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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추수때까지 두라(마태복음 13장 24절~30절)

by 【고동엽】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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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때까지 두라(마태복음 13장 24절~30절)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결실의 계절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내 수고하여 가꾼 들판이 누렇게 물결칩니다. 우리는 그 들판을 바라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른봄부터 피땀 흘린 농부들의 그 거룩한 수고요,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늘로서 비를 주시지 않았다면 벼 포기가 그처럼 자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놓았다 해도 큰 비바람 한번이면 일년 농사가 하루아침에 물거품 되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수고하고 내가 정성을 들였더라도 하나님께 추수를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결실은 은혜입니다. 이것은 또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둡니다. 좋은 것을 심었으면 좋은 것을 거둘 것이요, 나쁜 것을 심었으면 나쁜 것을 거둘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요, 도덕의 이치요, 종교의 이치입니다.
씨앗을 심는다는 것은 하나의 신앙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농부는 상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까운 씨앗을 땅 속에 넣고, 흙을 덮고, 발로 밟고, 그리고 밭을 떠나니 말입니다. 농부는 싹이 날 것으로 믿고,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것으로 믿고, 추수 때를 바라보며 밭을 떠납니다. 이것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농사에 임하는 것입니다.
심은 것은 하나의 인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농부의 인내를 배우라(약 5:7)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조용한 정적 인내가 아니라 행동적 인내입니다. 수고하고 땀을 흘리면서 무던히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서둘러도 소용없습니다. 꾸준히 기다려서 가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생명의 신비가 있습니다. 자라게 하고 거두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어린아이를 키워보셨습니까? 아기의 성장을 위해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젖을 먹이거나 우유 병을 물려주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겨우 그것뿐인데 아기 몸이 균형 있고 고르게, 총기 있게 자라나는 것을 보면 역시 생명은 신비합니다. 우리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 일은 하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엄청난 구원의 역사, 그 생명의 사역 안에서 우리는 조금 거들고 수고할 뿐입니다. 이 귀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제 심어놓은 이상 거둘 때에는 온유해야 합니다. 많이 거두든 적게 거두든 오로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거두어야 합니다. 워낙 내가 한 일은 적은데 무슨 불평이 있으며 무엇인들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심은대로 거둔다고 하는 이치 앞에 겸손한 사람은 불평이 없습니다. 오늘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해도 그것이 다 내가 심은대로 거두고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모든 일이 그 이치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라면 과거로부터 현재로, 또 현재로부터 미래로, 이 중요한 진리를 내 생활 속에 적용하면서 온유하고 겸손할 것입니다. 우리는 추수 앞에서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 이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진리를 복으로, 위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부인은 교회에 나오지만 큰 사업을 하는 남편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한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마침 남편되시는 분이 감기로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저는 좋은 기회다 싶어 여러 번 권면을 받아도 교회에 나오지 않는 그에게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몸이 괴로우십니까?"하고 물으니 그분 대답은 아주 엉뚱한 데서 나옵니다. "죄가 많아서요……" 제가 모른 척하고 또 물었습니다. "아니 무슨 죽을 병이라면 몰라도 감기쯤 걸린 것을 가지고 그러십니까?" 그분은 "워낙 못할 짓을 많이 하고 살거든요"하면서 언제나 삐끗할 때마다 '어이쿠 내 죄 때문에, 어이쿠 여기서 터지는구나'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선한 씨를 심어놓고 열매 맺기를 기다립니까? 아니면 도처에 뿌려놓은 악의 씨앗이 언제 싹이 나고 자라서 나를 찌를까 하고 깜짝깜짝 놀라면서 살아갑니까? 악의 씨앗이 열매 맺힐 것을 두려워하며 공포에 쫓기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어느 편에 속하는지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13장 전반부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 비유의 연장입니다. 결국 '씨 뿌리는 자' 비유의 후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 비유의 주제는 천국입니다. 천국의 임재와 확장, 그리고 완성을 자세히 말씀해주시는 소중한 비유입니다. 마음 밭에 좋은 씨-복음을 뿌렸습니다. 이 씨가 이제 자라는 중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분명히 좋은 씨를 뿌렸는데 어느 틈에 가라지가 섞여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가라지-헬라어로 '지자니아'라고 하는 이것은 '피'를 말합니다.
곡식 중에 피 혹은 돌피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벼와 모양이 비슷해서 알아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모내기를 해보신 분은 알 것입니다. 모내기할 때 보면 가끔 돌피가 섞여 있습니다.
잎만 보면 알 수 없으나 뿌리를 보면 금새 차이가 납니다. 돌피 뿌리는 하얗고 벼 뿌리는 노랗습니다. 그렇게 해서 벼와 돌피를 구분하는데, 잎을 보고는 비슷비슷해서 언뜻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줄기와 잎은 비슷하고 뿌리와 열매가 다른 것입니다. 악이 바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악의 모습과 선의 모습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뿌리와 열매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과정에 있어서는 때로 비슷해 보이지만 결과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열매를 보기까지는 악과 선을 구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결실할 때가 되어서야 종들이 가라지를 발견합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좋은 씨를 뿌렸는데 왜 여기에서 가라지가 났을까요? 주인님, 우리가 가서 뽑아버릴까요?" 이것은 현재적인 말입니다. "당장 가서 뽑아버릴까요?" 조급한 심판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하루는 한 학생 몸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다'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다음날 아침 또 술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생각했습니다.
'이 녀석이 아버지가 마시다 남긴 술을 몰래 마시고 왔구나.' 그 학생을 호되게 야단칠 생각으로 조용히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너 아침에 술 마시고 왔지"하고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아니예요, 선생님. 저는 술을 마셔 본 일이 없어요. 먹을 것이 없어서 양조장에서 버린 술 찌꺼기를 주워다 먹고 왔을 뿐이어요." 이 기막힌 사연을 듣고 선생님은 성급히 화낸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끌어안고 내가 너를 의심한 것 잘못했다고 울면서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것이 악이다, 이게 가라지다' 생각하는데 뽑고 보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사람은 정말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평가를 내려버렸는데 깊이 이해하고 보니 그 속 깊은 곳에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심판주가 될 수 없습니다. 심판의 시기는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심판의 방법도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정치가 치고 정의 자유 평화를 말하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그가 설혹 독재자라 해도 역시 그런 말을 합니다.
나라를 사랑한다 하고, 자유를 사랑한다 합니다. 모두가 정의를 내세우고, 진리를 내세우고, 모두가 바르게 한다고 하면서 실은 큰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빛 좋은 명분 아래서 더 큰 죄를 짓고 있습니다.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불의한 자를 말살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생각입니까? 누가 의롭고 누가 불의한지, 내가 어떻게 감히 판단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될 일입니까? 불의를 태워 없애겠다고 하지만 남는 것도 역시 불의의 재뿐입니다. 또 어느 혁명가가 정의를 말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그 말에도 진저리가 납니다. 모두 정의 정의 하면서 또 다른 악을 행합니다. 제2 제3의 무서운 악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방법으로 정의를 세우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일입니까?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이것이 역사의 증언입니다.
내가 가라지를 의식하고 '저것을 빼버려야겠다' 하는 것만 생각하다가 어느 사이에 나 자신도 가라지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악을 용납하실까? 왜 함께 자라게 하실까? 이것이 영 못마땅하게 여겨집니다마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잠 24:19)." 여러분,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을 질투하지 마십시오. 왜 악인과 함께 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역사는 변해도 진리는 여전합니다.
수백 년 수천 년이 흘러도 주님께서 주신 이 귀한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악한 느부갓네살이 이스라엘을 유린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저들과 대항해서 싸우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를 징계의 방망이로 쓰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말씀합니다. 악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불만이요, 악인이 더 형통하고 더 큰 재산과 권력을 잡는 것에 대하여 도무지 못마땅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이 우리들 마음입니다. 때로는 의와 불의가 거의 비슷해서 혼동과 무질서가 더욱 심화되어 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로 인하여 범죄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악을 제거하려다가 선을 잃고, 악을 뽑아버린다고 하다가 더 큰 악을 행하고 역사를 그르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역사가 온통 그러한 착각과 실수들로 얼룩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묻지 맙시다. 다만 현실과 실제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겸손히 믿고, 이 믿음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알곡이 있는가 하면 가라지가 있듯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가 공존(共存)합니다. 가짜가 왜 생기느냐고요? 진짜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가 귀한 물건이 아니라면 왜 모조 다이아몬드가 나왔겠습니까?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지만 요즘은 가짜 성직자도 있다고 합니다. 왜입니까? 귀한 직업, 성스러운 직업이기에 또 가짜가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귀한 진품이 있기에 가짜가 있게 마련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6절을 보면 '거짓 형제'라 표현되는 가짜 교인이 있습니다. '다른 복음'-가짜 복음도 있고(갈 1:6~9), 가짜 의(롬 10:1~3)도 있습니다. 심지어 '불법의 사람'-가짜 그리스도, 적 그리스도가 있고(살후 2:1~12), 요한계시록 2장 9절을 보면 '사단의 회'라 하는 가짜 교회도 있습니다. 수많은 '가짜'와 '거짓'이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말씀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역사들입니다. 이처럼 가짜가 득세하는 까닭을 '참'으로 '참'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2장 31절에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있습니다. 이 말씀의 맥락을 한번 연구해봅시다. 어느 마을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온 동네가 이사람 때문에 걱정을 합니다.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속수무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불쌍한 사람한테서 귀신을 내어쫓고 듣고 보고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에게 맑은 정신을 찾아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사건입니까? 모든 사람이 보고 "메시야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할렐루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렇게들 즐거워하고 있을 때 바리새인들이 나타나 찬물을 끼얹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쫓으신 것은 순전히 귀신의 왕 바알세불 덕분이라고 하나님의 역사를 왜곡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순진한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 그 믿음을 흐려놓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순전한 믿음을 왜곡시켜 놓은 너희같은 죄인은 영원히 사함받지 못한다고, 그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깨끗한 마음으로 받으려는 사람에게 귀를 막아 못 듣게 하고, 그것을 왜곡시켜서 자라지 못하게 하며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바른 길에 서지 못하게 가라지가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짜가 더 성하고, 더 훌륭하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밭 주인으로서 말씀하십니다. "가만 두어라,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선과 악의 공존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현실적인 문제를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악과 선이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선과 악은 임시로 공존합니다.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것은 악을 방치하자는 것이 아니요 선을 보호하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밭 주인이 곡식보다 가라지를 더 사랑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선보다 악을 아끼시겠습니까? 가라지 하나 뽑으려다 알곡을 다칠까봐 걱정하는 것이 주인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수학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여기 소돔과 고모라가 있습니다.
어느 학설에 따르면 이 성이 멸망할 당시의 인구가 약 오만이었다고 합니다. 그 학설대로 오만이라 칩시다. 소도마이트(sodomite;동성연애자)가 오만이나 되는, 이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더러운 성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당장 멸해도 시원치 않을 악의 소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 속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이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수학적으로 말하면 죄인 오천 명 중에 의인이 한 명만 있어도 그 하나를 보시고 전체를 용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의중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한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악한 것만을 보려고 합니다. 나쁜 점만, 가리지만 보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어떤 분은 만날 때마다 늘 어려운 이야기만 합니다. 세상이 썩었느니 망했느니, 강남에 오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댄스홀이 몇백 개가 되느니 어떻다느니 하고 이상한 이야기만 합니다. 저는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던데 말입니다. 어쨌든 그런 사람은 다시 만나는 게 싫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어두워지거든요, 좋은 이야기도 많은데 하필이면 못된 이야기만 골라서 할 게 뭡니까? 그것도 참 못고칠 병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밝은 면을 봅시다. 가라지만 생각하다가 아예 가라지 속에 묻히지 말고, 알곡을 봅시다. 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세상을 보든지 교회를 보든지, 자기 자신을 보든지 이웃을 보든지, 언제나 장점을 극대화하고 선을 보장하는 바로 거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악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시기도 방법도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의인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그 고난 속에서 선을 성장케 하시는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기 쉬운 가장 크고 흔한 오해는, 언제나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문제요, 문제가 없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 역시 위선입니다. 이 점을 깨닫고 이해해야 합니다. 언젠가 한번 말씀드렸듯이, 옛날 영국에서는 냉동시설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에 물고기를 물탱크에 넣어 가지고 산채로 수송했습니다. 그러나 먼바다에서 항구까지 오는 동안 물고기들은 아무리 살아서 온다 해도 긴 여행에 지쳐서 비실비실 해지게 마련입니다. 신선도가 낮아지고 값도 내려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지혜로운 사람은 물고기 넣은 탱크 속에 상어 새끼 몇 마리를 함께 집어넣어 왔다는 것입니다. 물고기들은 상어 새끼한테 잡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도망다닙니다. 그렇게 해서 자연히 운동이 되고 건강한 물고기로 항구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물론 몇 마리 잡아먹히기는 하지만 그 대신 전체가 삽니다.
여러분, 선과 악이 왜 공존하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있어야 하겠기에 있는 것입니다. 악 때문이 아니요 선 때문입니다. 선에 유익하기 위해서 악이 공존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백성을 위하는 데에 그 초점이 맞추어짐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여기에 더욱 중요한 문제-추수기가 있습니다.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이르기 전, 주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주님 오실 때에 라야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그날이 올 것을 믿고 오늘은 묵묵히 선과 의, 거기에 우리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선과 악이 함께 자라는 것-이것은 특별히 실존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도 두 세계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21절에서 바로 이 점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곧잘 진실하고 깨끗하게 살아가다가 어쩌다 그만 참지 못하고 화를 벌컥 내던가 실수를 저지르고 나면 이것을 너무 크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가슴을 치면서 나는 못된 놈이다. 아무래도 구제 불능이다 하고 자학합니다. 심지어 혈통이 나쁜 것 같다고도 생각합니다. 자기를 너무 가혹하게 책망하는 나머지, 그만 완전히 절망해버립니다. 파스칼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나만 보면 절망하게 되고, 나를 보지 않고 하나님만 보면 교만하게 된다.' 그래서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나,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리도 악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깜짝 놀라고, 절망하고, 자포자기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안에 악한 마음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놀라지 마십시오. 이상하게 여기지도 마십시오.
어디에나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있습니다.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뿌리로 알고 열매로 알게 될 것입니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 현실, 이 실존을 이해해야 합니다.
악을 빼버리려고 너무 애쓰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절망하기 십상입니다. 차라리 잊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선을 키웁시다. 어떤 사람은 그 악한 것, 이것 하나 고치겠다고 거기에 집중하다가 그만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은사를 다 소멸해버립니다. 그 많은 기회를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가라지를 생각하느라고 참으로 귀하고 선한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는 답답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선을 키웁시다. 이제 내게 주신 하나님 말씀, 그 복음에 온 몸과 마음으로 순종합시다. 거기에 구원의 길이 있고 악을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 시기를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심판의 방법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선한 종자에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선한 종자를 자라게 하고, 이것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여기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가라지에 대해서 시비를 벌이지 맙시다.
우리는 묵묵히 선한 일들을 찾아갈 뿐입니다. 가라지와 악곡을 구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무 염려 말고 심판을 그분께 맡깁시다. 그리고 우리는 나의 나됨을 지켜 갑시다. 말씀을 따르고, 받은 은사를 극대화합시다. 그리고 조용히 기다립시다. 주께서 주시는 가을에 알곡의 영광을 누리게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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