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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 장로교회의 과제와 전망 / 양희화

by 【고동엽】 2021. 11. 5.

21세기 한국 장로교회의 과제와 전망

 

양 희 화

 

 

 

제1장 들어가는 말

 

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아세아에서 가장 복음화 된 나라가 되었다. 개신교역사가 13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한국이 총 인구의 약 20 퍼센트가 되는 신자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는 개신교 여러 교파 공동체 가운데 가장 큰 교회 공동체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현재 한국개신교 세계에서 장로교의 교세가 전 교세의 약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나아가, 놀라운 것은 장로교회 전 교세 중 70퍼센트 이상이 정통 보수라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 기독교계에서 장로교회, 특별히 정통 보수 장로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경이적인 성장으로 많은 구미교회들의 부러움을 산 것이 사실이며 그 중에 장로교회는 타교파 교회보다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따른 부정적인 요소가 너무나 많았다. 교회의 성장에 비해서 사회적인 신인도가 너무나 낮은 것이다.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들이 그 반대로 지방색과 교파주의 교단주의 또한 세속정치와의 야합으로 얼룩져 왔기 때문이다. 100여 개가 넘는 장로교단이 그렇고 난립되어진 신학교가 그렇다. 교회는 항상 특수한 시대적 상황 속에 존재해왔다.

 

21세기에 들어서서 한국 교회도 40-50년 후가 되면 유럽 교회와 같이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미래를 진단하지만, 아무런 처방 없이 쇠퇴론 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변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며, 그 변화는 우리들의 삶의 전 영역에 미치고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21세기는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가운데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나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밖에서 따로 떨어져 살 수 없다. 세상의 변화는 교회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화는 신앙의 방법과 세계관과 가치관을 많은 부분 바꾸어 놓고 있다. 목회자는 변치 않는 성경의 복음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해 가는 세상에 증거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목회자가 무서운 속도로 변하는 세상을 바로 읽지 못한다면 시대의 낙오자가 되거나, 그 시대에 풍속에 빠져서 무력한 종교 지도자로 전략하기 쉽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시대의 징조를 바로 알아 깨어 있어서 오는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장로교회는 보다 다양하고 다변화될 다음 세기에 교회가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교권주의와 교파의 틀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신자들 개개인의 신앙양심과 개교회의 독립적 자치권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직의 융통성과 유연함을 잘 살린다면 우리는 한국교회의 장점중의 하나인 절대적인 말씀중심의 신앙과 양심중심의 신앙을 보태어 더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국 장로교회가 거듭나 명실공히 개혁주의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고, 교회 지도자. 신학자들이 지구촌 시대의 세계언어(영어)의 장벽을 뛰어 넘을 때 한국의 장로교회는 세계의 개혁주의 교회건설과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큰 봉사를 할 수 있게 될 것으로 확신하게 된다. 이를 위해 한국 장로교회가 먼저 해야할 일은, 막연한 정통보수 교회가 아니라, 신학, 신앙, 교리, 정치, 생활 등 모든 영역에서 좀 더 개혁주의적인, 좀 더 개혁되어가는 교회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본론에서 우리 장로교회가 좀 더 개혁주의적인 교회가 되기 위한 21세기의 과제와 전망을 살펴 보고자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의 역사를 주의 깊게 읽고, 교회의 현실을 바로 관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한국 장로교회의 발자취를 개관하고, 21세기의 장로교의 과제와 전망을 찾아보려고 한다.

 

 

 

제 2장 한국장로교회의 발자취

 

한국장로교회의 독특한 역사는 1885년 본격적인 선교사의 입국 이전에 성경이 먼저 유입되고 그 성경을 통해서 자체적으로 교회가 형성되는 놀라운 일이다. 성경번역과 소개는 중국과 일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중국에는 천주교와 다른 나라의 기독교 선교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 특히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와 성서공회를 통하여 성경번역 작업이 이루어졌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주재 책임자인 알렉산더 윌리암슨과 그 제자들인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를 통해서 한국선교의 문이 시작되는데 그 중 로스를 통하여 성경번역이 이루어진다. 1878년 로스는 이응찬의 도움으로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고, 1887년 번역이 완성되어 “예수셩교젼셔”가 출판되었다. 성경번역이 이루어진 후에는 각양의 방식을 통해서 조선으로 성경이 보급되었으며 그 중 서상륜을 통해서 언더우드에게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 소래교회(1887)가 세워지기도 한다.

일본을 통해서는 이수정이 성경번역의 일을 완성하는데, 그는 온건개화파에 속한 인물로서 임오군란 때 명성왕후를 구하고 신임을 얻어 일본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1882년에 토교 축지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계기를 통해서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 녹스에 의해서 세례를 받게 된다. 이후 김옥균의 인솔로 일본에 갔던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1883년 말에 동경에 한인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수정은 1883년 5월부터 성경번역을 시작했으며, 1885년 신약성경을 출판하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을 거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1885년에 한국에 입국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기독교는 중국과 일본에서 일어났던 장로교회의 선교활동을 통해서 성경이 번역되고 이 성경을 배포하면서 많은 회심자들을 얻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장로교회의 선교초기 활동은 이 땅에 기독교를 정착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를 감당했던 것이다.

 

3) 초기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것을 계기로 미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1884년 알렌은 의사의 신분으로 한국 땅에 들어온다. 그는 1884년에 일어났던 갑신정변으로 부상을 당한 명성왕후의 가족인 민영익을 치료해줌으로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광혜원(제중원)이라는 병원을 세우게 되었다. 이 병원은 후에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에 의해서 새롭게 운영되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선교사의 직함을 가지고 입국한 사람은 1885년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한 언더우드 목사였다. 언더우드는 북장로교회 선교부의 소속을 둔 장로교 선교사로서 그가 선교사업으로서 가장 우선적으로 행한 일은 다른 여러 가지 일도 있지만 1893년 시작된 성경번역 사업과 성경교육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장로교는 처음부터 철저한 성경관에 입각한 정신을 기초로 성경을 제시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져 간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1907년에는 장로교회의 역사 중에서 아주 중요한 작업이 이루어진다. 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 캐나다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장로교회 질서체계의 핵심이 되는 “노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독노회”라고 한다. 이처럼 장로교회는 선교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우선적으로 장로정치제도를 확립하여 성경적인 정치제도를 통한 성경적 교회 확립을 하기 위해서 힘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독노회에서는 성경적인 장로정치제도를 체계화한 것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장로교회의 정치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리가 되는 신조를 본격적으로 확립해 줬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요약본으로 인도에서 사용되던 신조를 정리해서 “12신조”를 채택한 것이다. 이 신조의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정통장로교회의 중요한 정신이 고백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이 동의해야 할 자체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함에 있어서, 이로써 대한예수교장로회를 설립한 모(母)교회의 교리적인 표준을 거부하지 않으며, 반대로 그러한 교리적 표준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값진 해석으로, 그리고 우리의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교리체계로 기리는 바이다. 그리고 본 교단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자체의 요리문답으로 채용하는 바이다.

 

4) 평양신학교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장로교회는 교회를 세우는 것도 중요한 목표로 생각했지만 이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기 위해서 철저한 개혁신앙으로 훈련된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사역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1901년에 한국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평양에 있다고 해서 ‘평양신학교’라고 칭하기도 한다.(조선예수교 장로회신학교) 이 학교의 교수진은 미국의 북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특히 구 프린스톤에서 신학수업을 마친 선교사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마포삼열, 곽안련, 이길함, 블레어, 무어, 로스, 버히슬, 아담스, 이눌서, 어도만, 구레인, 함일돈, 소안론 목사 등이 있다. 특히 함일돈 목사와 같은 사람은 1920년대의 미국 장로교회의 신.구학파 분리 때 메이첸을 따라서 메이첸이 주도하던 “독립선교회”로 자리를 옮겨서 선교사역을 할 정도로 개혁신앙에 철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구프린스턴 시절 메이첸과 워필드에게서 신학수업을 받으면서 개혁신앙을 정립하기도 했다. 또한 마포삼열 목사는 자유주의자들이 ‘어빙돈성경주석’을 출판한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개혁신앙의 입장에서 ‘표준성경주석’을 발간하고 그 서문에 개혁신앙의 중요한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기도 하였다.

 

본 주석의 집필자들은 성경 전부가 만서 지중에 최대서요, 신의 참된 말씀임을 믿을 뿐 아니라, 또한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체계가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에 선히 개괄되어 있다고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교리적 표준은 한국장로교회의 신조를 구성하는바, 본 주석의 집필자들이 이 신조를 믿음은 이것이 신의 말씀에 교훈되었음을 믿는 때문이다. 집필자들은 성경이 이 신조의 확신성을 완전히 지지한다고 믿는다.

 

초기 선교사들의 중요한 선교사역들 중에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장로교회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 선교정책은 “자립, 자치, 자전”이라고 하는 표어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내용은 이런 표어들이 나오게 된 신학적 기반을 들 수 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선교정책은 성경중심의 신앙과 성경중심의 교회통치와 전도를 들 수 있다. 감리교나 로마 카톨릭은 주로 사회사업을 통해서 교회활동을 넓혀갔지만 장로교회는 철저하게 성경중심의 신앙, 교육, 교회정치확립, 전도를 세워갔던 것이다. 주요한 내용들을 보면 요리문답 교육을 위한 주일학교, 일주일 동안의 온종일 사경회, 지교회에서의 학습교인반, 가정예배, 성경통신과정, 주일학교 연장, 기독교 면려운동(구제), 여름성경학교, 성경클럽, 상품을 내건 조직적인 암송 공부 등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교회 안에서 철저하게 성도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신조를 배우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장로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입장과 또한 장로정치의 확립을 통해서 초기한국장로교회는 미국의 구프린스턴의 개혁신앙적 입장을 계승한 철저한 보수주의, 칼빈주의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특징을 세우게 되는 것을 본다. 장로교회의 철저한 보수주의적 신앙모습에 대한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우선 입교를 위한 학습세례의 과정이 매우 엄격하고 어려웠던 것을 본다. 대상자가 성경에 대한 이해와 삶의 변화된 모습을 제시하지 못하면 세례를 보류했으며, 입교한 성도들도 철저하게 권징을 받기도 했다. 1900년에 행해졌던 입교문답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주일을 성수합니까?, 당신은 음주를 합니까?, 나는 한 때 술고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몸은 내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내 몸을 잘못 사용한다면 나는 영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들이 당신을 유혹하지 않던가요? 웬걸요. 물론 유혹하지요. 만일 내가 계속하여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나는 끊임없이 노름, 간음죄 등에 유혹 받았을 것입니다.

 

위의 입교문답을 통해서 한국장로교회가 초창기부터 얼마나 경건하고 엄격한 신앙과 교회의 질서를 요구했는지는 알 수 있다. 장로교회는 매춘과 흡연을 퇴치하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웰본은 1904년 선교보고서에서 “금주, 주일성수 파기, 그리고 다른 죄 때문에 세 명의 교인에게 교인자격을 정지시켜야만 했다”고 보고하기도 한다. 이처럼 청교도적인 경건정신의 신앙과 삶을 계승한 한국장로교회는 초기부터 입교의 조건으로 음주, 흡연, 노름의 금지와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 등의 생활을 요구했던 것이다.

 

3. 한국장로교회의 발전과 분열

한국장로교회가 선교를 시작하는 시점부터 한국교회에는 자유주의신앙을 가지고 그 신앙을 전파하는 자유주의 목사들과 교회들도 세워졌다. 이들은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점점 더 보수주의적 입장을 세워가고 있는 개혁교회를 위협했다. 자유주의 목사들은 일본과 미국, 카나다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많이 배워와서 한국교회에 급속히 퍼뜨리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의 입장은 성경의 권위을 부정하고 신조교육의 필요성을 제외시켜버리기도 했다. 일본에서 신학공부를 한 목사들은 일본이 당시 바르트라고 하는 신학자를 가장 중요한 신학자로 인정하던 시대에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이런 사상을 자연히 받아들이기 되었으며,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한 사람들도 미국이 구 프린스턴과 신 프린스턴이 나누어지면서 신파를 중심으로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예수님의 탄생, 부활, 재림, 기적 등을 부정하는 “오번 선언서”에 서명한 신학자들에게서 공부를 하면서 이들의 입장을 한국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람은 일본에서 바르트 신학을 공부한 김재준 목사다. 이 사람은 후에 정통장로교의 성경관과 신조관을 부정하고 자유주의적 입장을 확립하기 위해서 “한국신학대학”을 설립하여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세운 사람이기도 하다. 김재준 목사는 바르트의 사상처럼 성경의 영감과 무오설을 부정하고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고 인간의 말도 있으며, 그 안에는 잘못된 부분도 많다고 언급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증거정도라고 권위를 낮추기도 했으며, 자유주의자들의 성경비평과 진화론 등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김춘배 목사는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교회내의 여권문제를 심각하게 도전했다. 즉, 그는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말은 2000년 전의 일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비판하면서 교회내서 여성목사를 주장했던 것이다.

이렇게 장로교 안에서 자유주의 사상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총회는 1934, 1935년에 거쳐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린다. 박형룡 목사를 연구위원으로 세워서 제시된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난 후에 김재준 목사의 창세기 저자 문제나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 기독공보, 적극신앙단, 아빙돈 주석에 대한 입장을 모두 거부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창세기 저자 문제에 대해서는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하는 반대는 근대의 파괴적 성경 비평가들의 주장하는 이론인바 그들은 과연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데 머물지 않고 오경 전부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모세 시대로부터 여러 세기 후대 어떤 인물들이 기록한 위조문서로 돌린다. 또 그들은 오경뿐만 아니라 구약 다른 여러 책과 신약 여러 책을 후대인의 위조문서로 인정하며 그 기록의 내용에 신화와, 고담(古談), 미신 등 각종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여 냄으로 성경 대부분의 파괴를 모색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 신조 제1조를 위반하는 자이므로 우리 교회의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합니다.”라고 결정했다. 또한 여성권리와 관련해서는 “성경은 여자의 교권을 불허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여권운동이 대두하는 현 시대 사조에 영합하기 위하여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은 그 정신 태도가 파괴적 성경비평의 정신태도와 다름이 없습니다.---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가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제6장 제 42조와 43조에 의하여 처리케 할 것입니다.”라고 결정했다.

 

2) 장로교의 분열

한국장로교회는 일제식민지라고 하는 혼란 속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성경적인 원리를 따라서 점차 자라왔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팽배하면서 장로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일본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절하게 됨으로 인해서 평양신학교는 1938년에 폐교하게 된다. 그러나 자유주의 목사와 교회들은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더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협력을 통해서 1940년 ‘조선신학교’라고 하는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 학교는 김재준 목사와 더불어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학교였다. 이 학교는 해방이후에 더욱 적극적으로 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하면서 한국장로교회에 심각한 위기를 갖게 했다. 그래서 장로교회는 1951년 이 학교와 속해 있는 목사들을 제명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해서 장로교회는 1차 분열을 갖게 된다. 김재준 목사는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학교를 세운다. 이것이 ‘한국신학대학’이며, 기독교장로회의 출발인 것이다.

2차 분열은 신사참배의 문제로 갈라지게 된다. 신사참배를 총회차원에서 허락한 것은 한국장로교회의 가장 큰 죄이며, 아픔이었다. 해방 후 신사참배를 인정한 목사와 거부한 목사들 사이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었고 결국에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1952년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교단은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측)이라는 형태로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3차 분열은 WCC에 대한 입장이 갈라짐으로 인해서 장로교회 안에서 심각한 논쟁을 거친 후에 분열하게 된다. 종교 다원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WCC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그룹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따라서 1960년에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측)이라는 교단을 새롭게 형성한다. 이 학교는 후에 바르트의 신학사상을 자신들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유주의적인 신학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나머지 교회들은 “합동측”이라는 형태로 기존의 보수주의적 입장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되지만 합동측도 70년대 후반부터는 사본오열 되어 현재 장로교회는 100 개가 넘는 여러 교단으로 분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 3장 한국장로교의 과제

 

종교는 한 사회의 지표이다. 조선조 왕조의 통치이념인 유교와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가 더 이상 한국사회의 지표로서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을 때, 기독교는 외래 종교였지만 한국 사회의 근대화과정과 궤도를 함께 하며 근대적 시민 사회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한국 장로교는 반봉건-개화와 반외세-독립이라는 민족사의 과제를 선교적 소명으로 삼고 교육과 의료, 그리고 사회선교활동을 통해 한국사회의 주도적인 가치이념과 윤리의식을 제공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한국교회의 자치권(Self-Governing)의 유보와 일제의 식민지 종교정책은 한국장로교의 주체적인 자기 형성의 노력을 방해하거나 무효화 시켰다. 따라서 한국장로교는 1920년대 민족, 민중 해방운동인 사회주의와 연대, 제휴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에 어이없이 무너져 버렸다. 한국장로교는 “하늘이 준 선물”로서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일제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은 분명 해방이었지만, 그것은 또다시 남과 북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는 미완의 해방이었다. 한국장로교는 이 시기 분단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지 못하고 교회분열의 파행성을 드러내었다. 한국장로교는 해방공간에서 민족적 과제를 선교적 과제로 받아들여 주체적인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분단시대의 냉전적 사고구조와 적대적인 행동양식을 교회분열로 구체화 하였다.

 

1) 하나님의 영광에서 인간의 공로적 의(義)로

한국장로교는 무엇보다 먼저 일제시대의 식민 잔재에 대한 척결과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는 이점에서 매우 부족하였다. 신사 참배한 다수가 힘의 논리로 소수의 주장을 묵살하였다. 해방공간에서 한국장로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보다 강조점을 두었어야 하였다. 일차적 원인이 신사참배자들의 자기옹호와 책임회피에 있었다할지라도 신사참배 반대자들의 교회분열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가? 그것이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낸 사건인가? 한국장로교가 자기의 죄책을 민족 앞에 고백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용서를 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 이들도 형제를 정죄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이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지 않았겠는가?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義나 공로를 주장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과 그의 나라에 대한 관심보다, 서로의 인간적 의와 공로를 주장한 것은 해방 후 한국장로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2) 성서의 말씀에서 교리적 이념으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서 성서는 모든 신학을 다 포괄하고도 남음이 있다. 신학은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선포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신학이념인 교리가 성서보다 앞섰다. 즉 성서를 한국장로교는 선교사들이 전해준 일방적 신학적 교리에 묶어놓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하다. 그것은 어떠한 교리나 신학체계 안에 갇혀 있을 수 없다. 한국장로교가 이점을 해방공간에서 바로 인식하였다면 1953년 성서영감론 논쟁으로 인한 교회 분열은 없었을 것이다. 고등비평이라는 역사비평도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는 한국장로교의 획일적이고 단색적인 성서이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장로교는 이점을 보다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못하고 미국교회 신학논쟁을 재현하여 교회분열을 하였다.

 

3) 세상을 위한 교회에서 교회만을 위한 교회로

한국장로교가 초기부터 시행한 종교자유와 정교(政敎)분리 정책은 해방 후에도 기독교의 선교영역에서 정치영역을 배제한 인간의 내면적 영적 범위로 제한했다. 이것은 이원론적 신앙유형과 결합되어 해방 후 민족의 역사현실에 대한 무관심과 타종교 문화에 대한 정복적 선교노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교회는 세상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수와 신자수 만을 늘리는 물량적 성장주의로 치달았다. 엄연히 여기에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경쟁원칙이 충실히 적용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한국장로교의 사회적 책임이나 민족의 분단현실에 대한 소명의식의 결여는 해방 후 한국사회의 반공친미주의에 역사인식을 고취시켰고, 개 교회중심의 타계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열광신앙의 형태를 구형시켰다. 한국장로교는 이시기 고난 받는 민족사 속에 함께 하는 교회로서 이 땅에 정의와 평화를 심는 주체적인 교회로 자기 형성을 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세계교회들과의 공동선을 위한 협력과 연대에도 합류하지 못하고, 오히려 WCC 문제로 교회분열을 하였다.

 

 

2. 한국장로교의 일치와 통일시대의 교회 인식

한국장로교가 복음수용초기 한국사회에 끼쳤던 지표적 역할을 상실하고 해방공간에서 미소제국주의의 냉전논리와 힘의 논리에 부흥하여 반공, 반북주의를 주장하고 친미적 자본주의체제를 구조화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매우 심각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의 분열도 그 근본적인 구도에서는 한국 민족사를 결정한 자본주의의 힘의 논리에 근거한 물량적 성장주의, 독선적 권위주의, 타계적 이원주의, 정복적 선교론 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21세기는 통일의 세기이다. 한국장로교는 통일의 세기에 역사의 지표 역할을 해야 한다. 지리적 통일이나 정치적 통일 아닌 민족의 적대감과 힘에 위한 대결구도를 극복하는 “평화통일”이어야 한다. 성서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다. 막힌 것을 허시고 갈라진 것을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로부터 보냄 받은 화해의 전령사이며 평화의 일꾼이다. 오늘 부름 받은 젊은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한국장로교가 수적으로나 양적으로 한국 교계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먼저 분열된 한국장로교의 일치를 위해 일해야 한다. 교회는 계급과 성, 이념과 인종으로 나뉘어 지고 갈라진 세상의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 정작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할 교회가 평화를 깨는 존재로 한국 민족사 속에서 자리해 왔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국장로교는 이러한 측면에서 지난 분단55년의 민족사 앞에서 민족을 하나 되게 하는 일에 게을렀음을 반성하고, 더 나아가 분단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적 힘의 논리로 현실체제에 부응하였던 것을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 반성은 한국장로교 전체가 한국장로교의 주체적 자기 정체성 형성이라는 과제와 연결되어 분열과 대립 그리고 갈등을 극복하는 화해와 일치, 연대와 협력의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한국장로교가 지난 세기 분열을 통해 성장했다면 이제 더 이상 분열을 정당화하는 분단 시대적 교회이해를 가지고 성장할 수 없다. 통일시대를 향한 한국장로교의 교회인식의 전환이 없다면 그 미래적 성장은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아래서 한국장로교의 일치를 향한 실천 방안을 간략하게나마 몇 가지로 제시하고자 한다.

 

1)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한국장로교는 현재 100개 이상의 교단으로 분열되어 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열된 한국장로교의 현실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즉 다시 말하면 타자를 인정하는 것이다. 분열은 그것이 어떠한 이유에서였던 지간에 그 속에 있는 인간의 죄와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심판은 다른 한편으로 한국장로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와 창조의 사건이란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장로교의 일치의 풍요한 유산이란 것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썩은 물도 잘 빚으면 향기로운 술이 된다”는 말이 있다. 한국장로교 100년의 역사가 운데 각 교단들은 나름의 다양한 장로교 전통을 실험하였다. 비록 그것이 서구교회의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빚어진 결과라 할지라도 한국 근, 현대 민족사에서 한국민족의 정서와 삶속에서 뿌리 내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배우는 공동의 대화의 장이 필요하다. 한국장로교의 일치는 결국 획일적인 통합이나 적당한 결합이 아닌 서로의 다양성을 배우는 연합의 과정인 ‘일치(Unity)’이기 때문이다.

 

2) 소망을 향한 일치

한국장로교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다양성과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종교개혁 이후 세계 개혁교회가 속한 전통 위에 선 장로교단으로 근본적인 교리와 신앙 그리고 교회정치제도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특히 한국장로교는 성서 중심적인 신앙과 사도신경고백, 그리고 장로중심의 대의적 정치제도와 공용찬송가 등 이미 주어진 일치로서 공동의 신앙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교회일치 운동의 중요한 신앙적 근거이다. 한국장로교는 이러한 과거의 공통된 신앙 유산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일치는 정치적 야합이거나 친교적 절충이 아닌 진리 안에서의 만남을 이루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 미래를 향한 한국장로교의 공동의 선교적 소명을 발견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 21세기는 통일의 세기이다. 분단을 극복한 통일된 민족공동체의 형태는 단순한 국민국가 이상의 평화적이고 민중·생명공동체이어야 한다. 한국장로교는 통일의 과정에서 그리고 통일된 조국에서 평화, 민중, 생명이란 성서의 기본가치를 어떻게 선교적으로 민족사속에 실현할 것인가? 또한 21세기는 세계사의 문명축이 동아시아 중심으로 옮겨오는 시기이다. 12억의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선교국으로 한국교회의 역할에 우리의 선교적 비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21세기는 ‘세계지역화(Glocultualization)'의 세기이다. 우리가 받은 복음을 민족사적 경험과 신앙을 통해 더욱 심화하여 서구에 다시 전파함으로써 세계교회를 새롭게 갱신하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

 

 

3)실천을 통한 일치

길은 나아감 속에 있다. 소망은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실천함 속에서 커가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를 결정지은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에서 더욱더 쉽게,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해왔다. 교회분열이란 것이 칼빈도 말하듯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커다란 죄악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개신교가 분열하였지만 카톨릭과의 일치의 여지를 언제나 열어놓았고, 또 다른 한편 개신교의 분열을 막기 위해 혼신의 정열을 바쳤다. 그는 그런 면에서 교회의 일치운동가(Calvinus Oecumenicus)이다. 오늘 한국장로교의 교회연합과 일치는 칼빈과 같이 소명받은 자들이 뜨거운 관심과 열정, 그리고 소망(Vison)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면에서 교회 일치운동가를 훈련시키는 교육의 장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자기희생의 결단과 사고인식의 전환 없이는 일치운동은 안된다는 것이다. 내 것을 그대로 가자고 타인을 보고 양보하라는 것은 하나 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자기희생적 결단이 일치에 앞서 요청되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작은 것부터 그리고 실현 가능한 것부터의 행함이 중요하다. 이벤트성 행사나 형식적 선언문등이 아닌 서로의 마음을 열고 함께 일치의 기쁨을 체험하는 공동의 실천이 필요하다. 특히 21세기는 사회복지선교부분에서 교회의 봉사적 역할이 중요하게 대두될 것이다. 나눔과 섬김에서 한국장로교는 하나됨을 체험하고 더욱 커짐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방화 시대를 대비한 지역별 일치운동에 구상과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장로교의 분열이 목회자들에 의해 비롯되었다면, 앞으로 한국장로교의 일치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역할과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일치운동의 한 주체로서 그들을 교육하고 지도력을 배양시키는 작업도 시급히 추진되어야 할 실천과제이다.

 

 

 

제 4장 한국장로교회의 전망

 

현대에 있어서 가장 큰 도전은 다원주의의 접근이라고 하겠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근본주의적이며 보수적이며, 중도적이며, 자유적인 또는 급진적인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여러 신학적 사조들, 즉 실존 신학, 과정 신학, 세속 신학, 희망의 신학, 해방 신학, 정치 신학, 여성 신학, 설화 신학 등은 한국 장로교회의 바른 신학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의 과제는 다양한 계시관의 그 뿌리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고도의 신학적인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먼저 장로교 개혁신학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서 그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개혁신학의 바른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는 결코 다른 입장들을 평가할 수 없고 도리어 우리의 신학의 독특한 성격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21세기는 인간복제까지 가능하게 된 유전공학의 기술이나 시간유전자의 발견과 같은 더욱 첨단화된 과학기술의 예측 불가능한 시대라 하겠다. 그래서 더 다양하고 복합적인 신학의 문제가 제기될 것은 당연한 문제라 할 것이다.

 

수많은 계시관의 유형들은 여러 다른 사조들과 연합하고 혼합되므로 새로운 형태의 모습으로 등장함을 보게 된다. 신학적인 흐름을 살필 때, 전통신학의 몰락 원인은 매 시대마다 신학과 철학을 절충하고 혼합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나타난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의 권위가 상실되고 인간의 이성의 자율성이 강조되고, 그것이 신학의 출발점이 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이나 내재성의 균형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바른 "계시관"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조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계 위에 계시고 이 세계를 넘어서 초월의 세계에서 오시는 자충족적인 분이시다. 또한 그 하나님은 역사 안에, 자연적 과정 안에 관여하시면서 이 세상 속에 활동하시는, 현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화는 단지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균형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성경의 신적 권위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21세기 한국 장로교회의 전망을 몇 가지로 살펴보면, 첫째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바른 해석을 근거로 모든 문제를 접근해야 할 것이다. 즉, 이 시대의 요구에 따라가는 한국 장로교회가 아니라 이 시대의 문제를 성경의 관점에서 바로 해석하여 바른 대안을 제시하는 교회이어야 할 것이다. 둘째는 개혁주의 바른 전통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을 연구함에 있어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은 '종교개혁이 된(reformata)'것이 무엇인지 면밀히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항상 종교개혁을 해야 한다(semper reformanda)'는 그 원리에 따라서 계속적으로 그 개혁의 깃발을 들어야 할 것이다. 셋째는 성경의 원리에 따라 해석된 신조들을 면밀히 연구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넷째는 개혁신학의 근거인 성경을 제대로 파악하는 주경 실력을 함양하여 올바른 주석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다섯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자의 경건한 삶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제 5장 맺는 말

 

21세기를 가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는 부흥과 쇠퇴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 장로교회는 유럽 교회와 미국 교회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 견해를 가진 한국 교인들이 많이 있다. 한국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유럽 교회가 걸었던 그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그 사회적 환경이나 종교적 심성이 유럽의 그것들과 같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단정하는 일은 금물일 것이다.

이제 한국 장로교회는 미래 연구가 더 활발해져서 다가올 교회의 미래 현상을 미리 예견하고, 이에 따를 미래 교회의 목회 패러다임을 정립해 나가는 선견지명이 절실히 요구된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작은 망대도 준공할 때까지 모든 기획을 통하여 목적 성취가 가능한데 하물며 불확실한 미래 사회에 적응하고 미래 현상을 극복하려는 미래 장로교회가 아무런 예비 없이 목적을 성취할 수는 없다.

또한 미래 한국 장로교회 개혁의 전망이 어떠하냐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린 것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전적으로 개혁을 하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도 있다.

미래 사회 한국 장로교회의 개혁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개혁의 대상 안에 우리들 자신도 들어간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날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정의를 외침으로써 정의의 개념이 오염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랑을 외침으로써 사랑이 역겨운 말로 느껴질 수 있었듯이, 오늘 개혁되어 마땅한 사람들이 개혁을 부르짖기 때문에 개혁이란 개념 자체가 더럽혀지고 있다. 이리하여 '개혁'이란 낱말의 본디 뜻부터 되찾아야 할 형편이 되었다. 이러한 때, 개혁을 외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개혁되어 있고 개혁되고 있을 때만이 우리가 부르짖는 개혁이 설득력을 지니게 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 참고문헌 -

 

허순길, [한국개혁교회의 미래와 과제], (고신대 논문)

박동현, [미래 한국교회 개혁의 과제와 전망], (장신대 논문)

정장복, [21세기를 향한 한국교회의 전망과 진단], (장신대 논문)

강원돈, [21세기를 맞는 한국교회의 개혁과제], (한신대 논문)

구모영, [종교개혁과 한국교회의 과제], (부산 한우리교회)

나장열, [한국 개혁교회의 흐름, 문제점, 전망], (합동신학대학원 논문)

 

출처: 개혁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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