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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삼상 16:7)

by 【고동엽】 202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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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의 사랑을 힘입어 저희들이 다시 보좌 앞에 나왔습니다. 이렇게 병마 많고 위험이 있고 전쟁과 기근과 재난, 우환, 질고가 그칠 날이 없는 무서운 세상에 살아가지마는 한 주일을 평안히 지내게 하셨고 다시 주님 앞에 나와 찬송을 부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러하오나 우리는 나 자신을 생각한 나머지 주의 뜻을 저버리고 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서 불의한 길을 가는 자와 동행을 하였습니다. 덕 되지 못한 말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상처를 준바 있고, 내가 이롭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손해를 끼치기도 했습니다.

나 하나의 안일을 생각하며 모두의 평안과 기쁨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세속적인 생각에 매여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영원한 나라도 전혀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온 일들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 엎드리어 비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당연히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며 살았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찾아야 할 사람을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쉬움과 부끄러운 마음으로 주님 앞에 자복을 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는데 받은 것이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원망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많은 은사를 땅에 묻어 둔자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선한 일에는 핑계를 세속적인 일에는 서두름으로 일관했던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지금은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죄를 생각하며 묵묵히 참회의 기도를 개인적으로 드립니다.

용서의 선언 /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아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아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200여년전 중국최초로 통일 제국을 세운인물이 있습니다. 진시황입니다. 그의 생부로는 여불위를 이야기합니다. 그의 작품으로 여씨춘추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가 사람을 판단하는 방법으로 육론을 폈습니다. 사람을 평가하고 등용하고 배치하는데 아주 중요하게 쓰이던 기준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재능이나 지식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함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사람됨이 바로 된 사람이다.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그 첫째가 사람이 즐거울 때 그 즐거움에 얼마나 빠져드는가를 보는 겁니다. 즐거운 일이 있을때 그 일에 만족하고 즐거워야 합니다. 남들이 다 즐거워하는데 혼자서 울고 있습니다. 남이 다 기뻐하는데 혼자서 꼭 초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분위기를 흐립니다. 즐거운데 꼭 안 좋은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 이런 이는 사람의 기본이 잘못 된 겁니다. 둘째는 기쁠 때 얼마나 그 기쁨을 자제하는가를 보는 겁니다. 나는 기쁘지만 남을 생각해서 자기의 기쁨을 억제하는 사람을 이야기 합니다. 언젠가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아니 당신 집 아이가 명문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집 아이는 떨어지고 말았어요. 너도 열심히 해서 꼭 내년에는 그렇게 되는 데로 말을 합니다. 그러니 그 아이가 교회를 아예 안다니고 말았습니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기쁘다고 촐랑거리는 사람 경망스러운 사람입니다. 셋째 괴로울 때 얼마나 잘 참아내는가를 보는 겁니다. 괴롭고 아프고 할 때 나 하나만 참으면 되거든요. 그런데 괴로움으로 몰아갑니다. 자기가 괴로우면 다 괴로움을 줍니다. 그런다고 아픈 게 났습니까? 넷째가 두려울 때 그 두려움을 내색하지 않는 사람을 보는 겁니다. 깜짝 놀랄 일이 있어도 호들갑을 떨지를 않습니다. 이런 이가 바람직한 사람입니다. 그저 무슨 일만 있어도 여기저기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저 여기저기 쑤시고 다닙니다. 거 좀 조용히 처리를 하면 안 됩니까? 다섯째가 슬플 때 그 슬픔을 얼마나 삭이고 사는 가를 보는 겁니다. 슬픈 마음을 좀 삭일 줄 알아야 합니다. 슬픈 마음을 잘 누르고 삭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여섯째가 성나고 화가 날 때 얼마나 개의치 않을 수가 있는가를 보는 겁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 그런 이는 더 볼 것도 없습니다. 자 마음이 큰 사람을 거물이라고 합니다. 몸집이 커도 작은이가 있습니다. 마음이 커야 합니다.

아무리 사회제도가 복잡해지고 정치․경제 등의 문제가 우리를 위압한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삶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인격과 양심이요 신앙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 중에 90%가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라고도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그의 뜻을 이루는데 쓰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다윗을 보시고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이를 통하여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을 그는 귀중히 쓰십니다. 그럼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었던 사람,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무엘상 16장에는 하나님이 사무엘로 하여금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가 그의 아들들을 만나볼 때, 큰아들 엘리압을 보고 그를 택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삼상 1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나 지혜 또는 인간적인 용기를 보시지 않습니다.

오직 그의 중심, 속사람이 하나님 마음에 흡족한 자를 귀히 쓰시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사도 바울은 신장이 4척밖에 안 되는 왜소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안질로 인하여 일생 동안 고생한 사람이었으며, 행동이 남들처럼 민첩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달변가도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처음에 예수님을 몹시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는 이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까지 죽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속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불타는 정열을 보았습니다.

역대하 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그 속마음이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사람을 귀히 쓰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5:17에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 왕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이 말을 상고해 본다면 스스로 작게 여겨 겸손할 때에 하나님은 귀히 쓰셨다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4장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낮추어라. 그리하면 너를 높이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겸손한 자를 위하여 은혜를 베푸시고 또 그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어느 날 제자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기독교인으로서 최고의 덕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겸손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러면 두 번째 덕은 무엇입니까?"라고 다시 질문하자 "그리스도인의 덕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스스로 작게 여기는 마음,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인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두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오던 길에 말다툼을 합니다. 그러다가 둘이서 씨름을 합니다. 하나는 게오르그라는 소년입니다. 그는 몸집이 좀 크고 나이도 들었습니다. 또 하나는 유명한 알버트 슈바이쳐입니다. 그런데 이 씨름에서 몸집이 작고 약해보이는 슈바이쳐가 이기고 맙니다. 그런데 게오르그는 분한 듯이 씩씩대며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도 너처럼 일주일에 두 번 고깃국을 먹으면 너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는 정말로 가난한집 아이였습니다. 그러니 이겼다는 기쁨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후에 슈바이쳐는 고깃국을 볼때마다 미안한 마음과 게오르그의 음성이 들려서 고깃국을 먹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왜 게오르그의 음성이 들려와서 그런겁니다. 그는 올겐니스트로 성공을 했습니다. 철학박사와 신학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유능한 청년인 그가 고민을 합니다. 그의 가슴에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기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다시 7년을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의학박사가 되어서는 모든 것을 정리를 합니다. 그리고 아프리카로 떠납니다. 아프리카의 성자와 같은 이로 추앙을 받으며 삽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늘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로 작정을 하면서 살았다는 겁니다. 그가 아프리카의 밀림에 가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한평생을 삽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양심은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게오르그의 씩씩대며 하던 이야기가 그의 평생을 잊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서 들린겁니다.

사도 바울의 본명은 사울이었습니다. 그가 어렸을 적의 별명은 바울이었는데 이것은 키가 너무 작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에는 스스로 "사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울"이라는 이름을 택하였습니다. 키가 작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는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윗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에서 무려 995번이나 그의 이름이 나오며 신약에서도 60번씩이나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잘 알듯이 그는 매우 많은 허물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은 까닭은 그의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왕", "나의 주 하나님"이라고 불렀으며, 또 "하나님이 나를 항상 심판하고 다스린다"라고 말할 정도로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일생은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생활이요, 둘째는 범죄한 생활, 그리고 셋째는 참회의 생활입니다.

다윗은 어렸을 적에 철저한 믿음의 소년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왜소하지만 마음은 담대하여 양을 치면서 사자를 찢어 죽였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는 다윗과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의 대결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었던 거인 골리앗 장군을 물맷돌 다섯 개로 완전히 굴복시킬 때에 다윗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정말 굉장한 믿음입니다. 그 후 왕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철저한 신앙을 갖고 모든 전쟁에 임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무척이나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어찌나 흥겹게 춤을 추었던지 사울의 딸이자 그의 아내인 미갈은 "왕으로서 체통도 없이 모든 신복들 앞에서 몸을 드러내다니"라고 심중에 비웃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섭섭해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기뻐 춤을 춘 것이라 그가 나를 택하사 왕으로 삼으셨으니 나는 그 여호와 앞에서 뛰어 놀리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백향목으로 만든 궁전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법궤가 휘장 안에 있음을 염려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 하나님을 애타게 찾다가도 영광과 행복을 누릴 때에는 하나님을 잊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영광 중에 하나님을 생각했고 극히 평화로운 가운데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결심하였습니다.

시편 42편에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하나님을 찾는 다윗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이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감사하고 찬양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범죄의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를 보면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다윗의 씻을 수 없는 죄목이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탐하여 결국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얻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범죄한 이후 뜨거운 눈물로 하나님 앞에 회개와 참회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죄를 자복함에 있어서 결코 자기가 일시적으로 우연하게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시편 51편에서와 같이 "내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어머니가 어떤 불륜의 관계에서 다윗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는 본래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며 우리야의 아내를 취한 범죄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죄가 열매를 맺어 이룩된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범죄를 우리야나 그의 아내 밧세바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았고 또 그 날의 어떤 상황에다 그 이유를 붙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모든 것을 자기의 잘못으로 돌렸고 또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본래 그의 마음속에 숨어 있었던 죄가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회개는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둘째로 그의 회개는 구체적이며 실생활 속에서 느끼는 회개였습니다. 그는 아들 압살롬에게 배반을 당하여 피난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그 피난 시절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을 저주하였습니다. 옆에 있던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을 위하여 그의 목을 베려 할 때 다윗은 그를 말리며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내게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여도 그 모든 것을 여호와께서 주관하시는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시편 속에서도 그가 여러 번 되풀이한 것은 전쟁에 패한 것도 질병도 원수들이 자기를 조소하는 것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구체적인 현실 생활 속에서의 회개였습니다.

그는 나단 선지자의 충고를 겸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일생동안 회개하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입술로만 회개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회개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게 된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시편은 모두 150편이나 되는 방대한 시입니다. 그 중에 73편이 다윗 왕의 자작시입니다. 그 73편중에서도 제 34, 52, 54, 56, 57, 63, 142편은 다윗 왕이 고민 중에 쓴 시이며, 그가 회개하면서 쓴 시는 제 3, 16, 18, 30편입니다. 제 6, 32, 38, 51, 102, 130, 143편으로서 여기에는 다윗의 뼈아픈 회개와 눈물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 그에게 남다른 지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또한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겸손한 사람으로 항상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을 드렸던 사람입니다. 역경 중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성의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역설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질병 가운데에서도, 실패와 낙담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세워 성군 다윗으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가끔은 바르게 산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손해를 보는 게 많습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여러분 회개라는 말이 우리는 그저 뉘우침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성도가 차를 주차장에서 나오다가 도중에 묵직한 소리가 자신의 귀를 때립니다. 아차!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겁니다. 그래서 내려서 보니 아이고 이런 그 많은 차들이 있는데 하필이면 비엠떠블유를 긁었답니다. 자신의 차를 주고도 될 일이 아닙니다. 많은 갈등이 자기를 유혹을 합니다. 아! 이럴 때는 어쩌나? 아무도 본 일이 없어서 그냥 갈까나? 아니 그래도 내가 명색이 성도이건만. 그래서 많은 갈등의 소리를 무시를 하고서는 자기의 전화번호를 쓰고서 제가 선생님의 차를 흠집이 나게 했습니다. 전화를 주신다면 차를 수리해 드립니다. 그렇게 메모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리고서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도 하나님 제가 할일은 다했습니다. 그러니 바람이 불어서 메모지가 날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전화가 오고야 말았습니다.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로 조금이라도 수리비를 줄여보자. 그런데 저쪽에서 호탕한 소리로 물어봅니다. 당신이 그랬습니까? 네. 나 오늘 기분이 너무나 좋습니다. 내가 이민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메모를 보고서는 마음을 고치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해외에서 사업을 하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사업을 하는데 다른 이들이 너무나 비양심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도 사업이니까. 그렇게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아니 자동차를 그렇게 긁고서 가면서도 아무도 연락처를 남기지 않아서 실망을 하고서는 떠나려고 했는데 당신이 나에게 희망을 준 사람입니다. 수리비 걱정을 마세요. 그리고서는 전화를 딸깍 끊더랍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게 겸손입니다. 상황에 순응을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게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를 다 이루고자 하시는 데 쓰일 그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불러 모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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