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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물세례와 성령세례

by 【고동엽】 2011. 9. 15.

물 세례와 성령세례
                                                                                                                              
물세례

바울 사도는 로마서 6장 3절에서 세례는 주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물세례를 가리키는데, 물세례는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의식이므로  죄 사함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구약의 할례와 같은 구원의 외적 표식이 필요하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스스로 확증하였듯이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외적인 구원의 흔적으로서 물세례가 필요하다.

구약의 할례가 신약의 세례를 예표한 것은 바울이 고전 10:2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모세에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했다. 따라서 세례는 벧전 3:21에서 말씀하는 대로 죄 사함을 통한 구원의 표이다. 

물세례는 죄에 대하여 죽음을 상징한다.  로마서 6장 4절에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사하다라고 한 동사 쉬네타오멘(συνεταφημεν)은 함께라는 뜻의 쉰(συν) 전치사와 매장하다라는 동사 다프토(θaπτω)가 합성된 말로 '함께 묻히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주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의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다.

 

골 2:12에서도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어 있듯. 세례는 일종의 장례이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삶을 끝내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반드시 한 번 죽어야 한다. 거듭나기 위해서  죽는 죽음 이는 곧 주님을 믿고 영접할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루어지지만 세례라는 상징적 의식을 통하여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죄에 대하여 죽으셨지만,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다시 사심으로써 죄와 사망에게 패배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와 사망을 이기신 분이시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였다면 주님의 죽으심에만 연합한 것이 아니다. 주님의 부활에도 연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6장 4절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심같이 우리도 살리셔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한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죄에 대해 죽게 하신 것은 영적으로 죽어있던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시 살리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시는 것이다. 새 생명이란 헬라어로 카이노테티 조에스(καινoτητι  ζωης)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생명의 새로움'이라는 뜻이다. 카이노테티는 '새로움'이라는 중성 명사 카이노테스(καινoτης)의 여격(與格)이다.





새 생명은 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카이네 크티시스(καινη κτισις)인데 새 것이라는 카이나(καινo)

라는 말과 함께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류가 된 것을 뜻한다. 우리의 껍데기는 변하지 않았어도 본질에 있어서는 새롭게 창조된 새 인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과거 아담에 속한 인류가 아니다.

 

 

 

성령세례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막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리라'

행 11:16, 고전 12:13 등에서 말씀하고 있다.

물세례가 원래 물 속에 잠기게 한다는 뜻이라고 했으므로 성령세례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한다는 말이다.



성령은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는 뜻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오셔서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성령세례란 주님과의 상호 내주(Inter-Residence)이며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Union)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물세례보다 성령세례이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육체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다(신 10:16, 렘 4:4)고 했기 때문이다. 즉, 외형적인 어떠한 의식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오셔서(고후 1:22, 갈 4:6) 우리가 이제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람(롬 8:9)으로 변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을 유심히 연구해 보면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구분은 성령 강림 시점을 전후로 개념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것은 행 1:5에서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볼 때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는 주님께서 승천 후 성령으로 다시 오심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 전까지는 실질적으로는 요한의 물세례의 개념을 계승한 물세례만 행해졌던 것이다. 그때의 물세례의 의미는 앞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주실 속죄와 구원을 미리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령 강림 후에는 물세례가 더 이상 요한의 물세례가 아니라 구원의 완전한 표(벧전 3:21)가 되었다. 성령 강림 이후에 제자들에 의해 시행된 물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구원에 성도가 연합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물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 강림 이후에 물세례는 성령세례를 받은 자에게 행한 것으로 보아진다. 행 10:47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막으리요' 성령 받은 자에게 물세례를 준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와 실제로 연합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물세례보다 앞서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세례가 물세례와 성령세례로 구분되는 것은 세례가 거듭남의 원리이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원리는 곧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개념을 알아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거듭남이란 원어로 요 3:5에서는 겐나오 아노덴(γενναωaνωθεν)이라고 하여 '위로부터 난다'라는 뜻이고, 벧전 1:23에서는 아나겐나오(aναγεννaω)라고 하여 '다시 태어난다'라고도 말한다. 거듭남이란 한 번 죽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영적인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거듭남의 원리에서 물세례는 죄에 대하여 죽은자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다시 사는 것을 뜻하며, 성령세례는 영적으로 죽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되어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세례는 언제 받나?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성령 세례를 받았으며 그 받은 것은 또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령 세례는 모든 믿는 자가 다 받는 것은 아니며(행 19:2, 행 8:16) 진정으로 회개(행 11:18)하여 삶이 변화된 자의 마음에 주님이 오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는다고 하는 자들도 얼마든지 성령 받지 못하고 사는 자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주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므로 주님이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언제까지나 스스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자들이다.

한편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그것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보통의 신자들이 성령 받고 주님 안에서 온전히 살게 되는 시점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운 것이다.

주님을 영접하는 자가 회개하는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를 거짓됨 없이 받아들일 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는 자신의 영(성령)으로 우리의 마음 안에 비둘기처럼 온유하게 임하신다. 성령을 받은 것을 언제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성령 받은 성도에게는 성령의 권세와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므로 비로소 성령 받은 사실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시점보다는 우리의 변화된 삶이다. 성령 받은 자는 어느새 자신의 가치관이 바뀌고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바뀌며 성품과 인격이 바뀌는 내면적, 외형적 변모가 이루어진 것을 느낀다. 이전에 중요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이 이제 다시는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대신에 새로운 것이 자신의 인생의 기쁨이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주님의 구속하신 희생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날마다 구원의 감격을 잊지 않고 감사와 찬송이 내면에서 우러나올 뿐 아니라,  우리의 중심은 온통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께로만 향하게 되며 우리의 모든 생각은 하나님 나라의 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주님과 우리가 연합하여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존재는 무의미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주님이 우리의 참 주인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며 우리로부터 주님의 성품을 나타나게 하셔서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일은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는 과정이다. 즉 성령 세례 받은 결정적 증거는 바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난다. 성령의 열매는 갈 5:22의 말씀대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아홉 가지로 나타나는데 이는 바로 주님의 성품이 신자의 마음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할 때 비로소 성령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성도에게서 성령의 열매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 나라에 처음 들어온 성도는 어린아이(히 5:12)와 같다. 나무가 싹이 나고 자라서 점차 큰 나무가 되어지면서 열매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고 하나님 나라의 법도를 깨달아 감으로써 점차 자라서 장성한 자가 될 때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자신의 옛 성품들이 주님의 성품들로 바뀐 것을 확신하며 그 안에서 변함없이 사는 자라면 그대로 주님께 순종할 때 영원한 하나님 나라 문턱을 넘는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성도가 진정으로 사모하여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보다 오히려 성령의 열매를 더 사모해야 할 것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

 

바울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세례받음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세례는  단순한  의식(儀式)이나 성례전(聖禮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은유적 의미를 갖는다.

 

세례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은 다른 구절에서도 본절과 비슷한 연관성을  지닌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계기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게 된 경우가 그러하다(고전 10:2).

 

그들은 처음으로 모세와  연합하였고, 모세의 지도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모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며, 함께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하며(고전 12:13), 이것은 성도의 신령한 체험이라느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와 성찬  자체에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이 있는 것처럼 가르침으로써 교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의 죽으심에 세례받아 연합되었다는  것은  성도들 역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함께 죽은 자된 성도들은 죄에 종노릇하던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계속 죄에서 종노릇하는 신분에  머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킴으로써 바울은 많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더욱 처절하게 회개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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