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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2,922편)〓/치유 설교

걷고 뛰며 찬미하라

by 【고동엽】 2021.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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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뛰며 찬미하라
행3:1-10


예루살렘 성전 앞에는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있었습니다. 그를 사람들이 메어다가 성전 미문에 두면 그저 구걸만을 하여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구걸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 바로 성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이웃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구약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구걸하는 사람들에겐 성전처럼 좋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는 돈을 구걸했지만, 단 한번도 자신의 병을 고쳐 주기를 기대하거나 바란 일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는 소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고침 받으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고,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으면서도 돈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사람처럼 교회 나오고, 봉사하고 일하는 것이 영혼 문제이기보다는 사사로운 이익 때문이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보다는 육신에 속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아닌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는 사사로운 이를 얻기 위해서 성전에 나에 나와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지만 어떻든 성전을 가까이 하다가 복을 사람임에는 틀림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목적이 무엇이던지 간에 성전을 찾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한번은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앉은뱅이는 여전히 한푼의 동정을 구했습니다. 두 제자는 그를 불쌍히 여겨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나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때 그는 다리에 힘을 얻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전 처음 걷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도 기뻐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네 가지 중요성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장소 중요성입니다.
2절에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침이면 다른 사람들이 그 앉은뱅이를 메어다 주고 저녁이면 집으로 메어 가곤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걸의 장소를 성전 문 입구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산헤드린 공회당 입구나 빌라도 총독 관저 입구를 구걸의 장소로 선택했더라면 걷고 뛰는 은총을 입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소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람이 어떤 장소에 자주 가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술집이나 자주 드나든다면 그 인생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뻔한 일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정과 사업도 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학생은 학교와 도서관을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는 언제나 가정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가까이하며 모든 집회에 열심히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걷고 뛰는 은총을 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장소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구멍가게에서 대형 슈퍼마켓에 이르기까지 장소가 성패를 좌우합니다. 교회도 입지 조건이 성장 여부를 결정합니다.


미국의 경우 이상적인 교회 건축의 3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드리는 본당과 교육관과 그리고 체육관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체육관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체육관을 왜 교회에 두는가....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체육관을 통해서 교회를 가까이 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전을 가까이 하던 앉은뱅이처럼 걷고 뛰는 은총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을 가까이 하면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이 놀아도 교회에 와서 노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일주일에 한번보다는 두번, 두번보다는 세번,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것입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라고 한 것은 바로 은혜 받는 비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도 비록 구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어쨌던 성전을 가까이 하다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84:1-3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 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라고 했고 4절에서는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성전을 사모하며 성전에 나오기를 힘씁시다. 성전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성경 공부합시다. 성전을 가까이 함이 복입니다.


2. 시간의 중요성입니다.
1절에 보면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라고 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장소와 시간은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모여 함께 예배하며 기도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본문에 ‘제 9시’는 우리 나라 시간으로 오후 3시를 말합니다. 이렇게 시간을 정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줍니다.


시55:17절에 보면 다윗은 하루에 세번을 기도하는 시간으로 정하여 놓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단6:10절에 보면 “다니엘이....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 다니엘이, 그리고 다윗을 보면 하나님 앞에 은총을 크게 받은 자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10:11절에 보면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본을 보여주셨는데 눅22:39-41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가 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전한 시간에 감람산에 올라가 기도하신 것입니다.


정한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서는 나의 사사로운 이익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도야말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희생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만사에는 기한이 있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고후6:2절에 보면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야말로 은혜 받는 시간이요,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시간이야말로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복된 시간입니다.


3. 만남의 중요성입니다.
그 날 그 시간 거기서 그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지 못했다면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만남의 중요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잘 만나야 합니다. 학생은 선생님을 잘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 지금 가난과 질병과 고통 중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도자를 잘못 만났거나 환경을 잘못 만났거나 종교를 잘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가깝게는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들, 더 가깝게는 북한 동포들의 실상이 그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비록 인간들의 만남이 잘 못되었다 할 지라도 누구든지 예수님을 바로 만나면 그는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던지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것처럼 그는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에 환경이 바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뀔 것입니다. 정말 팔자가 바뀝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만난 그 위대한 만남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성전에서 행복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지금 나는 죄 많은 인생으로, 불행한 죄인으로 살다가 절망과 좌절 속에 빠진 채 지옥 불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를 만났느냐? 이것이 그의 인생의 삶과 행로를 결정합니다. 그 날 거기서 그가 베드로를 만났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매를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후에 그곳을 지나가던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므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서 구출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심령이 죽어 가는 불쌍한 사람들과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와 같이 소망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에게도 먼저 믿는 우리들을 통해서 구원의 소망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는 주님을 다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중요성입니다.
6-7절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롬10:13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 용서함을 받고 영생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 사탄의 종살이에서 자유 함을 얻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18:20절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기만 하면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천국이 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마귀가 물러갑니다. 흑암의 세력이 물러갑니다. 병마가 물러갑니다. 언제나 승리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배고픈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풍랑 만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위로 받고 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죄인이 예수님을 만나면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본문의 앉은뱅이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고침 받고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오는 자마다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불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는 한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행4:42절에 보면 그의 나이는 40여세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40여년 동안을 걷지도 못하는 불행을 안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은혜를 받는 순간 그의 전신의 기능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7절에 보면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힘이 생겼습니다. 신체의 기능이 정상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육신과 영혼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려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생각이 정상화되고, 말이 정상화되고, 행동이 정상화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금은 보화보다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어떤 권세보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가는 여러분 앞에 만사가 형통하시기를 바랍니다.


5. 보은의 중요성입니다.
8절에 보면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걷고, 뛰어서 맨 먼저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길거리로 나가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먼저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한 것입니다.


은혜는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 감격하여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은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은혜를 얼마나 받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얼마나 깨닫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도 우리의 입에 찬송이 없고, 감사가 없고 예배와 헌신이 없다면 여전히 앉은뱅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성도이면 누구나 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은혜를 받은 앉은뱅이와 같이 기뻐 뛰며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진정으로 복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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