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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기독교, 삶을 떠나다2

by 【고동엽】 2021. 10. 2.
기독교, 삶을 떠나다
1. 2 세기, 최초 신학 형성 배경
성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役事에 대한 증언 입니다. 신이 땅으로 오셔서 우리 삶 가운데서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현실에 우리가 참여하여 사랑과 평화, 새 생명을 얻는 게 구원 입니다. 우리는 현실 삶에서 구원받고 궁극구원을 향해 갑니다. 현재 구원이 없으면 미래 구원도 없습니다. 부산간다는 사람이 차도 안타고 어떻게 부산간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해서 우리 구원이 이 땅 삶을 버리고 영혼구원과 내세 천국구원이 되었는지 아는 게 우리 목표 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유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토양에서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는 철저히 현실 삶 구원 입니다.
AD 70 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파괴되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로마제국은 법과 질서는 로마체계를 따랐지만
문화, 교육, 철학 등은 그리스 체계를 따랐습니다. 로마 귀족 자녀 가정교사는 모두 그리스인이었습니다.
초기 교부들은 모두가 그리스 철학자거나 로마 관리 출신입니다.
기독교 유대 지식인은 성서 시대로 끝나고, 그리스 문화권 지식인이 초기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 사역과 가르침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나라 사상 중요성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 사역과 가르침이 그리스 철학과 어떻게 다른지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세대 가치를 따르지말고 하나님 뜻을 분별하라(로마12:2)는 바울 가르침은 무시되었습니다.
아직 신약성서가 정립되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 입니다.
근대가 오기까지 신학과 철학은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철학은 현실(실존)이 중요한지 본질(관념)이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이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혼구원과 내세천국이 믿음이된, 현실 삶보다 본질(관념)이 중요하게된 철학 배경을 살펴봅니다.
플라톤(BC 427 - 347)
눈에 보이는 현실은 천상 관념(IDEA)의 그림자 입니다. 생명 탄생은 천상에서 레테강(망각강)을 건너오며 천상 기억을 잊습니다.
그는 인간 현실을 동굴 비유로 설명합니다.
동굴에 사는 속박된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실체'의 '그림자'이지만, 그것을 실체라고 믿고 있습니다. 동굴 밖에서 '실체'를 옮겨가는 사람들 소리가 동굴 안쪽에 영향을 미치고, 이 영향에 대한 믿음은 확신으로 바뀝니다. 똑같이, 우리가 현실에 보고 있는 것은 이데아(관념)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다고 플라톤은 생각합니다.
즉, 세상 만물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고 동굴 밖에 '실체'가 존재하며 인간은 그 '실체'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원은 천상에 가야 있습니다.
플라톤 가르침에 따르면 실존은 비실재 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그림자에 불과한 가짜라는 겁니다. 실존은 비실재, 오류, 악으로서 그림자에 불과하고, 실재, 진리, 선은 관념(IDEA) 혹은 본질 영역에서 발견되고, 현실에선 빈약한 근사치에 불과합니다.
플라톤에게서 실존이란 본질 영역이 타락한 존재 입니다. 실존(현실)에 대한 부정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 중재 시도에도 고대와 중세에 지속되었습니다.(*1)
삶과 괴리된 지성주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어떤 사물이 참으로 무엇인가하는 것은 그것의 정의(definition)에 의해 밝혀진다고 가르치면서부터 입니다.
실재는 삶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본질(관념)로 이루어졌고, 우리가 정의(개념)를 앎으로서 사물 본질을 안다고 합니다.(*2)
본질을 추구하는 일원론과 전체주의는 반드시 소외가 발생합니다.
이것이 예수시대에 유대인들의 과도한 신앙주의가 소외를 발생시킨 이유 입니다.
1 세기 이스라엘은 극도로 분열되어 멸망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십니다. 저들이 하나님나라가 왔음을 모르기 때문에 평화를 모른다고 하시며 우십니다.(누가19:41 - 44)
예수께서는 이 우울한 국가에 사랑과 평화 그리고 새 생명을 일으켰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정체성을 다양성 존중 안에서 지켜가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우라고 합니다.(로마15:2 새번역)
아리스토텔레스(BC 384 - 322)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는 실제적 입니다. 그는 신 섭리를 믿지 않았고 영혼 불멸설도 믿지 않았습니다.(*3)
그는 감각계 질료(재료)와 본질계 형상을 구분합니다. 그도 스승 플라톤과 같이 질료가 실재가 아니라 형상이 실재 입니다.
기독교는 신이 사랑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이 최고 선善, 그리고 부동不動의 원동자 原動者 입니다.
후에 스토아 사상과 결합된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에 유입되어 도덕과 성화가 맹위를 떨치게된 효시 입니다.
그가 가르친, 사물은 '영속성'을 갖는다는 운동 법칙이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신학에서 구원 단계로 차용됩니다. 토마스는 구원이 인간 정화 - 신 조명 -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순서를 갖는다고 합니다.
1. 토마스 죄 용서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회개 전에 용서하는 사역과 그렇게 설교한 바울과 다릅니다(사도13:38)
신 조명 전에 인간 정화가 먼저인 것은, 베드로가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용서받으라고 설교한(사도2:38) 것과 같습니다.
회개하고 용서 받는다는, 회개가 먼저라는 사실은 유대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와 사상이 주장하는 사유 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리와 죄인을 회개 전에 먼저 용서하시고, 그 다음에 회개를 요청하셨습니다.
가톨릭은 베드로와 토마스 아퀴나스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하고, 개신교는 바울과 루터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2. 토마스 구원 순서와 개신교 7 단계 구원 서정(순서)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유래했습니다. 구원 순서(서정)는 성서에 없고 순전히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슬람에 먼저 수용되었다가 이슬람의 스페인 지배시에 서방으로 유입되었습니다.
에피쿠로스(BC 341 - 270)
에피쿠로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반대로 본질에 대해선 관심 없습니다. 지금 땅이 실재고 어떻게 사느냐가 관심 입니다.
그래서 그는 플라톤을 위선자라고 비난합니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을 따르면서 그를 구원자(소테르)라고 불렀습니다. 삶에 대한 긍정과 방향성을 가르쳤기 때문 입니다.
구원자라는 말은 로마 황제를 구원자라 부르기 전에 에피쿠로스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에피쿠로스를 구원자라고 부른 이유는,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구원자)라고 부르는 이유와 같은 이유 입니다.
그는 삶 목적을 쾌락(hedon)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쾌락이 아닙니다.
물질에 의한 쾌락이 아니라 정신 의미에서 쾌락인 평정심(atraxia) 입니다. 평정이란 번뇌를 떠난 마음 상태 입니다.(*4)
그의 저서 쾌락을 보면 일탈이나 퇴폐는 전혀 없습니다. 요즘말로 소확행 입니다.
피타고라스학파와 견유학파 등은 플라톤 사상을 따르며 철저히 금욕주의를 택했습니다. 당시 모든 지성인들은 금욕주의자 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철저히 외면되었습니다.
초기 교부들이 예수께서 일으킨 삶의 기쁨과 평화를 몰랐기 때문에 에피쿠로스 철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플라톤 사상을 따르면서 에피쿠로스는 과도하게 비난 대상이 되었습니다.
초기 교부 유스티누스(Justin 120 - 190)는 그리스 철학에서 기독교로 전향한 사람 입니다.
그는 플라톤의 선 아데아를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인간 죽음 후의 보상과 벌은 플라톤주의와 조화 입니다.(*5)
지성을 통해 대중을 다스리려면 신화와 이미지 영역인 관념을 통해서가 제일 입니다.(*6) 지식인은 대중이 잘 모르는 사실로 권력을 유지합니다. 학자들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모두가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 입니다.
스토아 윤리가 나오기까지는 플라톤 사상에 윤리는 없습니다. 초월 존재를 확신하는 건 믿음이라할 수 없습니다. 그 초월이 우리 말과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믿음 입니다.(*7)
하나의 관점이 진리인지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는 실제 생활에 해당 관점이 어떠한 영향을 주느냐에 있습니다.(*8)
표현 진정성은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느껴야 합니다.(*9)
기독교는 신학 중심을 우주 생성과 영혼구원에 집중하여, 신앙생활에서 삶의 이상 추구 갈망이 사라졌습니다.(*10)
예수그리스도는 삶을 긍정하여 부정과 정결, 선과 악 차이를 허물고 우리를 사랑과 평화, 새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비록 고생과 근심 속에 살지만 그분이 인도하는 화해와 평화 삶을 향해 갑니다.
그러나 플라톤 철학은 이 땅 삶을 부정하고 피안을 동경하는 사상으로서 부정과 정결, 선과 악을 구별하여 부정과 악을 차별하고 배제합니다. 자기 혼자 선하다는 그 길은 혼자이거나 주위에 몇 사람 있는 정도로서 갈등과 불화로 가는 길 입니다. 결국 나를 파멸로 인도합니다. 강남 대형교회들 부패를 보면서 부정과 악을 배척하는 경건 운동을 펼친 전광훈 목사가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예수그리스도와는 정 반대 입장 입니다.
신학 정립시에 플라톤 철학을 받아들인 기독교는 예수 사역과 가르침이 신앙생활에 자리 매김할 수 없는 신학이 되었습니다.
다음회에 기독교로 유입된 신플라톤주의와 초기 교부들을 살펴봅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1. A J 맥컬웨이 폴 틸리히 조직신학 요약과 분석 한재범 김재현 한들출판사 서울 2020, 207p
2. 조상식 윌리엄 제임스 문음사 서울 2005, 214p
3. 에띠엔느 질송 중세철학입문 강영계 서광사 서울 1987, 16p
4. 같은 책, 18p
5. 같은 책, 28p
6.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조은경 알마출판사 서울 2017, 189p
7.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강주헌 모멘토 서울 2010, 150p
8. 윌리엄 제임스 허버드 철학수업 이지은 나무와 열매 서울 2020, 44p
9.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심리철학적소견들2 이기흥 아커넷 서울 2013, 226p
10. 돈 큐빗 문명의 위기와 기독교의 새로운 대서사 안재형 한국기독교연구소 고양시 2020, 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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