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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제자직과 십자가본회퍼 /허호익 교수

by 【고동엽】 2021. 10. 27.
span>제자직과 십자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서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신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아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세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1~38)


제자직으로의 부름은 여기서 예수의 고난 선포와 관련되어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 받고 배척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성서가 성취되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고난과 배척은 같은 것이 아니다. 예수는 결국 고난 가운데 찬양받는 그리스도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동정과 찬양은 결국 그 고난으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고난은 비극적 고난으로서, 그 자체 안에 그 자신의 가치와 영광과 위엄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고난 가운데 배척당하신 그리스도이다. 배척은 고난으로부터 모든 위엄이나 영광을 빼앗아간다. 그것은 영광이 없는 고난이 된다. 고난과 배척은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집약적인 표현이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배척당하고 추방당한 자로서 고난받고 죽는 것을 뜻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필요의 의해 고난받고 배척당해야만 했다. 그 필요를 가로막는 그 어떤 시도도_심지어 혹은 정확히 그러한 사도들이 제자들이 집단으로부터 나오는 것에서도_사탄의 짓인바, 그것은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지 않도록 의도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고백하고 예수의 의해 임명받은 뒤에 곧바로 죄를 범하는 자가 다름 아닌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라는 사실은 교회가 그 시작에서부터 고난받는 그리스도에게 거역해 왔음을 의미한다. 교회는 그러한 주를 원하지도 않으며,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 주가 고난의 의무를 지우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베드로의 반대는 그러한 고난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그의 거역이다. 그것으로써 사탄은 교회로 기어 들어왔다. 사탄은 교회를 주의 십자가로부터 멀리 떼어내기를 원한다.


이것은 예수로 하여금 고난의 필요성을 그의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게 만든다.


그리스도가 고난과 배척 가운데서만 그리스도이듯이, 그들 또한 고난과 배척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릴 때에만 그분의 제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결단을 요구하는 제자직은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법, 즉 십자가 아래 있게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러한 빼앗길 수 없는 진리와 제자들을 잇는 매개는 예수께서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심으로써 시작된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만일 어느 누가 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심지어 제자들 중에서조차 명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강요받을 수 없으며, 어느 누군가에서 기대될 수도 없다.


오히려 '만일 어느 누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다른 제안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래서 다신 한 번 모든 것은 그 자신의 결단에 달려 있다 제자들이 서 있는 제자직 안에서, 모든 것은 이전처럼 깨어져 있고, 이전처럼 열려 있으며, 아무것도 기대되거나 강요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것은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제자직의 법이 선포되기 전에, 제자들조차도 그들의 헌신과 결단으로부터 풀려나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말했듯이, 모든 제자들은 각자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야 한다. 자기 부정은 자기 학대나 개인적인 행위와 관련된 금욕주의로서_그것이 아무리 위대할지라도_결코 정의될 수 없다. 그것은 또한 자살도 아닌데, 거기에서도 사람의 자기 의지가 그 자체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부정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아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를 앞서가신 그리스도만을 보고, 우리에게는 너무 힘든 길을 더 이상 보지 않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 부정은 다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앞서가신다. 그분을 굳게 붙잡아라."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우선 자기 부정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이 말씀에 대해 그의 제자들을 준비시키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 이상 알지 못할만큼 참으로 그리고 완전히 우리 자신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그분을 위해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분만을 안다면,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의 고통을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된다. 오로지 그분만을 보고 있으므로, 만약 예수께서 우리를 그토록 평화적으로 이 말씀에 대해 준비시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어려운 말씀조차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제자직의 기쁨 안에서 만나며, 그 말씀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십자가는 불행도 아니고 운명의 가혹함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헌신과 결단에서 오는 고난이다. 십자가의 고난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다. 십자가는 자연적 존재에 묶여 있는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됨에 묶여 있는 고난이다. 십자가는 단순히 고난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고난과 배척의 문제이다. 좀더 엄격히 말한다면, 다른 어떤 임의적인 행동이나 고백을 위한 배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배척이다.


제자직을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을 단순히 값싼 정신적 위안에 대한 믿음으로 전락시키며 자연적 존재와 그리스도인을 구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태는 십자가를 단순히 일상적인 어려움으로, 우리의 자연적 삶에서 오는 고통과 근심으로 이해해야 했다. 여기에서 십자가는 언제가 배척을 의미하고, 고난의 치욕이 십자가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잊혀졌다. 우리가 시편 기자의 끝없는 탄식에서 발견하듯이 고난 가운데서 사람들에 의해 추방받고 멸시받고 버림받는 것은 십자가 고난의 본직적인 특징이지만, 부르주아 계급과 기독교인의 존재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기독교적 삶의 형태에서는 더 이상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와 함께 겪는 고난을 뜻하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뜻한다. 제자직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헌신만이 십자가 아래에 진지하게 설 수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는 처음부터 이미 거기에 있으며, 준비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다만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단순히 어떤 임의적인 십자가를 선택하거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의 고난을 선택해야 한다고 믿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에 의해 적절히 측량되고 주어지고 준비된 자신의 십자가가 있음을 강조하신다. 우리 각자는 특별히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배척의 분량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분량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나님은 큰 고난을 당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하시는 어떤 이들에게는 순교의 축복을 주신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힘을 넘어서서 유혹받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하나의 십자가이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놓여 있다.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고난은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매임을 끓으라는 부름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옛 사람의 죽음이다. 누구든지 제자직에 들어가는 사람은 예수의 죽음에 들어가며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 둔다. 이것은 처음부터 그래 왔다. 십자가는, 경건하고 행복한 삶의 무서운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동체의 시작점에 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부르심은 죽음으로 인도한다. 초대 제자들처럼 우리가 그분을 따르기 위해 가정과 직업을 떠나든지, 루터처럼 세속적인 직업에 들어가기 위해 수도원을 떠나든지 간에, 그 어느 경우이든 동일한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 예수의 부르심 가운데 우리의 옛 인간의 형태가 죽어 없어지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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