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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2,922편)〓/치유 설교

제 목 : 고난과 위로

by 【고동엽】 2021.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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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고난과 위로

본 문 : 고후1:5-11

 

짧은 인생 길에 왜 이렇게도 고난이 많은가? 고난이 없이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생각해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항상 편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에게는 평안히 필요한 것처럼 고난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따뜻한 태양이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밤낮 태양이 비친다면 땅을 사막으로 변할 것이며 육신에 많은 병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밤도 필요합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태풍도 없고 좋을 것 같습니다. 비록 태풍의 위험과 폭우의 위험이 있다 할지라도 이로 인해서 지구의 신진대사가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도 부족한 인간들이기에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초년에 평안하다가 노년에 고생하는 것보다는 젊어서 고생하다가 노후에 평안히 사는 것이 훨씬 좋을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것도 고난으로 끝나거나 그것이 계속된다면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위로가 있고 끝이 있다면 그리고 고난 뒤에 영광이 있다면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여기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고난을 당한 그것만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난을 극복해야 하다는 점이며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을 극복한 힘이 극기와 인내, 또는 제물이나 권력의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래 고난이라는 말의 원어의 뜻은 “억압하다, 조이다, 꺾쇠를 죄다, 에워싸다”입니다. 그러니까 “주리를 틀다”라는 의미입니다. 옛날 관가에서 죄인을 심문할 때 주리를 틀었는데 바로 그런 것을 말합니다. 고난은 주리를 트는 것과 같아서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그 고난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1. 고난의 성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1) 고난은 보편적입니다.

고난은 누구에게 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백성들이 존경하였던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도 고난받는 종이었습니다. 당대의 의인으로써 의와 선을 행하였던 욥도 고난 당했습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고난 당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나만 고난을 겪는가? 왜 나만 이 고난 때문에 아파해야 하는가? 반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종류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난은 누구나 다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고난이 없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고난이 있습니다.

 

찬송가 474장에 (1)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2)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시오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3) 이 세상에 죄악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내 주 예수 날 건져 주시 오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이 세상에 어디를 가든지 고난은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보편적입니다.

2) 고난은 일시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고난은 영원히 계속되며 마지막에는 지옥의 형벌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성도의 고난은 일시적입니다. 마치 초년에 고생하다 노후에 평안히 그리고 낙을 누리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찬송가 289장에 “고생과 수고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주님을 모시고 나 살리니 영원히 빛나는 천국일세 영광일세 영광일세....”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 후에 반듯이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고난의 길이와 고통의 농도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짧게 쉽게 끝날 수도 있으며 고통이 순수한 고통이 될 수도 있고 즐거운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춘기 때는 누구나 얼굴에 여드름이 나기 마련입니다. 남자들은 별문제가 없지만 여학생들은 상당히 고민 거리입니다. 혹시 흉터나 생기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사춘기 때 저도 여드름이 즙났지만 한꺼번에 나지 아니하고 이따금씩 나는 여드름인데 한번 났다 하면 콩알만하게 부어 올라 결국 쥐어짜다 보면 화농성이 되어 상처가 생기고 맙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세히 보면 곰보처럼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어떤 분의 이야기입니다. 여드름 때문에 무척 고민이 많은 학생이 있었는데 학교 선배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너 누구를 사랑하고 있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 물렀더니 그 선배 말이 이마에 여드름 나면 누군가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것이고 얼굴에 나면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것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후 부터는 날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주문을 외우곤 했답니다. 그 주문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여드름아 여드름아 이왕 돋아날 바에는 이마에 집중적으로 돋아나려무나....” 어느 날 드디어 이마 한 복판에 좁쌀 알 만한 여드름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틈만 나면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그 소중한 여드름을 만지작거렸습니다. 이 여드름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면서 날마다 때묻고 먼지 묻은 손으로 만지작거렸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난번에 콩 팥이 나쁘고 간이 나빠 죽게 된 아버지에게 아들은 간을 짤라 주고 동생은 콩팥은 이식해 주는 아름다운 일이 티비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의사가 동생과 아들에게 “간을 자르고 콩팥을 떼어 내면 뼈를 깍는 아픔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수술을 마치고 마취가 풀렸을 때 의사의 말대로 두 사람은 극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이 다 가시기도 전에 건강을 찾은 아버지와 형님을 보고 두 사람은 큰 기쁨과 보람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작은 것도 잘못 다루면 큰 화근이 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큰 고난도 바로 이해하고 바로 다루면 그 고난이 일시적으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자꾸 되씹고 근심하고 걱정하면 점점 심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의미를 잘 알고 받아 드려야 합니다.

 

3) 고난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습니다.

무의미한 고난이라면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는 자에게는 얼마든지 유익하게 됩니다. 성도의 고난에는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는 고난이 없습니다.

히12:10에 보면“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1) 도덕적으로 자기 생활을 반성하게 됩니다.

자기 잘못이나 무질서를 뉘우치게 됩니다.

(2) 영적으로 정신차리고 기도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 편하고 좀 넉넉해지면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의지하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시련이나 고난을 당하게 되면 정신이 번쩍 들고 기도하기를 시작합니다. 사실 문제가 없으면 기도의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들입니다. 히12:12절에 보면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라고 했습니다. 고난 자체는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불행한 것만이 아닙니다. 고난은 잘만 다루면 매우 유익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프랜시스는 본래 부호의 아들로 사랑하는 여인과 정을 나누는 보통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는 고난의 길을 일부러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평생을 가난과 고독과 고통 속에 살았지만 이 모든 것을 유익한 것으로 받아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써 달라고 기도했고 기도대로 살았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라는 그의 기도가 그 사실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철들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고난은 유익한 것입니다.

 

2. 고난은 위로의 통로가 됩니다.

고난 없이 위로가 없는 것입니다. 큰 고난 가운데는 큰 위로가 있고 길고 긴 난관 가운데는 길고 더 긴 위로가 있습니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다는 말과 같은 이치입니다.

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그랬습니다. 이것은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가 뒤따라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1) 고난과 함께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법 고시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축하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큰 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위로 받으십시오 드릴 말씀이 없군요”해선 안됩니다. 축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 없이는 위로도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위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헬라 원어의 위로의 뜻은“가까이 에서 부르다, 초청하다”입니다. 고난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고난 때문에 넘어져 있을 때 가까이 곁으로 오셔서 다정한 목소리로 불러 주신다는 말씀이 바로 위로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에 풍랑을 만나 파선 지경에 있을 때 예수 님께서 파도 위로 걸어 오시면서 말씀하시면서 “내니 두려워 말라”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때로는 고난의 파도를 타고 우리 가까이 찾아오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고난을 바로 감당하면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상갓집에 가보면 조문객들이 슬픔을 당한 자를 위로하는 뜻으로 밤을 새워 가며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그것이 잘못되어 술 마시고 삼겹살 뜯어먹고 떠들고 화투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위로해 주기 위해 곁에 머무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위로한다는 것이 오히려 걱정을 더하게 하고 고통을 더하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인간은 진정한 위로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위로 자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난 당한 자를 위로하십니다. 바로 가까이 곁에 오셔서 부르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66:13절에 보면“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고난 곁에 위로가 있습니다. 고난 당한 자 곁에 주님이 계십니다. 고난과 위로는 항상 같은 길을 갑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말씀”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들은 고난의 성격과 해결 방법을 밝혀 주는 말씀입니다. 일부러 높은데서 뛰어내려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졌다고 합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닙니다. 강도 짓하고 도망하다가 당한 교통 사고라든지 욕심부려 실컨 집어 삼키다가 위장병으로 고생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상관없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교통사고라든지 기도하다가 당한 부상이라든지 교회 봉사하다가 입은 부상이라든지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와 관계 있는 고난입니다.

그러니까 아무것이나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떠들면 안됩니다.

 

지난밤에 술독에 빠져 진탕 퍼마시고 등에 업어 집에 돌아온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속이 아프고 골치가 아프다고 “오! 주의 고난이 넘치나이다” 라고 한다면 이거야말로 주의 고난을 욕되게 하는 짓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위로 자가 누구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부모의 위로나 친구의 위로나 친지의 위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참 위로는 그리스도의 위로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1) 주님 자신이 우리보다 더 큰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대신 고난을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난을 다 체휼하시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2) 죽은 자라도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9절에 보면“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했습니다. 힘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위로도 힘이 있어야 합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말씀 한마디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그의 능력이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내게 맡겨라, 내가 처리해 주마.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내가 그를 다시 살려주리라 라고 말씀하실 수 있고 말씀하신 대로하실 수 있는 주님만이 나의 영원한 위로 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믿고 아는 그리스도인만이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고난 중에 고통 당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사랑의 주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세상의 알지 못하는 신령한 하늘의 위로로 새 힘을 얻고 더욱더 기뻐하며 감사하며 승리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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