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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2,922편)〓/치유 설교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by 【고동엽】 2021.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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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요한 복음 16:16-24

 

미국 뉴저지 주에 웨스트오랜지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에 유명한 토마스 에디슨의 실험실이 있습니다. 1914년 12월 어느 날, 이 실험실에 불이 나서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에디슨이 60년간 다루어 온 연구 재료, 연구 결과, 그리고 당시 200만 달러 (22억원)에 해당되는 연구 시설물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리려 아버지에게 온 아들 찰스의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어떻게 설명을 할지, 어떻게 아버지를 위로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러나 간신히 이 사실을 전한 아들에게 에디슨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찰스야, 네 어머니를 찾아오너라. 평생에 두번 다시 볼 수 없는 구경을 하려 가야 하겠다." 67세가 된 노인 에디슨은 아내와 함께 불이 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다 타 버린 실험실을 보면서 태연히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 재난에는 위대한 가치와 교훈이 있소. 우리의 모든 과오는 이렇게 불타 버렸오. 이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이 말씀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다른 것을 언제나 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으며,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다른 사람이 절망할 때 함께 절망하고, 다른 사람이 분노할 때 함께 분노하고, 다른 사람이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는 정도로는 뛰어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경청하는데 신앙의 터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깊은 것을 봅니다. 곁으로 나타나는 일들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봅니다. 늘 미래를 봅니다. 지금 이 시간에 당하는 사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다음에 생길 일, 1년 후, 5년 후, 10년 후를 봅니다. 아니 더 먼 미래를 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보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 주석가인 월리암 바클레이는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성지를 무려 백번이나 여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분은 확실한 고증과 증거로 성경을 해석한 훌륭한 학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여행자가 바클레이를 찾아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귀한 책들을 많이 쓸 수 있었습니까?" 이 때 그 분은 빙그레 웃더니 귀에서 보청기를 꺼내 보였습니다. "나는 이 보청기가 없으면 전화 밸 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귀가 어둡습니다. 이것을 빼 놓고 앉아 있으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덕분에 저는 열심히 책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고 집중적으로 연구에 몰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저술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출강하는 어느 대학이나 강의에도 결코 결강을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어려운 일, 불행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 어디로 인도하시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의 시각에는 신앙인 에게는 불행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늘 나의 행복, 나의 불행 등에 신경을 쓰고 마음을 씁니다만, 사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현재의 평안함. 지식, 지위의 고하에 마음을 쓰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 적인 약속, 저 앞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는 사람이 더 훌륭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세 가지로 비유하여 말했습니다. 그는 인생을 모든 사람이 다 같이 하나의 배를 타고 먼 여행을 떠난 것으로 비유하고 말을 시작합니다.

첫 번째의 사람은 배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배 안에서 먹고 마시는 일에만 전심 전력합니다. 먹을 것이 많으면 만족해하고 먹을 것이 없으면 불행해 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배가 어디로 가는지는 관심이 없으나 주변의 경치를 구경하는 일에는 열심히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날씨가 화창하고 좋은 경치가 전개되면 좋아하다가도 날씨가 궂고 배가 흔들리면 죽느니 사느니 원망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배의 행선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세 번째의 사람은 배가 가는 방향을 생각하고 최종 정착지를 생각합니다. 그 길로 가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이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자기에게 맡겨진 대로 열심히 노를 젓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세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어느 편에 속한 사람입니까? 역사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 온 발자취를 말합니다. 역사는 세계사도 있고 국사도 있지만 교회사도 있고 개인의 역사도 있습니다. 신앙인 은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사람이 역사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되여 있습니다.

역사 의식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용기를 가지지 못합니다. 역사 의식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바를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 만족이나 주변의 경치에 의해 감정적으로 모든 일을 생각하고 처리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까운 인생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마지막 거두는 것은 후회와 가치 없는 삶의 흔적뿐입니다. 사람들은 무가치한 삶의 흔적을 역사라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특이합니다. 무의미한 시간의 윤회가 아닙니다. 돌고 도는 시간의 반복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관을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역사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관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직접 오신 것은 하나님이 이 역사에 투입하신 것입니다. 칼 발트는 이것은 하나님의 인브레이킹(inbreaking)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부수고 들어오신 분이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시고, 심판하시고, 주도적으로 역사 하시는 분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역사를 일직선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창조가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우리 인생을 시작에서 종말까지 일직선상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들이 이 직선 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즉 우리의 경험은 모두 일회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은 언제나

반복이 없는 단 한번의 일들입니다. 시간의 흐름도 지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역사를 이렇게 직선 상에 놓고 보면 인생이나 역사는 분명 방향과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역사를 당신이 이미 계획하신 목적지를 향해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이 약속된 종말을 향해 역사는 운영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을 보면 반드시 결론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간에 전개된 많은 이야기들은 이 마지막을 위해 있는 것들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에서는 인간의 모든 것들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론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 진짜 결론이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도 태양은 또 오를 것이다'라는 주인공의 말이 그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절망적 상황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주신 희망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고 그 역사의 종말의 좋은 결론을 소망이라고 합니다. 그 좋은 역사의 종말을 성경에서는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우리들의 변화입니다. 이것을 구속의 역사, 즉 구속 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영사를 진행하시고 계십니다. 즉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역사적 작업을 계속하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적 필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이며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릴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예수님만이 아시고, 예수님만 생각하시고, 예수님만 말씀하실 수 있는 문제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없어서 자꾸 '무슨 말씀인데요'라고 묻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요 16:19]" 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여기 '조금'이라는 말씀은 '미끄론' 즉 '마이크로'라는 말입니다. '아주 작다' '잠깐 지난다'는 말씀입니다. '보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님의 죽으심을 말씀하신 것이요 '본다는' 말씀은 주님이 부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다가올 일에 대해 아주 초연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중한 고초요 죽음이라고 해도 조금 있으면 그것을 이기시고 부활하실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현재는 십자가의 고난이지만 주님의 장래는 부활의 영광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현실과 미래이기도 합니다. 현실은 고통이 있고 소원이 있지만, 우리들의 장래는 완전한 구원과 행복입니다. 소원이 아니라 소원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들의 역사는 그렇게 전개되도록 하나님이 진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나 제자들이나 우리들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으로 흡수되어 버립니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하시고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 2:7]"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 에게요 또한 헬라인 에게라[롬 2:10]"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고난을 당하시기 전의 주님을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세상이 썩고 부패했다고 해도 하나님인 예수님을 잡아죽일 만큼 썩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에게 상상할 수 없는 모순과 부조리의 사건이 생겼습니다. 흑암 중에 있는 그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빛 된 그리스도를 그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불의의 재판을 여섯 번이나 강행했고 빌라도는 죄 없으신 줄 뻔히 알면서 예수님을 죽었으며 간사한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았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 식의 재판을 받는데도 한 사람도 예수님을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끼쳤는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기도도 못했습니다.

사단과 마귀가 총 동원이 되여 엄청난 축제를 한 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태연하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울며 따라오는 여인들을 위로하십니다. 그들의 장래를 걱정하십니다. 당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6]"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 18:11]"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식적으로 사회적으로, 심리학적으로도 모두 모순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구나 할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십자가를 지십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런 모순과 고난의 다음 장은 위대한 승리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철저히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태연하실 수 있으시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 생각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22]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주님의 마음은 이미 부활의 아침에 가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잠간으로 보시며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보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바로 여기에 주님의 역사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여기에 비유하여 비유하신 말씀이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치 아니하느니라[요 16:21]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22]"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비유도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생명의 태어남은 아주 귀한 일입니다. 주님의 부활과 죄인의 구원들이 모두 새 생명의 탄생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것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우리는 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역사를 봅시다. 그것은 믿음으로만이 보여지는 역사입니다.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롬 5:3]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4]"이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나니[고전 15:57]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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