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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처한 복음주의 /목창균

by 【고동엽】 2021. 11. 5.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

목창균(서울신대 교수)



서 론

한 때 변두리 운동과 지엽적 현상으로 여겨졌던 복음주의가 기독교의 주 세력권으로 진입하고 있다. 자유주의 교회는 침체하고 있는 반면, 복음주의 교회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1) 지류에서 성장하던 복음주의가 본류로 이동하여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려는 것이다. 이제 아무도 복음주의가 세계 기독교의 중심 요소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한편, 복음주의 성장과 더불어 지적되는 것이 복음주의의 위기다. 학자들은 복음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경고하고 있으며, 현대 복음주의를 주제로 한 책들은 거의 대부분 그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특히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의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The Great Evangelical Disaster)와 존 암스트롱의 [다가오는 복음주의의 위기]는 그 제목이 말해주듯 복음주의의 위기를 주제로 한 책들이다.

왜 복음주의는 성장의 기세가 약화되지 않고, 그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하는가? 복음주의 위기의 실체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가장 큰 문제점으로 생각한다. 수적인 성장과 확장이 복음주의의 정체성을 흐리게 하고 있다. 복음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불확실하다. 데이턴이 복음주의란 용어가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주장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2)

복음주의의 위기는 또한 복음주의의 기회이기도 하다. 복음주의의 정체성이 모호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존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위기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약점과 문제점을 수정, 보완한다면, 복음주의의 위기는 곧 복음주의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복음주의의 위기를 분석하여 그 실체가 어떠한가를 밝히려고 한다. 복음주의 위기의 주 요인은 정체성의 혼란, 반지성주의, 분파주의 등으로 요약된다.



I. 정체성의 혼란


지난 몇 십년 간 복음주의는 유례없이 성장하고, 복음주의 기관들은 번창하고 있다. 그럼에도, 복음주의 연구가들은 “복음주의가 정말로 위기의 중간에 있다,”“위기 속에 있는 복음주의,”“위기에 처한 복음주의”등의 표현을 통해 복음주의의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가 직면한 위기는 무엇인가? 가장 큰 위기는 정체성의 혼란이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복음주의가 정체성의 위기에 있다고 지적한다. 맥 그라스는 복음주의가 1950년대 이후 수적으로 확장되고 영향력이 확대된 반면, 정체성과 비전이 상실되는 위험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3) 복음주의는 수적인 확장으로 그 정체성이 약해지게 되었으며, 복음주의 운동은 체험과 정서를 강조하고 교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에 따라 그 핵심이 흐리게 되었다. 그랜츠는 복음주의 자체가 학문적 연구의 주제가 될 만큼, 성장하고 확장되었으나, 불확실한 것이 그 핵심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참으로 복음주의 신학이 무엇이며, 복음주의자가 누구인가가 불확실하며, 복음주의란 용어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블로쉬는 복음주의의 르네상스가 계속되고 있지만, 복음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복음주의적이란 용어가 모호하며 유동적이라는 것이다.4) 암스트롱은 현대 복음주의가 지난 수 십년 신학적으로 점차 개신교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의 형식적 원리는“오직 성경”이었으며, 내용적 원리는“오직 신앙”이었다.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성경이 최고의 권위요, 신앙의 유일한 표준이었데 반해, 현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성경이 권위의 많은 원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게 되었다. 또한 전자는“오직 신앙”의 교리를 교회 존립을 위한 필수 조항으로 간주한데 반해, 후자는 그런 이해로부터 멀리 이탈했다. 따라서 현대 복음주의는 “오직 성경”의 문제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으며, “오직 신앙”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주관주의의 바다에 익사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왜 복음주의는 정체성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가? 주 원인은 복음주의에 대한 일치된 정의가 없는 것이다.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그 의미가 다양하여,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그치지 않는 개념이다. 특히 복음주의를 지나치게 좁은 의미로 이해하거나, 그와는 달리 지나치게 넓은 의미로 취급하는데서 복음주의에 대한 오해가 일어나고 있다.

복음주의를 좁은 의미로 정의하는 입장은 체험파와 교리파로 구분된다. 체험파는 종교적 체험이라는 다소 무정형의 개념을 복음주의의 본질로 생각한다. 따라서 일부 복음주의 지류는 교리보다 경험을 강조하며, 기적적 치유, 방언, 예언 등 성령의 체험적 은사를 신앙의 본질로 강조하는 반면, 신학적 교리와 성례전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종교적 경험이 복음주의 신앙의 실체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복음주의란 용어를 18-19세기 부흥운동과 그 후예에 제한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이후 일어난 여러 각성운동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5)

반면, 교리파는 복음주의를 기독교의 핵심 교리에 토대를 둔 신학적 신념으로 정의한다. 어떤 복음주의 지류는 특정 교리를 복음주의의 징표로 생각한다. 복음주의를 성경의 영감과 무오신앙과 동등시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무오 교리가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보증서다. 무오 교리를 포기하게 되면, 복음주의 신앙으로부터 이탈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경 무오신앙이 복음주의의 분수령이 된다. 성경의 무오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따라 신앙 양태가 결정되고 신학 노선이 갈라진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의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The Great Evangelical Disaster)와 존 암스트롱의 [다가오는 복음주의의 위기], 린드셀의 [성경 전쟁] 등이 이런 입장을 대변한다.6) 한편, 또 다른 구룹은 복음주의를 전 천년설이나 세대주의와 동일시한다. 그들은 특히 대 환난 전 성도의 휴거를 강조한다. 이런 입장은 복음주의를 교회 내 한 종파나 파당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복음주의에 대한 좁은 정의와는 달리, 그것을 넓게 정의하려는 흐름도 있다. 어떤이는 예수를 구원자와 주로 인정하는 자는 모두 복음주의자로 불리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들은 용서나 내적 평화를 체험한 자는 복음주의자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친교를 복음주의의 기준으로 취급에 대해서 일어난다. 토마스 오든(Thomas Oden)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신실하게 믿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복음주의자로 정의한다.7) 이 견해에 따르면, 복음을 믿는 자는 모두 복음주의자며, 복음에 기초한 신학은 모두 복음주의 신학이다. 복음주의 신학이 아니면서 기독교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음주의에 대한 축소 지향적 정의나 일반적 이해 모두 복음주의 정체성 해명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특정 경험이나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것을 복음주의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복음주의는 교회 내 단순한 파당에 불과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복음주의를 성서 무오 신앙과 동일시하는 것은 복음을 확신하지만 무오란 용어 사용을 주저하는 많은 사람들을 복음주의 영역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반대로, 복음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복음주의의 보증으로 여긴다면, 복음주의의 구획이 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와 기독교인 모두의 공통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정체성이 모호하거나 희미하게 되는 것은 그 자신의 역사적 유산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일어나는 현상이다. 맥 그라스에 따르면, 복음주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략은 복음주의의 뿌리를 재발견하는 것이다.8) 복음주의의 역사적 원천은 종교개혁,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대 각성 및 부흥운동이다. 특히 종교개혁은 복음주의가 그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복음주의는 개신교 정통신앙의 계승에서 그 정체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복음주의는 신약성서 복음으로부터 유래된 신학적 신념인 동시에, 기독교 정통신앙을 계승하여 일어난 내에 영적 갱신운동이다. 복음에 기초하여 교회를 개혁하려는 운동이다.




II. 반지성주의


자유주의가 소수의 지성적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학운동이라 한다면, 복음주의는 일반 대중에 뿌리를 둔 신앙운동이다. 복음주의의 특색은 활동적이고 대중적이며, 실용, 실리적이다. 복음주의는 대중의 취향에 알맞는 단순한 신앙형태로 발전하여, 대중적 차원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진지한 지성 생활을 유지하는데 실패하여, 문화 및 지성계 상층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복음주의자들은 문화나 학문 연구, 신앙의 근거에 대한 합리적 탐구를 중요시하지 않았다. 마크 놀(Mark A. Noll)의 지적에 따르면, 북미 복음주의는 단 한 개의 학술 연구 전문대학도 현대 문화와 깊이 교류하는 단 한개의 정기 간행물도 가지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9)

복음주의가 빠지기 쉬운 가장 큰 위험은 반 지성주의다. 메이첸은 복음주의가 쇠약해지는 근본 원인은 20세기의 과격한 반 지식주의에 있다고 분석했다.10) 토머스 오덴은 현재 교회 상황을 세 가지 지적 원천에 의해 생성된 늪으로 진단했다. 지성 면역 결핍증, 현대성의 수용, 고전적 정통신앙에 대한 무지다. 특히 복음주의 교회에서 정서적 요소가 크게 강조되고 교리적 면이 크게 약화되는 현상이 널리 퍼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현대주의의 전제들을 수용하는 반면, 복음주의의 역사적 뿌리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하다. 에딘버러의 감독 할로웨이(Richard Holloway)는 세 가지 이유에서 복음주의 신학을 반대했다. 첫째, 복음주의 신학은 분파적 경향이 있다. 복음주의는 생각하지 않고 수용하기를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에 빠질 수 있다. 둘째, 복음주의 신학은 단 하나의 설명을 위한 열정을 나타낸다.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할 뿐만 아니라 지성적 교만이다. 셋째, 복음주의 신학은 빈약한 심미학에 의존하고 있다. 빈약한 창조교리를 견지하며 창조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11)

현대 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청교도운동 등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의 특징은 지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루터와 칼빈은 대중적 반지성주의 운동에 반대하고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청교도들 역시 교육문제 큰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면, 왜 복음주의자들은 그것을 역사적 유산으로 계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지니게 된 것인가? 복음주의자들은 과거 위대한 지성들과의 대화를 통해 사고능력을 확장하거나 향상시키지 못하고, 왜 창의적 사고의 영역을 적에게 내주고 만 것인가? 왜 반 지성주의가 복음주의의 단점으로, 스캔들로, 위기로 지적되는가?

복음주의가 반지성적 경향을 지니게 된 것은 경건주의와 부흥운동의 영향에서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경건주의는 기독교가 신념의 집합인 동시에 삶이라는 진리를 재발견했다. 그러나 일부 경건주의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삶으로만 보고 신념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경건을 지성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고, 신중한 사고와 반대되는 내적 상태로 정의했다. 그런 반지성적 경향이 복음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부흥운동 역시 복음주의의 지성적 빈곤과 무관하지 않다. 북미 대륙의 부흥운동은 1740년대의 제1차 대 각성운동과 19세기 초 제2차 대 각성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행동적이고 즉각적이며 개인적인 것이 특징이었다. 그것은 청중에 호소력 있는 대중적 설교자의 개인적 능력에 크게 의존한 반면, 간접적 지식이나 기독교 사상을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지성의 생명력을 손상시키고 기독교적 지성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세기 중엽부터 복음주의는 감정적이고 조직적 운동으로 발전했다. 근본주의, 세대주의적 전 천년주의, 케직운동, 오순절주의는 자유주의에 대응하여 일어난 복음주의의 생존 전략이었다. 그들은 독자적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들을 보존하였으나 지성생활에는 재난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세대주의가 그리스도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한 것은 학문 탐구의 필요성을 경감시켰으며, 복음주의자들에 큰 영향을 준 성경적 문자주의는 학문적 논쟁과 지성적 실험의 여지를 축소했다. 케직운동 역시 성서신학과 심오한 학문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키는데 적지 않게 작용했다. 오순절 운동의 열광적 초자연주의 역시 영성 강화에는 공헌했으나 신학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근본주의는 현대주의와 자유주의에 맞서 초자연주의를 옹호하며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를 성실히 보존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반면, 지성적 면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으며, 특히 반지성주의의 새 원인이 되었다. 근본주의는 학문을 불신하고, 합리적 추론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다. 신앙을 이성에 반대적인 것, 또는 합리적 분석이나 비판적 평가에 의해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것이 신앙에 대한 추론을 거부하는 비교화주의(obscurantism)을 일어나게 했다. 메이첸은 근본주의가 이성을 불신하고, 겉

핥기 식의 천박한 변증학에 몰두하며, 문화적인 면을 도외시하는 것을 개탄했다.12) 마크 놀에 따르면, 근본주의의 문제점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근본주의는 여러 형태의 반 지성주의를 형성시켰으며, 잘못된 사고를 통해 올바른 결론을 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둘째, 근본주의의 반 지성주의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창조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지성을 사용하려는 노력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었다. 셋째, 근본주의는 19세기 지성적 습관과 사고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강화했다. 따라서 자기 확신에 찬 근본주의적 교조주의에서는 지성이 자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었다. 한편, 해롤드 오켄가, 에드워드 카넬, 칼 헨리, 빌리 그래함 등이 정통 교리를 유지하면서도, 학문적 연구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회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표명하는 신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킨 것은 근본주의에 대한 반성과 각성의 결과로 이해된다.

요약하면, 복음주의적 지성은 항상 복잡하거나 심각한 것보다는 간단하거나 단순한 것, 비판적 분석과 진지한 성찰보다는 영감과 열심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지성적인 삶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활동무대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고는 심오한 학적 노력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복음주의 위기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신학적 노력을 경시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기독교 메시지를 명확히 표명하고 옹호할 수 있는 지적 도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체험을 강조하여 교리와 신학에 무관심한 것이 복음주의 운동에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주의의 핵심과 정체성이 명시되지 못하고 모호하게 되기 때문이다.

놀에 따르면, 복음주의자들이 지성의 생명력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세 가지 문제점들을 시급히 교정해야 한다. 첫째, 특징과 본질의 혼동이다. 복음주의자들은 행동주의와 회심과 같은 특징은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런 특징들 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와 헌신된 삶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특징과 본질을 혼동하는 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기독교 신앙의 특성과 기독교 지성의 부흥을 손상하는 것이다. 둘째, 거짓된 확신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의 특징들이 역사적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거짓된 확신은 기독교적 지성의 여지 마련을 위해 포기되어야 한다. 셋째, 지성적 직관주의이다. 복음주의자들이 지성을 계발하고자 한다면, 직관주의의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

최근 토마스 오든, 버나드 램, 맥 그라스, 그렌즈, 막크 놀,데이턴 등의 활동을 통해 복음주의 지성이 강화되고, 반지성적 경향이 개선되고 있다. 어떤 형태의 비 교화주의나 반지성주의도 참된 복음주의와 제휴될 수 없다. 복음주의는 사실(fact)를 두려워하지 않는다.13)



III. 분파주의


현대 복음주의는 만화경, 모자익, 또는 우산으로 표현될 만큼 다양한 모습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여러 신앙 전통과 단체들이 복음주의를 형성하고 있다. 로버트 웨버에 따르면, 개신교 복음주의는 14개의 단체로 구분된된다. 근본주의, 세대주의, 보수주의, 무 교회파, 개혁파, 재 세례파, 웨슬리파, 성결파, 오순절파, 성령은사파, 흑인교파, 진보파, 급진파, 전통적 복음주의다.14) 이렇듯 여러 형태의 복음주의 단체들이 파생된 것은 다양한 역사적 기원과 복음주의 신념에 대한 강조점과 해석의 차이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주의라는 한 지붕 아래 있으면서도, 지나친 다양성으로 인해 심각한 대립과 첨예한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버나드 램은 [복음주의 신학의 흐름]에서, 복음주의의 분열을 8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열렬한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의 격돌, 세대주의적 전 천년주의자들과 개혁주의적 무 천년주의자들 사이의 격렬한 논쟁, 성경 영감론과 무오교리로 인한 분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해석 차이로 인한 갈등, 자유주의 신학을 타도하는 방법론상의 차이로 교단 잔류파와 이탈파의 양분, 성경과 과학의 관계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 은사파와 비은사파의 대립, 구세대와 신세대 사역자 간의 세대 갈등이다.15)

복음주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 신앙 갱신운동이요 교회 개혁 운동이다. 그것은교회 내의 이데올로기적 다극화, 파당적 분열, 계층 구별을 깨트리는 정화와 갱신을 이상으로 하는 영적 운동이다. 그러나 실제로, 복음주의는 연합하기보다 다극화하며, 인종적이며 계층적 경향을 극복하기 보다 강화하는 이데올기적 운동이 되었다. 복음주의는 진정한 갱신 운동 보다 오히려 그 자신의 특정 관심사를 증진시키는 교희 내 파당의 기능을 하며, 특정 파당(party)의 형태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왜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이 자주 일어나는가? 그들의 배타적 성향과 독단적 태도가 복음주의 분열에 중요 요인으로 지적된다. 특히 미국 복음주의의 분열은 독단주의가 초래한 결과로 이해된다. 복음주의의 분리주의적 경향은 1920년대 근본주의의 등장으로 그 절정에 달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주류 교단 내에 잔류하며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가, 아니면 교단을 이탈하여 교리적으로 순수한 독자 교단을 구성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서로 대립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신앙의 근본 교리를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류 교단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리주의는 근본주의자들이 택한 현대주의에 대한 대응 전략이었다. 그들은 현대주의와의 논쟁을 통해 세속 문화와 자유주의적 교회에 대해 폐쇄적이고 방어적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교단에 남아서 싸우기를 선택한 자들을 타협주의자로 취급했다. 신학적 자유주의를 관용하는 교단으로부터 분리를 강조할 뿐 아니라 그런 교단에 속한 근본주의자 개인과의 교제도 거부한다. 따라서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자들의 독단적이며 불 관용적 태도로 인해 분열되었으며, 그것이 당시 복음주의를 거의 파멸시킬만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분파적 경향은 현대 복음주의의 특징인 동시에, 복음주의 위기형성의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된다. 블로쉬에 따르면, 복음주의가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신학적 미성숙과 고립 및 이데올로기적 채색 때문만이 아니라 종파적 경향 때문이다.16) 특히 근본주의는 흔히 편협하고 논쟁 지향적이며 분파적이라고 비판받는다. 1920년대 이후, 근본주의 운동은 수 없이 분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분리를 교리적으로 강조한다. 근본주의자들은 흔히 분리주의자(separatist)로 불릴 만큼, 현대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분리하고 주장한다.17)

분파정신은 비본질적인 것을 고양함으로써 교회 내에 긴장을 악화시키는 반면, 보편 정신은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교회의 상처들을 치유한다. “본질적인 것에서는 분명한 일치를, 그리고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양심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복음주의 정신이요, 기독교적 사랑과 관용이다. 웨슬리는“보편 정신”(Catholic Spirit)란 제목의 설교에 그것을 강조했다. 보편정신은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인 것에는 분명한 일치를 강조하는 반면, 의견의 문제에 대해서는 보다 관용을 허락하는 것이다.18) 참 종교는 예배 의식이나 세례 형태와 같은 문제에 대한 정통 의견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알며, 사랑의 동력으로 가득 찬 사람 안에서 발견된다. 신학적 논쟁들은 실제로 본질적인 것 보다 오히려 단순한 의견 차이이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 차이로부터 일어난다.

복음주의자들은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중심적이며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해야 하지만, 지엽적이며 부수적인 일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신앙의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상호간의 친교가 깨어짐으로 곧 자멸할 수밖에 없다. 복음주의의 존재 목적은 교회 내 단순한 파당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아래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하는 촉매로 봉사하는 것이다.19)




결론


현대 복음주의는 상당한 장점과 더불어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복음주의자 들은 문제점들에 대해 인정하기를 주저해왔다. 복음주의는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 스스로를 자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복음주의가 직면한 가장 대표적 문제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정체성의 위기다. 양적 성장과 더불어 그 정체성이 모호해졌다. 복음주의의 정의는 입장에 따라, 관점에 따라, 다르다. 복음주의란 말 자체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복음주의는 전통적으로 체험과 정서를 강조한 반면, 지성과 교리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따라서 정체성 확립을 위한 지성적 노력이 부족했다.

둘째, 반지성주의다. 복음주의는 대중적 운동으로는 상당한 성과를 이룩했으나, 지성적인 면에서는 취약했다. 그것은 반지성적 경향 때문이었다. 교리와 신학에 무관심한 것이 복음주의 운동에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정체성의 위기을 초래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 분파주의다. 복음주의는 지나친 다양성과 독단적 태도로 인해 심각한 대립과 첨예한 갈등을 드러내며, 파당적으로 분열되는 경향이 있다.

복음주의는 정체성의 혼란, 반지성주의, 분파주의 등의 문제로 위기에 처해있다. 그러나 그것은 극복되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다. 복음주의는 그 역사적 근원에 대해 큰 관심을 쏟지 못했다. 복음주의 정체성 확립의 지름길은 복음주의의 뿌리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복음주의의 역사적 원천은 종교개혁,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부흥 및 대 각성이다.

반지성주의와 분파주의는 20세기 초 복음주의를 대표했던 근본주의 운동의 부정적 유산이다. 지성을 활용해야 되는 궁극적 이유는 하나님과 그의 세상 사랑을 좀 더 이해하려는 것이다. 신학적 노력을 외면하는 것은 기독교 메시지를 명확히 하거나 옹호할 수 있는 지적 도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지성은 신앙에 대한 반성의 도구로서 유용하다. 신앙의 명료화를 위해서는 공정한 분석, 비판적 추론, 논리적 일관성이 필요하다. 신학은 이성의 사용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남용을 정죄한다. 따라서 진정한 복음주의는 비 교화주의나 반 지성주의와 제휴될 수 없다.

복음주의는 독선과 배타적 성향을 경계해야 한다. 복음주의가 하나의 파당이나 분파에 머무른다면, 기독교를 주도하거나 주류로 진입할 수 없다.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추구해야 하나, 부수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복음주의 정신이다.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 분열과 분리를 치유하는 것이 복음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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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0년대 미 연합 감리교회는 886,000명, 연합 장로교회 526,000명, 성공회는 476,000명의 교인이 준 반면, 루터교-미조리 노회는 3%, 나사렛교회는 8%, 침례교회는 18%, 하나님의 성회는 37% 이상 교인이 증가했다. 1990년 조사에 따르며, 미국에서 급 성장한 500개의 개신 교회 중 89%가 복음주의에 속한 교회였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는 약 4천만 내지 4천5백만명으로 추산되며, 미국 복음주의의 기관지로 간주되는 [크리스챤니티 투데이] (Christianity Today)는 1979년 북미 인구의 20%를, 그리고 여론조사 기관 갤럽은 개신교 교인 중 48%를 복음주의자로 간주했다. John J. Davis, Foundations of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4), pp12-14.

2. Donald W. Dayton, ?ome Doubts about the Usefulness of the Category ?vangelical?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ed.Donald W. Dayton & Robert K Johnston(Knoxville: The University of Tennessee Press, 1991), p.245.

3. Alister McGrath, Evangelicalism & the Future of Christianit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95), p.107.

4. Donald G. Bloesch, The Future of Evangelical Christianity(Garden City: Doubleday & Company, Inc., 1983), p.9.

5. Bloesch, The Future of Evangelical Christianity, p.12.

6. 심지어 한국의 “말씀 보존학회”와 성경 침례교회는 한글판 킹 제임즈 성경만을 절대적, 최종적 권위로 삼는 반면, 다른 성경 번역본들을 사단에 의해 변개된 것으로 주장한다.

7. Thomas Oden, ?he Death of Modernity and Postmodern Evangelical Spirituality,Ó The Challenge of Post-modernism, ed. David S. Dockery (Wheaton: A Bridgepoint BooK, 1995), p. 20.

8. Alister McGrath, Evangelicalism & the Future of Christianity (Downers Grove : Inter Varsity Press, 1995), p.115.

9. Mark A. Noll,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4), pp.3-4.

10. 팩커, [근본주의와 성경의 권위], p.42.

11. Kevin J. Vanhoozer,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복음주의 신학의 지도를 만드는 것.

12. 팩커, [근본주의와 성경의 권위], p.43.

13. 팩커, [근본주의와 성경의 권위], p.40.

14. 로버트 웨버,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15. 버나드 램, [복음주의의 흐름](서울:생명의 말씀사, 1985), pp.189-193.

16. Bloesch, The Future of Evangelical Christianity, p.11.

17. Gary G. Cohen, Biblical Separation Defended(Nutley,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66), p.viii.

18. Albert C. Outler(ed.), John Wesley? Sermons: An Anthology (Nashville: Abingdon Press, 1991), p.299.

19. Bloesch, The Future of Evangelical Christianity, p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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