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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중세 교회사 (내용 요약) / 조셉 린치 지음

by 【고동엽】 2021. 11. 2.

중 세 교 회 사

조셉 린치 지음 / 심창섭· 채천석 옮김

1. 내용 요약


고대기독교: 기독교는 역사적 사건을 중요시 하는 종교이다. 이 신념의 원천은 구약성경-하나님과 인류, 그 택한 백성 유대인과의 관계를 이야기-이며, 동정녀 마리아 탄생, 인간으로 사심,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오순절 사건, 즉 마가요한 다락방의 120명 모임에서 성령 충만을 받고(행 2: 42-47, 행 4:32-3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유무상통하며,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의 증거를 가르치는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다.
그러나 상이한 집단들의 이해의 상이성으로 격렬한 격론을 경험하나 베드로를 비롯한 12
제자 , 예루살렘 공회 지도자 야고보, 바울, 바나바 등의 헌신에 의한 교회가 보여준 완벽한 이미지에 의한 초대교회로 회귀하려는 원동력에 의해 기독교 발전하게 되었다. 즉 예수님의 음성과 사도들의 음성이 신자들의 귀에 메아리치던 시대였다. 이때 기독교는 유대교 내의 한 운동으로 시작하였다.
이 시대는 A.D 6년의 갈릴리 유다의 반란, 66년 로마에 대한 무장반란, 70년 예루살렘 유대성전 파괴를 야기한 로마와의 전쟁으로 로마인들의 유대인 적개심 및 핍박이 심했다. 이후 전통적 방식의 유대인과 예수의 메시아이심을 믿는 유대인 분리가 있은 후 바울 등 이방인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카톨릭 기독교는 1-2세기, 로마 제국은 고대종교와 신흥종교 번성하였고, 이때 로마제국의 평화와 번영은 민족의 이동과 혼합을 촉진하였고 이를 통해 그들의 종교와 제의가 유입되었다.
이 때 기독교는 사적인 모임으로 조직되었고, 200년 경 각 공동체의 단일 지도자를 세움으로 교회 조직. 보편적 교회(Catholic)가 형성 되고, 신경(credo-내가 믿는다)-카톨릭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본질적 요소에 대해 진술하는 신앙의 규칙-만들고(180년 경의 로마 신경 확인. 현존 최고 신경으로 인정되고 있음), 정경 혹은 신약성경 구성을 확정하였다.


한편으로는 기독교인을 황제 숭배로 개종시키려는 시도도가 계속되었다. 주요한 개종 시도로는 249년 데시우스 황제, 260년 발레리안 황제, 디오클레티안 303년에 끈질기고, 조직적인 잔인한 박해가 진행되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4세기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기독교인이 생겼고, 이들이 사회의 주류로 진입한다.
이 때 콘스탄틴대제(288-337)가 313·밀라노 칙령에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고, 데오도시우스 황제(379-95)는 정통 카톨릭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선포하게 됨과 함께 역으로 이방종교와 기독교의 이단적형태는 백성들이 따르지 못하도록 금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4세기- 6세기 기독교는 국가교회로서 유연하게 적응하고, 교회와 로마제국은 긴밀한 동맹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동맹의 결과를‘규범적 기독교’라 불렸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규범적 기독교의 증대되는 형식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금욕적인 운동이 강화되고, 기도와 성경에 대한 묵상이 결합된 조직적이고 엄격한 자기 부정의 삶을 사는 자들로 구성되고 이들은 직간접으로 사회와 다양한 유대를 가진 구조화된 교회의 발전을 비판하게 된다. 그러나 규범적 기독교는 수도사들을 순응케 하는 방법을 발견했고, 이를 잘 발전시킴으로써 5세기까지는 다양한 형태의 수도원 운동이 규범적 기독교의 일부고 되고, 신자들의 본체에서 분열할 지도 모르는 열정적인 소수를 위한 안정판이 되는 수도원 운동이 발전하게 된다.(15-41P)
중세교회의 기원: 규범적 기독교와 제국정부의 연합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문제들의 무게로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5세기 서방제국 정부는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침략자들에게 굴복하여 서로마제국이 멸망(476년)한다. 중세교회는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에도 생존하여 매우 상이한 환경과 타협했던 시기로부터 시작된다. 750년까지 이전의 로마제국은 세 개의 지속적 독립체, 즉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 터어키 콘스탄티노플 및 발칸반도에 잔존)과 이슬람권(근동, 북아프리카, 스페인 포함)과 라틴서방세계였고, 각 세계에는 규범적종교(그리스정교, 이슬람교 및 카톨릭)와 신성한 언어(그리스어, 아랍어 및 라틴어)에 근거하였다. 로마 정부가 사라진 후 서방세계의 쇠퇴와 그에 따른 침체가 6-7세기 동안 지속되었고, 11세기 가서야 주요한 부흥이 시작되었다.
632-650년 이슬람이 이집트, 팔레스타인, 레바논과 시리아를 정복했고 그 이후에 축소된 비잔틴제국은 언어는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종교로는 그리스 정교(Orthodox Christianity)를 믿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참된 신앙의 수호자였기에 이교도와 회교도와 이단(종종 서방기독교인들을 이런 부류로 간주)의 위험 가운데서 비잔틴제국을 보존했다. 비록 이슬람에 의해 서부에서는 라틴 기독교에 의해 봉쇄되었지만 선교사들은 9세기와 10세기에 러시아와 동유럽의 슬라브족들 중에서 영향권을 개척했다. 한편 라틴서방세계는 12세기까지 미개발지역으로 경제적 사회적으로 열등했다. 그러나 이들도 그 종교와 문화를 북유럽과 중앙 유럽의 게르만 지역과 슬라브 지역으로 확산시켰다. 라틴서방세계는 매우 강력한 것으로 증명된 새로운 제도들을 창조하거나 기독교회 자체를 포함한 이전 제도를 개조 했다.
기독교 운동 500년, 규범적 기독교가 250년 정도 지속되었을 때 교황 그레고리 1세(590-604)가 등장하여 수도원출신의 최초의 교황으로 수도원제도의 후원자로 수도원제도와 교황체제의 중요한 동맹의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수도원 출신으로 수도원운동을 강조하였고, 침략자들인 이교도 게르만족인 앵글로색슨족에 대한 선교를 후원하였다. 그는 라틴서방세계를 수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후기로마제국의 구조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45-60P)
수도원운동은 카톨릭 기독교내의 복잡하고 독립적인 운동이었다. 그레고리의 생애동안 수도원운동은 250년 이상 규범적 기독교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왔다.
초기 수도원 운동은 서민적 운동으로 출발하여 초기에는 개인적 은둔자와 기둥위의 고행자로부터 농부와 장인으로 일하는 수도사들의 크고 기강이 잡힌 마을들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유형을 양산 했다. 이후 5세기 감독들은 수도원의 토대를 인정하는 권한과 다른 모든 기독인들을 감독하는 것처럼 수도사들을 감독하는 권한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완전히 수도원운동을 통제하지는 못했다. 수세기 동안 수도원 운동은 교회내의 논쟁과 개혁과 혁신의 근원이 되었다, 대부분의 교회 내 갱신 운동은 수도원 운동에서 자라났다. 수도원운동이 동방에서 발생한 후 약 1세기 후에 로마제국의 서방지역에 확산되었다. 동방 수도원운동은
일방적으로 서방에 잘 이식되지 않았다. 서방 수도원적 삶의 정상적인 배경은 수도원장의 지도하에 있는 작은 공동체였다.
이후 베네딕트가 등장하여 수도원적 삶을 조직화하고 실천하기 위한 지침서로서 실행가능성과 중용과 자비의 원리에 근거하여‘수도규칙’(Rule)을 서술하고 책으로 출간한다.(61-69 P)






서방의 개종(350-700): 카톨릭 기독교는 고도의 융통성을 지닌 종교이어서 상이한 경제적, 정치적 상황에도 성공 했다. 기독교적 로마제국이 지배한 300년 동안 카톨릭 기독교는 정교한 신학과 예전과 학문의 전통과 공직자 선출, 부의 통제 및 분쟁의 해결등과 같은 실제적으로 필요한 일을 다루는 상세한 교회법 체계를 창조했다. 기독교는 초기 중세 시대에 기독교로 개종한 프랑크족과 영국의 개종에 성공하였는데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를 개종시켰고, 아일랜드에 거주 하던 사람들은 5-6세기 동안에 선교사 Patric과 후임자들에 의해 개종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로마제국 내에 살고 있지 않던 서방제국에서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민족이 되었다. 아일랜드 사회에서 수도원은 기독교의 지적, 신학적면이 보존되는 장소 였다. 기독교는 켈트어를 사용하던 이들에게 어려운 언어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규범적 기독교의 존립에 필수불가결했던 성경, 교회법,신학과 예전이 라틴어로 쓰여 있었다. 구성원의 이런 언어적 습득을 위한 학교의 기능을 가졌다. 아일랜드인들은 문법적으로 정확한 라틴어를 배웠다. 반면 대륙의 많은 사람들은 고전적 라틴어의 규범에서 심각하게 벗어난 살아있는 라틴어를 배웠다(사실 이 언어는 로망스어로 분류됨). 그리고 아일랜드 수도원은 4세기 이집트에서 발생한 수도원 운동처럼 매우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6세기 초에 일부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여행’을 떠나 영국과 골지방, 이탈리아,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게르만족이 audqahr상 개종한 이후 대륙 기독교의 부흥은 아일랜드인의 공이 크다. 6-9세기 아일랜드 순례수도사들으 stjqkdrlehrry의 친숙한 특징 중의 하나였다.
영국 선교는 기독교가 로마화된 영국에 처음전래된 것은 3세기에 무역상들과 군인들에 의해을 것이다. 교황 그레고리 1세(590-604) 때 5세기 북아프리카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의 이름을 딴 어거스틴을 보내 앵글로색슨족을 선교하도록 한 것이 주효하였다. 이것을 통하여 기독교는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았고 부흥과 확장의 희미한 빛을 나타냈다.


교황과 프랑크 왕국의 동맹: 8세기 중반에 대륙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앵글로색슨 수도사들은 교황과 프랑크 왕국의 동맹을 이끌었는데 이 동맹이 중세교회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요크의 윌프리드(634-709)와 8세기 가장 박식한 서구인 수도사 베데(672-735)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윌리브롤드(클레멘트,요크의 윌프리드의 제자)와 윈프리드(보니페이스)의 능숙한 조직가로서의 역할로 프랑크족의 후원을 얻어 선교사역을 하였다. 보니페이스는 프랑크 교회를 변혁하고 로마화를 촉진하는 개혁운동을 추진했다. (103-109P)








캐롤링 왕조1) 시대의 교회: 카롤링조 치하에서 라틴서방세계는 거의 한 세기(750-850)동안 정치적으로 안정을 누리고 ‘새로운 유럽’이라는 문명이 나타났다. 신 유럽의 심장부는 프랑크 왕국이었다. 카롤링왕조의 피핀과 그 아들 샤를마뉴는 영토를 두 배로 확장하고 서로마제국 멸망 후 가장 강력한 정치적 실체가 되었다. 서방 기독교 대부분은 프랑크왕국 내에 속해 있었다. 카롤링왕조 시대에 교회를 포함한 사회 전반의 질서의 회복을 위한 ‘개혁’이 진행되었다. 먼저 속세 성직자들의 개혁을 위해서 훈령을 만들어서 선포하였고 또한 수도사들의 개혁을 위해서 지극히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 되던 수도원을 베네딕트의 규칙을 따르도록 하였다. 평신도들의 개혁을 위해서는 교구를 조직하여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을 관리하였는데 평신도의 대부분이 문맹이었으므로 종교적인 지식보다는 생활 속에서의 종교적인 의무에 더 많은 강조점들을 두었다. 옛 종교적 방식을 삼가고 그리스도와 이교도들의 신들을 동시에 섬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반복 상기시키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것과 십일조와 여타 헌금을 내는 것,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 주일과 종교절기에 참석하는 것, 결혼을 통해서만 성적행위를 하는 것, 성적인 금욕을 준수하는 것 등이 었다(121-147P).


카롤링조 르네상스: 교회의 개혁은 이전세기에 저작된 문서에 기초했고, 구어로 사용되지 않았던 라틴어에 주로 의존하였다. 그 안에는 성경, 교부들의 책, 교회법, 예전서 그리고 베네틱트 규칙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성직자와 수도사들을 교육하는데 최선을 두었다. 그러나 라틴어를 읽을 수 없는 문맹이 거의 대다수였고 심지어는 사제들조차도 라틴어를 읽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카롤링조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라틴어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 교육은 왕실학교, 성당학교 수도원학교에서 일곱 교양과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어렵고 다양한 필체를 통합하는 초서체를 개발하였다. 카롤링조의 개혁은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교육의 수혜를 받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력은 기독교의 부흥에 큰 영향을 주었다.학문에 대한 교회의 독점을 강화하였다. 11세기와 12세기에 도시의 부흥이 있을 때 까지 글을 읽는 것은 성직자와 수도사의 영역이었다. 개혁은 부분적으로는 교육에 근거해서 교회의 지체 안에 삼중적인 갈래를 강화시켰다.(151-169P)


카롤링 왕조의 붕괴: 카롤링 왕조의 정치적인 분열로 인해서 시민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동 프랑크와 서 프랑크, 그리고 이탈리아로 나뉘어졌다. 동시에 회교도들과 바이킹들이 침략해왔고 수도원들이 피해를 보았다. 동 프랑크의 통치자는 교회들과 밀접한 동맹관계에 있었으나 교회가 통제받는 위치에 있었고 서 프랑크 왕국은 평신도 권력자에게 종속되었다. 이탈리아의 교황은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귀족들과 독일의 왕들에 의해서 휘둘리게 되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쇠퇴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꾸준한 성장과 상업을 통한 경제의 발달이 진행되고 있었다. 10세기에는 수도원장 베르노와 휴(Hugh)에 의해 크루니에서 수도원의 개혁이 일어났으며 평신도 권력자에게서 벗어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10-11세게 동안 이교도들의 기독교로의 동화과정이 계속되었고 정착자들은 원주민에 흡수되었고, 언어와 종교는 원주민들의 것을 선택했다. 이 때 또 다른 발전은 그것은 수도원에서 교회법 연구의 부흥이었다.카롤링조의 붕괴는 교회에 커다란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평신도의 지배’라는 구절로 요약된다. (173-200P)
1000년의 기독교: 유럽은 안정된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함께 동시에 다양한 민족과 언어가 함께하는 다중심적 사회가 되었다. 1000년에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기독교화되는 과정에 있었고, 곧 그렇게 되었다. 유럽인들의 정치적인 생활은 다 중심적이었다.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존재한 카롤링왕조 이후 10-21세기까지 유럽은 정치적으로 다시금 통일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유럽을 통일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같은 언어로 된 책을 읽고 같은 신조를 공유하는 교회였다. 1000년경의 교회의 중요한 구조에는 왕, 교황, 주교들, 교구, 수도원이 있었는데 이중 수도원은 끝까지 중보기도와 거룩을 나눌 수 있는 곳이라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수도원의 사회적 중요성과 일반적으로 중세기독교의 이해에 관한 열쇠중 하나는 한사람의 기도가 다른 사람에 혜택을 줄 수 있다는 것과 한 사람의 선한 행위를 다른 사람에 나누어 줄 수 있다는 주된 확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후에 분리주의자들이 등장하였는데 분리주의자들 중에 수도원적인 삶을 세상 속에서 살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이 11세기의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한다.(203-229P)


11세기의 교회의 문제점 중에 가장 크게 대두 되었던 것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서 시작된 성직의 매매이다. 급진적인 개혁자들은 성직매매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평신도지도자들에 의한 성직수여가 금지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직임명권을 두고 그레고리 7세와 헨리4세가 부딪혔는데 이로 그레고리7세가 헨리4세를 파문하고 권자에서 폐위시키고, 1077년 헨리4세가 스카니의 카놋사에서 속옷을 입고 3일간 화해를 청해 승낙을 받은 후 위치를 다시 회복하고 3년 후 다시 그레고리를 압박하여 축출하고 교황클레멘트 3세를 임명함으로서 왕이 교황을 임명하게 된다. 기름부은 왕이 교회를 통치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교황의 선출에 대해서 더 이상 왕이 관여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교황이 스스로 주교를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교구교회에서 평신도 지배에 대한 교황청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종교에서 평신도의 활동이 많은 방식으로 나타나고, 이단적이 아닌 대중들의 점증하는 종교적 활력이 두드려졌다. 제 1차 십자군 전쟁을 교황 우르반 2세가 1095년에 소집하고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며 하나님의 대적자로 인식한 유대인들을 무참히 살육하였다. 교회는 개혁 운동에 의해 사회에 분출된 종교적인 에너지를 여과하고 담는 일로 분투했지만 항상 성공적이지는 못했다.(235-257P)


역사가들은 중세시대를 셋으로 구분한다, 초기(500-1050), 고기2)(high-1050-1300. 고중세에 해당하며 진정한 중세이고, 황금시대를 말한다), 말기.
인구의 증가와 무역과 산업의 발달로 인한 경제력의 증가는 중세 서방교회를 풍요롭게 하였다. 이때 십자가 원정과 정복활동 등으로 인구의 이동이 증가하였으며 사람들의 활동범위가 넓어지게 되었다. 중세에 기독교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나라에 속해 있다는 것보다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더욱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십자군 원정 때 드러나게 되는데 결국에는 패배하였을 지라도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단합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단합은 외부세력에 대한 적대감으로 드러났는데 이슬람교와 유대교 등이 가장 큰 공격을 받았다. 또한 비잔틴제국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는데 비잔틴제국이 군사적으로 어렵게 되자 서방기독교인들은 그들을 군사적으로 도우면서 예전과 훈육으로 로마화 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한 비잔틴 기독교인들의 분노가 강해졌다.(261-284P)


교황청은 장기간의 권리를 효율적인 통치로 변화시키며 12-13세기에 체제의 정상위치를 누렸다. 치밀하게 구성된 교회법은 공평한 판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판결을 받기 위해서 교회로 나아왔다. 교황은 지금의 입법부이자 재판관으로서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한 교황은 전체교회의 회의를 주관하였으며 성직을 직접 임명하였으나 독단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교황의 권위가 높아지고 교황의 영향력이 확장되면서 교황은 재정적자에 시달리게 되었고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재판비용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해지면서 13세기 후반에 이러는 교황이 탐욕스럽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고 결과적으로 교황을 후원하던 세력을 잃게 된다. 교황권의 절정은 14세기로 교황은 일반시민, 성직자를 통치하고 재판하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다. 교황이 곧 교회다라는 극단적인 말이 나오기도 하였지만 오랜 전통, 재정적 구속, 영역 통치권을 교황이 제한한다는 세속 통치자들의 교황간섭에 대한 저항을 받는다.(287-305P)


종교부흥의 본질을 이해에는 중세 초기교회에 있어 구약의 중요성의 필요가 대두된다. 중세초기 기독교는 구약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통치자들은 여호와의 보호아래 전쟁을 치런 이스라엘의 왕들에게서 그들의 모델을 찾았다. 구약은 성경의 권위를 유지하였지만 중세의 왕들이 구약의 왕들의 모델을 따라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약의 베드로 반석 사상에 근거하고 있는 교황은 구약을 글자 그대로가 아닌 더 비유적으로 해석하면서 구약을 경시하고 비방하였다. 중세종교개혁이 성공하면서 신약이 더욱 강조되었고 당시의 사회분위기와 어울려 모든 문화예술의 영역에서도 신약의 내용들을 표현하는데 더욱 큰 비중을 두게 되었다. 평신도들 중에서 자신들이 사도적인 삶을 살도록 부름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더 이상 열렬한 종교행위가 더 이상 수도원의 전유물이 아니라 평신도에게로 확대되었고 그 결과 방랑설교자들과 은둔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신약을 강조한 종교부흥은 11세기 후반 14세기초 사이에 고중세를 특징지었다.(309-327P)


수도원:12세기에는 클루니 수도원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클루니 수도원이 갈수록 확대되면서 규칙준수의 완화라는 문제가 생겼다. 이에 베네딕트 규칙의 철저한 준수를 주장하는 시토수도회가 등장하였으며 기도와 노동의 두 원리를 회복시켰다. 또한 카르투지오 수도회라는 베네딕트의 규칙을 따르는 은둔자들의 모임과 수도원생활과 군대의 의무를 결합시킨 템플 기사단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세속 성직자들의 모임인 수도참사회원이라는 목회를 주로 담당하는 단체가 있었다. 12세기의 도시에는 병원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노인들의 휴식처, 회복을 위한 일시적 환자의 장소등으로 활용되어 어려운자들을 도왔고 많은 종교단체들이 이일에 헌신하였다.(331-357P)


13세기에 수도원생활은 번창하게 되었다. 개혁운동, 종교열정과 사회요구가 평신도들의 매우 다양한 수도원 설립을 자극 했다. 1200년까지 수도원, 수녀원, 수도사와 속세 성직자 참사회, 전사수도단의 지도자, 병원, 나환자 수도원과 은둔자들은 유럽 생활에 있어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다. 사도적 삶을 주창한 사람들은 로버트처럼 당시의 일반적인 전통에 흡수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주로 이단이었거나 이단화 되었다. 특히 왈도파는 이단은 아니었지만 문맹의 광신도로 교회가 그들의 설교를 금지하자 교회의 틀안에 있기를 거부함으로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를 만들었다. 또한 카타리파가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외적으로는 카톨릭 교회와 매우 유사하였으나 신학적으로는 영지주의자들에 속하였다. 이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자 교황은 이들을 처벌하려하였으나 남부군주들의 반응이 매우 미온적이었다. 이에 알비파 십자군을 일으켜 이들을 소탕하였고 또한 취조(inquiry)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온 종교재판소(inquisition)들을 열어서 이단들을 색출하였다.(361-377P)


이단의 확산이 유발한 위기는 기독교계의 수도원생활에 있어서 주요한 변화를 왔다. 탁발 수도사들은 종교적으로 정통파였으며 성실하고, 신뢰할만 했으며 평신도들의 이단에 대한 찬양과 충성에 도전했다.
아시시의 프란시스(1181-1226)는 왈도와 마찬가지로 가난과 설교를 하며 개인적으로 만족한 삶을 추구하는 사도적 삶을 사는데 헌신하였다. 그와 그의 평신도단체는 작은 형제들(fratres minores)이라 불렀으며 노동자로 일하거나 구걸을 하고 마구간 또는 야외서 잠을 자거나 평화와 회개에 대한 간단한 설교를하며 중부이탈리아를 방랑했다. 그는 가난과 설교를 중시하였는데 왈도와 달리 교황의 요구를 수락함으로써 설교권을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은 사도적인 삶을 존경하는 일반대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작은 형제회와 같은 성격의 수도단들이 13세기에 많이 생겨났는데 그중에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학교를 세워 교육하는 학문을 하는 수도단을 만들었다. 이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해 그들의 사도적 가난을 위한 운동의 큰부분을 흡수 했다. 결과적으로 중세의 탁발 수도승들은 기존교회에 대해서 환멸을 가지고 왈도파나 카타리파를 지지하려고 하던 많은 대중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함으로서 중세 신앙의 분열과 환멸을 150년간 피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361- 395P)


1000년에 선진교육은 몇몇 수도원과 성당학교에 집중되었다. 1300년 발전된 교육의 선도기관은 20개 정도의 대학들이었다. 기본적인 교육은 1000-1300년 사이에 도시지역에서 성장했다. 명상적이고 전통에 집착한 수도원학교, 지적혁신에 더 개방적이며 신학을 포함한 모든 분야의 지식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이용하는 일에 개방적인 성당학교가 있었다. 대학들은 원래 대가들과 학생들의 길드였으나 이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한 사람들이 대학을 설립하였다. 중세 후기의 대학들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가르쳤다. 성당학교 들은 영국남부, 프랑스 중부와 북부, 서부독일을 포함하는지역에서 발전된 교육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이들 학교들은 낙후된 다른지역의 학생들이 들어옴으로서 국제학교가되었다. 지식인들이 공유한 라틴어가 그러한 국경분할을 약하게 만들었다. 히브리어가 현대 이스라엘에서 부활한 것처럼 라틴어는 문어체 언어였으나 12세기 학교에서 교육받은 엘리트들 사이에서 문어체와 구어체 모두에 살아있는 언어가 되었다.1180-1300년대 성당학교가 우세한 기간은 짧았고 이 때 가장 선진적이며 현대적인 교육은 파리, 볼로냐, 옥스퍼드 같은 도시에 집중되었으며, 이들 도시에서는 새로운 교육기관인 대학이 생겨나고 있었다. 대학에서는 또한 의학, 신학, 법학을 가르쳤으며 중산층에게는 좋은 직업을 갖는 유리한 방편으로 여겨져서 점점 더 활성화 되었다. 또한 중세말기 교회의 기풍은 논리학과 법을 공부한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이것은 교회가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체계를 가질 수 있게 했다는 장점과 감정적인 대중신앙에 대처하는데 빈약한 성공을 보인 약점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399-420P)


중세의 기독교인은 현대의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창조, 타락, 구속의 원리에 입각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경의 심상으로부터 이해되었다. 현대의 입장에서 볼 때 특이한 점은 성인들을 숭배하였다는 점과 연옥을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에 대한 이해와 충성이 지금보다 훨씬 강력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삼층천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천국과 인간들이 거하는 세상, 사단이 거하는 지옥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 천구과 지옥은 지상의 인간의 삶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개개인들은 구원에 대한 절대적 확신은 없었다. 중세의 신앙은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 아마도 모두를 구원하기를 원한다는 신념과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죄에 의해 파멸될 것이라는 신년사이에서 괴로워 했다.(425-448P)


우주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은 추상적인 지적 실천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을 위한 구조적인 삶의 방식을 제공했다. 성례와 예전을 통해 주요한 기독교의 신앙이 실행되거나 심지어 개인과 그룹을 위해 재창조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의례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많았지만 중세시대의 의례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의례의 축복을 통해서 인간은 사제가 되었고 여성은 수녀가 되었으며 잔은 성배가 되었다. 의례를 적절히 행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예전서에는 세례, 견진과 성찬 같은 주요한 의례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축복과 정결의식이 들어있었다.
중세시대는 20세기의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삶이 종교와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451-494P)


13세기 말에 경제적인 붐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중세 말기에 인구의 증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왔다. 늘어나는 인구를 당시의 사회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식량의 부족과 실직이 늘어났다. 14세기에 1348-51 기간에 흑사병(서혜 임파선종 전염병-벼룩 속에 생존하는 박테리아가 원인인 설치류들의 질병)이 다시 발병하면서 중세인구의 3분의 1이 줄어들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살아남은 자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중세시대 말에는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100년 전쟁(1337-1453)이 있다. 폭력성의 증대로 반역자들과 권좌에서 밀려난 왕들, 그리고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과 살인이 자행되었다.(497-513P)


교황의 권력은 13세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로마라는 세속령의 통치자였으므로 세속적인 통치의 문제로 인해서 그의 영적인 권위를 실추시키는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였다. 교황의 영향력이 상승되고 교황 자체의 군대를 유지하여야 했기 때문에 교황은 재정적인 어려움에 항상 시달렸다. 그리하여 교황은 교회에 세금을 내도록 하였는데 필립4세는 이를 거부하였다. 보니페이스 황제는 이에 대해서 필립4세와 대립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났다. 후에 프랑스인 교황이 등장하면서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는 교황이 프랑스인들만 편애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하였고 이러한 갈등이 지속되면서 나중에는 1409년 두 교황, 1409-1414년 사이에 세 명의 교황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분열은 14세기에 시그문트 황제(1410-37)에 의해서 해결되었다. 교황의 실제적인 권력의 축소는 공의회주의가 등장하게 하였다. 중세 말에는 교황의 힘이 줄어들고 평신도 지배자의 영향력이 증대됨으로 종교개혁의 토양이 준비되고 있었다.(517-548)


우리는 종교적적인 분쟁(1517-55)의 시대 후에 중세기독교가 카톨릭, 루터파, 칼빈파, 영국성공회와 재세례파로 나누어 졌다. 1600년 종교적 변화의 힘은 기독교를 유럽의 모든 곳에서 재편하게 했다. 15세기 강력한 개혁활동의 사례로 콘스탄스(1414-18), 바젤(1431-49) 그리고 플로렌스(1438-45)의 위대한 공의회였다. 개혁가들을 엄수자라 불렀고 그들은 수도단의 규칙의 상세한 부분을 준수했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 수도단은 1368년에 첫엄수자 운동을 벌였고 유사한 그룹이 활동을 벌였다. 이중 마틴 루터도 어거스틴계 수도단의 엄숙자 그룹의 일원이었다.
경건한 운동과 종교적 비판은 고중세와 중세말에도 빈번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은 1500년 경의 몇 십년간 국가가 견고해지고 인쇄술이 발달한 것, 관료주의적 중앙집권적 정부가 12세기 이래로 서방유럽의 몇몇 지역에서 발전하였다. 이 국가들이 성공을 거둠으로 교황이 주도하는 보편교회의 효과성과 독립성은 약화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종교개혁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2. 서평


역사는 현대를 사는 모든 이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그리고 미래를 향한 나침반이 된다.


본 저서는 중세교회사를 간략하게 소개함으로써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독특한 저술의 방법으로 기록한 책으로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독자로 하여금 중세역사라고 하는 복잡한 구조를 아주 쉽게 전체그림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탁월한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깊이 있게 전체로 다루지 못한 부분에서 약간의 아쉬움도 있다. 이를 정리해 본다.


1) 본 저서는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해 놓은 것처럼 신뢰할 만하면서도 읽기 쉬게 서술되어 있다. 고대기독교의 기원부터 현대 기독교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까지 유추되어 정리될 수 있도록 간결하게 언급하고 있다. 유대교의 한 부분으로 시작한 기독교가 70년 예루살렘 파괴 이후 유대교와 분리되어 초대교인들이 로마제국에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과 박해를 거치면서 300년대에 로마의 주류로 진입하고 야만민족의 침입과 더불어 이들을 복음화 시켜 유럽을 복음 화시켜 가는 전 과정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어 기독교 발생으로부터 현재의 주류가 된 기독교의 역사를 한 눈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2)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사용하는 언어를 중심으로 중세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게 자세히 언급하고 있으며, 언어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3) 서방교회를 중심으로 언급되어 있어 현재 유럽의 기독교의 기원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반면에 동방교회에 대한 언급이 적어 전체적인 이해에 다소 어려움이 있다.


4) 내용의 간결성으로 쉽게 중세의 역사적 사건 및 사상적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장점이다. 그러나 사건과 인물들의 사상 등에 대한 각주가 없어 내용을 파악함에 있어 어려움이 있다.


5) 중세 교회사를 언급함에 있어 교회의 부패함과 종교개혁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이유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나 이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며 종교개혁의 당위성과 그들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아쉬움이 있다.




중세라는 개념은 보통 고대와 근대 사이에 끼어 있는 중간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 한다. 그러난 본래는 헬라 로마 문화와 르네상스 사이에서 아무런 문화가 없는 암흑시대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


독서를 통한 느낌 및 반성


중세 교회는 고대교회와 근대교회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감당하였고, 사실 어느 시대 보다 격동의 시대였다. 부정과 긍정의 대조를 이루는 시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세 교회의 양면성은 고대와 근대교회사에서도 존재해 온 현상들이며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 중세 교회를 근본적으로 부정해온 16세기 나타난 신비주의 (Mysticism), 명목주의(Nominalism)와 인문주의 (Humanism)자들과 급진주의적 종교 개혁자들의 견해는 칼빈이 했던 것처럼 지양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그 타락의 심도가 깊었다 할지라도 기독교 세력의 확장과 더불어 서양의 기독교 문화를 창달케 한 중세교회의 업적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독교인들마저도 하나님이 함께했던 역사를 암흑기라 단정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신앙인의 입장으로 볼 때 간과할 수 없는 그 타락의 비신앙적인 역사는 타산지석 으로 삼아 우리는 그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고 쓰고 역사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걱정되는 부분 또한 적지 않다. 우리 신학도 들의 예배의 태도나 사상의 흐름을 볼 때 그러하다. 이를 예민하게 바라보면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서 가운데 간과하지 말고 되새겨 보고 싶은 부분은 로마의 문화가 발달하고 연구가 진행되면서 교육용으로 간략하게 요점 정리하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젊은이들이 지식 정보입수는 쉬워져서 도움이 많이 되었으나 한편으로 깊이 있는 독서나 저술이 되지 않아 문화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의 흐름에 눈여겨 본다.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
삿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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