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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by 【고동엽】 2021.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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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

튤립 교육 선교회 김 명도 목사

 

서론

세상에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혼동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반드시 종교를 가져야 하는가? 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고, 어떤 이들은 종교를 하나의 인생 수양의 방편 (人生修養方便)으로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종교를 번갈아 가면서 믿는 분도 있고 동시에 여러 가지 종교를 믿는 분도 있습니다. 또 도모지 종교를 갖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하나밖에 없는 법입니다. 여기도 저기도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리의 절대성 (Absoluteness of Truth)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진리가 있다면 상대적으로 진리 아닌 것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훈련받지 못한 사람, 즉 자연인 (自然人, natural man) 에게는 진리가 아닌 것이 진리보다 더 찬란해 보이고 더욱 요란스럽습니다. 보석을 보아도 진짜 다이아몬드 보다 가짜 다이아몬드가 더욱 번쩍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종교단체라는 이름을 가진 무리들이 많습니다. 저마다 진리라고 합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자 하는 이유는 수양의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은 원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므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 속에 있는데 죄로 인하여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조물주 하나님을 찾아 갈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저것 궁리하며 이런 종교도 믿어 보고 저런 종교도 가져 봅니다. 그러나 참다운 종교에 이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영혼이 갈급하여 여기저기를 방황합니다. 라디오의 다이알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바른 방송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른 다이알을 돌리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바른 다이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 힘으로 바른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종교란 무엇입니까?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면서 수양을 쌓기 위한 수단입니까? 아닙니다. 물론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의 사서 오경 (四書五經)이나 불가의 불경 (佛經)은 모두 철학으로서 사람의 수양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수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수양을 쌓지 못하는 이유는 좋은 책을 읽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악하게 태어 납니다. 선하게 태어 나는데 환경이 나빠서 악해 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령 햇볕이 내려 쪼이는 같은 땅에 두 구루의 나무가 나란히 서 있다고 가정합시다. 한 나무는 열매를 잘 맺는데 다른 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깁니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그 뿌리가 나쁘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좋은 수양을 쌓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금수 (禽獸)같이 행동하여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모두 뿌리 즉 인간의 마음이 나빠서 그런 것입니다. 마음이 나쁘다는 말은 인간의 마음이 죄로 인하여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무제를 해결하는 일이 관건 (關鍵)입니다.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나? 계속, p.2 of 22)

 

마음이 새로워져야 하는데 마음이 새로워지는 길은 불가의 불경 이나 유교의사서 오경 이나 어떤 명작 수양 서적을 읽어서 되어지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6세기 독일의 신학자)라는 분은 많은 책을 읽은 학자이지만 그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의식 (罪意識, consciousness of sin) 을 걷잡을 수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느 날 Scala Sancta (Scala Sancta 란 로마의 St. John Lateran Church에 있는 돌 계단 이름으로 Constantine 대제의 어머니인 Helena 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 놓았다고 하는데 이 계단은 바로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총독부에 놓였던 것으로 예수님이 재판받으실 때 짚고 오르셨다하여 Helena가 Rome으로 옮겨서 많은 순례자들이 그 계단을 속옷 바람으로 오르내리면서 기도하는 곳) 를 속옷 바람으로 오르내리다가 사람이 의로워 지는 것은 이런 일, 즉 인간의 노력이나 고행을 해서 되어 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능해 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 로마서 1장17절이 그의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유명한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철학가인 Pascal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이 채워줄수 있는 큰 구멍이 있다 Il y a une breche dans l'ame d'home que seulement Dieu peut emplir”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들이 갖지 못한 영혼을 갖고 있습니다. 그 영혼은 하나님을 사모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 영혼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떄문입니다. 그 영혼은 불멸입니다. 영혼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영혼은 죽을 때 하나님에게로 돌아갑니다. 몸은 흙으로 되어 졌으니 흙으로 돌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몸은 죽어서 땅에 묻혔다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즉, 이 세상이 불로 심판받는 대 심판날에는 그 몸이 다시 부활되어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영원한 축복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한복음 5장24-28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 몸도 소중합니다. 몸을 학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육신도 영혼만큼 수중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으로 지음을 받은 인생은 인격이 있고 인격의 3대 요소는 지 (知, intellect), 정 (情, emotion), 그리고 의(意, volition) 으로 되었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아담이란 말은 사람이란 의미로서 인류의 시조) 타락한 후 우리의 인격, 즉, 지.정.의 가 모두 타락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고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판단의 기준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자신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수양을 쌓는 그런 차원을 넘어서 사람이 영원히 사느냐 혹은 영원히 죽느냐 하는 가강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입니다. 수양만을 위해서라면 구태어 종교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좋은 책들을 읽으면 그것으로 목적을 충분하게 달성할 수 있습니다. 긍극적인 문제는 사람의 영혼이 문제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죽은 후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늘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아 갑니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철학도 연구해 보고 역학 (易學) 도 연구하지만 엉뚱한 곳에서 그런 중대한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기독교만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게 됩니다. 여러 분 이것을 아십니까? 다른 어떠한 종교도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혹은 어떻게 지음을 받았는지를 말해주는 종교가 없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뿐입니다. 유대교는 예수님이 메시야 구세주 바로 그 분인 것을 모르고 배척하며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세상 적으로 말해서 강력한 맹장(猛將)이나 명장 (名將)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나라를 로마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줄 그런 강력한 장군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서 로마병정들의 손에 운명(殞命) 하시는 예수를 구세주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종말이 닥아 오면서, 유대인들 중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과연 구약성경에서 예언했던 메시야 바로 그 분인 것을 깨닫고 예수님에게 돌아오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 가고 있는 것은 퍽 다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은 “Jesus for Jews“ 라는 전도기관을 만들어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며 예배드립니다. 그 수가 매년 늘어갑니다.

 

그럼 기독교란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다른 종교는 모두 인간이 어떤 믿음의 대상을 향하여 찾아 나아가는 종교입니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선행 (善行, good works)을 통해서 그 공로로 어떤 신(神)의 은총을 받으려는 노력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적선 (積善)을 강조합니다. 천주교에서는 고행(苦行) 과 선행을 강조합니다. 이슬람교는 절대적인 순종을 강조합니다. “이슬람“ 이란 말 자체가 ”순종” 이라는 아랍어 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공로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반대로 하나님이 죄악에 빠져 죽은 인생을 살리시려고 먼저 손을 내밀면서 인간을 찾아 온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전도하다 보면 예상외로 많은 분들이 “나는 선행한 것이 없으니 천당에 가기는 틀렸다” 라고 말합니다. 또는 “나는 계명을 다 지키지 못했으니 천당 가기는 글렀다” 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람이 천당에 가는 일, 즉 영생을 얻는 것은 계명을 지키거나 혹은 선행으로 되어 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1:17이나 에베소서 2:8을 보십시오. 성경은 로마서 10장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즉 성경에서 난다”고 했으니 (로마서 10장17절), 전도해야 하고 전도하여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도리를 들려 주어야 할 책임이 먼저 믿는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처음에 “나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못한 죄인이다” 란 겸손한 태도에서 출발합니다. 성경이 사람은 모두 절대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죄인인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죄” 란 말은 참으로 심각하고 무서운 말입니다. “죄” 란 하나님의 완전한 법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원어 (原語) 에서는 “하마르티아” 라고 하는데 그 말의 의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과녁으로 비유한다면 그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것” 을 말합니다. 그런데, “죄” 란 아주 무서운 것으로 “죄” 의 값은 “죽음” 이라고 성경이 가르쳐 줍니다. (로마서 6:23). 그러므로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죄는 죽음을 요구합니다. 죄를 지은 죄인은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도 입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 아득한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죄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저는 김씨입니다. 내가 김씨인 이유는 우리 집 대대로 깁씨 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5대조 10대조 40대조 모두 김씨이므로 나도 김씨입니다. 마찬 가기로 모든 인류의 조상은 한 사람 아담인데 그 분이 죄를 지어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인 인류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 주신 것입니다.

 

죽음!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사람이 병을 앓거나, 어떤 사고를 당하여 생명이 위험할 때는 반드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생의 가장 큰 걱정거리이고 불안의 원인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축복된 사람이겠습니까? 얼마나 부러운 사람입니까? 인생은 태어나서부터 인생의 삶을 마칠 때 까지 늘 불안, 초조, 공포속에 살아가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죽음이며 죽음의 원인은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서 해방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가능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 분은 하나님 바로 그분이신데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해방되어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따라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하시고 영원히 살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14장27절에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라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예수님을 믿을 때 오게 됩니다. 그분은 평강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이사야서 9장을 읽어 보세요. 그 분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런 마음의 평화는 곧 영생으로 이어 집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셔서 두려움 없이 살아가게도 하시지만, 또한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은 누구나 때가 되면 죽을 수 밖에 없는데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죽은 다음에도 하나님에게 올라가서 영원히 살수 있는 길, 즉 영생 (永生, Eternal Life)을 주신 것입니다. 영생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 아니라 영생 그 자체를 주신 것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천당에는 눈물과 한숨이 없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직접 모시고 앞서간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만나며 기쁨으로 영원을 보내는 곳입니다. 저는 비행기를 자주 타는 편인데 비행기 안에서 옆 좌석에 앉은 승객에게 곧 잘 묻습니다. "Where are you going to spend your eternity, is it going to be in the Heaven or in the Hell? There is nothing in between, you know. I thought you might want to know" 라고 합니다. (당신은 어디서 영원을 보내기를 원하십니까? 천당입니까 혹은 지옥입니까? 중간 치기란 없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우리는 모두 어디서 영원을 보내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영원토록 살수 없습니다. 아무리 힘이 장사 같아도 때가 되면 가야하고,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도, 아무리 높은 권세를 갖고 재물이 많아도 성경은 시편 90편10절에 인생의 수명은 70이고 길어야 80인데 그나마 쏜 살같이 지나고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짦은 인생은 그 자체가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이세상에서 우리의 소망이 어디 있습니까? 자식에게? 품안의 자식이 장성해서 집을 나간 후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효도하는 자식이 몇이나 됩니까? 재물? 재물은 덧없는 것입니다. 오늘 있다가도 내일 모두 잃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명예? 마찬가지로 정치가 판을 치는 마당에 오늘의 명예가 내일의 실직자로 전락할지 누가 장담합니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을 주고 살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나그네가 여관방 신세를 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들어 가기전에 이 땅에 살 때부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천당에 갈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지혜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 잠언 6장에 보면 개미들의 일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개미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감독하는 이가 없어도, 스스로 닥아 올 겨울을 준비하며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인생은 개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인생에도 겨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습니다. 봄과 여름에는 열심히 일해야 할 때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가을에 거두어 드릴 것이 없게 됩니다. 거두어 드릴 것이 없으면 쓸쓸한 겨울을 맞습니다. 굶어 죽게 됩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살 동안 기회가 있을 때에 예수를 믿어 영생의 축복을 이미 받아 놓아야 이 다음 노년이 되어서, 아니면, 언제라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란 늙어서만 세상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젊은 사람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미 떠났습니까? 또 지금 떠나고 있습니까? 그 다음이 내 차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어디 있습니까?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고, 그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떄 에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십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또 개인의 생명도 개인의 일생도 하나님이 지배 하십니다. 내가 오늘 밤 잘못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하고 한번 생각한 적이 있는지요? 사람은 짐승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렇게나 먹고 자며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그런 무책임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을 흙으로 만드시고 다시 코에 입김을 불어 넣어서 비로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2:7).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그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타락하여 죄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은 죽음을 불러왔습니다. 모든 육체는 죽어야만 하고 인생이 사는 땅에는 엉겅퀴와 가시덤불이 나서 사람을 괴롭히고, 사람들은 힘들게 일해야 먹게 되었고, 약육강식(弱肉强食) 의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모두 죄가 불러 온 무서운 결과들입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십시오. 죄를 지으면 죽어야 합니다. 죄는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죄로 인하여 어두워 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선천적(先天的)으로 싫어 합니다. 이것이 인류의 최대의 불행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불행해 집니다. 인류 시조 아담은 죄짓기 전에는 행복했습니다. 동산의 모든 짐승을 다스리고, 자연을 다스리고,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었고, 하나님을 순종하면서 사는 동안은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죄를 범한후로는 사정이 달라 졌습니다. 그렇게 좋기만 하던 하나님이 두려워 졌고, 마음속에 불안이 찾아 왔고, 뿐만 아니가 “죽음” 이라는 인류 최대의 적이 찾아 와서 늘 위협합니다.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짐승과 다릅니다. 사람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에게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악한 사람이 잘된다고 부러워 할 것 없습니다. 악한 사람이 짧은 이 세상에서는 성공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존재하시고, 그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그 악한 사람이 하나님에게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그 사람이 죽을때 까지 뉘우치지 않고 회개함이 없으면 죽은 뒤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5장28절에는 그날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고, 또한 히브리서 9:27에는 앞서 인용한대로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다음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 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5장10절에도 “우리가 우리 육체로 행한 대로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 고린도후서 5:10 의 말씀은 예수를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에서의 상급을 말한 것이지만, 그 무서운 심판의 날이 서서히 닥아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이 그 심판의 날입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며 하늘나라를 전파하시려고 왔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으니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무서운 심판주로 오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심판날 만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내가 죽으면 그 죽는 날이 그 사람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종말을 말하지만, 세상의 종말이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종말이 더 시급합니다. 아무도 자기가 죽을 날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준비되어 있는 분들, 즉, 예수를 믿는 분들에게는 언제 죽어도 문제 될 것이 없고, 언제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아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오리려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천국의 소망 가운데 살아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하늘나라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여행길을 떠난 나그네는 늘 고향에 돌아 갈 날을 생각하는 법입니다. 인생이란 이곳에 얼마를 살고 나면 반드시 갸야 합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불상합니까? 저녁노을이 붉게 물드는데 낙엽이 한 잎 두입 소리 없이 떨어지는 공원의 벤취에 앉아서 물끄러미 서산에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노숙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모두 여기서 열심히 주어진 인생을 60년이건 80년이건 살다가, 하던 일을 고tm란히 둔 채로 갈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세상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며 일신의 영달을 위해 살았어도 갈 때는 그 모든 부귀영화를 가지고 갈수도 없어 무척 외롭게 떠납니다. 친구도 친척도 자식들도 동행해 주지 못하는 무척 외로운 나그네 길입니다. 세상 살아가는데 급히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갈 준비를 하는 일은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명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에게 올바른 진단을 해주고 처방약을 주어도 건강하다고 고집한다면 그 사람의 결국이 어떻게 될까요? 세상 사람들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고통으로 인도하는 죄 문제를 신앙으로 해결하시라고 간절히 전도하면 모두 싫어합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처음에는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 없이 혼자 살수 있을 것 처럼 교만해 집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내속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똑똑하여 하나님보다는 낫다는 식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스럽게 보이지만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고린도전서 1:18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교만한 마음들이 예수를 믿고 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합니다. 겸손해져서 자신의 지난날들을 회개하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죄인으로 인정하고 예수님에게 나아오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도 완악한 내 마음을 내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려울 때 잠시 도움을 받는 마술사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전혀 달라지고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하나님을 위해 살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우연도 아니고 스스로의 힘으로 되어 지는 것도 아니고, 순연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죄인으로 치우쳐서 죽었던 사람들인데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지옥에서 건져 주시고 싶은 사람들을 택해서 예수님을 믿을 마음을 주셨다고 가르쳐 줍니다 (에베소서 2장1-8절). 여기에 기적이 있고 하나님의 참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이것을 “거듭났다” 라고 합니다), 세상이 달라 집니다. 지금까지 쓰고 다니던 검은 색안경을 벗어 버렸으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일수 박에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검은 색안경을 쓰고 다니기 때문에 모든 것은 검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린도후서 5:17에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로운 피조물이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전에 좋아 보이던 것이 이제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이전에 우섭게 보이던 신앙, 교회, 예수님이 한없이 영광스럽게 보이고 한없이 감격스러워 보입니다.

 

그래서 옛 날에 바울이라는 사람은 공부도 많이 하였고, 유대교를 열심히 믿는 사람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몹시도 핍박했으나,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빌립보서 3장8절 이하에서 말하기를 “예수를 아는 고상한 지식으로 인하여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유대교의 유전들을 버리고 또한 그의 귀한 유대교의 학문을 버리는 일 어느 누구보다 많이 배운 그의 지식으로 인한 그의 자긍심을 버리는 것은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며, 바울 선생 혼자의 힘으로 할수 있었던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그런 마음을 주셔서 그렇게 사람을 변화 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마음속에서 새로 나게 하시는 성령님 (하나님을 말함) 이 인도하심으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며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왜냐 하면 모태로부터 태어 난 생일을 맞는 것보다 더 큰 감격을 주기 때문입니다. 모태에서 태어난 몸은 예수 알지 못하고 살아 가다가 70년 80년을 살고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고 그 사람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생하게 되지만, 예수님을 알고 난후에는 언제 어떻게 죽어도 영원한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니 자기의 생일보다 더 귀하고 기쁜 날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무당이 푸닥꺼리 하는 곳에 가서는 “정말

신이 있는가보다“ 라고 악령의 존재를 수긍하면서도 그 반대인 진리의 영 (靈) 이신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악령이 있으면 진리의 영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이상할 것이 없고 극히 당연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타락하여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震怒)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에 관한 것은 싫어하고 하나님과 반대가 되는 악령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원래 악하게 태어나기 때문이고 이런 악한 마음이 예수를 믿어야 선한 마음으로 변해 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데 그 성령이란 바로 예수님의 영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인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요? 많은 사람이 묻습니다. “누가 천당에 가본것도 아닌데” 라고 회의주의자 (懷疑主義者, skeptics) 들이 말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온갖 궤변을 모두 토로합니다. 사람은 무엇이든 눈으로 보아야 믿고 손으로 만져야 믿습니다. 극히 합리주의적 (合理主義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중에 “도마”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상당히 교만하고 회의적이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살아나신 예수님이 종전과 같은 모습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고 그때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네가 믿지 못하니 내 손의 못 자국을 만져 보며, 내 옆구리를 만져 보아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는 주님의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만져 보고는 즉시 놀라 엎드려서 절하면서, “오,

나의 왕, 나의 주시어“ 라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어 놓으시고,

”도마야, 너는 나를 본고로 믿지만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라고 말씀 하셨는데, 이말씀을 들었던 도마는 더 이상 하나님이 계셔서 그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지 사흘 만에 살리신 것을 조금도 의심없이 믿고 나가서 과감히 전도하는데 인도에 까지 가서 전도하다가 거기서 순교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요? 시카고에는 유명한 무디 성경 학교 (Moody Bible Institute) 가 있어서 수많은 목회자를 배출했습니다. 그 학교에 Steven Board 박사라는

정신과 의사가 교수로 있었습니다. 그분은 교통사고나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은 사람들을 연구한 분으로 유명한데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의사가 사망진단서를 쓰고, 유가족에게 알리고, 장례식을 준비하는데 그 죽었던 사람이 나중에 살아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이런 일들이 여러번 생기니 Steven Board 박사가 이들을 대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죽었다가 깨어난 환자들에게 그는 물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죽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합니다. 어떤 분은 천사에게 이끌려 너무도 좋은 곳에 갔는데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말로 형용할 수 없고, 그곳이 어디 인지는 몰라도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하였는데 그 꽃들의 색갈은 여러 가지인데 파란 것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으리 만큼 파랗고, 붉은 것은 역시 이 세상에서는 어디를 가도 볼수 없으리만큼 붉고, 노랑색도 그러하고 모든 것이 아주 색조 (色調, hue) 가 짙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떠나오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다시 와서 보니 몸에 통증을 지금 많이 느낀다는 것입니다. Steven Board 박사는 모든 환자의 진술을 그대로 적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어디인가는 모르는데 어느 곳에 갔더니 아주 마음이 답답하고, 앞이 캄캄하며, 무엇이든 내 뜻대로 할 수 없고, 누군가가 나를 억누르는 것 같은 답답한 경험을 하다가 이곳에 돌아오니 몸에 퉁증은 있어도 훨씬 이세상이 더욱 좋다고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Steven Boyd 박사는 양편의 진술을 모두 글로 적어서 나중에 책으로 펴 냈는데 그 책의 이름이 What Do the Dying See? (죽는 사람은 무엇을 보는가?) 라는 영문판입니다. 이 책자는 불과 30면밖에 되지 않는 적은 pamphlet 이지만 실제로 경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요즘에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이런 말들이 조심됩니다. 옛날에는 남미 브라질에 Percey Colet라는 사람이 천당에 가보았다고 하여 “내가 본 천국” 이란 책을 지어서 판 적도 있지만 그런 책과는 다릅니다.

Colet는 나중에 사기죄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경험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신데 거짓말을 할수 없으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천당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함을 분명히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지옥은 불신자들이나 예수를 믿어도 건성으로 믿으며 참다운 회개가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을 nominal Christian 혹은 carnal Christian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지 않고 형식으로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습니다. 천당은 예수님을 믿어서 자기의 죄를 용서함 받은 사람들, 거짓이 아닌 진정으로 회개하고 진정으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된 곳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절과 3절에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회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려 가노니 가서 너회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회도 있게 하리라” 라고 친히 말씀하시어 우리에게 영생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시어 지금은 하나님의 오른편 보좌 (寶座) 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죽으면, 아니면 죽기 전이라도 예수님이 다시 이 세상에 심판주 (審判主,

이곳에서 영원히 기쁨속에 살게 됩니다.

 

지옥과 천당은 과연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계신 것입니까? 네, 천당과 지옥이 있는 것은 성경이 증명해줍니다. 하나님은 계신 것입니까? 네. 역시 성경이 증거해 주십니다. 아니, 우리의 양심이나 자연의 이치가 웅변으로 증명해 줍니다. 아무리 무신론자 라고 해도 죽을 위기에 처하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이란 말이 입에서 새어 나오게 마련인데 그 이유는 사람은 윈래가 하나님을 알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는데 죄악으로 인하여 눈이 멀고 귀가 어두워서 그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7-19). 지옥이든 천당이든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수 없습니다. 영원 (永遠, eternity)를 그곳에서 보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누가복음 16:19 이하에서 천당과 지옥을 이야기 하다가 지옥에 들어간 부자가 이 세상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들이 지옥에 들어오지 않도록 정말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으니 본인은 지옥에서 나가지 못한다해도 천당에 올라가 있는 나사로는 갈수가 있으니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어 지옥과 천당이 있다는 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알려 달라고 하나님에게 애원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세상에서는 모세 와 선지자들에게 들을지니라” 라고 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있고 교회가 있으니 그곳에서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서로 내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요wm음 이른바 초자연적인 심령과학 (parapsychology) 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잘 못된 신앙 이라는 것입니다.

 

천당과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고, 사람은 누구나 그 두 군데중 어느 하나에 가서 영원히 살수 있도록 되어 있고,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면, 무엇이 가장 시급할까요? 사업보다, 친구보다, 가정보다, 자식 보다, 가장 귀하고 시급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일” 즉 기도교를 믿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전도서 12장 1절에는 “곤고한 날이 오기전에 조물주를 기억하라” 고 경고해 주십니다. 다른 종교는 사람이 노력하여 그 대가로, 그 공로로, 무엇인가 축복을 받는다고 하지만, 사람의 공로로 얻어지는 종교는 얼마나 형이 하학적 (形而下學的) 입니까?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

 

일본이 제2차 대전에서 패망할 무렵, 일본 북해도 (北海島) 삽보로 라는 곳에 당시 국민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예수를 모르고 살던 “미우라 아야꼬 (三浦稜子)” 라는 미혼의 젊은 여성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다다시 (正)” 라는 애인이 있었습니다. 다다시는 예수를 잘 믿는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지루한던 전쟁이 끝나고 황폐할대로 황폐된 나라에서 그는 아야꼬와 교제하였고 만날 때마다 다다시는 아야꼬에게 전도했습니다. 그래도 아야꼬는 지식인을 자처하면서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녀는 구름 한 점없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 세탁물들을 말리우려고 빨래 줄에 옷가지를 널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얼마 안되어 그렇게 말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면서 소나기가 오기 시작합니다. 그 때, 미우라 아야꼬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무엇인가 절대적인 힘이 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획

하신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스스로 찾아 오셔서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시고, 각 인생의 생애를 주관하시고 인도해주시고 또 예수를 믿을 마음 (an inclination to believe Jesus as his/her personal Savior)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그 자체로 보면 보잘것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생을 귀하게 여기고 영원한 죽음에서 구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전제주권 (絶對的 專制主權 absolute sovereignty)을 갖고 인간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은 모든 인류중에서 오직 그의 기쁘신 뜻대로 구원해주실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고, 지나칠 사람은 그냥 지나치십니다. 이것은 순연히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이기에 인간이 하나님에게 힐문 (詰問 cross question)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18-21절을 참고 바랍니다.

 

기독교는 타율적 종교 (他律的宗敎) 이며,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는 자율적종교 (自律的宗敎)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기독교와 다른 수많은 종교의 차이점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지나가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제 나름대로 한 마디씩 말을 건네고 갑니다. 어떤 이는 “좀 더 조심했더라면 빠지지 않았을 것을,” “물에서 나올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야지,“ ”물에 빠지면 죽는 다는 것을 미리 배워 두었더라면 빠지지 않았을 것울,“ 등등으로 물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려 들지만, 물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런 충고나 의견이 필요 없습니다. 속히 누군가가 물속에 들어와서 건져내어 주는 것만을 바라고 있을뿐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그는 하늘 나라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온갖 고난과 멸시를 받으시면서 자신의 몸을 희생의 제물로 바쳐서 우리가 죽을 대신 그가 죽어 주시므로 이제 우리가 죽을 필요 없이 우리가 영원히 살수 있도록 해 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교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봅시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도심지에 높이 솟은 건물을 말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생명의 구세주로 믿는 무리들, 즉, 예수 믿는 사람들을 통 틀어서 “교회“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웅장한 건물 속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암혈과 토굴 속에서 예배를 드린다 해도 그것이 바로 교회이며, 반면에, 아무리 화려한 건물안에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이 영광을 받는다거나 하나님이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은 다른 방법으로 예배드리면 그것은 사람의 사교집단 일지는 몰라도 예배는 아닙니다. 에베소서 라는 책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성경책입니다. 1장에서 3장까지는 교회가 무엇인지 교리적으로 설명해주고, 4-6장까지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그래서 초신 자들은 에베소서 라는 신약성경을 여러번 되풀이해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합심하여 서로 모여서

주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격하여 자신의 잘못을 회개 (悔改, repent) 하고

날마다 주님을 닮아 가도록 노력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모두 은사 (恩賜, gifts)를 주셨는데 사람은 서로 생김새가 다르듯,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사도 각각 다릅니다. 어떤 분은 노래를 잘 하여 노래로 하나님에게 찬양 하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도 하고, 어떤 분은 글을 잘 써서 좋은 글을 써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어떤 분은 여행을 좋아 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목사님의 심부름을 하므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가르치기를 잘하여 교사나 목사로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어떤 분은 관리를 잘합니다. 그는 그런 재능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믿는 성도라면 누구도 은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댜. 이 은사들은 모두 자랑이 목적이 아니고 그 은사로 교회를 봉사하는 일, 즉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이어야 합니다. 은사를 남에게 자랑만 하고 교회 봉사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책망하십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은사 문제가 시끄러웠습니다. 그들은 각자 은사를 자랑만 하고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은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다 말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자랑만 말고 교회를 위하여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더 좋은 길을 보여 주겠다” 라고 하시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을 써나가면서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은사는 주님을 사랑하고 교우들을 사랑하는 교회 발전 위헤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마치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고 자랑만 하고 다니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것입니다. 모든 은사, 건강, 지식, 지혜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지고 교회를 위하여 쓰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라고 이 세상 사는 동안 잠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즉, 은사 인 것입니다. 큰 교향악단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동원됩니다. 드럼만 있어도 안되고, 섹스폰만 있어도 안되며, 클라리넷, 비올라, 바이올린만 있어도 안됩니다. 모든 악기가 다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모든 악기가 합하여 웅장한 교향악이 울려 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모든 회원은 각자의 재능으로 멋진 하늘의 교향악을 연주하면서 일생을 살아 갑니다.

 

 

교회 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들, 즉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성도들의 무리의 총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성도 (예수 믿는 사람을 성도 聖徒 라고 함) 들이 각기 은사가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런 재능을 결코 사람에게 자랑꺼리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런 성도는 앞으로 신앙 생활을 어떻게 햐여야 할까요?

 

첫째, 교회 출석입니다. 가령 몸에 붙어 있는 왼편 팔이 말하기를, “나는 이 몸에 붙어 있기 싫고, 나 혼자 넓은 주차장에 있고 싶다” 고 하면서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고

가정합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떨어져 나간 팔은 몸의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하니 그대로 말라 죽을 것이고, 왼 팔을 잃어버린 몸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으른 팔이 왼편 팔이 하던 일까지 애야 하니 더욱 힘이 들겠고, 팔이 붙어 있던 자리는 쑤시고 아플 것이고, 아니, 그 보다도 머리가 얼마나 아플까요? 아주 오래된 옛날 이야기 이지만, 이북 공산차하에서 영어를 몰래 공부하다가 붙들려서 모진 고문을 받던 때를 기억합니다. 대나무를 뾰족하게 깎아서 손톱과 살 사이로 찔러 넣는 고문을 당했는데 손가락의 아픔보다 머리가 더욱

아팠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같이 교회 생활을 함에 있어서 자기 혼자서 편하겠다고, 교회도 출석하지 않고 제 멋대로 살아 가면 결국은 그 사람은 점점, 산앙이 해이 (解弛) 해지게되고, 다른 동료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고, 그 보다도 교회의 머리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에 자주 모여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주고, 사랑해주고, 아픈 곳을 서로 싸매주고, 서로 함께, 그리스도안에서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성장해야 합니다. 어린애가 처음에는 우유로 성장하지만 크면 우유병을 버리고 밥을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렇둣 성장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5장13-14절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만복하지 말고, 자신이 성장하여 다른 사람의 지도자가 되도록 하여야 하는데 성장에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성경을 가까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구원에 필요한 지식이 모두 들어 있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생의 교과서이며 또한 성도들의 헌법입니다. 성경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을 잘 읽고, 연구하고, 암기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1784년 영국 Wales 라는 지방에 Mary Jones 라는 열살된 여자애가 있었는데, 교회에 착실히 나가는 어린애였고 성경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주일만 되면 아빠 엄마와 함께 교회에 나가서 성경말씀을 듣는 것이 그렇게 기다려지고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성경은 희귀했고, 한 동리에 성경을 가진 사람은 손가락으로 곱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소녀는 성경을 사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그때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남의 집에 다니면서 집 청소를 하고, 물을 길어주고, 애기를 보아주기도 하면서 푼푼히 모은 돈을 모두 돼지 저금통에 꼬박 꼬박 저축했습니다.

 

어느둣, 6년 세월이 흘러서 소녀의 아니 이제 16이 되었고, 저금통에는 제법 많은 돈이 저축되어 있었습니다. 저금통을 깨고, 그간에 저축한 돈을 가지고 집에서 20마일 떨어진 Bala라는 곳에 있는 Charles목사로부터 성경 한권을 샀습니다. 그때 그 소녀에게 성경책을 판 목사는 그 천진한 소녀의 마음에 감동을 받아 이듬에 London에 나가 친구들을 불어 모아 놓고 성경 한권을 구입하기 위하여 6년을 고생한 그 소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성경을 더 많이 만들어낼 성서공회를 만들자는데 마음이 하나가 되어 드디어 1802년에

영국 London에 대영 성서공회 (British Foreign Bible Society) 가 만들어지게 되어 오늘

날에는 세계 150개국의 언어로 많은 분량의 성경을 인쇄하고 있습니다.

 

가는 세월 막을 길이 없어서, 꽃다운 나이의 Mary Jones가 할머니가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지 그가 6년간 일하여 번 돈으로 사들였던 성경은 이곳 대영 성서공회에 보내 졌고 지금은 대영 성서공회 유리 상자에 보관되어 있는데 펼처진 다 낡아 빠진 성경책에는 “Originally owned by Mary Jones at the Age 16 (원래 Mary Jones가 16세 때 가졌던 성경) 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를 보는 방문객들은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저도1993년 가을 영국을 여행했을 때, Westminster 사원, 대영 박물관, Greenwich천문대, Spurgeon 목사가 목회하던 유명한 Metropolitan Tabernacle, Loyd-Jones 목사가 목회하던

Westminster Chapel 등을 돌아보고 나서 대영 성서 공회에서 책에서만 읽어 알고 있던 Mary Jones 의 성경을 보고 감격한 경험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을 연구하십시오. 젊어서 성경을 되도록 많이 외우십시오

늙어서 눈이 침침해 지면 성경을 읽고 싶어도 읽을 길이 없습니다. 귀가 어두워지면 설교를 들을수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은 기회가 있습니다. 기회 있을 때, 젊을 때, 성경을 가까이 하십시오. 성경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니이다.”

라고 성경은 시편 119“105절에 말씀하십니다. 과연 성경은 캄캄하고 험한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 앞길에서 빛의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사람이 사는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대로 살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불안해하고, 공포에 쌓여 사는 것은 성경을 멀리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잘 출석하는데 교회를 나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불신자와 같이 되어 불신자 처럼 생활하는 사이비 신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를 바로 믿지 않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성경은 신약, 요한일서 3:9에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죄를 상습적으로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음이요”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상습적으로” 란 말은 번역판에는 없지만 원문인 헬라어의 문법이 그것을 잘 들어 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모를 것이 많습니다. 왜 어려운가 하면, 자꾸 읽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일년에 계획표를 만들어 놓고,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읽어 보세요. 자꾸 읽으면 예전에 몰랐던 것들이 희미하게 혹은 환하게 알려 집니다. 성경 읽지 않고는 신앙이 절대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또 성경 읽다가 모르는 것은 교회 목사님에게 물어 보십시오. 목사님은 성도들의 신앙을 돕기 위하여 신학 공부를 전문으로 하신 분이고 생활비를 받으시면서 전적으로 성도를 돕는 분이요 믿을수 있는 분입니다. 절대로 이단자 (異端者, heretic) 에게 가서 성경을 공부하거나 그들에게 자문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는 성경을 잘 못 가르치는 이드이 있습니다.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목사가 된 분도 있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다운 지도자에게 배우라는 말입니다. 여러분께서 출석하시는 교회의 목사님은 믿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믿는 사람, 기독교 신자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생명줄이고 전화 줄과 같습니다. 기도는 어렵게 생각할 필요없습니다. 보통 사람과 대화 하둣, 내 사정을 하나님에게 경건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알리는 것입니다. 전화는 혼자서 말하는 법이 없고, 반드시 두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대화 합니다. 기도른 내가 내 영혼에서 울어 나오는 말을 일방적으로 하나님에게 고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두분이서 대화 하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음성은 들려 오지 않아도, 하나님은 영적으로 나와 교제하십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면 마음에 평안이 오고 기쁨이 옵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위로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앞길이 캄캄할때가 있지요? 기도하십시오. 내 힘으로 도저히 해결 못할 일들이 있지요? 기도 하세요. 사람이 못 한다고 하나님도 못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 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수 있는 분입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17절에 말하였고, 또한 기도를 쉬는 것도 죄라고 사무엘상 12:23에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 기도를 쉬는 것은 죄입니다. 기도를 쉬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어 온갖 세상의 염려에 시달리게 되고 마귀가 틈을 탑니다. 마귀는 사탄의 앞잡이로서 구약성경 이사야서 14:12-16절에 보면, 하나님을 옹위하던 천사가 본연의 자세를 떠나 교만하여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고 하다가 하나님에게 형벌을 받아 사탄으로 전락하여 하나님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에던 동산에 들어가서 인간을 유혹했는데 하나님은 다시 창세기 3:15에서 사탄과의 선전포고를 선언하여 그때부터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New Age 운동“ 이라고 하는 기독교 파괴 운동으로 펴져 나가고 있습니다. 초기 성도들의 전도를 사형으로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자 사탄은 이제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는데 그것이 기독교의 문화를 타락시키자는 술책입니다. ”사탄” 이란 말은 원래가 ”대적하는 자” (adversary) 란 의미입니다.

 

그런 운동은 교회에서 예배에 대한 해이한 의식 구조, 하나님은 거룩하고 두려운 분이라기보다는 사랑 많은 친구라고 하는 안이한 생각,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오락 (娛樂, entertainment) 위주로 서서히 탈바꿈을 해 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극장의 무대같이 되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구약 레위기 10장 1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에게 예배를 잘 못 드리다가 당장 목숨을 잃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이었던 나답과 아비후 라는 두 인물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향을 드리다가, 다시 말하면, 제멋대로 향불을 드렸다가 하나님의 진노 (震怒)를 사서 그 자리에서 불이 나와서 두 사람이 모두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있었던 일입니다. 무서운 경종입니다. 예배는 자기 멋대로 드려 질수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아비후와 나답들은 성경에 금하지 않았으면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에 금하지 않았다고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차잇점입니다. 자유주의는 “무엇이든 성경에서 하라는 말이나 하지 말라는 말이 없으면, 해도 된다” 한 생각이고, 보수주의는 “성경에서 하라는 말이나 하지 말라는 말이 없으면 해서는 안된다” 란 생각입니다.. 두 생각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도록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견손해 진다는 말입니다. 인격이 성장합니다. 보다 원숙한 성도가 됩니다. 금식기도도 좋지만, 뭄을 해칠 정도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금식하는 것을 남에게 공포하고 자랑세서도 안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17절에 보면 어떻게 금식기도해야 하는지 알수 있습니다. 또한 같은 말을 자꾸 되풀이 하지 말 것입니다. 마태복음 5:7을 보십시오. 하루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십시오. 아침에 일어나서 “주여, 오늘도 주의 아들이/ 딸이 일어 났습니다. 오늘도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할 수 있게 하시고 그들이 나를 통해서 예수님의 빛을 받을 수 있게 하옵시고, 하루해가 차도록 보호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주여, 오늘도 하루해를 은혜중 마치게 하시니 감사 합ㄴ키다, 오늘 지은 모든 죄를 용서 하옵소서. 그리고 단잠을 잘 수 있도록 이 밤도 주님의 은헤로 감싸 주옴소서” 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가족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교역자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지금 당면한 문ㅋ제를 놓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또한 지금 전도하고 있는 분들을 위하여 그들이 속히 예수 앞에 나아 올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공중기도는 간단히 2분, 혹은 3분 이내로, 개인 기도는 한 시간도 좋고, 두시간도 좋고, 철야도 좋습니다. 산기도도 좋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5장8절을 보면, 친족을 돌보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가족도 돌보지 않고 산기도만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누구든지 친족을 즉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부린자만도 못하다” 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기도에는 항상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자로서는 ACTS 라고 하는데

이는 Adoration(찬양), Confession(죄의 고백), Thanksgiving(감사), Supplication(간구) 의 약자로서 첫째, 찬양이 있어야 하고, 둘째, 죄의 고백, 셋째 구원에 대한 감사, 그리고 끝으로, 내가 원하는 간구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을 부르고, 그의 성호를 찬송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용서를 구한 연후에,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며, 그리고 나서, 자신이 하나님에게 구할 기도의 내용을 하나님에게 아뢰는 것입니다. 이런 네 가지 요소가 모두 있어야 됩니다. 자꾸 달라고 만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기도는 홍해를 갈라지게 하여 육지가 되게 합니다. 기도는 난공불락의 육중한 여리고성을 무너트립니다. 기도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합니다. 기도는 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기도의 위력을 생각하면서 기도에 많이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쓸 것을 미리 아시지만 기도라는 방편을 통해서 우리의 필요를 충족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함이라” 고 야고보서 4:2-3에 말씀 하십니다. 기도하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성도의 모든 생활의 기준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로마서 14장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새벽이나, 저녁 고요한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아침에는 성경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같은 지혜문서를 펴 놓고 몇 절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오늘 아침,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이렇게 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 생각을 노트에 적어 두십시오. 이렇게 하기를 한 달만 계속하시면, 자신이 변하는 모습을 스스로 느낄수 있습니다. 좋은 신앙 성장의 방법입니다.

 

세 번째로, 전도하는 일입니다. 전도는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주님의 최대의 관심사는 인간의 영혼 구원 전도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전도합니다. 전도할 마음이 생깁니다.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은 증거는 전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8절에 “성령이 임하면.....땅끝까지 이르러 순교하라” 고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말씀 하시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문에서 보면 그런 의미입니다. “내 중인이 되리라” 란 말씀은 원문에서 보면 “순교자가 되리라” 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다가 순교자가 되리라” 란 의미이지요. “증인이 된다” 란 말은 원래 헬라어로는 "esesthe mou martres" 인데, 이말은 “증인들이 될것이가” kf 말로 “중거돤다”는 동사인 “martureo" 의 명사로서 ”순교자들“ 이란 의미이고, ”esesthe" 란 말은 “된다” 란 단어인 “eimi" 동사의 직설법 미래 2인칭 복수형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나의 순교자들이 되리라“ 가 정확한 번역입니다.

 

과연, 주님의 승천시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예수님의 이 말씀을 헬라어로 들었던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 모두 세계 각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 당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감옥에 갇혀 있다가 도망쳐 나오는 길에 부활 하신 주님을 만나자 “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물었는데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로마성으로 들어 가는 길이라” 고 하셨는데 이 말이 베드로의 마음을 찔러, 베드로는 그 길로 로마에 들어 가 자수하여 얼마후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안드레 라는 제자는 십자가를 X 자 모양으로 지고 순교했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 라는 제자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다 돌에 맞아 순교했고, 바울 선생이 그렇게 아끼던 디모데 라는 젊은 목사는 에베소 라는 곳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교인들이 가면을 쓰고, 이방신을 위하는 가장 행렬을 벌리자 이를 만류하는 과정에서 성난 군중에게 몽둥이고 뒷 통수를 맞아 순교했습니다.

 

영국 서부 Glasgow 라는 곳에 가면, David Livingstone 선교사의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 박물관 1층에는 사람의 팔의 뼈가 진렬되어 있는데 이 뼈는 바로 David Livingstone 이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이웃 마을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토인들 몇 사람과 같이 산을 넘던 도중, 갑자기 어디선가 밀림 속에서 사자가 나타나 Livingstone 목사의 팔을 물어 뜯어 팔이 절단되었습니다. 그래도 Livingstone 목사는 나머지 한 팔을 가지고 죽기까지 전도하였고, 그는 자기가 평생을 전도하던 그곳 토인들을 잊지 못하여 마지막 운명하면서 유언하는 말이, “내가 죽거든 내 몸은 영국 내고향 Glasgow에 보내 주고, 내 심장은 이곳에 묻어 달라“ 하여 그의 심장은 지금도 아프리카 그가 목회하던 마을에 묻혀 있고, 사자에게 절단된 팔은 영국의 고향으로 보내져서 그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Livingstone 목사의 제자 중 한 사람인 토인은 아프리카 토인들에게만 흔히 걸리는 이른바 Elephant Disease 즉 코끼리 병에 걸려 다 죽게 되었는데 그의 마지막 소원은 이웃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어느날 Livingstone 목사가 목회하던 교회 근처에 있는 자신의 집을 뻐져 나와 험한 산을 넘고 또 다른 산을 넘어 이웃 마을에 가서 부족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였고, 돌아 오는 길에는 너무도 다리의 상처가 악화되어 부어 오른 다리를 달래면서 걸어오다가 더 이상은 걸을 수 없어서 누어서 등으로 비벼대면서 집에까지 겨우 도착하였으나 너무도 지쳐서 도착하자마자 문간에 쓰려져서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참으로 놀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보는 모든 Livingstone 목사의 교인들이 감동을 받아 더욱 신앙이 성장하고 전도에 힘썼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사람은 남에게 이런 복되신 소식을 전하려는 마음에 불타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어떤 명의 (名醫) 의 처방으로 좋은 약을 써서 완쾌 되었다면, 죽을 병에 걸린 다른 환자들에게도 그 명의를 소개하지 않겠습니까? 꼭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전도를 많이 하는가에 따라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도하는 씨만 뿌리면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3:6-7을 참고 하십시오. 바울은 그의 디모데라는 청년에게. “기회가 되던 되지 못하던 열심히 전도하라” 고 디모데후서 4:1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로 되어 있지만, 원문의 의미는 “기회가 있든지 없든지” 란 의미입니다. 언제나 전도하라는 말입니다.

 

가만 따지고 보면, 가장 시급한 것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믿기를 뒤로 미루다가 어떤 연고로든지 죽게 되면, 그날이 그 죽은 사람에게는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이 100 퍼센트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아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에게 줄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믿게 하는 복음 전도입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예수를 모르다가 저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면 그는 평생에 그 은혜를 잊지 못하여 가장 친근한 벗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 신앙이 성장하면, 은혜 받고 자신의 남은 여생을 하나님에게 바치겠다고 결심하고 제가 원장으로 12년간 일하던 동부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인 성경 연구원에 입학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나면 정식 미국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된 분들이 몇분됩니다.

 

1994년 8월말에서 9월중순까지 러시아 모스크바에 갔을 때, 저의 제자 한 사람이 그곳 우크라이나 지방, "네이쁘로뻬떼르스크 (Dneipropetersk)“에서 열심히 선교하고 있음을 보고 마음이 즐거웠던 일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제가 옛날 필라델피아에서 공부할 때, 안경을 맞추기 위하여 어느 미국 안경점에 들린적이 있었는데, 안경점 주인은 유대인이 었습니다. 인사하는 과정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다니는 신학생이라고 소개했더니, 주인은 반색을 하면서,“Do you know Dr. Philip Hughes? " 라고 묻기에 저는 너무 반가워서, ”Yes, he is my Th.M advisor." 라고 했더니 무척이나 반가워 하면서, “He saved me and my wife." 라고 하면서 안경 값을 반이나 깎아 주었습니다. 그 의사의 이름은 Dr.Frank Foedick 이었는데 지금도 그때 감격을 잊지 못합니다.

 

당시 Philip Edgecumbe Hughes 교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약분야의 석사 과정을 공부하던 저의 지도 교수 세 분 중 한 분이어서 늘 그 분의 학문과 인격에 감화를 받으면서 나도 그 교수처럼 되리라 하는 막연한 기대 속에 꿈을 키우던 시절이 었습니다. Dr. Hughes는 영국 태생이었으나 Australia 의 Melbourne에서 신학을 기르치다가 미국에 청빙되어 제가 공부하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만나게 된 분입니다. 저에게 영향을 주신 분들이 많이 있지만 Hughes교수를 잊을 길이 없습니다. 그는 제가 졸업한 후 몇 년후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다른 한 지도교수 평생을 독신으로 지나신 Dr. John Skilton 도 소천하셨고, Dr. Richard Gaffin 만 생존합니다.

 

옛날, 1930년대 우리 나라가 일본 사람들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온갖 핍박을 당하던 때, 평안도에 최봉석이라는 전도사가 계셨는데 공부보다도 전도에 더 흥미가 있었습니다. 그 분의 별명은 최권능 전도사 라고 했는데 평양 전차정거장에 서 있다가 전차에 올라타고는 큰 목소리로 “예수 천당” 이라고 웨치고는 내려오곤 했습니다. 그 분은 나중에 목사로 안수를 받고 큰 일을 한 분이지만 진정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죽어 가는 영혼들이 보이게 마련이고 그 영혼들을 안고 울게 마련입니다. 우산 장사는 늘 하늘만 처다 보고, 신발 장사는 늘 지나 가는 사람들의 신발만 처다 봅니다. 거기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길에 오고 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처다 봅니다. “저 분은 구원을 받은 분인가? 아니면 아직도 구원 얻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 갈 사람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합니다.

 

넷째,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생활입니다. 헌신이란 함은 몸으로 헌신하고, 시간으로 헌신하고, 물질로 헌신함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라디오 선교 방송을 중심한 튤립 교육 선교회 같은 규모가 작은 선교의 사역도 물질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세계 선교를 지향하는 큰 선교 사역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래서 믿는 성도들은 다른 영혼도 예수를 믿고 내가 누리는 축복을 누리도록 전도하는 일을 돕기 위하여 힘에 미치는 대로 물질로, 헌금도 하고, 시간으로 헌신하고, 뭄으로 헌신하기도 합니다.

 

요wm음에는 선교가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버려서, 선교 라는 이름으로 온갖 잘 못된 비리 (非理) 들이 많이 성행하여 전도에 도움보다는 병폐가 되는 일들이 많이 있어서, 물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육신적으로 헌신할 때, 돕고저 하는 선교 기관에 대한 사전 예비 지식을 갖고 선교 현장이나 실제로 사역하는 모습을 잘 주의하여 지켜 본후에 믿을 만한 선교 기관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수입 중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기르치지만 어찌 열의 하나뿐이겠습니까? 구약시대에는 열의 하나를 바쳤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중에서 레위지파 사람들은 전적으로 성전의 일을 전담하여 별도로 수입이 없으므로 다른 11 자파가 각가 수입의 십분의 일을 헌금하여 그것으로 레위 사람들이 생활하도록 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열의 하나가 아니라 우리 몸,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전부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생활비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나머지는 선교에 헌금합니다.

 

하나님에게 드린 시간과 물질과 헌신은 반드시 하나님을 위하여 죽,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드리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그 누구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할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선교 하는데는 물질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구원 얻은 우리는 아직도 구원 얻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하는일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이나 시간 등은 하루 아침에 하나님이 원하시면 모두 가저 가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 이지만 한국에서 화폐 개혁이 있었을 때 일인데, 어느 교회 장로님이 평생 교회에도 인생하고 남에게도 인색하여 많은 재산을 모아 두었으나 화폐개혁때에 가마니에 들어 있는 많은 지폐를 그냥 내어 버리게 되자, 그 분이 하는 말이 “이럴줄 알았더라면 이 돈 가지고 교회에 헌금이나 해 두었더라면 한이 없을 텐데.....“ 라고 하더란 것입니다.

 

다섯째, 구원 얻은 사람은 시간을 선용합니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생은 누구나 정해진 시간을 살고 나면 하나님에게 가야 합니다. 시간이 황금이라는 말도 있지만 시간은 생명입니다. 시간을 잘 못 사용하면, 늙어서 후회 막급합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사람은 늘 시간을 쪼개어 선용 (善用) 합니다. 인생의 성패 (成敗) 가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이 시간을 얼마나 슬기롭게 사용하였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면서 꼭 쓸 곳에 쓰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낭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살림을 잘 하는 사람은 낭비가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은 시간을 분별없이 허비합니다. 이렇게 되면 남은 것은 패가 망신뿐입니다. 성경은 에베소서 5:16 에 세월을 아끼라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아무리 시간을 아껴쓰고 지혜롭게 사용해도 시간은 부족하고 아쉬운 것이 인생입니다. 한번 흘러간 세월을 다시 돌아 올줄을 모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이란 오늘뿐입니다. 내일은 있을수도 있고 없을수도 있습니다. 내일은 아무도 기약할수 없습니다. 어제는 이미 지났습니다. 잘 살았건 못 살았건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요 다시 돌아 오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오늘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히브리서 3:13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며, 너희중 누구든지 악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원을 아낍시다. 세상 범사에는 기한이 있습니다. 날때가 있고 죽을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매일 매일 기록하는 일기장에는 무엇인가 오늘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살았다는 신앙 고백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하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면서 왜 기독교만이 참 생명의 종교이며, 다른 종교와 기독ㄱ와의 근본적인 차잇점이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사람이란 스스로 혼자서는 살지 못하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과 죄로 인하여 죽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히 살게 되는가를 공부했으며, 왜 예수를 믿어야 하며,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믿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해아 하는지 등등 여러 가지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공부했습니다.

 

이 책자를 읽으시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깨달으신 분은 지체 없이 다음 주일 아침에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교회로 가장 가까운 교회에 축석하시어 목사님을 만나 뵙고 앞으로 신앙생활을 지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때 주의 할 것은 성경을 신실하게 가르치는 교회를 택하십시오. 교회란 이름을 가진 곳은 많지만 성경을 성경대로 가르치지 않고, 성경과 다른 교리를 가르치는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베드로후서 2장에 보면, “민간에 이단이 많이 나와 있다” 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참 교회” 와 “거짓 교회” 가 있습니다. 참교회의 특징은 세가지가 있는데, 첫째, 바른 말씀의 선포가 있고, 둘째, 바른 성례식 (세례식과 성찬식) 이 있고, 셋째로,

바른 권징이 있는 교회입니다. 좀더 설명을 한다면, 어떤 교회에서는 말씀을 전하지 않고

음악만 한다든지, 어떤 의식만 한다든지, 혹은 성경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한다든지 합니다.

이것은 참교회가 아닙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성례식이 없습니다. 세례식도 성찬식도 없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교회입니다. 또한 어떤 교회에서는 교인이나 집사, 장로, 목사가 잘못해도 아무런 벌이 없고 징계가 없습니다. 이것도 참 교회가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믿는 교회는 일단 안심하십시오. 어떤 교회에서는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보다 먼저 태어난 피조물이라고 가르칩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하나의 도덕적 성현군자 (聖賢君者) 정도로 믿습니다. 참다운 구세주로 믿지 않는데 이는 참교회가 아닙니다. 어떤 교회는 마리아를 숭상하면서 마리아에게 예배하기도하고 또 천사에게 경배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참 교회가 아닙니다. 또한 연옥을 믿는다 든지, 연보를 많이 하면 그것이 공로가 되어 구원을 얻는다든지 하는 가르침은 비성경적이며 참 교호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친구를 따라서, 또 교인들을 따라서 혹은 목사님이 하시는 광고를 듣고 부흥집회에 가게 되는 일이 있게 되는데 이때 주의할 점은 옛날과 달라서 요지음엔 건전하지 못한 부흥사가 참 부흥사보다 더 많은 형편이어서 주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부흥사는 설교하면서, “어제밤 철야하고 교회에서 사택으로 돌아가는데 하늘에 큰 별이 나를 교회에서 집까지 인도하고 사라졌습니다.” 라는 웃지 못할 말을 서슴없이 하는 분도 있습니다. 평신도가 성경에 무식한 것을 기화로 이런 거짓 말을 강대상에서 하는 거짓 부흥사도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지.정.의가 바로 서야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할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강대상에서 흘러나오는 설교 말씀이 과연 성경적인가 아니면 사람의 조작한 소리인가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목사가 성경에 어긋나는 말을 해도 “아멘” 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성경에 무식한 사람입니다. 이 시대에 많은 이단들이 일시적이나마 성공하는 것은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너무 모르고 성경을 연구하지 아니하므로 성경에 무지하기 때문에 교인들을 우롱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에게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단에 빠져서 기산을 탕진하고 가정이 파괴된 사람들의 사례가 보고 되어 들어옵니다.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참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단들에게는 공통점 몇 가지가 있는데, 대개 이렇게 요약 할수 있습니다. 즉, 헌금을 강요하고, 지도자가 독재적이며,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고, 지도자의 이성관계가 복잡하고,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합니다. 이런 교회는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아니면, 후에 반드시 빠져나오지 못할 함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기도하는 중에, 좋은 교회를 정하면 말할 수 없는 축복을 받습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목사님의 지도를 바로 받으면 신앙생활의 비약적인 발전을 기할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른 교회를 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교회 생활을 하던 중 교회의 비리가 발견되면 참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위에 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라도 완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잡음이 있게 마련입니다. 교리에 관계되지 않는 웬만한 일을 그대로 참으시면서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반드시 옮겨야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가 비성경적인 교훈을 할 때, 또한 인격적으로 존경하지 못할 비윤리적인, 비도덕적인 일을 행할 때에는 새로운 교회를 찾아야 할것입니다. 많은 분들은 “교회는 모두 썩었으니

교회에 출석할 필요 없다“ 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생선가게에는 썩은 생선도 가끔 있지만 그렇다고 생선가게에 있는 모든 생선이 썩은 것은 아니듯, 잘 못된 교회도 있지만 바른 교회에도 아직은 여기저기에 찾으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인생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합니다. 신앙이란 형태가 많으나 위에서 언급한 모든 바른 지켜 나가면 반드시 신앙생활에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내 영혼이 구원을 얻는 일, 영원히 사는 길을 마련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긴급합니다.

 

이제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으신 줄 압니다. 아직 예수를 모르시는 분은 다시 한번 인생문제를 심각하게 진지하게 생각해 보셔서 영생을 보장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에게 나와서 구원 얻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미 예수를 믿으시는 분들은 이 책자를 통해서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더욱 큰 진전이 있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에게 !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이사야 55장 6-7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장 12절-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태복음 16장26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 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후서 6장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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