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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豫定論에 대한 비판

by 【고동엽】 2011.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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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豫定論에 대한 비판 -

Ⅰ. 서 론

 

Ⅱ. 바르트 신학의 역사적 배경

Ⅲ. 바르트의 예정론

1. 전통개혁신학의 이중예정론 거부

2. 예수 그리스도 일원론

3. 보편 구원론적 전택론

Ⅳ. 성경신학적 비판

1. 계시 진리인 이중예정론

2. 예정론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

3. 특수주의적 전택론

Ⅴ. 결 론

 

 

 

Ⅰ. 서 론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20세기 스위스가 낳은 최대의 신학자로 추앙되고 있다. 바르트가 타계한 지 51여 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의 신학적 영향력은 약화되지 않고 있다. 현재 구미 각국의 대표적 신학자들 중 거의 대부분이 바르트 신학의 영향권 안에서 신학 작업을 수행하고 있음은 이를 잘 입증해 준다. 예를 들어 영국의 토렌스(T. F. Torrance), 화란의 벌콥(Hendrikus Berkhof), 독일의 몰트만(Jürgen Moltmann)과 윙엘(Eberhard Jüngel), 미국의 블뢰쉬(Donald G. Bloesch)와 브로밀리(Geoffery W. Bromiley) 등은 바르트의 신학적 통찰과 착상을 계승하는 신학자들이다. 위의 여러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바르트 학회가 구성되었고, 거의 매년 “바르트 신학 국제회의(International Congress for the Theology of Barth)”가 열리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20세기 현대신학을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바르트 신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보여진다.

 

서구 신학의 영향권 아래서 신학작업을 수행해 온 한국 신학계에도 바르트 신학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지난 50년대 예장교단과 기장교단이 분열된 사건에도 바르트 신학의 부정적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60년대 예장 통합과 합동측이 분열될 때도 바르트의 에큐메니칼 신학은 논쟁의 핵심 주제였다. 또한 구미 자유주의신학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수용해 온 감신대 교수들의 주류가 바르트주의자인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연세대 신학과를 포함한 일반대학교 내 신학과의 교수들 주류가 바르트 신학에 동조하고 있음 또한 신학계에서는 상식에 속한다. 결국 청교도적 정통 보수신학, 즉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을 주창하는 몇몇 보수신학교를 제외하고, 한국의 신학계는 바르트주의가 지배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바르트 신학의 이러한 국내외적 인기와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확신은 바르트 신학이 근본적으로 비성경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바르트 신학이 성경계시에 비추어 정확하고 예리하게 비판,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한국 신학계에서 바르트 신학에 대한 정당한 평가 작업은 규모있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여지며, 이 사실은 바르트 신학의 부정적 영향력을 지속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성경권위에 기초한 복음주의적 개혁신학을 지향하는 한국교회는 바르트 신학에 대한 성경적 비판 작업을 통해 교회의 신학적 순수성을 보수해 나가야 한다. 물론 혹자는 필자에게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여타 과격한 급진신학에 대한 비판이 더 시급한 문제가 아니겠느냐고. 그들 급진신학에 비하면 바르트 신학은 자유주의신학을 대적한 상당히 보수적인 신학이 아니냐고. 물론 필자 또한 이 질문들의 부분적 타당성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위의 질문 또한 바르트 신학에 대한 질문자들의 자기류의 ‘해석’을 반영하고 있으며, 필자는 질문자들의 그 ‘해석’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르트 신학이 여타 급진신학(해방신학, 종교다원신학, 해체신학 등)에 비교될만한 과격성과 급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필자는 주장하는 것인가? 대답은 독자들이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예”이다. 필자가 보기에 바르트의 신학은 사도시대 이후 이레니우스 - 어거스틴 - 루터, 칼빈 - 전통개혁신학으로 이어지는 정통신학의 계보에서 크게 이탈되었다. 그의 계시론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계시의 영감과 무오, 신적 권위, 통일성 등을 부인하고 있다. 또한 그의 신론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원성보다는 사랑의 속성을 강조함으로 인간주의적으로 변형되었다. 그와 더불어 바르트의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보다는 그의 성육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균형 파괴의 오류를 범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자체가 -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아니라 - 화해사건이었다는 바르트의 착상은 성경적 지지를 얻지 못한다. 구원론에 있어서도 인간의 의지적 결단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 펠라기안주의(Pelagianism)를 지향하고 있으며, 종말론에 있어서도 보편 구원론으로 극단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위에서 지적된 여러 가지 오류보다도 더 과격하고 급진적인 이탈을 보여주는 바르트 신학의 주제는 예정론 또는 선택론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바르트의 예정교리는 전통개혁신학이 하나님 주권사상에 기초해 확립한 이중예정론을 철저히 거부하는, 그리스도 일원론적인, 급진적 변혁의 산물에 불과 하다. 본 논문의 목적은 바로 바르트의 예정론을 성경적 입장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데 있다. 전통개혁신학의 성경적인 업적을 적극 수용, 계승하면서, 그 안에 내재해 있는 비성경적인 오류와 미숙을 개혁해 나가고자 하는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바르트의 예정론을 치밀하게 비판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 비판적 논의를 통해 바르트 신학의 비성경적 요소를 갈파함으로 바르트 신학에 대한 정당한 평가 작업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제Ⅱ장에서는 바르트 신학의 역사적 위치를 사상사적 관점에서 조망할 것이다. 그리고 제Ⅲ장에서는 바르트 예정론의 구체적인 내용을 논의하고, 이어서 성경신학적 비판을 가한 뒤(Ⅳ장),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려보고자 한다.

 

바르트 신학이 한 시대를 풍미한 이후 구미의 신학계는 엄청난 정체혼미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각종의 급진신학 - 해방신학, 사신신학, 세속화신학, 해체신학, 종교다원주의 - 이 태동되면서 서구 자유주의신학계는 혼돈과 무질서에 빠져 있다. 한편 전통개혁신학을 계승하는 복음주의 신학이 학문적인 발전을 통해 영향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지만, 성경 자체의 논리 맥락이 증거하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 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시점에서 ‘성경신학’의 태동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으며, 성경신학의 입장에서 바르트 신학을 비판적으로 논구함 또한 가치있는 일이라 보여진다.

 

Ⅱ. 바르트 신학의 역사적 배경

 

바르트의 예정론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와 비판에 앞서 그의 신학이 어떤 역사적 배경 가운데서 태동되었는가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역사적으로 바르트의 신학은 “말씀의 신학”, “위기의 신학”, “변증법 신학”, 또는 “신정통 신학”등으로 지칭되어 왔다. 바르트 신학에 붙여진 이 이름들은 바르트 신학의 특징적 모습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말씀의 신학”이란 별명은 바르트가 하나님 말씀으로의 복귀를 강조한 사실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바르트가 공식적으로 신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1910년대의 유럽 신학계는 하나님의 말씀이 철저히 무시되었던 신학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신학계를 지배한 학파는 슐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 1768∼1834)의 현대주의를 계승한 자유주의신학파였다. 이 학파의 주요 인물에는 릿츌(Albert Ritschl, 1822∼1889), 헤르만(Wilhelm Herman, 1846∼1923), 하르낙(Adolf Harnack, 1851∼1930), 트뢸치(Ernst Toeltsch, 1865∼1923) 등의 철학적 신학자와 궁켈(Herman Gunkel, 1862∼1932),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1918), 쉬트라우스(David F. Strauss, 1808∼1874) 등의 비판주의적 성경신학자가 포함된다.

 

자유주의신학은 전통개혁신학과 루터파 정통신학에 대한 신학적 반항으로 태동되었다.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통적 입장을 거부하고, 역사적 비평방법(historical-critical method)을 이용, 성경을 인간적 문서 조각의 일관성 없는 집합체로 격하시키게 된다. 성경권위의 추락은 결국 모든 성경적 교리의 체계적 왜곡을 산출했다. 하나님의 영원성, 초월내재성, 주권성, 전능성 등이 부인되었고, 작정론과 예정론 그리고 섭리론 등이 부인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는 가차없이 거부되고, 인간의 자연적 선성(goodness)과 인간 이성의 자율성이 강조되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셔서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부인되고, 예수는 윤리적 모범을 보여준 한 인간으로 묘사되었다. 초자연적인 성령의 사역(중생, 성화) 또한 인간적인 영향력과 영감의 산물로 이해되었다. 결국 성경적인 기독교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인간의 영광과 인간의 왕국에 대한 비성경적 주장이 당시의 신학계와 교회를 부패와 타락으로 치닫게 하였다.

 

바르트는 이 시대의 아들로 태어나 헤르만과 하르낙 등 자유주의신학의 대표자들 밑에서 신학 수업을 하였다. 따라서 바르트의 신학 저변에는 자유주의신학의 학문적 영향이 깊이 자리해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자유주의신학의 예리한 비판가로 변하게 되었는가?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다. 첫째는 바르트의 목회경험이고, 둘째는 세계 1차 대전에 대한 그의 신학적 스승들의 태도였다. 스위스의 작은 도시 자펜빌(Safenwil)에서 바르트는 1911∼1921년 사이에 작은 교회를 목회하면서 매주 여러 번 설교 준비를 하게 되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바르트는 성경의 ‘이상한 신세계(strange and new world)’에 접하게 된다. 성경의 가르침은 자유주의신학의 가르침과 너무나도 판이했다. 자신의 자유주의신학적 입장은 설교에 방해물이 될 뿐이었지만,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설교에 새로운 힘과 희망을 공급해 준다는 사실을 바르트는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었다. 이 경험은 그의 신학적 입장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 또한 바르트의 신학적 변화에 주된 역할을 했다. 당시 빌헬름(Kaiser Wihelm) 황제의 전쟁정책에 대한 지지성명이 바로 그의 신학적 스승들에 의해 발표된 것이다. 바르트의 직계 스승인 헤르만과 하르낙이 전쟁 지지성명에 동조한 사실은 바르트에게 자유주의신학의 진리성에 대한 깊은 회의를 심어 주었다. 결국 그는 자유주의적인 성경관, 윤리관, 교의학 등이 근본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뒤, 성경속에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갈구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성경연구 노력의 산물이 1919년 출판된『로마서 주석』(Der Römerbrief)이었다. 그는『로마서 주석』에 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며,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종교와 경건은 인간의 자기 영화를 추구하는 교만의 산물임을 피력하였다. 또한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강림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 운동에 여러 신학자들이 동참하면서 유럽 신학계의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는 투르나이젠(Edward Thurneysen, 1888∼1974), 고가르텐(Friedrich Gogarten, 1887∼1967), 불트만(Rutolf Bultmann, 1884∼1976),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 베버(Otto Weber, 1902∼1966)등이 포함된다. 이 학파에 신정통신학(Neo-orthodox)이라는 별명이 붙여지면서 미국의 니버 형제(Reinhold & Richard Niebuhr) 또한 비슷한 신학적 입장을 천명하게 된다. 이 신학파가 “신정통 신학”파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현대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종교개혁의 정통신학을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신정통 학파는 60년대까지 구미의 신학계에 최대의 세력을 형성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바르트는 신정통주의의 대표로서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재해석하고 전통개혁신학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신학적 저술을 많이 남겼다. 특히 그의 주저『교회 교의학』(Die Kirchliche Dogmatik)은 총4부 14권의 대저작으로 칼빈과 슐라이에르마허 이후 최대의 교의신학적 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1부는 말씀론, 2부는 신론, 3부는 창조론, 4부는 화해론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5부 종말론은 집필되지 못하였다. 너무 방대한 저작이어서『교회 교의학』의 전권을 상세히 비판적으로 논구하는 것은 엄청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필자는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예정론 또는 선택론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바르트는 그의 선택론을 신론의 일부분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는 전통개혁신학의 입장을 따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정론은 전통개혁신학의 이중 예정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필자는 그의 선택론이 전통신학의 발전적 계승이 아니라 ‘반항적 왜곡’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Ⅲ. 바르트의 예정론

 

1. 전통개혁신학의 이중예정론 거부

전통개혁신학은 어거스틴,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의 하나님 주권사상에 기초한 이중예정론(선택과 유기를 포함한)을 확립하고 성경적 교리로 가르쳐 왔다. 그러나 바르트는 전통개혁신학의 이중예정론을 거부하고, 혁신적인 선택론을 피력한다. 바르트는 “은총의 선택(Gnadenwahl) 교리가 복음의 총체(die Sume des Evangeliums)”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은총의 선택교리에서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혜로운 언약적 선택이 바르게 확립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은총으로서의 선택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며, 선택으로서의 은총은 하나님의 자유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 인간과의 교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정초시킨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신, 즉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에 기초한 선택은 선택의 반대 개념인 유기를 포함하는 예정(die Prädestination)의 일부분이 아니다. 바르트는 예정론에 유기를 포함하는 것은 복음의 총체인 은총의 선택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어거스틴, 칼빈, 그리고 도르트 대회(Synod of Dort) 모두 복음적 요소인 선택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중예정(die doppelte Prädestination)을 수용한 것은 예정론의 복음적 성격을 손상시킨다고 피력한다. 전통신학의 이중예정론을 거부하고 선택론으로 대체시키려는 바르트의 시도에서 우리는 그의 신학적 과격성과 급진성을 발견하게 된다. 바르트의 예정론은 선택의 의미에서만 은총의 복음일 뿐, 유기의 어두운 부분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자신의 선택론을 변호하면서 선택론의 세 가지 요소를 설명한다. 첫째는 은총의 선택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유, 둘째는 자유로운 결정속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자유속에 있는 의이다. 바르트는 이 세요소 모두가 궁극적으로 피조물에 대한 축복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의 선택론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유기하시겠다는 주권적인 결정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 대한 저주와 유기를 결정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 주권사상과 바르트의 신론간의 근본적 갈등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바르트에게 있어서 절대주권적인 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다음 장에서 좀더 상세한 비판을 피력하기로 하고, 좀더 바르트의 주장을 논의해 보자.

 

바르트는 예정론(이미 선택론이 되어버렸지만)의 정당한 기초가 무엇일까를 논구한다. 먼저 바르트는, 전통적인 어거스틴주의와 칼빈주의는 어거스틴과 칼빈의 사상을 재해석할 뿐이므로 정당한 기초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본다. 둘째로 바르트에 의하면 예정론 또는 선택론의 실제적 유용성이 반드시 그 교리의 진리성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셋째로 복음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신앙과 불신앙의 반응이 함께 나타나는 삶의 경험 또한 선택론의 정당한 기초는 아니다. 넷째로 아퀴나스 등이 주장한 바대로 “하나님의 주권이 예정과 선택의 기초이다”라는 명제 또한 바르트에게는 추상적인 신론적 명제일 뿐, 구체적으로 선택하시는 성경적 신론의 산물은 아니다. 이렇게 네 가지 전통적 주장을 반박한 뒤, 그는 선택론의 정당한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피력한다. 바르트는 성경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가 동시적으로 “선택하시는 하나님”과 “선택되는 인간”이 되는 그 사건이 선택론의 정당한 기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르트는 그의 선택론을 그리스도 일원론적으로 변형시킨다.

 

바르트에 의하면 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 교회의 위대한 스승들 역시 선택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인 위치를 바르게 강조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과 선택의 궁극적 참조점으로 삼는데 실패했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바로 이러한 실패 때문에 전통개혁신학은 선택과 유기를 예정론에 포함시킬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예정론이 복음과 은총만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축복과 저주의 혼합물로 이해되었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피조물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사랑과 은총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유기를 예정할 수 없으시다고 피력한다. 우리는 바르트의 이러한 주장에서 그의 신론이 성경적 균형을 잃고 사랑의 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을 보게 된다. 또한 바르트의 선택론이 주권적인 선택과 유기의 주체인 ‘아버지 하나님’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의 근본 주체로 묘사하는 범주착오를 범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2. 예수 그리스도 일원론

앞에서 필자가 암시적으로 언급한 대로 바르트는 그의 선택론을 예수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ism)의 방향으로 변형시킨다. 즉 선택하는 자와 선택되는 자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며, 그 자신이 동시에 하나님이요 사람이시다.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시작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시작이며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택이다. 좀 더 논리를 진전시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택이요 원결정이다. 즉,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에게 은혜로우시겠다고 결정하셨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이시므로 바르트에 의하면 창세전부터 선택의 주체(자신을 선택하는)와 객체(선택되는)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선재하셨다.

 

다시 설명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동시적으로 신인(神人)이시므로, 동시적으로 선택의 주체요 대상이 되신다. 따라서 바르트의 예정론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선택유무에 관계되지 않는다. 선택하는 주체로서, 그리고 선택되는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뚝 선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의 선택론은 예수 그리스도 일원론적 선택론이다.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와 성령과 동일한 신이시며, 또한 동일하게 선택하시는 신이시다. ‘사람의 아들(Son of Man)’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에게 선택받는 인간이시다. 인간 예수를 선택하심으로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궁극적 은총과 구원을 결정하셨다.

 

사실 전통개혁신학계에서도 선택의 주체와 객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논의해 왔다. 따라서 바르트의 이러한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거나 생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르트의 선택론이 전통개혁신학의 이중예정론을 거부한다는 관점에서 볼때, 그의 주장은 급진적인 일면을 보여준다.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 사역에서 인간에 대한 유기예정은 철저히 거부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선택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택에 따른 부차적인 요소로 취급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시지 않았다면 인간의 선택도 무의미해진다. 즉, 하나님의 성육신 결정은 인간의 선택보다 근원적으로 선행한다. 따라서 선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가지는 자기결정이지 인간에 대한 은총과 저주 결정이 아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바르트는 그의 예정론을 인간론이나 구원론에서 다루지 않고 신론에서 다루게 된다. 따라서 선택은 하나님 자신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존재양식의 결정이지 하나님에 대한 인간 존재양식(피선택자로든 피유기자로든)의 결정이 아니다.

 

창세전 하나님께서 인간 예수로 성육신 하겠다는 결정, 즉 자신을 선택했을 때,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했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은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총포괄적인 선택이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과 자비의 선물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은혜로우심을 의미한다. 또한 인간 예수의 선택은 예수의 대속적 순종과 고난에로의 선택이므로, 이 또한 선택의 은총적 성격을 나타낸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와 인간에게 신실하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선택된 인간들은 믿음의 근거를 보장받게 된다. 이러한 바르트의 예수 그리스도 일원론적 선택론은 전통개혁신학의 이중예정론에서 과격하게 이탈된 모습을 보여줄 뿐 아니라, 자유로운 성경해석의 결과가 얼마나 판이한 신학적 결론을 산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창세전부터 모든 인간에게 은혜로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원결정은 보편구원론의 위험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이 점을 다음 절에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3. 보편 구원론적 전택론

필자는 위의 논의를 통해 바르트의 선택론 또는 예정론이 성경에 계시된 이중예정론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 일원론으로 극단화되어 있음을 논증하였다. 바르트에 의하면, 영원전 하나님의 예정은 인류의 일부는 구원으로 선택하고, 나머지 일부는 멸망되도록 유기하는 절대주권적 이중예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오로지 선택일 뿐이며, 진정으로 선택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인의 대표와 구원자로 선택되는 그 사건, 즉 하나님의 원결정(原決定) 안에서 인간은 파생적으로 선택될 뿐이다. 이러한 논의를 압축시켜 보면, 바르트 선택론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드러난다.

 

즉,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은 만인에 대한 선택과 만인에 대한 구원을 지향하게 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한 선택 사역속에서 단 한 사람도 유기하시지 않기로 결정하신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본질적이고도 영원한 뜻은 은총이요 사랑이기 때문에, 창세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인이 선택되었다. 이러한 바르트의 주장은 비성경적인 과격성을 분명하게 예시해 준다. 바르트는 에베소서 1장을 주석하면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1:4) 구절 중 “우리”에게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와 믿는 이들만 포함된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전 인류 모두가 포함된다고 피력한다. 과연 바르트의 선택론의 필연적인 귀결은 보편구원론일 수밖에 없다. 물론 바르트 자신은 자신의 선택론의 논리적 귀결이 만유구원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으나, 그의 논리는 궁극적으로 일관성이 없어 보이며, 그는 이러한 비판을 정당하게 논박하지 못하였다.

 

바르트는 그의 신론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일변도로 과격하게 변혁시킨다. 이러한 그의 신론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거룩하심, 의로우심이 균형있게 논해질 수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본질적인 속성이라면, 하나님의 진노와 엄위는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속성으로 취급된다. 벌카워가 잘 지적한 대로, 바르트 신학의 요체는 ‘은총의 승리’이다. 하나님의 본질, 작정, 원결정, 그리고 선택 모두는 은총의 계시요, 은총의 실현일 뿐이다. 이러한 은총 일원론적 입장에서 바르트는 그의 선택론을 전택설의 방향으로 밀고 나간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이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속보다 선행한다. 이것은 역사적 현실 속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창세전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에 그대로 반영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 사건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뜻은 성자의 성육신을 통해 자신을 인간에게 주시겠다는 결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공로, 죄악 등 그 무엇도 조건으로 삼으시지 않는 하나님의 원결정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인에 대한 선택은 인류의 타락, 죄, 신앙 등의 어떠한 조건과도 관계없이 일어난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철두철미하게 은혜와 사랑으로 인간을 대우하신다. 바르트는 바로 이 진리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피력한다. 인간의 죄와 타락 작정 이전에 이미 영원한 선택 작정이 선행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의 예정론은 전택론적이다. 바르트는 자신의 예정론을 전택론에 정초시키면서 전통적 개혁신학계에서 역사적으로 우위를 차지해 온 후택론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후택론은 인간의 죄와 타락을 은혜의 조건으로 규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원초적 은총을 바르게 증거하지 못했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후택론은 하나님의 은총을 인간의 죄와 타락에 대한 응급조치적 반응으로 퇴색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를 믿는 바르트에게는 전택론이 후택론보다 더 바른 예정론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전택론은 성경적인 전택론과 근본적으로 상이한 지향점을 가진다. 성경신학의 전택론은 특수주의적이다. 즉, 일부는 선택되고 일부는 유기되는 이중 예정의 논의 맥락에서 특수한 일부 사람에게만 무조건적, 절대적 은혜가 베풀어진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선택과 유기를 포함하는 총체적 예정사역이 죄와 타락이라는 인간적 조건과 관계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성경신학의 전택론이다. 따라서 전통신학과 성경신학이 함께 받아들이는 전택론은 ‘은총의 승리’보다는 ‘하나님 절대 주권과 영광의 계시’를 지향하고 있다. 반면에 바르트의 전택론은 유기의 논의가 탈락된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만유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주장한다. 이 맥락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은총에 봉사하는 부수적 속성으로 변혁되고, 주권의 절대성은 부인되기에 이른다.

 

요컨대 바르트의 선택론은 보편구원론적 전택론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뜻은 바로 ‘은총에 의한 만인의 구원’이었다. 이 주장을 통해 바르트는 전통개혁신학의 작정론을 은총 일의지론(一意志論)으로 과격하게 변혁시킨다. 하나님의 작정은 만사와 만물에 대한 주권적 예정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만인을 선택하고 구원하겠다는 한가지 뜻일 뿐이다. 바르트의 작정론이 이렇게 빗나감에 따라 그는 악과 무(無)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통치를 거부하게 된다. 이는 결국 마니교적 이원론으로서의 퇴락을 낳아, 바르트 신학의 근본적 취약성과 오류로 남게 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원결정은 인간의 악한 의지와 무(無)의 세력에 의해 와해되기에 이른다. 사실상 만인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현실로 증명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바르트의 예정론을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논의해 왔다. 다음 장에서는 이에 대한 성경신학적 비판을 제시하고,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입장을 논증해 볼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 과정상 암시적으로 나타난 비판 내용을 좀 더 상세히 확대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Ⅳ. 성경신학적 비판

 

1. 계시 진리인 이중예정론

필자는 제3장에서 바르트의 예정론을 세 가지 특징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였다. 그 세 가지 특징 중 첫번째가 바로 바르트의 선택론이 전통개혁신학이 주창해 온 이중예정론을 철두철미 거부한다는 점이다. 필자의 신학적 입장은 언약사적 성경신학이다. 언약사적 성경신학은 성경의 언약사적 통일성과 일관성에 정초되어 있으며, 신학함을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돌린다. 또한 언약사적 성경신학은 전통개혁신학의 성경적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계승하되, 비성경적인 부분을 발전적으로 개혁해 나가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언약사적 성경신학이나 전통개혁신학이나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통일성을 신학의 표준으로 삼는 점에서는 공통된 입장에 있다. 따라서 언약사적 성경신학은 전통개혁신학과 함께 이중예정론을 성경에 계시된 진리로 수납한다.

 

성경은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사역이 선택과 유기의 이중적 사역이었음을 가감없이 증거해 준다. 구약의 언약 수립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고, 선민의 역사가 이를 확증하고 있다. 아벨은 선택되나, 가인은 버림을 받는다. 야곱은 선택되나 에서는 버림을 받는다. 단순 논리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선택이라는 용어는 그 상대 개념으로서 유기(버림)를 내포한다. 따라서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라는 구절은 논리적으로 “우리는 택하시되 다른 이들은 버리시사”로 해석되어야 한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바르트는 이 구절을 엄청나게 왜곡된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유기 사역에 대하여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8).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멸망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그렇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은총의 선택만이 아니라, 저주의 유기와 버림도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사역 속에 포함되어 있다.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유기하실 것인가에 대한 결정권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무조건적 주권에 속해 있다. 피조된 인생에게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요구할 권리나 권한이 전혀 있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이 결정된다. 그러나 바르트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오해하고 철저히 왜곡하였다. 그의 예정론은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높이는 인본주의적 사상에 의해 채색되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한 구절 더 소개해 보기로 하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이 구절은 선택된 자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의미와 함께 영생을 안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지 않더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결정적인 구절이다. 이 구절의 의미를 부인하는 것은 명백한 성경의 증거를 부인하는 것이니, 바르트는 자신의 예정론을 선택일원론으로 변형시킴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부인하고 철저히 왜곡하였다. 선택과 유기 예정에 따라 신앙과 불신앙, 구원과 멸망, 영생과 영벌이 결정된다. 한 구절만 더 소개해 보자.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1∼13). 이 구절 역시 사랑과 미움의 이중적 역사를 명백하게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사랑에 의한 선택, 미움에 의한 버림 모두 인간의 행위를 조건으로 하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속해 있다. 바르트의 이중예정론 부정은 성경적 지지를 결코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왜 바르트는 이중예정론을 거부하고 선택일원론을 피력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신의 왜곡된 선이해(하나님은 사랑이시다)의 관점에서 성경을 탈맥락적, 자의적으로 해석한 때문이다. 성경은 사랑도 미움도, 선택도 유기도 당신의 주권적 뜻에 따라 마음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반면, 바르트는 사랑이라는 속성에 지배되는 인간주의적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수납한 때문이다. 결국 바르트의 선택론은 비성경적인 것으로 마땅히 비판되어야 한다.

 

2. 예정론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

바르트는 자신의 선택론을 인간을 선택하시고 유기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라, 자신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모든 인간을 포함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확립하였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선택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을 의미한다. 즉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 하실 것에 대한 원결정을 의미한다. 이 원결정 속에 인간의 선택은 부수적이고, 파생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선택된 자는 인간 예수 한 분 뿐이며, 선택하는 주체 역시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르트의 선택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동시적으로 선택의 주체와 객체가 된다는 점에서 급격한 변혁을 보여 준다.

 

물론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예정론도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논의의 맥락은 바르트의 그것과 중요한 차이를 보여준다. 언약사적 성경신학에 따르면, 선택과 유기 등 이중예정의 주체는 삼위 하나님 중 주로 성부 하나님께로 돌려진다.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선택과 유기 사역에 동참하시나, 주로 피선택자로서 성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으로 묘사된다. 즉, 삼위 사역상 성부는 선택과 유기의 주체로서, 성자 하나님은 피선택자로서 구분이 된다. 물론 신성을 가지신 성자와 성령 역시 선택과 유기의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박용기 목사가 정당하게 주장하듯, “그리스도는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시고, 절대의인이면서 죄인이시고, 예정의 주체이시면서 대상이시다.”

 

얼핏보면 바르트의 주장과 성경신학의 주장이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엄청난 차이가 있다. 바르트의 선택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선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부만이 선택되고, 나머지는 그리스도 밖에서 유기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바르트의 예정론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일부를 상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모든 인류가 선택자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원결정이기 때문이다. 인간 예수가 선택된 사실은 모든 인간에 대해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겠다고 결정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바르트는 피력한다. 그러나 성경신학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주권적인 뜻대로 인류의 일부를 선택하시고 나머지는 유기하시기로 결정하셨다고 피력한다. 바로 여기에 바르트 신학의 교묘함과 급진성이 나타나며 언약사적 성경신학과의 근본적 갈등이 드러난다.

 

성경신학은 하나님 아들로의 선택과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나, 영원한 멸망으로의 유기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바로 여기에서 성경신학은 보편적 선택의 은총을 이야기 하기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특수한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주권적 은혜의 선물임을 주장한다.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권적으로 선택된 일부에게만 베풀어진다. 바르트의 선택론은 “보편적 은총의 승리”를 노래하지만, 성경신학은 “주권적 은총의 감격”을 노래한다. 유기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배경삼아, 선택의 은혜는 더욱 큰 빛을 발하게 된다. 따라서 은혜와 저주, 선택과 유기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의 산물이요, 그 영광의 선포임을 성경신학은 피력한다. 결국 성경신학에 의하면, 선택만이 아니라 유기 또한 하나님의 무한한 주권 선포라는 목적에 의해 확립된다.

 

3. 특수주의적 전택론

필자는 바르트의 예정론이 가진 세번째 특징을 보편구원론적 전택론이라 이름하였다. 사실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예정론 역시 전택론적 입장을 따른다. 전택론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논리적 순서상 선택작정이 타락작정보다 선행하고 이전에 위치해 있다는 입장이다. 즉 선택이 타락이전에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전택론을 말한다. 하지만 개혁신학의 역사는 전택론보다는 후택론이 더 우세했던 역사였다. 비록 거의 모든 공적 교리서들이 전택론을 정죄하지 않고 관용하였지만, 후택론이 공식적 입장으로 채택되어 왔다. 이러한 전통개혁신학의 역사를 고려할 때,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전택론 수용은 역사적으로 혁신적 의의가 있다고 보여진다.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는 후택론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무조건적 은혜를 강조하는 전택론이 더 성경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바르트 역시 공교롭게도 전택론자란 사실이다. 이점은 바르트의 신학적 고민과 사유의 깊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임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신학 사상의 초두에 둔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정론 또한 사랑과 은혜의 교리여야 했다는 점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예정론이 은혜의 교리여야 한다면 전택론이 더 바르트에게 호감을 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전택론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강조하는 반면, 후택론은 타락의 조건에 대한 반응적 은혜와 공의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의 분석대로 바르트는 전택론을 택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더 남아있었다.

 

전통적인 전택론은 바르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무조건적, 절대적 유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문제에 봉착한 바르트는 엄청난 신학적 고민을 했을 것이다. 선택의 무조건적 은혜를 강조하려다 보니 무조건적인 유기의 어두운 그림자 또한 수용해야 했다. 바르트의 신은 결코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유기하는 그런 잔인한, 폭군적인(?) 신일 수 없었다. 여기서 바르트는 자신의 신론과 일관되게 예정론을 변형시키고자 결심한다. 이 결심의 산물이 바로 예정사역에서 유기사역을 제거하고 오로지 선택의 일원론을 주장함이었다. 하나님의 원결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 즉 만민의 구원과 화해라고 바르트는 피력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구원과 선택의 하나님이지, 심판과 멸망의 하나님은 아니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 주권에 연결된 사랑을 택하지 않고, 자신의 인간주의적 신과 또 그에 일치되는 선택론을 주장한 것이다.

 

바르트의 보편구원론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하려고 했다. 필자는 그의 신학적 고민의 쓰라린 고통을 이해하나, 그의 예정론은 비성경적인 자기 철학의 산물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성경은 명백하게 특수주의적 구원론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선택된 일부만이 구원을 얻는다. 그래서 구원이 선물이요 은혜라고 피력한다. 성경은 또한 명백하게 일부 택자를 제외한 많은 불택자들의 멸망을 가르친다. 그들의 죄악이 멸망의 원인으로 돌려지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유기 사역에 속해 있다. 하나님은 선택과 유기의 이중 예정을 통해 당신의 영원한, 절대적인 주권의 영광을 선포하며, 택자는 은혜의 영광을, 불택자는 진노의 영광을 찬송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성경신학은 바르트의 보편구원론적 전택론에 반하여 특수주의적 전택론의 입장을 수용한다.

 

Ⅴ. 결론

 

필자는 지금까지 바르트의 예정론을 소개하고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비교적 상세히 비판해 왔다. 바르트 예정론의 특징을 밝혔고, 그 특징에 대한 반박을 제시해 왔다. 필자가 보기에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적 착상에 의해 거치는 돌이 부딪치어 넘어짐을 당하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명제를 하나님 중심적으로 인간주의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전 신학체계에 비성경적인 왜곡을 초래하였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이 명제의 이면에는 함축된 많은 전제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권적이며,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사랑이시다라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신부가 아닌 자들을 사랑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좋으신 뜻대로 선택한 자녀들과 신부들만을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사랑하신다.

 

바르트는 성경의 하나님을 자기의 신학적 사유에 의해 변형시키려 하였다. 바르트는 주권적이신 하나님을 사랑이라는 속성(바르트에 의해 자의적으로 정의된)에 지배받고 종속된 신으로 왜곡시켜 버렸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했으나, 그것은 주권적 은총이 아닌 본성의 필연에 지배되는 보편적 은총에 불과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원결정, 즉 영원한 선택을 결정하였으나, 인간의 불순종과 무(無)의 세력의 방해로 인해 이를 이루지 못했다. 결국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비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전능성과 주권성을 그의 신이해에서 탈락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바르트의 예정론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해 준다.

 

그렇다면 왜 바르트는 이러한 비성경적 주장을 하게 되었는가? 무엇보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신학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인본주의적 애착을 버릴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의 신학 활동 후기에 가서 “하나님의 인간성(the Humanity of God)이라는 저술을 낼 만큼 애틋한 인간애를 보여주었다. 그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신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전통개혁신학의 예정론이 인간을 사랑하는 신보다, 저주하고 버리는 신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통개혁신학에 대한 그의 반항의 시작을 보게된다.

 

한 가지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바르트 역시 전통적인 구속사신학적 패러다임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구속사신학이란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목적이 인간의 구속, 또는 구원에 있다는 입장에 기초해 있는 모든 신학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존재해 온 거의 모든 신학은 자유주의든, 보수주의든, 이 구속사적 모티브에 의해 지배받아 왔다. 인간의 구원이 모든 것의 목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사역까지도 인간의 구원이라는 모티브에 의해 왜곡과 굴절을 겪게된다. 바르트의 인간애는 그의 신학을 더욱 구원중심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 사랑하는 하나님, 은혜로운 하나님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구속사적 신학의 근본적 취약성을 반영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은 구속과 구원의 내용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의 내적 흐름을 구체적으로 따라보면 성경은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계시하여 자신의 살아계심을 입증하기 위해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근본 모티브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 언약론적 구조 속에 구속은 방편적 과정임이 드러나게 될 때 비로소 모든 신학은 인간중심적인 질곡에서 해방되어 신본주의로 개혁되게 될 것이다. 언약사적 성경신학이 바로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였으므로 이 입장에서 볼 때 바르트의 예정론은 근본적으로 비판될 수 밖에 없다. 바르트 신학의 달콤한 유혹에 매혹되어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한국 신학계는 살아계신 성경의 하나님에게로 재개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당신의 뜻을 이 땅에 이루소서!

Soli Deo Gloria!  고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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