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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2,922편)〓/치유 설교

영원한 생수

by 【고동엽】 2021.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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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수

요한 복음 4:1-14

 

헬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해서 자연의 합리적 설명을 최초로 시도했습니다. 사실 지구의 3/4는 물입니다. 바다, 빙하, 호수, 하천들이 지구의 대부분을 덮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체도 70%가 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물은 소중하지만 우리들은 물의 고마움을 잊고 사는 일이 많습니다.

 

미국 엘 에이 근교에 페이지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옛날에 살던 사람들의 유골과 비참한 모습을 그려 놓고 있습니다. 원래 이곳은 비가 많이 오는 풍요한 곳이 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게 되였습니다. 사람들은 먹을 물을 찾기 위해 땅을 파고 자꾸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땅에 매몰되어 버렸는데 그것을 파서 전시해 놓은 곳이 이 박물관입니다.

 

물이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물이 없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물이 없는 곳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물의 고마움을 모르고 삽니다. 오히려 작은 이익을 위해 물을 오염시키고 강을 죽이고 바다를 죽입니다. 우리가 값을 칠 수 없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 안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말 값이 있는 것은 값이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들의 건강, 우리의 가정, 모두 귀중한 우리들의 값을 칠 수 없는 재산들이요 우리들의 생명을 지키는 보배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보배로운 것들을 소홀히 취급을 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서구 사회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멸망을 면할 것입니다. 그 하나는 이혼이요 또 하나는 아편과 술의 중독입니다. 유럽의 가정은 70%가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득실거리고 자살하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은 안내원이 설명하는 안내의 말을 일일이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이 관광을 할 때는 설명은 잘 듣지 않고 먹고, 말하고 떠듭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더 일을 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는 식의 관광을 합니다. 우리는 녹초가 죽도록 구경을 합니다, 그리고 그 휴가의 여독 때문에 며칠씩 일을 제대로 못합니다.

 

이상한 것을 보고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까? 역사적 교훈이 중요합니까? 노는 것이 중요합니까? 건강이 더 중요합니까? 사진을 찍어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 잘난 얼굴을 꼭 한 가운데 넣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설악산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그 아름다운 경치를 찍지 않고 그 아름다운 경치 한 가운데 늘 보는 그 얼굴을 2/3정도 디밀고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설악산에 갖다 왔다고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무엇이 중요합니까? 물은 아주 중요합니다. 물이 없으면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주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말씀을 생수로 비유하여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우물로 물을 기르려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깊고 오묘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가 참으로 좋습니다. 목이 말라 물을 기르려 온 사람에게 "육체를 위한 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수를 주마. 육신을 물은 조금 있으면 다시 목이 마를 것이지만 내가 주는 영원한 생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니라" 얼마나 멋있고 귀한 말씀입니까?

여인은 진실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은 한 동이의 물이 아니라, 영혼을 풍요하게 해 주는 하나님의 은총이 였습니다. 그 여인의 갈증은 육신적인 갈증이 아니라 영혼의 갈증이었던 것입니다.

 

영국의 극작가 엘리어트는 인간은 알게 모르게 5가지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자기 사랑입니다.

즉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주의에 깊이 빠지게 되면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없는 정신없는 사람이 됩니다. 나만 생각하는 비참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주위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자기만을 생각하고 살았는데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둘째는, 근심의 감옥입니다.

걱정처럼 불필요한 일은 없습니다. 쓸데없는 일로 걱정하느라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하여 인격이 파괴되고 질서가 흩어집니다.

셋째는, 과거를 생각하는 향수입니다.

과거라는 것은 이미 지난 일입니다. 젊었을 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그 때 그 사람과 만나지 말아야 하는 건데, 다 부질없고 쓸데없는 생각들입니다. 잘못되었든, 후회롭든 지난 일들에 매여 현재를 그르치고 장래를 망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넷째는, 남의 것만 좋게 보이는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 처지는 나쁘고 남의 처지만 좋게 보이는 것입니다. 내 아내는 못나고 남의 아내는 잘나 보이는 것입니다. 내 것은 다 시원치 않고 남의 것만 모두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처럼 못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는 증오의 감옥입니다.

시기와 질투,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불꽃은 자기도 태우고 다른 사람도 태웁니다.

 

본문의 여자, 참으로 불행한 여자입니다. 4장 전체에 걸쳐서 이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사마리아 사람으로 스스로 이방인이라는 열등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자기 행복만을 추구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남자를 자꾸 갈면 행복할까 하여 여러 번 결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8]" 이미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하여튼 사는 것이 정상이 아닌 복잡한 여인입니다. 이 여자의 생각은 우리 나라 여자들의 정통적인 사고 방식과 흡사합니다. 여자는 남편을 잘 만나야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결국 실패를 했습니다. 이제는 남의 남편을 빼앗아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진정한 행복은 사람에게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쨌거나 불행한 여인입니다. 세상에, 남자들에게, 물질에, 명예에 마음을 붙일 수 없는 여인입니다. 잘 살아 보려고 애를 쓰고, 행복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지만 이제 와서 남은 것이라고는 실패와 좌절과 불행 받게 없는 여자입니다.

이렇게 살다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의 조소 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를 만나신 것은 제 6시였습니다. 유대의 제 6시는 우리의 낮 12시입니다. 유대의 한 낮은 무섭게 햇빛이 내려 쪼이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낮에 활동을 하지 않고 서늘할 때 활동을 합니다. 이 여자는 서늘한 시간이 싫습니다. 많은 사람의 눈에 뜨이는 것이 싫습니다. 물은 안 마시면 죽은 것이니까 물을 기르려 오기는 하지만 짜증이 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물을 달라 하시는 예수님에게도 짜증 섞인 반응을 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물 한 그릇 떠 주는 것도 귀찮아합니다. 사람들에게 조금도 호감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시비를 하려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하실 때 이 여자는 자기 생각에만 골몰하여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기르려 오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합니다. 주님은 그에게 생명의 말씀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그 여자는 물 기르려 오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자기 식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집착해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은 그 여인을 만나시고 말씀을 주시고 그 여자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은혜를 주시므로 그 여자는 변화를 받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데 있어 주님에 대한 종합적 인식이 필요합니다. 많은 시간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여러 해 동안 주님을 따라 다닌 것도 아닙니다. 단 한번 주님을 만남으로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변화가 되었느니 여인을 물동이를 놔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요 4:29]"라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이 말을 할 때 이미 죄 용서를 받은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일을 고백합니다. 죄용서 받고, 구원의 확신을 얻고,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이 여자는 물을 기르려 왔다가 뜻밖에 놀랍고 큰 감격적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여자에게 가르치신 것은 죄용서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확신만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 수 있는가를 가르치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새로운 인생살이의 방법을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시간과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를 가던 주님을 만나는 곳이 예배 장소요,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예배 시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첫 사랑의 경험을 하고 그 감격을 회상하고 사는 것은 그 첫 경험을 얻었을 때의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는 엄청난 충격적인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 더위에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물을 기르려 왔는데 그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자기 동네로 뛰어 갈 정도의 감격이 그 여인에게 있었습니다.

 

영적인 시원함을 얻는 순간, 육적인 목마름도, 육체의 피곤도, 보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던 사람들도, 극도의 좌절과 실망과 자격지심도 모두 아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만난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아니냐"하고 미친 듯이 돌아다닙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진실히, 열정적으로, 감동적으로 이 사실을 전했으면 그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여자의 말을 듣고 모두 예수님에게 나왔겠습니까? 이 여자의 마음에는 예수님에게 받은 은혜의 감동이 그대로 살아 넘쳐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또 그대로 전가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자 존. 뉴턴은 원래 선장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파는 잔인한 노예 상인이 됩니다. 그러다가 누구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었으며 평생 이 노래 속에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삽니다. 그는 죽기 전에 스스로 이런 묘비를 만들었습니다. "존. 뉴톤! 그는 한 때 하나님을 부인하고, 방탕에 빠졌으며, 노예를 매매하던 사람이 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 자시요,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로 보호되고 회복되고 죄 용서를 받은 사람입니다."

 

성 아우그스티누스도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절대 공간이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세상의 어떤 것도 채울 수 없는 영혼의 공간이 있는 것입니다. 그 공간은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명예도, 지식도, 돈도 아무 것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영혼의 공간을 채움 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목마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 두 눈을 잃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수술을 하는데 발악을 하면서 '소경이 되어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라고 했습니다. 회복이 되어 붕대를 풀면서 의사가 '자네는 소경이 아닐세. 어떤 분이 한 눈을 주어 한 눈은 볼 수 있다네' '나는 애꾸눈이 되기 싫니 나를 죽이시오' 붕대를 풀자 희미한 눈동자 앞에 한 눈이 없는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청년은 울면서 '어머니 다시는 불평하고, 절망하지 않고 열심히 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 주님 앞에 절망이나 불평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 인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길, 십자가의 사랑을 똑바로 아는 길, 십자가 안에서 주님과 나와의 만남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이 될 때 우리들의 갈증은 해소됩니다. 이 후로는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살이 짜증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행복을 찾아 쓸데없이 헤매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언제나 감사하고 생기가 넘치는 발랄하고 행복한 삶을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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