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돌아오는 자의 고민(창세기 32장 21절~29절)

by 【고동엽】 2023. 4. 10.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돌아오는 자의 고민(창세기 32장 21절~29절)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 하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사람이 가로되 네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지극히 평범한 진리 한 가지를 깨닫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를테면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 진리는 상식 중에서도 상식입니다. 삼척동자라 해도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를 터득하는 데에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 진리를 나의 진리로 삼고, 내가 긍정하고, 내가 믿고, 내가 그에 따라 사는 데에는 엄청난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긴 시간이 필요하며, 많은 경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확실히 믿고 사십니까? 여러분은 가을의 의미를 아십니까? 봄 여름에 걸쳐 심고 가꾼 것을 거두어들이는 이 가을이 말해주는 진리를 아십니까? 내가 오늘 베푸는 친절이 반드시 다른 형태의 친절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내가 오늘 행하는 선행은 그 언젠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을 아십니까?
내가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언젠가는 내 마음이 아프게 됩니다. 내가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언젠가는 내 눈에서 피가 난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셔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머리로는 쉽게 생각하고 추상적으로는 진리로 받아들이지마는 그것을 생활 속에 받아들일 만큼 확고하게, 뼈저리게 믿고 나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저 야곱이라는 인물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은 이른바 보통사람의 전형입니다. 동생으로서 형이 받을 기업을 부당하게 받은 사람입니다. 전혀 복 받지 못할 성품을 지녔지만 그 간절함과 정열 때문에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자기중심적이어서 자신의 욕망,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좌우를 돌아보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이 자기중심적인 축복을 바라 집착하고 있는 동안 도덕도 의리도 하나님도 아무 것도 그는 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속였고 형과 불화 했고, 하나님 앞에서 거짓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 14년을 머슴살이한 사람입니다. 말문이 막힐 지경입니다.
가끔 젊은 사람들이 서로 연애를 하다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해 맺어지지 못하고 애태우다가 저를 찾아오는 일이 있습니다. 자기네 마음대로 결혼을 해버려야 할지 좀더 참아서 기어이 허락을 받아내어야 할지, 그것이 고민인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젊은이들에게 열 번이라도 똑같은 대답을 해줍니다. "기다려라." "아이고 목사님, 2년이나 기다렸습니다." "또 기다려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14년 기다려라!" "아이구, 그러다가 다 늙어버리겠네요"-여러분, 이런 것을 보면 야곱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짐작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가위 위대한 집념의 사나이라 할만합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집념으로 복을 받아내고 그런 집념으로 잘 살아 보겠다고 한 사람입니다.
야곱이 가진 축복관-생각해볼 점이 많은 축복관입니다. 그가 오로지 염원한 것은 부자가 되어야 한다, 큰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 족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큰 가정을 거느리고 왕권같은 강력한 권세를 누리며 일족을 호령하고 살아 보자-이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아주 세속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보통사람의 욕망을 지녔던 것입니다. 그는 이런 욕망을 꿈으로만 불태운 것이 아니요 실천을 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불의한 일까지 서슴지 않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이제는 다릅니다.
마침내 그는 깨닫습니다. 화해가 중요하다는 것을 피부로 절감합니다. 잠언 17장 1절에서 말씀하지 않습니까?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또한 15장 17절에서도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식탁이 아무리 기름지면 뭐합니까? 식탁에 마주 앉기만 하면 서로 싸우는데 음식이 산해진미(山海珍味)면 무슨 소용입니까? 좋은 집이면 또 뭐합니까? 화목이 제일인 것입니다. "저희 집에는 절대로 깨질 물건을 갖다놓지 않습니다."하고 어떤 부인이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편이 화만 나면 다 집어던지니까요." 그래서 던져도 깨지지 않을 물건만 갖다놓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그 부인에게 비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엄청나게 비싼 것을 갖다놓으십시오, 그렇게 하면 집어던지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집, 좋은 음식, 비싼 물건, 다 소용없습니다.
소용이 되는 것은 화목입니다. 화목이 제일이요 화평이 으뜸이요 사랑이 제일입니다. 야곱이 이것을 깨닫는 데에 20년이 걸렸습니다. 사람 철나기가 이토록 힘든 것입니다. 그 많은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으면서 파란만장한 20년의 세월을 살고 나서야 비로소 이 평범한 진리 - 화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이요 최우선임을 뼈아프게 깨달은 것입니다. 가출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별거를 해도 안됩니다. 멀리 떠나 있어도 소용없고 숨어산다 해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필경은 원점으로 돌아와 화목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다고 깨달았습니다.
야곱은 또한 그보다 더 중요한 것도 깨달았습니다. 화목이 없는 것은 바로 나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 때문도 아니요 가난 때문도 아니요 자신이 동생이라는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도 아니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해 주느냐 하는 것도 탓이 되지 못합니다. 문제는 오로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나 하나의 존재, 나 하나의 사람됨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다음의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화목이 없는 부귀영화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죄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두렵다"고 하는 잠언 말씀을 상기합시다.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닙니다. 혼자서 스스로 두려운 것입니다. 홀로 있어도 그 마음은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죄인은 고독합니다. 죄인은 어디에를 가나 불행합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죄인을 위로할 수 있는 대책이란 따로 없습니다. 변명을 해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성명서를 내보아도 시원치 않습니다. 잊어버리자고 술 취하고, 방탕하고, 일부러 악을 행하고, 마약에 취하고…… 갖은 방법으로 발악을 하기도 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죄인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누구라도 그를 위로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노 섭스티튜트(No substitute)-대책이 없습니다. 길은 하나입니다. 스스로 회개하는 것, 화해하는 것-이것 말고는 절대로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화해가 그리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어려운 것입니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뼈를 깎는 아픔이 필요합니다. "미안합니다."-쉽게 말할 수 있는 이 말 한마디를 하기조차 얼마나 어렵습니까? 제 잘못을 시인한다는 것, 그리고 돌이킨다는 것이 그토록이나 힘이 듭니다.
역사를 살펴보아도, 뉘우치고 사과하고 돌이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많은 독재자들의 서글픈 말로(末路)가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화해하기란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돌아오는 길은 그만큼 더 멀어집니다. 왕복 거리가 있으니 원점으로 돌이킨다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의 그림 '최후의 만찬'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그림을 그릴 때에 다빈치는 많은 기도를 하며 애를 썼습니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열두 제자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나가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빈치에게는 두고두고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 같은 사나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잘못은 그 사나이에게 있었지만 다빈치는 그 사나이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옳다구나' 하고 다빈치는 그 원수 같은 사나이의 얼굴을 모델로 삼아 가룟 유다를 그렸습니다. 그리고서 남은 열한 제자의 얼굴도 그러구러 다 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예수님의 얼굴-다빈치는 이 얼굴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달이 가고, 몇 해가 지나도, 아무리 기도하고 애를 써도 예수님의 얼굴은 영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덕망 높은 수도승 하나가 지나가는 길에 다빈치의 화실을 방문했습니다. 수도승은 다빈치의 오랜 고민을 알고 한마디했습니다. "원수를 용서치 못하는 한 당신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수도승이 떠난 다음, 다빈치는 그 자리에 엎어져 피땀으로 회개했습니다. 회개를 하고 자기가 미워하던 그 원수 같은 사나이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십시오." 마침내 마음이 열리면서 다빈치는 비로소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낼 수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때로 우리는 화목 없이도 복을 받으려 하고, 회개 없이 무엇인가를 이루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민에는 상대적인 고민과 절대적인 고민이 있습니다. 야곱은 여전히 상대적인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막상 화목 하고 회개하려 할 때에 큰 어려움이 따릅니다. 내가 화해를 청할 때에 저가 내게 어떻게 나올까,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할 때에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취급할까? "진작 그랬어야지"하고 거만하게 나오면 어떻게 되나? 나를 패자(敗者)로 업신여기면 어떡하나? 이런저런 걱정이 앞섭니다.
내가 회개를 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남들이 얼마나 나를 무시할까, 얼마나 내 인격을 천하게 볼까? 나는 한 가지 잘못을 고하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나를 보고 열 가지 잘못을 범했다 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앞서갑니다. 이런 두려움으로 해서 화해가 어렵고 회개가 어려운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다윗 왕은 역시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는 만백성을 재판하는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입장으로 엄청난 죄를 짓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지위가 지위니만큼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란 몹시 어려운 입장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엎어져 고백하고 맙니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사람들이 멸시를 하든 돌을 던지든 침을 뱉든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진실만을 찾았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실로 대단한 용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야곱은 지금 고민이 많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화해하고 싶지만 두려움이 큽니다. 형님이 나를 어떻게 대할까? 나를 어떻게 취급할까? 나 때문에 20년 동안이나 이를 갈았을 형님이 나를 만나면 어떻게 나올 것인가? 나를 살려 줄까, 죽일까? 400명을 인솔하고 온다 하지 않는가? 나는 이제 죽은목숨인가? 내 재산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내 가정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어 난감합니다. 야곱은 줄곧 나 아닌 상대방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요사이도 가만히 보면 "네가 받아들인다면 사과하겠다."이렇게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상대방에게서 무슨 반응을 보게 되든 상관하지 말일입니다. 죽이든 살리든 물어볼 것 없습니다. 상대방은 상대방이고 나는 나입니다. 상대방의 반응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나의 할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야곱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다운 간사한 수단을 씁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다 동원한 것입니다. 그는 먼저 사자(使者)를 보냅니다. 형님의 속셈을 떠보겠다는 짓입니다. 그리고는 무리를 두 대(隊)로 나누었습니다. 이쪽을 치면 저쪽으로 도망가겠다는 속셈이지요. 뒷문까지 열어놓고 흥정하는 간교한 지혜입니다. 세 번째로는 선물 공세를 폅니다.
선물을 먼저 보냅니다. 여러 차례 보냅니다. 웬 양떼냐, 웬 소떼냐 하고 물으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형님에게 보내는 예물입니다 하고 대답하게 합니다. 거듭 예물을 보냈습니다.
그랬는데도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여전히 불안합니다. 어떤 수단을 써도 안될 것 같습니다. 마침내 야곱은 절대적인 고민에 빠지고 맙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니 재산도 소용없습니다. 그 많은 아들딸도, 사랑하는 아내 라헬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문제는 이 장면입니다. 홀로 남았습니다. 혼자입니다. 절대적 관계의 순간이요 절대적 고민에 빠지는 순간입니다. 아무도 그를 위로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그를 돕지 못합니다.
마지막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과 만나게 됩니다.
벧엘의 약속을 그는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가 피난의 길을 갈 때에 하나님께서 돌베개를 베고 누워 있는 야곱에게 꿈으로 나타나셔서 보여주신 것이 있지 않습니까? "너 누운 땅을 네 후손에게 주리라. 네가 무사히 돌아오리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이 벧엘의 약속이 있지만 그래도 야곱은 생각합니다. 그 약속을 받을 만큼 의롭지 못합니다. 그 약속을 따라 살지 못했습니다, 그 축복을 받을만한 그릇이 없습니다-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야곱은 진실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홀로 남은 이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이 있어야 했고 그 관계의 정상화가 필요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야곱은 이제야 이 말씀을 알아야 했습니다. 원수와 화목하게 되는 것은 선물 가지고 될 일이 아닙니다. 마주앉아서 흥정을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원수와도 화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사람의 눈치보고 사람의 반응을 생각하는 동안에 야곱은 간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올무에 걸려서 거듭되는 죄악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오로지 생각해야 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안전하리라."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본래적인 하나님과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야곱은 밤새 천사와 씨름을 하면서 마침내 문제의 해결을 보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야곱의 일생은 씨름하는 역사였습니다. 씨름에는 상대적인 승리가 있습니다. 한쪽이 넘어져 주어야 한쪽이 이기는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그랬습니다. 내가 얻고자 남을 손해 입혀야 했고, 내가 살려고 남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패자(敗者)없는 승리가 있습니다. 알고 보면 사실은 야곱이 패했습니다. 천사가 내리침으로 환도뼈가 위골됐습니다. 사실은 지고 이긴, 그러한 씨름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말이 떠오릅니다. "위풍당당하게 불의한 길을 가는 것보다는 절뚝거리면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걷는 것이 복이 있다." 여러분, 교만하고 안이하게 죄 가운데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께로서 한대 얻어맞고 절뚝거릴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복됩니다. 야곱은 그후 일생동안 절름발이로 삽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불화 하면서 떵떵거리고 살던 것보다는 그 이후의 절뚝거리며 사는 겸손의 생이 야곱에게는 복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구할 것 없이 하나님께 맞아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기도 하고 어느 한군데라도 멍든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루어나가고 화목의 사람, 참회하는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진실할 수 있다면 이 길이야말로 복된 길인 것입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역시 고민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대하실까? 형님이 어떻게 대할까? 그러나 탕자는 위대했습니다. 그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어떻게 대하시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완전히 항복하여 두손들고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자는 말이 없어야 합니다. 돌아오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돌아오는 자는 변명이 없어야 합니다.
온전히 자기를 부정하고 나아와야 합니다.
오직 회개가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한 다음, 야곱은 이튿날 아침에 얍복 나루를 건넙니다. 이제 형님을 대해도 그는 두렵지 않습니다. 밝은 얼굴로 대하였고, 형님도 그를 반겨주었습니다. 얼싸안고-20년만에 처음으로 형제가 마주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야곱은 고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습니다." 가슴이 탁 트이고 하늘이 열리듯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감격의 순간을 맛보게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답답하고 괴롭습니까? 무엇인가 어디에 맺힌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기도하고 몸부림쳐도 열리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돌아가 보십시오. 원점으로 말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될 때에만 비로소 사죄(赦罪)의 은총을 힘입게도 되고 화목하게도 됩니다. 이 화목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의 윤택함과 새로운 행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