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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뼈를 윤택케 하는 소리(잠언 15:23-33)

by 【고동엽】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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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를 윤택케 하는 소리(잠언 15:23-3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地界)를 정하시느니라 악한 꾀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도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이()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사느니라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독일 격언에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금 잃어버리는 것이다.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은 많이 잃어버리는 것이다.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때 우리는 잘살아보고자 노력했습니다. 돈을 모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명예를 얻기 위하여 발버둥치고, 못할 짓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 돌아보니 그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건강을 해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건강을 잃어보십시오.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고,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돈이니 명예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소위 건강식품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먹으면 좋다는 둥, 저렇게 하면 건강하다는 둥, 얼마나 말이 많은지 그대로 다 된다면 죽을 사람 아무도 없을 것만 같습니다. 참으로 건강하고자 하는 욕망에 끌리어 살아가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모임이나 축하연에서 축배를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하는 대로 '위하여'하고 축배를 듭니다. 그런데 어떤 모임에 갔더니 특이하게도 '이대로'하고 축배를 들어요. 돈도 좀 벌고 살만큼 여유도 좀 생겼는데 이제는 건강이 따라주지를 않습니다. 자꾸 늙어가고 있습니다. 쇠약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발 이대로'하는 마음으로 축배를 드는 것입니다. 서글픈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은혜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의학은 날마다 놀랍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병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발달하고 있으니 불감당입니다. 모두가 건강하고자 하는 욕망에 살아가고 있습니다마는, 사실 깊이 반성해보면 스스로 자기 건강을 해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좋다면 다 먹습니다. 뱀은 물론이고 지렁이까지 먹습니다. 얼마나 뱀을 잡아먹었던지 지금은 수입하기까지 합니다. 아예 뱀 먹으려고 동남아시아까지 일부러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헛된 걸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어느 학자가 동물 수명 산출가설을 내놓았는데 읽어보니 일리가 있다 싶었습니다. 모든 동물을 유심히 관찰해보니 자기 생명의 성장기의 여섯 배를 살더라는 것입니다. 이 가설에 따라 사람의 수명을 산출해보십시오. 여성은 24세가, 남성은 26세가 성장의 peak입니다. 그렇다면 25세까지를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평균기간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수명이 이의 여섯 배라고 하니 사람은 적어도 120년은 살아야 마땅합니다. 120년을 못살았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생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생각해보았습니까? 인명은 재천(在天)이라고만 밀어붙이지 말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생명 위탁성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Life mandate----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생명에 대한 것을 위임하셨습니다. 상당한 분량으로 위임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좀더 쉽게 생각합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모든 것을 갖추어놓으시고 그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신 다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6,1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복잡하게 해석할 것 없습니다. 네 생명 네가 책임져라, 저것을 먹지 않으면 살고 먹으면 죽을 것이니 네가 선택해라 하심입니다. 생명의 위임입니다.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우리에게 암시하심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 이 같은 맥락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왜 생명의 길을 버리고 사망의 길로 가려 하느냐, 생명의 길로 돌아오라---이것이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주제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왜 살기를 바라면서 죽음의 길로 가느냐, 왜 복된 길을 바라면서 망조의 길로 가느냐, 충분히 가르쳐 주었는데 아직도 모르느냐, 아직도 깨달음이 없느냐 하십니다. 신명기 1126절을 보십시오.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복과 저주 두 길을 너희에게 준다, 복도 저주도 네 손에 있다, 네가 선택하는 것이다, 하고 그 선택권을 우리에게 위임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살기를 바라면서 꼭 죽을 짓만 하고, 행복을 바라면서 꼭 불행할 수밖에 없는 짓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살자는 것입니까, 죽자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샬롬에 있고, 우리의 행복에 있고, 우리의 건강에 있고, 우리의 화평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 역사 하실 때에 맨 처음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병고치신 일입니다. 귀신들린 사람 귀신 내쫓아주시고, 죽은 사람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눈에 이런 것들이 보이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보는 바 회당에 손 마른 사람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오늘이 안식일인데 예수가 병을 고치나 안 고치나 하고 시험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괘념치 않으시고 병을 고쳐주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보시고 그냥 지나치시지 못하는, 꼭 고치시고야 마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병자를 고쳤다는 초보적인 것을 생각하지 말고, 보다 원초적으로 근본적으로 돌아가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병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모두가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두가 영생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온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환자의 병을 돌보실 때에 하신 말씀을 보세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5:34)." 여기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영혼의 구원이 아닙니다. 건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살펴보면 구원이 건강과 온전한 인격, 하나님의 자녀됨을 직접 지칭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곧 'wholeness--온전함'을 뜻합니다. 건강과 평안과 자유와 화평과 영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샬롬'입니다.

일반상식으로 보면 건강을 유지하는 여덟 가지 비법이 있습니다. 신선한 공기, 깨끗한 물, 밝은 햇빛, 적절한 휴식, 알맞은 운동, 자연식, 절제, 신앙이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절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몸도 마음도 절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중요합니다. 몇 년 동안 온 세계가 참으로 걱정하는 가운데 2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많이 죽고 죽이고, 쏘고 찌르고 했습니다마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전쟁을 통틀어 칼이나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30만 명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반면에 전쟁의 공포 때문에 심장병을 일으킨다거나 정신질환을 일으킨다거나 하는 후속적인 병으로 죽은 사람이 300만 명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 300만 명은 믿음만 있었더라면 안 죽었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바른 신앙만 가졌더라면 죽지 않았을 사람들입니다. 공포 때문에,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옛날 왕들의 수명을 집중 연구해보았다고 합니다.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생을, 영광을 누렸던 로마황제들을 연구해보니 평균수명이 35세였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왕을 가리켜 천자(天子)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이슬을 받아서 마실 정도로, 불로초를 구하러 사람을 보낼 정도로 부귀영화를 다 누렸습니다마는, 그들의 평균 수명 역시 39.2세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조선시대 왕들도 그 평균 수명은 43.3세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들은 먹는 것으로 말하면 그 이상 먹을 수 없고, 보약으로 말해도 그 이상이 없을 정도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지만 단명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들은 일찍 죽을 수밖에 없도록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했던 것입니다. 요샛말로 스트레스가 쌓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절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건강이 이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려한 생활이나 값비싼 음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건강의 비법을 생각해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충분히 건강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사실 병균도 하나님께서 내신 것입니다.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는 병균을 넉넉히 이기도록, 제어할 수 있도록 인간을 내셨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예수 잘 믿는 어느 부인이 에이즈에 감염된 남편하고 삽니다. 부부생활 다 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 부인, 에이즈에 전염되지 않더랍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한마디 더 할까요? 건강한 남자라면 성병 걸린 여자와 관계를 맺어도 당장에는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단 술을 마시고 관계하면 대번에 걸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건강한 사람이라도 술을 마시게 되면 병에 대한 면역성이 떨어지게 된다는 반증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충분히 건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암세포를 가지고 있답니다. 이것이 어느 때에 몸이 약해지면 감당을 못해 가지고 그만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넉넉히 건강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질서가 무너지고 균형이 깨지면서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병을 'disorder'라고도 합니다. 질서가 잘못 이그러질 때에 병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내과의사의 고백입니다. 내과의사로서 '당신은 지금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앞으로 6개월 정도밖에는 못살 것입니다. 그러니 대비를 해두십시오'하는 말을 하게 될 때에 참으로 괴롭다는 것입니다.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이 일이 제일 고통스럽답니다. 왜입니까? 살겠다고 왔는데 '당신은 죽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니까요. 고치겠다고 왔는데 '고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니까요.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환자를 붙들고 자연히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며 병력(病歷)을 살피게 된답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그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더랍니다. 대부분이 병에 걸리기 얼마 전에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강한 정신적 충격 때문에 잠도 못잔 채 일주일 내내 괴로워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있고 몇 년 후에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 때에 얻어맞은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지 못함으로, 정신적 평온을 유지하지 못함으로, 그 때에 이미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뒤에 육체의 병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건강한 정신이 있고야 건강한 육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영혼에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건강한 영혼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비롯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에 충만하고 감격할 때에 영혼이 건강해집니다. 여러분, 아이들을 키워보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마냥 좋아서 땀을 뻘뻘 홀리며 웃고 뛰놀지 않습니까? 그렇게 웃고 있는 동안은 건강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 꾸중 좀 듣고 몇 시간 울고 나면 틀림없이 며칠 뒤 병에 걸리게 됩니다. 얼마나 예민한지 몰라요. 벌써 사랑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고, 사랑에 대하여 그늘진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병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자세히 가르쳐줍니다. 뼈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뼈에 대하여 상당히 무식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의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니 상식이 부족해서 그렇겠지요. ''하면 그저 우리 몸을 기둥처럼 받치고 있는 것이겠거니,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척추라고 하면 그저 사람이 걸어다니는 데에 필요한 것이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척추가 맑은 피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척추 속에 온 신경이 다 들어 있다고 합니다. 각종 호르몬과 분비물을 척추가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척추가 힘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허리가 시원치 않으면 만사가 다 시원치 않은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 척추가, 이 기둥이 튼튼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수천 년 전에 기록된 것입니다마는 바로 이 문제를 논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잠언 1722절의 말씀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하루에 세 번은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야 한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루종일 있어봐야 웃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니 어디서 건강을 얻겠습니까? 병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도덕성을 잃어버린 웃음은 웃음이 아닙니다. 기생의 웃음은 웃음이 아닙니다. 장삿속으로 웃는 웃음도 웃음이 아닙니다. 영혼의 그 깊은 곳에서부터 활짝 피어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큰 웃음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천사의 웃음이 필요합니다. 온몸이 화끈하게 달아오를 정도로 웃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루 세 번은 웃을 수 있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고야 오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의학적으로 이렇게 설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심을 하다보면 신체 내에 칼슘이 말라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잠언 1430절에 보면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화평이 필요합니다. 용서할 자를 용서하고, 화해할 자와 화해하고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불화한 가운데는 마음의 즐거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하고 나만 웃을 수는 없습니다. 남에게 고통을 주고 나만 이기적인 기분을 즐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뼈가 썩음으로 허리가 구부러지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시기와 질투를 조심할 것입니다. 늘 용서와 화평을 도모해야 건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케 하느니라(30)." '눈의 밝은 것'이란 무슨 말씀입니까? 좋은 소식 가지고 오는 반가운 사람을 만날 때에 우리는 눈이 반짝 뜨입니다. 이것이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뼈를 윤택케한다'라는 말은 이렇습니다. 여기서 '윤택'은 반짝거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윤기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넉넉하다는 뜻입니다. 힘이 넉넉합니다. 뼈가 넉넉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병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은 요한복음 316절 속에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이 가장 좋은 명약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말보다 좋은 약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2장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왔으나 모인 무리가 너무 많아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어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립니다.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처방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기쁨의 소식, 승리의 소식, 용서의 소식, 화해의 소식, 사죄의 소식,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소식, 십자가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해 주신다고 하는 소식---이것이 양약입니다. 이것이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건강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31-33)."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그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뼈를 아주 윤택케 할 수 있는 아주 귀한 말씀이 내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듣는 귀가,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좋은 기별을 온전히 믿고 수용할 때에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2천 년 전 중국의 사가(史家) 사마천이 저술한 많은 책 가운데 사기열전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병에는 다섯 가지 못 고칠 병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나열해놓았습니다. 첫 번째 불치병은 교만해서 도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아무도 고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불치병은 몸을 소홀히 여기고 재물을 즐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몸을 해하면서 돈을 벌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고치겠습니까? 세 번째 불치병은 의식, 곧 철학이 타당치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잘못된 사람은 바로잡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불치병은 음양이 오장에 합병하고, 기운이 불안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기운이 불균형을 이룬 사람은 고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형용까지 쇠약하여 약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깊은 곳에 있는 병이 얼굴에 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계를 넘은 것입니다. 이 병은 못고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불치병은 무당과 박수의 말을 듣고, 의사의 말은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못 고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문제입니다. 이렇게 삐뚤어진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여러분, 건강은 음식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은 정신으로 지켜집니다. 건강한 마음은 건강한 영혼에서 옵니다.

건강한 영혼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옵니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심령이 건강하고, 정신이 건강하고, 몸이 건강하고, 온 인격이 건강한 화평의 사람, 자유의 사람, 희락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될 때에, 충만한 사람이 될 때에 그는 좋은 기별을 전할 수도, 다른 사람에게 건강을 베풀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케 하느니라."  

뼈를 윤택케 하는 소리(잠언 15:23-3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地界)를 정하시느니라 악한 꾀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도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이()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사느니라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독일 격언에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금 잃어버리는 것이다.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은 많이 잃어버리는 것이다.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때 우리는 잘살아보고자 노력했습니다. 돈을 모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명예를 얻기 위하여 발버둥치고, 못할 짓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 돌아보니 그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건강을 해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건강을 잃어보십시오.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고,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돈이니 명예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소위 건강식품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먹으면 좋다는 둥, 저렇게 하면 건강하다는 둥, 얼마나 말이 많은지 그대로 다 된다면 죽을 사람 아무도 없을 것만 같습니다. 참으로 건강하고자 하는 욕망에 끌리어 살아가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모임이나 축하연에서 축배를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하는 대로 '위하여'하고 축배를 듭니다. 그런데 어떤 모임에 갔더니 특이하게도 '이대로'하고 축배를 들어요. 돈도 좀 벌고 살만큼 여유도 좀 생겼는데 이제는 건강이 따라주지를 않습니다. 자꾸 늙어가고 있습니다. 쇠약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발 이대로'하는 마음으로 축배를 드는 것입니다. 서글픈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은혜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의학은 날마다 놀랍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병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발달하고 있으니 불감당입니다. 모두가 건강하고자 하는 욕망에 살아가고 있습니다마는, 사실 깊이 반성해보면 스스로 자기 건강을 해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좋다면 다 먹습니다. 뱀은 물론이고 지렁이까지 먹습니다. 얼마나 뱀을 잡아먹었던지 지금은 수입하기까지 합니다. 아예 뱀 먹으려고 동남아시아까지 일부러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헛된 걸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어느 학자가 동물 수명 산출가설을 내놓았는데 읽어보니 일리가 있다 싶었습니다. 모든 동물을 유심히 관찰해보니 자기 생명의 성장기의 여섯 배를 살더라는 것입니다. 이 가설에 따라 사람의 수명을 산출해보십시오. 여성은 24세가, 남성은 26세가 성장의 peak입니다. 그렇다면 25세까지를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평균기간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수명이 이의 여섯 배라고 하니 사람은 적어도 120년은 살아야 마땅합니다. 120년을 못살았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생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생각해보았습니까? 인명은 재천(在天)이라고만 밀어붙이지 말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생명 위탁성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Life mandate----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생명에 대한 것을 위임하셨습니다. 상당한 분량으로 위임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좀더 쉽게 생각합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모든 것을 갖추어놓으시고 그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신 다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6,1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복잡하게 해석할 것 없습니다. 네 생명 네가 책임져라, 저것을 먹지 않으면 살고 먹으면 죽을 것이니 네가 선택해라 하심입니다. 생명의 위임입니다.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우리에게 암시하심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 이 같은 맥락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왜 생명의 길을 버리고 사망의 길로 가려 하느냐, 생명의 길로 돌아오라---이것이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주제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왜 살기를 바라면서 죽음의 길로 가느냐, 왜 복된 길을 바라면서 망조의 길로 가느냐, 충분히 가르쳐 주었는데 아직도 모르느냐, 아직도 깨달음이 없느냐 하십니다. 신명기 1126절을 보십시오.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복과 저주 두 길을 너희에게 준다, 복도 저주도 네 손에 있다, 네가 선택하는 것이다, 하고 그 선택권을 우리에게 위임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살기를 바라면서 꼭 죽을 짓만 하고, 행복을 바라면서 꼭 불행할 수밖에 없는 짓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살자는 것입니까, 죽자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샬롬에 있고, 우리의 행복에 있고, 우리의 건강에 있고, 우리의 화평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 역사 하실 때에 맨 처음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병고치신 일입니다. 귀신들린 사람 귀신 내쫓아주시고, 죽은 사람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눈에 이런 것들이 보이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보는 바 회당에 손 마른 사람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오늘이 안식일인데 예수가 병을 고치나 안 고치나 하고 시험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괘념치 않으시고 병을 고쳐주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보시고 그냥 지나치시지 못하는, 꼭 고치시고야 마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병자를 고쳤다는 초보적인 것을 생각하지 말고, 보다 원초적으로 근본적으로 돌아가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병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모두가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두가 영생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온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환자의 병을 돌보실 때에 하신 말씀을 보세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5:34)." 여기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영혼의 구원이 아닙니다. 건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살펴보면 구원이 건강과 온전한 인격, 하나님의 자녀됨을 직접 지칭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곧 'wholeness--온전함'을 뜻합니다. 건강과 평안과 자유와 화평과 영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샬롬'입니다.

일반상식으로 보면 건강을 유지하는 여덟 가지 비법이 있습니다. 신선한 공기, 깨끗한 물, 밝은 햇빛, 적절한 휴식, 알맞은 운동, 자연식, 절제, 신앙이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절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몸도 마음도 절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중요합니다. 몇 년 동안 온 세계가 참으로 걱정하는 가운데 2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많이 죽고 죽이고, 쏘고 찌르고 했습니다마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전쟁을 통틀어 칼이나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30만 명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반면에 전쟁의 공포 때문에 심장병을 일으킨다거나 정신질환을 일으킨다거나 하는 후속적인 병으로 죽은 사람이 300만 명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 300만 명은 믿음만 있었더라면 안 죽었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바른 신앙만 가졌더라면 죽지 않았을 사람들입니다. 공포 때문에,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옛날 왕들의 수명을 집중 연구해보았다고 합니다.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생을, 영광을 누렸던 로마황제들을 연구해보니 평균수명이 35세였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왕을 가리켜 천자(天子)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이슬을 받아서 마실 정도로, 불로초를 구하러 사람을 보낼 정도로 부귀영화를 다 누렸습니다마는, 그들의 평균 수명 역시 39.2세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조선시대 왕들도 그 평균 수명은 43.3세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들은 먹는 것으로 말하면 그 이상 먹을 수 없고, 보약으로 말해도 그 이상이 없을 정도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지만 단명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들은 일찍 죽을 수밖에 없도록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했던 것입니다. 요샛말로 스트레스가 쌓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절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건강이 이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려한 생활이나 값비싼 음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건강의 비법을 생각해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충분히 건강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사실 병균도 하나님께서 내신 것입니다.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는 병균을 넉넉히 이기도록, 제어할 수 있도록 인간을 내셨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예수 잘 믿는 어느 부인이 에이즈에 감염된 남편하고 삽니다. 부부생활 다 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 부인, 에이즈에 전염되지 않더랍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한마디 더 할까요? 건강한 남자라면 성병 걸린 여자와 관계를 맺어도 당장에는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단 술을 마시고 관계하면 대번에 걸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건강한 사람이라도 술을 마시게 되면 병에 대한 면역성이 떨어지게 된다는 반증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충분히 건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암세포를 가지고 있답니다. 이것이 어느 때에 몸이 약해지면 감당을 못해 가지고 그만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넉넉히 건강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질서가 무너지고 균형이 깨지면서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병을 'disorder'라고도 합니다. 질서가 잘못 이그러질 때에 병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내과의사의 고백입니다. 내과의사로서 '당신은 지금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앞으로 6개월 정도밖에는 못살 것입니다. 그러니 대비를 해두십시오'하는 말을 하게 될 때에 참으로 괴롭다는 것입니다.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이 일이 제일 고통스럽답니다. 왜입니까? 살겠다고 왔는데 '당신은 죽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니까요. 고치겠다고 왔는데 '고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니까요.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환자를 붙들고 자연히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며 병력(病歷)을 살피게 된답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그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더랍니다. 대부분이 병에 걸리기 얼마 전에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강한 정신적 충격 때문에 잠도 못잔 채 일주일 내내 괴로워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있고 몇 년 후에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 때에 얻어맞은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지 못함으로, 정신적 평온을 유지하지 못함으로, 그 때에 이미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뒤에 육체의 병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건강한 정신이 있고야 건강한 육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영혼에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건강한 영혼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비롯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에 충만하고 감격할 때에 영혼이 건강해집니다. 여러분, 아이들을 키워보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마냥 좋아서 땀을 뻘뻘 홀리며 웃고 뛰놀지 않습니까? 그렇게 웃고 있는 동안은 건강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 꾸중 좀 듣고 몇 시간 울고 나면 틀림없이 며칠 뒤 병에 걸리게 됩니다. 얼마나 예민한지 몰라요. 벌써 사랑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고, 사랑에 대하여 그늘진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병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자세히 가르쳐줍니다. 뼈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뼈에 대하여 상당히 무식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의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니 상식이 부족해서 그렇겠지요. ''하면 그저 우리 몸을 기둥처럼 받치고 있는 것이겠거니,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척추라고 하면 그저 사람이 걸어다니는 데에 필요한 것이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척추가 맑은 피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척추 속에 온 신경이 다 들어 있다고 합니다. 각종 호르몬과 분비물을 척추가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척추가 힘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허리가 시원치 않으면 만사가 다 시원치 않은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 척추가, 이 기둥이 튼튼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수천 년 전에 기록된 것입니다마는 바로 이 문제를 논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잠언 1722절의 말씀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하루에 세 번은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야 한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루종일 있어봐야 웃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니 어디서 건강을 얻겠습니까? 병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도덕성을 잃어버린 웃음은 웃음이 아닙니다. 기생의 웃음은 웃음이 아닙니다. 장삿속으로 웃는 웃음도 웃음이 아닙니다. 영혼의 그 깊은 곳에서부터 활짝 피어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큰 웃음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천사의 웃음이 필요합니다. 온몸이 화끈하게 달아오를 정도로 웃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루 세 번은 웃을 수 있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고야 오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의학적으로 이렇게 설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심을 하다보면 신체 내에 칼슘이 말라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잠언 1430절에 보면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화평이 필요합니다. 용서할 자를 용서하고, 화해할 자와 화해하고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불화한 가운데는 마음의 즐거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하고 나만 웃을 수는 없습니다. 남에게 고통을 주고 나만 이기적인 기분을 즐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뼈가 썩음으로 허리가 구부러지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시기와 질투를 조심할 것입니다. 늘 용서와 화평을 도모해야 건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케 하느니라(30)." '눈의 밝은 것'이란 무슨 말씀입니까? 좋은 소식 가지고 오는 반가운 사람을 만날 때에 우리는 눈이 반짝 뜨입니다. 이것이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뼈를 윤택케한다'라는 말은 이렇습니다. 여기서 '윤택'은 반짝거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윤기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넉넉하다는 뜻입니다. 힘이 넉넉합니다. 뼈가 넉넉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병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은 요한복음 316절 속에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이 가장 좋은 명약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말보다 좋은 약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2장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왔으나 모인 무리가 너무 많아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어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립니다.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처방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기쁨의 소식, 승리의 소식, 용서의 소식, 화해의 소식, 사죄의 소식,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소식, 십자가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해 주신다고 하는 소식---이것이 양약입니다. 이것이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건강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31-33)."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그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뼈를 아주 윤택케 할 수 있는 아주 귀한 말씀이 내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듣는 귀가,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좋은 기별을 온전히 믿고 수용할 때에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2천 년 전 중국의 사가(史家) 사마천이 저술한 많은 책 가운데 사기열전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병에는 다섯 가지 못 고칠 병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나열해놓았습니다. 첫 번째 불치병은 교만해서 도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아무도 고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불치병은 몸을 소홀히 여기고 재물을 즐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몸을 해하면서 돈을 벌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고치겠습니까? 세 번째 불치병은 의식, 곧 철학이 타당치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잘못된 사람은 바로잡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불치병은 음양이 오장에 합병하고, 기운이 불안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기운이 불균형을 이룬 사람은 고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형용까지 쇠약하여 약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깊은 곳에 있는 병이 얼굴에 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계를 넘은 것입니다. 이 병은 못고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불치병은 무당과 박수의 말을 듣고, 의사의 말은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못 고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문제입니다. 이렇게 삐뚤어진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여러분, 건강은 음식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은 정신으로 지켜집니다. 건강한 마음은 건강한 영혼에서 옵니다.

건강한 영혼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옵니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심령이 건강하고, 정신이 건강하고, 몸이 건강하고, 온 인격이 건강한 화평의 사람, 자유의 사람, 희락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될 때에, 충만한 사람이 될 때에 그는 좋은 기별을 전할 수도, 다른 사람에게 건강을 베풀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케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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