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한국장로교 100주년, 역사적 고찰

by 【고동엽】 2021. 11. 5.
2012년은 한국에서의 장로교 총회 조직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에 장로교회가 소개되고 1912년 총회를 조직한지 한 세기를 뒤돌아보며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역사적 좌표를 점평해 보는 일은 유익한 반성이 될 것이다. 장로교회가 한국에 소개되고 치리회를 구성한지 100년을 맞으면서 한국교회가 수적으로 크게 성장한 점은 인정되나 성장의 배후에는 숱한 분열의 자취로 점철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기원에 대해 검토한 후 지난 100년간의 장로교회의 역사를 고찰한 후 오늘의 한국장로교회가 안고 있는 두 가지 현안인 장로교회의 감독교회화 현상과 교회분열의 문제에 대해 점평하고 이를 통해 한국장로교회 갱신 혹은 쇄신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1.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형성

‘장로교’(Presbyterianism)를 가장 간단하게 정의하면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칼빈에 의해 발전된 장로교 제도는 교황제나 감독제 혹은 회중제와는 달리 직분상의 평등을 강조하여 계급(계층)구조를 거부하고, 개 교회의 자율과 독립을 강조하되 연합을 중시하는 대의제(代議制)의 성격을 지닌다. 장로교 제도는 성경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성경적인 제도, 비록 ‘장로제’ 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으나 사도시대 부터 존재했던 제도(행 15, 딤전 4:14 등)라는 점에서 가장 사도적인 제도, 교회 정치제도가 대의제 성격을 지닌 제도라는 점에서 가장 민주적인 제도로 일컬어져 왔다.


역사적으로 말할 때 스코틀랜드장로교회는 장로교회의 모교회라고 할 수 있다. 제네바에서 칼빈의 가르침을 입었던 낙스는 칼빈에 의해 개진된 개혁신학을 수용하되 스코틀랜드와 인접한 잉글랜드교회(Church of English)의 ‘감독제’ 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제’의 교회 곧 장로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오랜 망명생활을 끝내고 1559년 5월 2일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낙스는 1560년 교회개혁을 단행하고 전문 25개조의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를 제정했는데, 이 고백서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채택되기까지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서가 되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1561년 12월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들과 함께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총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세계장로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스코틀랜드교회는 신학적으로 개혁신학을 수용했으나 교회정치제도로 장로교제도를 채택하여 장로교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 후예들이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 이주하여 이런 나라에 장로교회가 전파되었고, 다음 시기 미국, 호주, 캐나다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한국에도 장로교회가 소개된 것이다.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와의 첫 접촉은 1870년대로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는 1862년부터 중국선교를 시작하였는데, 1871년 이후로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지도로 산둥반도를 주 선교지로 정하고 만주에서 활동해 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871년 중국으로 피송된 메킨타이어(John Macintyre, 1837~1905)와 1872년 중국에 온 존 로스(John Ross, 1841~1915)였다. 만주지방 선교사였던 이들은 조선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압록강 상류인 린장(臨江)까지 여행한 일이 있으나 조선에 입국할 수는 없었다. 조선에 대한 영적 부담을 느낀 그는 한국인과 접촉하기 위해서 1873년 10월 잉커우를 떠나 가오리먼(高麗門)을 방문한 바 있다. 가오리먼은 남만주 펑황청(圓凰城) 투카라는 곳에 있는 책문(柵門)의 하나로 의주에서 약 120리 되는 곳이었다. 이곳은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지역으로 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로스는 조선인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1874년 4월 말에 다시 가오리먼을 방문 했다. 거기서 한국인 이용찬(李應贊)을 만나게 되었고, 곧 그를 통해 한글을 배우게 된다. 또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5년에는 한국인 김진기(金鎭基), 이성하(李成夏), 백홍준(白鴻俊, 1848~1893) 등 3사람의 의주청년과 접촉하게 된다. 이것이 한국인으로써 장로교 선교사와의 첫 접촉이었다.


앞의 4청년은 1876년 매킨타이어에게 세례를 받으므로 최초의 수세자가 되었다. 곧 이어 인삼 행상인이었던 서상륜(徐相崙)도 선교사와 접촉하여 신자가 되었고, 1879년 만주 뉴좡(牛莊)에서 존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883년에는 서간도의 한인으로서 성경인쇄를 위해 채용되었던 김청송(金靑松) 또한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인 장로교 수세자는 6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이 공식적인 한국인 첫 수세자로서 한국어 성경 번역에 기여하게 된다. 한국인 수세자들과 함께 만주와 그 변방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인에 의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만주에서의 첫 신앙공동체이자 첫 장로교회였다.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내한하기에 앞서 한국인 스스로가 만주 지방에서 기독교(장로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의 자주적 기독교영입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 갔던 이수정도 장로교 선교사를 통해 개종하고 장로교선교사와의 접촉을 통해 성경 번역에 기여하게 된다. 그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는 1882년 9월 28일이었다. 그는 일본 농정(農政)의 권위자였던 쓰다센(律田仙)을 통해 심적 변화를 경험하고 일본에 간지 3개월 후부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1883년 4월 29일 주일에는 동경의 로루게즈쪼(露月町)교회에서 장로교 목사인 야스까와 토오루(安川亨, ?~1908)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일본 땅에서 첫 한국인 수세자가 된다. 특히 그는 일본주제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녹스(George Knox)의 도움을 받으며 성경연구에 진력하였고, 또 미국 장로교 목사로서 미국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 목사의 요청으로 복음서 번역에 참여하게 된다. 루미스는 1872년부터 일본에 체류해 왔는데 요꼬하마 제일장로교회를 설립했고, 1881년부터는 미국성서공회 총무로 일하고 있었다.


교파적을 말한다면 이수정은 장로교인이었다. 탁월한 언어능력의 소유자였던 이수정은 한문성경과 일본어성경을 대조하면서 신약성서 마태전(馬太傳), 마가전(馬可傳) , 누가전(路加傳) , 요한전(約輪傳), 그리고 사도행전(使徒行傳) 등을 번역하였고, 이를 묶어 <현토 한한 신약성서>(懸吐 漢韓 新約 聖書)를 1884년 요코하마의 ‘대영 및 외국성서공회’를 통해 출간한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수정은 완전한 한글 성경번역을 시도하여 마가복음을 번역하여 1885년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ᄒᆞ>라는 이름으로 요꼬하마에서 미국성서공회를 통해 간행한바 있다. 초판 1천부를 인쇄하였는데 그해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라가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입국할 때 가지고 온 성경이 바로 이 마가복음 번역본이었다.


비록 한국인들이 만주와 일본에서 장로교선교사와 접촉하고 세례를 받고 장로교인이 되고 성경번역에 동참하게 되지만,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조직은 미국 북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은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된다. 1884년 9월 알렌이 입국하였고, 이듬해 언더우가가 입국함으로 한국에서 미국북장로교회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호주빅토리아장로교(1889), 미국남장로교(1893), 캐나다장로교회(1898)가 선교사를 파송하여 4개 장로교 선교부가 한국에서 사역하였다. 이들은 합의에 따라 선교지를 분담하여 사역하던 중 여러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미 1883년에는 소래(松川)교회가 설립되었고, 1887년 9월 27일에는 서울에서 첫 교회인 새문안교회였다. 곧 남대문교회(1887), 승동교회(1893), 연동교회(1894) 등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다. 1893년 6월 평양의 첫 교회인 장대현교회가 설립되었고, 부산에는 부산진교회(1892), 초량교회(1893)가 설립되었다. 그래서 1893년에 19개 교회가, 1894년에 12개 교회가, 1895년에 18개 교회가, 1896년에 25개 교회가, 1897년에 33개 교회가, 1898년에 19개 교회가, 1899년에 19개 교회가 1900년에는 46개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7년에는 한국에서의 첫 노회인 ‘독노회’ (獨老會)를 조직하였다. 물론 독노회가 조직되기 이전에 미국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간의 협의체인 ‘연합공의회’(1889), 미국남장로교가 선교사를 파송한 이후 조직된 ‘선교공의회’(1893)가 있었고, 이 공의회가 1901년에는 ‘장로교공의회’로 개칭되지만 이런 협의체는 노회조직 이전의 예비조직이었다. 1906년에 소집된 ‘장로교공의회’는 장로교 노회조직을 결의하고 준비에 착수하여 1907년 9월 17일 최초의 장로교 노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이 노회의 공식명칭은 ‘죠션야소교장로회 로회’였으나 하나뿐인 노회였으므로 ‘독노회’(獨老會)라고 불렸다. 회장은 마포삼열(S H Moffett, 1864~1939)이었고, 회원은 한국인 장로 36 명, 주한 장로교선교사 33명, 찬성회원 9명 등 도합 78명이었다. 찬성회원이란 당시 대한성서공회, 기독교서회, YMCA 등에 속해 있던 장로교 계통의 목사들을 의미했다.


당시 장로교회에 속한 교회는 750(785)개 처, 신자는 7만5천968명, 세례교 은 1만8천61명으로 보고되어있다. 또 목사 선교사 49명, 한국인 장로는 47명에 달했다.


노회의 조직과 함께 ‘12개 신조’를 채택했는데, 이 신조는 성경무오, 하나님의 주권, 삼위일체, 동정녀 탄생,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속죄, 성령, 성례전, 불가항력적 은혜, 부활과 심판 등을 포함하는 단순한 문서였다. 이 ‘12개 신조’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도 교회가 마땅히 가르쳐야 할 문답서로 채택하였다.


1907년 노회 조직과 함께 최초로 일곱 목사를 장립했는데, 이들은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들인 길선주(40세) 방기창(58세) 송인서(40세) 서경조(58세) 양전백(39세) 이기풍(40세) 한석진(41세) 등이었다. 감리교의 경우 1901년에 김기범 김창식을 ‘집사목사’로 안수한 바 있으나, 장로교회는 이 때 첫 목사를 배출하게 된 것이다. 일곱 목사 중 한 사람인 이기풍(李基豊)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한 일은 한국장로교회의 선교사역의 시작이었다.


독노회 하에는 7대리회(代理會)를 두었는데, 경충대리회(관할 교회수 50교회), 평북대리회(160여개 교회), 평남대리회(90여개 교회), 황해대리회(50여개 교회), 함경대리회(80여개 교회), 전라대리회(130여개 교회), 경상대리회(190 여개 교회) 등이었다. 1911년 9월 17일 대구 남문교회에서 모인 제5회 노회는 7대리회를 노회로 승격시키고 총회를 조직키로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1912년 9월 2일 평양에서 7노회가 파송한 목사 96명(한국인 목사 52명, 선교사 44명), 장로 125명 등 221명이 모여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朝鮮耶蘇敎長老會總會)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한국의 전국규모의 장로교 치리회였다.


총회에서는 원두우(H G UnderWood)를 총회장으로, 길선주 목사를 부총회장으로, 한석진 목사를 서기로, 방위량 선교사를 회계로 선출했다. 이렇게 하여 장로교의 기구적인 조직을 갖추었다. 이때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한국 장로교는 단일 총회 하에 있었다.


장로교총회가 조직될 당시 휘하에는 7개 노회가 있었고, 당회가 조직된 교회 134개처, 미조직교회 1천920개처, 한국인 목사 69명, 외국인(선교사)목사 77명, 장로 225명, 세례교인 5만3천8명, 학습교인 2만6천400명이었고, 총신자수는 12만7천228명에 달했다.


2.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적 고찰

1) 미국교회의 영향
한국의 장로교회는 신학이나, 예전, 신앙고백, 그리고 기독교적 삶의 방식 등 여러 측면에서 미국장로교회의 결정적인 영향 하에 있었다. 이것은 선교영역에 있어서나 선교사의 수, 선교활동에 있어서 미국교회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독일의 선교학자 바르넥(Gustav Warneck)이 지적한 바처럼 피선교지의 교회는 선교국의 영향 하에 있게 되는데,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해방 전까지 내한한 선교사의 총수는 약 1500여명으로 파악되는데, 그 중 약 70%가 미국 국적의 선교사들이었다. 내한한 장로교 선교사 671명중 76%에 해당하는 513명이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이 이 점만 보더라도 미국교회가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전에 내한한 1500여명의 선교사 중에서 장로교 선교사는 44.5%로서 감리교의 26.3%보다 1.8배 많은 수였다. 이처럼 장로교는 한국의 주도적인 교파였다.


해방 전에 내한한 장로교 선교사 671명 중 북장로교가 339명으로 50.5%에 해당하고, 남장로교가 191명으로 28.5%, 호주장로교가 78명으로 11.6%, 캐나다장로교가 80명으로 11.9%에 달한다. 남북장로교를 합한 미국장로교 선교사는 79%에 달한다. 이렇게 볼 때 한국장로교 형성에 있어서 미국장로교회의 인적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한국장로교회가 미국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1930년대 이전 한국에서의 장로교회 형성기를 중심으로 말할 때, 그 의미를 3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성경에 대한 문자적 강조, 곧 비블리시즘(Biblicism)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한 성경주의, 혹은 성경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성경에 대한 문자적 강조와 윤리적 엄격성을 의미한다. 둘째, 유럽교회 전통에 비해 신조나 신앙고백, 그리고 성례전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장로교회는 과거 유럽의 개혁교회와는 달리 신앙고백 때문에 로마 가톨릭과 대결하거나 신학적인 토론을 한 경험이 없었다. 성례전의 문제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중요한 문제였으나 피선교지였던 미국교회는 이런 문제로 로마교와 대결한 일이 없다. 이런 미국교회적 특성이 한국에도 영향을 주어 신조나 성례전에 대해 심각하게 노구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세 번째 성격은 부흥주의(Revivalism)라고 할 수 있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대각성운동 이후 특히 영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결과로 일어난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부흥주의는 감성적 측면이 강조되고 개인 전도와 중생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미국교회적 특성들이 한국교회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한국 장로교회는 1901년 장로회신학교의 설립과 함께 신학교육을 시작하게 되지만 미국 선교사들이 신학교육을 주도하였다. 특히 북장로교 선교부가 신학교육을 주도하되, 1924년 라부열(Stacy L. Robert)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기 이전까지는 이길함(Graham Lee), 소안론(W L Swallen), 배위량(W B Baird), 곽안련(C A Clark) 등 메코믹 신학교 출신들이 신학교육을 주도 하였다. 적어도 1920년대 말까지의 신학교육은 선교사들의 주도하에 있었다. 한국인에 의한 신학연구 혹은 교회적 영향력은 1930년대 이후 나타난다. 한국인들이 신학교육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1927년 이후인데, 1927년에 남궁혁(南宮爀, 1882~1950), 1928년에 이성휘(李聖輝, 1889~1950)가 평양신학 교 교수로 참여했고, 박형룡(朴亨龍, 1897~1978)은 1930년부터 교수로 참여하게 된다. 평양신학교 교지 형식으로 발행되었던 신학지남은 1918년 창간되지만 1930년 이전에는 선교사들이 주된 집필진이었다. 이렇게 볼 때 미국 장로교회는 한국장로교 형성기의 신학과 교회생활 일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2) 초기 선교정책과 교회의 설립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가장 일반적인 선교 방법은 순회(巡廻)전도였다. 순행(巡行)전도라고도 불린 이 전도 방식은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의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 선호되던 선교방식으로 선교지역을 방문하면서 매서(賣書) 활동을 통해 전도하는 방식이었다. 선교지역 답사를 겸한 순회활동은 한국인과 접촉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것은 초기 한국선교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결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되 중소지역으로 기독교가 확산되었다.


1890년대 이후 북장로교는 네비우스정책(Nevius plan)을 수용하고 이를 선교정책으로 수용하였는데, 이 정책은 1799년 창립된 영국교회선교회(CMS) 의 총무였던 헨리 벤(Henry Venn)이 제창했던 토착교회 설립론에 근거한 이론이었다. 흔히 3자 원리(3-S formula)로 불리는 네비우스정책은 자립이론인데, 한국에서의 경우 이 3자 원리 외에도 성경연구(사경회)를 강조했다. 이 정책이 한국 장로교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1893년에 조직된 선교사들 간의 연합체인 ‘선교사 공의회’ 는 효과적인 선교활동과 인적, 재정적 낭비를 막기 위해 선교지역 분담정책을 채택했는데, 보통 ‘예양협정’ (禮讓協定, Comity arrangement)으로 불리고 있다. 이 협정 에 따라 미국북장로교는 제령·강계·평양·서울·청주·안동·대구 등 평안도·황해도·경상북도 지역을, 미국남장로교는 전주·군산·목포·광주·순천 등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 지방을, 캐나다장로교(후에 캐나다 연합교회)는 함경도지방과 간도지방을, 호주장로교는 부산과 경남 일대를 각각 담당했다. 이 분할정책이 해 지역에서의 교회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나, 후일 교회분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은 사도시대 이후 전형적인 선교방법인 전도·교육·의료의 3분야에서 활동했는데, 이 선교방책은 19세기 이래로 아시아·아프리카 등 제 3세계에 유효한 선교방법이었고,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선교했던 거의 모든 선교부는 각종의 학교를 세워 학교교육을 시행하는 한편 시약소(施藥所)의 설치와 진료소, 병원을 세웠으며 이를 통해 선교운동을 수행하였다. 이 방법은 한국의 복음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09년 당시 한국에는 950여개처의 기독교 학교(mission school)가 설립 되었는데, 이중 장로교계가 605개교로 63.7%에 해당한다. 감리교계 학교는 200개교로 21%에 불과했다. 장로교가 근대교육운동을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통계의 차이가 있지만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탄할 당시 조선총독부 는 전국에 300여개의 기독교 학교, 약 3만 명을 헤아리는 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에서 기독교 학교는, 교육은 특수한 계층의 일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공교육(公敎育, public education) 개념을 심어주었고, 교육의 대상은 남자만이 아니라 여성도 교육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1913년까지 전국에는 3개처의 진료소를 포함하여 33개의 선교병원이 설립되어 있었는데, 장로교 병원이 17개 병원으로 52%에 해당했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강계·선천·평양·제령·서울·청주·안동·대구·부산에, 남장로교는 군산·전주·목포·광주·순천에 병원을 설립하고 의료활동을 했다. 캐나다장로교는 성진 함홍에는 병원을, 원산과 회령에는 시약소를 두고 있었다. 호주장로교회는 진주에는 병원을, 통영에는 시약소를 두고 있었다. 그 외에도 장로교는 부산·대구·광주에 나병환자들을 위한 의료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교육과 의료 활동을 주도하며 이 나라의 구습을 개혁하고 신분계급의 타파, 여권신장, 여성교육·술·담배·아편금지 등 미신 타파, 흔례·장례의 개혁 등 건실한 사회 형성에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3) 교회부흥과 민족주의
첫 거주 선교사였던 알레의 입국 이후 첫 십년 동안은 ‘고투의 기간’ (years of struggles)이었으나 1900년대를 경과해 가면서 장로교회는 조직, 치리회 등 제도와, 신학, 예전 등에서 정비가 이루어져 갔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1894~5년의 청일전쟁을 경험 한 이후 한국교회는 처음으로 수적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서양기술의 수용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결과 자강 민족의식이 싹텄고, 기독교를 통해 서구와의 접촉을 의도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국가적 위기라는 정치적 환경에서 기독교를 수용하여 이를 타계하고자했던 한국인의 집단적 의식을 호주의 역사가 케네스 웰즈(K M Wells)는 ‘자강 민족주의’(self-reconstruction nationalism)라고 불렀다.


한국교회는 1903년 원산을 시작으로 영적각성과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감리교의 하디선교사의 회개로부터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1904에도 반복되었고, 1906에도 동일한 부흥을 경험했다. 그러다가 1907년 1월에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홍(Great Revival)의 역사로 발전하여 한국교회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대부흥은 약 6개월간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장로교회는 16,000명의 새신자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7년 대부흥은 1909년에는 ‘백만구령운동’(百萬A救靈運動)으로 발전하였다. 이 당시 부흥을 주도하였던 인물은 하디(Dr. Robert H. Hardie), 저다인(J. L. Jerdine) 외에도 그래함 리(Graham Lee), 번하이젤(Charles F. Bemheisel), 윌리엄 불레어(William Blair), 윌리엄 헌트(William Hunt) 등과 한국인 길선주, 김찬성 등이었다. 이때의 부흥은 교파적으로 볼 때 감리교에서 시원하였지만 장로교회에로 발전된 양상을 보여준다. 이 부흥 역사 기간 중에 한국교회의 고유한 신앙행위인 새벽기도, 통성기도, 날연보, 사경회 운동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수용(受容)은 인접한 중국이나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급성장이었다. 우리나라는 외래종교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었으나 기독교의 수용만은 급진적이었다. 이것은 기독교 전래시의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배경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흔히 한국교회 성장을 선교정책설, 정치사회적 환경론,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론(心性論) 등으로 설명해 왔지만 한국이 일제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정치환경에서 유래한 민족주의에 기인한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제국과는 달리 한국은 기독교 국가가 아닌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는 사실은 교회성장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아제국(亞阿諸國)이 기독교국가의 식민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그 나라들의 민족운동은 반(反) 기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300여 년 간 화란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네시아였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인접한 강대국들(일본, 소련, 중국 등)의 침략야욕 앞에서 기독교를 통로로 자강의지를 키워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말하자만 한국인은, 기독교는 외래적인 것이라는 배타적 거부에서 기독교를 통한 근대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환영을 받았고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친기독교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기독교적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김세윤은 이런 특수한 상황을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혼” 이라고 불렀다.


4) 일제하에서의 교회의 수난
한국의 장로교회는 일제하에서 가장 큰 수난을 겪으며 생존의 투쟁을 해야만 했다. 일제의 조선 침략은 운양호사건(1875)을 문제 삼아 개항을 강요한 후 점진적으로 추진되었다. 임오군란(1882), 청일전쟁(1894), 노일전쟁 (1904~5)을 거쳐 일본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였고, 불평등조약인 을사조약을 강제로 채결하고(1905), 한국을 병탄한 후(1910) 식민통치를 시작 했다. 무단통치를 단행하여 경찰과 헌병대를 일원화하여 ‘헌병경찰제도’를 만들어 무력으로 조선인을 통치하였다. 1910년에는 ‘범죄즉결법’을 제정하고 한국인의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를 제한했다. 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사 연구의 일환으로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를 편찬하고,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이를 통해 조선통치를 이념적으로 합리화 하고자했다. 후일에는 한국어의 사용금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민족 말살정책을 수립하였다. 수많은 한국인을 지원이란 이름으로 징용하여 전선으로, 탄광 노동자로 징발하였고, 초등학생에 지나지 않은 12살 소녀에서 50대 여인에 이르는 수십만의 부녀자들이 성노예로 강제하였다.


이 기간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것이었다. 1910년 당시 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조선의 교회는 20만의 신도와 1천900여개의 집회소가 전국에 산재해 있었으며, 지도자로서 외국인 선교사 270여명, 조선인 교직자 2천300여명이 있었다. 그밖에 기독교회는 많은 병원과 고아원을 가진 조직이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견고한 유대로 결합되어 구미의 선교사들에 의해 세계 여론과 연결되어 있다고 일제는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교회에는 국권, 민권의 회복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므로 “태극기가 가장 많이 게양되는 곳은 교회와 기독교인의 집”이라고 보고 될 정도로 교회를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인식에서 일제의 기독교 정책은 일면 회유, 일면 탄압이라는 이중적이고도 양면적인 것이었다.


특히 일제는 1925년 신사제도의 총본산인 조선신궁을 건립한 이래로 도처에 신사(神社)를 건립하고 일면일신사주의를 강행하였다. 1935년부터 기독교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1936년부터는 교회와 교회기관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일대 수난의 역사를 엮어 갔다. 1936년도 당시 한국 장로교회는 2천931개처, 교인 총수는 34만1천700명 에 달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소위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운동의 일환이었다.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해 대륙병참화 정책을 수립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을 실시했고, 이 정책의 거점을 신사(神社)에 두었다. 따라서 신사참배 강요는 전쟁정책을 위한 불가피한 요구였다.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여 미국남장로교 선교부는 즉각적인 학교폐쇄를 결정했다. 그래서 광주의 숭일중학, 수피아여중, 목포의 영흥중학, 정명여중, 순천의 매산학교, 전주의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군산의 영명학교 등은 폐교되었다. 호주장로교 선교부도 약간의 이견이 없지 않았으나 절대다수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다른 선교부도 동일했지만 직접적으로 학교교육에 종사하는 이들이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서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마라연(Ch McLaren) 태매시(M G Tate) 등은 강경한 반대론자였다. 처음에는 원로 선교사였던 매켄지(J N Mackenzie)의 “어떤 명예로운 방법”을 강구하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신사에 가서 ‘묵도’는 하되 ‘참배’는 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1938년 6월 이후 강경하게 돌아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 폐쇄를 선택했다. 미국북장로교 선교부는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심했다. 학교 교육에 가담하는 이들이 신사참배를 수용하더라도 교육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원한경(H H Underwood)이었다. 북장로교는 논란 끝에 남장로교의 영향을 받아 결국에는 학교 폐쇄를 결정하게 된다. 서울의 경신학교 정신학교, 대구의 계성학교 신명학교, 평양의 숭실학교 숭의학교 재령의 명신학교, 선천의 신성중학교, 보성학교, 강계의 영실학교 등이 죽음을 선택했다. 반면에 캐나다선교부(캐나다연합교회)는 신사참배를 일제가 말하는 국민의례로 수용하여 학교 교육을 계속했다. 평양신학교는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자진 폐교를 선택했다.


기독교계 학교에서부터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는 드디어는 교회와 교회기관으로 확대되었다. 기독교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가 평안남도 지사 야스다케 타다오(安武直夫)의 부임으로 발화(發火)되었다면, 교회에 대한 강요는 조선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郞, 1874~1955)의 부임으로 방화(放火)되었다. 관동군 사령관 출신인 미나미는 15년 전쟁 기간 동안 최전선에서 지휘하고 1936년 8월 제7대 조선총독으로 취임했다. 그는 철저한 군국주의자였다.


그는 1937년 7월 중일전쟁(中日戰爭) 이후, 9월 6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일본국기 게양, 동방요배, 신사참배를 요구하였고,10월에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제정하였고, 12월에는 천황의 사진을 학교와 기관에 배부하고 경배를 요구했다. 1938년 2월에는 전쟁수행을 위한 특별지원제(징병제)를 제 정하고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어(한글)사용을 금지시켰다.


이와 같은 일련의 강압통치 과정에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신사참배 강요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용하든지 거부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되었다. 천주교와 감리교, 구세군, 성결교, 안식교, 성공회 등 대부분의 교회들도 일제의 압력에 굴복했다. 끝까지 저항한 교회는 장로교뿐이었다. 장로교는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강하게 반대했으나 강요가 심해지자 점점 그 의지가 약화되어 갔다. 1938년 2월 9일에는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큰 평북노회가 탄압과 압력에 굴복하고, “신사는 국가의식이므로 참배를 허용한다”고 결의하였다. 이렇게 되어 1938년 9월 이전까지 당시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일제의 요구에 굴복하였다. 일제의 용의주도한 전략에 따라 장로교도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外) 교회에서 206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장로교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불법적으로’ 가결했다.


‘불법적’ 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사참배안 처리를 사회자 총회장 홍태기 목사가 ‘가’(可)는 물었으나 ‘부’ (否)는 묻지 않는 채 가결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선교사 방위량(W N Blair)과 그의 사위 한부선(Bruce F Hunt) 등의 항의가 있었으나 가결을 번복하지는 못했다. 삼엄한 상황에서 신사참배안에 대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統後) 황국신민으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후’ 라는 말은 어자적으로 총(鉉) 뒤(後)라는 의미인데, 후방이란 의미였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식임으로 전쟁 수행중인 말레시아나 싱가폴 같은 전방이 아니라 후방에 있는 천황의 백성으로써 신사에 적극적으로 참가 한다는 내용이었다.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평양기독교친목회 심익현 목사의 즉시 실행 요청에 따라 김길창 부총회장의 인솔로 23명의 총회임원은 평양 신사에 참배하였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굴욕이었다. 한국의 장로교회도 태양신 숭배사상을 수용한 것이다. 이 당시(1938. 6) 한국의 장로교회는 3천300여 교회에 달했다.


1938년 총회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했으나 전국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자들은 1940년 7월 이후 ‘일제검거’란 이름으로 체포구금 되었다. 신사참배 반대로 2천여 명 이상이 투옥되었고, 이 중 30여 명이 순교했다. 마지막까지 수감되어 있던 중 해방과 함께 출옥한 인사는 20여명에 달했다. 평양감옥에서 8월 17일 저녁 고흥봉 김화준 방계성 서정환 손명복 오윤선 이기선 이인제 조수옥 주남선 최덕지 한상동 등과 김형락 박신근 안이숙 양대록 이광록 장두휘 채정민 등이 출옥했다. 신사참배반대로 약 150여 교회가 파괴되었고 장로교회는 큰 수난을 감내해야 했다. 1938년 이후 한국교회에는 굴종과 저항이라는 양면적인 역사를 엮어갔다.


5) 해방, 친일청산의 좌절
제2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우리는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해방 후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일제잔재를 청산하고 한국교회를 쇄신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역사의 당위이자 한국교회에 주어진 숙제였다. 국가적으로도 친일파를 제거하고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일은 역사의 당위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과 교회, 그 어느 쪽도 친일세력을 제거하거나 잠재우지 못함으로서 식민지적 상황은 그 이후의 한국사회와 교회현실에 영속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끼쳐왔다. 교회적으로 볼 때 그 부정적인 영향이란 신앙정기를 회복하지 못함으로서 교회쇄신을 이루지 못했고, 교회 분열의 원인(遠因)이 되었다는 점이다.


해방 후 친일인시들은 미군정에 의해 관리로 등용되었고, 1948년 정부수립 후에도 친일전력의 인사들은 제거되지 못했다. 서중석의 분석에 따르면 1960년 1월말 당시 11명의 국무위원 중 독립운동자 출신은 한 사람도 없었고 모두가 일제 때 군수, 판사 등 공직자 출신이거나 군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 해방 이후 정치 경제 문화를 주도하는 이른바 파워 엘리트층은 부일 협력자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김학준은 “친일세력이 분단체제의 고정화에 기여했고, 또 분단체제는 친일세력의 기득권을 보호, 신장시켜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진단했다.


교회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교회쇄신에 대한 평신도들의 열화 같은 요구가 있었으나 친일적 인사들은 신속한 변신을 통해 교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따라서 교회쇄신의 요구는 좌절되었다. 해방 후 친일 혹은 부일 기독교 지도자들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한국교회의 혼란과 분열의 근본적 원인이었고 또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정당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해방 후 장로교회 중심으로 세 지방에서 교회쇄신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 평양 중심의 이북지방에서의 교회쇄신 운동의 중심인물은 출옥 성도인 이기선 목사와 채정민 목사였다. 1945년의 9월 4일 산정현교회에서 평양노회가 임시노회를 개최되었을 때 이들의 주도하에 3일 간 금식기도하며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해 9월 20일 경에는 “교회의 지도자 (목사, 장로)들은 모두 선사에 참배하였으므로 권정(權戀)의 길을 취하여 통회정화(痛悔淨化)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 등 한국교회 쇄신을 위한 기본원칙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쇄신안은 친일적 인사의 강한 반대에 직면했다.


1945년 11월 14일부터 일주일간 평북노회가 주최한 ‘평북 6노회 교역자 퇴수회’가 선천 월곡동(月谷洞)교회에서 회집되었을 때 이기선 목사와 만주 봉천의 박형룡 박사가 강사로 초빙되었다. 이 모임에서 박형룡이 한국교회 쇄신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을 발표했을 때 신사참배 가결(1938) 당시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 등은 쇄신원칙은 독선적인 주장이라며 강력하게 반대 했다.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옥 밖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신사참배 회개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형룡은 교회지도자들의 태도가 구태의연하고 회개의 빛이 없음을 보고 실망한 나머지 봉천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기선 목사 등은 1945년 9월 20일 발표했던 한국교회 재건원칙을 그대로 실시하는 교회들, 곧 평양 산정현교회를 위시하여 선천, 신의주, 강계 등 평안북도와 황해도 등지의 30여 교회들을 규합하여 별도로 독노회(周老會)를 조직했다. 이 독노회가 혁신복구파(革新復舊派)라고 불렸다. 북한에서의 교회재건과 교회쇄신을 위한 시도는 공산정권의 수립으로 좌절되었고, 오늘까지 침묵의 교회로 남아 있다.


서울에서의 교회재건은 영적쇄신이 아니라 일제하에서 와해된 교회조직을 재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장로교의 김관식(金觀植) 김영주(金英珠) 송창근(宋昌根) 목사, 감리교의 변홍규(下鴻圭) 이규갑(李奎甲) 박연서(朴淵瑞) 목사 등은 일제에 의해 조직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유지, 계승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이 시도가 무산되자 장로교 인사들은 1946년 6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대한 예수교장로회 남부총회(南部總會)를 조직하였다. 분단으로 인한 남한교회만의 총회였기에 ‘남부총회’ 라고 이름하였으나 1947년 4월 ‘총회’로 개편되었다.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던 조직은 재건했으나 친일적 인사들이 여전히 교권의 중심에 있었다.


교회쇄신운동이 적극적으로 일어난 지역은 부산, 경남지역이었다. 이 지방에서의 교회쇄신운동도 친일인사들의 저항에 직면하여 교회쇄신은 심한 방해를 받았다. 1945년 9월 18일에는(1942년 5월 5일 장로교총회가 해산됨에 따라 5월 25일 해산되었던 경남노회를 재건하는) 경남재건노회가 조직되었다. 이때 일제하에서 범한 죄과에 대한 자숙안이 상정되었는데, 이때부터 친일전력의 교권주의자들과 교회쇄신론들이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교권주의자들이 노회의 영도권을 장악하므로 자숙안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때부터 진정한 쇄신을 주장하는 이들과 교권주의자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런 대립 가운데서 교회의 지지를 받지 못한 김길창, 권남선 목사 등은 1949년 3월 8일 부산항서교회에서 기존의 경남노회를 이탈하여 별도의 ‘경남노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경남지방에서 일어난 대수롭지 않는 사건으로 보일지 모르나 이것이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의 시작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한국 장로교회의 첫 분열은 교권주의자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변신과 자구책의 결과였다는 점이다.


6) 1950년대의 교회, 장로교회의 분열
1950년대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기였다. 해방 후 5년이 경과했으나 그 이전 시대의 민족문제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열강들의 대립은 1950년대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었다. 해방 후 남북한 간의 첨예한 대립과 이 시대의 냉전체제는 한반도에 민족상잔의 전쟁을 발발케 하였고, 이 전화(戰禍)는 민족의 고난과 아픔의 실체였다.


이 시대의 교회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 시기의 교회는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가 부족했다. 예언자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국가권력에 대한 교회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했다. 북한에서의 공한정권의 수립, 남북 간의 이념적 대결, 그리고 6.25전쟁의 결과로 남한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화 되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과 거부는 상대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과신을 안겨주어 자본주의의 문제를 정당하게 비판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신사참배 문제, 신학적 문제, 교권적 대립 혹은 교회 지도자 간의 갈등으로 장로교회의 분열을 초래했다. 신사참배 행위에 대한 회개와 자숙을 주창한 주남선과 한상동 목사는 1946년 부산에서 과거 평양신학교의 정신을 계승하는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이들은 고려신학교를 교회쇄신운동의 신학적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부일 협력자들, 곧 신사참배 요구를 수용했던 이들의 방해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교회 쇄신론자들은 1951년 총회로부터 축출됨으로써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총회로 부터 축출된 이약신(李約信) 주남선(朱南善) 한상동(韓尙東) 등은 1952년 별도의 치리회를 구성했는데 이것이 한국장로교회의 첫 분열인 고신교회의 출발이었다. 고신교회(단)는 1.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대와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 2.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 정신의 계승 3. 교회쇄신을 통한 생활의 순결을 그 이념으로 제시했다.


신학적 문제로 총회로부터 제명된 김재준(金在俊) 목사는 1953년 경기노회 중심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기독교장로회’(기장)로 분립하였다. 이것이 한국장로교회의 제2차 분열이었다. 보수적인 한상동과 진보적인 김재준의 양 극단이 제거되어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한국장로교회는 1959년 다시 분열했다. 표면적으로는 신학교 건축 기금 3천만환 사기사건, WCC 문제,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 등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박형룡과 한경직 간의 대립으로 총회는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분열되었다. 이것이 제3차 분열이었다. 장로교회는 1912년 총회를 구성한 이래 단일 교회로 남아 있었으나 1952년 이후 3차례의 분열을 통해 4개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분열의 중심에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4사람의 지도자 곧 한상동(1901~1976), 김재준(1901~1987), 박형룡(1897~1978), 한경직(1902~2000) 목사가 좌정하고 있었다.


분열된 장로교회의 합동을 위한 시도도 없지 않았다. 1959년 장로교회가 승동과 연동측으로 분열되자, 고신측과 승동측은 교단 합동을 위한 대화를 시작했다. 1960년 9월 양 교단은 해 교단의 인준 하에 통합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약 3개월간의 대화 끝에 1960년 12월 13일 합동총회가 개최되었다. 고신과 승동측은 ‘합동’ 교단으로 통합된 것이다. 합동을 기념하여 출판된 찬송가가 ‘새 찬송가’였다. 고신과 승동측은 ‘합동’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으나 불과 3년이 못되어 고신은 환원을 선언하고 합동측으로부터 재 분리되었다. 1959년 분리된 합동측과 연동측도 1962년과 1968년 재통합을 시도했으나 이 또한 무위로 끝났다. 결과적으로 한국장로교회는 4개 교단으로 분리되어 고신교단은 고려신학교(고신대학교)를, 합동교단은 총회신학교(총신대학교)를, 통합은 장로회신학교(장로회신학대학)를, 기장은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를 중심으로 각각 신학교육을 시행하며 목회자를 양성하고 있다.


7) 1960~70년대의 교회
1960년대 한국교회는 정치현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이 1960년의 4.19혁명이었다. 학생혁명은 우리 사회의 민주의식 혹은 정치의식의 발전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회참여와 그 대응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교회는 이승만 재임 중에는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으나 4.19 이후 기독교계는 정치현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1961년 5.16군사 쿠테타 발생 10일 후 ‘한국교회협의회’(NCC)는 박정희 장군을 비롯한 군사쿠데티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즉 쿠데타는 부정과 부패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건지기 위한 불가피 한 조치였으며 한국민은 군사정부에 협조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35일 만인 6월 21일에는 한경직과 김활란은 한국교회를 대표하여 미국을 방문하고 군사정부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통해 교회는 사회현실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조망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는 보수나 진보의 구분선이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출현과 함께 정치권력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신학적 성향에 따라 선명하게 구분되기 시작했고, 신학적 성향에 따라 정치권력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대두되었다. 즉 보수적 성향의 교회나 그 지도자는 개인구원을 강조하고, 정교분리에 근거하여 정치적인 문제나 사회구조의 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무관심했다. 그러나 진보적 교회는 사회구조의 개혁 및 변혁을 우선시하고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결국 1960년대부터 보수와 진보 양측은 정치권력과의 관계 혹은 태도에 대한 분명한 차이를 노정하기 시작했다.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신학의 양극화 현상은 그 이후의 역사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보수와 진보의 경계선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교회성장이었다. ‘성장’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의 제왕이었고, 교회성장은 이 시대의 제일의적(第一義的) 과제였다. 이것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을 국가지표로 삼았다. 이것은 군사혁명의 당위성을 꾀하는 명분확보로 제시되었고,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기근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생존의지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경제성장, 곧 성장지상주의(成長至上主義)는 국민적 소망과 정권적 의지, 그리고 현실적 힘을 가진 살아 있는 가치체계였다. 그 결과 우리나라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 1966년과 1970년 사이의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된 59개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는 경제성장률 제1위, 수출신장률 제1위, 그리고 제조업 고용증가율 제2위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성장지상주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갔다. 성장은 교회의 최고의 가치이자 최고선(最高善)이었다. 결과적으로 1970년대 교회의 양적성장 추구가 이 시대 교회의 뚜렷한 특정이 되어 1907년 대부홍 이래 가장 큰 성장을 이루었다. 해방 당시의 기독교신자는 약 35만 명으로 추산되고 이로부터 10년 후인 1955년에는 60만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1965년에는 약 120만 명으로 성장하였고, 1975년에는 약 350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1970년대를 마감하는 1979년 기독교신자는 약 70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는 매 10년마다 200% 성장하였고, 1970년대 후반에는 매일 6개씩의 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수적으로 말하면 1970년에는 매년 60만 명씩 증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통계만 보더라도 1970년대의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교회성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 운동에 영향을 준 것은 정부의 경제성장제일주의만이 아니라 미국 풀러신학교의 교회성장학파(Church Growth School)의 영향이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의 목회방식도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다.


‘성장’ 이 최고의 가치였기 때문에 신학적 일관성이나 신학적 순전성은 별 의미를 갖지 못했다. 성장 그 자체가 문제시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성장제일주의는 성장 이외의 다른 가치들을 무시하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성장 아닌 것, 곧 정당한 치리, 의와 거룩, 성결, 이웃사랑 등 윤리적 가치들은 무시되거나 경시되었다. 이 시기 성장 지향적 목회는 인간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망을 신앙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거나, 현세적 축복지향의 기복주의가 풍미했다. 결과적으로 이 시대의 교회는 순례자적 이상을 상실했다.


1970년대 장로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기 교회 분열 또한 심각했다. 1970년대 중반 고신교단과 합동교단에서의 내분은 교회분열로 나타났고, 장로교회는 교권과 지연, 학연이 결합되어 분열을 거듭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300여개에 달하는 비인가(무인가)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신학교의 설립은 필연적으로 교단의 설립 혹은 교회의 분리를 초래했다. 1970년대 이후 생성된 교단으로는 개혁 광주측, 개혁 서울, 개혁 안양, 개혁 국제, 개혁 총연, 예장 총회, 합동 개혁, 합동 정통, 합동 중앙, 합동 복음, 합동 총회, 합신측, 선목, 대신, 호헌 등이다.


1970년대 한국교회는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을 또 다른 형태의 교회적 과제로 인식했다. 이 시기에 보수적 교회가 교회성장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진보적 교회는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선교적 과제로 인식했다. 즉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출현과 함께 한국교회에는 두 가지 형태의 교회 운동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사회현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반면 교회성장을 우선적 과제로 추구하는 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구조의 개혁 및 변혁을 앞세우는 사회참여 운동이었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전자는 사회구조와의 싸움보다는 개인의 구원문제를 앞세우는 보수주의 교회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보수측과 진보측 간의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8) 1980년대의 교회
1961년 군사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한 의도로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헌정을 중단시키고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시켰다. 국회가 해산된 상태에서 비상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소위 유신헌법이 공포되었고 형식적인 국민투표에 의해서 이 법은 확정되었다(1972. 11. 21). 대통령의 중엄제한이 철폐된 이 헌법은 대통령에게 무소불위의 절대적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19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 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되어 절대 권력을 행사했으나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피살됨으로서 70년대의 암울한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이런 정치적 변혁을 경험하면서 국가와 교회에 대한 바른 관계가 무엇인가를 깨닫기 시작했고,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헤아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교회의 사회참여는 더욱 확대되었고, 1980년대는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통일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확대되었다. 1980년대 전반기까지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관심사가 민주화였다면, 1980년대 후반에 와서 민족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장 큰 관심사는 통일문제였다. 따라서 통일문제는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진보적 교회가 주도한 통일논의는 민족주의적 관심에서 전개되었고 북한 인권에 대한 무관심 등으로 보수적 교회의 지지를 얻지 못했으나 민간차원에서의 통일운동을 주도한 점은 부인 할 수 없다.


1980년대는 한국교회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1984년을 전후하여 한국교회는 자성과 반성의 계기로 삼았고, 그 동안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수적성장에 치중하였고, 사회현실에 대한 정당한 관심이나 교회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된다. 이때를 전후하여 일상의 삶 속에서 신앙적 성숙을 도모하는 말씀 묵상운동(QT), 제자훈련, 기독교문화운동, 교회의 사회봉사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고, 특히 선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이 시대의 주목할 만한 진전이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는 교포목회자를 포함하여 불과 20여명에 불과했다. 이 점은 한국교회가 해외선교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던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선교는 거 교회적 관심사로 대두 되었다. 한국교회에서 선교운동에 연향을 준 이는 1968년 동서선교연구원을 설립했던 조동진 목사였다. 그는 1980년대 이후 선교신학을 가르쳤던 전호진 박사와 함께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990말 당시 한국의 20여 교단과 30여 선교단체는 790명의 선교사들을 해외에 파송했다. 그러나 2007년에는 173개국에 16,6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 대국이 되었다. 현재(2011년 12월 기준) 한국교회는 23,322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급성장은 서구기독교회의 주목을 받아왔으나 1980년대 후반을 거쳐 가면서 성장 둔화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점은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삶의 환경의 변화였다. 한국인의 삶의 환경은 1980년대 후반에 와서는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해방이후의 혼란, 6.25동란 이후의 가난함과 무질서 그리고 계속되던 전쟁의 위협, 이런 사회적 불안 요인들은 1980년대를 거쳐 가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역대정권에 의해 정권적 차원에서 이용되던 안보 이데올로기는 1980년대 후반부터는 그 위력이 크게 감소되었고, 김영삼 정부 이후는 국제적인 냉전체제의 종식과 함께 전쟁에 대한 위기감은 상당히 격감되었다.


1970년대부터 서서히 나타나던 경제성장과 삶의 환경 개선은 1980년대를 거쳐 가면서 상당한 변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해방이전에는 한국인의 약 80%가 농업에 종사했으나 지금은 농어촌 인구는 15% 미만이다. 말하자면 급격한 도시화 현상 혹은 도시집중현상이 초래되었고, 보다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되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85년 당시 1인당 GNP는 2,242불에 지나지 않았으나, 1993년에는 7,513불로 세계 150여 국가 중 30위 안에 들게 되었다. 1990년대에 후반에는 1만불을 넘어섰고, 2005년에는 17,422불로 세계 33위였다. 이와 같은 안정된 생활은 종교적 세속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이전에는 고난과 가난의 와중에서 믿음 안에서 안식을 누렸고 그 믿음은 험악한 세월을 이기는 정신적 무기였다. 그러나 사회적 삶의 변화로 신앙은 본령(本領)에서 주변(周邊)의 부가물로 밀려나고 있다.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가 자동차의 급격한 보급이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승용차의 보급은 1985년 이후 급격히 증가 되었다. 1985년의 경우 55만6천700대에 지나지 않았으나, 1986년에는 66만4천대, 1987년에는 84만4천대, 1988년에는 111만 8천대, 1989년에는 155만8천600대, 1990년에는 207만5천대로 각각 늘어났다. 또 1991년에는 273만대, 1992년에는 346만대로 중가 되었고, 인구 100명당 보유수가 8대로 나타났다. 승용차만이 아니라 상용차까지 합치면 1992년의 경우 자동차 보유수는 523만대이고 100명당 자동차 보유수는 12명으로 나타나 있다. 한국의 자동차 보유수는 세계 160개국 중에서 60번째에 해당된다. 그런데 1993년에는 427만대로 늘어났고 상용차까지 합치면 627만대이다. 1994년의 경우 인구 100명당 자동차 보유수는 16.7대로 늘어났다. 자동차의 급격한 보급은 한국인의 생활양식에 급격한 변화를 주었고 이것은 여가문화의 변화와 함께 교회 출석률을 급격히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즐기느냐가 문제로 인식 되고 있다.


물론 기존교회와 지도자들의 영적, 도덕적, 윤리적 권위의 상실, 이단이나 유사기독교의 활동이 가져온 부정적 영향 등도 교회성장 둔화현상에 영향을 끼친 요인들이다. 특히 1992년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광신적인 활동과 그 주장의 허구성, 몰이성적 행태들이 가져온 역기능 또한 복음전도 활동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던 요인이었다.


여성안수 문제는 1980년대 이후 장로교회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이것은 비단 한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미국 북장로교회(PCUSA)는 1930년에 여장로직을 허용하였고, 1955년 총회에서는 여목사 제도를 승인한 바 있고, 북장로교회에 비해 다소 보수적이었던 미국 남장로교회(PCUS)는 1964년에 여성안수를 허락하였는데, 1978년에는 여목사 사라 모즐리(Sara B. Moseley)가 총회장이 되기도 했다. 위의 두 교회는 1983년 통합하여 지금은 미합중국장로교회가 되었고 여성안수는 자연스런 일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교회들만이 아니라 미국의 기독교개혁교회(CRC)는 지난 30여 년간 이 문제로 심각한 토론이 있었고, 이로 인한 내분까지 겪었다.


여성 사관을 당연시해왔던 구세군(1908)을 제외하고 볼 때, 한국에서 여성안수를 가장 먼저 결정한 교회는 감리교였다. 한국감리교회는 이미 1933년부터 여성안수, 곧 여성 목사와 장로가 허용되었다. 기독교장로회는 1957년에 여장로 제도를, 1974년부터는 여목사 제도를 채택했다. 미국남장로교회가 여성목사를 안수하기 4년 전의 일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극단적인 보수주의 혹은 근본주의적인 재건파 교회가 1954년부터 여성안수를 허락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신학적 근거에서 여성안수를 허용했다기보다는 재건파의 지도자인 최덕지 씨를 위해 여자성직을 허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일로 재건교회는 여권파와 반여권파로 분열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고신 등 보수적 장로교회는 여전히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통합교회(단)는 여성안수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에 모였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74회 총회에서는 여성안수 찬성표가 반대보다 2표가 앞서는 이변이 일어났으나 4표가 부족하여 과반선을 넘지 못해 부결되었다. 그러나 1994년 제 79회 총회에서는 총 투표자 1,321명중, 찬성 701, 반대 612, 기권 8표로, 89표 차이로 여성안수를 허용하는 헌의안이 채택되었고,1996년부터 여장로와 여목사를 두게 되었다. 이로서 통합측은 한국의 감리교와 기독교장로회에 이어 여성안수를 허용하는 교단이 되었다.


1980년대 이후의 한국교회는 밖으로부터의 도전과 내부적 혼란을 극복해야 하는 이중적 난제를 안고 있었다. 단군전건립운동에 맞선 건립반대운동, 이단과 사이비 유사기독교의 출현, 신학교의 난립과 교회 분열, 교회의 사회적 신뢰의 상실 등은 교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적극적인 선교운동, 대사회 봉사활동, 북한동포에 대한 관심과 물적지원, 통일운동에의 동참, 교회연합운동 등이 이 시대의 중요한 활동이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고 교회가 이 사회 앞에서 도덕적 윤리적 계도자의 위치에서 한국사회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기독교 신앙 본래 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어떤 시대든지 기독교의 세속화는 본래적 가치로부터의 후퇴나 이탈이었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시는 것이다. ‘나그네성(性)’의 상실은 교회의 속화를 초래하였다. 한 때 막스주의자였던 폴란드 출신의 사회철학자 레젝 콜라롭스키(Leszek Kolakowski)는 오늘의 서구사회의 세속화는 기독교가 너무 쉽게 그 고유한 가치를 포기해 버린 결과라고 지적했다.


3. 한국장로교회의 오늘과 내일: 반성과 평가

앞에서 지적했지만 지난 100년간의 한국 장로교회사를 뒤돌아 볼 때 해결해야 할 몇 가지 과제가 있다. 대사회 정책의 수립, 이단에 대한 대처, 그리고 무인가 신학교의 난립과 무자격 목사의 양산에 대한 대처, 신학의 발전, 교회연합 운동, 통일에 대한 대비, 기독교적 가치의 구현 등 실로 많은 난제가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의 장로교회가 안고 있는 2가지 문제, 교권주의와 교회구조의 계급화, 교회분열과 연합에 대해 검토하고 이를 통해 향후 장로교회가 나아갈 바를 점평해 보고자 한다.


1) 장로교제도와 교권주의
장로교회가 어떤 정치제도를 취하는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장로교는, 중세적 계층구조를 반대하는 성격과 교회의 자율과 독립을 강조하는 이중적 성격이 있다. 로마 가톨릭의 중세적 계층구조를 부정하는 가장 안이한 방식은 회중교회와 같은 개 교회주의를 택하던가, 아니면 교직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소위 자유교회(free church)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제도적으로 이런 양 극단을 지양한다. 즉 교회의 계층화를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 교회주의나 자유교회적 경향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장로교의 역사와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의 장로교회는 앞의 양 극단의 형태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천주교와 같은 교회구조의 계층화와 교권이 행사되고 있는가 하면, 그 반대적 경향, 곧 개교회적 경향도 심화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장로교회가 감독교회화 되고 있다는 지적이 높다. 뿐만 아니라 노회, 총회가 권력화 되어 교권을 행사하는가 하면 정치집단화 되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한국교회 일각에서 나타나는 개교회적 경향은 따지고 보면 교회 구조의 계급화, 과도한 교권 행사 혹은 교회 조직에서의 정치집단화에 대한 반동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계급적인 구조는 본질적으로 신약교회 원리에서 어긋난다. 초기 기독교회에서 직분자들은 서로를 “함께 종 된 자”(골 1:7), “함께 군사 된 자”(빌 2:25), “같은 장로”(벧전 5:1), 혹은 “동역자”(빌 2:25, 4:3, 몬 1:24)라고 불렀다. 이 시대교회는 계급적인 구조가 없었으나 2세기를 거쳐 가면서 교회구조의 변질과 함께 교회는 계층화되고 감독정치가 자리 잡게 되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회중교회는 계층구조를 반대하고, 교회연합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교회연합을 강조하다보면 교회조직이 계급구조로 변질될 위험이 있고, 계급구조화 될 때 교권이 행사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 다. 그래서 회중교회는 개체 교회의 자율과 평등을 절대적 가치로 수용하는 개 교회주의를 지향했다.


그런데 장로교회는 장로와 장로, 교회와 교회간의 평등을 강조하며, 또 감독정치의 계급적인 구조를 반대하면서도,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에서 연합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장로교회는 감독제도를 반대하는 점에서는 회중교회와 동일하지만, 연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회중교회와 다르다. 장로교회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모든 지체들이 누리는 평등성(equality), 직분자들을 통해서 운영되는 자율성(autonomy), 교회 대표를 통해서 실시되는 연합성(unity)을 기본 정신으로 하고 있다. 즉 장로교회는 평등과 자율을 강조하면서도 연합을 반대하는 회중주의와 다르며, 연합을 강조하지만 평등과 자율을 거부하는 감독정치도 반대한다.


그런데 한국에 장로교회가 소개되고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게 되자 교회가 점차 교권화 되고 장로(목사)와 장로(목사) 간의 평등, 교회와 교회간의 평동의식이 희박해지고 계층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점은 장로교회 제도에서 오는 내적원인과 한국의 문화현실에서 오는 외적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내적원인이란 말은 장로교회가 감독교회 정치에 대한 반발로 나왔지만, 장로교회는 제도적으로 감독교회화 혹은 교권의 권력화가 될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외적 원인이란 한국이 처한 유가적(儒家的) 문화 토양에서 교회구조의 계급화가 일어날 소지가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런 영향에서 1920년부터 장로교회에는 교회 정치 혹은 교권이 행사되기 시작했는데 그 일예가 서북지방과 비서북지방의 대립이었다. 흔히 서북(西北)지방으로 불리는 황해도와 평안도지역에서 교회성장은 타 지역을 완전히 앞지르기 시작한다. 1905년의 경우 서북지방의 신자 수는 18,300명으로 전국의 23,300명의 80%를 점했다. 교회당의 경우 서북지방은 298개처로써 전국 298개처의 85%를 점했다. 1910년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나는데 이때의 교세는, 평북 7,901명, 평남 10,842명, 황해 4,740명, 경기충청 2,975 명, 경상 5,726명, 전라 및 제주 5,509명이었다. 이 통계를 보면 서북지방으로 불리는 황해도와 평안도지방의 신자 수는 23,483명으로 경기충청의 2,975 명보다 8배 앞선다. 서북지역 이외의 기독교 인구를 다 합해도(14,210명) 서북지역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비율은 그 이후에도 계속 유지된다. 이런 서북지방의 압도적 성장 때문에 그 세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세력화가 교권의 행사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런 갈등은 1940년대까지 계속되어 서북과 비서북, 이북과 이남 사이에 긴장과 대립이 형성되었다. 말하자면 이미 장로교회는 부정적 의미의 교회정치 혹은 교권이 행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의 장로교회의 분열은 신학적 혹은 신앙고백적 동기라기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깊다는 점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1953년의 기장의 분열이 그러했고, 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열이 그러했다. 일반적으로 승동과 연동측으로의 분열은 박형룡의 3천만환 사건, WCC가입 문제, 경기노회 총대 건의 문제로 논의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박형룡과 한경직을 둘러싼 두 인맥 구성에서 야기된 대립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분열에 신학적 요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형룡, 한경직을 두 축으로 한 파당적 대결로 발전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장로교회에서 교권과 교회정치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그 이후 의 한국장로교회의 도덕적, 윤리적 균형 감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교권의 행사는 유교적 권위주의에 힘입어 권력화 되고 집단화 되었다. 이제는 교회 분열이라는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그 분명한 증거가 1970년대 초에 전개된 합동과 고신교단에서의 분열이었다. 1970년대 합동교단은 교회정치문제로 깊은 수렁에 빠졌고, 1978년의 합동보수(후에 개혁측), 1980년의 합신측의 분열 등 수다한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교회 분열이 아니라 분열에 이르게 한 교권과 교회정치의 폐단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동일한 시기 고신의 경우에서도 동일했다. 어떤 경우든 신학적, 윤리적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배후에는 지연이나 인맥, 노회를 배경으로 한 교권대립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런 유형의 교권 대립이나 교단 내의 정치활동은 과거에 비해 더욱 심화 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자 우리 장로교회가 극복하고 해소해야 할 과제가 아 닐 수 없다. 우리는 장로교 전통의 교회정치 원리를 존중하되 한국교회 현실에서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보완적 제도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한국장로교회의 감독교회화 현상을 직시하고, 파벌이나 부당한 교회 정치운동을 잠재우게 될 때 교회로서의 권위를 회복하고 신뢰받는 교회를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2) 교회성장과 분열, 연합을 위한 시도
한국 장로교회는 피선교지에서 유래가 없는 급성장한 교회이지만 동시에 과도하게 분열된 교회로 알려져 있다. 지난 100년의 역사는 성장의 역사인 동시의 분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성장하면서 분열하고 분열하면서 성장해왔다. 거듭된 분열을 거쳐 현재는 약 250여개 교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난날의 분열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1950년대와 그 이후 상황에서 나름대로 분리해야만 할 이유가 있었겠지만 지금에 와서 그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연합을 추구해야 할 오늘의 현실에서 적절치 못하다. 단지 분열을 당연시하고, 칼빈이 그토록 강조했던 연합에 대해 무관심했던 점을 반성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분열된 장로교회의 현실을 사실상의 현실(the reality of de facto)로 받아들이고 연합과 일치를 모색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연합은 어느 시대나 용이하지 않았고, 분열은 쉬우나 연합은 더욱 어렵다는 점을 지난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는 분열된 가운데서도 연합을 시도한 여러 사례들이 있다. 1960년에는 고신과 승동이 연합하여 ‘합동’ 교단을 조직했으나 3년이 못되어 재 분리되었고, 1962년과 1968년에는 합동과 통합 간의 연합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국기독교 100주년이 되는 1984년을 기점으로 지난날의 분열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일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 와서 한국장로교협의회가 구성되고 장로교회들 간의 연합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또 이를 위해 장로교 7개교단 중견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젊은 목회자협의회가 조직된 일도 있다. 1997년에는 범 합동교단에 속하는 9개의 보수교단이 ‘선 합동, 후 협상’이라는 기치 하에서 통합을 논의한 바 있다. 이때도 교단통합이 성사되지는 못했으나 교회연합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2005년 9월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과 개혁교단이 분열된 지 26년 만에 재 합동했다. 그러나 완전한 합동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연합을 위한 추구는 권장할만한 가치였다.


우리는 몇 가지 근거, 곧 연합은 성경의 명령이라는 점(요 17:11, 엡 4:2~6)에서, 연합은 복음중언과 기독교적 가치 실현에 있어서 효과적이라는 점, 연합은 개혁교회 전통에서 항상 강조되어 왔다는 점, 그리고 교회연합은 한국교회 쇄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단간의 완전한 통합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한국의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이종윤 박사가 제시하는 ‘일 교단 다 체제’ 방식의 연합이 성경적 타당성과 교회사적 실례, 현실적 가능성을 보여 주는 이상적인 형태로 보인다. 이종윤 박사는 ‘한국장로교회는 하나 될 수 있나’ 라는 논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여러 갈래로 찢어지지 않는 이상, 두 개 나 세 개의 교회가 있을 수 없다”(IV.1.2)는 칼빈의 교회관에 근거하여 교회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일 교단 다 체제, 곧 ‘하나(1)의 한국 장로교회(단)에 속한 서로 다른 교단(체제)’를 제안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일 교단 다 체제’는 하나의 교단으로 일원화하되, 현재 교단이 지니는 각 교단의 특성을 인정하고 치리회의 다양성을 인정해 주는 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대 국가 사회문제, 통일문제, 선교사의 교육 파송 관리, 신학 교육 문제 등은 일 교단 체제하에 운영한다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호주장로교회의 경우와 비교될 수 있다. 호주의 경우 전국 규모의 호주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ustralia, PCA)는 매 3년마다 총회를 개최하여 범 교회적인 의안을 처리하지만 실제적인 주요 사안은 각주별로 조직된 주 총회가 독자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의 장로교라는 우산 아래 있으나 각 주별로 교회행정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다. 바로 이런 체제를 이종윤 박사는 ‘일 교단 다 체제’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일 교단 다 체제 방식은 초대교회 때, 곧 기독교 형성 초기부터 있었던 제도라는 점에서 결코 새로운 제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실예가 고린도교회인데, 고린도교회는 하나의 교회였으나 그 안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등 ‘서로 다른 계파’가 있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하나의 신앙 토대 위에 ‘아볼로’, ‘바울’, ‘게바(베드로)’의 서로 다른 신앙표현 곧 ‘서로 다른 신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즉 초기 기독교 신앙이 정립되기 시작할 때부터 기독교는 한 분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신앙’ 안에서 다양한 신학을 가진 서로 다른 교회공동체(체제)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종윤 박사는 일 교단 다 체제 방식은 신학적 전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장로교 교회관에 부합한다고 보고 있다. 특히 이점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25장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다. 칼빈 또한 “교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교리 는 신앙 안에서의 일치(die Einheit im Glauben)를 저해하지 않는 다”(N.l.27)고 말하는데, 칼빈은 각 교파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론’을 수용하고 고백하면, 각 교파의 독특한 교리해석의 다양성은 일단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종윤 박사는 한국장로교회는 사도신경, 아타나시우스신경, 칼세돈 신경,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이미 ‘하나의 장로교단’이라고 말하고 겸손히 회개하고 신행일치를 통해 정체성올 회복할 때 일 교단 다 체제의 장로교 연합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장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분열을 통회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연합을 추구하는 일일 것이다. 이미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총)은 2009년 칼빈의 출생일인 7월10일을 ‘장로교의 날’로 선정토록 한 바 있고, 그해 7월 10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연합과 일치’를 주제로 제1회 장로교의 날 행사를 가진 바 있다. 이런 행사도 일 교단 다 체제를 지향하는 연합이었다. 특히 2010년 7월 10일 제2회 장로교의 날 행사에 서 한장총 대표회장이 공식적으로 일 교단 다 체제 방식의 연합안을 제시하였고, 임원회는 이를 추진할 특별위원회 조직을 청원하여 총회에서 통과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동일한 신앙고백을 공유하는 장로교회가 연합하여 일단 일 교단을 이루고, 잠정적으로 체제의 다양성을 인정하되 점진적인 조직의 연합과 통일을 추구해가면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연합은 오늘의 장로교회가 추구해야 할 우선적인 과제일 것이다. 이런 연합이 이루어진다면 21세기 한국교회 종교개혁이 될 것이다.




이상규 교수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5192




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