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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한 수난자의 소망(욥기 19장 23절~29절)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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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난자의 소망(욥기 19장 23절~29절)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꼬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가 즐겨 쓴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런던 시민들은 신선한 청어를 좋아해서 북해에서는 늘 청어잡이가 성행했습니다. 북해로부터 청어를 수송해오는 방법은 큰 물탱크에 산채로 넣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먹이를 주어가면서 그렇게 수송해오면 런던까지 살아 있는 청어를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어는 먼 여행에 기진맥진해져서 도착할 때쯤이면 거의 탈진 상태에 빠져 있곤 했습니다. 이런 형편이고 보니 살아 있기는 해도 신선도가 높지 않은 청어가 잘 팔릴 리 없었습니다.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별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은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런던까지 줄곧 신선한 상태로 수송해다가 팔았습니다. 이 사람의 청어는 언제나 싱싱했습니다. 그래서 돈도 많이 벌고, 상당한 재미를 보았습니다. 다른 수산업자들은 제발 그 비결을 가르쳐달라고 쫓아다니면서 졸랐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비결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물탱크에 산 청어를 집어넣는 것까지는 같은데, 그 청어들 틈에 커다란 숭어 한 마리를 넣어주는 것이 바로 그 비결이었습니다.
'숭어가 청어를 잡아먹을 텐데……' 하고 걱정하겠지만, 실은 먹어보았댔자 몇 마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노리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숭어가 청어를 잡아먹으려고 쫓아다니면 청어들은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헤엄을 칩니다. 그렇게 도망 다니는 것이 운동 효과를 내어, 결국 청어는 런던까지 싱싱하게 산채로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간단한 이야기지만 토인비는 이 이야기를 통해 매우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한테는 공통된 심리가 있습니다. 편하기를 바랍니다. 무사태평, 건강, 안일, 오늘도 무사히-오로지 안정과 평화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섭섭하지만 이 세상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절대적 평화란 없습니다. 환난이 있고 고통이 있고, 재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남의 처지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누구나 다 죽을 지경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남의 나라에 있는 부와 안정을 동경하지 마십시오. 그들 나름대로 고민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느 곳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또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아우성치고 뺏고 빼앗기며 야단하는 것도 다 시간 문제요, 결국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것은 매우 공평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도 못 가진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지긋지긋하게 아픈 사람도, 죽음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끝내는 다 가는 것입니다. 평안을 바라는 심리, 그러나 고통할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 그리고 어떠한 고통도 죽음 앞에서 무의미함-이 세 가지는 인간 사회에서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욥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욥은 욥기 전체의 주제가 되는 인물이요, 고난의 대표자입니다. 그런데 욥기가 말하는 고난, 또 고난 당하는 수난자의 모습은 매우 독특합니다. 일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욥은 의인입니다.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 : 1)" - 깨끗하게 산 사람입니다. 이러한 욥이 고생을 합니다. 여러분, 욥과 같은 사람한테는 고통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무사태평하고 형통함과 건강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기대하는 바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이런 욥이 고생을 합니다. 이것이 욥기의 주제입니다. 욥의 경건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마음에 늘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1장 2절에 나와 있듯이 욥한테는 아들 일곱, 딸 셋의 10남매가 있었습니다.
자식이 그처럼 많으니 생일 잔치라도 한번 할라치면 크게 벌어집니다. 왁자지껄하게 먹고 마시며 놉니다. 잔치가 있을 때마다 욥은 생각합니다. '이 젊은것들이 죄를 지었으면 어떻게 하나. 취흥(醉興)에 젖어 방탕한 마음을 품거나 하나님의 뜻을 어겼으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욥은 잔치 후에 자녀들을 불러다가 속죄의 제를 드립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경건한 사람입니까? 얼마나 깨끗하게 살려고 애를 썼습니까?
언젠가 제가 어느 미국 청교도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 한 사흘 묵으면서 본 장면입니다. 아침, 학교 가기 전에 어머니가 아이들을 불러놓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잠깐동안 기도한 후에 보내줍니다. 그리고 점심 나절, 어머니가 풀밭에서 빨래를 널고 있을 때에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옵니다. "엄마!"하고 뛰어 들어오면 어머니는 아이를 풀밭에 앉혀놓고 묻습니다. "너 오늘 누구하고 싸우지 않았니? 누구 미워하지 않았니? 질투하지 않았니? 거짓말하지 않았니? 나쁜 마음을 품거나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니?" 그러고는 아이와 함께 손을 마주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는 그 모습에서 정결하게 살려고 애쓰는 청교도적인 생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가정에 질병이 없겠습니까? 이 가정에 실패가 없고 죽음이 없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욥은 의인입니다. 의인인데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무던히도 고생을 했습니다. 문제는 고난이 있으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복된 사람은 고난을 어떻게 참으며, 어떤 뜻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1장 9절을 봅시다. 사단이 하나님 앞에 욥을 참소 합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무서운 도전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당신이 저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지요. 건강을 주셨으니까 당신을 경외하는 것이요, 명예롭게 하고 태평하게 해주시니 경외하는 것입니다. 한번 내리쳐보세요. 그러면 곧 당신을 원망할 것입니다. 병들고 실패하면 자기 하나님을 저버릴 것입니다. 욕을 먹으면 욕으로 맞설 것입니다. 욥이라고 해서 뭐 더 나을 줄 아십니까? 그도 별수없어요. 하나님이 특별히 봐주시니까 경건한 것이지요, 까닭 없이 왜 당신을 경외하겠습니까?' 이처럼 욥을 모함하고 멸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욥을 사랑하십니다. 그를 믿으십니다. 그러기에 장담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욥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다. 병들어도 나를 사랑할 것이다. 실패해도 나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여건에서도, 어떠한 악조건에 처한다 해도 그는 나를 배반하거나 내 사랑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이 긴장 관계 속에서 욥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욥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 까닭이 있어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사단의 생각을 무너뜨리고자 하심입니다. 아무 까닭 없이, 자기에게 어떤 유익이 없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욥은 그렇게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욥이 당신의 그러한 기대에 부응(副應)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욥기의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고난의 문제란 곧 믿음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입니다. 야고보서 1장 2~3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시련이 있느냐 없느냐, 고난이 있으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 중에 기뻐하느냐 절망하느냐의 문제요, 고난당해서 우느냐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시련-없는 믿음을 있게 하시고 거짓된 믿음을 순수하게 하시고 약한 믿음을 강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련의 목적입니다. 욥기는 이것을 욥이라는 한 특정 인물에게 일어나는 사건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믿음을 원하십니다. 창세기 12장과 2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네 고향을 떠나라' 명하십니다. 아브라함도 할 말이 많습니다. '어디로 가라는 것입니까? 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묻은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갈 곳을 알지 못해도 내가 가라 하면 가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믿음입니다. 또 백 세에 비로소 얻은 아들, 이 얼마나 소중한 아들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명하십니다. '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내게 바치라!'
이처럼 불합리한 요구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기로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얼마든지 할 말이 많겠으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조건적인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기대대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 소중한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 제물로 바칩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그리고 아브라함을 크게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기를 원하십니까? 까닭 없이 조건 없이, 환경에 관계없이, 어떠한 여건에도 관계없는 깨끗한 절대적 신앙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욥이 고난을 당합니다. 먼저,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는 동방의 부자였습니다.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 동방의 최고 갑부였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재산을 몽땅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대책도 없이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그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1:21)."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일차 합격입니다. 이제 다음 시험으로 욥의 열 자식이 모두 죽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자식이 아닙니까? 그런데 7남 3녀나 되는 자식이 집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몰사해 버렸습니다. 기가 막힐 사건입니다. 게다가 생의 반려자인 아내마저 하나님을 저주하고 도망가버립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닙니까?
사람에게는 마지막 보루(堡壘)가 뭐니뭐니해도 건강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건강마저 잃어버렸습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잿더미에서 뒹굽니다. 얼마나 참기 어려운 고통이겠습니까?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고 일주일을 함께 있으나, 할 말이 없습니다. 말없이 앉아 있어줄 때에는 차라리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한마디씩 입을 열기 시작하니 이 말이라는 것이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잘 생각해보아라. 네게 무슨 큰 죄가 있는 모양이다.' 한다는 이야기가 겨우 이런 식입니다.
욥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제발 입 좀 다물어다오. 그런 말은 나도 할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말하기를 '욥은 교만하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으면서도 교만하다' 합니다. 그렇지요. 교만하기도 하고 고집도 있었겠지요. 그래도 욥은 진실했습니다. 이제 무슨 말로도 욥을 위로할 수 없고 위로 받을 수도 없습니다. 끝내 친구의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위로가 오히려 그를 조롱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고통에 고통을 더해줄 뿐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 때 종군기자로 왔었던 마가렛 히기우스라는 사람이 미국의 언론․문학상인 풀리처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미 해병대에 종군하여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해병 5중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한번은 참호 속에 갇혀서 다 죽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시체가 쌓여 있는 그 속에서 벌벌 떨며 초조해하고 있었습니다.
서로가 무슨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마가렛 기자는 병사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이라면, 그래서 내가 당신들한테 무엇을 어떻게 해주면 좋겠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이 처지에서 어떤 청을 하겠습니까?" 그때 한 병사가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Just give me tomorrow (오직 내일을 주십시오)." 확실한 내일이 있다면 지금 당하는 고통은 문제가 아니다, 내일을 달라, 소망을 달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소망만 있다면 눈앞의 고난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소망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처지가 어떠합니까? 그것은 알 바가 아닙니다. "소망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필요합니다. 욥은 고백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나는 죽어가도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내가 고난을 당하고 실패해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날은 흐려도 태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먹구름이 가득차 있다 하더라도 태양은 분명 저편에 빛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수난자의 소망이었습니다.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 욥은 이제 영적인 인간이 되어갑니다. 영원한 소망을 지닌 성숙한 인간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나의 이 모진 환경과는 상관없이 나의 구속자는 살아 계시다, 영원히 살아 계시다-이 신앙 고백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너무 자기중심적입니다. 내 일이 잘되면 하나님도 계시는 것 같고, 내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도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게 무슨 유익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 같고, 내가 뭘 잘못하면 하나님도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천만에요. 하나님은 나와 상관없이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 소망의 뿌리가 있습니다. 욥의 다음 말을 들어봅시다.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많은 신학자들이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삼는 고백입니다. 욥은 그 어려운 고난 가운데서도 메시야 왕국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될 그리스도의 왕국을 고난 중에 내다보았다는 것이올시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반드시 메시야의 나라가, 그분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헛된 중상 모략이며 갖은 악은 다 물러가고 찬란하게 밝은 아침은 올 것입니다. 욥은 그렇게 전망하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더욱더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장면은 그 다음입니다.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영원 지향적 인격이 형성되는 순간입니다. 그 동안 의지했던 재물, 자녀, 가정, 명예…… 세상적인 것을 모두 부정해버리고, 깨끗이 부정해버리고,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육체가 썩어 가는 순간인데 명예가 무엇이며 재산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제 영원지향적인 인격, 영원한 생명을 중심한 소망 - 거기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제가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집을 보면 그러한 주제로 설교하신 것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폐결핵으로 3년밖에 더 살지 못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던 분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하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오셨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우리가 바로 이러한 문제를 놓고 생각해봅시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지금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얼마나 가치 있는 말을 하고 있는가, 내가 오늘 주님의 얼굴을 뵙는다면 나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서게 될까, 욥은 여기에 소망의 닻을 내렸습니다.
썩어질 세상, 변하는 인심, 그 변변치 않은 것들을 모두 지워버렸습니다. 다 부정해버리고 마치 순교자처럼 주님의 얼굴만 바라봅니다.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다음 말씀을 봅시다.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어서 올라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천사의 얼굴로 죽을 수가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주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나를 반겨주시는 주님을 보았기에 '나의 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내 앞에는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늘 종말론적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소망은 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실 것입니다. 욥은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하여 밝아지는 소망을 보았습니다. 잡스러운 생각을 깨끗이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 낮에도 별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저것 볼 수 있을 때에는 별을 보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캄캄한 밤에야 비로소 영롱한 별빛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어두움 속에서 별빛을 보듯이 고난 중에 소망을 가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앙적 현실관을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어려운 고난을 다 지내고나면 마치 정련된 금과 같이 내가 더욱 순수하고 강하고 귀하게 될 것이라며 앞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 훈련을 다 겪은 후에 정금같이 나오리라-이것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고난의 문제는 결코 고난의 문제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소망의 문제입니다. 사단은 고통을 통하여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불신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게 하고,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더 밝은 소망의 세계로, 더 높은 소망의 세계로 이끌어 갑니다. 한 수난자의 소망-그는 그 밝은 소망이 있었기에 밝은 현실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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