려가고 있다고 선언한다(엡2:1-3; 롬3:9-20). 인간에게는 의와 능력과 생명과 구원을 자기 자신 속에서 찾아야 할 이유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고 분리된 인간은(호13:4-9) 자신 속에서 오직 불행, 연약, 사악, 죽음, 한마디로 지옥 그 자체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무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율법을 새기시고 인치셨다(롬2:1-16). 그러나 이것은 양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것을 양심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앞에 선한 악을 제시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발하고 정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교만과 야심으로 가득차 있으며 자기 사랑에 의해 눈 먼 존재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자리고 내려와서 자기 비참을 고백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태를 보시고서 완전한 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이 지켜져야 하는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기록된 율법을 주셨다. 말하자면 하나님 안에 견고하게 서서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그분에게만 고정시키며 우리의 모든 생각과 열망과 행동과 말을 그분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의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가 바른 길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가를 명백히 보여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또한 우리를 위해 율법 속에 제시된 모든 약속들과 저주들을 바라보라.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모든 계명을 완벽하고도 정확하게 수행하면 그는 영생의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다(렘18:5). 이것에 의해 그분은 분명히 우리에게 율법에서 가르치고 있는 완전한 삶이 참으로 의로우며 그분에게 그토록 중요하며 만일 누구든지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그러한 상급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율법의 모든 의를 충분하고도 예외없이 지키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는 저주를 선언하시며 영원한 사망의 심판을 선고하시는 것이다(신27:26; 갈3:10). 확실히 이러한 처벌에 의해서 그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간을 강권하고 계시는 것이다.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그것을 준행 해야만 하며 그것은 우리가 지고 있는 빛이다. 그것은 우리가 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전혀 제대로 준행 할 수 없는지를 보여준다(롬3:19; 7:7-25). 결과적으로 그것은 분명히 우리를 위한 거울이 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마치 거울 속에서 우리 얼굴의 상처와 흠들을 늘상 보는 것처럼 우리의 죄와 저주를 분별하고 명상할 수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기록된 율법은 자연법에 대한 증인이다. 자연법이 우리를 교훈할 때, 수시로 우리의 기억을 되살려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들을 일깨워 주는 증인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율법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우리의 주님이요 아버지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게 영광과 존귀와 사랑을 바쳐 드려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저주, 심판, 한마디로 영원한 죽음을 받기에 합당하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에서 나온 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 길은 죄의 용서이다. 다음에,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율법에 대한 의무를 면제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다른 데서 오는 도움을 찾고 기다려야만 한다. 우리가 이처럼 겸손해지고 꺼꾸러질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며 너그럽고 친절하며 오묘하고 관대하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느니라”(약4:6; 벧전5:5).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돌려 달라고 기도하고 용서를 구하면 그분은 틀림없이 그렇게 해주실 것이다.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했던 형벌을 면제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D.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5.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그의 도우시는 손길을 간구하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분의 보호를 힘입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선한 뜻을 따라 새 마음과 새 힘을 주심으로 우리가 그분의 계명들을 준행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겔36:26).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축복들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다.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하나님이셨으나(요1:1-14) 우리의 육신을 입으심으로 우리와 계약을 맺으셨고(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떨어진) 우리를 자기에게 연합시키고자 하셨던 것이다(사53:4-11). 그는 또한 자신의 죽음의 공로에 의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빛을 지불하셨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무마시키셨던 것이다(엡2:3-5). 그는 우리를 묶는 저주와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으며 자기 몸으로 죄의 형벌을 담당하셔서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던 것이다(골1:21-22). 땅으로 내려오실 때에 그는 풍성한 하늘의 축복들을 가져 오셨고 그 축복들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부어 주셨던 것이다(요1:14-16; 7:38; 롬8:14-17). 이것들은 성령의 은사들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거듭나며 악마의 권세와 사슬에서 해방되며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성화 되는 것이다 또한 그를 통해-우리가 이 죽을 몸을 입고 있는 동안-우리 안에서 부패한 욕망들, 육신의 정욕들, 그리고 왜곡되고 부패한 우리 본성이 일으키는 모든 것이 죽어 가는 것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져서(고후4:16) 새로운 생명 가운데 걷게 되며(롬6:4) 의를 위해 살게 되는 것이다.
6.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우리 주안에서 이 모든 축복들을 주시는데 그 속에는 죄에 대한 값없는 용서, 하나님과의 평화와 화목, 성령의 은혜와 선물들이 있다. 만일 우리가 확실한 믿음으로 그것들을 붙잡고 받아들이므로 전적으로 신뢰하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요 진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면 말이다(롬3:21-26; 5:1-11). 한마디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에 참여한다면 그분 안에서 우리는 모든 하늘의 보화와 성령의 선물들을 소유하게 될 것인데 그것은 우리를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참되고 산 믿음 없이는 결코 이런 것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이 있으면 위는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이 그분 안에 있으며 우리가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 왕궁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요1:12; 롬8:14-17). 한편 그리스도 안에 분깃이 없는 자들은 그들의 성품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들이 무슨 일을 행하든지 간에, 파멸과 혼란 그리고 영원한 죽음의 심판 속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모든 구원의 소망이 끊기게 될 것이란 말이다(요3:18-20; 요일5:12). 우리 자신과 우리의 빈곤과 파멸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우리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던지며 그의 자비를 구하라고 가르쳐 준다(렘31:18-20).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맛보게 하는 믿음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 선함과 자비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관계를 가지시는 것이다. 오히려 거짓 없는 회개로 우리를 인도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하도록 요청 받은 분은 하나님이시다. 즉, 확실한 믿음에 의해 우리를 인도해서 그분의 온유하심과 선하심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하시는데 그는, 아버지에게로 가는 유일한 길이신 우리 지도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한 축복으로 인도하실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E. 십계명 강해
7. 십계명은 두 개의 돌판으로 나뉘어져 있었다(출32:15; 34:1; 신10:1). 첫째 돌판은 처음의 네 개의 계명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지고 있는 의무를 보여준다. 즉, 그분을 유일한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며 무엇보다도 그리고 모든 다른 것에 앞서 그분을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며 두려워하는 것, 우리의 모든 소원과 필요를 그분 안에서만 구하는 것, 항상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그것이다. 둘째 돌판은 남을 여섯 개의 계명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우리의 이웃을 향하여 행해야 할 사랑의 의무를 설명하고 있다. 복음서 기자가 말한 거처럼 우리 주님은 율법을 두 개의 주제로 요약하신다. 즉,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마22:37, 39; 눅10:27). 비록 모든 율법이 이 두 개의 주제로 요약되었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서 모든 변명의 구실을 박탈하시기 위해 십계명에 의해 더 깊고 명백하게,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것에 관계된 전부와 우리의 이웃을 향한 사랑과 관계된 모든 것을 선포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계명을 시작하시기 전에 그는 다음과 같은 머리말을 주셨다(충20:2; 신5:6).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8. 이 말씀에 의해 그는 우리에게 순종해야 할 계명을 주실 권리가 있는 주님이심을 보여주고 계신다. 게다가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와 애굽의 굴레에서 자유케 하실 때에 얼마나 영광스럽게 자신의 힘과 능력을 나타내셨는가를 상기시키신다. 즉, 그가 택한 자들을(진정한 이스라엘) 죄의 굴레(‘애굽’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된)로부터 구해 내실 때, 그가 그들을 애굽인등(자신의 정욕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자들)의 주, 즉 영적 바로인 마귀의 쇠사슬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실 때 어떻게 날마다 동일한 능력을 나타내시는가를 상기시키시는 것이다.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9. 이 계명은 우리가 완전히 하니님께만 두어야 하는 신뢰를 다른 신에게 두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혹은 어떤 선이나 무슨 덕이든지 그것을(그분에게 바쳐 드려야 할) 다른 신에게 향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사30:1-5; 31:1; 렘2:13,32). 오히려 다른 모든 것보다도 그분만을 경외하고 사랑해야 하며 그분만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하며 우리의 모든 소망과 신뢰를 그분에게 두어야 하는 것이다(딤전1:17; 신6:4-14; 10:12-13). 그러는 중에 우리는 모든 선한 것이 그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묵상해야 하며 그분이 영광을 받고 찬양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전10:23-31). 이것을 우리는 단지 말과 몸짓으로 또한 모든 외적 표시에 의해 우리가 다른 어떤 하나님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해서 해야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모든 열심히 과연 우리가 그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해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과 외적 행위만 그분에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과 생각까지도 우리 자신에게 보다 그분에게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대상28:9).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려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4-5).
10. 이것은 모든 예배와 경배를 한 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불가해하며 육신이 없으며 보이지 아니하며 만물을 포용하기 때문에 아무 장소에서도 갇힐 수 없다. 그렇다면 마치 어떤 형상이나 우상의 모습이 하나님을 형용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표현 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자.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그분은 영이시며 진리 안에 계신다(신6:13-16; 10:12-13; 왕상8:22-27; 딤전1:17; 요1:9-14; 4:24). 그런고로 제 1계명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을 떠나서는 어떤 다른 신도 생각하거나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계명은 하나님 자신이 그러한 분이며 그러한 경배에 의해 영광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게 육체적인 어떤 것을 감히 부과하려해서는 안되며 그분을 우리의 감각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해서는 안됨을 가르친다. 마치 그가 우리의 아둔한 머리에 의해 이해될 수 있거나 어떤 형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구차한 변명을 가지고, 옛날에 참 종교를 삼켜 버렸던 저주받을 우상숭배를 옹호하려 하는 자들은 다음의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형상들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기 전에 자기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낸 하나님이었다는 분인 것을 망각할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잊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이방인들이 하나님은 나무나 돌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음대로 형상을 바꾸곤 했지만 그러나 마음속에서 항상 동일한 신들이 있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한 신에게 많은 형상을 부가했지만 자신들을 위해서 형상들이 있는 만큼 많은 신들을 만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매일 새로운 형상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자기들이 새로운 신들을 만들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된 일인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이란 그들의 공허한 정신이 상상해 낸 꼭 그대로 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 공허함에 부패가 부가되었다. 즉 그들이 속으로 상상한 그대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고로 정신은 우상을 상상했고 손은 그것이 출현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그러한 형상을 입은 영원한 하나님, 하늘과 땅의 한 분, 참되신 주를 예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이방인들은 자기들 자신의 신들, 엉터리이지만 그래도 자기들로서는 하늘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들을 경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서 그들은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육체적으로 보여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심을 믿지 않았다. 이 맹목적인 갈망에 순응하여 그들은 표상을 만들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그들 육안에 나타났다고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것들 가운데서 스스로 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또한 그것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경배했다. 마침내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과 눈을 그것들 위에 고정시킨 채 마치 그것에 어떤 신성한 것이 깃든 것처럼 그것들에 대해 경탄하기 시작했으며 도한 점점 야수화되어 갔다. 과거에 그런 일이 없었으며, 우리가 기억하는 한 지금도 그런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부끄럼도 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왜 이러한 것들 앞에 서는가? 그들은 왜 기도하려 할 때 마치 하나님의 귀를 향하는 것처럼 그것들에게 향하는가? 왜 그들은 심지어 전멸 당하는 순간까지도 마치 그것들이 제단이나 난롯불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형상들을 지키기 위해 칼을 빼드는가? 그들은 우상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한 분 하나님을 빼앗기는 것을 택하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무리들의 형편없는 실수를 일일이 나열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의 무한대의 것으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그들이 특별히 자기 자신을 우상숭배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싶어 할 때 그들이 고백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의 신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도 그것들을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고 단지 하나님의 표시와 모양이라고만 불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과 모든 성경은 그들이 나무와 돌과 간음했다고 주저 없이 고발했다(렘2:27; 겔6:4; 사40:19-20; 합2:18-19; 신32:37).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고 싶어하는 자들에 의해 매일 행해진 바로 그인들, 말하자면, 그들이 나무와 돌 속에 있는 하나님을 물리적으로 경배한 바로 그 일들을 행했다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11. 최종적 회피는 우상들을 “교육받지 못한 자들의 책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한다 하자(비록 그것은 전적으로 헛된 것이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부복하는 유일한 목적이 경배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러한 형상들이 교육받지 못한 자들에게(특별히 그들이 하나님을 묘사해 보여주고자 하는 자들에게)의인화된 신을 제시해 주는 것 외에 어떤 유익을 주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이 성자들에게 바치는 것들-그것들은 가장 타락한 정욕과 음탕함의 본보기 외에 무엇이겠는가? 만일 누가 그들을 모방하고 싶다면 그는 채찍형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정말이지 교회들이 처녀들을 더 정숙하고 덕스럽게 보여준다. 그런고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형상들을 최소한 적절한 체통을 지닌 것으로 만들게 하라. 그래야 그들은 조금 거 정숙하게 이것들은 어떤 거룩한 책들이라고 헛되이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또한 이것은 주님께서 이러한 쓰레기와는 전혀 다른 교리를 가르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육하는 방법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는 자기 말씀의 선포를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 교리로 설정하셨다. 만일 다음의 사실이 적절하고도 신실하게 가르쳐졌다면 나무와 돌과 심지어 금은으로 만든 그렇게 많은 십자가를 세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허물을 깨끗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 죄 때문에 자기 몸을 주셨다는 사실 말이다. 이 한마디 말로부터 그들은 나무나 돌로 만든 수천개의 십자가로부터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마도 탐욕스러운 자들은 자기들의 마음과 눈을 어떤 하나님의 말씀보다 금과 은에 더 집요하게 고정시키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그들은 누구더러 “배우지 못한” 자들이라고 부르는가? 정말이지 주님께서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자”(요6:45)로 인정하시는 자들인 것이다. 여기에 비길 데 없는, 값을 매길 수 없는 형상의 축복이 있다. 그러나 그는 더 분명하게 다음의 두 계명을 부과함으로써 모든 불신실과 우상숭배를 얼마나 지독히 혐오하는가를 말씀하신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투기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6)
이것은 마치 그가, 우리가 굳게 붙잡아야 하는 것은 홀로 그분이며 그는 이떤 경쟁자도 참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다. 또한 그는 자기의 위엄과 영광을 새긴 우상이나 다른 어떤 것에 넘겨주려는 자에 대항해서 그것을 수호하실 것이다. 그리고 한번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들과 손자들에 대항해서 그렇게 하실 것이다. 말하자면 어느 때라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그를 사랑하고 자기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영원하신 자비와 친절을 나타내신다.
제3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20:7).
12. 이 계명의 뜻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고 두려워해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지극히 거룩한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된가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인해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분을 높여야 하며 순탄할 때나, 역경에 처할 때나 매사에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그분의 손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그분에게 간구해야 하며 그분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조심스럽게 모든 모욕과 불경함을 멀리함으로써 그분의 높은 위엄에 적합한 것 외에 어떤 다른 이름으로 그를 부르거나 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그분이 의도했던 것 외의 어떤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성을 모독하고 모욕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의 이름을 강신술, 저주, 불법의 축귀 행위, 그리고 기타 사악한 주문 암송 등의 미신에 사용하는 자들처럼 말이다(fp20:6; 신18:10-12). 서약과 맹세에 관한 한 우리는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결코 거짓되이 불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영원한 진리는 거짓에 대한 증인으로 인용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모욕을 당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형제들의 필요가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 한 진실한 맹세라 할지라도 성급하게 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목적을 제외하고는 어떤 종류의 맹세도 금지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율법의 이 조항의 뜻은 우리의 모든 말은 예, 예, 혹은 아니, 아니 뿐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지나는 것은 악한 자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한다(마5:37).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또한 주목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성급함 때문에 어떤 맹세를 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치안 판사가 요구할 때 하는 맹세는 전혀 이 계명에 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성귀에서 하나님께서는, 진실에 대한 증인이 재판에 필요할 때 치안 판사에게 맹세를 지시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이다(출22:11; 히6:13-18). 아니, 모든 공적 맹세는 이 금지에서 면제된다. 바울이 복음의 위엄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했던 맹세들도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롬1:9; 9:1). 왜냐하면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사도들은 사사로운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적 종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약을 엄숙하게 하기 위해 왕들이 하는 맹세, 혹은 자기 왕의 이름으로 백성들이 하는 맹세 등 사사로운 욕심에서가 아니라 공공의 선을 위해 행하는 맹세 등은 다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첫 번째 사실은 맹세가 허용된 것이 정욕이나 탐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말을 확정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상과 같은 경우 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그러한 필요가 있을 때에 한해서만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유일하고 영원한 진리 되신 그분이 진리의 유일한 증인이시며 또 그렇게 간주되는 것은 그분의 명예와 영광에 관계되기 때문이다(신6:13; 10:20; 사45:23; 48:15).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자기 이름의 탁월한 위엄을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그 계명에 다음의 말씀을 덧붙이셨다.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 의해 하나님은 이 계명을 어기는 자들에게 특별한 저주를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13. 안식일 준수는 경건과 하나님 예배 양자에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첫 번째 둘판에 포함되어 있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심”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주님께서는 다른 어떤 것도 이것보다 더 강조하시지는 않았다(출31:13-17). 그리고 선지서에서 모든 종교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실 때 그는 안식일이 더렵혀지고 모독당하고 침해되어 지켜지지 않고 거룩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마치 이 계명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겔20:12-13; 22:8; 23:38; 렘17:21,22,27; 사56:2; 민15:32-35). 그러나 이 계명은 그림자였으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영적 예배를 보여주기 위해 의식기간 중에 부과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고로 그림자의 빛이시오 형상의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그것이 모세 율법의 잔영처럼 폐기된 것은 바울이 밝히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다(갈4:8-11; 골2:16-17). 그러나 유대인들의 신앙이 율법의 교육하에서 표현되었던 그 의식들과 외적 제사는 폐기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주님께서 유대인들과 우리가 공히 영원토록 가지기를 원하셨던 계명의 진리를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의 것이 그 진리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경외하고 사랑해야 하는 고로 그분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양심을 혼란시키고 괴롭히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 우리의 사악한 욕망들을 깨끗이 청산하고 육신의 모든 깨끗치 못한 일들을 버린다면, 말하자면 어떤 인간적 지혜의 외양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모든 일들, 즉 우리의 현세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 사악함이 우리 본성 속에 조성되게 하는 모든 것을 버린다면,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히3:7-19; 4:9; 사5:8; 58:13-14). 그러한 종류의 모든 일들은 노예와 같은 일이다. 안식일의 율법은 그러한 일들을 중단하라고 우리에게 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며 선한 영향을 미치게 하고 양심에 평안과 평정을 부여해주는 성령의 인도에 의해 우리를 다스리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안식일이며, 유대인의 안식일은 사실상 그것의 모형이요 그림자였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성경에서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인 일곱째 날에 할당되었다. 그것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명하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데 그 안식에는 아무 한계가 정해지지 않았다. 둘째, 그것이 완전하고도 적절하게 거룩해지는 일은 일곱째 날까지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히4:1-11). 그 일곱째 날은 사실상 최종적이며 영원하다. 신자인 우리 모두는 부분적으로 그것에 들어갔지만 아직 그것에 완전히 도달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누리기 시작했지만 그 속에서 또한 매일 진보를 이루어 마침내 이사야의 말이 실현될 때 그것이 완성될 것인데 그 말속에는 안식 위에 안식에 대한 약속이 하나님의 교회에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사66:23). 말하자면, 그때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실 것이라는 말이다(고전15:28). 이것을 또한 하나님께서는 엿새동안에 완성하신 천지 창조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오직 제칠일에 하나님은 모든 일을 쉬셨는데(창2:1-3). 그분의 모범에 의해 우리 또한 우리의 일을 쉬고 그분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찾으며 제칠일의 이 안식을 열렬히 동경하게 되는 것이다.
14. 이것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주일에 적용된다. 주일은 우리가 모든 다른 것에 앞서 그것을 거룩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 즉 그것을 거룩하게 여기게 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날들을 공히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만의 특권이기 때문이다(롬14:5).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듣는 것과 성례의 시행을 위해 모이도록 제정된 것이다(갈4:8-11; 골3:16). 우리의 모든 노력을 이러한 일들에 한 마음으로 바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기계적이며 육체적인 노동을 중지해야 하며 이생의 행위와 관계 있는 모든 추구들을 중지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엄숙한 날들도 같은 종류의 것인데 그때 우리 구원의 신비를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말씀을 온 마음으로(그것이 적절하지만)마시게 되면, 또한 그것을 통해 옛 사람의 행위를 죽이게 되면, 특별한 절기 때뿐만 아니라 매일 한결같이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그러한 명령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안식일마다 축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한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는 것은 종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통의 국가를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규정된 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을 그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기나 하는 것인 양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어떤 날에 함께 모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일들이 질서를 따라 방해받지 않고 이루어 질 수 있는 지정된 날을 두는 것이 긴요하다(고전14:40). 그와 같이 함으로써 이 계명의 의식적인 부분만 폐지되었다는 유대인의 인식을 가지고서 세상을 오염시킨 궤변론자들의 넌센스를 추방하게 되는 것이다(그들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제칠일의 ‘지정’이라 불리운다). 그들은, 도덕적인 부분은 남아 있는데, 말하자면, 한 주 가운데 어느 날을 지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날을 지키는 것을 유지하면서 유대인들을 약올리기 위해 날을 바꾸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그들이 그러한 교훈에 의해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게 되는지를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제도에 집착하는 자들은 무식하고 육적인 안식일의 미신에 있어 유대인들을 세배 이상 능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사야서에 있는 책망이 오늘날 이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선지자가 그 당시에 책망했던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과 꼭같다(사1:13-15; 58:13).
15. 유대인들은 안식일주의 속에서 지킬 또 하나의 과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종교와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공평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비인간적인 주인들이 계속적으로 종들과 짐승들을 부려먹음으로써 적절할 한도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종들과 짐승들의 노동을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는 사실상 자기 자신의 어떤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이미 가르쳐졌던 어떤 것의 유용성을 지적하고 있었다(출23:11; 신5:14). 우리도 또한 오늘날 어떤 노예의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명령에 따라 공평에 대한 존중심을 가져야만 한다. 이제 여기에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처음의 네 계명들이 있다. 이것들이 첫 번째 돌판을 결론짓는 것이다.
16. 그러나 거의 모든 곳에서 수락된 보편적인 형태 외에 나는 첫 번째 돌판에 네 개의 계명들을 포함시킨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중요한 이유이다. 확실히 권위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달리 구분하여 두 번째 계명을 우리가 언급하는 수에서 제외시킨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계명으로써의 확실한 위치를 부여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을 터무니없이 둘로 나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단일한 계명인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오리겐이 우리의 구분을 그대로 제시했다는 사실에서 보다 순전한 시대에는 그와 같은 구분 방식이 알려진 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그와 같은 구분은 어거스틴의 시대에 나타났는데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 확실히 그것은 아주 불충분한 이유로 인해 어거스틴을 기쁘게 했다. 말하자면 “삼”이라는 숫자 속에는(만일 첫째 돌판이 세 개의 계명으로 구성된다면) 삼위일체의 신비가 더 밝히 빛을 발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다른 점에서 있어서는 우리의 구분이 보다 더 그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그것에 의해 우상 숭배가 그처럼 명백히 금지되었던 이 계명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서서히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은 마귀의 사기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 점을 짚고 넘어 가야만 사람들이 나의 구분을 어떤 새롭고 최근에 고안한 것으로 비웃거나 의아해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두 번째 돌판이 남아 있다.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20:12).
17.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분인 고로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무시하거나 어떤 식으로 노엽게 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에게 커다란 경의를 표해야 하며 그들을 존경하고 명예롭게 해야 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일들에 있어 우리의 노력이 소용될 수 있는 사람들은 기쁘게 하고 그들에게 감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엡6:1-3; 마15:4-6). 여기에는 축복이 부가되어 있다.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독특한 추천의 방식을 통해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를 선포하며 우리의 나태함을 일깨우며 동시에 자기 부모에게 보답하고 감사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배은망덕한 자식들은 확실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출20:13).
18.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행위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도 안 된다. 어떤 사람도 불공평하게 대해서는 안되며 누구를 공격하거나 아무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만일 우리 속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나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친구든 원수든-을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어떤 사람이 위험에 처해 있으면 도움의 손길일 베풀어야 하며 최선을 다해서 친구에게건 원수에게건 관대해지려고 애를 써야 한다(마 5:27-30).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출20:14)
19. 그 의미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통해 우리의 모든 행위를 순결하고 자제심 있게 조절하고 말하고 행해야 한다. 그리고 순결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 까닭에 우리 각자는 그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마5:43-48; 엡5:3-4; 고전6:13-20; 마19:11-12; 고전7:1-40).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그들 육신의 불순함을 위해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치료책이 있다. 그들이 그것을 이용하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을 대항해서 싸우고 그분의 규례에 저항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노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움은 오직 그의 길에 행하는 자들에게만 임하기 때문이다(시91:1-14).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해서 떠나려고 기를 쓰고 있는데, 그의 부르심 안에 행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도움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강퍅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6:16; 미4:7).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본성에 반하여 그가 주신 현재의 은사들까지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들이 하는 일은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세우시고 명예로운 것이라 선언하신 결혼 관계마저 감히 “더러운 것” 이라 부른다. 그리스도 우리 주께서 친히 왕림하셔서 그의 첫 번째 기적의 은혜를 베풀어주심으로 거룩하게 하신 결혼 관계를 말이다(창2:18-24; 히13:4; 요2:1-11).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단지 어떤 종류의 독신 상태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독신과 처녀성은 별개가 아닌 것처럼! 그들은 그것은 “천사 같은 생활”이라 부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음행자들과 간음자들, 그리고 그보다 어 악하고 더러운 어떤 것을 천사들에 비유함으로써 하나님의 천사들을 심히 부당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사물 그 자체가 스스로 명백한 반대를 표시하고 있는 이와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증명의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주께서 때때로 이런 종류의 교만과 은혜에 대한 경멸에 대해 어떤 무서운 형벌로 보수하시는지를 안다. 부부들은 자기들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남편들은 자기 아내를 신중하고 점잖게 다루어야 하며 아내들도 남편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삼감으로써 결혼의 순결한 절제에 합당하지 않은 어떤 것도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주안에서 결혼한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제8계명: 도둑질하지 말지니라(출20:15).
20. 계명의 뜻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하는 고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사기에 의해 도둑질하거나 완력에 의해 움켜잡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아나 계약을 할 때 다른 사람의 무지를 악용하지 말아야 한다. 즉 물건값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너무 비싸게 팔거나 혹은 너무 싸게 구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어떤 종류의 간계에 의해 다른 사람의 재산에 손을 대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친구든 적이든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움과 충고를 줌으로써 그의 재산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떤 것을 취하기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만일 그들이 어떤 물질적 곤란을 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짐을 나누어 져야 하며 우리의 물질을 가지고서 그들의 가난을 덜어 주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이다.
제9계명: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20:16).
21.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해야 하는 고로 어떤 사람에 대해 거짓된 비난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평판에 손상을 주어서는 안되고 험담을 하거나 독설에 귀를 기울여서도 안되며 어떤 사람에 대해 의심을 하거나 악의를 가져서도 안된다. 오히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이 있다면 할 수 있는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좋게 말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에 대한 공정한 판단자로서(허용된 한도 내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말과 행위를 가장 좋게 해석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마7:1-5; 롬13:8-10; 14:10). 이 계명에 또한 우리가 어떤 거짓말도 기뻐하지 않으며 그럴듯한 아첨을 하지 않으며 무익한 잡담을 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한다(잠5:6; 마12:36-37; 엡4:25-28; 5:6-11).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탄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
22. 이 계명에 의해서 주님은 다른 사람의 아내나 가족이나 소유나 어떤 좋은 것에 대한 모든 탐심을 금지하신다. 이런 식으로 그는 더 많은 것을 금지하신다. 우리는 어떤 술책이나 사기나 잔꾀를 부림으로써(비록 그것이 그럴듯한 이름으로 은폐될 수 있다 할지라도) 아내가 남편과의 교제에서 떠나게 한다든지 종들이 도망치게 한다든지 혹은 어떤 소유물들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게 한다든지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공교한 말로 아내가 남편에게서 혹은 종이 주인에게 떠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남편이 자기 아내로부터 떠나게 함으로써 남편에 의해 버림받은 아내가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인에 의해서 쫓겨난 종들이 우리 차지가 되도록 해서도 안된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의 소유를 처지하기 위해 탐욕스런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이런 종류의 사기를 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가 금지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그러한 것을 의도하거나 원하거나 생각하는 것마저도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오히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경외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떤 사람의 아내와 모든 소유물들이 안전하게 보존될 것을 바라야 할뿐 아니라 남편과 아내 사이에 애정을 조장해 주어야 할 것이다. 노예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의무를 다 하게 하시오. 한마디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의 것을 간직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23. 다른 사람의 소유물들을 탐내는 것을 금하는 이 규칙은 또한 각 사람이 자기의 소명을 따라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며 자기 직분에 관계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도록 하는 방식으로도 적용되어야 한다(엡4). 그리고 자기 자신의 소명의 은사로부터 그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낳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소유들을 탐내고 차지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람들은 왕들과 왕자들과 관원들과 다른 권세 있는 자들을 공경해야 하며 그들의 정부에 인내심을 가지고 대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 아래에 수행될 수 있는 어떤 것도 거부하지 말고 법률과 계명들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롬13:1이하, 벧전2:13이하, 딛3:1). 한편 통치자들은 그들 자신의 보통 백성들을 돌보고 정의를 구현하며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선한 자들을 보호하며 악한 자들을 징벌해야 한다(엡4:1, 7, 16, 28) 그리하여 마치 최후의 왕이시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자신들의 봉사에 대한 회계를 곧 해야 할 것처럼 모든 것을 관리해야 한다(신17:19; 대하19:6-7비교; 또한 히13:17). 교회의 감독들과 목사들은 말씀의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하며 구원의 도리를 혼잡케 함이 없이(고후2:17비교).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채 전달해야 한다. 또한 그들은 말로써 뿐만 아니라 생활의 본보기를 통해서도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선한 목자들로서 양떼들에 대한 권위를 행사해야 하는 것이다(딤전3:1-5; 딤후2:15; 4:2,5; 딛1:6이하; 벧전5:2이하). 한편 백성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사자요 사도로 받아들여 주께서 그들에게 합당하다고 여기신 명예를 부여해야 하며 그들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그들에게 공급해야 한다(마10:10이하; 롬10:15 그리고 15:15 이하, 고전9:6-14; 갈6:6; 실잔5:12; 딤전5:17이하).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 주신 자녀들을 양육하고 가르치고 다르시는 일을 감당해야 하며 인정 없고 잔인한 태도로 그들을 노엽게 함으로써 그들이 부모에게 들을 돌리게 해서는 안된다(엡6:4; 골3:21).
오히려 온유함과 친절함으로 자녀들을 품어 주고 감싸주어야 한다. 그것이 부모에게 합당한 일이다. 우리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주께서 노인들은 공경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따라 젊은이들은 노인들을 공경해야 한다. 또한 노인들은 젊은이들보다 나은 지혜와 경험으로 젊은이들의 부족함을 지도해 주어야 하며 심하게 큰 소리로 그들을 꾸짖지 말고 유순함과 온유함으로 그들의 가혹함을 조절해야 한다. 종들은 주인들에게 부지런하고 고분고분하게 행동해야 하며 눈가림만 하지 말고 마음으로부터 주께 하듯 순종해야 한다. 또한 주인들은 종들에게 까다롭고 고약하게 행동하지 말고 지나친 엄격함으로 그들을 억압하지 말고 그들에게 욕설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종들을 자기 형제들로, 하늘에 계신 동일한 주의 종들로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인간적으로 대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엡6:5-9; 골3:22-25; 딛2:9-10; 벧전2:18-20; 골4:1; 몬16비교). 이런 식으로 각 사람은 자신의 위치와 신분 속에서 이웃에 대한 의무를 생각하고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F. 요약
24. 우리는 십계명에 드러난 전 율법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나 이웃을 향해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금지하시는 것들을 충분히 배우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첫 번째 돌판에 의해 우리는 특별히 경건을 배우게 되는데 그것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고백하며 그를 부르며 그분에게 모든 것을 구하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기다리며 그분 안에서 우리의 보호를 찾으며 그분 안에 쉬는 것이다.(마7:12). 둘째 돌판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계발하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행하며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율법 어디에서고 우리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거나 할 수 없다는 것에 관한 규칙은 한 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분명히 자기 사랑으로 기울어질 수 있는 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율법이 일부러 이미 과도한 사랑에 부채질을 할 필요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계명들을 지키게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할 수 있는 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훌륭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발버둥치고,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악하고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25.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뿐 아니라 생각들 그 자체와 마음의 내적 감정들까지도 하나님의 법에 의해 명령되거나 금지됨으로써 사람이 단지 어떤 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율법을 만족시켰다고 생각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자기들의 눈과 발과 손과 지체의 모든 부분을 삼간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람들이 모르게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는다(출20:13-15). 그들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칼을 뽑지는 않으며, 사창가를 찾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을 대지도 않는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살기를 가득 품고 있으며 정욕으로 불타 오르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물건에 눈독을 들이고 있으며 탐욕스럽게 그것을 삼켜버린다. 그들은 지금 율법의 근본 정신을 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 때문에 바울은 “율법은 신령하다”(롬7:14)고 단언하면서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은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마음과 영혼과 의지를 요구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율법의 의미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주입시켰던 그릇된 생각은 겉으로 드러나게 율법을 범하는 행위만 하지 않으면 율법을 다 이룬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가장 위험한 오류로 책망하신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으며(마5:28), 형제를 미워한 자는 살인하 자라고 가는 성언 하셨으며(요일3:15),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5:21-22; 5:43 이하 비교). 이러한 가르침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또 다른 모세로 생각했으며 모세의 율법에 있던 결함을 매꾸기 위한 복음의 율법의 수여자로 생각했는데 그것은 대단히 그릇된 인식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거기서 옛날 율법에 아무 것도 더한 것이 없고 단지 바리새인들의 거짓말에 의해 애매해지고 그들의 누룩에 의해 더럽혀진 율법을 정화시키고 재천명했던 것뿐이었다.
G. 칭의
26. 동일한 무지나 악의에 의해 복수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이러한 계명들을-이것들은 먼저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다음으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되었다-우리의 대적들은 우리가 지키든 지키지 않든 자유로운 ‘권고’로 바꿔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수도승들에게 그 계명들을 지킬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수도승들은 이 한 가지 점에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의로운 사람들이 되게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발적으로 이 ‘권고들’을 지키기로 서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들을 율법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던 이유는 그것들이 너무나 부당스럽고 중해 보였기 때문인데 특별히 은혜의 율법 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영원한 법을 감히 폐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한 비유를 통해 우리의 이웃이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 심지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계명들도 여기저기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주린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며(잠25:21; 롬12:20), 길을 잃어버린 원수의 소나 나귀를 원수이게 인도해 주어야 하며 그것들이 짐을 너무 많이 실어 찌부러져 있는 것을 보면 버려두지 말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출23:4-5). 주의 말씀은 영원하지 않은가?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히10:30; 신32:35비교). 그리고는 내가 묻노니 이 말씀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마5:44-45). 그렇다면 누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수도승들인가? 만일 수도승들만이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고 있는 공통의 멍에를 제멋대로 벗어버리는 자들은 사탄의 자녀로서의 자기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나 어리석게 항변하고 있는가?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라고 말이다. 마치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율법에 비교해 볼 때 모든 것이 쉽게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이나 복수심을 우리 마음에서 추방하라는 계명까지도 말이다. 우리의 연약한 본성에 비추어 볼 때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까지 지킨다는 것은 실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마5:18; 눅16:17비교). 우리는 주 안에서 덕스럽게 행동한다. “명하신 것을 주시고 원하시는 것을 명하소서”(성 어거스틴)
은혜의 율법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율법 밖에서 고삐가 풀린 채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접붙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며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율법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게 하는 것이다(렘31:33). 바울은 이 은혜를 “율법”:이라는 말을 가지고 이 사람들은 어떤 것도 철학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27. 이 율법의 조금이라도 어긴 자들이나 온전히 지키지 못한 자들은, 비록 그것을 다 지키는 것이 우리 능력 밖에 있는 일이다 할지라도 주님에 의해 무섭고도 중한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이미 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율법을 범한 자들로 판결을 받게 된다. 그리고 죄인들을 향해 선포되는 저주는 단지 우리 중 몇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율법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낙심하고 당황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것에 의해 정죄 되고 저주받기 때문이다(갈3:10).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바울의 말은 바로 그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율법은 모든 것을 인간의 탓으로 돌려 인간을 저주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책망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심판 안에서 인간을 정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만이 의롭다 하시고 모든 육체는 그분 앞에서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다(롬3:19).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자랑하는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는다. 그들이 행위의 공로를 통해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의를 획득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 후 그들은 결코 율법을 완성할 수 없는 고로 실제 그런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영광을 빼앗긴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그들은 부분적으로 율법을 지켰으며 그 점에 관한 한 자신들이 의롭다고 주장한다. 부족한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과 적선의 행위에 의해 보충된다고 그들은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부족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들 자신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망각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멸시와 자신들의 죄에 대한 무지가 그들을 이러한 오류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성경이 아담의 모든 자손들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것 외의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자들은 확실히 자신에 대한 지식(seif-knowledge)에서 멀리 떠난 자들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은 묘사를 하고 있다. 즉 그들은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며(창8:21), 그들의 모든 생각은 허망하며(시94:11), 그들은 “흑암의 빛”이며(욥10:22참조), 모든 사람이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으며(사53:6), 선을 행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으며,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으며,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며(시14:2), 한 마디로 그들은 육체가 된 것이다(창6:3). 우리는 이러한 말에 의해 바울이 열거하는 저 모든 행위들을 연상할 수 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투기와 방탕함”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더러운 것과 가증한 것이다(갈5:19-21). 우리가 하나님에 대항해서 의지한다고 자랑하는 것들의 가치가 실로 그러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음의 것을 보편적 원리로 붙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온 세상으로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는 반면(롬3:19 참조) 인간에게서는 자랑할 모든 기회를 완전히 박탈하고 있다. 하나님에 의해 정죄 되고 그토록 나쁜 평판을 갖고 있는 인간이 감히 자기 자신에게 어떤 것을 돌릴 수 있을까? 그는 아직도 자기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는 아직도 자기가 낮아졌으며 꺼꾸러져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가? 만일 누구든지 자신에게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겸손이라 부를 수 없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자들, 즉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겸비해져야 하고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어떤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아주 해로운 위선을 가르쳐 왔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장점에 대한 모든 신뢰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생각마저도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만일 사람이 자연적 은사에 따라 판단 받는다면 머리 꼭대기로부터 발끝까지 그에게 선한 의지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있는 칭찬들을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악한 경향은 항상 우리의 추잡함을 변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자신의 공로로 돌리려 하는 것이다.
28. 또한 하나님의 의가 너무나 완전하기 때문에 어떤 더러움에 의해서도 오염되지 않은 완전한 것 외에는 하나님에 의해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식되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멸시를 당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행위가 그 자체의 가치에 의해 판단된다면 부패와 오염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의는 연약함이며, 우리의 강직함은 오염이며, 우리의 영광은 불명예일 뿐인 것이다.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것도 여전히 우리의 육체의 어떤 부정에 의해 얼룩지고 더러워져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불순물이 섞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설령 우리가 완전히 순수하고 의로운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다 할지라도, 선지자가 소멸시키기에 충분하다(겔18:24). 야고보도 같은 의견을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우리 인생은 결코 죄 없는 순결할 수 없는 고로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무슨 의든지(잠24:16; 요일1:8), 그것이 뒤에 지은 죄로 인해 오염되고, 눌리고, 파괴될 때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없거나 혹은 우리에게 의로 인정될 수 없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계명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만일 율법으로부터 의를 찾는다면 이런 행위나 저런 행위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순종이 의를 이루게 될 것이다. 게다가 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가증한 것이며 너무나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모든 의를 전부 합한다 하더라도 단 한 가지의 죄에 대한 보상도 될 수 없다. 인간은 한 가지 범죄 때문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구원을 얻을 모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창3:17). 그런고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29. 그것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인데 그것은 원수로부터 죄를 전가하신다. 그런고로 주께서 우리의 어떤 행위를 인정하시기 전에 우리의 죄가 용서 받고 덮여져야만 한다(시31:1; 롬4:1 비교). 이 사실로부터 죄의 용서는 값없는 것이며 자기의 공로를 의지하는 자들은 그것을 무효화하고 모독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본보기를 따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자(빌3:13-14). 선행을 자랑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 앞에 놓인 말씀,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는 말씀과 부합될 수 있는가(눅17:10)? 하나님 앞에서 말할 때는 체하거나 거짓말할 것이 아니라 느끼는대로 정직하게 진실되이 말해야 한다. 그런고로 주님은 우리가 그를 위해 요청 받지 않은 의무를 수행하지 말고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봉사를 할 것은 신중히 고려하라고 명령하신다. 또한 우리가 명령받은 것을 다 행했을 때라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우리가 생각들 전부와 우리의 모든 지체들이 율법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드려졌거나 혹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선행이 한 사람에게 속하게 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말이다.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하는 것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마땅히 해야 할 이상의 일을 했다고 감히 자랑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늘 밑의 벤치에 앉아서 이 문제에 대해 논쟁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지고하신 재판장께서 심판석에 앉으실 때 모든 입은 닫혀지고 모든 자랑은 끝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이 심판대 앞으로 가져 갈 수 있는 변론이 무엇인가가 문제이지 우리가 학교나 구석에서 무엇에 대해 잡담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게다가 그러한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선행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자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한번도 명하시거나 인정하신 일이 없는 자질구레한 일들뿐이다. 그들이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나님 앞에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받아들이시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선행들이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말하자면 선지자가 말하는바 “누가 이것은 네 손에서 요구하였느냐?”(사1:12)하는 것이다.
30. 그렇다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다. 그리고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 율법의 권세에서 떠나는 것, 즉 율법의 굴레에서 놓임을 받아 자유롭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육신적 자유가 아니다. 육신적 자유는 우리를 몰아가서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우리가 모든 일에 방탕하도록 유혹할 것이며, 마치 고삐가 풀린 것처럼 우리의 정욕이 활개치게 한다. 오히려 영적 자유가 상하고 낙심한 심령을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서 그것이 저주와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율법은 양심을 짓누루고 속박하여 저주하고 정죄했던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붙잡을 때 우리는 이 자유, 즉 율법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해방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용서를 확신하게 되는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의 양심을 찌르고 괴롭혀서 죄를 깨닫게 했던 것이다(고전15:56). 그러나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바보스럽게 믿고 있는 것처럼, 영 단번에 사죄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셔서 우리가 과거의 죄를 용서받은 뒤에는 율법에서 의를 찾도록 하시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를 거짓 소망으로 인도해서 우리를 비웃고 조롱하게 할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은 완전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율법이 행위에 있어서의 완전한 의를 획득하지 못하는 모든 자에게 죽음과 심판을 선언하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의 자비가 율법에 대항해서 계속적인 사죄에 의해 우리를 거듭 용서하시지 않는다면 율법은 항상 우리를 고소하고 정죄할 근거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서두에서 말했던 바는 항상 타당하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치에 의해 판단을 받는다면, 우리가 열과 성을 다해 무엇을 계획하고 수행하든 간에 우리는 사망과 혼란만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율법을 통해 우리에게 제공되는 약속들은 모두 부질없고 헛된 것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율법을 준행 한다고 하는 이러한 조건은 결코 성취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약속들은 그 조건이 성취에 달려 있고 그 조건이 성취되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31. 사도는 계속해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롬4:14). 그는 두 가지 사실을 추론하고 있다. 첫째, 만일 약속이 우리 행위의 공로를 바라보거나 혹은 율법의 준수에 의존한다면 믿음은 무력하고 취소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속에서 율법을 만족시켰다고 진심으로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율법 안에서 확실한 신뢰를 가지고 편안히 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의 증거를 너무 멀리서 찾을 필요성이 누구든지 정직한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면 자기 자신의 증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첫째 의심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오게 될 것이며 마침내는 정말이 찾아들 것이다. 자기에게 얼마나 무거운 빛이 있는가 하는 것과 자기에게 부과된 조건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깨닫는 동안에 말이다. 이미 억눌리고 소멸된 신앙을 보라!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흔들리거나 변하거나 요동하거나 주저하거나 우유부단하거나 해서 마침내 절망하게 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계속적인 확신과 완전한 신뢰 속에서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이며 안식할 자리를 가지는 것이다(참조 고전2:5; 고후13:4).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이 대두된다: 또한 약속 그 자체가 폐기처분된다. 약속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성취되어야만 한다는 확실하고도 불변하는 신념을 가진 자들에게만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으면 약속이 소용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구원의 소망을 제시하기 위해 우리를 위한 새로운 약속들이 제공되어야만 한다. 게다가 우리의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복음의 약속들은 우리에게 무슨 선행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고 그분의 아버지로서의 선하심에서 나온 것인데(롬10:20) 그 조건은 그의 기쁘신 뜻에서 나온 위대한 선물을 온 마음에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바울은 이러한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 구원의 기업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약속을 견고하게 하는 것인 믿음에서 온다(롬4:16). 자비와 진리는 함께 만난다는 것(시85:10), 즉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그가 또한 신실하게 이루신다는 사실을 알고서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하는 신앙은 참으로 확실하다. 그리고 오직 믿는 자들만을 위해 성취될 수 있는 견고한 약속이 그 확실한 신앙을 뒤따르게 된다.
32.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어떤 가치나 우리에게서 나오는 어떤 것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이 자비 위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망을 세우고 깊이 뿌리 박아야 하며 우리의 행위에 어떤 기대를 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움을 구해서도 안된다. 사실상 신앙의 속성은 귀를 열고 눈을 닫아서 인간의 모든 공로나 가치로부터 주의를 돌려 약속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가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먼저 실망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분 안에서 충분한 위로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있는 모든 영광을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분 안에서 영광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모든 자신감이 완전히 꺾이고 그대신 그분의 선하심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획득하게 되며(어거스틴이 말한바와 같이) 우리의 공로를 잊고 그리스도의 선물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오직 그분의 축복에 의해서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로와진다. 저주는 우리 모두에게 선포되고 선언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 아담으로부터 상속된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요청되는 율법의 행위를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로와지며 율법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의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입으며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 주셔서 우리를 거룩하고 순결하고 무죄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바울의 말이 성취되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느니라”(고전1:30). 우리의 자비로우신 주께서 그의 선하심과 값없는 은혜를 따라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진노와 영원한 죽음을 받아 마땅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다(롬5:11; 6:22). 그런 다음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고 다스리시며 그를 통해 우리 육신의 정욕들은 날마다 더욱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성화되고 완전히 순결한 삶 속에서 주께 헌신되며 우리의 마음은 변화되어 율법을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분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매사에 그분의 영광만을 진작시키고자 하는 것을 우리의 유일한 의지로 삼기 위해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는 모든 육신의 더러움을 증오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주의 길을 걸어가고 우리가 교만해지는 것을 계속적으로 피하는 중에도 불완전한 어떤 것이 우리 안에 남아서 우리가 겸손할 수 있게 해 주며 하나님 앞에 모든 입을 막고 모든 신뢰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옮길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롬7:23). 따라서 우리는 항상 사죄를 필요로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주의 길에 행하는 동안 성취하는 선행들도(그것들이 믿음 안에서 행해지는 고로 마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처럼)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존재로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홀로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를 대신해서 법정에 나타나야 하며 시판 때에 우리를 위한 보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히11:6; 롬8:34). 마치 그것이 우리의 것인 양 이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 안에서 우리는 계속적이고도 끊임없는 사죄를 받게 되며 우리의 불완전에서 나온 어떠한 부정이나 더러움도 우리에게 전가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정결에 의해 덮여지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장사되어서 우리의 옛사람이 완전히 죽어 없어지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새 아담(그리스도)과의 복된 평화로 인도하는 시간이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날을 기다리자. 그때 우리는 썩지 아니하는 육체를 받아 하늘 왕국의 영광으로 인도될 것이다(고전15:45이하 참조).
H. 율법의 사용
33.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율법의 용도가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그것은 각 사람의 불의를 책망하며 그의 죄를 깨닫게 해준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주께서 그들의 허영을 증명해 보이시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터무니없는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이 모든 어리석은 견해가 제거된 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또한 그들 행위의 의에 의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대항하는 고로 이러한 교만이 팽개쳐져서 빈손으로 하나님의 자비만 의지하고 그 안에 쉬며 그 속에 숨는 것이 합당하다. 또한 의와 공로를 위해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붙잡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는 진실한 마음으로 그것을 찾고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을 하나님께서 보복하실 것을 선언하고 범법자들을 위한 형벌을 설정하며 사망과 심판을 선언하기 때문에 최소한 무엇이 옳으며 바른 것인가에 관한 고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어떤 사람들을 형벌의 공포에 의해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제어되는 것은 마음이 움직이거나 흔들려서가 아니라 고삐가 매였기 때문, 즉 그들의 손을 외적 행동에까지 뻗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마음대로 탐닉했을 부패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더 나아지거나 의로와진 것이 없다. 비록 두려움이나 수치심에 의해 제동이 걸린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기 마음에 생각한 대로 행하며 또한 그들의 정욕에 따라 강탈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도 않으며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는다. 사실은 그들이 자신을 제어하면 할수록 더욱 더 불타오르고 속이 들끓어서 무슨 일이든 하게 되거나 아무데서고 폭발하게 된다. 만일 율법에 대한 두려움으로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또 율법 그 자체를 심히 미워하여 율법의 수여자인 하나님을 저주하며 할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그를 제거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옳은 일을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나 혹은 당신의 위엄을 무시하는 자들에 대해 보복하시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억지로 강요된 의는 인간의 공공 사회를 위해 필요하다. 주께서는 공공의 안녕을 위해 그러한 대비를 하심으로써 완전하고 폭력적인 혼란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저마다 원하는 대로하게 내버려둔다면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셔서 다스리시는 신자들에게도 그것은 못지 않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인가에 대해 더욱 더 엄숙한 경고를 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 그들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갖고 있지만(렘31:33; 히10:16), 즉 그들은 주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할 만큼 마음이 움직인 자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율법에 의해 유익을 얻는 것은 율법으로부터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매일 더 철저히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주인을 섬기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을 가진 종이라 할지라도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를 항상 살펴서 그것을 행해야 하는 것과 같다. 게다가 그들이 아무리 성령의 감화를 받아 열심히 하나님께 순종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육신 가운데 연약하며 하나님보다는 죄를 섬기려 하는 경향이 있다. 게으르고 고집 센 나귀를 채찍으로 쳐서 일어나 일터로 향하게 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율법이 우리 육신에 대해 한다.
요약하며, 율법은 신자들에 대한 권면이다. 그것은 저주로 신자들의 마음을 구속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권고에 의해 그들이 나태를 떨쳐버리게 하며, 그들의 불완전에 대해 항상 깨어 있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이러한 해방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있어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말했다. 율법이 신자들로 하여금 옳은 일을 하도록 더 이상 명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자들에 대해 이전과 같은 관계를 갖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사망의 메시지를 가지소거 그들을 놀라게 하고 겁나게 함으로써 그들의 양심을 정죄하고 파괴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선행을 신뢰하거나 자랑하거나 우리의 구원을 선행의 공로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며, 우리에게 준 바 되어서 우리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 그리고 하늘 왕국의 상속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사9:6; 살전4:14-18). 우리의 재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친절에 의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소망 속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부정과 죄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 안에서 정결하고 흠이 없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엡1:4).
I. 칭의(계속)
34. 만일 이러한 문제들이 지나간 시대에 제대로 취급되고 다루어졌다면 그토록 많은 소란과 잡음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거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을 세울 때 그리스도께서 닦아 놓은 기초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고전3:10 참조).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11). 이것은 어떤 종류의 기초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인가? 그가 우리에게 공로를 쌓을 기회를 주셨을 때 길을 여셨다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창세 전에” 우리 자신의 공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기쁘신 뜻대로”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이다(엡1:4-5). 그것은 우리가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저주로부터 구속되었으며 멸망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골1:14, 20) 그것은 우리가 아버지에 의해 아들과 상속자로 입양되었다는 것이다(롬8:17; 갈4:5-7 비교). 그것은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것이다(롬5:9-10; 9:11). 그것은 아버지의 보호로 말미암아 우리가 결코 망하거나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요10:28; 17:12). 이렇게 그이게 접붙여진 우리는 어떤 면으로 이미 영생에 참여한 자들이며 소망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들인 것이다(요1:12; 엡3:6-11; 1:7; 1:4; 딤후1:9).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그러한 참여를 체험함으로 비록 우리 자신은 여전히 우매하나 그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혜가 되시며, 우리는 죄인이나 그가 우리의 의가 되시며, 우리는 부정하나 그가 우리의 정함이 되시며, 우리는 약하나-우리가 무방비 상태로 사탄에게 노출되어 있는 동안-하늘과 땅에 있는 그분의 권세가 우리의 것이 되어(마28:18) 사탄을 쳐부수며 지옥의 문들을 박살 내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여전히 죽을 몸을 가지고 있으나 그가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롬8:34; 엡4:24; 2:1-5; 고전1:30; 골3:4). 한마디로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 안에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향한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 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기초 위에 세워져 가야 하는 것이다(엡2:21비교). 일단 기초가 놓인 뒤에는 지혜로운 건축자들이 그 위에 건축을 한다. 만일 교훈과 권면이 필요가 있으면 그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한다고(요일3:8-9), 또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다고(벧전4:3), 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 위해 더러운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딤후2:20-21)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3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원하신다는 말씀에서 모든 것이 영단번에 드러난 것이다. 자기를 부인한 사람은 모든 악의 뿌리를 끊어 버렸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은 모든 인내와 온유로 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마16:24; 눅9:23). 그러나 그리스도의 모범은 이뿐만 아니라 경건과 성결에 속한 모든 다른 의무까지도 포함한다. 그는 아버지께 자신을 드려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빌2:8), 그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온전히 자기를 드렸다(요4:34; 눅2:49; 요17:4). 그의 마음과 생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 있었다(요8:50; 7:16-18비교). 그는 자기 형제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놓았다(요10:15; 15:13비교). 그는 원수들에게도 선을 행했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만일 위로가 필요하다면 다음의 본문이 놀라운 위로를 준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빌2:5-8). “만일 우리가 그와 함께 죽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딤후2:11-12). 우리가 그의 고난에 참예하려 함은(빌3:10-11)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그러므로, “사망이나 생명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의해 사람을 의롭다 하지 않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난 모든 자들을 “거듭난” 사람(벧전1:3비교), “새로운 피조물”증거에 의해 그들은 자신의 부르심을 견고케 하며(벧후1:10) 또한 나무와 같이 그들의 열매에 의해 판단 받는다(마7:20; 12:33; 눅6:44).
36. 한 마디로 말해 이것이 어떤 불경한 자들의 뻔뻔스러움을 반박하기에 충분하다. 그들은 우리가 인간들에 의한 모든 선행의 추구를 정죄할 때 우리가 선행을 폐기한다고 비난하며, 우리가 사죄는 값없는 것이라고 말할 때 너무 쉬운 사죄를 설교한다고 비난하며, 이러한 유혹에 의해 이미 자기 스스로 죄로 기울어져 있는 자들을 유혹해서 범죄케 한다고 비난하며, 우리가 사람은 행위나 공로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선행을 위한 열심에서 돌아서게 한다고 중상한다. 이러한 거짓된 비난들은 앞에 말한 단순한 사실들에 의해 충분히 반박되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느 그러한 비난에 대해 간단한 답을 주겠다. 우리는 선행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선한 행실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바울도 그러한 행위들을 “하나님의 영의 열매들”(갈5:22)이라 말함으로써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처럼 선행의 공로를 하나님과 사람에게 분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 전부를 온전히 통채로 주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다. 선행에 있어 우리는 다만 다음의 것을 인간에게 돌린다. 즉, 인간은 자신의 부정에 의해 본래 선했던 그것을 오염시키고 더럽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아무리 완전하다 할지라도 그에게서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어떤 것이 나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께서 인간 행위 가운데 최선의 것을 심판하시게 하라. 그러면 그는 그것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의를 인정하실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는 인간들의 노력을 정죄한다. 즉, 우리는 인간이 가진 것이나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저주받은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에 의해 신자들의 마음은 놀라운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다. 그들은 이 선행들이 하나님에 의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자기들의 것이라는 교훈을 받는다. 동시에 그들은 그 행위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것이며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신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들 자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들에게 이러한 가치를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우리는 아무도 믿음 없이 어떤 일을 시도하거나 시작하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굳은 확신이 없으면 아무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실로 그들은 항상 선행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는 중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친절히 보여 주기고 그들의 행위에 대해 호의적으로 대하신다는 자신을 가질 수 있도록 양심을 훈련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값없는 사죄를 단언할 때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큰 가치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선행으로 그 값을 지불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값없는 선물로 외에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정말 그것이 값없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에게는 그렇지 아니했다. 그는 자시의 너무나 거룩한 피를 대가로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가치를 가진 대속물은 그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그들은 그의 보혈이 그들이 범죄할 때마다 쏟아진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의 더러움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 순결한 보혈의 샘에서 외에는 결코 그것을 씻을 수 없다고 말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듣는 자들이-만일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어떻게 제 마음대로 진흙 구덩이에 뒹굴면서 이 샘의 정결함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솔로몬처럼 신자들도 “나는 내 발을 씻었노라, 어떻게 내가 다시 그것을 더럽힐 수 있으랴?”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아5:3).
37. 이제 어떤 사람들이 값싼 사죄를 좋아하는가는 명백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배설물 같은 초라한 선행에 의해 달랠 수 있다고 믿는다(빌3:8). 우리는 죄책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그처럼 미미한 것들에 의해 용서받을 수가 없으며, 그것은 하나님을 대항한 너무나 커다란 과오이기 때문에 그처럼 무가치한 선행에 의해 사면될 수 없으며, 죄의 사면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의 특권이라고 단언한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공로를 쌓을 기회를 빼앗아 버릴 때 우리는 인간의 마음에서 선행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오도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보상의 소망을 제시하자 않는다면 인간들은 올바르게 사는 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그들의 말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단지 보상을 바라는 일이요 자기들의 노동을 하나님께 파는 일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운 경배와 사랑을 받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예배자는 보상의 모든 소망이 끊어졌을 때라도 계속해서 그를 섬기는 자들이다. 사실상 만일 사람들이 선행을 위한 독려를 받아야만 한다면 바울보다 더 날카로운 권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은 의를 위해 살기 위함이다”(롬6:4; 벧전2:24). 그는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우리 몸을 드려야 한다고 했다(롬12:1; 엡4:15).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이니만큼 우리 상호간의 직분을 통해 우리가 같은 몸의 지체임을 증거해야 한다고 말했다(고전12:25; 6:15,17; 12:12).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이며(고후6:16) 그리스도와 벨리알 사이, 그리고 빛과 어두움 사이에는 아무 일치점이 없다고 가는 말했다(고후6:14,15).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며(살전4:3) 우리가 불법적인 욕망을 삼가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은 것은 의의 종이 되기 위함이라(롬6:18)고 그는 말했다. 또 요한의 주장보다 더 효과적인 주장을 어떤 사랑의 권면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일4:11; 요3:10; 2:10-11). 그들이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자기 자신을 깨끗게 하느니라”는 것과 같은 말씀을 들을 때보다 더 강력한 성결에의 부름을 어디서 들을 수 있겠는가? 혹은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범으로 자기 자신을 제시하셔서 우리가 그의 발자취를 뒤따르게 하셨다는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강력한 부름이 어디 있겠는가(벧전2:21; 요15:1-10; 13:15 비교)? 사실 나는 이 몇 가지 성경 구절들을 단지 맛뵈기로 제시했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구절을 검토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다면 커다란 책을 한 권 써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쓴 글들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한 권면들, 책망들, 위로들, 독려들로 가득차 있는데(딤후3:16-17비교) 공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이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족할 것이다(마5:16).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히 나지 않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만 하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공로를 강조함으로써 율법에 대한 노예적이고도 강요된 순종을 요구하여 거짓되게 말하기를 우리는 그들과 동일한 길을 가지 않기 때문에 선행을 격려할 아무 근거가 없다고 한다. 마치 그러한 순종이 하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며,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내는 것을 금지하신다(고후9:7).
38. 성경은 아주 빈번하게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갚으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롬2:6-7; 마16:27; 고전3:8,14-15; 고후5:10). 결과적으로 아무도 우리 행위가 이러한 보상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늘 나라는 종의 삯이 아니라 아들의 상속이며(엡1:18) 오직 주님에 의해 양자가 된 자들만이 그것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양자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이유도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런 종류의 약속에 의해 우리 행위릐 가치를 인정하려 하신다고 생각하지 말자. 마치 우리의 선행이 그러한 상급을 가져다주는 공로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높아질 수 있는 어떤 이유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목적은 우리의 교만을 억제하고, 우리를 겸손하게 하며, 우리를 낮추어서 완전히 꺼꾸러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기대에 의해 지탱되고 위로를 받지 않으면 즉시 무너져 내릴 우리의 연약함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도움을 얻는다. 첫째, 모든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직도 이 첫 번째 교훈으로써 자기 제자들(마16:24-26), 즉 모든 신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그리하여 그는 일생을 통해서 십자가의 훈련으로 그들을 가르치심으로써 그들이 현세의 유익들을 바라거나 의지하지 못하게 하신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그들이 자기 눈을 돌릴 적마다 그들은 오직 절망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만일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고 말했다. 그들이 커다란 환난들 가운데서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 주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머리를 높이 들고서 멀리 내다보며 세상에서 그들이 보지 못하는 축복을 그분 안에서 발견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는 이 축복을 “상급”, “보상”, “상”(마5:12; 6:1등등)으로 부른다. 행위의 공로를 책정하는 대신 그것이 그들의 비참과, 환난과 받은 모략들에 대한 보상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어떤 것도 성경의 증거를 가지고서는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보상”이라 부르지 못하게 할 수 없다(고후6:13; g;10:35; 11:26). 왜냐하면 그 안에서 주님은 자기 자신의 백성을 수고로부터 안식으로, 환난으로부터 위로로, 슬픔으로부터 기쁨으로, 수치로부터 영광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는 그들이 겪은 모든 악이 변하여 더 큰 선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털끝 만치라도 행위에 공로를 돌린다면 그는 성경 전체를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다. 성경은 모든 공로를 하나님의 선하심에 돌리고 있다. 그러나 “공로”라는 말을 사용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욕하는 자이다. 확실히 그것은 하나님에 대항한 교만과 광포한 허영으로 충만한 것이다. 하나님은 보상과 상급을 약속하고 계신다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그의 지극히 큰 친절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결코 빚진 적이 없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재산에 대한 사용권을 부여받았다면, 그러한 배은망덕에 의해 그가 소요한 그 재산의 사용권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를 때, 그때도 그가 우리에게 면책의 특권을 베풀어 주시겠는가?

믿음
사도신경 해설 포함
A. 믿음과 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1. 방금 결론 지은 논의로부터 우리는, 주님께서 율법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제시해 주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빠뜨린다면 율법은 진노와 영원한 죽음의 무서운 심판을 선고하는 것이다. 한편 율법은 우리들이 그 율법의 요구를 다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는 것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그 일이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며 또한 우리의 모든 가능성 밖의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만을 돌아보고 우리가 지닌 가치만을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아무 선한 희망이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죽음과 하나님께로부터 내던져진 채로 당하게 될 틀림없는 재앙만이 우리 차지가 되고 만다. 이와 함께 우리는 또 앞에서 이같은 재앙을 피하고 우리를 더 나은 상태에로 회복할 수 있는 한가지 길이 있는데 곧 주님의 자비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이는 우리가 완전한 믿음 가운데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리고 그 안에 확고히 거하기만 하면 반드시 맛보게 되는 그런 것이다. 이제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남은 부분은 이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점인데, 우리는 이를 신경(소위 ‘사도’ 신경)으로부터 신속히 배울 수 있다. 이 신경은 공교회가 합의한 믿음의 요약이요 총체이다.
2. 논의를 전개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은 믿음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는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서술된 역사도 진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유형은 한 때 일어났던 일로 묘사되어 있는 일에 대해서나 혹은 우리가 스스로 그 자리에 있어 보았던 일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 “믿음”이라 부르기에는 부적절하다. 어떤 사람이 그런 것을 가지고 자랑한다면, 그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마귀들도 같은 믿음을 가졌지만(약2:19)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더 두렵게 하고 떨게 하며 엎드리게 한 외에 다른 아무것도 이루어 놓지 못했던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른 하나의 유형은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존재를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진실되게 인정하는 가운데 그를 신뢰하는 믿음이다. 이제 이 믿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되고 이야기되어지는 모든 것이 옳다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모든 희망과 신뢰를 한 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두는 일이며, 또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의를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는 마음으로 격려를 얻게 되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영혼의 소용을 위한 것이든 육신을 위한 것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사실, 그리고 성경이 그분에 대해 약속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 또 예수께서 우리의 그리스도 곧 구세주이심을 의심피 아니하는 사실, 이런 사실들로 인해 우리는 설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를 통해 죄의 용서와 성화를 얻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에 마침내 우리가 들어가기 위해 구원도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그의 거룩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제공하시며 약속하시는 온갖 일들의 핵심이요 총체이다. 이것이 그의 성경 가운데 우리를 위하여 세우신 목적이요, 이것이 그가 세우신 과녁이다.
3.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 믿음이 지향해야 할 목적이요 과녁이다. 또한 이 말씀은 믿음을 지탱하고 보조하는 기초로서 이것이 없이는 믿음이 설 수조차 없다. 그래서 이 참 믿음-종국적으로 “그리스도인”믿음이라 칭할 수 있는-이란 것은 마음의 굳은 확신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가 너무나 확실하여서 그분의 말씀으로 서약한 것을 이루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롬10:11). 바울은 이러한 믿음을 정의하여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 부르고 있다. 여기 “실살”(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이라는 표현을 통해 바울은 우리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지렛대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곧 믿음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일들의 확실하고도 분명한 소유라는 것이다. 반면에 바울이 또 한편 의도하는 바는 마지막 날에 속한 일들은(책들이 하나님 앞에 펼쳐질 때, 단7:10)우리가 지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일들, 또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일들보다 더 고매한 일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들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본성의 전 수용성을 뛰어 넘어, 우리 시야의 예민성을 세상 속에 있는 사물들 밖으로 초월할 때, 간단히 말해서 우리 자신들을 초극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바울은 희망 속에 놓여진 일들 곧 보이지 않는 것들을 소유할 수 있게 확보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다른 곳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소망은 소망이 아니요, 보는 것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롬8:24) 바울이 믿음을 나타나지 않는 일들의 표시요 증거(헬라어로 엥렝쿠스: 시위)라 부르는 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즉 나타나지 않는 일들의 증거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봄이요, 애매한 것들을 지각함이요, 없는 것들의 현존이요, 감추인 것들의 증거이다. 우리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신비들은 이렇듯 그 자체대로 그리고 그 본성 그대로 분별되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우리는 다만 그의 말씀 속에서만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 진실성에 대해 필히 설득되어진 나머지 우리는 그 모든 언급을 성취된 사실로 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이런 종류의 믿음은 앞의 첫 번째 것과는 너무도 차이가 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께 인정받지 않을 사람이 없지만, 반대로 그것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그를 기쁘시게 할만한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히1:6).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원하고 하나님께 구하는 그 무엇이나 얻게 되는데, 다만 그것이 우리를 더 큰 선으로 인도하는 것이기만 하면 무엇이라도 허락하신다. 하지만 이런 신앙은 잘못되고 왜곡되어 있으며, 그릇된 마음 속에는 그 자리를 가질 수가 없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아니고서는 시작될 수도, 지속될 수도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께서 율법의 첫째 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이다. 먼저 자신이 한 분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고서 이에 덧붙여 우리가 그 앞에서 다른 신들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분명하게 의미하는 바는, 그분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의 희망과 신뢰를 둘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희망과 신뢰는 그 분에게서만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희망과 신뢰가 다른 이에게로 향하게 되면 우리는 다른 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논의를 사도신경에 요약되어 나타난 믿음의 교리 쪽으로 계속 전개시켜 보자. 사도신경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 첫 세부분은 성삼위의 세 위격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각각 할당되고 있다. 이 성삼위 하나님은 영원하고 전능하신 우리의 한 분 하나님으로서 그분을 우리가 믿는 것이다. 네 번째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이 믿음이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이 무엇인지, 또 우리가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준다.
5. 그런데 만일 어떤 경건치 못한 사람들이 우리의 믿음을 뿌리채 뒤집어 놓기 위하여 기본원리들에 대하여 소란을 일으키고, 한 분 하나님이 삼위로 계신다는 우리 고백을 조롱한다면 그들의 불경스런 말을 재갈먹일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의 의도는 그런 궤변적이고 반역적인 사람들과 맞서 싸우고자 함이 아니라, 배우기 원하는 사람들을 손잡아 이끌어 주고자 하는데 있기 때문에 이제 나는 전열을 정비하여 싸울 차비를 차리자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믿음의 문제에 있어 따라야 할 것은 무엇이며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지적함으로써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열려진 귀를 빌려 그들이 굳건히 설 수 있는 기반을 가지도록 하고자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한 분 하나님을 가르친다. 많은 신들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신6:4)라 하였다. 성경이 성부를 하나님이라 하고 아들을 하나님이라, 또 성령을 하나님이라 말할 때 이것은 같은 성경이 애매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6. 우리는 단 한 가지 증거만 제시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한 가지는 천 가지와 맞먹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과 믿음과 세례 이 세 가지를 긴밀히 연결짓고 있어서, 이 하나로부터 다른 것으로 추론해 갈 수 있게 하였다(엡4:5). 한 믿음만이 있기 때문에 이 사실에서부터 하나님도 한 분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고, 세례가 하나이기 때문에 이 사실은 믿음도 하나일 것을 보여주다. 믿음이란 것이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거나, 여러 다른 것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만을 향한 것이고, 그 분과 연합하는 것이고, 그분과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실로부터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만일 많은 수의 믿음들이 있다면 하나님도 역시 많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또 한편 세례라는 것도 믿음의 성례로서, 그것이 하나이란 사실 때문에 우리가 그 일치 가운데 하나로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한 분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그 믿음을 고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믿음으로 세례를 받은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한 분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인데 이는 이 둘이 한 분 하나님께 속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상으로부터 따라 오는 것은, 우리가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세례 받도록 허락되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바,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세례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성경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아야 한다고 말할 때(마28:19) 이와 동시에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하나의 믿음으로 믿어야 할 것을 의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그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그분들에 대한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분들이 한 믿음으로 예배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이 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이밖에 다른 명백한 증거들을 볼 때도 세 위격의 한 하나님에 대해, 또 세 위격의 구분에 대해 따로 따로 주장하는 증거들이 많다. 유대인들이 “칭할 수 없는” 것으로 불렀던 이름도 예레미야서에서는(렘23:6, 33:16) 성자에게 적ㅇㅇ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7, 그러므로 이분은 성경 다른 곳에서 자기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8:11) 하시는 한 분 영원하신 하나님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태초에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1:1) 는 말씀이나 “아버지가 세상을 그를 통해 지었다”(요1:2)는 말씀, 더 나아가서 “그가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그 자신이 광채를 가지셨다”(히1:3,10)는 말씀 등은 성부와 성자간의 구분을 말해준다. 이런 사실은 보다 더 명확하게, 우리의 육체를 입고 오신 분이 성부가 아니요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아들, 그분이 우리에게로 내려와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에서 나타나고 있다(요17:5, 요16:28, 요15:3, 5, 7, 10, 15, 17, 25-28). 다른 선지서에 보면 둘이 동시에 표현되고 있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아버지는 아들을 “동료 또는 친척”(슥13:7, 국역은 “짝된 자”)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서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동료나 친척이 될 수가 없다. 한편 그가 동료라면 그는 구별된 개체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친교라는 것은 둘 사이가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는 성령이 하나님이라고 선포한다(행5:3-9). 요한복음에서는 10군데가 넘는 구절에서 성령이 그리스도와 다른 분임을 언급한다(요14:16, 25, 15:26). 바울은 그 누구보다 명백하게 이 모든 비밀을 설명해주고 있다(롬8:9-11). 여기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영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을 구별짓지 않고 언급한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 하나이라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한편 성령 자신이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라는 사실도 성립되는데 왜냐하면 그 아무도 그 자신이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라는 사실도 성립되는데 왜냐하면 그 아무도 그 자신의 영과 구별되는 경우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영이라는 말을 들어 트집을 잡고 있다(요4:24). 결국 그들은 “영”이란 말로써 성부 하나님 밖에는 다른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은 영이시란 말을 듣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란 말을 또한 듣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체적 본질이 영적이란 사실과 또한 그 같은 본질을 가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하는 사실에 있어서는 아무런 불일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때는 아버지로, 어떤 때는 아들로, 또 다른 경우에서는 성령으로 불리워졌다고 하면서, 이는 그분이 동시에 강하시면서 선하시고 영광스러우시면서 자비스러우신 사실을 보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쉽게 물리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들 수식어들이요, 그가 진정으로 누구이냐를 선포하는 것은 그 이름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궤변스럽거나 고집스런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라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하나님이심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아버지도 하나님이요, 아들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오직 한 하나님만이 계실 수 있을 분이라는 것 때문이다. 반면에 새 이름이 나오고, 셋이 묘사되어졌고, 셋이 구별되어졌다. 그러므로 하나와 셋이다. 한 하나님 한 본질이다. 그런데 왜 셋인가? 세 하나님이 아니가. 세 본질들도 아니다. 양면을 동시에 나타내기 위해 고대의 정통 교부들은 한 본질 (ousia)과 세 위격(hypostasis), 곧 한 본성(substance)과 그 한 본성 속에 세 요소(subsistence)가 있다고 표현하였다. 라틴 교부들은, 의미상으로는 희랍교부들과 모든 점에서 일치하는 가운데, 두 가지 이름만을 제시하였고 그 각각의 이름으로 어떤 차이를 표현하였다.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한 본질(one essence) 이 존재하시며, 세 위격(three persons, 말로써는 어떤 종류의 관계를 지적하고자 하였다)이 있다는 내용이다.
8. 이단자들은 우시아니 휘포스타시스, 즉 본질이나 위격이란 말들이 성경에서는 읽지도 보지도 못하는 말을 인간이 보안해낸 말일뿐이라고 짖어댄다. 그러나 한 하나님이면서도 셋으로 계신 분이 언급되고 있다는 우리의 확신을 그들이 흔들어 놓지 못하고 있는데, 성경에 의해 인정되고 인친 바 된 바로 그 내용을 설명하는 말들을 부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역겨운 일인가!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우리가 낯선 용어들을 뿌려 놓음으로 말미암아 불일치와 충돌의 모판을 만드니 보다는 성경의 범주 속에다 우리의 생각뿐만 아니라 말까지도 제한시켜 놓은 것이 좋겠다고 한다. 말들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싸우는 사이 우리가 진리를 잃어버리고 나아가서 사랑을 파괴하고 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자구 한 자 한 자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이라 해서 그것을 낯선 말이라고 한다면, 이는 성경의 직물로부터 떼어내지 않은 어떤 종류의 논의도 단죄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부당한 규칙을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낯설다”라는 말로써 어떤 교묘하게 조작되었거나 미신적으로 비호를 받고 있는 그런 것, 그래서 덕을 세우기보다는 더욱 혼란을 일으키는 것, 격에 맞지도 않고 열매도 없이 사용하는 것, 그 거치름으로 인하여 경건한 귀를 거스리게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의 단순성을 벗어나는 것, 이같은 것을 가리킨다면 나도 그들의 겸비한 태도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한 한 우리가 말하는 것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보다 덜 복종하는 태도로 대해서는 안되겠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고안해서 생각하는 것이 다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며 또 우리가 표현하는 말도 다 바보스러울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어떤 규칙은 있어야 한다. 즉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생각과 말의 법칙을 찾을 수 있어야겠다는 것이다. 이 잣대에 모든 마음의 생각과 입술의 말이 합치되어져야만 하겠다. 성경에서 우리의 이해를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 보다 명확한 말로써 표현하고, 이것이 성경자체의 진리를 충실히 섬기면서 또한 적절하고도 겸비하게, 또 잘못된 경우들을 피하여 사용되어지는 그런 말이 있다면 우리가 이를 사용하여 성경의 문제들을 설명하는 일을 금지할 것이 무엇인가? 근소한 예를 보자. 사람들은 때때로 믿음과 의에 대해 논의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못하다. 여기에 우리가 첨가시켜 생각해야 할 것은, 의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요,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의이지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의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가를 통해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가 그것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가 얻기만 하면 전가에 의해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다는 이 사실이 이렇게 간단하고 복잡스럽지 않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자들, 그 행위가 정죄 받은 자들 속에서 일하신다는 말이 있다. 이것도 어렵고 함축성이 많은 문제이다. 하나님이 죄의 조장자란 말인가? 악이 하나님께로 전가되는가? 불의가 바로 그가 저지르는 일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마음속에 상기 시켜야 할 것은, 한 동일한 사건 속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의 일과 의로우신 하나님의 일을 분간해 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악한 인간은 그 자신 속에 악의 뿌리를 가지고 있고, 스스로 악을 생각해 내고, 스스로 그것을 도모하고, 스스로 계획하고, 스스로 실행에 옮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의 행위 속에 있는 악과 죄를 그에게 다 돌려야 마땅하다. 그 사람은 의도와 의지와 행동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분이 뜻하시는 대로 때로는 휘게도 하고 때로는 가동시키기도 하면서 인간의 악한 의지와 도모를 조정하신다. 행복한 결과를 주기도 하고 힘을 더하기도 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의롭게 행하신다. 바로나 느부갓넷살이나 산헤립 등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능력을 비웃고 또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는 백성을 할 수 있을 만큼 핍박했다. 또 권리도 없이 그저 힘으로 타인의 재물을 탈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일으켜 이 모든 일들을 하게 하셨다(출9:16, 렘5:15). 하나님은 악한 뜻을 품고 악한 생각을 하는 그들을 돌이켜, 아니 차라리 그들의 악한 의지와 악한 의도를 이스라엘을 대항하도록 돌이켜서, 때로는 그의 백성의 경건치 않음을 벌주시고 때로는 그들의 구원을 이루기도 하셨다. 그래서 욥의 고난도 하나님의 사역이며 동시에 마귀의 사역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도 마귀의 불의를 하나님의 의와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은 연단코자 하시는 자를 마귀는 파멸시키고자 하였다(욥1:12, 2:6). 마찬가지로 앗수르는 하나님의 노의 막대였고(사10:5), 산헤립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끼였다(사10:15).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 불리워지고 일으켜지고 추진되어, 한마디로 모두가 그의 종들이었다. 하지만 왜? 그들 자신의 스스로의 고삐 풀린 욕망에 순종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의를 그들은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렘27:4-8). 보라! 하나님도 계시고 악한 사람들도 있어서 그들은 동일한 한 가지 일의 공모자다! 그러나 그 동일한 일 속에 하나님의 의가 빛나고 인간의 죄악이 비추인다. 이러한 구별을 통해 엉킨 고리가 풀리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소한 말장난을 가지고도 싸움질을 일삼는 궤변가처럼 이런 구별의 방법이 가지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나선다면 누가 그런 경멸스런 태도를 미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용어의 생소함에 대하여 트집을 잡는다면 그런 사람은 진리를 단순하고 명백하게 해주는데 대해 트집을 잡는 것이 되니 진리의 등불을 둘 자격이 없다고 판단을 받더라도 합당치 않겠는가? 이런 종류의 용서의 생소함(꼭 이렇게 불러야 한다면)은 진리를 자기 식으로 변경시켜 지워버리고 마는 잘못된 비판자들에 대항하여 옹호하는데 특별히 유용하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오늘날 진리의 적들을 격멸시키기 위한 우리의 위대한 노력들 가운데에서 숱한 경험을 맛보고 있다. 이들 빤질거리는 뱀들은 얼마나 비틀고 꾸불거리게 만드는지 만일 그들을 과감하게 뒤쫓아 잡아 내팽개치지 않으면 슬그머니 미끄러져 들어올 것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타락한 교리들에 대하여 여러 모양으로 투쟁하였고, 또 어떤 경건치 못한 자들이 그들의 오류들을 쓸데도 없이 늘어놓은 두터운 말의 외투 속에 감추고 진리를 교묘하게 변천시키려는 시도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 그들이 느끼는 바를 가장 명료하게 표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9. 아리우스라는 사람은, 명백한 성경을 반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으며, 또 자기가 올바른 일을 하기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같이 하는 척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가 창조되었으며, 다른 피조물들처럼 시작을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계속했다. 선인들은 이 사람의 꾸불꾸불한 술책을 그 은신처로부터 끌어내기 위해 한 걸음을 앞질러 가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이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고 선포했다. 그러자 아리우스주의자들의 불경이 끓어올라서 동일본질 (homoousios)이라는 말에 대하여 증오와 저주를 가장 사악하게 퍼붓기 시작했다. 만일 그들이 처음부터 진지하고 또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 고백했던 것이라면 이렇게 그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가지 작은 단어 때문에 아무리 열띤 논쟁이 불붙고 또 교회의 평화가 방해를 받았기로서니 누가 감히 그 고결한 사람들을 말장이니 궤변가들이라고 독설을 하였겠는가? 하지만 그 아무 것도 아닌 단어 하나가 순수한 믿음을 소유한 신자들과 거룩한 것을 짓밟는 아리우스주의자들 사이에 구분을 지어 주었던 것이다. 그 후에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라는 이름들은 빈 껍질과 같은 것으로서 어떤 차이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니라, 그 박에도 매우 많이 있는 하나님의 여러 다양한 속성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단 논쟁이 붙으면 사벨리우스는 자기도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아들을 하나님으로 또 성령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고 고백하곤 하였다. 그러나 차차 그는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강하고 의롭고 지혜로운 하나님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또 하나의 옛 노래 즉, 아버지는 아들이요, 성령은 아버지로서 계급도 없고 구별도 없다는 노래를 되풀이하였다. 이 사람의 사악을 흔들어 놓기 위해 마음에 경건을 품은 우리의 선인들은, 한 분 하나님 안에는 세 자질이 진정으로 확인되어야 한다고 크게 반박했다. 단순한 진리를 비비꼬는 속임수에 대항하여 자신들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은 한 하나님 안에는 위격들의 삼위일체가 존재한다고, 아니, 같은 말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일체성 속에 존재한다고 못박았다. 그러므로 만일 이런 용어들이 성급하게 고안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너무 성급하게 부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들이 다 묵혀지고 말더라도 모든 사람들 속에 이런 신앙의 일치만 이루어진다면 좋을 것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하나님이며 그러면서도 아들은 아버지가 이나요, 성령도 아들이 아니라는 것, 그들은 서로가 특별한 자질에 의해 구별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가 한편에서는 아리안주의자들을 대항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벨리안주의자들을 대항하는 동안에 이런 문제를 피항 기회가 단절된 것에 화를 내는 사이 그들은 자신들이 아리우스나 사벨리우스의 제자가 아닌지 하는 어떤 회의를 일으켰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창조되었고 또 시작을 가진다고 덧붙인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자기 추종자들의 귀에다 대고 은밀히 속삭이기를 그리스도는 다른 신자들이 그런 것처럼 연합되어져 있다고, 다만 유일한 특권에 의해 그렇게 된 것만이 다르다고 속삭이는 것이다. 여기에다 대고 당신은 “동일본질”이란 말을 해주라. 그러면 이 변절자의 가면을 찢어 밝히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 하여 성경에 없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벨리우스가 하는 말은 무엇인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하나님 안에 어떤 구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 대해서는 그분들이 셋이라고 말해주라. 그러면 그는 당신이 세 하나님을 부르짖고 있다고 고함을 지를 것이다. 다시 하나님의 한 본질 속에서 인격들의 삼위일체가 있다고 말해주라.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성경의 가르침을 한 마디에 담아서 표현하는 것이 될 것이며 말만 많은 빈깡통을 요절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이런 이름들을 참아내지 못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소란은 피우더라도 부인할 수 없는 내용에 대해 우리의 말을 적어도 용인하게 하라. 곧 우리가 “하나”라 할 때는 본질의 합일을 말하며, “셋”이라 할 때는 이 하나의 본질 속에도 세 자질들이 서로 구별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성경은 이 셋을 구별하고 있는데, 아버지에게는 활동의 시작 및 만물의 기초와 원천을 돌리고 있고, 아들에게는 활동의 지혜와 계획을, 성령에게는 활동의 능력호가 효율적인 사역을 돌리고 있다. 또한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이라 불리워지고 있는데, 이는 사람이 말하고 생각하듯이 하는 거싱 아니라, 영원하고 불변하며 또 성부로부터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오시는 것이다. 이는 성령이 “능력”, “손가락”, “권세”라 불리는 것과 같다. 이제 우리는 진리의 이 단순한 고백이 어떤 것인지 들어보기로 하자.
B. 사도신경 해설
첫째 부분
전눙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10. 이 고백에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신뢰를 두고 있음을 밝히는 것으로, 우리는 그분을 우리 자신들과 무릇 지음을 받은 모든 만물의 창조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 일은 그의 말씀, 그의 영원한 지혜(곧 성자)로, 그리고 그의 능력(곧 성령)으로 이루어졌다(시33:6, 104:24, 행17:24, 히1:2-10). 그리고 그가 한 번 이루신 일을 지금도 유지하고, 보양하고, 활동케 하고, 보존하되 그의 선하심과 능력으로 하여, 만물이 즉시 허물어지고 무(無)로 떨어지는 것을 피하게 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그를 전능하시며 만물의 창조자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의 권능을 생각해야만 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분은 모든 것 안에서 만물을 역사 하신다. 그리고 그의 섭리를 생각해야만 하는데 이것으로써 그는 만물을 조정하신다(고전12:6, 애3:37-38). 그러나 이것은 궤변가들이 몽상하듯이 공허하고 어리석고 게으른 그런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이든지 행복하든 슬프든, 순경이든 역성이든, 몸에 속한 것이든 영에 속한 것이든 모두가 그분께로부터 오는 것을 인정하고(죄만이 예외이다. 죄는 우리들 스스로의 사악함에 기인한다) 또한 그분의 보호로 인해 우리가 안전하고, 방어를 받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어떤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도 보존되고 있음을(호13:14) 인정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분께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은 무엇이나(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의 손으로부터 받으니까)우리의 행복으로 이끌지 않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비록 일들이 때로는 잘되는 듯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역경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말이다(롬8:28). 실제로 이 모든 일들은 그분에 의해 우리들에게 되어진 일인데 이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나 또는 하나님이 그의 은혜를 빚질만한 어떤 공적이 있어서도 아니며, 그의 자비에 견줄만한 어떤 상대적 보상을 그에게 제시하기 때문에도 아니다. 다만 그가 우리를 대하시는 것은 당신의 아버지 같은 친절과 자비를 통해서이며 이 모든 일의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의 선하심이다. 그 때문에 우리가 그 크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기를 잊지 말아야 하며, 우리 마음으로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우리 입으로 그것을 선포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합당한 찬양을 돌려야 마땅하다. 우리가 그러한 아버지를 감사하는 경건과 타오르는 사랑으로 존경하여 그를 섬기는 일에 전념하고 또 매사에 그를 높이어야겠다. 뿐만 아니라 모든 역경들까지도 조용하고 화평한 마음으로 받아, 마치 그분의 손으로부터 오는 것인 양 받아들이고, 그의 섭리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또 그것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억누를지라도 우리 구원을 계속 생각해야겠다(욥2:10). 그러므로 마지막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간에 우리는 의심치 말고, 자애로우신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잃지 말고, 또 마찬가지로 그가 주시는 구원을 기다리며 살아야겠다. 우리가 사도신경의 이 첫 부분에서 배우는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란 것은 전적으로 확실하며 또 참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둘째 부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시며, 지옥에 내려 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11. 이 부분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내용은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바 우리가 그분을 덮는다는 것이다. 그는 아들이시되 신자들처럼 입양을 통해 은혜로 된 아들이 아니라 본성으로 그러하시며 영원부터 성부에게서 나셨다. 우리가 그를 “외” 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그를 다른 모든 이로부터 구별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이신 한 그는 아버지와 하나인 하나님이며 동일한 본성과 본질을 가지시며, 위격에 있어 차이가 있는 것은 아버지로부터는 구별되는 그 자신 고유의 것을 가지시는 것이다(시100:3 상). 이 점에서 인간의 지혜로부터 나오는 것은 무엇이나 여기에 복종해야하며 말하자면 포로가 되어야 함이 옳다. 유치한 호기심으로 캐묻는 것이나 또는 망설이는 것이 모두 그토록 신비로운 일에 대한 예배에로 이끌어 가지는 못 할 것이다. 이 신비는 인간의 모든 이해력을 훨씬 추월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 점에 대해서 성경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떠나 우리 마음이나 경험으로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기 위해 이단자들의 예를 통해 두려움의 마음을 갖도록 하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해 속에서 사치를 누리러 하는 사이에 극심한 위험으로 치달아 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이신 하나님은 성부와 하나이며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참 하나님이요 천지의 창조자로 받들어야 한다.
우리가 성부에 대해 우리의 모든 신뢰를 이루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자에 대해서도 그러하여야 마땅한데, 이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성부는 그의 자질의 구별 때문에(앞서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천지의 창조자라 특별하게 불리워지고 있는데(히1:2,10) 이 때문에 활동의 시작은 아버지께 돌려지고 있어서 그가 친히 스스로 행동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분은 말씀과 그의 지혜를 통하여, 그리고 그의 능력 안에서 그렇게 하신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세 위격의 공동 활동이 있었다는 사실은, 성부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라고 말씀하신데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는 천사들과 의논한 것도 아니요 그 혼자 중얼거린 것도 아니며 다만 그의 지혜와 능력께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12.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아버지께로부터 그의 친절과 자비로 인하여 보내지셨다는 것,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꽁꽁 묶여있던 죄의 멍에로부터 풀어주려 오셨다는 것, 우리가 빠져 있던 육신과 영혼의 죽음의 속박에서 풀어주려 오셨다는 것, 우리가 떠넘겨져 있던(우리 능력이 자신을 그것으로부터 풀만큼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영원한 형벌로부터 우리를 풀어주러 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또 그가 아버지의 친절과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육체를 입기 위하여 내려오셨고 이를 그의 신성에 합하셨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중보자로 오신 분이 참 신이요 인간이란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되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구름으로 가려 만사가 다 흩어져 버렸을 때 누가 하나님께 이를 수 있을 것인가?(사59:2) 사람이? 하지만 모든 사람은 그의 조상 아담과 함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두려움에 놀라 떨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천사가?(창3:10-12)그러나 그들조차도 하나님께 속하기 위해서는 한 머리가 필요했다(골1:16-20, 엡1:21-23). 그렇다면? 이 문제는 하나님의 위엄이 우리에게로 내려오시지 않는 한 희망 없는 문제였다. 우리편에서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되시었다(사7:14). 한편 우리의 비천함이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엄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 하여도, 또 그와 함께 거하시고 그와 더불어 현존하신다 하여도 그 사실을 충분히 믿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충분히 느낄 만큼 가까이 계심이나 충분히 느낄만한 굳은 관계는 그가 그의 신성을 우리에게 합하시고, 우리의 인간성을 또한 그의 신성에 합하시는 일 밖에는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분을 중보자로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강조하여 그를 “사람”이라 칭하였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바울은 “하나님”이라고 강조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하나님”이란 말을 쓰지 않은 것처럼 이 말도 빼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는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에서 중보자를 찾아야 할지, 또 우리가 어떻게 그에게로 갈 수 있을지 어느 누구라도 곤란을 겪지 않도록 하려고 곧 이어서 “그는 사람이라”고 덧붙이는 것이다. 이는 마치 “그는 너의 가까이 있고 정말 너는 만지고, 또 그는 너의 육체 그대로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점에 대해 그는 다른 곳에서 보다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이 중보자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곧 사람의 자식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일, 지옥의 상속자들을 천국의 상속자로 만드는 일이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아들이 되지 않고서는, 그래서 우리의 것을 취하시고 그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서는, 또한 본성으로 그의 것을 은혜로 우리의 것 되게 하지 않고서는 누가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적 아들이 우리의 몸으로 그의 몸을 삼으시고, 우리의 살로 그의 살을, 우리의 뼈로 그의 뼈를 삼으사 우리와 하나가 되려 하셨다는 이 사실에 우리의 소망이 달려 있는 것이다(창2:23-24, 엡5:29-31). 우리의 것인 것을 그 자신에 속하도록 뜻하심으로써 그의 것인 것을 우리에게 속하도록 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 이 둘이 우리에게 공통적인 것이 되도록 하셨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천국의 기업은 우리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독생자가 그의 완전한 기업이었던 것을 그의 형제들로서 우리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롬8:17). 나아가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실 분이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란 사실은 바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그분의 임무는 죽음을 삼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생명 자체가 아니고서는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또 죄를 정복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러나 의 자체가 아니고서는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하나님만이 아니고는 누가 생명이요 의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자비로운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셔야겠다고 뜻하셨을 때 그분 자신이 우리의 구속자가 되신 것이다(비교, 롬 5:8). 우리 구속에 대한 또 다른 항목은 이것이다. 즉 사람이 그의 불순종으로 인해 잃어진 바 되었는데, 이제 순종을 통해 그의 혼돈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케 하고, 죄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이에 따라 우리 주님께서 오셨는데, 참 사람으로 오셨다. 그는 아담의 인격을 취하시고, 이제 사람을 위하여 아버지께 순종하시고, 우리 몸을 입어 아버지의 정의를 만족케 하시고, 우리의 몸 가운데서 죄의 값을 지불하셨다.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신성이든지 그의 인성이든지 어느 하나라도 빼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엄을 욕하는 것이거나 그의 선하심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우리의 신앙 속 이 기초 위에가 아니면 설 수 없는 이 신앙을 약하게 하거나 내팽개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1:14). 하나님이신 그가 인간이 되어 동일한 한 분이 사람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되셨는데 이는 본질의 혼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격의 합일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13. 이 점을 우리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의 예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그 두 부분으로 다른 한 쪽과 혼합되어서 그 자체의 구별적 특성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영혼은 몸이 아니며 몸도 영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들을 독단적으로 영혼에 대해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육체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 있고, 또한 육체에 대한 것이 영혼에 맞지 않는 것도 있다. 전 인간에 있어서는 영혼이나 육체에 각각 따로 언급될 수 없는 것도 있다. 결국 영혼의 특성이 육체적인 것으로 바뀌기도 하고, 육체의 특성이 영적인 것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사람은 한 사람 이상이 아니라 바로 한 사람이다. 이런 표현이 암시하는 것은 사람 속에는 한 본성이 두 요소가 서로 결합된 채로 존재한다는 것, 또한 동시에 이 한 인격을 구성하는 두 개의 상이한 본성들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독단적으로 그의 인간성에 대해서만 언급되어져야 할 것이 있고, 또 때로는 그의 신성에만 특별히 해당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때로는 양 성격을 다 포용하되 어느 하나에 대해서만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결국 “속성의 교류”를 통하여 그의 인성에 속한 것을 신성에 돌리고, 또 그의 신성에 포함되는 것들을 그의 인성에 돌리게 된다. 이런 말들은 성경에서 명백한 예들을 제시해 주지 않으면 의미 없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인성과는 거리가 먼 말이다. 아브라함 이후 수세기가 지나기까지 그는 인간이 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특히 그의 신성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의 종”(사42:1, 기타 다른 구절들)이라 불린 것이다. 그가 “나이와 지혜가 자라갔다”(눅2:52)는 말, 그리고 그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요8:50)는 말 등은 그의 인성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그가 하나님이신 한에서는 성부와 동등하며, 자랄 수도 없으며, 또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해당하지 않고, 동시에 양자에 다 해당되는 예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죄를 사하는 권세를 받으셨다는 것, 죽은 자를 살리신 것,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로 임명되신 것(눅5:20-24, 요5:21, 6:40-54, 행10:42)등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육체를 입고 나타나설 때 그 같은 특권을 부여받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 권세들을 그는 아버지와 함께 가지며(벧전1:20) 세상의 창조 이전에 가졌으며(엡1:4)그리고 이런 것들은 사람일뿐인 자에게는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이런 형태에 대한 본문들이 많이 있다. 신성이나 인성 어느 한쪽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나타났다고 해야 알맞는 그런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의 글 중에 나타나는 말 즉 “그리스도는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것이라”(고전15:24)고 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러나 그는 낮아지신 후 영광과 존귀로 관쓰시고 모든 것 위에 계심과 같이, 꼬 마찬가지로, 그가 자신을 비우고 자기를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 드린 후에 그는 높여지셨고 그 앞에 모든 무릎이 끓을 이름을 받으셨다(빌2:8-10). 그리하여 그때에 그는 그 이름 자체와 또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은 그 무엇이나 아버지께 드려서 하나님이 모든 것 가운데 모두가 되게 하셨다(고전 15:28). 특성 혹은 속성의 공유는 바울이 한 말 속에도 나타났는데 곧 “하나님이 그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행20:28) 또 “영광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전2:8)는 표현이다. 그러나 참 신이요 참 인간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피를 흘리실 때 그가 인간 본질 가운데서 행하신 일이 신성으로 전환되었다. 한편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고 하신 것도 그가 신체상으로 하늘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자아동일한 한 분이 동시에 하나님이며 사람이기 때문에, 양 본성의 합일을 위해서, 그는 한쪽에 속하는 것을 다른 쪽에 주셨다. 내가 이 문제를 더 철저하게 파고드는 이유는 어떤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의 한 인격 속에 양 본질의 속성들이 있다는 것을 도무지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도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요 또 사람이요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더 추궁해 들어 가보면 그들이 “하나님”이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고 말하는 것은 그가 성령으로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옛날에 마니교도들도 동일한 몽상을 하고 있었다. 즉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영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 근거는 “하나님이 사람 위에 생명의 숨을 쉬셨다”(창2:7)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오류를 방어하기 위해 소리를 높여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며(롬8:32) 또 처녀에게서 날 자가 “지극히 높은 이의 아들”이라 불리울 것이라고 천사가 고지하였다는 것이다(눅1:32). 분명히 우리는 두 그리스도를 만들지 않았다. 우리가 단순히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인 그가 우리 육신을 취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이신 동일한 그리스도요, 하나님이며 또 사람이신데 그의 양 본성이 합하기는 하나 혼합되지는 않았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이 자기의 잘못된 반대(이것을 가지고 우리를 대항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을 따라서만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는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가 처녀의 몸에서 난 사람으로서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칭하여졌기 때문이라는 사상을 찬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통해 그들이 올바른 것을 배우게 하자. 선지자의 말씀 중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5:2, 마2:6) 그들은 바로 이 그리스도 곧 베들레헴에서 나신 분이 “영원한 날로부터 나오신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가? 하지만 우리가 “날의 영원성”을 바라본다면 그리스도는 아직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다. 즉 하나님의 아들만이 계셨고 그가 후에 그리스도가 되어싿. 히브리서의 기자도 그렇게 말한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 틀림없는 사실은,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볼 때, 그를 통하여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면, 그는 인간이 되기 전에 먼저 아들이라 볼 때, 그를 통하여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면, 그는 인간이 되기 전에 먼저 아들이시었다. 요한도 “만물이 말씀을 통해 지어졌다”고 말하며(요1:3), 그 사도도 “아들을 통하여”라 말한다(히1:2).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 두 칭호를 명백히 분리하는데 이는 이런 구분은 반대하는 것은 완고함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무지의 표시라는 것을 보여주려 함이다. 먼저 그가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인데,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형통에서 나셨고,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1:1-4)하였다. 여기서 바울이 육신으로 다윗의 아들이라고 구별해서 지칭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육신을 따른 것이 아님을 표명하고자함이 아니겠는가? 다른 곳에서도 그는 말하기를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9:5)하였다. 이제 그리스도가 “육신으로는 아브라함의 씨"라 불리우고 있지만 육신을 넘어서는 ”세세에 찬양 받을 하나님“이라 한 이 선언보다 더 명백한 것을 어떻게 그들에게 보여 줄 것인가? 다시 한번 내가 확인해 두고 싶은 사실은, 우리는 한 분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것을 부인하지 못하며, 또 그의 신성을 그의 인성에서 찢어 내지 못하고 다만 둘을 구분할 뿐임을 밝히고 싶다. 이러한 표현들은 이 큰 비밀을 정당히 대접하여 경건히 다루고 있는 건전한 주경가의 손안에서 아름답게 일치를 보도 있다. 그러나 정신이 나가서 광적이 된 저 못된 영들이 요란을 떨지 않고 고이 모셔 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속성들만을 그의 신성에서 떼어내어 붙들고 있다. 또 그의 신성만을 인성에서 떼어 내어 붙들기도 한다. 또는 양 본질에 속한 것이 너무나 혼합되어 있어서 각각이 서로 교류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둘을 동시에 떼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같이 해서 남는 결과가 무엇인가? 결국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니다. 또는 그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니다. 또는 그는 동시에 사람과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다. 이런 말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가 참 육신을 취하셨을 때 또한 사람이 되셨다.
14. 예수께서 아버지의 음성으로 또 하늘의 신탁으로 칭하여진 것과 같이(눅1:30-35, 2:21) 우리도 그를 진정으로 그러하다고 믿으며 또 이 이름이 “우리가 그 안에서 구원을 얻도록 사람들에게 주신”(행4:12) 이름인 줄로 믿는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의 모든 은혜와 함께 뿌려진 것을 믿는다. 이 은혜가 “기름”이라 불리워진 것은(시45:7, 89:20)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시들어 가고, 마르고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의 위에 머무시고, 그의 충만함으로부터 우리가 모든 것을 받도록 하기 위해(다시 말해 우리 누구나가 믿음을 통해 그의 짜기 되고 동참자가 된다) 성령을 그의 위에 다 쏟아 부으신 것처럼(사11:1-5, 61:1-3, 요1:16), 우리도 또한 믿는 것은, 이 기름부음을 통해 그가 아버지로부터 왕으로 임명되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스리고(시2:1-6), 또 그 안에서 우리도 왕이 되어 마귀와 죄와 죽음과 지옥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을(벧전2:9, 행0:36) 믿는 것이다. 또 우리가 믿는 것은 그가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아버지의 노를 풀고 우리를 그와 화목케 하기 위한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것과, 그 안에서 우리도 제사장이 되어, 우리의 대도자요 중보자인 그와 함께,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감사와, 우리 자신과, 우리 모두를 아버지께 드리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계1:6, 시110:1-4, 히 5:1-10, 13:15-16).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에 의해 우리 위에 계시도록 되었을 때, 우리는 그분을 유일한 주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성처녀의 태 속에서 성령의 놀랍고도 말 할 수 없는 능력으로 잉태되었음을 믿는다(눅1:26-38, 2:17). 우리의 구원을 이룩하기 위하여 죽은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비참한 죽음에 그의 몸을 넘겨주시고, 그의 피를 구속의 값으로 쏟으셨다(참고. 마26:28, 엡1:7). 더군다나 그는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 당하시고, 죄수요 행악자처럼 심판관의 인도를 받아 정죄되었는데, 이는 그가 정죄 받으므로 우리가 가장 높으신 심판자의 신판대 앞에서 죄를 면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십자가에서 못박혔는데, 이 일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저주받을 일로 나타나신 바, 그는 우리의 죄가 받아야 할 우리의 저주를 짊어지신 것이다(신21:22-23, 갈3:10). 그는 죽으셨다. 이는 그의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죽음을 정복하기 위함이며 또한 우리를 삼키도록 된 그 죽음을 삼키기 위함이다(호13:14, 고전15:54). 그는 묻히셨는데, 이는 그의 은혜로써 우리가 죄에 대해 묻히고, 마귀와 죽음의 지배에서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함이다(히2:14-15, 롬6:4).
15.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고통을 받아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과 격심함을 느낌으로 말미암아(시21:9) 하나님의 진노를 중재하고 우리의 이름으로 그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함이며(사53:4, 11), 그리하여 우리의 빚을 지불하고 형벌을 제거하시되 그 자신의 죄(결코 있을 수도 없는) 때문에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그같이 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언제나 그에게 대하여 노를 바라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되겠다. 어떻게 그가 자기 사랑하는 아들, “내가 기뻐한다”한(마3:17) 그 아들에 대해 항상 노하실 수가 있겠는가? 아버지가 그를 원수로 여기신다면 어떻게 그가 중보의 일로 아버지의 노를 가라 앉힐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격심함의 무게를 지셨다고 말하는 것을 그 순간 그가 원수와 같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채찍을 맞고 징계를 받았”으며(참고, 사53:5) 또한 노하시고 복수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표시들을 다 경험하셔서 깊은 고뇌 가운데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22:1, 마27:46)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도록 까지 되셨기 때문이다.
“그가 지옥에 내려갔다”는 말은 명백하지만 그러나 어떤 특정한 장소에(“림보”라는 말이 이를 위해 만들어졌다)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구약시대에 살았던 조상들이 감금되어 있으면서 속박과 포로로부터 놓여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거기에 가서 그 문들을 힘차게 깨뜨리고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위대한 저자들에 의해 반복되어져 왔고, 또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진지하게 옹호되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구절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3:19). 사람들은 이 구절을 들어서 앞의 이야기를 보존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여기서 뜻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구속의 능력은 그 이전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에게도 비쳐지고 또 분명히 나타났다는 사실일 따름이다. 그로부터 올 구원을 항상 기다리며 살았던 신자들이 그 때에 분명히 그리고 얼굴을 맞대고서 그의 방문을 맞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버려진 자들은 그리스도가 그들의 유일한 구원이란 사실을 너무 늦게 알게됨으로써, 이미 구원에서 제외된 상태에서, 더욱 더 자기들에게 아무 희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경건한 자라 불경한자들을 구분하지 않고 그들이 함께 감옥에 있었다고 말하는 사실을 두고서 마치 경건한 자들도 그런 속박 속에 갇혀 있었다는 듯이 이해해서는 안되겠고, 다만 그들이 그리스도를 멀리서, 희미하게 구름 속에 가리운 채, 아직도 완전히 다 보여지지 않은 채로 바라보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겠다. 이런 간절한 기다림을 “감옥”이라 부른 것은 일종의 비유적 표현인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품 속에 있다고 증거한다(눅16:22-23, 계6:9-11). 그들은 이미 안식과 고요 속에 있는데 이런 상태는 그들에게 있어서 복락의 시작인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안에 살아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또 그분께 나뉠 수 없이 붙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복된 부활의 날을 기다리는 중에 특별한 위로를 받은 것이다. 비록 지옥에 내려갔다는 이 부분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 생략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것이 결코 필요 없는 부분은 아니며, 가장 커다란 일들에 대한 가장 큰 비밀을 포함하고 있다.
16. 나아가서 우리는 “제삼일에 그가 죽은 가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믿는다. 여기 죽음이란 여느 사람이 자연법칙 아래에서 죽는 그 꼭 같은 죽음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한 참 인간이 되어 이제는 더 이상 죽을 몸이 아니며, 몸과 영을 받되 부패되지 않고 영화된 상태임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죄의 죽음에서 일으켜 의롭게된 상태에서 생명과 의의 새로움을 얻게 한다고 믿으며(롬6:4). 또 마찬가지로 같은 죽음을 거쳐간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일으킴을 받을 것을 확신한다. 이는 그의 부활이 가장 확실한 믿음이며 우리 사람의 부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고전15:13, 행1:22).
17. 우리는 “그가 하늘로 승천하신 것”을 믿는다. 이 승천으로써 그리스도는 아담 안에서 닫혀져 있었던 천국에의 입구를 우리에게 열어 주신 것이다(요14:1-3). 진정 그는 우리의 육신으로 하늘에 들어가셨는데 이는 마치 우리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신 것과 같아서, 이미 우리가 소망 중에 이 천국을 그분 안에서 소유하게 되었고, 이제 후에는 천상의 존재들 사이에 우리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히2:10, 13, 엡1:3, 2:6). 우리는 또한 그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가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믿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이제 왕과 심판자와 만유의 주로 임명받고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도 예외 없이 그의 주권에 복속되어서, 이제 그의 능력으로 영적 은사들을 우리에게 베풀 수 있게 되었다(고전15:27, 히2:8, 엡4:8).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성화시키시고, 우리 죄의 오물을 씻기시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되 우리가 죽음을 통하여 그에게로 나아갈 때까지 하실 것인데, 이 죽음은 우리 불완전의 종점이 될 것이며 우리 축복의 시작이 될 것인 바, 우리가 이 축복을 그 안에서 받아 그의 나라와 영광이 우리의 저주요 능력이요 지옥을 이기는 승리가 될 것이다. 이제 그가 아버지 앞에 계신 거이 우리를 위해 큰 유익이다. 이는 그가 거기에서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 앞에 나아감을 앋게 하며, 그 길을 닦고, 우리를 그분께 드리며, 그로부터 우리를 위해 은혜를 요청하시며, 우리의 영원한 지원자요 중보자로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우리 죄를 위해 중보기도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끊임없이 화해시키고 계시기 때문이다(히7:24이하, 9:11이하, 롬8:26~27, 요일2:1). 그러므로 그가 비록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우리의 시야로부터 그의 몸을 감추셨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는 신자와 함께 있어 도움과 힘이 되시고 또 그의 현존의 분명한 능력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또한 그는 약속하셨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마28:20).
18.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가 내려오실 것”을 믿는다. 그가 올라가실 때 보이셨던 그 모습대로(행1:11, 마24:27, 44).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에게 일시에 나타나실 때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수 있는 위엄으로 하늘로부터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내려오실 것이다. 그때에 아직도 살아 있는 자와 이미 죽어 데려간 자들 모두를 심판하실 것이다(살전4:14-17, 마16:27-28). 그들 모두에게 그들의 업적을 따라 신실했든지 혹은 신실치 못했든지 그 나타나는대로 그가 갚아줄 덕이다.
19. 그러므로 우리 구원의 전체와 또 그 부분들이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집약되어 있음을 보게 되는 고로, 우리가 우리 구원의 가장 작은 한 부분이라도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생각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하겠다. 그리스도 안에만 하늘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에게만 모든 기대를 거는 자들이 무슨 선한 일이든지 충만히 이루어질 것을 바랄 수 있다. 진정으로 이 모든 일들이 그로부터 우리에게 의심할 바 없이 오는 것이라면,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서 그의 말씀으로부터 그것들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선한 일의 어떤 부분에라도 참여치 못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셋째 부분
성령을 믿사오며
20. 여기서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지만 더욱 더 그 분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계시고, 또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이며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본질이며 함께 영원하며, 전능하사 만물의 창조자이란 것을 믿는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세 구별된 위격이 계시지만 본질은 하나이다. 이는 깊고 감추어진 신비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성이나 우리의 혀가 자연으로나 능력으로나 이 신비들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들은 탐구되기보다는 오히려 경모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와 그의 외아들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신뢰를 두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동일한 신뢰를 이 성령계도 돌려야겠다. 그는 참으로 우리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이시다. 우리가 인정하되 사실은 아버지께 이르는 그리스도 외의 다른 길리 없듯이 다른 지도자나 인도자가 우리에게는 없다. 또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은혜도 오지 않는다. 은혜는 그 자체가 성령의 능력이요 활동이다. 은혜를 통해 성부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모든 선한 일을 이루신다. 은혜를 통해 그는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며 또 우리를 씻기시고, 그에게로 불러 가까이 가게 하셔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신다(롬8:11-17, 엡2:18, 고전12:1-13). 그러므로 성령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 속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그의 빛으로 비추어 주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부요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지 배우고 또 명백히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고전2:10-16, 고후13). 그는 우리의 가슴속에 하나님을 향하여서와 또 이웃을 향하여 사랑의 불이 일도록 하시며, 또 날이면 날마다 우리의 과도한 욕망으로 일어나는 악을 소멸하셔서(롬8:13). 만일 우리 속에 어떤 선한 역사라도 있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은혜의 열매요 능력인 것을 나타내신다. 그를 떠나서 우리가 빚어내는 일이란 모두가 지각의 어두움과 마음의 타락일 뿐이다(갈5:19-21). 성령의 이런 은사들은 우리의 어떤 의무나 공적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써 자유롭게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분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우리의 한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서, 또 우리가 거룩한 복음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그 믿음 위에 굳게 서 있기 때문에, 이 사역과 능력이 그의 것인줄 확실하고 굳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사역은 거저 주시는 것이므로 아무 것도 우리의 공적에 돌릴 수 없다. 이러한 일들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꼭 같이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모두를 위한 믿음이어야 함이 마땅하다.
넷째부분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통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21. 먼저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 다시 말해서 선택받은 자의 전체수, 천사들이나 사람들(엡1:9-10, 골1:16), 사람들 중에서는 죽은 자이든지 아직 살아 있는 자들, 산 자들 중에서는 어느 땅에 살고 있든지, 또 어느 민족 속에 흩어져 있든지 간에 이들이 한 교회요 사회이며, 하나님의 한 백성인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는 이 모두의 지도자요 통치자이며, 한 몸의 머리이며,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을 통해 그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기초가 있기 전에 택하심을 입어(엡1:4) 모두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모이도록 하셨다. 이제 이 사회는 보편적이요 다시 말해서 우주적인데 이는 둘이나 혹은 세 교회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모든 택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가 되고 연합되어져서(참고, 엡1:22-23) 그들이 한 머리에 붙어 있는 동안 한 몸으로 함께 자라며, 함께 결합되고 짜여져 가는 것이(비교, 엡4:16) 한몸의 지체들과 같다(롬12:5, 고전10:17, 12:12, 27). 이들은 한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또 하나님의 한 영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기업에로 부름을 받아 함께 살아가는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진 것이다. 교회를 또 거룩하다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 선택되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 들여져서, 이 모든 이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기 때문이다(요17:17-19, 엡5:25-32).
22.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의 이 순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그가 자기 사람들을 그에게로 이끄실 때는 그들을 부르신다. 그러면서 자신을 보여 주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의 옷을 입혀 의롭다 하시는데, 이 의의 옷이 그들의 환전이 되게끔 꾸미시고 또 본래 그들의 불완전을 엎어 감추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육체의 부패를 매일 매일 씻는 자들을 그는 성령의 축복들로써 소생시켜 그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며, 마침내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흠 없이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왕국의 위엄이 모든 것 속에 그리고 만물을 통하여 나타나게 될 때에 그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님은 자기 사람들을 불러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때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작정하셨던 그의 영원한 선택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영광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랄 것 없이 이러한 방식으로 부름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이런 방법을 통해 그가 택하신 모든 사람 가운데 그의 선택을 이루시고 나타내시는 것이다. 성경은 가끔, 우리의 이해력에 맞추기 위해, “하나님의 선택”을 이 부르심과 칭의로써 이미 드러난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은 가끔 택함을 받은 자가 아닌 자에게는 그의 능력을 보여 주신 그런 예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정으로 선택받은 자가 아직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백성의 숫자에 계산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롬9:11, 25-26, 10:20, 11:7, 24, 28: 호2:23).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유일하고 불변적인 섭리를 언급하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자녀들 즉, 성령으로 감화 받은 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롬8:1,14).
23.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요10:28), 진정으로 그 일관된 자들은 결국 소멸된다거나(요10:28) 또는 나쁜 결과를 맞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구원은 너무도 확실하고 견고한 터전 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이 세상의 모든 구조가 허물어진다 하더라도 그 구원은 흔들리거나 쓰러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은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과 더불어 서 있으므로 신자들이 비툴거리거나 심지어 넘어진다 할지라도 서로를 대하여 충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을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사라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고 한 말도 그런 뜻이다. 주께서 택하신 자들은 그의 아들 그리스도의 보호와 지키심이 넘기워져서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39이하) 한 말씀대로 이룰 것이다. 그분과 같이 좋은 보호자 아래에서(참고, 고후4:9)그들은 방황하고 넘어질 수는 있을지라도, 결코 잃어버려질 수는 없다. 그밖에도, 세상의 창조 이후로 주께서 땅위에 그의 교회를 가지지 않은 때가 없을 것인데, 이는 그가 친히 약속하신 대로이다(욥3:20; 시89:27, 35-37; 시132:12-18). 인류가 아담의 죄로 인해 시초부터 부패하고 그릇되어졌다 할지라도, 그 많은 사람이 오염된 상태 속에서, 주님은 어떤 그릇들을 귀하게 성화시켜(롬9:21) 모든 시대 가운데 그의 자비를 맛보지 않은 시대가 없도록 하셨다(딤후2:20이하). 마지막으로 우리가 교회를 믿되, 하나님의 선하심의 신실함에 근거하여 믿는다면, 우리가 그의 택한 자의 한 부분으로서 그들과 함께 부르심을 받고 이미 부분적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붙들어서, 우리가 완전히 의롭게 되고 성화되리라는 믿음을 굳게 지키도록 하자.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불가해한 지혜를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누가 그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선택받았으며 또 누가 정죄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것을 조사할만한 능력도 우리에게는 없다(롬11:1-36). 그러나 이런 것은 우리 믿음에는 필요하지 않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 곧,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영접하는 자들을 그의 자녀로 인정하시겠다 하신 약속(요1:12)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견고해진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무엇을 구할 만큼 염치없는 욕심을 가진 자가 누구인가?
24.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대한 성부 하나님의 선의와 생명과 구원, 간단히 말해서 하늘나라 그 자체를 찾게 되는 고로,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 줄 알아야겠다. 이를 위해 우리가 생각해야만 할 것은, 그분이 우리의 것이기만 하면 우리 구원과 선을 위해 아무 것도 달리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에 확실한 믿음을 두기만 하면, 우리가 그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가 그의 안에 구원과 생명과, 한 마디로 우리 모든 소유를 두기만 하면, 그분이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을 것을 우리가 확신하기만 한다면, 그분과 또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리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받기만 한다면 그는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실 준비가 다 되어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깊이 뚫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들 위에 일으키는 셈인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위엄의 깊이를 뚫고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잠25:2-6). 우리 주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그 안에서 영원 전부터 그의 것으로 삼아 그의 교회의 양 무리 가운데로 이끌어 들이시기로 뜻하셨던 자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택한 자와 또 교회에 속하는 자가 된다는 명확하고도 충분한 증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동일한 그리스도께서 바로 아버지의 지속적이요 불변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그의 말씀이 진정으로 선포하는 바대로, 처음부터 그리하였고 또 영원히 그러할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뜻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요1:1; 14:7-1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또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라면, 그분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또 천국의 상속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그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그의 친구와 동료가 되어 그가 받을 기업을 함께 나룰 자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이 성립되어져야만 하겠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또한 주님이 영원부터 택하신 자, 그가 영원토록 보호하여 결코 멸하게 허락하지 않을 자들 속에 우리도 속하였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롬8:31-39).
25. 그렇지 않고 만일 우리가 자신이 그 회중에 든 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공교회가 잇다는 사실을 헛되이 열매 없이 믿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이 교회에 속하였는지 결정하는 일이나, 또는 선택된 자를 유기된 자들과 구분해 내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아니다. 이 일은 하나님만의 특권인데,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2:19). 그리고 인간의 성급함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매일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판단이 얼마나 우리의 지각을 초월하는지에 대해 경고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완전히 버린 자요 희망 없이 포기해 버린 자들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생명의 길로 다시 부름을 받고, 반면에 남들 앞 서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던 자들이 넘어지는 경우를 우리가 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눈만이 누가 마지막까지 보전될 자인 지를 보실 수 있다(마24L13). 이는 그분만이 구원의 머리이기 때문이다(히2:10).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씀의 사역자들이 땅에서 풀고 맨 것이 하늘에서 풀고 맨 것이 되리라고 하신 것은(마16:19) 우리가 스스로 누가 교회에 속하는지, 또 누가 외인인지를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약속을 통해 그가 의도하신 뜻은, 그가 우리에게 어떤 외적 기준을 주어서 우리 앞에 드러낸다거나 또 매이고 풀린 자들을 우리눈 앞에 나타내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믿음으로 복음의 약속 곧 그리스도가 땅위에 구속과 자유로 주어지시고, 말씀 사역자에 의해 이생 속에 선포된 그 약속을 듣고 받아들이는 그 사람들이 하늘에서도,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존전에서 그의 심판에서 풀리고 자유롭게 되리라는 것이다. 반면에 이 약속을 거부하고 경멸하는 자들은 이 약속으로부터 하늘 하나님의 존전에서 자기들의 결박 속에, 말하자면 그들의 정죄 속에 그대로 매여 있을 것 밖에는 다른 증거를 기대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26. 택한 자를 우리가 확실하게 확인해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확실한 표시들을 일러주기 때문에 그에 비추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 누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은 자인지, 누가 유기되고 소위된 자들인지 구별해 볼 수 있다. 결국 우리와 함께 같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그 신앙의 고백을 통해서나 생활의 모범 또는 성례전에의 참여 등을 통해 고백하는 자들은, 사랑의 규칙에 의해 선택받은 자요 교회의 회원으로 볼 수가 있다. 비록 그들의 도덕 생활 속에 액간의 불완전이 남아 있다하더라도(사실 이 점에서 완전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자기들의 악행을 지나치게 찬동하거나 자랑하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여겨도 좋을 것이다. 그들에 대해서도 희망을 가져야만 할 것은 그들도 하나님의 인도에 의해 더 나은 길로 발전해 갈 것이며 마침내는 모든 불완전을 떨쳐 버리고 택함 받은 자의 영원한 복락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표시와 조짐을 통해 성경은 누가 하나님의 택한 자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인지 분간해 낼 수 있도록 한다. 반면에 우리와 같은 신앙을 고배하지 않는 자들, 또는 비록 잆ㄹ로는 고백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으로는 그 입술로 고백하는 하나님을 여전히 부인하는 자들(평생을 통해 사악하고 버린 사람들, 죄의 탐욕에 취해 있는 자들, 자기들의 악함을 전혀 개의치 않는 자들), 이런 류의 사람들은 그 스스로 보여 주는 조짐들을 통해 그들이 교회의 일원이 아닌 것을 나타낸다. 출교하는 것이 제정된 것도 이런 경우에 사용하기 위함이다.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거짓으로 꾸미면서, 그 생활의 무가치함이나 거침없이 마음대로 죄짓는 모습을 통해, 교회에 거침돌만이 될 뿐, 그리스도의 이름에 적합하지 못한 자들을 신자들의 회중에서 끊켜지고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다(고전5:1-5, 마18:15-19, 딤전1:20). 첫째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욕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인데,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욕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인데, 그들을 용납하게 되면 그의 거룩한 교회가 마치 행악자들과 공적으로 드러난 악한들의 모의회가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빈번한 접촉으로 그들의 타락한 삶의 모범이 다른 사람들도 부패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하게 하여 마침내 바른 길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다.
27. 징계할 사람들을 우리는 당분간 교회로부터 고립시키되, 분별하도록 허락된 범위 안에서 하며, 앞서 말한 규칙을 따라서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마치 하나님의 손에서 내던져진 자들인 것처럼 다룸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절망케 하여서는 아니된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미 정죄된 것이 매우 확실하지 않은 한은, 그들 중 누구라도 택한 자의 수로부터 제하여 진 것처럼, 또는 이미 버려진 자인 것처럼 포기해 버리라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이미 정죄된 것으로 보아야 할 자들은, 확고한 목적과 굳은 악의를 품고 진리를 공격하거나, 복음을 압박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하거나, 성령을 거역하거나 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임으로 이런 자들에 대해서는 이미 정죄하였다. 곧 성령을 거스리는 죄는 이 세대에서나 오는 세대에서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마12:32). 이런 일은 우리가 매우 지각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성급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앞질러 가기보다는 오히려 계시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더 신중한 계획이 될 것이다(히6:6, 10:26, 요5:28-29, 고전4:3-5).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그의 자비를 그의 율법에 한정시키고 싶지 않다면, 우리 스스로 심판의 권리를 더 많이 가지려 하지 말도록 하자. 하나님은 최악의 사람을 최상으로 변화시키고, 이방인에 접붙이고, 또 나그네를 교회로 받아들이는 일을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행하시는 분이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인간의 생각의 결점을 보이시고 그 성급함을 억제시키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스스로에게 적당한 정도를 넘는 심판권을 부여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능력으로 서로를 상호 편견없이 대하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서로에게 행해진 행동을 가장 좋은 면으로 받아들이고, 의심 많은 사람들이 늘 그러는 것처럼 꾸불꾸불하고 냉소적으로 비틀지 말도록 하자(마7:1; 롬12:9-10; 14:13, 19; 살전5:15; 히12:14). 하지만 어떤 사람이 너무나 비뚤어져서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의 선하심에 부탁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서로를 상호 공평과 인내로 대하고 평화와 사랑을 끼침으로써, 하나님의 비밀한 판단을 어리석게 침범하지 않고 또 우리 자신의 오류의 흑암에 휘말려 들지 않도록 해야겠다. 이제 이 문제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사람 자체를 죽음에 이르도록 언도하지는 말고(그는 하나님의 손과 심판 안에 있다) 다만 각 사람의 행사를 하나님의 법에 따라 선악의 규칙대로 제기만 하자.
28. 출교를 이러한 의미로 하겠다. 교회의 양떼들로부터(사람 앞에서)단절된 자들이 구원의 희망 바깥에 내던져 진 것이 아니고, 다만 그들이 이 징계를 통해 그들의 이전 생활의 더러움을 떠나 올바른 길로 되돌아 올 때까지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기록하고 있듯이 그가 사람을 사탄에게, 육체적 죽음에 넘겨준 것은 그의 영혼이 주님의 날에 안전하게 하기 위함이다(고전5:5, 살후3:14-15). 이는(내가 해석하는대로는) 그 사람을 순간적으로 정죄 함으로써 영원토록 안전케 한다는 것이다(살후3:14-15). 결론적으로, 비록 교회의 권징에 의하면 우리가 출교된 사람들과 친근하게 살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나 위로와 가르침으로든지혼은 자비와 부드러움으로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기도를 드림으로써든지 그들이 보다 덕스러운 삶으로 돌아오고, 교회의 교제와 일치에로 되돌아오도록 노력해야만 한다.그런 사람들뿐만 아니라 터키인들과 사라센인들, 그밖에 종교의 적들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로 대하여야겠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믿음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방법들을 우리는 결코 용인할 수 없다. 즉, 그들로 하여금 불과 물과 다른 일상요소들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그들의 인간성을 부인하고, 그들을 칼과 무기로 윽박지르는 방법 등이다.
29.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비록 우리가 누가 교회에 속하는 자이며 누가 아닌지 개개인적으로 구별해 내도록 허락 받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히 전파되고 경청되는 곳, 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대로 성례가 시행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고 의심치 않고 말할 수 있다(참고, 엡2:20). 이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하신 약속이 실패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에 관하여 이보다 더 확실하거나 또 다른 지식은 없으며 또 누가 교회에 속하지 않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없다. 이런 일은 믿음으로 외에는 알 길이 없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는 그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일까지 믿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일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의 지배를 받거나, 한정된 공간 또는 고정된 장소에 둘러 싸여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30. 이와 함께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 이는 그 공교회 안에서 모든 택한 자들(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을 함께 경배하는 자들)이 상호 교제를 가지며 또 모든 좋은 것에 동참함을 말한다. 물론 각 개개인이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실을(바울도 가르치듯이 성령의 은사는 나뉘어져서 다양하게 배분된다)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고전12:4-11), 또 시민 질서의 구조 속에서 그가 가진 그 자신의 자리를 지켜가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이 세상의 구조 아래서는 사람들 가운데 독립된 소유가 있어야 하므로 이런 시민 질러가 필요하다).
그러나 성도의 공동체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동시에, 공평과 필요에 따라 친절과 사랑으로 그들 가운데서 서로 나누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사가 각 개인에게 어떻게 주어졌던, 설혹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특별히 어떤 자에게는 주어지고 다른 자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 가진 것을 모두 나누는 자들이 된다(롬12:4-8, 고전12:12, 26). 한 몸의 지체가 일종의 공동체로서 서로를 나누듯이, 그러면서도 각자의 특별한 은사와 독립된 사역을 수행하듯이, 성도들은 서로 모여 한 몸으로 지어져 간다. 이것이 공교회요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이다(엡1:22-23). 이제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은 이 항목을 통해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믿는 교회가 어떤 류의 것이냐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이 부분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는 간과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는 의미가 바뀐 채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믿음으로 이를 해석하였다.
31. “우리는 죄 용서를 믿는다.” 이는 하나님의 자유대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죄의 용서오 은혜가 우리들 속 교회의 몸에 입양되고 접붙여진 자들에게 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사죄가 다른 원천으로부터, 아무 이유 때문에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행10:43, 요일2:1-12, 사33:24). 왜냐하면 교회와 이 성도의 교제 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교회 자체는 이 죄의 용서로 구성되고 또 이것이 기초가 되어 교회를 지탱한다(호2:18-23). 죄의 용서가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요, 또 그분이 우리와 화해하게 되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이 죄의 용서만이 우리에게 교회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며(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이요, 지존자가 그의 거하시는 처소로 거룩하게 한 장막이다) 우리를 그 안에 머물게 보호해 준다(시 46:4-5, 87:1-3, 딤전3:15). 신자들이 이 죄 용서를 받는 때는, 그들이 자기들의 죄의 자각으로 억압되고, 고통받고 또 혼동되어 있는 중에, 하나님의 심판을 느끼며 두려워하고, 스스로에 대해 혐오하고, 무거운 짐 밑에서 탄식하고 허덕일 그때이다. 이 죄에 대한 혐오와 또 스스로의 혼란으로 인해 그들은 자기 육체와 거기서 파생되는 모든 것을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회개를 몸의 감옥 속에 거하는 한 계속 추구해 나가는 사이, 그들은 거듭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런 회개를 얻게 된다. 이는 그들의 회개가 그렇게 대접을 받을만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이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자신들의 궁핍을 자각함으로써 모든 교만을 꺽고, 자신 들을 온전히 내던져 그 무가치함을 분명히 알게 하시고, 그때에 가서야 마침내 주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내미시는 자비의 달콤함을 맛보기 시작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를 맛볼 때에 그들은 편히 숨을 쉬고 위로를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죄용서와 또 복된 구원이 자기들을 위함인 줄 확신하게 된다.
반면에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로 가지 않는 자들은 구원의 연결고리인 이 죄용서를 결코 얻지 못한다(눅16:15, 26). 비록 그들의 행사들이 기적에 가깝도록 장엄하게 빛나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이나 행위나 생각이 다 혐오스러울 뿐이다. 사람들의 눈이란 것은 업적의 빈 광채에 자주 눈이 멀기 때문에 그 외양이 거룩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 잘 속에 된다.
32.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는가.” 모든 인간 육체가 일시에 한꺼번에 썩음에서 썩지 않음으로, 죽을 몸에서 불멸로 일으켜 지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고전15:20-56, 살전4:13-17, 행23:6-9). 이미 죽은 자들도, 벌레가 먹었든, 흙으로 변했든, 재가되었든 또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 산화되었든지 간에 그들의 몸을 다시 받을 것이다(요5:28-32). 그러나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들은 자기 육체의 부패성을 벗어버리게 될 것이다. 모든 자들이 갑작스런 변화를 통해 불멸의 본질로 건너가게 되고, 경건한 자들은 생명의 영광으로, 유기된 자들은 죽음의 정죄로 이르게 된다(마25:31-46).
33. 마지막으로 “우리는 영생을 믿는다.” 이는 주님께서 그 자신의 백성들 곧 몸과 영이 영화롭게된 자들을 복락 가운데로, 변화와 부패가 미치지 못하고 영원히 지속될 그 복락 가운데로 받아들이실 그때에 일어날 일이다. 이 일은 우리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모든 좋은 것들을 자기 속에 충만히 가지신 주님께 우리가 굳게 붙어 있을 때 생명과 빛과 의를 참되고 완전하게 성취시키는 일이다(고전15:28-53). 그 복락은 모든 밝음과 기쁨과 능력과 행복으로 가득 찬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데, 이들은 지금 우리 인간의 지각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옮겨져 있어서(바울이 말한 것처럼) 귀로 듣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고 인간의 마음으로 추측하지 못한다(고전2:9). 반면에 경건치 못한 자들과 유기된 자들은 순전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찾고 공경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한 부분이라도 얻지 못하고, 마귀와 함께 영원한 죽음 가운데로 쫓겨 갈 것이다. 거기서 모든 기쁨과 능력과 천국의 다른 좋은 것들은 맛보지도 못하고, 영원한 흑암과 영원한 형벌의 정죄를 받아(마8:12, 22:13) 죽지 않은 벌레에게 먹히며(사66:24, 막9:44),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태워질 것이다(마3:12, 막9:43, 44, 45, 46, 48; 사66:24).
34. 우리는 진정으로 성도의 교제와 죄용서 그리고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어서, 우리 주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중에 이 모든 일들이 모든 성도들과 함께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을 확신해야 하겠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진리가 얼마나 확실하며 흔들리지 않는 것인지 표시하기 위해, 또 신자들마다 주님께서 자기의 하나님이요 그리스도는 자기의 구주인 줄로 믿으며 그의 몸의 부활과 영생을 기다리는 가운데 그 자신들을 이 믿음으로 굳게 하기 위해, 이 모든 고백의 마지막을 증명된 확실성의 부호인 “아멘”으로 끝맺고 있다.
C. 믿음, 소망, 사랑
35. 이제 이 산 믿음, 곧 앞서 우리가 보았듯이 한 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있는 속마다 이 믿음과 함께 소망과 사랑이 동반된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고전13:13). 이들이 결하여 있으면 우리가 믿음에 대해 아무리 학식있게 또 조리있게 논의하더라도 그것이 다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이는 믿음이 소망과 사랑에 의해 우리 안에 생기기 때문에가 아니라, 소망과 사랑이 믿음을 영원히 따라오지 않는 일이 생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먼저 소망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자. 만일 믿음(우리가 앞에서 들은대로)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실한 설득, 곧 우리를 속이거나 화나게 만들 수 없는 설득이라면, 이 확신을 붙드는 자들은 이 하나님의 약속들이 참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요약해 말하자면 소망이란 우리의 믿음을 통해 진실로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것으로 믿게 된 그런 것들을 바라는 기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하나님이 신실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요, 소망이란 그가 적합한 시기에 그의 진실을 보여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으로서 행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믿는 것이요, 소망은 그분이 우리에게 대해 항상 그런 분으로서 행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믿음은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믿는 것이요, 소망은 언젠가는 그것이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믿음은 이렇게 소망이 의지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그리고 소망은 믿음을 키우고 유지시킨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믿음이 약하여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꾸준히 소망하고 기다리는 중에 유지되고 심화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는 보다 더 명백한 증거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성부에 의해 우리에게 오신 분임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참고, 요6:29)-다시 말해서 그는 사죄와 의와 평화와 성부와의 화해가 되실 뿐만이 아니라 성화와 생수의 샘이 되시기도 한다-우리는 그의 안에서 사랑, 곧 성령의 선물이요 열매(갈5:22)이며 또한 그의 성화의 사역(참고, 엡5:26)인 그것을 의심할 바 없이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소망과 사랑이 모두 어떻게 믿음으로부터 태어나며 나오는지, 그리고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는 방금 소망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그것을 통해 믿음이 자라며 보존되고 굳어진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이런 일은 사실 소망에 속하는 것인데, 이는 소망이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주님을 기다리는 가운데, 믿음이 너무 많이 헐떡거리지 않도록 억제해 주기도 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에 대해 흔들리거나 의심하지 않도록 믿음을 강하게 해주는 역할을 소망이 하기 때문이다(사28:16). 그러나 사랑의 성격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사랑에는 이런 성질들이 전혀 없다. 어떤 이들 중에는 항상 바울의 말을 입버릇처럼 들먹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누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13:2)라는 말이다. 이 구절을 통해 그들이 증명하려 드는 것은 사랑과는 상관없는 믿음도 있다는 것이다(그들은 이를 “형체 없는 믿음”이라 부른다). 그들은 이 구절에서 사도가 “믿음”이란 말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앞장에서 바울은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논의했다. 능력들, 여러 방언들 그리고 예언 등이다(고전12:4-10). 그러면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은사들보다 더 나은 것을 구하라”고 권한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에 더 큰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덧붙이기를 “제일 좋은 길”을 그들에게 보여주겠다고 한다(고전12:30). 여타의 은사들은 그 자체로서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사랑을 섬기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은사들이 주어진 목적은 교회를 세우기 위함인데 이 목적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한은 그것들은 다 은혜를 잃고 만다. 이를 증명하고자 바울은 그가 앞서 열거한 동일한 은사들을 이제 다른 이름으로 되풀이하고 있다. 그 동일한 것 즉, 살아 있는 기적들의 은사를 위해 “능력들” 또는 “믿음”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런 기적의 능력 또는 믿음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데, 사람들은 이 역시 남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방언이나 예언 또는 다른 은사들과 같이 참된 그리스도인 믿음과는 멀리 동떨어진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가롯 유다의 예에서 이를 볼 수 있는데 그는 이런 것을 가졌으면서도 전혀 신가답지 못했다(눅10:17-21, 42). 이 동일 구절들로부터와 그리고 같은 장에 뒤따라 나오는 다른 구절에서 그들이 하는 말은, 사랑과 소망과 믿음보다 더 큰 것이라고, 또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도 믿음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사랑 곧 능력(그들이 말하는 대로하자면), 더 큰 능력에 의한 것으로 바울이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교묘함은 큰 어려움 없이 물리칠 수 있다. 왜냐하면 첫 구절에 언급된 것은 참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구절은 우리가 참 믿음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바울이 사랑이 믿음보다 크다고 하는 말은, 더 공적이 많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더 열매가 많다는 것, 더 멀리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 더 많이 봉사한다는 것, 또 영원히 번창한다는 것 때문이다. 이에 비해 믿음의 용도는 당분간만 지속될 뿐이기 때문이다(참고, 고전13:2 이하). 도대체 어떤 건전한 판단을 가진 사람-온전히 건전한 두뇌의 사람-이기에 여기서 의롭다함에 있어서 사랑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추론해 내고 있단 말인가? 의롭다하는 능력은 일의 가치에 놓여 있지 않다. 우리의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에만 달려 있는 것이고, 믿음은 칭의에 붙어 있을 때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 어느 반대자가 끼어 들어와서, 왜 내가 그 짧은 공간 안에서 “믿음”이란 용어를 그렇게 변덕스럽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런 해석에 대해 나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바울이 열거한 은사들이 모두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믿음과 소망 아래 귀속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그 은사들을 요점반복의 방식으로 “믿음”과 “소망”이란 용어 아래에 포함시키고 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예언과 방언들, 해석의 은사, 지식의 은사 등은 한결같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이끌어 주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 그런데 이 당에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과 소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믿음과 소망이라 말할 때는 동시에 이 모든 은사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쓰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다”(고전13:13 상). 즉, 아무리 다양한 은사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향하는 곳은, “그들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고전13:13 하).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만 할 것은, 믿음, 소망, 사랑이 성령의 은사로서, 이 중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지 않고는 시작될 수도, 굳게 설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고전4:7). 그러므로 이 모두를 하나님께 구하되 우리 자신들 안에서 찾아서는 안되겠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안에서 소망에 속한 것이나 사랑에 속한 것이나 혹은 믿음에 속한 그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전체를 하나님께로서 받은 줄 확신하고, 감사하며, 마음과 입술로 구하되 특히 마음으로 구하며 또 절제하여, 그분이 우리 안에 그것들을 간직케 하고 또 매일 더 낫게 하시도록 해야겠다. 우리는 이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그것들을 계속적으로 자라가도록 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일은 우리 완전의 전부가 그 안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께 우리가 확실히 도착하도록 까지 걸어나가야 할 도상에서의 전진 과정에 속하는 것이다.

기도
주기도문 해설 포함
A. 일반적 의미의 기도
1. 지금까지 논의한 문제들로부터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의 형편이 얼마나 절망적이며 또 모든 선한 것들에 결핍을 겪고 있느냐는 것, 그리고 구원에 이르기 위한 모든 방편을 얼마나 철저히 잃어버리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자원을 찾고자 한다면 자기 바깥으로 눈을 돌려 외부의 어디로부터 그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리고 자유롭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우리의 불쌍한 처지대신 온갖 행복을, 우리의 부족대신 모든 부요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하늘의 보물 창고를 우리에게 열어주셔서, 우리의 온 신앙으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묵상하게 하녀 우리의 기대를 그분께만 두게 하며, 또 우리의 온 소망이 그분께 불어 머무르도록 하신다.
이런 일은 어떤 삼단논법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비밀이 감추어진 철학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눈을 열어 주시는 자들은 그것을 마음으로 배우게 되고 그분의 빛 가운데서 빛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시 36:9). 일단 우리가 이렇게 우리에게 필요하고 부족한 그 무엇이든지 하나님 안에서,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곧 아버지께서 그의 모든 부요로운 은사가 머무르게 하신 그 분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믿음으로 가르쳐 주신 후에는(참고. 골1:9, 요1:16),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대상이 되고, 또 기도로써 그에게 요청하게 되고, 우리가 배우게 된 것이 그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이요 모든 선한 것들의 공급자이심을 알고서도 그가 우리로 하여금 와서 구하라고 초청하시는 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가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으면,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땅 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그 있는 곳을 가르쳐주는데도 이를 무시하여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에서 그저 신속히 건드리고만 지나간 이 문제에 대해서 이제 더 철저히 논의해 보도록 해야겠다.
2. 그러면 올바른 기도의 첫 번째 규칙은 우리가 자기 영광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지각을 던져 버리는 것, 우리의 자기 확신을 모두 내버리는 것이다. 반면에 두렵고도 겸비한 자세로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겠다. 선지자의 가르침에도 이런 자세가 제시되고 있다.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려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9:18-19). 또 다른 선지자의 가르침에도 보면, “자기 큰 죄로 인하여 슬퍼하고 낙담한 영혼, 부족하고 약한...굶주린 영혼, 시력 잃은 눈들이, 오 주여, 당신께 영광을 돌리나이다. 우리 기도를 당신 앞에 쏟아 붓고, 당신의 눈에 자비를 구하는 것은, 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 조상의 의 때문이 아니옵니다”(바룩2:18-19). 그러나 주께서는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바룩3:2).
올바른 기도의 두 번째 규칙은, 우리가 자신의 불충분함을 진정으로 자각하고,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구하는 것을 우리 자신을 위해서와 우리 유익을 위해 정말 필요로 한다는 것을 순수하게 생각하고, 그분께 구하는 것마다 그로부터 얻기 위한 목적으로 구해야겠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의도나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가장되고 불순한 것이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구하면서 그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확실하고도 진지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셈이 되며 오히려 그의 가식을 통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구하는 모든 것들을 크고도 타오르는 의욕과 열정으로 구하도록 하자.
예를 들어 우리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눅11:2)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그 거룩히 됨을 열정적으로 배고파하고 목말라 할 수 있어야만 하겠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의 죄의 무게로 억눌리고 짐 진 것을 인식하게 될 때,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쁘시게 할만한 아무 것도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보게될 때, 이런 느낌이 우리를 공포로 몰아 넣게는 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자신을 그분께로 가져가도록 하자.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나가고자 할 때는 그런 일을 느끼며 생각치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서 말이다(눅17:7-10).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거만하게 부풀어오르도록 하려고 있는 것도 아니요, 우리의 어떤 것을 위대하게 평가하도록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기도로써 우리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자기들의 문제를 그 부모에게 친근히 가져가 털어놓듯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 우리의 곤경을 고백하고 그로 인해 울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죄의식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박차와 채찍과 같은 것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더욱 기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3. 이렇게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자각하게 하는 위에다가, 우리의 자선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더 강렬히 기도하도록 하시려고 두 가지를 더 보태어 주신다. 하나는 기도하라는 명령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무엇이든 받을 줄로 확신케 하는 그분의 약속이다. 우리에게는 매우 빈번히 되풀이되는 명령이 주어졌다. 곧 “찾으라”, “나에게로 오라”, “내게 구하라”, “내게로 돌이키라”,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등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십계명의 제3계명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방식으로 명령되기도 하였다(눅11:9-13, 요16:23-29, 마7:7,11:28, 슥1:3, 시50:15, 출20:7). 그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는 이 금지명령은 역으로 말해서, 우리가 무슨 것이나 선이나 도움이나 보호를 하나님께 구하고 또 기다리는 중에 그에게 우리의 묻는 신뢰를 돌림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떤 필요가 우리를 억누를 때 우리가 그에게로 피하여 가지 않으면, 그를 찾고 그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이는 그의 화를 우리 위에 자초하는 일이며, 마치 신들을 우리를 위해 만들고 우상을 세우는 일과 같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무시하는 사이에 우리는 그의 뜻을 멸시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그를 부르는 자들은 찾고, 찬양을 돌리고, 큰 위로를 누리게 되는데 이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받을만한 존재가 되고 또 그의 뜻을 섬기는 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약속은 이런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7:7, 참고. 렘20:13이하).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내가 너희에게 응답하겠다”(사65:24). “내가 너를 건지리라”(시50:15,91:2이하).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내가 너희를 풍족히 먹이리라”(겔34:14 이하).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알지 아니하리로다”(사45:17).
4.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한 믿음으로 기다리면, 의심 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기도 자체가 그 구하는 것에 대한 공로나 가치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의 전적인 소망은 이같은 약속에 놓여 있으며 그런 약속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꼭 같이 담대한 믿음으로 부르짖기만 하면 베드로나 바울, 기타 여러 성도들이 응답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비록 그들이 우리들보다 더 큰 성결의 삶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할지라도)우리도 응답 받게 될 것이라는 확고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우리가 기도하라 하시는 동일한 명령으로 무장되고, 또 응답 받을 것이라는 동일한 약속으로 갖추어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가치를 따라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에 따라서만 즉, 사람들이 그의 명령을 순종하고 그의 약속을 신뢰하는지에 따라 우리 기도의 가치를 평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지 못하고 그의 진리를 의심하는 자들은, 그렇게 의심하고 응답을 받을 수 있을지 머뭇거리는 사이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만다(야고보의 말을 생각해 보라). 야고보는 이런 자들을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에 비교하고 있다(약1:6).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믿음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히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믿음을 떠나서 이루어 질 수 없다(마8:l3, 9:29, 막11:24). 어느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놓고 또 그분의 눈앞에 나올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이런 곤궁에서 우리를 풀어주기 위해(이런 곤궁은 우리의 마음을 절망으로 던져 넣고야 만다)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언자(요일2:1)와 중보자(딤전2:5; 참고, 히8:6과 9:15)로 보내어 주셨다.
이분의 지도를 따라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께 갈 수 있게 되고, 또 아버지께서 그를 거절하지 않으심과 같이 우리가 이런 중보자와 함께 나갈 때 그의 이름으로 구하는 그 무엇이라도 거절하지 않을 것을 믿게 되었다. 하나님의 보좌는 위엄의 보좌일 뿐만 아니라, 은혜의 보좌이기도 하므로 우리가 그 앞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나타나고, 자비를 얻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히4:16).
5.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는 규칙이 정해지고 또, 그를 부르는 자가 들으심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니, 이제 그를 부르되 특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라는 명령을 받은 것과, 그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요14:13, 16:24).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들은 그의 명령을 거만스럽게 어기고 그의 뜻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며, 실상 무엇인가를 얻으리라는 약속을 갖지 못한 자라는 사실이 논란의 여지없이 분명해졌다. 참으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 예와 아멘을 찾는다”(고후1:20). 말하자면 그 약속들이 확증을 받고 성취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제 그가 유일의 길리요,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허락 받을 수 있는 유일의 문이기 때문에(참고. 요14:6) 누구든지 이 길과 이 문을 버리면 하나님께 나가는 다른 길과 문이 없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아래 진노와 심판과 공포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둘 것이 없는 자들이 되고 만다.
나아가서 아버지께서는 그를 우리 머리와(마2:6) 인도자(고전11:3, 엡1:22, 4:15, 5:23, 골1:18)로 세우셨기 때문에(참고. 요6:27), 그를 저버리고 돌아서는 자들은 자기들의 지위를 지워 버리고 하나님이 새겨 주신 표지를 뭉개버리려고 발버둥을 치는 자들이다.
6. 지금은 죽어서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는 성인들에 관해서는, 그들이 하나님께 탄원할 때 유일한 길이신(요14:6)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어떤 다른 길로 한다든가, 또는 어떤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께 용납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갖지 말도록 하자. 따라서 성경이 우리를 오직 그리스도께로만 부르고 있는데, 또 천부께서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 모이도록 뜻하고 계시는데(골1:20, 엡1:10) 우리가 가들 자신으로서는 아무 것도 없는 성인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감을 얻으려고 의도해서는 아니되겠다. 성인들이 자기들의 뜻에만 모든 소원들을 하나님의 뜻에만 맡기고 그 뜻을 묵상하고 또 그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볼 때, 누군가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그들의 기도 외에 다른 어떤 기도를 돌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들을 어리석고도 저속하게, 심지어 경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된다.
거룩한 자들의 구원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버린 자들의 능욕에 의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한 부분을 가지고 또 그의 나라의 부분에 속하지 않는다면, 성인들의 기도(그들이 할 수 있는 무엇이든지)로 도움을 얻고자 하는 기대를 가져서는 아니 되겠다.
반면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다면, 우리의 노력을 통해 서게 되는 어떤 것이든지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라는 것, 그리고 성인들도 그 가족이 되어 기도하는 전 교회의 기도는 주님의 나라가 오도록 기도하는 것인데, 이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란 사실에 대해 전적으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성인들이 비록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부르짖어서는 안되겠다. 이것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은(딤전2:1-7, 약5l15-18)땅 위에 사는 자들이 서로 기도로 자신을 부탁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논란의 여지없이 따라 나오는 결론이 되지는 못한다. 기도로 서로를 부탁하는 이 가능은 서로 간에 필요한 것들을 나누는 가운데 사랑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런 행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교제로부터 데려가 버린 죽은 자들과의 사이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에 대한 한 신앙 안에 묶여져서, 비록 그들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 점점 자라간다 할지라도 서로 간에 대화나 듣기의 교환은 존재하지 못한다(고전13:10이하). 이와 달리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판단 속으로 그분의 말씀을 떠나서 뚫고 들어가려고(인간의 두뇌의 술 취한 망상을 통해), 그래서 성경을 짓밟아 놓으려는 것 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경은 우리 육체의 신중함이 하나님의 지혜의 원수하고 매우 자주 선언하며(롬8:6-7), 또 우리 마음의 허영을 전적으로 정죄 하며, 우리의 모든 이성을 낮추어서 하나님의 뜻만을 바라보도록 해준다(신12:32).
성경은 그리스도만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우리를 그에게로 보내고, 그 안에서 우리를 세워간다. 암브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우리의 입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께 말하며, 또 그는 우리의 눈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를 본다. 그는 우리의 오른손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자신들을 아버지께 드린다. 그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우리나 다른 모든 성인들이 하나님과 서로 관계하지 못하게 된다.”
7. 이제, 스스로를 위하여 성인들 중에서 특별한 후견자를 택하여 그들의 특별추천으로 어떤 도움을 얻을 것으로 희망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대해 대단히 무례한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인들에게 어떤 물질적 애정을 조작하여 하나나 또 다른 숭배자에게 더 많은 은총을 얻고자 하는 사시에, 그들을 그 하나의 뜻 곧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바라는 그 뜻으로부터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인들을 자기들의 중보자로 삼는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실패를 하셨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너무 심하게 대하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그들은 그리스도를 존귀히 하지 않으며, 또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특유의 특권, 다른 이에게 결코 양도할 수 없는 ‘유일한 중보자’라는 칭호를 그에게서 떼어내어 버리고 있다. 또한 이런 일을 통해서 그들은 그의 탕행의 영광을 흐리게 하고 십자가를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우리 구원을 위해 행하시고 또 고난받으신 이 모든 일에 대한 합당한 찬양을 그들은 탈취해 버리는 것이다. 그가 이런 일들을 하신 것은 그 혼자만이 중보자라는 결론으로 이끌고자 함이다. 그들은 또 동시에 자신을 아버지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친절을 팽개쳐 버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형제가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버지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참고. 히2:1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더 이상 부드러울 수가 없는 그런 형제의 애정을 보여 주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런 이름이 명백히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가끔 읽는대로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분명히 영향을 받고 있다. 왜? 무론 그들이 기도했기 때문이다. 선지자의 말처럼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구원을 받았으며...저희가 부르짖어...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시22::4-5, 참고, 21:5-6 약간수정).
그러므로 우리도 그들의 예처럼 기도하고, 그들처럼 우리도 응답을 받자. 그런데 우리의 대적들은 되지도 않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말하기를 그 한번 응답을 받은 자들만이 응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을 빌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야고보는 얼마나 더 이 문제에 대해 잘 말해 주고 있는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5:17-18). 여기서 야고보는 엘리야에게 어떤 기도의 특권을 돌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같은 방식으로 기도하도록 장려하기 위해 기도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8. 기도(이제 우리가 이 말을 이해하고 있는대로) 에는 두 부분이 있다. 즉 간구와 감사이다. 간구로써 우리는 우리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의 선하심으로부터 먼저는 그의 영광 돌릴 것만을 구하고, 다음으로 우리의 소요에 해당하는 것을 구한다(딤전2:1). 감사로써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찬양으로 그것을 고백하며, 모든 좋은 것들을 그의 선하심에 돌리는 것이다.
이 양 요소는 다윗이 성령 안에서 거룩한 한 구절 안에 압축되어 표현되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계속적으로 사용해야 하겠다(참고. 눅18:1,21:36, 엡5:20). 왜냐하면 우리의 빈곤이 너무 크며 또 커다란 걱정거리들이 사방으로부터 우리를 재촉하며 억누르므로,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탄식하고 한숨지으며 그를 우리의 공급자로 찾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그토록 크고 풍성하게 쏟아 붓는 하나님의 은혜에 거의 압도당했고, 또 우리가 보는 곳마다 발견할 수 있는 그의 많고도 능력 큰 기적들에 압도당해서, 우리에게는 찬양과 감사를 위한 이유와 경우가 결코 갈하는 법이 없다. 이런 일들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도록 하자. 왜냐하면(앞서 이미 충분하게 증거된 것처럼) 우리의 모든 소망과 부요는 하나님 안에 놓여 있어서 우리 자신이나 또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들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서는 결코 번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자신과 또 가진 바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하나님께 위탁하여야 하겠다(참고. 약4:14-15). 그래서 우리가 결정하고 말하고 행하는 무슨 일이든지 그것을 그의 손과 뜻 아래에서, 한 마디로, 그의 도우심의 소망 아래에서 결정하고 말하고 행하도록 하자.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에게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 신뢰를 두고 스스로의 계획대로 생각하고 실행하는 자들 곧,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또 그를 부르지도 않고 무엇인가를 맡아 시작하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받은 자들로 선포되어졌다(참고. 사30:1, 31:1).
이제 그분이 모든 축복의 공급자로 인정되어야 함을 말했으니까 이에 따라 나와야 할 사실은, 우리가 그 모든 일들을 그의 손으로부터 받되 항상 감사함으로 받아야겠다는 것이다. 그의 관대하심으로부터 쉼 없이 흘러나와 우리에게로 오는 그의 은택들을 우리가 올바르게 받아 누리는 길은, 계속 그를 찬양하고 감사를 돌려 드리는 길 외에는 없다. 바울이 이 은택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딤전4:5)고 하였는데 이 말은 동시에 말씀과 기도가 없으면 그것들이 거룩하여질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여기 “말씀”으로써 그는 “믿음”의 대용서로 이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9. 바울이 다른 곳에서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은(살5:17-18, 참고. 딤전2:1,8), 모든 사람이 언제, 어느 때, 어떤 일에서든지 만사를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고, 모든 일로 그를 찬양하면서 자기들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기를 그가 바란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찬양하고 그에게 간구하도록 결코 패함이 없는 이유들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다. 이런 기도의 지속성은 각 사람의 개인기도에 관한 문제에제, 공기도는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또 공중 전체의 합의에 따른 정책대호 할 수밖에 다른 방법도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무관하지만 사람의 편리에 따라 필요한 대로 어떤 시간을 정하여 모든 사람의 유익을 제공하고 또 바울의 표현처럼(고전14:40) “적당하고 질서대로”모든 일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가 “성전”이라 부르는 공중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나름대로의 비밀스런 성스러움을 꾸며 놓았다고 해서 기도가 더 거룩해진다든지, 하나님이 특별히 들어 주신다든지 하지는 않는다. 성전들이 필요한 이유는 다만 신자들의 회중이 기도하고, 말씀의 선포를 들으며 또 같은 시간에 성례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 올 때 그들에게 더욱 편리를 주기 위한 목적일 뿐이다.
사실(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성전이다(고전3:16, 6:19, 고후6:16). 하나님의 전에서 기도하기 원하는 자는 자기 안에서 기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귀가 성전에 있을 때 자기들에게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또는 그 장소에 있을 때 자기들의 기도가 더욱 거룩함으로 치장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의 어리석음을 답습하여 행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물질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장소를 상관치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명하신(요4:23)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다.
10. 기도의 이 목적이 이미 언급되었기에-즉,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든지 그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든지 우리의 마음이 그를 향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제 이로부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기도의 본질이 마음에 있다는 것, 또는 기도 자체는 마음을 찾으시는 분이신(참고, 롬8:27)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쏟아 부어진, 마음속의 어떤 감정이라 해야 옳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기도의 최고의 규칙을 명하여 주시면서, 우리가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면서 우리 기도를 듣고 계시는 우리 아버지께 은밀히 기도하라고 명하시는 것이다(마6:6).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헛되고 가식적인 기도를 늘어놓는 외식자들로부터 우리를 갈라놓고자 하셔서 그는 우리에게 더 좋은 길을 제시해 주셨던 것이다. 곧 우리의 침실로 들어가 거기에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묻는 생각을 기울여 바로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이다. 우리의 몸을 그의 성전으로 삼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의 따뜻한 감정 속에서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신다고 약속해 주셨다(참조. 고후6:16). 물론 다른 어떤 속에서 기도하는 것은 적합치 못한다는 말은 아니고, 기도라는 것은 은밀한 그 무엇으로서, 주로 마음속에 그 거처가 있으며 또 떼지어 몰려오는 근심 걱정을 떠나 마음의 평강을 요구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자명해 지는 것은, 기도에 사용되는 소리나 노래가 마음의 깊은 느낌에서 솟아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가치도, 유익도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입술 끝에서나 목줄기에서 솟아나는 이 소리는 우리 위에 하나님의 진노만을 불러일으킬 따름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그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하고 그의 위엄을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이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비교. 마15:8-9).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니라”(사29:14).
11. 하지만 말이나 노래가 마음의 애정과 결합되어 그것을 잘 섬긴다면 그것들을 정죄 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중에(그 마음이란 것이 미끄러지기 쉬운 것이어서) 쉽게 해이해 지거나 다른 방향으로 이탈하지 못하도록 주의하게 해준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영광은 어느 정도는 우리 몸의 여러 지체 속에 비추이는 것이므로, 특별히 우리의 혀가 노래를 통해서와 또 말을 통해서 이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적합한 일이다. 이 혀는 하나님의 존영을 선포하고 말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하지만 혀의 주된 용도는 공중기도에 있다. 신자들의 모임에서 기도할 때, 다같이 한 목소리, 한 입으로 하나님을 한 성령과 같은 믿음으로 예배하면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우리는 이를 공개적으로 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상호 간에 그의 형제로부터 신앙의 고백을 듣고 도 그 모범을 따라 행하도록 초청을 받게 하는 것이다.
12. 이런 과정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이 공중기도가 라틴 사람들 속에 헬라어ㅗ나 또는 프랑스나 영국 사람들 속에 라틴어로(이런 관습이 지금까지 지켜져 왔다) 이루어져서는 안되겠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참석한 전체 회중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대중의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 전 교회의 덕을 위해 해야될 이 순서가 이해도 하지 못할 소리로 이루어진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사랑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적어ㅗ 바울의 권위로라도 감동을 받아야만 하겠다. 그의 말은 전적으로 확실하다.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14:16-17).
공(公)기도에서나 사(私)기도에서나 우리가 확실히 붙들어야 할 것은, 마음이 없는 말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음이 생각하는 것은 그 힘과 열기에 있어서 혀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사기도에서 말이 필요 없기 조차한다. 내면의 느낌이 스스로 발생하여 때로는 가장 좋은 기도가 말없는 기도인 경우가 있다. 이런 예를 우리는 모세의 경우에서나(출14) 한나의 기도에서(삼상1:13) 볼 수 있다.
13. 이제 우리는 기도의 보다 확실한 방법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 형식 자체에 대해서도 배워 보아야 하겠다. 이는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으로서(마6:9이하, 눅11:2 이하) 그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한없는 선하심과 자비를 본다(아이들이 그 부모의 보호 속에 은신처를 찾듯이) 우리의 모든 필요 가운데서 그를 찾도록 우리를 경고하시고 재촉하시는 것이다. 이 밖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빈곤이 얼마나 깊어 있는지 우리 자신이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또 무엇을 구해야 옳은 것인지,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우리의 이 무지를 채울 수 있는 것을 제공해 주셨다. 우리 능력에 부족한 것을 그가 친히 제공하시고 그 자신의 것으로 충만하게 채우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의 한 형식을 지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그에게 구하도록 허락 하신 것,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 우리가 구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마치 식탁 위에 베풀어 놓은 것처럼 베풀어 놓으신 것이다. 그분의 이런 친절에서 우리는 위로의 큰 열매를 받게 된다. 곧 우리가 거의 그분 자신의 말로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어리석은 것, 낯설고 이상한 것, 다시 말해서 그분께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을 구하는 거시 아님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 이 기도의 형식 또는 규칙은 여섯 가지 간구로 이루어져 있다. 일곱 가지로 구분하는 사람들과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누가복음에(눅11:2-4)다만 여섯 가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결함 있는 모양으로 내버려두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마태에서 일곱째 자리에 첨가된 것은 주석적으로 여섯 번째 간구에 합쳐져야 하겠다. 물론 이 기도의 전부가 하나님의 영광을 그 첫째 자리에 두고 있지만, 그리고 반면에 이 모두가 또 우리와 관계 있는 일이지만, 글도 첫 세 간구가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해야 하겠다. 다른 세 가지 간구는 우리 자신의 문제와 관련 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구해야 할 것들에 특히 해당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 되기를 구할 때,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말고, 우리 앞에 그의 영광만을 놓고, 두 눈을 주목하여 이 한가지 일에만 집중해야 하겠다. 이런 종류의 다른 간구들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마음을 쏟아야 하겠다. 그런데 실상 이 간구는 우리에게도 큰 유익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간구하는 대로 그의 이름이 거룩 되어질때 우리 자신의 거룩도 같이 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눈은 이런 종류의 이익에는 감겨 있도록 해야겠다. 어떤 방식으로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말고, 그래서 우리의 개인적 이익에 대한 모든 희망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될 것과 또 그의 영광에 관한 다른 내용들에 대해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세와 바울의 예에서 보면, 그들의 마음과 눈을 자신들에게로부터 돌려, 그들의 손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가 온다면 그것을 위해 스스로는 파멸되어지기를 맹렬하고도 타오르는 열정으로 바라는 것을 볼 수 있다(출32:32, 롬9:3). 반면에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때, 비록 우리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를 구한다 할지라도, 여기서도 역시 그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면 구하지 말도록 해야 하므로, 이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특별하게 구하는 것이 된다.
B. 주기도문 해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14. 먼저, 바로 첫 문턱에서부터 우리가 앞서 언급했던 사실 곧,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사실과 접하게 된다 어떤 기도든지 다른 이름으로 드리도록 명한 일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제시되고 있다. 우리가 은혜의 자녀로 그리스도께 합하지 못하였더라면 어느 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확신 있게 부를 수 있었겠는가? 누가 그 자신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세를 함부로 부여할 수 있었겠는가? 참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우리의 형제로 주셔서, 그에게 본래부터 속한 것들이 양자의 은혜로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 우리가 이 큰 축복을 확실한 믿음으로 그저 감싸 안기만 하면 된다. 요한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요1:12). 따라서 하나님은 그 자신을 우리의 아버지라 부르시고 우리에게서 그같이 불리워지기를 뜻하셨다. 이렇게 감미로운 그의 이름으로써 그는 우리를 불신앙에서 해방해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 안에서보다 더 큰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은 우리 육신의 부모의 사랑보다 훨씬 크고 뛰어나다. 이는 그분이 선하심과 자비에 있어서 모든 인간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땅 위에는 수많은 아버지들이 있자면, 그들이 부성적 경건함이 부족하여 그 자녀들을 버리는 일이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자신을 부정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딤후2:13)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시27:10, 사63:16). 우리가 가진 바 그의 약속은 이런 것이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그런데 어떤 자식이 어느 나그네나 이방인에게 자신의 신변을 내어 맡길 때는 자기 아버지의 잔인성이나 재산의 부족 등을 꼭 불평하면서 그렇게 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자녀들로서, 그가 아닌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도움을 구한다면 이는 그가 가난하다거나 재산이 부족하다거나, 또는 잔인하다거나 과격하다고 비난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 우리의 죄의식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아버지-비록 친절하고 부드러우시긴 하나-를 불쾌하게 만든다고 하여 우리가 무기력하게 되지는 말도록 하자. 사람들 가운데도, 아들 자신이 자기 죄를 인정하고, 탄원하는 겸손한 자세로 그 아버지의 자비를 구하는 것보다 더 나은 변호자를 그의 아버지 앞에서 가질 수 없고, 잃어버린 아버지의 총애를 되찾아 주 더 나은 중재자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아들의 그런 태도를 보고서 그의 아버지는 동정심을 감추지 못할 것이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신(참고. 고후1:3) 그분은 어떻게 반응하실까?
아버지의 긍휼과 친절을 의심해서 자기를 도와줄 다른 어떤 대변자를 구하기보다는, 바로 자신이 눈물과 탄식으로 간청하는 자기의 자녀들에게 그분이 귀기울이시기 낳겠는가?(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행동을 특별하게 권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넘치는 아버지로서의 긍휼을 한 비유에서(눅15:11-32) 생생히 나타내 주신다. 한 아들이 그 아버지를 떠나, 그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13절), 아버지에게 심히 죄를 쌓았다(18절). 그러나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 그를 감싸 안고, 그가 용서를 구하려 오기 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기꺼이 뛰어 나가 맞으며(20절), 그를 위로하고, 자애롭게 그를 받아준다(22-24절). 사람들 가운데도 이렇게 큰 긍휼의 예가 있음을 보여 주시면서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그로부터 보다 넘치는 풍성한 긍휼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 자신들이 감사할 줄도 모르고, 반역적이고 방탕한 자식들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분의 자비에 우리를 맡기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아버지들 중에서 가장 선하고 친절하신 아버지이신 것이다.
15. 그가 우리에게 대하여 이런 류의 아버지이신데 대한 확신을 더 강하게 해주시기 위해, 그는 우리가 그를 “아버지”라 부를 뿐만 아니라 보다 명시적으로 “우리아버지”라 부르도록 뜻하셨다. 이는 마치 우리가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것과 같다. “오 아버지 당신의 자녀들에 대하여 큰 열정이 넘치시며 또 기꺼이 용서하시려는 분, 당신의 자녀 된 우리는, 비록 당신과 같은 아버지를 모실 자격이 없는 자들이지만, 그래도 당신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자애로운 애정만을 품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또 명백히 설복되어 이제 당신을 불러 우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 개별적으로 그를 “나의 아버지”라 부르도록 배우지 않고, 우리 모두가 공동적으로 그를 “우리 아버지”라 부르도록 배우고 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경고를 받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한 아버지의 동일한 자녀가 되어있으므로 우리 가운데 형제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큰 위치를 가지는가 하는 점이다.
만일 한 아버지가 우리 모두의 공통적 아버지이며(마23:9), 또 모든 좋은 것이 그로부터 우리의 몫으로 오는 것이라면, 우리가 필요한대로 서로 서로 나누기 위해 마음의 큰 열정을 품고 준비해 두지 않은 것이라도 우리들 중에 없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옳다. 우리가 우리의 손길을 서로에게 펼치고 서로를 돕고자 원한다면 우리 형제들을 가장 선하신 아버지의 섭리적 보살핌 아래로 이끌어 주는 것보다 더 크게 그들을 유익 되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나님이 친절하시고 자애롭다면 다른 어떤 것을 더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형제간의 이런 일도 우리는 우리 아버지께 힘입고 있다. 가족 중에서도 자기 아버지를 진정으로 또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동시에 그의 전 가족을 사랑과 선의로 대하는 천부에 대한 동일한 열정과 사랑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그의 독생자 아들의 충만이라 불러 높여 주셨다(엡1:23).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자들, 현재 그렇게 인정되고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땅위에 거하는 모든 자들까지도 감싸는 것이 되기 위하여 위의 규칙에 합하여야만 하겠다. 우리의 기도가 감싸야 할 그 대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작정하셨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최선의 것을 바라고 희망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믿음의 가족에 속한 이들에게 더 특별한 애정을 기울여야 하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도도 우리에게 특별히 명하고 있다(갈6:10).
요약하자면, 모든 기도는 우리 주님께서 그의 나라와 그의 가족으로 세우신 그 공동체를 고려하신 것이여야 한다. 물론 이 말이 우리가 특별히 자신을 위해서나 어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에라도 우리 마음이 우리 공동체에 대한 주의를 잃어버린다든가 그것을 빗나가게 해서는 안되고 매사를 그것과 결부시키도록 해야한다. 비록 기도가 개별적으로 형성된다 하더라도, 이런 목적을 지행하기 때문에 공동적이기를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의 비교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구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명령이다. 그런데 자기로서는 알 수도 없고 또 도울 수도 없는 더 무거운 필요를 짊어진 많은 사람들을 간과하면서도, 자기들이 고통 당하는 줄 알고 있고 또 보고 있는 자들의 그 곤경을 도와주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교회의 이 공동체를 보고 또 생각하면서 어떤 특별한 기도를 작성하는 자들이 그들의 개별적 언어로, 그러나 공중적 관심과 공동 애정의 언어로, 자기 자신들과 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친밀히 알게 하시기를 기뻐하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하여 기도한다면,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기도와 구제의 이런 비교와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구제에 있어서는 자유롭게 주는 것이 우리가 그 빈궁을 볼 수 있는 자들에게만 시행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로서 도울 때에는 완전히 낯설고 미지의 사람에게, 그 떨어져 있는 거리에 멀고 가까움에 상관없이 기도로 자유롭게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포함되는 이 기도의 공동 형식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16. 우리의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이 첨가되고 있다(마6:9). 이 말로써 우리가 하나님께서 마치 기둥을 박은 울타리 속에 갇히듯, 하늘이라는 환경 속에 묶여서 갇혀 있다는 식의 결론으로 비약해서는 안된다. 솔로몬이 고백하듯이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치 못한다”(왕상8:27).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선지자를 통해 하늘이 그의 보좌요 땅이 그의 발등상 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사66:1, 행7:49).
그는 어느 특정지역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만물 속에 흩어져 계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너무나 제한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말 할 수 없는 영광을 그렇게 밖에는 생각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결국 “하늘”이란 말로써, 우리가 이보다 더 묘하고 위엄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그 영광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마치 그가 권세 있고 고귀하며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 말을 들을 때, 하나님에 대해서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무엇을 꿈꾼다든지, 우리의 작은 잣대로 그를 재려 한다든지, 그의 뜻을 우리 감정에 제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각을 보다 높이 고양시켜야만 하겠다.


첫째간구
“이름이 그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하)
17.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의 모든 탁월성들 곧, 그의 권세, 지혜, 의, 자비, 진리 등을 함축한다. 그는 의로우시기 때문에,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자비하시기 때문에, 권세 있으시기 때문에, 진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크고도 놀라우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구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이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탁월성들 안에서 거룩하여지기를 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아무 것도 더 보탤 것도 없고 또 뺄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이 위엄이 모든 사람들에 의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다시 말해 진정으로 인정되고 확장되기를 우리는 기도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그의 모든 사역이 본래 그러한 그대로 영광스럽게 나타나도록 하자. 만일 구가 벌을 주신다면 그가 의로우신 분이라고 선포하도록 하자. 또 그가 용서를 베푸신다면 자비로우시다 하고, 그가 약속하신 것들을 실행하시는 것을 볼 때 진실 하시다고 인정되도록 하자.
간단히 말해서, 어떤 것에든지 그의 영광이 비추이지 않는 곳이 없게 하고, 그리하여 그에게 돌리는 칭송이 모든 마음속에서, 또 모든 혀 위에서 울려나도록 하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불경건함이-그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욕하는 일(다시 말해 이 거룩함을 어둡게 하고 감소 시키는것)-소멸되고 수치를 당하도록 하자. 이같은 수치 속에도 하나님의 위엄은 더 찬란히 비추인다. 따라서 이 간구 속에는 감사가 또한 포함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어느 곳에서나 거룩히 되기를 기도할 때에 우리는 그분께 모든 선한 일들로 말미암아 찬양하는 것이 되고, 또 우리가 일단 한번 받은 모든 일들을 그분과 연관시키게 되고, 또 우리를 향한 그의 은총을 우리가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간구
“나라이 임하옵시며”(마6:10상)
18.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자기 백성 위에 행하시고 다스리어 그의 선하심과 자비의 부요가 그들이 하는 모든 일 속에 나타나지도록 하는 일이다. 반면에 유기된 자들은 파멸과 내던져짐을 당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주님을 위한 존재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도 않고, 그의 통치에 굴복하기도 거절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이러한 모욕적인 교만을 깨뜨리고 낮추어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향할 수 있는 세력은 그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 주는 일도 그의 나라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일상적으로도 우리 눈앞에 일어나고 있다. 곧 황홀처럼 세움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십자가와 경멸과 모욕 아래에서도 자라고, 지배하며 흥왕하고 또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속에도 번창함을 보여 준다. 물론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전1:21, 요17:14, 18:36, 롬14:17). 첫째는 그것이 영적인 것이요 또 모든 것들로 구성되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것이 부패하지 않고 영원하기 때문이다(눅1:33, 단7:14).
19. 이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오소서”라고 기도하고 것은 주님께서 새로 믿는 자들을 날이면 날마다 그의 백성을 더 보태사 그들이 모든 방법으로 그의 영광을 찬양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그의 부요한 은혜를 부으사 그들이 날마다 그 은혜로 살고 마침내는 그들이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도록 바라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그의 빛과 진리가 점점 더 밝히 비취어서 사탄과 그의 나라의 흑암과 오류가 소멸되고, 쫓겨나고, 불러가고,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소서”라고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그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 속에서 마침내 완전해지고 완성되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그날에는 그분만이 높이움을 받고, 모든 것 가운데 모두가 되시고, 그의 백성은 영광 가운데로 모이고 영접을 받겠지만 사탄의 나라는 완전히 휘파되어 낮추어지고 말 것이다(고전15:28).
셋째간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하)
20. 이 간구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하늘과 땅 모두, 곧 어느 곳에서든지-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듬고 조성하시기를, 모든 일의 결과를 다스리시기를, 자기의 창조물을 그의 결정에 따라 사용하시기를, 모든 존재들의 어떤 의지든지 그 자신에게 복종시키기를 구한다. 그의 뜻에 꼭 같이 순종하되, 어떤 이들은 자의적으로(그의 백성, 다른 이들은 내키지 않아 마지못해서(마귀와 유기자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피하려고 애쓴다)한다.
우리가 이같은 간구를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모두 버리고,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애정을 주님께 향하도록 조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우리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작정하신 대로 새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그의 뜻에 반항하는 모든 감정들을 그저 비워버리고 힘을 못쓰게 만들어 버리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새 정신과 새 마음을 창조하사 이것이 우리 자신의 것을 소멸해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겔36:26).
하나의 순수하고 또 하나님 뜻에 합치하는 뜻 외에 다른 어떤 욕구가 우리 속에 충동질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우리 자신들에 대해 스스로가 의지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서 의지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안으로부터 가르치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우리가 사랑하도록 만들고, 그를 노엽게 하는 것을 우리가 싫어하고 혐오하도록 만든다.
21. 이상으로 주기도의 첫 세부분을 생각해 보았다. 이 간구들을 할 때마다 우리 눈앞에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뚜렷이 나타나서, 우리 자신들은 고려에 넣지 말고 또 자신에게 이익될 것은 아무 것이라도 기대하지 않아야 하겠다. 물론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해 유익을 얻는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그 기도 속에서 그것을 구해서는 안되겠다. 우리가 간구하는 이 일들은 다 그때가 되면, 우리의 생각이나 바램이나 간구가 없이도, 일어나게 될 일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일들을 여전히 바라고 구해야만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적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최선의 능력을 다해서 하나님의 영예를 섬기는 그의 종이요 자녀로서 합당한 자인지 아를 통해 시험하고 또 밝힐 수 있다. 이 일을 우리는 우리 주와 아버지께 빚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넓히고자 하는 욕망과 열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을” 것과 “그의 나라가 올” 것과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와 종으로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런 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일들이 이루어질 때 그들이 맞을 결과는 혼란과 심판일 뿐이다.
넷째간구
22. 이것은 나머지 세 간구들의 첫 번째 부분이다. 나머지 세 간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일들을 특별하게 하나님께 부탁하고, 우리의 필요를 도와주시도록 구하는 기도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6:11)
23. 이 간구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우리 육신이 이 세상 요소 아래에서(갈4:3)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로 하는 음식과 의복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모든 것들을 전반적으로 구하는 것이며, 또 우리가 평화로운 가운데서 우리의 빵을 먹을 수 있도록 구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간구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의 보살핌에 맡기는 것이며, 그의 섭리에 우리를 의탁하여 그가 우리를 먹이고 자라게 하고 보존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육신조차도 당신의 보호와 인도 아래에 두시기를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빵 한 조각, 물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그분께로부터 얻기를 기대하는 사이, 이런 작은 문제들로써 우리 믿음을 훈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런 저런 연약 때문에 우리가 영혼보다는 육체에 더 큰 관심을 갖고서 동요되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용감히 맡기려 하는 자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용감히 맡기려 하는 자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육신의 문제로 고민하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고 있다. 그들은 수중에 포도주와 곡식과 기름을 넘치도록 가득히 넣어 두고 있지 않으면 두려움으로 떤다. 이렇게 이 지나가는 인생의 그림자가 저 영원한 불멸보다 더 우리에게 큰 의미가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육신에 더 큰 일들 곧 구원과 영생을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것들을 받고자 하는 소망으로 우리 믿음을 훈련해 가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다. 이런 소망이 없이는 우리는 염려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 없음을 밀쳐 버릴 때에 큰 유익을 얻게 된다. 보통 이런 불신앙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뼛 속 깊이까지 그 뿌리를 박고 있다(마6:25-33).
24.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빵을 우리 아버지에게서 구한다. 우리가 이를 “일용할”,“그날의”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만족을 모르는 욕망으로 그 지나가 버리는 것들 곧, 후에는 감각적 쾌락과 과시와 사치의 겉치레에 휘황찬란하게 낭비되어질 것들을 바라지 말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필요한대로 충분한 만큼만 구해야겠고 또 그것을 매일 매일 구해야겠다.
그렇게 하되 우리가 가지는 굳은 확신은, 우리 천부께서 오늘 우리를 먹이시듯이 내일 또한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아무리 재산이 흘러 넘치고 우리의 창고가 가득하고 또 선반마다 둘 자리가 없을 정도이더라도, 우리는 이 모든 소유들이 주님께서 당신의 축복을 쏟아 부으사 번창케 하고 열매를 맺게 하시지 않는 한 아무 것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줄을 , 항상 우리의 그날 양식을 구하도록 해야 하겠다. 비록 우리 손안에 들어 있는 것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작은 한 부분까지 매 시마다 우리에게 주시고 또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것이 도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을 보면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할 줄 모르고 고삐 풀린 욕망으로 무한정의 재물을 찾아 헐떡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의 부요에 흐뭇해 하며 자기들의 쌓아놓은 재물을 믿고 걱정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자의 사람들의 경우는 그들이 받고 싶지도 않은 것, 실제로는 완전히 경멸하는 것-말하자면 그 따위 매일의 빵-을 구하는 자들인데, 그들은 가능한 한 그들의 탐욕을 하나님 앞에서 감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마음 전체와 그 속에 감추인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것이다.
후자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최소한으로만 구하는 것, 곧 이미 자기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빵을 “우리의 것”이라 부름으로써 하나님은 그의 관대하심을 더 크게 나타내신다. 이는 결코 우리의 것이 도리 수 없는 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기 때문이다(참고, 신8:18),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구한다는 사실은,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오든지, 심지어 우리가 스스로의 기슬과 근면으로 얻은 것처럼 보이고 또 우리 자신의 손으로 공급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단순하고도 자유로운 선물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섯째 간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25. 이 간구로써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필요한 죄의 용서가 우리에게 베풀어지기를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빚”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께 죄 값을 빚지고 있기 때문인데, 이 빚은 하나님의 탕감으로 면제되는 길 밖에는 달리 그를 만족시킬 방법이 없다(롬 3:23-24).
이 자유로운 탕감은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비롯되는데 그분은 관대하게도 이 빚을 면제하시고 우리를 그것으로부터 풀어 주시며, 두 번 다시 그 빚의 지불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고, 그분 자신이 그리스도 곧 단번에 자신을 대속물로 아버지께 드린 그 안에서 스스로 만족을 취하신 것이다.(참고, 롬3:24). 그러므로 어떤 자들이 자기나 또는 타인의 공로로 하나님이 만족하셨다고 믿는다든지, 이런 만족을 통해 사죄의 댓가가 지불되고 구입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 자유로운 선물을 결코 나누어 받을 수 없다.
그들이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이는 스스로 자기를 고발하는 것이 되며, 자기 스스로의 증거로 자기의 정죄를 보증하는 것이 좋다. 그들이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비웃고 있는 사죄의 은총을 통해 자유를 얻지 못하는 한 자기들의 공로와 만족을 하나님께 아무리 들이밀더라도 이는 스스로 빚진 자임을 고백하는 일일뿐이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26.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용서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듯이”(마6:12), 즉 행동으로 우리를 부당하게 취급했든 말로 우리를 모욕했든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에게 해를 입힌 자들을 우리가 감싸주고 용서해 주듯이, 우리에게도 이런 용서가 오기를 간구한다. 이 말은 허물이나 불법의 죄를 사하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권리는 하나님께만 속한다(참고, 사43:25).
오히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편에서 할 수 있는 용서이다. 즉 우리 마음에서 분노나 증오, 복수심 등을 기꺼이 내버리고,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기억을 자발적으로 잊어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나쁜 일을 하는 자들이나 했던 자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도 우리의 죄 용서를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증오심을 잔뜩 품고 복수를 계획하고, 또한 우리 원수와 화해를 회복하기 위해 각양 호의를 보이며 좋은 인상을 주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런 우리가 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 죄를 용서하지 말라고 기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한 것처럼 해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마7:12)
참으로 이 간구의 뜻은 우리 자신이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가 우리도 용서하지 마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용서치 못하는 사람들이 이 간구를 통해 얻을 것은 더 엄중한 심판 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이 조건-즉“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것 (마6:12)-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데 합당한 자격이 되기 때문에 덧붙여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오히려 이 말로써 주님은 우리 연약한 믿음을 위로하시기만을 뜻하셨다. 우리 마음속에서 타인에 대한 모든 증오와 시기, 복수심을 다 비워버리고 깨끗이 하게될 때에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확실히 용서한 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실 때 우리가 그 용서의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표시로써 이 말씀을 덧붙여 주신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이 표시를 통해, 복수심에 불타고 용서하기에는 느려서, 다른 사람에게 지속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자기들은 하나님에게서 없어지기를 기도하는 그 화를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계속 불태우고 있는 그런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의 수에서 제외시키시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도록 하신다.
여섯째 간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3상)
27. 유혹의 형태는 많고도 다양하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어기도록 꾀는 것으로서, 우리 자신의 방자한 욕망이 부추겨서 생겨나든지 또는 마귀가 일으킴으로써 생겨나는 우리 마음의 악한 생각들이 바로 유혹이다. 이런 것들이 그 본성에 있어서는 악이 아니지만 마귀의 간계로 인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든지 등을 돌리게 만들 때에 이것들은 유혹이 된다. (약1:2, 14;참고. 마4:1, 3;살전3:5)
그리고 이 유혹들은 우로나 좌로나 어느 쪽에서든 온다(참고 잠4:27). 우로부터 온다는 말은 예를 들어서 부나 권세나 명예 등 그 휘황찬란함이나 가장 선으로 사람들의 예리한 눈을 흐리게 만들고 또 온갖 매력으로 치장하여 사람들이 그 계략에 포로가 되고 그 달콤함에 취하여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그런 종류들이다. 그리고 좌로부터 온다는 말은 예를 들어서 가난과 수치와 경멸과 곤경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이 주는 역경과 곤란에 위축되어져서 마음에 절망을 품고, 확신과 소망을 잃어버리고 마침내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어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방자한 욕망 때문에 우리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든 아니면 마귀의 간계로 생겨나는 것이든, 우리를 대항해 싸움을 걸어오는 이 유혹들에 우리가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이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붙잡고 격려하심으로 우리가 그의 능력으로 인해 힘을 얻어서, 우리 마음 속에 생겨나는 어떤 생각이든지 악한 대적이 일으키는 모든 공격에 맞서 든든히 설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방향으로 우리를 기울어지게 하든지간에 우리는 선한 방향으로만 나아가기를, 즉 번찬할 때도 교만하지 않고 역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시험을 전혀 느끼지 못하도록 되기를 간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나 무감각이 되어서 둔해지지 않도록 이 시험들로 인해 경성하고 재촉 받아야 할 많은 필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약1:2)
그래서 다윗이 시험받기를 원한 것도 경우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며(참고,시26:2), 또 주께서 매일 그의 택한 자를 시험하시되(창22:1, 신8:2, 13:3)치욕과 가난과 참사와 그밖에 다른 종류의 곤경들로써 하시는 것도 이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사탄과는 다르다. 사탄은 멸망시키고 저주하고 욕하고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증명하고 연단하기 위해 시험하신다. 곧 그들의 육체를 죽이고 정결케 하고 소독하려는 것인데, 만일 이런 제약이 없으면 육체는 방탕을 즐기고 또 도를 넘어 자기 자랑에 빠질 것이다. 이 밖에도 사탄은 무장도 되어 있지 않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을 몰래 기습하여 넘어뜨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험을 주실 때에는 피할 길도 주셔서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모든 것들을 꾸준히 참아낼 수 있도록 하신다.(고전10:13, 벧후2:9)
28. 그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은 이것이다. 곧, 우리가 어떤 유혹에도 정복당하거나 압도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굳게 서서 우리를 공격해 오는 모든 적대적인 세력들을 맞설 수 있도록 해 주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시험에 들지 않는 일이다. 또 우리가 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살핌과 안위와 보호를 입어서, 죄와 죽음과 지옥과 문과(마16:28)또 마귀의 전 왕국에 의해 정복당하지 않고 견딜 수 있도록 기도한다. 이것이 악에서 구하여지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힘센 전사인 마귀와 대항하고 또 그의 힘과 경격을 막아내는 힘이 우리 속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요령 없고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자기확신으로 그 전투를 준비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맞서야 할 적이 얼마나 사납고 노련한지를 충분히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미쳐 날뛰는 사자의 이빨을 피하듯이(벧전 5:8)원수의 세력을 피하도록 구해야 한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를 사망가운데서 건져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원수의 송곳니와 발톱에 즉시 산산조각으로 찢겨 그의 목구멍으로 삼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해 싸우시면 우리는 잠잠히 하여“하나님을 의지하여 용감히 행할 것이다”(시60:12; 참고, 107:14과 주석). 다른 사람들이야 하고 싶다면 자기들의 자유의지와 또 자기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게 내버려두라.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만 힘있게 설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자.
29. 이상 세 가지 간구 곧, 우리 자신과 우리의 소유를 하나님께 특별히 부탁하는 이 간구들은 우리가 앞서 언급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공적이어야 하며, 교회를 공적으로 세우는 일과 성도들의 교제를 증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사람들은 어떤 것들이 자기에게 사적으로 주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이 다 공동으로 우리의 빵과 죄용서와 또 시험에 들지 말고 악한 자들로부터 구함 받기를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이를 담대히 구할 수 있고 또 구한 것을 받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첨가되고 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하)
30. 이야말로 우리 믿음의 확고하고도 평온한 양식이다. 만일 우리 기도가 우리 자신의 어떤 가치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라면 누가 감히 하나님의 존전에서 입이라도 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비록 아무리 미천한 자라 할지라도 또 모든 칭찬을 잃어버린 자라 할지라도 이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이유를 잃지는 않으며 또 확신에서 끊쳐지지도 않는다. 이는 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우리의 아버지께서 결코 빼앗기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멘”이 첨가되었다. 이 말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모든 것을 얻기 원한다는 따뜻한 소원이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 확고한 이유는 이 모든 일들이 이미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이고, 또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들이라 그것들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C. 기도의 실제
31.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 또는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이 기도의 형식 속에 제시되었다. 이 기도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선생으로 세우시고 또 그 한 분만을 우리가 주목하고 들어야 할 분으로 세워주신(마17:5) 우리의 최고의 주인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물려준 기도의 규칙이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었고(사11:2) 동시에 사람들을 위하여 위대한 모사로 주어졌다(사9:6; 참고. 사28:29, 렘32:19). 그리고 이 기도는 모든 면에서 너무나 완전하여, 이것과 상관될 수 없는 외부적인 것이나 이질적인 것을 여기에 첨가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짓이며 또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기도에 요약하신 것은 하나님께 합당한 것, 그가 기뻐하시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요컨대 그가 기꺼이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감히 이 범위를 넘어 다른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원하는 자들은 첫째로,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에 무엇인가를 첨가하려는 것이니 이런 것은 비정상적인 모독에 불과하며,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면서, 자기들의 날뛰는 욕망을 따라 멀리 길을 일고 헤맨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믿음도 없이 기도하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런 기도는 모두 신앙과는 관계없이 하는 것이니, 이는 믿음이 굳건히 서기 위해 그 기반으로 삼아야 될 하나님의 말씀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자기들의 온 힘을 다하여 그 말씀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나 이 기도의 형식에 얽매인 나머지 그 일점일획이라도 바꾸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이해해서는 안되겠다. 성경 여기 저기에는 우리가 사용해서 유익을 얻을 다른 기도들이 많이 나타나 있는데 그것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많이 다르다 하더라도 그 역시 같은 성령님이 만드신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이것이다. 우리가 이 주기도에 요약적 방식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 외에는 아무 것이라도 기대하거나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요, 비록 사용하는 말들은 완전히 다를 수 있겠지만 뜻이 변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온 모든 기도와 또 경건한 이들이 드리는 기도는 모두 주기도와 관련 지워져야 한다. 참으로 이 기도와 같이 완전한 기도는 없으며 더 능가하는 것은 더군다나 없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생각해야 할 것과, 사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생각해야 할 것이 이 기도에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또 구조도 지극히 정밀해서 어느 누구라도 이를 개선해 보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요약하자면, 이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을 뜻하셨는지를 가르치고 또 필요한 그것을 뜻하셨음을 보여 주는, 바로 그 지혜의 가르침이란 사실을 기억하자.
32. 위에서 벌써 언급된 바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들어서 그를 앙망하며 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지만(살전5:17).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 기도가 여러 가지 방편으로 보조를 받아야겠고 또 우리의 나태함 때문에 자극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우리 각자는 기도의 실천을 위해 일정한 시간을 할당해 두어야만 하겠다.
그 시간들이 되면 기도 없이 보내서는 안되겠고, 그 시간 동안에는 우리 마음이 전적으로 기도에 바쳐져야 하겠다. 그런 시간들로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일고를 시작하기 전, 음식을 먹으려 식탁에 않을 때, 하나님의 축복으로 먹고 난 후, 그리고 하루의 휴식을 취하려 할 때 등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그저 미신적으로 시간을 지킴으로써, 마치 하나님꼐 빚을 갚는 듯이 그 나머지 시간은, 지불하고 남은 자기의 시간인 양 생각해서는 아니되겠다.
오히려 우리가 규칙적으로 시간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일종의 훈련이며, 이런 방법을 통해 연단을 받고 또 반복적으로 자극을 받아야 하겠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곤경을 당한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서 하나님께로 달려가되, 발을 빨리 할 것이 아니라 열심어린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한다. 또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번창하는 것을 보면 놓치지 말고 찬양과 감사로써 하나님의 손길이 그 속에 역사하심을 증거하도록 해야겠다.
33. 마지막으로, 우리의 모든 기도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특정 환경 속에 묶어 두고, 그에게 어느 시, 어느 장소, 일을 하시는 방법 등을 지정해 주려는 의도가 혹시 없는지 살펴보아야겠다. 우리가 기도에서 하나님께 어떤 법을 만들어 드리려는 것도 아니며, 또 어떤 조건을 제시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을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대로 그의 방법과, 그의 시간과, 그의 장소에서 그가 선히 여기시는대로 결정하시도록 맡겨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를 위해 어떤 기도를 짜내기 전에 먼저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겠다(마6:10). 이 말로써 우리는 자신의 의지를 주님께 복속 시켜서, 마치 고삐로 제재를 가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그분이 우리 모든 요청의 수행자와 지시자가 되도록 해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순종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법칙이 자신을 다스리도록 허락한다면, 그 즉시 우리는 참고 기도하는 법고, 자신의 욕망을 자제한 채 꾸준히 주님을 기다리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록 그분이 나타나지는 않으실지라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인간의 눈에는 그가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도 당신의 정하신 때에 그가 우리에게서 귀를 막고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선포해 주시리라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상존적은 위안은 이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번 간구에 응답하시지 않더라도 우리가 기진하거나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습관을 보면 보통 자기 열심에 떠밀려서, 하나님을 부르다가 그들의 첫 기도에 응답하지 않거나 즉시 그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화가 나 있거나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서는, 들으리라는 모든 희망을 포기한 채 그를 더 이상 부르지도 않는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여, 그가 우리의 악함에 지친 나머지 우리에게 대하여 화를 발하시게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특정 조건 아래에서만 계약을 맺어, 마치 하나님이 자기 욕구를 섬기는 종이나 된 것처럼, 그들 자기 자신의 요구의 법칙에다 얽어매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곧바로 이행하지 않으면 그들은 화를 내고 불평하고 반항하고 응얼거리며 분격한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의 은총을 입은 자들에게는 주시지 않는 진노를 가끔 내리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일의 증거를 보여주는데, 그들이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삼키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뻔한 일을 당하였던 것이다(민11:18,33). 그러나 기도하고 오래 기다린 후에도 기도로부터 받는 유익을 우리의 감각으로 알 수 없다거나 기도의 열매를 지각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을 확신하게 만들어준다. 곧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것을 우리가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난 속에서 부요를, 곤경 속에서 위로를 소유하도록 하실 것이다. 비록 모든 일이 우리에게서 실패하더라도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기 백성의 기대와 인내를 저버릴 수 없는 분이다. 그분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대신할 것이다. 이는 모든 선한 일들이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이것들을 심판날에 곧 그의 나라가 명백히 나타나게 될 그 때에 우리에게 밝히 보여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자들은 인내심으로 지탱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그들이 인내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오래 서 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가벼운 시험으로 연단 하시지 않으며 또 그들을 부드럽게 훈련 하시지도 않고, 때로는 그들을 극한상황까지 몰고 가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달콤한 은혜를 맛보기 전에 오랫동안 진창 속에 빠져 있도록 허락하시기도 한다. 이는 한나가 고백한 것처럼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삼상2:6)함과 같다. 곤경을 당하고 고독하여 이미 거반 죽게된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돌보시며 현재의 불행을 끝나게 해 주시리라는 생각으로 인해 소생도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국 낙담하여 절망으로 달려갈 밖에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Ⅳ 성례
A. 일반적 의미와 성례
1. 성례의 본질에 대해서는, 그것이 제정된 목적과 또 현재의 시행 목적을 동시에 배울 수 있도록 어떤 명확한 교리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선 성례란 무엇인가? 성례란 우리의 약한 믿음을 붙들어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선한 뜻을 나타내시고 확증해 주시는 일의 외적 표시이다.
또 다른 정의는, 외적 표시를 통해 우리에게 선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다. 이런 정의를 통해 우리가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성례에는 반드시 선행하는 약속이 있으며, 성례는 이 약속 자체를 확인하고 인치며, 그 약속을 우리에게 보다 명확하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무지와 우리 육신의 연약을 위해 친히 준비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 자체를 확증하는 일은 그 진리를 우리 속에 확립하는 일 보다 덜 요긴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그 자체로서 충분히 굳고 확실하다. 따라서 그 스스로 외에 다른 어떤 자료로써 더 나은 확증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방에서 받쳐주고 여려 방법으로 지탱해 주지 않으면 너무나 가볍고 약해서 흔들리고 요동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의 자비로운 주님께서는 그 자신을 우리의 능력에 맞추셔서(왜냐하면 우리들은 늘 땅 위를 기어 다니며 육체에 집착하고 또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 땅의 요소들을 통해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고, 우리가 바로 육체 그 가운데서 그의 영에 속한 것을 묵상할 수 있게 하셨다.
이는 성례에서 우리에게 제종하시는 은사들이 사물적 성질에 입혀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표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 은사들을 이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난관을 들어서 논쟁을 걸어오는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되겠다. 그들은 성례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참 뜻인지를 우리가 알든지 아니면 알지 못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따라오는 성례에서 새로 배우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모른다면 성례전 자체도(그 힘과 에너지가 그 말씀에 있으므로)그것을 가르쳐 주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정부의 문서나 그 밖의 공문서에 찍은 인장을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종이위에 찍었을 경우 그 날인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므로 인장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반면에 그 인장이 문서 위에 찍혀지면 거기에 적힌 내용을 틀림없이 확인하고 보증한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 비유를 근자에 우리가 고안해 낸 것이라 해서 트집을 잡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바울 자신이 할례를 가리켜 “인”이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롬4:11).
주님께서 그의 약속들을 “언약”이라 부르시며(창 6:18, 9:9, 17:2) 그의 성례를 언약의 “표”라 부르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 사이의 언약에서 하나의 유사를 찾아 볼 수 있겠다. 돼지를 잡는다고 해서 말이 그 행동에 수반되지 않으면, 아니 말이 선행되지 않으면 그 행위가 무엇을 하겠는가? 돼지는 내적이고 고상한 신비 없이도 늘 잡는다. 싸움터에서 손들이 서로 마주치는 때가 많은데 그 중에 오른손을 내어준다는 사실이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말이 선행 할 때에는 언약의 법들은, 비록 먼저 생각하고 결정하고 말로 발표했다 하더라도 그런 표징들로 인해 명백하게 입증을 받게 되는 것이다.
2. 그러므로 성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함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만드는 행사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육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성례도 육에 속한 것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선생이 아이들의 손을 잡아 인도하듯이 성례도 우리의 우둔한 능력에 수준을 맞추어서 가르치려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으로 그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 눈 앞에 제시하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성례를 더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다른 비유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곧 성례를 “우리 믿음의 기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건물이 물론 그 기초위에 서 있긴 하지만 그러나 기둥으로 괴어야만 더 확고하게 설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아 그 위에 있기는 하나 성례를 여기에 첨가함으로써 마치 기둥으로 받친 듯이 더욱 튼튼하게 서게된다.
또 다른 비유로 성례를 거울이라 부를 수도 있겠는데, 이때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위에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둔한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성례를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며, 또 우리에게 향하신 그의 선한 뜻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례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증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고 반박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성례가 악인들에게도 베풀어지는 것으로써 그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중한 정죄를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주장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그것을 배척했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보았고 인정했으면서도 그중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이 없다시피했는데, 그렇다면 이 사실 때문에 복음이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이제 확실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또 그의 선한 뜻의 은혜를 거룩한 말씀과 또 그의 성례 두 가지 다를 통해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확실히 이해 할 수 있는 자들은 확실히 믿음으로 말씀과 성례를 받는 사람들 밖에는 없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주어졌지만 그러나 그 모두가 그를 알아보고 영접하지는 않았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어느 곳에서 어거스틴은 이런 의미를 전달하고자, 말씀의 효력이 성례에 나타는 것은 말씀을 듣기 때문이 아니라 믿기 때문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성례가 우리의 믿음을 섬기도록, 다시 말해서 그 믿음을 기르고 연습시키고 중대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게 되었다.
3. 이런 견해에 반대하는 자들이 항상 사용하는 이유들은 너무나도 빈약하고 미흡하다. 어떤 자들은 말하기를, 우리의 믿음이 이미 좋은 것이라면 더 좋게될 수가 없을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를 굳게 또 꾸준히 믿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면 믿음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이생에서는 사람의 자식들 중 어느 누구도 얻을 바가 없고 또 얻지 못할 그런 완벽한 믿음을 염치없이 가장하고 앉았느니보다는 차라리 사도들처럼 주님께서 그 믿음을 더하여 주시도록 기도하는 편이 낫겠다(눅 17:5).
도대체 그들이 성경에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9:24)라고 기도한 사람은 어떤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지 대답해 보게 하라. 이 믿음은 비록 현재로서는 불완전한 것이지만, 일단 불신앙이 제거되고 난 후에는 좋은, 또 더 좋게될 수 있는 믿은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양심이 그 어떤 논증보다 더 확실하게 그들을 논박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죄인임을 자백하게 될 때 (이 사실은 어쨌거나 그들이 부인할 수 없다)이는 곧 나신들의 믿음이 불완전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그들이 하는 말은 빌립이 내시에게 그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는데(행 8:37) 것이다. 이렇게 믿음이 마음에 가득하다면 세례가 믿음을 굳게 할 여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들이 자시의 마음 한 쪽 구석에 믿음이 없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래서 그들이 매일 믿음이 자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지 묻고자 한다.
어느 뛰어난 한 사람은 가지는 배우면서 늙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 진보 없이 늙는다면 우리는 매우 가련한 그리스도인이다. 우리의 믿음은 인생의 모든 시기를 통하여 항상 성장해서 마침내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엡 4:13).
따라서 앞의 구절에서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이라 말한 것은 그리스도에게 완전하게 밀착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를 진정과 성실하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그로 인하여 배부른 상태가 아니라 배고프고 목말라서 열렬한 감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모한다는 의미이다. 성경에서는 어떤 일을“마음을 온전히 하여”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통상“성실하게 그리고 깊이있게” 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 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시119;10)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111:1, 138:1)등이다.
4. 또 다른 이들은 이렇게 쓰고 있다. 곧, 성례를 통해 믿음이 증가하는 것이라면 성령은 헛되이 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성령이 믿음을 시작케 하고 또 지속시키며 완성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믿음이 전적으로 성령의 고유한 사역이라는 점에서 그들과 동의한다. 성령의 조명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비의 보고를 알게 되는 것이며, 또 성령의 빛이 없이는 우리 마음 눈이 너무나 어두워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며 또 감각이 둔해서 영적인 것들을 아무것도 감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한가지만 말하는데 비해서 우리는 세가지를 인정하다. 첫째로는, 주께서 우리를 그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지도하신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는 말씀을 성례로써 확고히 하신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또 우리의 마음을 여사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시는데, 이런 일이 없이는 그것들이 그저 우리의 귀를 울리고 눈앞에 어른거리기만 하여 결코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성례는 더군다나 우리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어떤 때는, 그 성례에서 약속된 내용들에 대한 확신을 제거해 버리고자 하실 때, 성례 그 자체를 취하여 가버리시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불멸의 은사를 취하여 가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해 줄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나의 약속의 상징에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불멸에 대한 어떤 소망이라도 그에게 일깨워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제거해 버리겠다.” 사도가 에배소 교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림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였음을 상기시키는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그때에 그들은 할례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말한다(엡 2:11)여기에서 사도가 환유법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약속의 표를 받지 못했으면 약속 그 자체로부터도 제외된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또 다른 반대 - 즉,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에 내려오며 그 피조물에 많은 능력을 할당되어서 결국 그의 영광이 그만큼 감소된다는 것 - 에 대해서 우리의 대답은 준비되어 있다. 우리는 피조물에 어떤 능력도 두지 않는 다는 것이다. 내가 다만 하나 주장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주요 또 심판자이시며 따라서 그분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수단과 도구를 사용하여서 만물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몸에 필요한 빵과 다른 음식을 주어 먹이시고, 태양으로 세상을 비추시며, 이런 도구들로써 우리에게 그의 복을 나눠 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례로써 믿음을 영적으로 자라가게 하신다.
성례의 기능 중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눈앞에 두고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한 뜻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소용을 위해 정해두신 다른 피조물들에 우리의 신뢰를 두지 말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 그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을 우리 선의 원천으로 선포하고 경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성례 자체에 신뢰를 두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성례에다 전이시켜서도 안되겠다. 오히려 성례와 다른 모든 만물의 창조자인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고백이 동시에 올려지도록 해야겠고 다른 모든 것들은 한 옆으로 밀쳐 놓아야겠다.
5. 어떤 사람들은“사크라멘트”라는 용어로부터 그들의 잘못된 주장의 근거를 끄집어내고 있는데 이는 매우 현명치 못한 일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사크라멘트라는 이 말이 저명한 작가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표징”이란 뜻으로는 단 한가지만이 있엇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군인이 군복무를 위해 입대할 때 사령관 앞에서 행하는 엄숙한 맹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 군대식 맹세를 통해 사령관에 대한 충성을 약속하고 군복무에 대한봉사의 고백을 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표시를 통해 그리스도 우리의 사령관으로 고백하고 우리가 그의 기치 아래에서 봉사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을 더 명확히 밝히기 위해 다른 비교들을 덧보태고 있다.
로마인은 토가라는 겉옷을 입고, 그리이스인은 팔리움이란 겉옷을 입어 서로 구별되었던 것과 같이, 또 로마 내에서도 각 계급에 따라 독특한 표지가 있었던 것과 같이(원로운 계급을 기사계급과 구별해주는 자색 옷과 초승달 모양의 신발, 기사계급을 평민과 구별해주는 반지),우리도 우리를 불신자와 구별해주는 우리의 상징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꾸준히 선언할 수 있는 것은 이“사크라멘트”라는 말을 표징에 적용한 우리의 교부들은 라틴 문일들이 사용한 이 단어의 용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다만 그들의 편의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붙여서 거룩한 표징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이다.
6.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조사해 보고자 한다면, 교부들이 이 말을 현재의 의미로 전환해서 사용한 것은 “믿음”이란 말의 사용에 나타나는 동일한 유추법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믿음이란 약속을 수행 할 때의 신실성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사람이 진리에 대해서 가지는 확신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같은 방식으로 “사크라멘트”라는 말이 군인이 사령관에게 맹세하는 일을 의미하였지만 그들은 이 말을 사령관이 군인들을 계급 서열에 받아들이는 행위라는 뜻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례를 통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신다(고후 6:16, 겔 37:27). 그러나 이제 이런 세밀한 점들은 넘어가자.
나는 정말 많고도 명백한 논증을 통해 교부들이“사크라멘트”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에는, 그 성례가 거룩하고 영적인 일들의 표징이라는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 뿐이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대자들이 제시하는 비교들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들이 성례의 이차적인 것을 일차적인 것 내지는 유일한 점이라고 보고 있는 사실은 용납할 수 없다. 성례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믿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점이다. 그 후에야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 후자에 적용한다면 앞의 비교들은 타당성이 있다.
7. 반면에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이 사람들이 성례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 효력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데 반해, 그들과는 정반대의 쪽에서 어떤 사람들은 성례의 일종의 비밀스런 능력이 붙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능력을 주셨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읽어볼 수 없다. 이 위험한 오류에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속아 넘어간다.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얻을 수도 없는데서 찾으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점점 떼어 하나님의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허무한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가르침을 퍼뜨리고 있는 사람들은 두 종규가 있다.
그 첫째 부류가 가르치는 것은, 새로운 율법의 성례(현재 그리스고 교회에서 사용되는 것들)는 만일 우리가 죽을죄로 장벽을 쌓지만 않는다면 그것이 우리를 의롭게 하고 또 은혜를 입혀준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치명적이며, 유해한가는 이루 형언할 수 없다. 더군다나 과거 수백년동안 넓은 지역에서 이런 생각이 만연하여 교회에 큰 손실을 입혔다. 확실히 이것은 악마적인 교훈이다.
믿음과 관계없는 의를 약속함으로써 이 생각은 사람들의 영혼을 혼동과 심판으로 몰아 넣는다. 뿐만 아니라 고대의 저술가들의 글 속에서 읽어볼 수 있는 부적절한 성례 예찬론이 또한 영혼들을 미혹했다. 어거스틴의 주장이 그렇다. “옛 율법의 성례는 단지 구원을 약속만 해 주었으나 우리의 성례는 그것을 준다.” 사람들은 이 말이나 또는 비슷한 류의 표현들이 다소 과장된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한 술 더 떠서 이 교부들이 글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그들 나름대로의 과장된 역설을 출판해 내었다.
어거스틴이 앞에서 말한 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이야기 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곧,“모세의 율법의 성례는 그리스도를 예시했지만, 우리의 성례는 바로 그리스도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옛 성례들은 아직도 그를 기다리는 동안에 그를 나타내 주었지만, 우리의 성례는 이미 주어진 그분이 마치 현존해 있는 듯이 보여준다.” 이 구절에서나 또는 다른 설교문을 통해서 우리가 쉽게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성례가 그 표징에 있어서는 달랐으나, 표시하고자 하는 내용에 있어서는 동일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직책, 곧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그 안에서 하늘 은혜의 보고를 제시하는 직책을 가진다는 사실을 하나의 확정된 원칙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들에 의해 믿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도 없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처럼 파멸적인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실수를 범하고는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성례에는 수은 능력이 결합되어 있어서 잔에 포도주를 따르듯이 성령의 은혜들이 그 성례 속에 배분 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실성 성례의 유일한 기능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신 선한 뜻을 우리를 위해 확인하고 확증해 주는데에 있다. 그리고 그 성례는 성령께서 동반해 주지 않으면 더 이상의 유익이 없다. 이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 증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이가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한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들이 찬란히 빛나고 있다. 왜냐하면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 그 자체가 직접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을 알려주고 보여주는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성령(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무분별하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에게만 특별히 주시는)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들을 지니고 오시며, 그것들이 열매를 맺도록 하시려고 우리들 가운데에 성례가 있을 자리를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
8. “성례”라는 용어는 우리가 이미 그 본질을 논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의 신실성을 사람이 더욱 확실하게 믿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정하여 주신 모든 표징들을 전반적으로 함축하는 말이다. 때로는 자연물로 표징을 삼으시고 어떤 때에는 기적들 속에 그것을 나타내셨다.
첫 번째 종류의 예들은 이런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불멸의 보증으로 생명나무를 주시고, 그들이 그 열매를 먹는 동안은 불멸을 확신할 수 있게 하셨다(창 2:9, 3:22). 또 다른 예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후손들을 위해 무지개를 주셨을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후로는 홍수로 땅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신 사실에 대한 상기물이 되었던 것이다(창 9:13-16).
아담과 노아는 이런 것들을 성례로 어겼다. 그 자체로서는 영생을 줄 수 없는 생명나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며, 또 무지개(반대편 구름에 태양 광선이 반사되어 생겨난 현상에 불과한)가 홍수를 막는데 어떤 영향력을 끼쳤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그 생명나무와 무지개에 표를 새겨 두렸기 때문에 그것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증거요 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실 그나무는 전에도 한 그루 나무였고, 그 무지개 또한 하나의 무지개였다. 그러나 그것들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후로는 새로운 모양이 그것들 위에 입혀졌고 전에 아니었던 것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말을 헛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지금도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우리에게 증거한다.
우리가 무지개를 볼 때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속 곧, 땅이 홍수로 인하여는 멸망치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읽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변가가 우리의 믿음의 단순성을 조롱하기 위해, 저렇게 다양한 색책는 맞은편 구름에 태양 광선이 반사되어 저절로 생겨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것은 인정하자.
하지만 동시에 그 사람이 자연의 주인이며 주재자인신 하나님 곧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영광을 섬기도록 모든 자연의 요소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의 우매함을 비웃어 주자.
하나님께서 해와 별과 땅과 돌에 이런 상기의 뜻을 찍어 놓으셨다면 이 모든 자연물들이 우리에게 성례가 되는 것이다. 은덩어리와 은전이 꼭같은 금속이면서도 그 가치가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 그거은 은덩어리가 단지 자연상태로 있을 뿐이지만, 은전은 관인이 찍혀 그위에 은전으로서의 새로운 가치가 부과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님께서 그가 창조하신 사무들 위에 그의 말씀으로 표시를 내어 전에는 그저 단순한 자연물이었던 것을 이제는 성례가 되게 하실 수 없겠는가?
앞서 말한 둘째 종류의 예들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 승리를 약속해 주시기 위해, 양털에만 이슬이 있고 주변 땅은 마르게 하셨고 또 거꾸로 이번에는 땅에는 이슬이 내렸으나 양털이 젖지 않게 하셨던 일이 있다(삿 6:37-38). 또 히스기야에게 안전을 약속하시기 위해 일영표에 나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하셨다(왕하 20:9-11, 사38:7)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은 그들의 약한 믿음을 지탱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서 였으므로 이 일들 또한 성례이다.
9. 하지만 현재의 우리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서 그의 백성을 한 믿음과 또 그 한 믿음의 고백 안에서 키우시고자 일상적인 행사로 뜻하시 그 성례들에 대해 특별히 논하코자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성례들은 상징으로 뿐만 아니라 의식으로의 모습도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기 주어진 상징든 곧 의식이라 말해도 좋다. 따라서 이런 류의 성례를, 주님께서 그의 백성의 믿음을 훈련하고 강화하기 위해 뜻하신 의식이라 정의할 수도 있겠다.
성례들 자체는 역사상 각 세대에 따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람들에겐 이런 저런 모양으로 계시하신 그 다양한 방식으로 인하여 그 또한 여러 모양이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는 할례를 명하셨다(창 17:10). 후에 모세의 율법에서는 여기에 결례(레 11-15)와 희생제사(제 1-10장)가 첨가 되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유대인들의 성례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것들이 폐지되고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가지 성례가 제정되어 현재 기독교회가 사용하고 있다(마 28:19, 26:26-28).
그러나 고대의 그 성례들도 오늘날 우리의 성례들과 같은 목적을 지향했다. 즉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고, 손을 잡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거나 또는 형상으로써 그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우리는 이미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에 인치는 일이라고 배웠고, 더 나아가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주신 그 어떤 약속도 그리스도 밖에서 주어진 것이 없다는 사실도 확실하다(고후 1:20).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성례들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만 한다. 단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유대인의 성례는 그리스도를 아직도 기다려야 했던 시절에 약속된 그리스도를 예시했다면, 우리의 성례는 이미 주어지고 계시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데 있다. 이들을 따로 따로 설명하면 보다 확실해질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즉, 인류의 본성 전체는 부패하여 잘라버릴 필요가 있음을 경고하는 상징이었다.
뿐만 아니라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된 씨에 대한 약속, 그 씨 안에서 땅 위에 모든 백성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과(창 22:18), 그 씨로부터 그들도 자기 자신들이 받을 복을 기다려야 했던, 바로 그 씨에 대한 약속을 그들에게 확증해 주기 위한 표요 상기물이었다. 이제 그 구원의 씨가(바울이 가르치는대로) 바로 그리스도요(갈 3:16), 그 안에서만 사람들은 아담안에서 자기들은 잃어버린 것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할례는 바울의 가르침과 같이 아브라함에 대해 가졌던 같은 뜻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가진다. 곧 믿음으로 얻는 의의 상징이다(롬 4:11). 다시 말해서 그 씨를 기다리는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보증하는 일종의 인이다.
세례와 결례는 유대인들에게 대해서 그들의 본성이 스스로의 부정과 추악함과 오염으로 더럽혀졌다는 것을 밝혀준다. 그러나 이 의식들은 그들의 추함을 씻어 없앨 다른 씻음을 약속한다(히 9:10, 14). 이 씻음은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그의 피로 씻음을 받으며(요일 1:7, 계1:5)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치료를 받는다(사 53:5, 벧전 2:24).
희생제사는 그들의 불의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어떤 만족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인 어떤 대제사장이 있어서, 그가 죄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을 얻기 위해 피뿌림과 희생제물을 드려 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이 대제사장이 바로 그리스도이다(히 4:14, 5:5, 9:11).
그는 자기 자신의 피를 뿌렸고, 그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셨고,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함으로써 자신을 바치셨다(빌 2:8). 이 복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킨 인간의 불손종을 말소하셨다(롬 5:19).
10. 오늘날 우리의 성례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께서 더 가까이 사람들에게 계시됨으로써, 아버지께서 이미 약속하신대로 그리스도를 참으로 계시하신 때로부터 이 성례들은 그를 더 가까이 우리에게 현존하게 해준다. 세례는 우리가 씻어 깨끗하게 되어졌음을 증거하며, 성만찬은 우리가 구속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물에는 씻음이 피로는 만족이 표시되었다.
이 두 가지는 요한이 말한 것처럼 “물과 피로 오신”(요일 5:6)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진다. 그는 씻기시고 구속하시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의 영도 이 일의 증인이다. 그러므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하였다. 물과 그리고 피에서 우리는 씻음과 구속의 증거를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최우선적인 증인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 증거를 확신할 수 있게 해주신다. 이 고상한 신비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런 나온 때에(요 19:34)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에게 훌륭하게 제시되었다. 이 때문에 어거스틴은 십자가를 우리의 성례의 샘이라 불렀던 것이다. 우리는 이 이들을 아직도 보다 자세하게 논의해 보아야겠다.
B. 세 례
11. 세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첫째 목적은 그분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섬기기 위함이요, 둘째 목적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섬기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제 차례로 이 제도를 세우신 두가지 이유를 취급해 보겠다. 세례는 우리의 믿음에 세 가지 사항을 가져다 주는데 그 각각을 따로 살펴보아야 하겠다.
12.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세우신 첫 번째의 일은 이 세례가 우리의 씻음의 상징이요 증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우리가 그것을 더 잘 설명하자면)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용서되고 소멸되어 다시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재소환되거나 그 때문에 우리가 정죄받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애 주기 위해 보냄을 받은 전달자와 같은 것이 바로 이 세례이다. 믿는 모든 자가 죄사함을 위한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마 28:19, 행 2:38).
13. 따라서 세례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 신앙을 고백하는데 사용하는 하나의 표찰이나 표지에 불과하며 이는 군인이 그 충성선언의 표시로써 사령관의 휘장을 달고 다니는 것과 같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지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세례의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라는 약속과 함께 세례를 받는다는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이 쓴 것을 이해해야겠다. 곧,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로 인해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되었다는 것이다(엡 5:26). 또 다른 구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그리고 베드로가 한 말, “너희는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 3:21) 등이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이 우리를 깨끗하게 씻으며 구원한다거나 물 자체가 깨끗케 하고 중생시키며 새롭게 하는 힘이 있다거나 거기에 구원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성례에서 우리가 그같은 은사들에 대한 지식과 확신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말 자체가 충분히 확실하게 설명해 주는 바다.
바울의 생명의 말씀과 물의 세례를 긴밀히 연결시키고 있어서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복음을 통해서는 우리의 씻음과 거룩에 대한 소식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세례를 통해서는 이 소식이 인을 받는다.” 그리고 베드로도 이 세례가 육에서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믿음에서 온 선한 양심이라고(벧전 3:21) 첨가한다.
14.그러나 우리가 이 세례에 대해 생각할 때, 이것이 우리의 과거를 위해 베풀어진 것이며, 세례를 받은 후에 지은 죄를 위해서는 마치 전에 받은 세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듯 새로운 처방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겠다. 초기에는 이런 오류 때문에 사람들이 생명이 위급하거나 임종시가 아니면 서례받기를 거절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자기들이 일생 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겠다는 잘못된 생각이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어느 시기에 시례를 받든 우리는 그 단 한번으로 우리 전 생을 씻고 깨끗케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세례를 받은 기억을 회상하고 마음을 굳게 해서 항상 사죄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겠다.
세례는 단 한번 받고 지나가 버린 것처럼 보여질지라도, 그 후에 지은 죄로 인하여 무효가 되지 않는다. 세례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순결이 주어졌으며, 그의 순결은 늘 풍성하고 또 어떤 오점으로 더럽혀지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을 묻고 씻어준다. 이제 이사실로부터 앞으로는 마음대로 죄를 짓겠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물론 이 사실은 그런 대담한 짓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 교훈은 다만 자기 죄에 지치고 눌려있는 신음하는 죄인들에게 주는 것이며, 그들을 일으키며 위로할 것이 있도록 그들이 혼란과 절망에 바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하셨다고 했다.(롬 3:25).
바울의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죄를 용서 받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다만 가련한 죄인들, 곧 양심의 가책으로 상하여 의사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주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죄지을 기회와 방종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격발시킬 뿐이다.
15. 세례는 또 다른 위로를 전해준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것과 그 안에서 새생명을 받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사도가 말한 것처럼)“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4).
사도는 이런 말로써 우리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우리의 욕망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분발하도록 권면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보다 높은 어떤 것을 붙들도록 한다. 곧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의 죽음에 접붙이려 하신다는 것이다(롬6:5).
가지가 그 접붙인 뿌리에서 수분과 영양을 취하듯이, 올바른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육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참으로 느끼며, 성령이 생명을 주시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하는 것을 느낀다.(롬6:8) 이것을 근거로 삼아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롬6:11)
그는 다른 곳에서도 이와 꼭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안에 장사된 후에야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다(골 2:11-12). 그리고 바울은 내가 이미 인용한 구절과 같은 의미에서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함이라고 부르고 있다(딛 3:5). 그래서 요한이 처음 세례를 주었고 후에 사도들도 역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주었다.(마3:6, 11; 눅 3:16; 요3:23; 4:1; 행 2:38,41).
여기서“회개”가 의미하는 것은 중생이요, “죄사함”이 의미하는 것은 씻음이다. 이렇게 볼 때, 요한의 사역은 후에 사도들에게 맡겨진 것과 꼭같은 것이란 사실에 대해 우리는 전적인 확신을 갖는 것이다. 세례를 베푸는 자의 손이 다르다고 해서 세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같은 가르침에 근거한 같은 세례인 것이다.
요한과 사도들은 한 가지 가르침에 일치를 보았다. 양자가 다같이 회개를 위해 세례를 주었고, 죄용서를 위해 세례를 주었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데 곧 이 그리스도로부터 회개와 죄사함이 나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하였다(요 1:29).
요한의 이 말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희생제물이요, 그 자신이 화해자며 구주라는 것을 말한다. 사도들이 이런 고백 위에 무엇을 더 보탤 것이 있었겠는가? 그러면 요한이 말하기를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겠다고 한 것이 무슨 의미인가?(마3:11,눅 3:16).
이는 몇 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요한은 세례의 종류를 구별할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다만 자기와 그리스도의 인격을 비교한 것이다. 즉 자기는 물로 세례를 줄 뿐이지만, 성령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라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이 권능은 성령을 사도들에게0불의 혀와 같이 보내어 주신 그날에 하나의 가시적 기적의 형태로 선포되어졌다(행 2:3). 사도들은 이 이상의 무엇을 자랑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오늘날 세례를 주는 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단지 외적 표징의 수종자에 불과하고, 내적 은혜를 주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우리가 앞서 이야기해 온 육신을 죽임과 또 씻음의 일이 모두 이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예시되었는데, 이 때문에 사도는 그들이“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고전10:2). 주께서 자기 백성을 바로의 지배와 잔인한 속박에서 구출하여 홍해 속으로 그들이 건너갈 길을 만드신 후에(출14:21) 그들의 뒤를 바싹 뒤쫓아온 바로와 애굽 군대를 바다에 빠지게 한 일은(출 14:26-28) 몸을 죽이는 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즉, 죄의 노예 상태에서 구출하셨으며, 우리의 바로인 마귀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며 지치게 만들지만 그는 이미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을 세례가 우리에게 약속하며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애굽인들의 시체가 바다속에 잠기지 않고 바닷가에 흩어져서 그 흉측한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놀라게 했지만 그러나 그들을 해칠 수는 없었던 것과 같이(출 14:30-31), 우리의 원수 마귀도 우리를 여전히 위험하며 무기를 휘둘러 그 존재를 느끼게 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정복할 힘이 없는 것이다.
구름에서는(민 9:15, 출13:21) 씻음의 일이 상징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으로 덮어 서늘하게 하심으로 그들이 무자비한 태양열로 인해 기진맥진하지 않게 하신 것과 같이 우리는 세례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리움을 받고 보호를 받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가리움으로써 정말로 견딜 수 없는 불꽃인 하나님의 지엄하심이 우리를 엄습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16.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선전하는 가르침은 대단히 잘못되었음이 확실하다. 그들은 가르치기를, 세례에 의해서 우리가 원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면제되며 또 아담으로부터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유전된 부패를 면하게 되며, 또 만일 아담이 처음 창조된 상태대로 지속했더라면 그가 얻어 누렸을 그 의와 본성의 순결을 서례를 통해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교사들은 원죄가 무엇인지, 원의가 무엇인지, 또 세례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원죄란 것은 우리 본성이 타락하게 되고 부패한 것을 가리키는데, 이로인해 우리는 우선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고, 다음으로는 성경이“육체의 일”이라 부르는(갈 5:19)그런 것들이 우리속에 생겨난다. 이것이 성경에서 "죄“라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일어나는 일들-곧 음행,호색,도적질,증오,분쟁,살인,술취함 등-은 ”죄의 열매들“(갈5:19-20)이라 불러야 마땅하며, 성경에서는 때로 ”죄들“이라 불리고 있다.
17.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점을 주의 깊게 고려해 보아야겠다. 첫째는, 우리 본성의 모든 부분이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유죄 선고를 받은 자로 인정된다. 의와 결백과 순결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도 그분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아들조차도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저주를 지고 나온다(시 51:5).
비록 유아들이 자기 스스로의 죄의 열매들을 짓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들 속에 죄의 씨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의 전 본성은 죄의 씨이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가증할 뿐인 것이다. 세례를 통해 신자들은 이 저주가 그들로부터 제거되고 취소되었다는 활약을 받는다.
이는(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 표징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완전히 용서되었고 또 우리에게 부과된 죄책과 그 때문에 받아야 할 형벌이 모두 충만하고 완전하게 사하여졌음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또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생에서 받을 수 있는 그런 의를 오직 전가의 방법으로만 얻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고 결백하다고 그의 자비로써 인정해 주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고려해 볼 점은, 이 왜곡된 본성이 우리 속에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열매들을 낳는데(롬7장) 이는 앞에서 우리가 “육체의 일”이라고 묘사한 바 있는 것으로서 (갈5:19),마치 뜨거운 용광로가 끊임없이 불꽃과 불똥을 내뿜듯이, 또 샘에서 쉬지 않고 샘물이 솟아나듯이 그 열매들을 쏟아 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원리를 정의하여 “원의의 결핍”이라 한 사람들도 아직 그 원죄의 세력과 힘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은 선한 것이 전적으로 결핍되고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게으름 피울 사이도 없이 각종 악한 것들을 왕성하게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또 원죄를 “정욕“이라고 말한 자들도 있는데, 그들이 이 말을 - 그들은 결코 동의하지 않겠지만- 사람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나, 이해력에서부터 의지력가지 영혼에서부터 육체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이 정욕에 의해 더럽혀지고 잠식되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면 그들이 결코 낯선 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좀 더 간단히 표현하자면 인간이란 것이 전적으로 이 정욕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욕망은 사람에게서 그가 죽어, 사망으로 사망의 몸에서 해방되고 자기를 완전히 벗어버리기 전까지는 결코 죽지도 않으며 소진되지도 않는다. 세례가 우리에게 바로가 익사하고(출14:28), 우리의 죄가 죽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고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도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우리를 정복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육체라는 이 감옥에서 갇혀서 사는 동안에는 죄의 흔적은 항상 우리 안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신실하게 붙잡고만 있다면 그 죄의 자취가 우리를 지배하거나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다.
18. 그러나 누구라도 자기를 기만하거나 죄악 생활을 변명해서는 안된다. 죄가 항상 우리 안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 말은, 그렇잖아도 죄 짓기 쉬운 죄인들이 안심하고 죄악 속에서 잠자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육체로 말미암아 고통과 연단을 받고 있는 자들이 기진하거나 낙담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다.
이런 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아직도 도상에 있음을 생각해야 하겠고, 매일 정욕이 조금이나마 약해는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그들이 훌륭한 진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믿어야 하겠고,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때, 곧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끝나는 육신의 죽음의 순간에 이를 때에야 그 완성을 보리라는 것을 알아야겠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죽음이라는 세례를 받지만 이 일은 우리의 세례와 함께 시작되어, 매일 매일 이 목표를 추구해 가야하며 마침내는 이 생을 떠나 주님께로 갈 때에야 완성되리라는 것이다.
19. 마지막으로, 세례로부터 우리 믿음이 받는 위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삶에 접붙여 졌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에게 완전히 연합되어서 그의 모든 축복의 동참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세례를 자신의 몸을 바쳐서 거룩케 하여(마3:13) 그가 우리와 함께 누리실 연합과 교제의 가장 견고한 끈으로서 그 세례를 우리와 함께 공유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도 우리가 세례에서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고 있다(갈 33:26)
20. 나아가서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의 우리의 고백을 위해 봉사한다. 참으로 이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기를 원한다는 그 소원을 공적으로 나타내는 표시이다. 이 세례를 통해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합류한다는 것과 또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하나의 종교를 가진다는 것을 증거한다.
또 마지막으로 이 세례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혀와 우리의 모든 지체가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을 높이 찬양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능력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하며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하는 것을 본 받아 같은 노력을 하도록 격려받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고린도교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고전 1:13). 그가 암시하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들은 그에게 몸을 바치며, 그의 이름에 충성을 맹세하고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충실할 것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이 세례 받을 때에 한 약속을 취소할 생각이 없다면 앞으로는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을 고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21. 이제 우리가 주님께서 세례를 제정하신 목적을 설명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그 세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며 또 어떻게 받아야 할지를 판단하기는 쉬운 일이다. 세례란 우리의 믿음을 위로하고 강화하기 위해 주신 것이므로 우리가 그것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손에서 받는 것처럼 해야겠다. 이 표징을 통해 말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누리는 확실하고 증명된 일로 여겨야 하겠다.
또한 죄악들에 대한 기억을 정결케 하고 씻어 없애고 또 닦아 내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과, 우리를 그의 아들의 죽음에 동참다가 되어 사탄의 권세와 우리의 정욕을 그 아들 안에서 약화시키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 곧 우리에게 그의 아들로 옷입히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하자.
이같은 일들을 그가 우리 안에서 우리 영혼을 위해서 행사시는 것은, 우리의 몸이 물로써 외적으로 깨끗해지고 물에 잠기며 물에 둘러싸이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참되고 확실한 것이다. 우리가 영적인 일을 물질적인 것 속에서 보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런 유비와 비유가 성례를 위한 확실한 규칙인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영적인 것을 그런 표상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은혜들이 이 성례 속에 묶여서 갇혀 있기 때문이거나 이 성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들을 베풀어주는 기관과 도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주님께서 이 성례라는 표시를 통해 그의 은혜들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그 뜻을 우리에게 확인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 증거로써 백부장 고넬료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이미 죄용서와 또 성령의 가시적 은혜들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세례를 받았다(행10:48). 그는 세례에 의해서 더 많은 죄용서를 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더 확고하게 단련하고자 했다. 아마 혹자는 반박할지도 모른다. 죄악들이 세례로 인해 씻겨지는 것이 아니라면 왜 아나이나는 바울더러 세례를 통해 죄를 씻으라고 말했는가?9행 22:16;참고. 9:17-18)
나의 대답은 이렇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믿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그것을 처음 자각하든지 또는 전에 이미 자각한 것을 보다 확실하게 하든지 간에, 우리가 그것을 받고 얻고 또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말하고자 한 뜻은 이런 것이다. “바울이여, 당신의 죄가 용서된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세례를 받으시오. 주님은 세례로써 죄 용서를 약속하시니, 그것을 받고 안심하시오.”
하지만 우리가 이 성례로부터 얻은 것은 믿음으로 우리가 얻는 꼭 그만큼 일 뿐이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이것이 곧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았다는 것의 증거요, 그 안에 주어진 약속을 믿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고백의 상징인 한은 우리가 그 성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비 안에 우리의 확신이 있다는 것, 죄용서 속에 우리의 순결이 있다는 것, 또한 하나님의 교회에 모든 신자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의 완전한 일치 가운데서 조화롭게 살도록 속하여 지게 된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바울이 “우리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 12:12)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의미이다.
22. 이제 우리가 결정지은 것이 진실하다고 보자. 곧 성례는 그 집행하는 자의 손에서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것을 보내어 주신 분이신 하나님의 손에서부터 받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는 그 손으로 성례를 집행하는 자들의 인간적 가치로 무엇인가를 덧붙이거나 빼거나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 사이에서도 편지를 보내는데-그 필적과 봉인이 충분히 알아볼만 하기만 하면- 누가 혹은 어떤 종류의 배달인이 그것을 전달하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례들 속에서 우리주의 손길과 인을 알아보기만 한다면 어떤 전달자가 그것을 전달하든지 상관없다. 이런 논의로써 우리는, 사역자의 가치에 따라 성례의 힘과 가치를 측정하였던 도나투스파의 오류를 산뜻하게 반박하게 된다. 오늘날 재세례파들은 우리가 교황제도 아래에서 불경건한 우상숭배자들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이므로 그것이 올바르게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세례받은 사실과, 또 세례라는 것은 누가 그것을 시행하든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그들의 어리석은 이론에 강력한 논증을 갖추고서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세례 준 자들이 우리 무지하고 경멸스러운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들이고, 우리를 세례줄 때 자기들의 무지와 배도를 나누도록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위해 세례 주었던 것인데 이는 세례 시에 그들이 부른 것이 자기들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우리를 다른 어떤 이름으로 세례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세례였다면 틀림없이 거기에는 죄용서와, 육체의 죽음과, 영적으로 살리심, 그리고 그리스도에의 참여 등에 약속이 있었다.
이제 우리의 적대자들은 우리가 세례 받은 후 몇 년 사이에 어떤 믿음이 우리에게 생겼느냐고 묻는다. 이렇게 묻는 이유는,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때가 아니면 세례가 우리에게 대하여 거룩한 것이 되지 못하므로 결국 우리가 받은 세례가 헛되다는 것을 증명하여 하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답할 수 있는 것은, 진정 우리가 눈이 멀고 믿음이 없어 세례에서 받은 약속을 오랫동안 깨닫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그 약속에 대해서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언제가지나 확고하고 믿을만한 채로 있다고 답한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고 믿을 수 없을 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다(롬3:3).
모든 사람이 멸망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때에는 우리가 세례에서 유익을 얻지 못하고 있었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례를 통해 받은 약속을 무시한 채로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며, 이 약속이 없이는 세례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며 그분의 크신 선하심에 대해 오랫동안 감사할 줄 모른 우리의 맹목과 완고함을 자책한다.
하지만 우리는 약속 자체가 사라진다고 믿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에 의해서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약속하시며 의심의 여지없이 그 모든 약속을 모든 신자들에게 실행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약속을 세례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가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자. 참으로 우리의 믿음 없음으로 약속은 우리 속에 오랫동안 매장되어 있었다. 이제 우리가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아 들이자.
그러나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바울이 다시 세례를 주었다고(행19:2-7) 주장함으로써 우리에게 불창으로 공격하듯이 생각한다. 요한의 세례와 우리가 지금 받는 세례가 꼭 같은 것이라는 우리의 주장이 옳은 것이라면, 잘못된 교훈을 받았던 사람들이 올바른 믿음을 배운 후 에 그 바른 믿음으로 다시 세례를 받은 것이니 참된 교리가 없었던 그 세례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또 우리도 이제 비로소 처음 맛보고 있는 이 참된 종교로 다시 세례를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전의 세례가 요한의 참된 세례로서 그리스도의 세례와 하나요 동일 한 것이란 점은
인정하나, 그들이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부인한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행 19:15)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들이 바울에게서 진정한 교리를 배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더 단순하게 해석해서 이것이 성령의 세례라고 본다. 곧 성령의 가시적 은사들이 안수를 통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은사들을 “세례”라는 말로 나타내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에 따라오는 말과 모순되지 않는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행 19:6) 여기서 누가는 두가지 서로 다른 일의 요약을 말하고 이어서 그것을 더 자세히 설명했다. 글의 전후를 보면 누구든지 이를 파악할 수 있다.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행 19:5-6). 이 후자의 표현이 앞에 말한 세례의 성격을 묘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23. 이제 이것으로써 우리는 세례의 용도에 두 부분이 있음을 이야기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함이요, 둘째는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이 세례받는 이유에 대해 의문이 생기는데, 이는 아이들이 아지곧 그렇게 많은 증거들을 들어서 가르침을 받을만한 능력이 없고, 또한 밖으로 고백하기 위하여 안으로 믿음을 생각할 수 있을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유아세례의 이유에 대해 몇마디 설명해 보겠다.
이 죽을 인생으로부터 주님께서 유아적에 불러가시는 자들에서는 그들을 바로 천국의 상속자로 만드신다. 이제 영원한 복락은 하나님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왜 그는 그 선한 일을 언젠가는 완전히 누리게 될 그들에게 지금 여기에서 그 첫 열매의 맛을 조금이나마 주시지 않는 것인가? 왜 그는 언젠가는 얼굴과 얼굴을 맞댄 듯이 보게될 그들에게(고전 13:12)지금은 거울로 보듯이 희미하게만 보이게 하시는가? 우리가 이것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모든 사역이 얼마나 훌륭한지, 그리고 그의 작정은 우리 지성이 잴 수 없을 만큼 얼마나 깊은지 숙고해 보아야겠다.
더군다나 심지어 이 나이 때부터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그릇으로 선택을 받는 다는 사실을(롬 5:1) 우리가 고백한다면(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확실히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믿음이라는 것을 부인 할 수 없다(합2:4).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 믿음으로 산다면, 우리가 믿음에서 떠날 때는 아담 안에서 죽을 수 밖에 없다(롬 1:17). 명확한 증거가 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진술이 복음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 충분한 나이를 먹은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헤일 수 없이 많은 규칙들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나이든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러한 그들의 진흙탕에서부터 우리 자신을 빼내어야만 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본래 내가 의도했던 것보다 말이 길어졌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의도한 바를 달성한 듯하다.
c. 성만찬
24. 그리스도 교회를 위해 제정된 나머지 하나의 성례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거룩하게 된 떡과 그의 피 안에서 거룩하게 된 포도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성만찬 혹은 성찬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안에서 주의 선하심에 의해 신령한 양식을 공급받고 그의 친절하심에 대한 감사를 드리데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부가된 약속은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제정되었으며 어떤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지를 아주 분명히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것은 주의 몸이 영단번에 우리에게 주어져서 현재 우리의 것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장래에도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될 것임을 우리에게 확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그것은 그의 피가 영 단번에 우리를 위해 부어져서 항상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시켜 준다.
한편, 이것에 의해서 반박되어지는 오류는 성례가 신앙을 보호하고, 불러일으키고, 증가시키기 위해 주어진 신앙의 훈련임을 감히 부인하는 자들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가 친히“이 잔은 내 피로 세운 내 언약이다”(눅22:30; 고전 11:25)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약속의 증거요 증언이다. 그러나 약속이 어디에 있든간에 신앙은 그 자체를 지탱하고, 안위하고, 강화시킬, 방도를 가진다.
우리의 영혼이 이 성례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달콤함과 위로의 열매는 실로 지대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접붙여진 것이 또한 우리가 그에게 접붙여진 것과 같아서 그분의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우리의 것도 무엇이든지 그분의 것으로 간주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영생이 우리의 것이며 하늘나라가 우리에게서 끊어질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 없는 것과 같으며, 정반대로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해 정죄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정죄될 수 없는 것과 같은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이제 우리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임을 감히 확신하는 것이다. 어떤 죄책이 그분에게 전가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스스로 그들을 위해 자신을 빚진 자로 정하시고 떠 자신을 그 빚의 청산자로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측량할 수 없는 선하심에서 그분은 우리와 이러한 상호교환을 하셨던 것이다. 즉, 우리의 가난을 자신이 떠맡으시고, 우리에게는 자신의 부요함을 옮겨 주셨으며, 우리의 연약함을 자신이 걸머지시고, 우리를 그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셨으며, 우리의 가멸성(mortality)을 떠맡으시고 대신 우리에게 자신의 불멸성을 주셨으며, 자신이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늘로 올라 갈 준비를 갖추게 하셨으며, 우리와 함께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우리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셨던 것이다.
25. 이 모든 사실들이 이 성례 속에 너무나 완벽하게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마치 우리 눈앞에 나타나셔서 우리가 손으로 그분을 만지는 것처럼 우리에게 현현하셨다고 확실히 믿는다. 왜냐하면 다음의 말씀이 우리를 놀리거나 우리에게 거짓말하는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먹고 마셔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며 죄사함을 위해 흘린 나의 피다”(마26:26-28; 고전 11:24; 막14:22-24; 눅 22:19-20 비교).
우리에게 그것을 먹고 마시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그는 그것이 우리의 것임을 보여 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나의 몸이니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린 나의 피니라”리고 말씀하실 때 그는 이것들이 그분의 것임을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그것을 주셨던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성례의 모든 효력이 이 말씀들 가운데 있음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너희를 위해 주는”, ‘너희를 위해 흘린“라는 말씀이다. 만일 그 살과 피가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해 영단번에 주어지지 않았다면 지금 그것을 분배하는 것은 우리에게 별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 것은 떡과 포도주로 우리에게 제시되어 단지 그것이 우리의 것일 뿐 아니리 또한 우리를 위한 생명이요 양식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또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성례에 나타난 물질적인 젓들로부터 우리는 일종의 영적인 것들에 대한 비유로 옮겨 가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표시로 우리에게 제공된 떡을 볼 때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지탱시켜 주고 양육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이요 보호라는 것이다.
피의 상징으로 제시된 포도주를 볼 때 우리는 포도주가 육신에게 주는 유익을 생각하고서 그와 동일한 유익이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영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때달아야 한다. 이러한 유익들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새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그 지극히 거룩한 몸으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었는지, 또한 그 피로부터 어떠한 유익을 얻었는지를 깊이 생각한다면 떡과 포도주가 그러한 비유를 따라 그러한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채택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26. 그러므로 성례의 주된 기능은 단지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몸이 참양식이며 그의 피는 음료(요6:56)임을 증거하는 그 약속을 인치고 확증하는 것이다. 그 양식과 음료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영생에 이르게 된다(요 6:55). 도한 그 약속에 의해 그는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선포하신다. 그것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요6:48,50).
이것을 위해 성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해 간다. 거기서 그 약속이 참으로 실현되었으며 모든 면에서 완성되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을“생명의 떡”으로 부름에 있어 그는 그 이름을, 어떤 사람이 잘못 해석하는 것처럼, 성례로부터 빌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버지에 의해 그러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바 되었으며, 우리 인간의 가멸성에 동참하는 자가 됨으로써 우리로 그의 신적 불멸성에 동참하게 하였을 때 그러한 것으로 자기 자신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우리의 저주를 자신이 감당하시고 우리에게 자신의 축복을 불어 넣어 주셨을 때, 자신의 죽음에 의해 죽음을 삼켜버리고 제거해 버리셨을 때(벧전 3:22; 고전 15:54 비교), 또한 부활을 통해 자기가 입으셨던 우리의 이 썩을 몸을 다시 살리셔서 영광과 썩지 아니함에 이르게 하셨을 때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고전 15:53-54 비교).
그러므로 성례가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례가 우리에게 예수께서 우리가 늘 먹고 있는 떡이 되셨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성례는 그 떡의 맛과 풍미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리스도께서 하셨거나 고통당하셨던 모든 일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이 살리심은 영원한 것이어서 우리는 그것에 의해 평생 동안 끊임없이 양육을 받고 지탱되며 보존된다는 것을 성례가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나시고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만일 그가 우리를 위해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우리를 위해 생명의 떡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만일 그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의 효과적인 사역과 열매가 영원한 불멸의 일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결코 지금 이러한 것들이 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7. 만일 성례의 이러한 힘이 제대로 연구 검토되었다면 우리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이 발견되었을 것이며, 옛날부터 그리고 심지어 교회를 괴롭혀 왔던 그 놀라운 주장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어떻게 임재하는가를 규정하기 위한 인간들의 호기심에서 비롯된 노력들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교함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의 단순성에다,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리고 ‘실체로서’(substantia-ily)임재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과 꼭 같은 차원에 있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떡 자체가 몸이라고 주장했다.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떡 안에 있다고 주장하며, 또 어떤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표지 (sign)와 표상(figure)만이 제시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실로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을 두고서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사실주로 그런 식으로 믿어 왔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었는가를 물을 필요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그의 피가 우리를 위해 흘려졌을 때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전부를 소유하는 것과 그의 모든 유익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처럼 중요한 문제들을 간과하고서, 사실상 그것들을 무시하고 거의 사장시키고 있으면서 우리의 대적들은 단한가지 까다로운 질문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 질문은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는가 하는 것이다.
28.그러나 그처럼 복잡다단한 견해들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확실한 진리가 굳게 설 수 있겠는가? 첫째, 성례가 어떠한 종류의 영적 일인지 생각해 보자. 주께서는 성례를 통해 우리의 배가 아니라 영혼을 채워 주려 하셨으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게 하려 하셨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 육신의 감각들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이 나타나고 제시될 때 영혼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였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획득할 충분한 기을 가지게 된 것 이다. 왜냐하면, 이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얻게 되는 것은 성례로부터 어떤 열매들을 거두는 것이 그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한 후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성례를 통해 우리에게 제공되는지를 즉시 이해하게 될 것 이다. 즉, 그것이 어떻게 참 효과적으로 주어지는가 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 몸의 성질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들은 덜 익숙한 것들이기 때문에(머리에 못을 박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들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아마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전체를 요약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처녀의 몸에서 나심으로 우리의 육신을 입으셨을 때 정말 인간의 육신 안에서 고통을 당하셨다. 또한 우리를 위해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셨을 때에도 그러하셨으며 부활하실 때에도 참된 육신을 입으셨으며 그것을 지닌 채 승천하셨다. 우리는 부활과 승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육신이 바로 그것이 하늘나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 소망은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 되겠는가? 그러나 한 장소에 묶여서 그것 자체의 모습만을 가지는 것이 우리 육신의 불변하는 성질이다.
나는 어떤 완고한 친구들이 한 때 성급하게 생각했건 오류, 즉 그리스도의 육신이 소유했던 유일한 차원은 하늘과 땅에만 미친다는 것을 옹호하기 위해 어떤 말을 중얼거리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모태에서 아기로 태어났으며, 자랐으며, 십자가에 매달렸으며, 무덤에 묻혔다는 것-이것은 그가 탄생과 죽음과 또 다른 모든 인간사들을 면제시켜 주기 위하여 어떠한 특정한 세대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부활 후에 그는 생시에 육신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며(행 1:3; 고전 15:5 비교), 승천했으며(행1:9; 눅 24:51; 막 16:19), 마침내는 승천 후에 스데반(행7:55)과 바울(행9:3)에 의해 보여진바 되었다는 것-이것은 인간들이 보기에 그가 하늘에서 왕이 되셨다는 것을 분명케 해 주기 위해 동일한 세대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시온(Marcion)을 지옥으로부터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이러한 상태로 존재했다면 그것은 환상이었다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라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이 “속성의 교류(communication of properties)를 통해 되어졌다는 것을 보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한 것이다. 정말이지 영광의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바울이 말할 때 (고전 2:8)그것은 그가 자신의 신성에 따라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버림받고 멸시당하고 육신으로 고통당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이요, 영광의 주이셨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또한 하늘에 있는 인자였다(요 3:13). 왜냐하면 육신을 따라 지상에서 인자로 거하셨던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성을 따라 그 자리로 내려 오셨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신성이 육신의 감옥에 자신으로 감추기 위해 하늘을 떠나셨기 때문이 아니라, 비록 그것이 모든 것을 충만케 하셨지만 그리도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여전히 육신으로 거했기 때문이었다(골 2:9). 즉 본성에 의해 그리고 어떤 취소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29. 어떤 사람들은 조금 더 교묘한 회피의 방법을 사용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성례에 제시된 이 몸은 영광스럽고 불멸하는 몸이다. 그러므로 성례 하에 그것이 여러 장소에 나타날 수 있고 아무 장소에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아무 형체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는다. 주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 날 제자들에게 어떤 종류의 몸을 주셨는가? 말씀은 그가 그들에게 바로 그 죽을 몸을 주셨다고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앞서 자신의 영광을 제자 세 사람에게 변화산에서 보여 주시지 않았는가? (라고 이 사람들은 말한다)(마17:2).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장엄한 광경에 의해 그는 단지 불멸성의 맛뵈기만 보여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에서 자기 몸을 나누어 주었을 때 이미 때는 다가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고 낮추셔서(사53:4), 그가 문둥병자처럼 꼴사납게 엎드려져야 하는 때였다(사 53:2비교). 그때 자기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전혀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이 한 본문에서 가멸적이고 비천한 것으로 보인다면, 또 다른 구절에서는 불멸하고 영화로운 것으로 생각된다면 그것을 말시온에게 얼마나 넓은 문을 열어 주는 셈이 되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처럼 거대한 불합리를 간과한다. 단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에 관한 나의 질문에 대답하게 하라.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이 아니었는가? 그들은, 그러나 그것은 장소도 없었고, 여러 곳에 걸쳐 있었으며, 형체도 없었고, 부피도 없었다고 마라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에 의해서가 아니라 완곡한 표현에 의해서 그것을“영”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부활을 명백히 부인하든지 혹은 그것이 부활했을 때 그것은 여전히 육체였으며 이점에서 영과 달랐다는 것, 그것은 장소와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었다는 것, 그것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닫힌 문을 통해 제자들이 있던 곳에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거듭 거듭 반대하는 그들의 입장을 조금도 지지하지 않는다(요20:19).
그는 과연 놀라운 방식으로 그 안에 들어 가셨다. 왜냐하면 그는 완력으로 그것을 때려 부수지도 않았고 사람이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힘으로 모든 장벽이 제거되게 작용하셨기 때문이디. 게다가 들어가신 후에 그는 제자들에게 자기 몸의 실제성을 증명해 보이셨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 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나는 있느니라”(눅 24:39).
보라!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은 진짜 육체임이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지고 볼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제하고 나면 그것은 진짜 몸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악담을 한다고 우리를 비난함으로ㅅ 자신들의 악의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리석게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든지 아니면 비겁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하고자 하셨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기뻐하시는 바가 이루어졌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있어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는 것이 그의 기쁘신 뜻 이었다(히4:15).
우리 육신의 본성이 어떠한 것인가? 그 자신의 고정된 차원을 가지고서 한 장소에 제한되어 있으며 만지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 동일한 육체가 여러 가지 다양한 장소들을 차지해서 어떤 장소에도 제한되지 아니하고 부피와 모양이 없게 만드실 수 없단 말인가(고 그들은 말한다).
정신 나간 자여! 당신은 왜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하여금 동시에 육신이 되게도 하고 되지 않게도 하라고 요구하는가? 그것은 마치 당신이 하나님께서 빛으로 하여금 동시에 빛과 어두움이 되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는 빛은 빛이, 어두움은 어두움이, 육신은 육신이 되게 하실 것이다 정말이지,그가 기뻐하신다면 그는 어둠이 변하여 빛이 되게 하실 것이고 빛이 변하여 어두움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빛과 어두움이 다르지 않기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질서를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육신은 육신이 되어야 하며 영은 영이 되어야 한다. 각 사물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신 상태와 여건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육신의 조건이 그 자신의 크기와 모양을 가진 채 한 특정한 장소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가지고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취하셨으며 그것에 썩지 아니함과 영광을 부여하시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본성과 진리를 제거하시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승천 하셨으며 하늘로 올라가신 그 모습으로 재림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성경의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 목이 곧은 대적들이, 그는 승천하셔서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재림하시겠지만 그 동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대답할 이유는 전혀 없다. 사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살과 뼈를 가졌는데 그것은 만져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증거하셨다(요20:27).
또한 “떠남”과 “올라가심”은 한 벌의 올라가심과 떠나심의 모양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사실상 말씀이 진술하고 있는 바를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록 그가 우리로부터 자신의 육신을 옮겨 가셨고 또한 육체 안에서 하늘로 올라 가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말하자면, 그는 아버지의 능력과 위엄과 영광 속에서 통치하시는 것이다. 이 왕국은 어떤 장소에 의해 공간 속에 제한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한계에 의해 경계가 설정되는 것도 아니가. 그리하여 아무런 제한을 받음이 없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어느 곳에서든지 원하시는 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행사하실 수 있으며, 능력과 권능으로 자신의 임재를 보여 주실 수 있으며, 항상 자기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 안에 사시고, 그들을 지탱시키시고, 그들을 강화 시키시며, 소생시키시며, 보호하실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몸 안에 계시는 것처럼 말이다.
30.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례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지 그 외의 방법으로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그가 진리와 효과적 사역 안에서 제시되는 것이지 본성 속에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말의 뜻은 분명히 그의 몸의 실체나 그리스도의 자연적 육체가 거기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그 모든 유익들이 그의 몸 안에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성례의 성격이 요구하는 몸의 임재는 그러한 것이다. 한 분이 여기서 너무나 위대한 능력과 권능으로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영생에 대한 확신을 줄 뿐 아니라 우리 육체의 불멸성에 대한 확신까지 주신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것이 그의 불멸하는 육신에 의해 소생하며 어떤 의미에서 그의 불멸성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과장에 의해 이 이상 나아가는 자들은 단지 그러한 궤변을 통해 단순하고 분명한 진리를 혼란시키고 있을 뿐이다.
31. 그러나 만일 어떠한 비타협적인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놓고 우리에게 논쟁을 제기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나의 몸이요, 이것은 나의 피라 하셨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여기서 그에게 잠시 동안 나와 함께,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은 성례에 대해서인데 그것은 전부 믿음과 관계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가 선언한 이 몸에 참여하는 것과 함께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을 하늘로부터 끌어내리려는 자들만큼이나 풍부하게 믿음을 공급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끈덕지게 그 말씀에 달라붙는다면 그 말씀도 또한 놀랍게 우리를 지지한다. 마태와 마가는 주께서 잔을“그의 새 언약의 피”라 부르셨다고 말한다. 누가와 바울은 “피로 세운 언약”이라고 말한다. 비록 당신이 이것은 몸이요 피다라고 소리친다 할지라도 나는 이것이 몸과 피로 세운 언약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바울은 성경의 해석이 믿음의 분량(영어 번역에는 analogy라고 되어있음: 역자주)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롬12:3,6). 이 경우에 그것이 나를 지지하고 있음이 너무나 명백하다. 당신이 어떤 믿음의 정도를 따르고 있는지 유의해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가 아니다(요일4:3). 비록 당신이 그것을 감춘다 할지라도 당신을 그리스도께서 진짜 육신을 가지셨음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32. 이러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물질에 경배하는 오류를 면케 해 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릇된 경솔함으로 그러한 우를 범했는데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만일 그것이 몸이라면 영혼과 신성이 육체와 함께 있으며 육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거기서 그리스도에게 경배해야 한다. 일단 우리가 우리 자신의 꿈속에서 방황하게 되었을 때의 결과를 보라!
그러나 만일 그러한 논리를 전대한 주모자들이 자신들의 지성의 산물인 이 모든 생각들을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시켰다면 틀림없이“집어 먹어라, 마셔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며(마26:26-27) 그 명령에 순종했을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그 말씀을 통해 성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셨지 그것에 경배하라고 하시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명하신대로 성례를 받는 자들은 그러한 경배 없이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에 임할 때 이러한 확신보다 더 큰 위로를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사도들의 모범을 보고 있다. 사도들은, 우리가 일고 있는 바와 같이, 엎드려 그것에 경배하지 않았고 누운 채로 그것을 받아먹었다. 그들은 사도적 교회의 전례를 가지고 있다.
누가가 말해 주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경배함으로써가 아니라 떡을 떼는 가운데 교제했던 것이다(행 2:42). 그들은 사도적 교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가지고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교훈하면서 말하기를, 자기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전해 주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1:23).
그러나 성례에 경배하는 자들은 한마디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 자신의 주장과 억측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몸”과 “피”라는 말을 크게 강조한다 할지라도 어떤 멀쩡한 정신을 가진 자가 그리스도의 몸이 그리스도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정말이지 그들은 자신들의 정교한 이론을 가지고서 그것을 깔끔하게 증명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양심이 어떤 보다 엄숙한 느낌에 의해 우연히 고통을 받게 된다면 그들은 쉽게 자신들의 논리와 함께 넘어지고 해체되어 버릴 것이다. 또한 자기들이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으로부터 이탈되어 있음을 알게 될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회개하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 위에만 굳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다면 사도들의 교훈과 모범이 그들을 대적하고 있고 또한 그들 자신만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권위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그들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또 다른 날카로운 양심의 가책이 그러한 충동에 가세할 것이다. 뭐라고?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제시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이러한 형태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고? 하나님의 영광과 경배가 관련되었을 때, 말씀이 아무 곳에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을 그들은 그처럼 가볍게 행했어야만 했다고?
더군다나 성경이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 우리에게 아주 자세한 설명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승천에 의해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에 대한 모든 육적 생각들을 버리게 하셨으며 그것이 그리스도를 기억나게 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분발해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그를 찾으라고 경종을 울려 주신다(골3:1-2)-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육적이고 조잡한 개념으로 가득찬 어떤 위험한 종류의 경배를 고안하느니 보다는 하늘 영광 가운데 계신 그분을 영적으로 찬양했어야만 했다.
그럼으로 성례에 대한 경배를 고안해낸 자들은 성경과는 별도로 저 혼자서 그것을 꿈꾸어 온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러한 경배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었다면 결코 간과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으로부터 어떤 것을 제거하는 것 보다 첨가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는 자들은(신13:1)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정욕의 결정으로 따라 우상을 만드는 동안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저버렸다. 그들에게 선물을 주신 자 대신에 선물들을 숭배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이중의 과오를 범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취한 영광이 피조물에게로 옮겨졌으며(롬1:25비교), 그의 거룩한 성례가 가증스런 우상이 될 때 자신의 선물이 더럽혀지고 모독을 당하므로 그분 또한 모역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그와 동일한 함정에 빠지는 것을 피하고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과 생각과 혀를 온전히 하나님의 거룩하신 가르침에 고정시키자.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선생이신 성령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진보를 이룩함으로 다른 곳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필요가 없으며 거기서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기꺼이 눈을 감아야만 하는 것이다.
33. 우리는 앞에서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위해 기여하는지를 논의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성례를 통해, 우리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그의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게 하신다. 동시에 그는 우리가 그처럼 풍성한 은혜에 대해 배은 망덕하지 말고 적절한 찬양과 함께 그것을 선포하고 감사함으로 그것을 전파하라고 권고하신다. 그러므로, 그가 사도들에게 성례제도를 주셨을 때 그는 그들이 그를 기념하여 그것을 행하라고 가르치셨다(눅22:19). 그것이 바로“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으로 바울이 해석했던 것이다(고전11:26).
말하자면 공개적으로 또한 한 목소리로 사람들 앞에서 생명과 구원에 대한 모든 보장이 주님의 죽으심에 달려 있다는 것과 우리의 고백에 의해 그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으며 우리의 본보기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권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성례의 목적이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성례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을 훈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라“(고전11:26)는 명령을 우리가 우리 입술의 고백에 의해 우리의 신앙이 성례를 통해 인정하는 것을 선언해야 함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외적 고백과 관련된 성례의 두 번째 용도이다.
34. 셋째로, 주께서는 도한 성만찬이 우리를 위한 일종의 권면이 될 것을 의도하셨다. 그것은 다른 어떤 다른 수단보다도 강력하게 우리를 소생시켜서 우리에게 사랑과 평안과 조화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심으로 그가 완전히 우리와 하나가 되고 우리가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단 하나의 몸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 모두를 그 몸에 참예케 하시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또한 그러한 참여에 의해 한 몸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성례로 나타난 떡이 이 하나됨을 반영한다. 그 떡은 많은 곡식알들이 섞이고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므로 한 사람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식으로 우리가 연합되고 함께 묶여서 우리 사이에 어떤 종류의 불화나 분리가 틈타지 말게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바울의 말을 빌어 그것을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그런즉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 함이라”(고전 10:16-17).
만일 이러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 진다면 우리는 성례로부터 아주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즉 형제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을 해치고, 비방하고, 조롱하고, 멸시하거나 어떤 식으로든지 분개하게 만드는 것은 동시에 그리스도를 해롭게 하고, 비방하고, 조롱하고, 멸시하는 것이며, 우리 형제들과 불화하는 것은 동시에 그리스도와 불화하는 것이며, 형제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으며, 형제들은 우리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돌보듯이 우리 형제들의 몸도 돌보아야 하며, 우리 몸의 한 부분이 어떤 고통을 당하면 그것이 온 몸에 퍼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동정을 느끼지 않고서는 형제가 어떤 해를 입도록 버려두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이 성례를 자주 “사랑의 끈” 이라 부른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자기 자신의 모범에 의해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자신들을 주게 할 뿐 아니라, 그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자신을 나타내시므로, 또한 우리 모두를 그 안에서 하나 되게 만드실 때에야 말로 우리 사이에 사랑을 가장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35. 우리는 성만찬의 이 거룩한 떡이 신령한 양식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생명이 되도록 주신 자들에게 달콤하고 오묘하여 그들로 하여금 감사하게 하며 그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권면이 됨을 본다. 한편, 그것은 성례를 통해 감사와 사랑을 배우지 못한 자들, 즉 성례가 감사와 사랑을 일으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된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누구든지 주의 ㄸ■ㄱ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 이니라”(고전11:27,29). 우리는 이 귀 절에서 “주의 몸과 피를 분변치 않는 것”과“그것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이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 믿음도 없이, 사랑을 위한 아무 열심도 없이 주의 만찬을 먹기 위해 돼지처럼 돌진하는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은 주의 몸을 전혀 분변치 않는다. 몸이 그들의 생명임을 그들이 믿지 않는 한 그들은 그것을 모욕하여 그것으로부터 모든 위험을 도적질 하며 마침내 그런 식으로 그것을 받음으로써 그것을 오염시키고 모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형제들과의 조화에서 벗어나 버렸고 그리스도의 몸의 거룩한 상징을 그들의 불일치와 감히 혼합시켜 버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 찢어지고 분열되는 것은 그들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신성모독적인 불경으로 더럽혔던 주의 몸과 피에 대한 죄책을 걸머짐이 마땅하다. 이리하여, 그들은 주의 몸과 피를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신들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고정된 믿음이 전혀 없으면서도 성찬을 받음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그분 안에만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모든 다른 확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들 자신을 고소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으며 자신들을 정죄하는 일에 인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그들이 증오와 악의에 대해 다른 형제들로부터, 즉 그리스도의 지체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이것만이, 즉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이것만이, 즉 그리스도에 참예해서 그와 연합하는 것만이 구원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몸의 실제적 임재를 위해 이 본문을 헛되이 반복 제시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실제적 육체에 대하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의 변명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36. 이 때문에 바울은 사람이 자기를 살핀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한다고 명한다(고전11:28) 그 말의 뜻은 각 사람이 정신을 가다듬고서 자신이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인정하고 있는지를 숙고해 보라는 것이다.
입술의 고백으로만 그것을 안정하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형제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고 함께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나타낼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가 그리스도의 지체로 생각되고 있는 것처럼 그도 모든 형제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로 간주하고 있는지, 그들을 자기 자신의 지체로 아끼고 보호하고 도울 맘이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믿음과 사랑의 이 의무들이 지금 우리 안에서 완전해 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다해 이 목적을 향해 노력하고 그것을 갈망함으로 날마다 이미 시작된 우리의 믿음을 증가시키고 우리의 연약한 사랑을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37.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합당하게 먹을 준비를 하게 할 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련한 양심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런데도 그들은 목적에 부합되는 결과를 전혀 얻지 못한다. 그들은, 은혜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합당하게 먹었다고 말했다. ;은혜의 상태“란 모든 죄를 씻어 내어 깨끗한 것을 의미한다고 그들은 해석했다.
그러한 도그마는 지금까지 지상에 존재했거나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성례에서 제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만일 문제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 자신의 가치를 찾는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파멸과 혼란이 있을 뿐이다. 비록 우리가 전력을 다 기울인다 할지라도 아무 성과가 없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가치를 찾아 온갖 수고를 다 한 후에 우리는 단지 지극히 무가치한 존재들이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가치를 획득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있는 힘을 다해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모든 행위들을 다 설명할 것을 요구한 후 우리는 참회와 자백과 보속에 의해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무마 시키려 하는 것이다. 뒤에 가서 보다 적절한 곳에서 이 무마의 성격을 언급하기로 하겠다.
현재의 과제에 관한 한, 나는 이러한 처방들이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해 상심하고 찢긴 심령들에게 너무 약하고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 주께서 금지령을 내리셔서, 의롭고, 무죄한 사람만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신다면, 모든 사람이 자시 자신의 의로움을 확신해야 한다는 엄중한 주의 가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근거에서, 지신들의 최선을 다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임무를 다 수행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그것이 그렇다 할지라도, 언제 어떤 사람이 자기 최선을 다했고 확신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우리의 가치로움에 대한 명백한 확신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 문은 항상,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그 무서운 금지에 의해 닫힌 채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고전11:29).
이제, 그 교리의 성격과 그것이 어디에서 생겼는가를 판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련한 죄인들에게서 이 성례가 주는 위로를 빼앗아 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복음이 주는 모든 기쁨이 담겨 있다. 확실히 마귀로서는, 그들을 그처럼 혼란시켜 그들이 그 음식-그들의 지극히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주고자 하셨던-을 맛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을 파멸시킬 수 있는 가장 신속한 수단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38. 그러므로, 그러한 혼란과 파멸로 줄달음질 쳐 가지 않도록, 이 거룩한 향연이 병자들을 위한 약이요, 죄인들을 위한 위로며,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그러나 건하고 의롭고 부유한 자들에게는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한다. 만일 그런 자들이 있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통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 없이는 우리가 말라 죽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우리에게 생명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우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분명히 죽은 자들임을 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가치이다. 즉, 우리의 간악함과(말하자면) 우리의 무가치함을 그분에게 그려서 그분이 자신의 자비로 우리를 그분에게 가치 있게 만드시는 것, 또 우리 자신에게 절망해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위로를 얻는 것, 또 우리 자신에게 절망해서 우리가 그 분 안에서 위로를 얻는 것, 또 우리 자신을 정죄함으로써 그분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게 하는 것, 또한 그가 그 분 안에서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지고 같은 말을 하게 되기를 사모하는 것이 그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충분히 심사숙고 하였다면 이러한 생각들이 결코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선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고 죄로 더럽혀졌으며 거의 반죽은 우리가 어떻게 주의 몸을 합당하게 먹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가난한 자로서 자비로운 시혜자에게, 병든자로서 의사에게, 죄인들로서 구주에게 나아오며 우리의 가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에 있지 우리 자신에게는 전혀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사랑 안에서 또한 불완전하나마 바로 그 사랑을 우리는 하나님께 바침으로 그가 그것을 우리가 공급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한 어떤 것으로 증가 시키게 하는 것이다.
39. 어떤 사람들은 가치 그 자체가 오직 믿음과 사랑 안에만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와 의견을 같이 하면서도 여전히 가치의 표준에 관해서는 심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결코 획득 될 수 없는 완전한 신앙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과 꼭 같은 사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앞서 언급한 자들과 같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 지극히 거룩한 성찬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합당하게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인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의식을 가지고 있어 자기 자신의 불완전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찬을 받는데 있어 그 성찬이 텅비고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정도의 완전을 요구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가지는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분명히 과도한 어리석음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한 자들이 아니라 약하고 우력한 자들이 믿음과 사랑의 결핍을 깨닫고, 일깨우고, 자극하고, 훈련하도록 제정된 성례이기 때문이다.
40. 우리가 지금까지 성례에 대해 언급한 많은 것들은 그것이 일년에 단 한번만, 그것도 현재 행해지고 있는 바와 같이 아주 기계적으로 시행되도록 제정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자우 사용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주 기억하고 또 그러한 기념에 의해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며 강화하고 감사의 찬미를 부르면서 그의 선하심을 선포하도록 격려하고 드디어는 그것에 의해 상호간의 사랑을 배양하고 그들 사이에 이 사랑을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 속에 그 유대를 분별하도록 제정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고받은 표시로서의 주의 몸의 상징에 참여하는 만큼 우리는 사랑의 모든 책임에 우리 자신을 서로 묶게 됨으로써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우리 형제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어떤 것을 허용치 않게 되며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을 간과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그것이야말로 사도 교회의 관습이었다고 말한다. 믿는 자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떡을 떼며,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계속 했다”(행2:42)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의 어떤 모임도 말씀과 기도와 성찬과 구제 없이는 이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불변의 법칙이 생겼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고린도인들 사이에 확립된 규례이기도 했다는 것을 우리는 바울의 말로부터 넉넉히 추정할 수 있다(고전11:20).
우리가 일년에 단 한번만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이 관습은 분명히 마귀가 고안해낸 작품이다. 그것을 도입하는데 누가 도구가 되었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다. 그들은 스피리니우스(Zephyrinus)가 그러한 제도의 창시자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지금과 같은 형태였다고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마도 그의 규정은 그 당시의 교회를 위해서는 그처럼 나쁜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찬이 당시에는 그들이 만날 적마다 행해졌으며 그들 중 대부분이 거기에 참여하였지만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참여했던 적은 거의 없었으며 불경하고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과 섞여서 살고 있는 신자들이 어떤 외적 표시에 의해 자신들의 신앙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질서와 체계를 위해 한 날을 지정해서 성찬에 참여함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했다는 것은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그 때문에 그들은 성찬을 자주 시행하기를 멈추었는데, 그것은 아나클레투스(Anacletus)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성찬을 거행하여야한다는 법을 제정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사악하게도 스피리누스의 규례를 왜곡하였는데 그것은 일년에 단 한번만 성찬을 거행하리는 것을 법으로 못박았을 때의 일이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성찬에 단 한번만 참서가면서도 자기의 의무를 아름답게 이행했다고 생각하고서 방종에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다른 방식으로 행해져야만 했었다.
주의 만찬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그리스도인들의 회집시에 행해져야만 했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를 영적으로 양육할 약속들이 선포되어야만 했었다. 어느 누구도 억지로 강요당해서는 안되었겠지만 모든 사람들을 장려하고 분발시켜서 나태한 사람들의 태만을 책망해야만 했었다. 모든 사람들은 굶주린 사람처럼 그토록 풍성한 식사에 참여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관습이 마귀의 계교에 의해 일년에 단 하루만 시행되는 것으로 대체됨으로써 사람들을 연 중 내내 게으르게 만들어 버린 것을 내가 처음부터 불평한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닌 것이다.
41. 동일한 원천으로부터 또 하나의 규칙이 나왔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태반으로부터 성찬을 도두질한 것이거나 혹은 반쯤 빼앗아간 것이었다. 피의 상징이 평신도들과 불신자들에게(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후사에 붙이는 이름들이다[밷전 5:3]) 거부됨으로써 소수의 기름부음받은 자들에게만 특별한 재산으로 주어지게 된 사실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칙령은 모든 사람이 마셔야 한다(마 26:27)는 것인데 사람들이 감히 그것에 반대되는 새로운 법을 가지고서, 그것을 폐기처분하고서는 모든 사람이 마실 수는 없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법을 만든 자들이 이성없이 하나님께 대항한 주장을 내세우지 않을런지는 모르나 만일 이 거룩한 잔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제공된다면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가 그러한 위험들을 미리 내다보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가 둘을 위해 충분하다는 교묘한 이론을 늘어놓는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몸이라면(그들은 말하기를), 그것은 자기 몸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그리스도 전체이다. 그러므로 그 몸은 또한 피를 포함한다.”
우리의 지각이 고삐를 늦추어 조금이라고 방종해지기 시작할 때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지 보라! 주께서는 우리에게 떡을 보여 주시면서 그것이 자기 몸이라 말씀하시고 잔을 보여 주시면서 그것을 자기의 피라 부르신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은 뻔뻔스럽게도 그 주장에 반박한다. “떡은 피며 포도주는 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주께서 아무 목적없이 말씀과 표지에 의해 자신의 몸과 피를 구분하셨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 때나 그리스도의 몸이나 피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불리워진다는 말을 듣는 것과 같다. 분명히, 만일 그가 자신의 자아 전부를 표시하고자 하셨다면“그것은 나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성경에서 그는 자주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다(마 14:27, 요 18:5, 눅 24:39). 그러나 “이것이 내 몸이요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사탄의 종들은(성경을 조롱하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기 때문에)그 사실을 비웃고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리하여 그가 선택하시고 “희생자들”의 반열에 넣어 주신 사도들만이 이 성찬에 참여할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다섯가지 질문에 대해 나에게 대답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그 질문으로부터 도피할 길이 없으며 그들의 거짓말과 더불어 쉽게 반박될 것이다.
첫째, 어떤 계시가 그들에게 그러한 해결책-하나님의 말씀과는 너무나 이질적인-을 보여주었는가? 성경은 예수와 함께 있던 열 두 사람을 언급하고 있다(마 26:20).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위엄을 무색하게 해서 그들을 “희생자들”로 부르게 할 수는 없다(우리는 후에 적당한 장소에서 이 용어를 다루게 될 것이다). 비록 그가 그때 그것을 열 두 제자에게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이 그와 동일한 일을 하도록 명하셨다. 즉 그들 사이에서 그것을 분배하셨던 것이다.
둘째, 그 좋은 시대로부터 사도 이후 천년 동안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이 두 가지 상징에 다 참여하였음은 무엇 때문인가? 초대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성만찬의 손님으로 허용하셨는지를 몰랐단 말인가? 여기서 그러한 질문에 요리조리 답변을 회피하는 것은 가장 뻔뻔스러운 철면피의 행위가 될 것이다. 현존하는 교회 역사가 있으며, 고대의 저자들의 저서들이 있어 이 사실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왜 그들이 먹어야만 하는 떡에 대해서만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 모두가 마셔야 하는 잔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는가(막 14:22-23 ; 마 26:26-27)? 그것은 마치 그가 일부러 사탄의 계교를 물리치고자 하셨던 것처럼 보인다.
넷째, 만일 주께서 오직 “희생 제사를 드리는 자들”만이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누가 감히 주님에 의해 배제당한 이방인들을 불러서 홀로 그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의 명령없이 자신의 권한 밖에 있는 은사에 참여하게까지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들이 주님이 주신 명령이나 본보기를 갖고 있지 않다면 무슨 마음으로 그리스도 몸의 상징을 일반 백성들에게 감히 나누어 주고 있는가?
다섯째,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자기가 그들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라고 한 말은 거짓말이란 말인가(고전 11:23)? 왜냐하면 후에 그는 모든 사람이 차별없이 두 가지 상징에 다 참여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1:26). 만일 바울이 주께로부터 모든 사람이 구별없이 허용되는 규례를 받았다면 그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몰아내어 버리는 자들로 하여금 그것의 창시자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분에게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은 되지 아니한 것이다(고후 1:19)
그런데도 우리는 그처럼 가증한 것들에다가 교회의 이름을 붙여 그것들을 옹호하다니! 그것은 마치 이 적그리스도들이 그리스도 교훈과 규례들을 그토록 함부로 짓밟고 파괴하고 말살하고 있는데도 교회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또는 이와 유사한 간계에 의해 사탄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만찬을 짙은 어두움으로 가리우고 더럽혀 최소한 교회에서 그 순수성이 보존되지 못하게 하려고 악을 쓰고 있는 것이다.
42. 그러나 마귀가 한 가지 표적을 일으켰을 때 그 가증함은 절정에 달했다. 그 표적에 의해 그것은 단지 희미해지고 변질되었을 뿐 아니라 완전히 지워지고 폐기되었다. 말하자면, 인간의 기억에서 추방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마귀가 거의 모든 세계를 아주 전염성이 강한 오류로 눈을 가리워 버렸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은 미사가 죄사함을 얻기 위한 희생이요 제물이라는 신념이었다. 나는 이 염병이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으며 얼마나 많이 선한 외양 밑에 숨어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과시하여 얼마나 무수한 사람들이 “미사”라는 한 마디 말 속에서 신앙의 총체를 붙들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를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 미사가 아무리 장엄하게 꾸며져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에게 불명예를 끼치고 있으며, 그의 십자가를 매장하여 짓 누르고 있으며, 그의 죽음을 망각 속으로 빠뜨리고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우리에게 온 유익들을 앗아가고 있으며, 성례를 약화시키고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히 증명될 때 그 뿌리들 가운데 어떤 것이 너무나 깊어서 이 가장 튼튼한 도끼(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가 찍어 낼 수 없단 말인가? 포장이 너무나 현란하여 이 빛이 그 밑에 숨어 있는 악을 드러낼 수 없는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43. 그러므로 처음에 제시되었던것, 즉 그것을 통해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과 불명예가 그리스도에게 끼쳐진다는 것을 보여주자.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성별되었는데 우리가 구약에서 읽는 것처럼 일정기간 동안만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제사장격은 영구적인 것일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생명이 유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시로 계승자들이 죽은 자들을 대신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불멸이신고로 자신을 대체할 아무 대리자를 필요로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그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영원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시게” 했던 것이다(히 5:6, 10, 7:17, 21, 9:11, 10:21, 시 110:4, 창 14:18).
이 비밀은 오래 전에 멜기세덱 속에서 미리 묘사된 바 있다. 성경이 한 때 그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소개해 놓고는 후에 어느 곳에서도 그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생명이 무한한 것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사성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그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이제 매일 희생제물을 드리는 자들은 그들의 의무를 위해 그들이 계승자와 대리자로 그리스도를 대체할 제사장들을 임명할 필요가 있다. 이 대체에 의해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존귀를 박탈하고 그의 영원한 제사장직의 특권을 빼앗을 뿐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오른손으로부터 그를 내동댕이 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머무르지 않고는 불멸의 몸으로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제사장직이 마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대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영원한 제사장직의 보조자일 뿐이라고 주장하지 말게 하라.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들의 말씀에 의해 너무나 강하게 속박되어 있어 그처럼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많은 다른 제사장들이 세워진 것은 그들이 죽음 때문에 그 직무를 계속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히 7:23).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죽음에 의해 방해받지 않음으오 류일무쌍한 분이다.
44. 미사의 또 다른 능력이 이렇게 제시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을 매장하여 억눌러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아주 확실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희생 제물로 자신을 주셔서 영원히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를 위한 영원한 구속을 이루고자 하셨다면(히 9:12) 이 희생의 능력과 효과가 한없이 계속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율법 하에서 희생되곤 했던 황소와 송아지들에 대한 것 이상의 존중심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황소의 송아지들의 제사는 효과가 없을 것임이 입증되었는데 그것은 그것들이 자주 되풀이 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이다(히 10: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회생제물로써 십자가상에서 제공되었으나 영원히 정결케 할 능력은 결하고 있다고 고백하든지 혹은 그리스도께서 영 단번에 모든 세대를 위해 하나의 제사를 지냈다고 고백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히 9:26). 또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또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그리스도께서도 이 사실을 자신의 마지막 말씀에 의해 확인하셨다.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그는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말씀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보통 임종시의 마지막 말을 유언으로 간주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임종시에 우리 구원에 관련된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희생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증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매일 그 희생 위에 무수한 헝겊 조각들을 깁고 있다. 그가 그토록 분명히 그 희생의 완전함을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불완전한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이 희생이 단 한번 행해졌으며 그것의 모든 효력은 영원히 남는 것이라고 단언할 뿐아니라 소리쳐 주장하고 있는데 또 다른 희생을 요청하는 자들은 그것이 불완전하다고 연약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지 않은가(히 7:28, 9:26, 10:18)?
그러나 이 조건 위에 세워지고 수십만의 회생 제사가 매일 행해지는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희생 제물로 아버지께 자신을 드린 그 고난을 매장시켜 버린 것 외에 무슨 목적을 갖고 있는가? 눈 있는 사람치고 누가 거기서 그처럼 공개적이고 명백한 진리를 말살하려는 사탄의 담대함을 보지 못하겠는가?
또한 거짓의 아비가 자신의 사기를 감추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그 술수를 내가 모르는 바 아니다. 즉, 이것들은 변형된 혹은 전혀 다른 희생 제사가 아니라 종종 되풀이된 그 동일한 제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술수를 깨뜨리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논의 속에서 사도는 다른 제사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단 한번 드려져서 결코 반복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45. 이제 나는 미사의 세 번째 기능을 따르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참되고 고유한 죽음을 제거하여 그것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만드는지를 설명해야만 하겠다. 왜냐하면 인간들 사이에서 유언의 효력이 유언자의 사망에 달려 있는 것처럼 우리 주께서도 자신의 죽음에 의해 유언을 확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그 유언에 의해 우리에게 사죄와 영원한 의를 주셨다(히 9:15-17).
이 유언을 변경시키려 하거나 어떤 새로운 것을 첨가하려 하는 자들은 그의 죽음을 부인하고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사가 완전히 다른 새 언약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왜 그러한가? 각각의 미사는 새로운 사죄와 의의 길을 약속함으로써 이제 미사들만큼이나 많은 언약이 있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또 한번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새 언약을 인준하게 하든지 혹은 오히려 무수한 죽음들, 즉 무수한 미사의 언약에 의해 이 새 언약을 인준하시게 하라.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참되고 고유한 죽음이 미사에 의해 제거된다는 진리를 말했던 것이다.
미사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왜냐하면 유언이 있는 곳에는(사도들의 말에 의하면) 유언자의 죽음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히 9:16). 미사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언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의 죽음을 요청한다. 게다가 제공된 제물이 죽임을 당하고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각 미사 때마다 희생 제물이 되신다면 그는 매순간 수천 장소에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사도의 말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주 자기를 드리셔야 했다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반복적으로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다(히 9:25-26)
46. 이제 나는 미사의 네 번째 기능을 논의해야겠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유익을 앗아가는 반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인정하거나 묵상하지 못하게 한다. 미사에서 새로운 구속을 발견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자신이 구속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사죄의 길을 발견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 죄가 용서받는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사죄를 오직 미사에게서만 획득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확보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속한다는 조건 위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었다고 자랑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탄의 종들에 의해 널리 전파되고 있으며 오늘날 고함과 칼과 불에 의해 옹호되고 있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아버지께 제공할 때 이 의무의 행위에 의해 우리는 사죄를 얻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가 그것에 의해 우리 자신의 구속자임을 배우는 구속의 본보기라는 것 외에 무슨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
47. 이제 마지막 순서에 이르렀다. 그것은 성만찬(그것을 통해 주께서 자신의 고난이 기념되게 하셨다)이 미사 때문에 제거되고 파괴되었으며 폐기 되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성만찬 그 자체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감사함으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미사의 희생은 하나님께 값을 치르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값을 배상(satisfaction)에 의해 받으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희생과 성례 사이에는 주는 것과 받는 것 사이에 있는 것만큼이나 커다란 차이가 있다. 또한 인간의 가장 비참한 배은망덕함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인정하고 그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채무자로 만들고 있다.
성례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우리가 한번 생명을 회복하게 될 뿐 아니라 계속적으로 소생하게 된다고 약속한다. 왜냐하면 우리 구원의 모든 부문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미사의 희생은 전혀 다른 소리를 내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끼치기 위해 매일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8. 성만찬은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 거행됨으로써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결속되는 영적 교제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미사의 희생은 이 공동체를 찢어 분해 시킨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대신해서 제사를 행하기 위해서는 제사장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오류가 판을 치게 된 후에는 -마치 성만찬이 그들에게 인계된 것처럼- 그것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신자들의 교회에 전달되는 것이 중단되었다.
사적인 미사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주께서 제정하신 공동체보다는 오히려 출교를 시사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미미한 제사장은 혼자 자신의 희생물을 삼켜버리기 직전에 모든 믿는 사람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아무도 오해하지 않도록) 사적미사(private mass)라 부른다. 그가 큰 소리와 고함으로 울부짖는다 혹은 단지 속삭이는 목소리로 찍찍거리든지 그 두 가지가 다 교회로부터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49. 그러나 말을 맺기 전에 나는 우리의 미사 박사님들에게 묻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강하며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나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삼상 15:22). 어떻게 그들은 하나님을 이러한 희생 제사의 방식에 의해 즐겁게 해드린다고 믿을 수 있는가? 그들은 한번도 그런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으며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것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발견할 수 없는데 말이다.
더군다나(이론처럼) 부르심을 받은 자 외에는 어느 누구도 제사장의 존귀와 칭호를 걸머질 수 없으며 그리스도 자신마저도 그것을 자취하지 않고 아버지의 부르심에 순종했다(히 5:4-5)는 사도의 말을 그들이 듣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사장직의 창시자요 설립자로서 하나님을 모셔오든지 혹은 그 명예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자신들이 부르심을 받지 않았으면서 사악한 경솔함으로 그것을 자취했다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제사장직을 지지할 수 있는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제사장 없이 드려질 수 없는 그들의 희생 제사는 어디로 사라지게 될 것인가?
미사의 이 가증함은 눈 먼 자들도 볼 수 있고 귀 먹은 자들도 들을 수 있으며 심지어 어린 아이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황금잔으로 제공된 이 미사 는 모든 왕들과 땅의 백성들, 가장 높은 자로부터 가장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취하게 했고 그들의 정신을 어질어질하고 몽롱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의 배 전체를 이 하나의 치명적인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게 되었다.
실로 사탄이 고안해 낸 무기 중에 이보다 더 강력하게 그리스도의 왕국을 포위하고 사로잡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진리의 원수들이 그토록 난폭하고도 잔인한 전투를 통해 섬기고 있는 헬렌(Helen)인 것이다. 실로 그들은 이 헬렌으로 더불어 영적 간음을 행하고, 있는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가증스러운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들이 자신들의 신성한 미사의 순결을 더럽힌 데 대한 변명으로 제사하는 저 엄청난 폐습들을 입에 올리기도 싫다. 그들이 하고 있는 그 더러운 장사, 미사에 의해 그들이 거두어들이는 더러운 이득, 그들의 탐욕을 만족시키는 고삐 풀린 욕망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단지 간단한 몇 마디 말로 미사의 지극히 거룩한 것 그 자체가 어떤 종류의 것이며 어떤 이유로 인해 수세기 동안 그것이 그토록 존경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왔는지를 지적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이 지극히 커다란 신비들을 그것들의 위엄에 따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약간 거창한 작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저 추잡한 부패들을 그것들과 뒤섞어 버리고 싶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미사가 그 최고의 순수함을 유지한 상태에서라 할지라도 모든 종류의 불경과 신성모독과 우상숭배와 참람죄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0. 이제, 어떠한 논쟁자도 “희생 제사”와 “제사장”이라는 말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또한 간단하게 이 논의를 통해 “희생 제사”나 “제사장”이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고자 했던가를 설명하려한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기에는 “희생 제사”라는 말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 전부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별을 해야 한다. 또한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는 “감사나 찬미의 제사”, 다른 하나는 “화해 또는 화목의 제사”라 부르기로 하자.
이제 화목의 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그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죄를 씻고 은혜와 구원을 간청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 한분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다른 어느 누구도 그 일을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단번에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그 간 한번의 희생 제사의 효력과 능력이 여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음성으로 그것이 성취되고 완성되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증거 하신 바와 같다(요 19:30). 말하자면 아버지의 은혜를 회복하고 사죄와 의와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모든 것이 그분의 고유한 희생 제사에 의해 수행되고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너무나 완벽한 것이었기 때문에 후에 어떤 다른 제물이 도무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그 의무를 반복함으로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을 무마시키고 의를 획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 치르셨던 희생과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불경이요 아주 사악한 모욕이라고 나는 결론짓는다.
그러나 미사를 거행함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의무의 공로에 의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 외에 다른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가? 게다가 그들의 광란에는 한계가 없을런지 모른다. 그들은 만일 그들이 그것을 특별히 이 사람이나 저 사람에게 원하는 대로 적용하는 것, 혹은 오히려 그러한 상품을 위해 현금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자기들의 권리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면 그들의 희생 제사가 교회 전체를 위해 차별 없이 행해졌다고 말하는 것을 작은 일로 여겼다.
이제 비록 그들이 유다의 값에는 미칠 수 없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어떤 점에 있어서는 그들의 창시자를 닮고 있다. 그들은 수에 있어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유다는 은 삼십에 그를 팔았다. 이 사람들은 동전 삼십에 그를 팔고 있다. 유다는 단 한번 팔았지만 이 사람들은 구매자가 생기는 대로 팔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들이 그러한 봉헌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위해 중재함으로 하나님을 무마시키고 죄에 대한 속죄를 획득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이 제사장이라는 것도 부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야말로 새 언약의 유일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히 9장). 모든 제사장직은 그분에게로 이전되었으며 그분 안에서 종결되었다.
그리고 비록 성경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옛 제사장직을 폐지하셨을 때 새로운 제사장직을 제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사도의 논증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라”(히 5:4). 그렇다면 이 신성 모독하는 인간들은 무슨 염치로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도살자임을 자랑하면서 감히 스스로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부르고 있는가?
51. 희생 제사의 두 번째 분류에는 -우리는 그것을 “감사”의 제사라 불렀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찬미와 감사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실로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거룩히 구별되어 그분에게 바쳐짐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의 영광에 이바지하고 그의 장엄함을 나타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사 양식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사죄를 받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며 의를 위한 공로를 쌓는 것과도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높이는 것에만 관련되어 있다. 실로 그것은 오직 사죄를 받아 하나님과 화목되고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은 교회를 위해 너무나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떨어 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영원할 것이다. 선지서에서도 이미 그것을 기록하고 있는바와 같다.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 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1:11).
우리가 결코 그것을 제거하지 않게 되기를! 그리하여 바울은 우리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명령한다(롬12:1;벧전2:5-6 비교). 이런 식으로 다윗도 자기 기도가 향처럼 하나님의 존전에 올라갈 것을 기도했다(시141:2). 그리하여 다른 곳에서 성도들의 기도는“향”으로 불리우며 선지자들에 의해 “입술의 수송아지”(호14:2;14:3)러 불리운다.
바울은 그것을 “예배”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적 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교묘하게도 그것을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동물의 제사와 대조시켰기 때문이다. 성만찬은 이런 종류의 희생 제사 없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그의 죽음을 선포하고 감사를 드리는 동안 우리는 바로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사와 직분으로 인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또한 우리는 중재자 없이 우리의 선물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를 위해 중재하는 중보자는 그리스도이신데 그분에 의해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것을 아버지께 드린다. 그는 우리의 제사장인데 하늘 성소로 들어가셔서 우리가 들어갈 길을 열어주신다(히10:20). 그는 제단이시데(히13:10) 그 위에 우리는 우리의 선물을 놓는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것을 감히 시도한다. 우리를 아버지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은 바로 그분이시라고 나는 말한다(계1:6).
52. 우리 독자들은 이제 이 두 가지 성례에 대하 알아야만 할 거의 모든 것을 요약된 형태로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 두 가지 성례는 신약의 처음부터 세상 끝까지 그리스도 교회에 전수되어 왔다. 말하자면 세례는 사실상 교회에의 가입이 되어야 하며 신앙생활의 시작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찬은 일종의 계속적인 양식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가지고서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권속을 영적으로 먹이신다.
그러므로 오직 한 하나님, 한 믿음, 한 그리스도, 한 교회, 즉 그의 몸이 있는 것처럼 세례도 오직 하나 뿐이며(엡 4:4-6) 자주 되풀이 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찬은 반복적으로 거행되어 일단 교회로 들어온 자신들은 그리스도를 계속적으로 먹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자들의 교회는 다른 어떤 성례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성례를 세우고 수립하는 것은 인간이 선택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위에서 충분히 또 분명히 설명된 바 있는 것들을 기억한다면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성례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인데 그분 자신의 어떤 약속에 관해 우리를 가르치고 위를 행한 그분 자신의 선한 의도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만일 우리가 아무도 하나님의 모사가 될 수 없으며(사40:13; 롬 11:34) 하나님의 뜻에 관해 확실한 어떤 것을 그가 약속하거나 혹은 그가 우리를 향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계시는지,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자 하시며 무엇을 거부하고자 하시는지에 관해 우리가 확신을 가리도록 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성례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인데 그분 자신의 어떤 약속에 관해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를 향한 그분 자신의 선한 의도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만일 우리가 아무도 하나님의 모사가 될 수 없으며(사 40:13; 롬 11:34) 하나님의 뜻에 관해 확실한 어떤 것을 그가 약속하거나 혹은 그가 우리를 향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계시는지,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자 하시며 무엇을 거부하고자 하시는지에 관해 우리가 확신을 가지도록 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의도나 약속에 대한 증거가 되도록 표지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표지를 주셔서 우리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증거 할 수 있는 분은 홀로 그 분 뿐이시다. 나는 더 간단하고 그리고 아마도 더 퉁명스럽기는 하겠지만 보다 분명하게 그것을 말하겠다. 구원에 대한 약속 없이는 어떠한 성례도 있을 수 없다.
함께 모인 모든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약속 할 수 없다.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성례를 만들거나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교회는 이 두 가지 성례로 만족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어떤 세 번째 성례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해야 할 뿐 아니라 세상 끝까지 어떤 것도 바라거나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 일반적인 성례들 외에 다양한 성례들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다(만나처럼[출16:13; 고전 10:3],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처럼[출 17:6; 고전10:4], 구리 뱀처럼[민 21:8; 요3:14] 등등.)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의해 유대인들은 그 조건이 일시적인 그러한 형상들에게 멈추지 말고 보다 나은 어떤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기다리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것은 파괴되거나 끝남이 없이 영원히 거할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계시된 우리에게 있어서는 여건이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골2:3). 그것은 너무나 풍성하고 풍부하기 때문에 이러한 보화 이상의 어떤 새로운 첨가물들을 바라거나 찾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그의 노를 촉발하는 것이다.
주께서 자기 나라의 영광을 완전히 나타내실 그 큰 날이 밝기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찾고 배우고 공부하여 그분을 갈구해야 한다(고전15:24). 그때에 그는 자신을 나타내셔서 그가 계신 그대로 보게 하실 것이다(요일3:2).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의 이 세대는 성경에서 “마지막 때”(요일2:18).“마지막 날”(히1:2),“말세”(벧전 1:20)로 묘사된다.
그것은 아무도 어떤 새로운 교리나 계시에 대한 헛된 기대로 자신을 속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1:1-2). 그런데 그분만이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는 것이다(눅10:22).
그러나 이제 교회에서 새로운 성례들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처럼 인간의 교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례들과 가능한 혼합되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 왜냐하면 물을 부으면 포도주가 묽어지는 것과 꼭 같이, 또한 효모를 넣으면 밀가루의 모든 반죽이 시어지는 것과 꼭 같이 하나님의 신비의 깨끗함도 인간이 자기 자신의 어떤 것을 첨가할 때 오염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례들이 오늘날 본연의 순수함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본다. 도처에 너무나 많은 행렬들, 외식을, 그리고 광대놀음이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려나 언급은 전혀 없다. 그것이 없다면 이미 성례가 아니다. 사실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의식들마저도 그토록 많은 군중들 속에서는 머리를 내밀 수 없고 단지 짓밟힌 것처럼 누워있을 뿐이다.
세례를 통해 사람들은 홀로 빛을 바라고 주목을 받아야 하는 것, 즉 세례 그 자체를 얼마나 제대로 보고 있는가? 성찬은 완전히 사장되어 버렸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미사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년에 단 한번 난도질당하고 찢겨지고 병신이 된 형태로 행해지고 있을 뿐이다.
D. 성례의 집행
53.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으려 할 적마다 그를 신자들의 총회에 내세워서 온 교회로 더불어 증인으로 바라보며 그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그를 드리는 것과 또한 그 세례 지원자가 배워야만 하는 신앙고백을 암송하고 세례 시에 주어지는 약속들을 묵상하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에게 세례를 주고(마28:19) 마지막으로 기도와 감사로 그를 돌려보내는 것은 얼마나 만족스러운 일이 되겠는가?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긴요한 것은 하나도 빠Em리지 않은 셈이 될 것이며 그것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한 의식이 이상한 오염 속에 매장되어 버리지 않고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례를 받는 사람이 완전히 물에 담겨야 하는가 혹은 단지 물 뿌림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등의 상세한 문제들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라들의 다양성에 따라 교회가 선택해야 될 문제이다. 그러나 “세례주다” 라는 말은 물에 잠그는 것을 의미하며 침례의 의식이 고대 교회에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성만찬에 관한 한 만일 그것이 교회 앞에서 아주 자주,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거행된다면 그것은 아주 적절하게 집행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첫째, 그것은 공중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그 후에는 설교가 있어야 한다. 다음에, 떡과 포도주가 식탁위에 놓였을 때에 목사는 성찬의 제정에 관한 말씀들을 반복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는 성찬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액속들을 암송해야 한다. 동시에 그는 주님의 금지에 의해 그것으로부터 제외된 모든 자들을 제외시켜야 한다.
후에 그는 주께서 이 거룩한 음식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그 친절함으로 또한 우리를 가르치셔서 우리가 믿음과 마음의 감사로 그것을 받도록 기도해야 하며 또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합당한 자가 될 수 없으므로 그분의 자비로 우리를 그 향연에 합당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시편을 노래하든지 혹은 어떤 것을 읽어야 하며 적절한 질서 속에서 신자들은 지극히 거룩한 잔치에 참여해야 하고 목사들은 떡을 떼고 잔을 주어야 한다.
성찬이 끝나면 신실한 믿음과 신앙고백, 또한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사랑과 행위에 대한 권면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감사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 대한 찬미를 불러야 한다. 이러한 일들이 끝나면 교회는 평안 중에 돌아가야 한다.
신자들이 그것을 각자의 손에 드느냐 마느냐, 혹은 그것을 그들 중에서 나누느냐 마느냐, 혹은 각자에게 주어진 것을 여러 번 먹느냐 마느냐, 잔을 집사에게 돌려주느냐 혹은 다름 사람에게 주느냐, 빵의 효모를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포도주는 흰 것이 좋은가 붉은 것이 좋은가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관계가 없는 것들이며 교회의 판단에 맡겨 두어야 한다. 그러나 교대 교회의 관습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각자의 손으로 취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도“이것을 너희끼리 나누라”(눅22:17)고 말씀하셨다. 역사가 말하고 있는 것은 효모 없는 빵을 좋아한 최초의 인물인 로마 감독 알렉산더 이전에는 보통의 발효된 빵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반 백서들의 마음을 신앙으로 교화하기 위한 것보다 새로운 광경에 의해 그들을 놀라게 하려는 목적 외에는 그것에 별다른 목적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경건을 위한 열심에 의해 전혀 감동을 받지 않는 자들에게 감청한다. 어리벙벙하게 된 사람들의 감각을 속이기 위한 목적 이외의 어떤 목적도 갖지 않는 이 생명 없고 연극적인 장난보다 얼마나 더 밝은 하나님의 영광이 여기서 빛나고 있으며 얼마나 더 풍부한 영적 위로의 감미로움이 신자들에게 찾아오는지를 보라.
그들은 미신으로 둔해지고 멍청해진 자들을 아무데나 이끌고 가면서 그것을 신앙에 의한 장악이라 부른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고대의 문헌에 호소함으로써 그러한 장난을 옹호하고 싶어 한다면 나도 또한 세례에 있어 성유식(chrism)과 입김을 부는 것1)이 얼마나 고대의 관습인지, 또, 성만찬이 사도시대 이후에 얼마나 신속히 오염되어 버렸는가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실로 이것이야말로 인간들의 완악한 담대함인바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신비한 일들을 함부로 다루고 혼란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너무나 높이 평가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천사들과 세계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고전6:2-3; 갈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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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입김을 부는 것(exsufflation)은 축복의 한 행위로서 예수님이 숨을 내쉬시며 축복하신 것(요20:22)을 본받은 예식이나 현재 카톨릭 교회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역자주
출처 : 智本知神
글쓴이 : Heal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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