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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7,537편)〓/곽선희 목사 설교

하나님만 바라라(시편 62:1-8)

by 고동엽.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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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만 바라라(시편 62:1-8)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셀라)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커밍 워크라고 하는 학자는 인간의 성공 요인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은 현대인이라면 다음의 네 가지 요인은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지능, 즉 아이큐(IQ)입니다. 지능이 낮으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현대는 '지능과 지능의 경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지능이 기본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지식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공부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성공을 하려면 필요한 많은 지식을 두뇌에 입력해서 축적시켜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기술입니다. 누구보다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지식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실천능력이 없으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런 능력을 몸에 익히고 실천에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기술은 창조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지능과 지식에 겸하여 고도의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태도(자세)입니다. 워크는 이 네 가지 요인 가운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에 적어도 93퍼센트 이상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네 번째 요인인 태도(자세)라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저것 다 차치하고,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자세입니다. 환경이나 자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은 어떤 자세로 사느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우선,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거짓되면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성실과 진실이 바른 자세의 기본입니다. 또한 긍정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긍정적 생활을 해야 합니다. 모두가 다 가능하다고 보는데 유독 자기만 불가능하다고 우기는 사람, 모두가 다 바르게 보는데 유독 자기만 삐딱하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제불능의 사람입니다.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만사를 어둡게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어떤 성공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긍정적 생활태도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이 감사를 낳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며 족하게 여기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고마워하는 마음은 겸손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어 온유하고 겸손해질 때에 고마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성공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나아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개인이건 민족이건 간에 신의가 없어지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믿는다는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한 이태 전에 모스크바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보통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에는 그 수속절차가 간단합니다. 그 나라의 대사관 직원과 마주 앉아서 그냥 간단히 끝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근간에는 아예 아무런 절차도 없이 그저 여권 하나 달랑 보여주고 지나가면 되는 곳도 있습니다. 점점 이렇게 자유스럽고 편하게 입출국을 하는데, 유독 모스크바에 들어갈 때에만은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지금은 좀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을 세워놓고 앞뒤로 이리저리 거울을 비춰봅니다. '돌아서 옆을 보라, 뒤를 보라'하는 요구도 있습니다. 이렇듯 의심이 많아요. 마치 무슨 취조라도 당하는 것 같아서 매우 기분이 나빴습니다. 이것도 망조입니다. 사회주의가 무너진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이 불신입니다. 공산주의자는 누구의 말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불신하는 주체가 개인이든 민족이든 간에 어쨌든 불신은 멸망의 선봉임을 잊지 말 것입니다.

철학자 하이디 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두 가지 종류의 사고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calculating thinking'---'계산적인 사고'이다. 이것은 타산적으로 계산하는 생각이며 미리 예상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이렇게 저렇게 예상해보는 사고의 기능이 있다. 또 하나는 'inspirational thinking'---'영감적인 사고'이다. 이것은 현재에서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닌, 미래에서 현재를 보는 소위 '영감'을 말한다. 직감적이고 영감적인 이 사고가 사람에게 지혜를 주고 나아가 창조력을 길러준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현재로부터 미래를 생각하는 것, 오늘 나의 상황으로부터 탈출하여 먼 미래를 전망해보겠다고 하는 것---이러한 예상과 추측은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소망으로부터 현재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소망과 소원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소원이라는 것은 필요에 의해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요, 나 중심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집단주의적이든 개인주의적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생각에서 자기중심적으로 미래를 보는 것을 소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망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에 대한 진실한 자세를 가지고 미래에서 현재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

소망 없는 현실은 참을 수 없는 mechanism에 지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파멸과 진정될 수 없는 불안만 있을 뿐입니다. 현재 누가 잘살고 못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졌느냐 못가졌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바로 미래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미래가 있는 고통이라면 기꺼이 참을 수 있고 미래가 약속된 현실이라면 문제될 것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넉넉하고 안일한 생을 산다 하더라도 내일을 소망할 수 없다면 그는 죽은 사람과 다름없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미래가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고, 죽을병에 걸렸는데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지 못할 일이 있는데 이것을 믿고 있다면 이 또한 예사로 비참한 일이 아니겠습니다.

실례의 말씀입니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정말 답답한 때가 한번 있었습니다. 60년대 초반, 제가 처음으로 미국유학을 떠났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로스앤젤레스에 들렀었는데, 그 때에 그곳에서 평소 잘 아는 어떤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이 자기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이렇습니다. 자신은 한국에 처자식이 버젓이 있는데도 지금은 미국에서 다른 여자와 산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하며 이것저것 애써 변명을 합니다만, 제가 듣고 느끼기에는 그저 '한 가정이 딱한 지경에 놓였구나'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분과 헤어진 뒤에 저는 비행기를 타고 우리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난 그 사람의 부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알고 보니 남편을 줄곧 기다리기만 하다가 영 소식이 없자, 직접 저에게 남편의 근황을 물어 보러 온 것입니다. "미국에서 제 남편을 만나셨을 텐데, 그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건강은 괜찮아보이던가요?"하고 자꾸만 물어봅니다. 생활비도 안보내주는 무관심한 남편에 대해 불평도 합니다. 세상에 제 마음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남편은 이미 자기를 떠나 딴 여자와 살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마냥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생활비가 다 뭡니까? 다 쓸데없는 얘기입니다. 바랄 것도 없는데 바라고 있고,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부인이 참으로 불쌍하고 안됐다 싶었습니다.

여러분, 못믿을 것을 믿는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아무 믿을 가치도 없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진작에 알았어야 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깨달아봐도 소용없습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믿을 것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믿었던 것이 착각이었습니다. 소망할 가치가 없는 것을 소망하고 있는 것처럼 허무한 일이 없습니다. 별것 아니었다는 것을, 소망할 가치가 없었다는 것을 오늘에야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허무한 것입니다. 미리부터 생각을 했었더라면 적어도 절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못믿을 것을 믿었기 때문에 절망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말씀의 기자인 다윗왕은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습니다. 베들레헴의 양치는 목자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최고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또한 그는 사울왕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한 충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휘하의 신하들에게 배신당하는 아픔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인 자기를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는 뼈아픈 슬픔도 겪었습니다.

자기가 믿었던 나라, 자기가 믿었던 친구, 자기가 믿었던 신하가 전부 배신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많은 사건과 시련 속에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세상에 믿을 것은 하나도 없구나. 처음부터 믿어야 할 것이 못되었던 것을 내가 믿었었구나'하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보세요.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그의 마음은 고요해질 수 있었습니다.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진리를 진실하게 받아들일 때에 그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노년에 시편 62편을 썼다고 합니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 믿을 것이 못되는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었습니다.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인생, 흔들리는 담장 같은 인생, 아무것도 아닌 인생,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쫓아다녔던가? 내가 나를 생각할 때에도 믿을 것이 못되는데 다른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하는 세상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담담하게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1절)"---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외침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육체입니다. 다른 것이 다 흔들린다 해도 건강만은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이 건강마저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그는 말합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다 흔들리고 다 병들어도, 나의 영혼아 너만은 건강하고 건실하게 바로 서 있어다오'라고 말입니다. 영혼의 자세만은 바르게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낙심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미련을 가지려하는 자기 심리적 성향을 향하여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못 믿을 것을 왜 믿으려고 하느냐, 믿지 못할 것인 줄 알았으면 아예 체념할 것이지 새삼스럽게 왜 세상을 향하여 마음을 기울이고 있느냐 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인 시편 62편을 통하여 다윗은 영혼의 독립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영혼이 스스로 서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하고 자기 자신을 향하여 꾸짖으며 태도를 분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하고 외칩니다. 여러분, 잠잠하라는 말은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무슨 조그마한 일만 생겨도 누구에게 얘기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뭐가 좀 나아질 줄 알지만 보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얘기할수록 점점 더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여러분, 슬플 때에라도 말 않고 가만히 있으면 슬픔이 조금씩 사라집니다. 그런데 슬프다고 자꾸 이야기를 해보십시오. 그럴수록 오히려 슬픈 느낌이 되살아납니다. 점점 더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말을 해버리면 시원하다고 하지만 말은 하면 할수록 마음만 점점 복잡해집니다. 그런고로 일단은 입다물고 조용해집시다. 침묵합시다. 어느 누구에게 얘기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도 아니요, 소리친다고 해서 해결될 것도 아닙니다. 그런다고 풀릴 수 있는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다윗은 말씀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5절)." 입을 다물고 잠잠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잠잠하라'라는 말은 변명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논리를 잠재우라는 것입니다. 격정을 잠재우라는 것입니다. 한에 맺히고, 원한에 사무치고, 욕심에 차 있고, 변명에 차 있는 속에서 하는 말은 우리를 점점 더 고통스럽게 할 따름입니다. 나아가 이렇게 한에 맺히고 격정이 싸이고 보면 기도도 못하게 됩니다. 기도한다고 해도 그것은 진정한 기도가 못됩니다.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몸부림을 치는 것을 어찌 기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 조용해지라는 말씀입니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있느냐고 묻지 말 것입니다. 누구 때문이라고도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조용히 하나님만 바랄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여유를 드리기 위하여 네 이성을 제한하라.' 여러분, 이성의 추리능력, 이성의 비판능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궁리하다보면 끝없이 뻗어나갑니다. 그러다가 이상한 꿈이라도 꾸고 나면 꿈과 현실을 혼동합니다. 갈수록 복잡해집니다.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모든 생각을 멈추라는 말씀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판단을 중지하라.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아라. 일단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하나님을 보아라'하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육십만 대군중 이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광야로 나섭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믿었고 백성은 그러한 모세를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들은 모세가 인도하는 대로 그저 따라 갈 뿐입니다. 그런데 가고 보니 그 길이 막다른 길이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놓여 있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뒤쫓아옵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은목숨입니다. 독 안에 든 쥐입니다. '아이고,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하며 원망과 불평이 절로 나옵니다. 모세보고 마구 소리를 지릅니다. "애굽에 공동묘지가 모자라더냐? 왜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그래, 우리가 뭐라고 하였더냐? 진작에 우리를 그냥 놓아두라고, 인도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하며 원성이 자자합니다. 할말 못 할말 다합니다. 여러분, 그 때에 모세가 한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조용하라. 하나님께 무어라 말하지 말라. 시비를 가리지 말라.

조용히 하나님만을 쳐다보아라'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열어 이스라엘 백성을 그 위기에서 구원하십니다. 여러분, 걱정에 매여 있습니까? 한이 있습니까? 원망과 불평이 있습니까? 이제는 멈추세요. 그리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능력, 오직 하나님의 지혜, 오직 하나님의 사랑, 오직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믿고 그것만을 바라보세요. 그 약속만 바라고 그 미래만을 전망하세요.

여러분, 우주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더불어 사는 물질입니다. 이 물질의 근원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나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간에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내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조용히 하나님만 바라세요. 나의 생명이, 나의 소망이, 나의 능력이, 나의 영광이 다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세요.

소망은 동사입니다. 형용사가 아닙니다. 소망은 주도력이 아닙니다. 생명력입니다.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라도록 그렇게 구체적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내가 쓸데없는 것을 바라고 있으면 모두 끊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도록, 하나님만 소망하도록 현실적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2차 세계대전 당시 약 육백만 명의 유태인들이 나치에 의하여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포로수용소에서, 지하감옥에서 무참히 학살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그 지하감옥에서 발견된 것이 있습니다. 바람벽에 손톱으로 다윗의 별과 함께 이런 글을 새겨놓은 것입니다. '비록 태양 빛이 비춰오지는 않지만 나는 저기에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비록 지금 사랑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나는 저기에 여전히 사랑이 존재함을 믿는다. 비록 지금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다.' 여러분,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만 의논하고, 하나님께만 기도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우리의 소망은 바로 하나님께로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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