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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원-세대론의 종말론 바른이해*

by 【고동엽】 2009.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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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론의 종말론 바른이해


초대교회 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주님 오심을 간절히 바라고 또 기도하고 언제든지 주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임을 확실하게 믿고 그리고 2천년을 지내왔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특별히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와 간절함이 참으로 심했다. 한국교회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 예수 믿어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채 다 알기도 전에 한국이 국가적으로 크게 위기의 연속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런 것들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주의 재림을 열망하고 또  요한계시록 20장에 전개될 천년기의 도래를 열망했다.


재림을 그렇게 기쁘고 즐겁고 기쁨으로 맞이할 생각을 하기 보다는 좀 두려움과 불안, 막상 주님이 재림을 하신다고 할 것 같으면 그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상당히 크게 한국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천년왕국은 지상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아직도 이 현 역사의 체계가 진행되는 것이 완전히 종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주의 재림이 있고 천년왕국이 있어도 우리의 운명이 단번에 결정나고 그런 것으로 인류의 역사가 다 끝나는 것이 아닌걸로 생각되기 때문에 아마 주의 재림, 그리고 그로 인해서 함께 올 심판에 대해서 큰 두려움이 적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통상 천년왕국이  교회가 핍박받고 위기에 처하고 존립이 위태하게 그와 같은 때가 될 때에 천년기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강렬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들어오고 얼마 안돼서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 백만 부흥운동이 일어나서 새롭게 교회가 일어난 놀라운 역사가 있었지만 그것은 나라가 다 운명이 끝나갈 그와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기도하고 회개하고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다.

 

길선주 목사님께서 아주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급에 속하는 큰 목사님이셨는데 그분이 요한계시록을 강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천년왕국을 열렬하게 가르치고 고난받고 나라가 망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실 뿐만 아니라 이런 핍박과 어려움이 후에 우리가 천년왕국, 주님의 통치 아래서 이 모든 고통을 씻고 그리고 왕노릇하게 되며 의와 평화와 번영의 때를 맞아서 이 고통이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왕노릇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굶주리고 못먹고 할벗은 그런 상태에서 그런 것이 다 벗어나는 때가 올 것을 열렬하게 가르치고 성도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나라가 망하지 않았는가? 그때부터 1919년 3.1운동이 있었고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있었고 정말 참담하며 어두움이 계속되어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와 같은 어두운 참담한 때에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다면 요한계시록의 강해를 통해서 주의 재림하시면 그때 우리가 이 고통을 벗어나고 그때는 왕노릇하며 악인들을 지배하고 또 세상이 저주를 거두심으로 생산이 풍성하게 넘치게 되고 그리고 동물들의 성질도 변해서 이사야가 예언한 것과 같은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터이니까 소망을 갖게하고 교회로 하여금 핍박받는 중에 좌절하지 않고 살게 했다.

 

그러나 일면 그와 같은 우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회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친일파들이 되어서 다 일본과 일본을 봉사하고 편들며 그들의 앞잡이가 돼서 참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자들을 다 잡아주는데 앞잡이 노릇을 하고 그들이 교회의 모든 지도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1937년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대부분의 미션스쿨이 폐쇄되고 선교사들이 다 추방당하게 되었다.

 

그럴 때에 일본과 대한교회 지도자들 그리고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현세적인 아부와 현세에서의 삶에 만족하는 삶을 계속했다. 그렇게 하다가 해방을 겪고도 여순반란과  제주도 폭동 사건  50-53년에 걸친 4년에 걸친 6.25, 휴전 후에도 계속된 불안한 정치정세,  그리고 4.19, 또 5.16 이와 같은 어려움의 시절을 겪으면서도 요한계시록 강해를 벗어버리지 못했다. 60년대 말까지도!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요한계시록 강해하는 것이 수요일밤 필수 과제였고 대부분 부흥사들이 요한계시록 강해를 해서 주님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늘 강조했다.

 

주님의 재림이 언제든지 긴박하게 올 수 있다는 그와 같은 생각을 많이 갖고 그래서 학생들도 학교 보내는 것도 금지하고 많이 보내야 중학교, 그리고 더가면 성경학교나 해서 고등학교 나오고 대학교 가면은 다 세속화 되어 참 신앙의 길에서 떠나서 자유주의 신앙을 갖게 됨으로 더 많은 교육은 교회로 하여금 타락하고 배도하려 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교육을 시킬 수 없도록 그렇게 했다.

 

사실 5.16이 나서 63년 민정으로 이양되기 까지 어둠의 시절을 지나고 설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떡을 하고 명절을 맞을 준비를 별로 못하는 그와 같은 상황을 3년을 겪었다. 그러다가 60년대 중반부터 경제 5개년 계획을 세워서 열심히 정부가 노력해서 자본과 기술들을 도입하고 열심히 부흥을 노력해서 70년대 기간산업들 처음에 1차 산업 기간산업들을 세워서 공업국으로 도약할 만큼 그와 같은 기초를 놓게 되고 수출입국으로 수출만이 사는 길로 해서 수출 2백억불을 달성하면 다 잘살게 될 걸로 믿게 되었고 4백억불을 달성하면 다 잘살게 될 걸로 믿으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사회가 크게 부흥하고 또 교회도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을 했다.  70년대 중반 이후 부터는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요한계시록 강해가 사라진다.

 

그때 대부분 요한계시록을 성경공부를 계속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다 사라지고 축복에 대한 강조가 요한계시록 강해를 대체하게 됐다. 그 교회가 번창하게 잘 살게 되고 특별히 농촌교회가 아직도 어렵고 농촌 교역자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교회가 너무도 많지만 도시교회들은 부자교회가 많아지게 되서 목사나 성도들도 많은 여유를 갖게 돼서 웬만한 계획들은 다 집행하고 시행하지 못할 일이 없을 만한 수준이 됐다. 그래서 교회가 별로 종말에 대한 긴박한 생각도 없고 기대도 크지 않는데 한편에서는 이렇게 재림과 재림보다는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와 부풀음이 강하게 일고 있는 것은 어찌된 것인지 모르겠다.

 

초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2세기 중엽에 이레네우스라 하는 기독교 최초의 신학자가 소위 “이단들에 대하여”라는 책들을 썼다. 그 책에 특별히 영지주의자들, 그노시스주의자들에 대한 그들의 신관과 그들의 주장들을 논박하면서 마지막에 종말론에 관해서 천년기론을 잘 개진하고 있다. 주님이 오셔서 천년기를 세우실 때에 그때는 온 지구가 비옥한 생산을 하게 되어서 포도 한송이를 두 사람이 메도 멜 수 없는 그와 같은 풍성한 수확을 내게 되고 의와 평화가 이루어져서 굶주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게 되고 질병이 다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서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갈 때에 천년기가 끝나는 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인도할 만큼 될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다. 그런데 3세기 들어올 때에 핍박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하고 있는 그와 같은 때에 천년기에 대한 반대가 교회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천년기에 대한 강한 반대를 먼저 주장한 사람이 소위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인 오리게네스 이다. 오리게네스는 천년기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시작하고 그것과 함께 육체의 부활도 거부하기 시작했다. 사도신경에 나와 있는 “죄를 사해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 그것을 배척했다. 그런데 오리겐이 그와 같은 천년기를 배척할 때에 교회가 핍박아래 있으면서 많은 순교자를 내고 있는 그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함께 천년기를 배척하는 일을 시작했다.

 

특히 어거스틴이 4세기 말부터 5세기까지, 어거스틴이 4세기 중엽에 나서 5세기 초엽에 죽었다. 대 교부가 아주 강력하게 천년기론을 배척했다. 그런데 천년기를 배척할 때에 오리겐이 반대한 육체의 부활은 교회가 한사코 주장하고 굳게 붙들었다. 그래서 교회가 그렇게 큰 핍박과 환란을 맞고 있는 중에도 교회가 천년기를 배척해서 사도신경에 나와있는 것보다 조금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진 것이 325년 니케야신경인데 여기 보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이 보통 2세기 중엽에 형성된 걸로 본다. 2세기 중엽에 아직도 핍박을 받고 있을 때이다. 순교자를 많이 낼 때이다. 2세기 중엽 저스틴 마터가 초대 변증가로서 순교를 당했다. 그때에 형성된 신앙고백이 “저리로 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구속의 경륜에 대해서 더 자세하고 확실하다. 325년 니케야 공회의가 최초로 에큐메니칼 공회의로써 기독교 믿는 신앙의 내용을 말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여기 2조에 덧붙히기를 그의 만세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그리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다 확정을 했다. 그의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이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천년에 국한한 것이 그릇됐다고 하는 사상을 정식으로 배척을 했다. 천년기론의 공통된 특색은 지금 하나님 나라는 현세에 있지 않고 주님이 오셔서 천년왕국을 세울 때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진다고 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가 공식으로 천년왕국을 배척을 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영원한 나라라고 하는 것을 확정했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5:24-28에 있는 “그 마지막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나라를 바칠 때라” 그래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종결될 것 같은 이해를 갖도록 하는 성경 구절에 대해서 24절이다. 이 천년기를 가장 크게 열렬하게 교회서 완전히 추방한 사람이 대교부인 어거스틴이다.

 

그래서 모든 교회의 신경들이 다 천년왕국이 다 이단으로 정죄되고 바른 교회의 믿음이 아니라고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소수의 분파들에게 내려왔고 종교개혁 때 다시 신경을 확정할 때도 천년왕국이 전혀 무가치하고 가치가 없는 이단적인 설로 배척을 했다. 이것이 재세례파들에게 이 천년왕국이 수납되었다가 내려왔는데  19세기 중엽 혹은 초엽 달비가 영국교회가 너무 의식화 되고 형식화의 반동으로 필리스마 형제단을 조직하고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문자적인 해석으로 천년기론이 다시 크게 열렬하게 수납되고 그 후에 미국의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교회의 이 천년기론을 열심히 선전해서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다 달비가 가르친 천년기론, 현대형의 미국 천년기라 그것이 세대론이다. 세대론이 가장 바른 천년기론으로 받아들였고, 19세기에 미국교회가 그의 천년기론을 받아 들이게 됨으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천년기론 사상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천년기론이 그대로 전달돼 와서 가장 확실하고 바른 이론인 것처럼 이때까지 지내왔다.

 

그러나 공교회에 로마교회가 정교회와 종교개혁 공교회들의 신앙고백서가 다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보편부활 보편 일반적인 부활, 그리고 보편적인 심판 그리고 신천신지의 도래, 이와 같은 종말도식을 가장 바르고 확실한 교회의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고난 받는 교회들에게는 천년기론이 그렇게 호소력을 갖게 되고 특히 세대론에 의하면 주님 재림전에 무슨 꼭 표징이 있어야 되는데  주님은 문밖에 와 계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즉각 오실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천년기론 특히 세대론의 가르침 이다. 그런데 한국이 잘살게 되었어도 일부에서는 천년기론에 대한 세대론적인 선전이 크게 일고 있어서 한국교회가 이 세대론을 그의 확실하고 분명한 교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이 말하는 주의 재림이 곧 가까이 임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호와증인파, 안식일파만 주의 재림의 날을 확정한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 당시에도 재세례파들 그리고 17-19세기에도 그런파들이 참으로 많았다. 


주님의 재림하시는 것은 또 한번의 유예기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시면 그의 재림의 역사는 종결하고 구원을 완성하며 그리고 심판을 이루므로 완전히 새인류를 이루시므로 하나님께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는 그와 같은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은 역사의 끝이고 역사의 완결이다. 주님의 재림 이후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시간이 또 계속되고 진행되는게 아니다. 역사 자체는 역사 자체에 의해서 종결한다. 주님의 초림 때에 그가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사람들을 구원해 내시고 자기의 백성들을 확실하게 구원해 내시기 시작했다.

 

주님의 오시는 것은 그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이고 마침내 악을 소제하므로  그 천국에 도달하는 것이 종말이다. 재림은 종말이지 재림후에 반복되는 종말이 반복되는 재림이 또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20장을 어떻게 이해하던지 간에 교회가 한번의 재림과 한번의 보편부활, 한번의 보편심판으로 일이 종결되는 걸로 했지 계속적인 여러차례의 재림과 또 여러차례의 심판, 여러차례의 부활을 말하지 않는 것이 성경 전체와 교회의 회의였다.  우리는 이제까지 전통적인 종말론이 대부분 기독론과 상관없이 진행됐다.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심으로 이루셨다. 죄를 속하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와 죽음 가운데서 살려 내셔서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셨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생산해 내는 일을 시작하셨으므로 이 자기 백성들을 완전하게 하나로 모으시는 일을 하셔야 한다. 이 처음 재림은 초림 때 이룩하신 구원의 완성이다. 그래서 종말론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게 기독론의 연속이다. 성육신하신 그 몸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신다. 모든 처음 하나님의 경륜에 작정하셨던 모든 백성들을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으시고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에 성육신하셔서 사람이 되시므로 구원을 이루셨는데 구원을 이루심 때문에 그 아버지에 의해서 주와 그리고 구주로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재로 왕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그가 역사의 주인으로서 역사를 관할하고 계신다. 그러기 때문에 이 역사가 도달할 목표는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그 사역의 완성이 그 역사의 목표이다.

 

이 역사가 다른 것을 위해 진행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다 완성해 내시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하게 이루신다. 그 역사가 목표하고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 이가 완결하기 위해서 오신다. 그러니까 이 구원의 완성은 주의 재림 때 이루어진다. 지금 통상, 지금 받은 구원은 구원이라. 지금은 우리가 예수 믿어서 우리의 영혼이 죄를 씻음받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영혼만 구원에 이르렀지 육체가 구원에 동참한게 아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배척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성립한다. 구원은 영혼만의 구원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뿌리 깊은 확신이다. 구원은 반드시 우리의 영혼과 함께 육체가 함께 구속되어야 되는 것이지 영혼만 구원에 이르고 육체와의 현상세계는 그대로 있는 상태, 그런 구원만 가져온 메시야는 메시야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유대교였다.

 

이 뿌리 깊은 확신, 지금도 예수를 못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예수가 진정 메시야이면 영혼 만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완전히 구원해야 하는 것이 바른 일이라! 그러니까 언제 예수 믿느냐? 우리의 육체까지 구원을 가져올 때 그때 예수를 믿을 수 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사고이다. 우리도 지금 구원에 이르러서 성령님이 우리안에 와 계시고 우리가 영생에 이르는 씨를 받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한 건 아직 못된다.

 

우리가 완전히 구원되는 길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우리의 육체도 하나님 구원에 동참하게 하고 우리의 거소인 이 현상세계도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야 구원이 완성된 거다. 구속이란 구원하고 구속이 별차이가 없는 것 같아도 그게 큰 차이를 낸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만 구원에 이르는게 아니다. 육체가 이 땅을 거소로 하고 살고 우주와 유기적인 연관을 맺는데 우리의 육체는 부활해서 구원에 이르고 이 지구는 우리의 생존세계는 현상대로 있는 것도 완전한 구원이 아니다. 그 때는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할 때에 우리의 거소도 변화돼서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한. 구원의 완성은 구속이라고 한다.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주님이 다시 오신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대표로 해서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삶의 길을 작정해 놓으셨는데 그 삶의 길을 바르게 살 것인지 안살았는지를 하나님 앞에 보고하고 결말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서 역사는 종결되고 그 역사가 목표에 도달한다. 우리가 역사의 끝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다. 이 역사가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이 인류의 역사가 불합리와 부조리의 연속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도 그리스도께서 역사를 주재하고 계시므로 그렇게 부조리와 불합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참담한 전쟁과 질병과 재앙들이 연속되기 때문에 이 역사가 역사 자체로 무의미한 것 같애도 그 자체로 보면 무의미해도 다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진행되고 하나님의 영광의 도달을 목표로 하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역사가 무의미로 허무로 종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를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실려고 작정하시고 역사를 진행하셨는데 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걸 방해하는 일 이 요소들 유혹자들과 그리고 죄악들을 제거해 내시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이루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셔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신다.


그 영광에 이르는 그것이 역사의 목표이다. 무의미와 부조리와 불합리가 역사를 지배하고 진행되는 것 같아도 이 역사 자체 내에서만 보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역사의 주재자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진행됨으로 역사가 무의미 불합리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귀결된다. 바로 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역사의 주재이시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이다. 단지 심판만 하시기 위해서 오시는게 아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이와 같은 전쟁과 질병과 참혹함이 있을 수 있느냐? 2차대전 때 나치 아래서 폭격을 받고 고생하는 그들이 하나님이 계시면 도대체 이와 같은 일들이 진행될 수 있느냐? 하나님 믿을 수 없다.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일 줄은 생각하지 못하는 거다.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의 나라됨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사람들을 병들어 죽게하고 멸망에 이르게 하고, 그 근원인 유혹자들 사탄과 죄악을 그로 인해서 도입된 죽음을 제거하는 일이 함께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구원의 완성이 그 근본목표라 할 수 있다.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나라를 방해하고 훼방할려고 했던 악의 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해 낼 것이다.  죄가 그냥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두려워하고 적게 짓는 상황에서는 죄의 무서운 세력을 잘 모른다.   


악이 소제되지 않고야 이 땅에서 어떻게 정의가 실현될 수 있겠는가? 악이 소제되지 않고야 이 땅에 어떻게 공평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이루어질 수 없다.  구원의 완성이 악을 제거하고 심판하는 것은 구원의 완성의 다른 면이니까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것이다. 그가 육을 입으셨고 구원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역사의 주재자가 되시므로 그가 손으로 하나님께서 악을 처리하는 일을 하시므로 그 영화에 크게 도달하게 하는 일을 그리스도의 손에 하나님께서 위탁하셨다. 종말론이 종결하기 위해서 주님이 오신다 하는게 아니라 주님이 이룩하신 그 역사의 목표를 이루게 하시고 그리고 완성하시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히 이루기 위하여 악을 소제하신다. 그러므로 심판이 올 수 밖에 없다.

 

사탄을 심판하는 일이 꼭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서 인류 역사에 진행되고 이루어졌던 그 큰 악들이 소제되고 징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 악이 얼마나 큰지는 우리는 다 알지는 못한다. 그래도 우리가 이만큼 사는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보전의 역사이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도 다 악의 용사들이 되서 다 한 몫을 단단히 할 수 있는 자들일 터인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히시고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악이 마음껏 흥왕해서 땅과 역사를 민족을 멸망케 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제재하시기 때문에 이와 같이 역사가 진행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창조와 개발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구속된 백성만 포함되고 변화된 이 창조가 낙원의 표준에로 되돌아가는 그 수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신 이 창조의 개발,  나타나는 결과들도 다 하나님의 나라에 선별되어 포함될 것이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시니까 그때 오시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시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이야 하나님이 계시는 줄 알지만, 우리가 믿음이 약해지고 시험이 들 때는 하나님이 계신가 하고 의심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담대히 악을 행해도 징벌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이와 같은 현상을 본다면 정말 하나님이 계시냐 할 수 있는데, 종말에 가면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하시고 악을 완전히 소제하셔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실 때 완전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 계시고 역사하실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 것이냐? 세대론에서는 주님의 재림 전에 특별한 징조들이 있는 것도 없다. 언제든지 오실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천년전기와 그리고 무천년의 교회 종말론에 의하면 주의 재림 전에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고 그후 이스라엘이 회심하는 일이 있고 큰 배도가 있고 전쟁과 환란이 있으며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것이라. 그와 같이 말하지마는 그러나 기근과 전쟁과 지진이 많이 생겨도 그것 가지고 바로 종말이다 말하기 어렵다. 거대한 로마 나라가 4백 여년에 망했을 때 정말 그 거대한 나라가 망할 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라가 망하고 환란이 닥치면 곧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고 또 그렇게 믿는다. 2차 세계대전 때, 6.25,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멸망 때 주님 자신도 마태복음 24장에서 예루살렘 멸망과 주님 자기 자신의 재림과를 이렇게 일치시킨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 가지고 종말의 시기를 계산해 낼 수 없다. 그것을 이시간에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재림의 징조는 알 수 있어도 징조는 분별할 수 있어도 날짜를 계산하는 것은 유대주의의 묵시문학의 결론이지 그것이 성경적인 종말론은 아니다. 언제 이루어지느냐? 하나님의 백성들을 완결하기 위해서 오시니까 주의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돼서 마지막 피택자가 복음을 받을 때 그 때 주님이 오실 것이라. 그리고 주님 오실 때 쯤 해서 상당히 많은 창조의 가능성들이, 보화들이 개발될 것이라.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면 언제 오시느냐? 그 날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밤에 도적이 온것처럼 오는 것 그 이상 저 분명하게 날짜를 계산할 수 없다. 주님이 오실 때에 그냥 보편적으로 오시지만 인격적으로 오시고 가시적으로 오시고 어느 일정한 시기에 오시고 그리고 장소에 오시고 그걸 모든 인류가 다 알게 된. 그리고 예측할 수 없게 오실 것이라. 오실 때에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라. 이 일을 심판주이시고 역사의 주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 전에 반복해서 이 일을 강조하셨다. 물론 주님의 오심이 제일 처음에 성령강림 때 오셨다. 성령강림 때 인류에게 주님이 오셨다. 그 때는 영으로 오셨고 영 안에서 인류에게 오셨다. 그리고 통치권 행사로 모든 인류에게 늘 오시고 지금도 가까이 오신다고 하실 수 있다. 주님이 역사적인 큰 사건들을 진행하시고 일을 이루실 때 인류에게 가까이 오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복음이 넓게 더 편만해서 확실하게 주의 백성들이 일어날 때 주님이 오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 멸망 때 주님이 오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때 주님이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오심은 영적으로 오심이요 육체로! 초림 때 그 몸으로 오신게 아니다. 이제 오시는 것은 영적으로 오시는게 아니다. 가견적으로 육체적으로 인격적으로 오실 것이다. 그 오심은 반복될 오심이 아니어서 한번 오심으로 모든 역사를 종결하시게 된다. 이렇게 해서 주님이 마지막에 오시게 되면 육체로 인격적으로 가견적으로 만인이 볼 수 있는 형태로 오신다. 성령강림 때 주님의 오심을 제자들은 성령 받은 분들은 다 알았다. 이미 통치권을 행사하시므로 주님이 인류 가까이 오심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다는 알지 못합니다. 예루살렘 멸망 때 주님 친히 심판하시기 위하여 역사하셨던 것을 초대교회 교인들이 다 깨달았다. 그러나 가견적으로 육체로 인격적으로 오시는 예는 재림 때 오심이 마지막이고 이 재림으로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오셔서 창조를 회복하시고 새인류를 완전히 만드셨다.

 

구속을 완성하시고 그리고 악을 완전히 소제해 내시고 악의 근원자인 사탄을 완전히 인류세계에서 창조세계에서 제거해 내시고 그리고 이 창조를 완전히 새롭게 만드셔서 새 창조를 만드심으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은 인류와 창조를 제시하시기 위하여 오실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새 인류에게 오셔서 풍만하게 완전하게 거하시고 그로 영광에 충만하게 돼서 하나님이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는 일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전에도  처음 낙원에 인류와 함께 계셨다. 낙원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었다. 성전의 기능을 행사한 곳이 낙원이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교제를 하시고 거기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낙원이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였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의 자리였다.

 

그런데 그 이후에 범죄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영을 거두셨다. 그런데 언제 다시 인류에게 오셨느냐? 완성하고 떠나신 건 아니지만 구약의 백성들에게 성전 성막에 하나님께서 오심으로 백성들 가운데 사시게 되었다. 그것을 '쉐키나'라고 한다.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살게 됐다. 그러나 이 계심은 기계적으로 마력적으로 한 곳에 부착해 계심이 아니라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위에 계심이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계심이 임의로 철수할 수 있고 그리고 변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하나님의 임재가 성육신으로 한 육체 가운데 하나님 자신이 골로새서에 '플레로마'(πλήρωμα)로 표시했는데 하나님 자신이 혹은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이 그리스도의 육체안에 완전히 거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육체가 성전으로 하나님의 충만을 완전히 가진 곳이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해 있었고 그리고 그 몸에서 하나님의 죄사함이 완전히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육체 나무와 돌로 지은 물리적인 성전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그 성전을 헐어 버리셨다. 그 이후에 교회에 성령 강림 이루어 성령으로 인류에게 교회에 함께 계셨다. 그러나 이 계심은 보증으로 또 하나님의 종말에서 완전한 임재의 예배로 계심이었지 이게 만유안에 만유가 되시는 방식으로 계심이 아니었다. 완전하게 만유안에 만유가 되심은 종말에서 새인류에게, 그 때는 하나님이 우리중에 충만히 거하시므로 하나님의 임재를 피할 길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길 없어서 하나님이 우리안에 완전히 전부가 되시는 그와 같은 때가 될 것다. 그 일이 종말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모든 질병과 고통과 죽음과 이런 것들이 다 소제된다. 하나님이 우리와 충만히 계시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와 같은 질병과 고통과 죽음이 있게 됐다. 그 때는 죄가 완전히 제거됨으로 하나님의 거룩이 충만해져서 모든 곳이 다 하나님 임재의 처소이다. 스가랴에 써있는 그대로 말발굽에까지 여호와께 거룩이라고 써붙히듯 완전히 모든 세상이 다 거룩한 세상이므로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는 부분이 없다.


그러면 천년왕국, 주님이 재림하신 다음에 그 재림이 언제 이루어지느냐? 재림하고 천년기하고 사이에 문제가 있다. 전통적인 교회의 종말론, 재림, 부활, 심판, 전통적인 종말론에 의하면 주님의 한번 재림으로 모든 인류가 선악간에 다 부활하고 그리고 모든 인류가 선악간에 다 심판을 받고 그리고 정화가 이루어지고 새롭게 되는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신천신지가 도입된다. 그것이 전통적인 교회의 종말론적인 도식이다. 그런데 천년기론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천년기를 칼리아즘이라고 한다. 킬리아즘은 소위 전통적인 역사적 천년기라. 주님의 재림이 천년기와 어떻게 연관이 있느냐에 따라서 무천년론, 역사적인 천년기, 후천년론, 세대론, 그런데 그 전에는 킬리아즘이라고 했는데 요새는 세대론이 성하고 부터는 밀레니아즘으로 용어가 바뀌었다. 전통적으로 킬레니아즘에 의하면 주님이 재림하신 이후에 천년에 지상에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의와 평화와 번영의 때가 시작된다. 그와 같은 나라가 세워진다. 주님이 재림하시고 천년의 지복의 때가 시작된다. 천년재림 전에 일어나기 때문에 밀레니아즘, 프리 밀레니아리즘 천년기 전에 재림이 있다.


후천년기론은 정확하게는 최근의 형태를 제외하고는 교회 천년기라 그런다.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에 동로마제국 막센치우스를 쳐부수고 로마의 통일된 황제가, 유일한 통치자로 등극을 했다. 그 때부터 핍박받던 교회가 공인됐다. 그리고 콘스탄틴이 서방에서 자기 아버지와 군대에 의해서 황제로 추대됐다.  동방에 다스리는 황제가 막센치우스 이다. 막센치우스가 너무 핍박을 많이 하니까 콘스탄탄에게 청원을 했다. 이걸 좀 해방시켜 달라고 하니 군대를 몰고 막센치우스를 펴부수러 왔다. 티벨강가에서 3번 싸웠는데 마지막 싸우기 직전에 콘스탄틴이 환상을 보았는데 주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네가 십자가의 기호로 대적을 쳐부수라”하는 환상을 보고 모든 칼과 방패에다 십자가 기호를 붙이고 막센치우스와 싸워서 쳐부수었다. 그리고 막센치우스를 티벨강에다 수장을 했다. 그리고 통일된 황제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 때가 이제 핍박과 압제와 순교의 교회가 지하에 있던 교회가 드러나서 옛날에 이방종교가 왕노릇하던 자리에 교회가 올라섰다. 그 때부터 교회에 평화가 찾아오고 그리고 교회가 번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교회가 사람들을 칼의 권세로라도 다 교회에 들어오도록 했다. 그 말을 어거스틴도 강력하게 주장을 했다. 그래서 교회 밖에 나가는 자들은 칼로 맞을 수 밖에 없는 거였다. 도나스티스트가 분립해서 나갈 때도 어거스틴이 그렇게 극력 반대하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칼의 권세를 동원해서라도 모두를 다 교회 안으로 들여야 된다. 그 때부터서 보통 13세기까지를 소위 교회의 천년기라 그런다. 이 기간에 교회가 평화를 누리고 복음이 널리 번창해 나갔기 때문에 이 때가 요한계시록이 말한 천년기 기간이라. 어거스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자기 말년에는 벌써 반달족에 의해서 히포성이 유린당하니 그들과 싸웠다. 이 천년기간에도 교회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하고 세속의 권세가 성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한가지 유익한 것은 이 험악한 때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선포됐다.-

 

 혹자는 그것보다 더 늘여서 1789년 불란서 혁명으로 교회가 완전히 배척당한 그 때까지가 천년기라 그렇게 주장을 하기도 해 왔다. 이 기간이 천년기라. 그래서 이 전통이 남아가지고 천년후기에 의하면 복음의 권세가 넓게 퍼지므로 그 복음이 모든 민족들 국가의 생활에 지배적이고 주도적인 세력에 대해서 복음의 도가 완전히 지배하게 되므로 악이 완전히 극도로 쇠퇴해져서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은 전 세계적으로 주의 재림전에 복음이 모든 민족들의 생활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므로 그 때에 의와 평화의 번영의 때가 천년간 있을 것이라 그렇게 주장을 한다. 그것이 천년후기이다.

천년후기론에 의하면 이제 이것이 진화론과 연결된 부분이 있습지만은 복음이 주님 재림 전에 편만해져서 온 세계를 뒤덮게 될 것이다. 이렇게 갈수록 악이 성해지고 배도가 심해지는데 주님 재림 전에 천년기간에 복음이 온 세상을 뒤덮어서 이렇게 될 때 미국교회는 그렇게 될 줄 믿고 사회복음주의를 부르짖었다. 지금 미국의 모든 생활 영역이 다 복음화 되었는데 정치와 경제 영역만 복음화 되면 완전히 복음화 되어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윌터 라이센부시가 이 사회복음주의를 열심히 부르짖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세상이 어려워지고 복음의 도가 크게 퇴락한 상황에서 앞으로 천년기에 복음의 역사가 크게 지배하는 때가 올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역사적 천년전기론하고 세대론하고 몇가지 차이는 있다. 달비에 의해서 미국에 심기워지고 그 다음에 불랙스톤, 또 그 다음에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게벨라인, 그 다음에 스페리취퍼, 이런 사람들이 천년기론의 세대론의 대표적인 학자이고 그것을 널리 보편화 하는데 크게 공헌한 것은 스코필드의 관주성경, 그 책이 미국으로 하여금 천년기론에 있어서 세대론이 되게한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천년기는 세대를 7세대로 나누지 않고 교회가 환난기를 통과한 후에 주님이 오신 반면,  세대론은 7년 환난을 교회가 통과하지 않고 7년 환난 되기 전에 주님이 오셔서 휴거해서 하늘로 가고 교회가 지상에 없을 때 7년 환난이 이 땅에 임한다.*

 

 그런 차이가 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다윗 왕국을 세우신다. 메시야 왕국을 세우신다. 그런데 이 다윗 왕국, 메시야 왕국은 예수님 초림 때 세울려고 하셨는데 이들이 메시야의 왕국에 이 호의의 제공을 거부하므로 할 수 없이 그 때에 메시야 왕국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재림 때로 연기했다가 재림 때 오셔서 이스라엘이 세계의 왕노릇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는 그와 같은 다윗 왕국을 세운다. 그런데 또 한가지 문제점은 세대론에 의하면은 교회는 휴거되어서 영원히 천국에 있고 지상에는 영원히 이스라엘이 다스린다. 이것도 문제이다. 그러니까 초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어린양의 제물로 오신 것이 아니고 메시야 왕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약속은 메시야의 왕국을 세워주기 위해서 오셨다. 그런데 이 메시야 왕국을 백성들이 배척하므로 메시야 왕국을 세울 수 없고 재림 때로 연기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섭리를 이 목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해방해서 왕되게 하는 세상적인 지상적인 왕국의 설립을 위해서 메시야가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때까지 모든 인류역사에 역사하신 것이 그리고 이스라엘을 불러가지고 민족을 삼으시고 이렇게 인도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세상적인 권세와 영화를 누리고 다스리게 하실려는 것이 아니라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게 하게 하고 그 백성에게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메시야가 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했는데 이 백성을 두었는데 세대론이 천년기론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메시야 왕국의 설립을 위해서 처음에 오시니 것이다. 그러니 천년기론 특별히 세대론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그 근본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이라고 해야 맞다.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데 첫째로 지금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 아직 세상에 있지 않다. 언제 세워지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세우신다. 지금 현상에는 역사적인 천년전기하고 세대론이 공통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이 세상에서 진행되고 있지 않는다. 그럼 복음은 왜 선포하느냐? 복음의 선포는 그들로 하여금 다 구원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려는 목적 보다는 복음을 증거하므로, 복음 때문에 그들이 심판받게 하는 구실을 준다. 그리고 이 복음을 통해서 이미 택한 자들을 불러 들인다. 그것이지 복음 자체가 이들을 구원해 내는 역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년기론에 의하면 대대적인 인류의 구원과 회심은 천년기 때 이루어진다. 천년기 때! 그것도 하나님의 경륜에 배척되는 것이 바울이 로마서 1:16,17절에서 말하기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이 복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에 권세인데 복음이 유대인과 첫째는 유대이이고 헬라인에게 유대인과 이방인 전체 믿는 자에게 여기에 보면 판티(παντι)를 썼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라. 그런데 복음 선포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민족들에게 심판에 이르게 하는 증거로 제시된다.

 

그리고 점점 더 갈수록 세상이 완악해지고 악이 성하고 배도가 성하기 시작했된다. 점점 불신앙이 성해져서 배도가 심해진다. 배도가 심해지고 그럴 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신다. 오셔서 어떻게 하시느냐? 메시야 왕국을 세운다. 초림 때 약속하신 메시야 왕국을 세운다. 그 때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유대인들이 특별한 지위를 갖고 모든 민족들을 이스라엘을 섬기는 종주국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섬기는 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특별한 지위에 있게 되고 여기에도 견해가 두 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직접 다스리는 경우가 있고 메시야 왕국만 세워놓고 다시 하늘로 가신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 때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세웠을 때에 구약의 제사와 절기와 법도들이 다시 회복된다. 그래서 희생의 제사를 다시 드린다. 이것은 세대론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천년전기도 마찬가지로 주장한다.

 

그런데 유대인 제사장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정신으로 제사가 집행된다. 이것도 근본적으로 끝에는 수정을 해서 좋은 것 같아도 이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한 유일한 희생의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로 정하셨기 때문에 구약의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이 완전한 제사 이 희생을 가르치기 위한 몽학선생 역할을 한 것이다. 율법만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윤리적인 율법만 아니라 의식법도 다 백성들의 눈을 들어서 십자가에 달려서 완전하게 희생을 이룬 이 희생을 가르치기 위한 훈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가 구약의 제사들을 그림자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제사를 실체라고 했다. 실체가 와서 완전히 구원이 성취되었는데 그림자로 다시 복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경륜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지혜가 마련한 유일한 구원의 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인데 이 구원으로 인해서 이 십자가 희생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이 훼파하셨는데 다시 피제사로 복귀한다. 피제사를! 구약의 모든 절기와 제사들을 이것을 다시 다 복귀한다. 그래서 제사를 드린다.

 

그렇게 되면 세계에서 제일 좋은 양들과 소들을 골라서 예루살렘으로 로켓트에 실어서 보내게 될 것이고 제일 좋은 건포도와 건무화과들을 그리고 또 한국에서도 나는 농약에 의해서 기르지 않은 좋은 소,  그것도 예루살렘에 가서 잡으면 예루살렘에 힌놈의 골짜기와 같은 더러운 것이 생길 것이니까 여기서 다 잡아가지고 등심 부분, 안심 부분을 로케트에 실어서 즉각 쏘아 올려서 예루살렘에 보내게 될 것이고 그리고 고기 많이 먹으면 입가심도 해서 그러니까 커피 많이 마시는데 그 커피도 좋지만은 그 수박, 수박 얼마나 좋은가? 세계 나라의 모든 수박이 많지만은 즉 서리 내릴 때 난다는 무등산 수박 얼마나 좋은가?. 다 썰어버리고 속만 해가지고 잘 포장을 해서 로케트에 실어서 예루살렘으로 쏘아 보내면 거기서 내려가지고 다 분배를 해서 우리는 가면 그 맛있는 양고기와 쇠고기 잘 익힌 것, 그리고 건포도, 건무화과, 수박 한점씩 받아 먹게 되고 좋을 것이다. 그러면 세대론만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년전기도 이와 같은 주장을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나라가 세워졌을 때 피제사가 다시 복귀한다. 바울 사도가 수상이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장관이 되된다.

 

"요한계시록 22:1-5절까지,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 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이제 새 창조가 이루어지면 새로 다시 짓는다는 의미의 새 창조가 아니고 있는 것을, 있는 재료들을 형태와 질서를, 제도를 바꾸어서 새롭게 창조하시면 그 창조를  구속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이제 새 인류가 신천신지에 살게 되는데 새 인류는 창조되고 구속된 백성이다. 새롭게 되어진 인류가, 처음 창조에서 처럼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창조되고 구속받은 백성들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 인류가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과 인류의 뜻이 완전히 일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들어감과 나가심이 사람의 들어감과 나감과 일치하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인간하고 일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전 인류가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찬양을 하는 백성들이 될 것이다. 개인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전 인류로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재능들을 다 계발하고 발전시켜서 풍성하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그와 같은 인류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타락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그런 인류가 되어서 타락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 혹은 불변성, 은혜언약의 불변성은 특히 말하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더 이상의 타락이나 범죄가 있을 수 없는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소가 어디가 되느냐? 하나님의 거소는 바로 일체의 인류가 하나님의 거소가 된다. 지금 하나님이 계신 곳하고 신천신지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하고 합쳐진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거소는 새 인류이다.  종말에 가서 하나님의 거소하고 지금 현재의 하나님의 거소하고 종말에서의 거소가 합진다요. 그러면 결국 지금 계신 곳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처소가 아니라 새 인류에게서 거하실 처소가 궁극적인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 계신 하나님의 처소가 새 인류를 거소로 하는 그 마지막 궁극적인 거소에 비하면 임시적이라, 임시적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처소에 대해서 쓸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거소를 새 인류로 하고 계신다.


이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과 같지 않느냐 하고 그런 이의를 많이 제기한다. 여호와의 증인에 의하면 모든 인류가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면 그때 부터 죽지 않고 그냥 영생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우리가 세대론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가지고 인각되었기 때문에 이 죄 많은 이 세상, 온갖 더러워진 것으로 많이 부패된 세상이 새 인류의 거소가 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딴 데로 가야된다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거소인데 그 거소가 땅으로 내려온다. 하나님이 영원히 새 인류를 거소로 하고 사신다.
그러면 새 인류의 거소, 하나님의 거소, 새 인류의 거소는 변화된 신천신지, 정확하게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완전히 변화되고 새롭게 되어서 새 인류가 살려고 하는 처소이다. 하나님이 이 자기의 창조를 내버리고 포기해 버리고 딴 곳에서 새 거소를 마련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면  베드로후서 3장에 있는 10절-13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현재의 땅이 풀어진다고 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창조를 전혀 새롭게, 새로운 창조처럼 다시 만드시는 역사를 말하는 것이지 이 창조를 다 없애버리고 또 우리가 살던 이 지구만은 이 죄악의 근본 고장이니까 이건 다 없애 버리고 저 멀리 새 곳에 딴 곳으로 우리의 처소를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냥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면 그 때부터 모든 인류가 죽지 않고 영생에 이르런다. 그런데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인류가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면 그 때 부터 죽지 않고 모든 인류가 그 때 부터 영생하게 된다.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른다. 그래 여호와의 증인들이 얼마나 열심있고 절도있게 사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우리들과 전적으로 배치되고 맞지 않는다. 이들에 의하면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면 모든 인류가 그때 70억의 인구가 예외없이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게 될지 모른다. 그건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그들에게는 심판이 없다. 그들에게는 부활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 천지를 새롭게 하심,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없다.


요한계시록 21:5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전적으로 새롭게 하시는, 아주 새 창조와 같은 의미의 재 창조의 역사가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없다. 그래 현상 그대로 동결하고 영생에 이른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심판을 다 겪고 이 창조를 완전히 새롭게 한 다음에 그 다음 새 인류들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이 땅이 우리 영혼의 거소이다.


세대론, 천년기론에 의하면 이 땅은 죄악의 도성이고 죄악의 곳이기 때문에 이것은 다 헐어버리고 천년왕국이 끝난 다음에는 딴 곳으로 간다. 우주의 딴 곳으로! 거기에는 구속이 창조의 회복이라고 하는 성경의 근본 가르침에 전적으로 위배된다.


창세기부터가 전적으로 회복의 역사이다. 창세기 3장 타락 이후의 모든 역사는 회복의 역사이다. 구속의 회복이다.

하나님께서 이 창조를 완전히 새롭게 하실 때에 이 창조 중에 하나도 떨어져 나가 상실되지 않게 하신다. 완전 복원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아무 것도 창조에서 상실되지 않는다. 그것이 개혁신학이다. 그것이 구속이다.


새 인류의 거소는 전적으로 새롭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인데 바로 이 땅이 하나님의 거소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그 새 성, 새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께로 부터 하늘에서 이땅으로  내려온다. 사람들의 처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구한 그의 거소로 하고 사시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 로마교회는 새 인류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을 직관한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그 때에 우리의 영혼이 신화한다고 한다. 특별한 은혜의 빛을 받아서,  영광의 빛을 받아서 신화한다고 한다. 특수한 빛을 받아서 인간의 합리적인 영혼의 부분이 신화한다. 모든 로마 교회의 구원과정이 신화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을 직관한다고한다.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이냐? 삼위일체 신비이다. 삼위일체 신비를 들여다 보게 된다. 그때 영혼도 신처럼 된다. 그때 희랍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향연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가 하나님 얼굴을 뵌다. 그리고 우리의 신 지식이 완성에 이른다. 얼굴과 얼굴을 친히 대하여서 보니까 지금처럼 책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구할 필요가 없게 된다. 신 지식이 완성에 이르른다.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 앞에 살지만 신화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 남는다.  바르트는 종말에 가면 인간이 피조물의 한계성을 넘어선다고 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나 오늘 바르트의 신학이 옛날과 같은 19세기 같은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기 때문에 신정통 신학이나 로마교회나 같다.  신화하는 데 도달한다.


그런데 개혁신학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살지만 그래도 우리의 수준이 말할 수 없이 높은 수준으로 향상을 하지만 그러나 신화되는 것이 아니다.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그가 이단들에 대항해 가는 아주 좋은 책을 썼다. 그 부분에 보면 어떤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아지심은 우리를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아지셨다. 그리스도께서, 로고스께서, 말씀이 우리와 같아지신 것은 우리를 자기와 같게 만들려고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를 하나님과 같이 되게 만들려고 하셨다고 한다. 우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포용할 만큼 잘 알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까지 포용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회복신학은 결코 피조물의 한계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영화하더라도 그것은 신화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교회는 모든 구원의 과정의 종국을 신화되는 것,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에 둔다. 창세기 3장이 죄로 지목한 것을 근본 죄로 지목한 것을 로마교회는, 그리고 현대신학은 다 구원의 종국으로, 구원으로 말한다. 하나님과 같이 됨, 하나님이 됨, 하나님이 신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회복신학에서는 신화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되지만 피조물로 남는다. 벌코프는 영화수준에 신화까지 이야기한다. 단호하고 확고하다. 확실하게 인간이 영화되어도 천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남고 피조물로 남는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창조 중보자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구속 중보자로서 모든 구속을 이루셨는데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는 그 구원이 완성된다. 그래서 새 인류에다 이야기 할 때 은혜가 자연의 질서에 통합된다. 더 이상 구속되는 은혜가 계속되는게 아니다.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중보자로 계신 것이 아니라 그때는 구속의 사역을 완성한다. 더 이상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구속의 중보자로 서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할 일이 없어지는가? 아무것도 안하시는가? 구속, 중보사역을 완성한다. 연합의 중보를 이루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류와 연합하시는데 그 바로 연합의 중보로서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연합의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선다. 연합의 중보사역을 계속하신다. 그때는 구속을 위한 구속 중보자가 아니라 연합의 중보자로서 역사하신다. 새 일류에 은혜가 자연의 질서에 통합된다. 자연의 원리, 지금은 자연의 순환의 법에 의해서 산다. 우리의 삶이  태양 에너지의 변형들을 흡수해서 건강을 유지하고 또 태양 에너지의 변형 형태들로 옷을 입고 있다. 그래서 순환기로 받아들여서 배설하고 배설하면 또 그것이 다시 분해해서 재합성을 통해서 인간에게 들어오고,  그 분해하는 중간 물체들, 미생물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재생산하는 식물들, 재연합하는 동물들도 일종의 생산자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생명의 음식을 공급해주는 의미로는 일차적인 생산자는 아니지만 2차적인 생산자지다. 다 식물에 의해서 생산된 것을 우리가 다시 받아서 먹고 살고, 자연의 순환과정에 의해서 우리가 산다. 그것을 조금 더 많이 먹고 좋은 질의 것을 먹느냐는 그 차이 뿐이지 다 꼭 같다.


지금은 그런 순환법에 의해서 사는데 그때는 영이 생명의 원리이다. 그래서 그때는 먹고 마시는 것이 필요가 없게 된다. 영에 의해서 완전히 사니까! 우리의 생명의 원리가 영이다. 그래서 육으로 살지 않는다. 자연의 순환법에 의해서 살지 않고 영의 역사로 산다.

그러면 생명의 문제, 요한계시록에서 22장에 보면 참 재미있는게 나온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 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열 두 실과가 있다. 신성 과일이 생명과와 다른게 아니고 과일이다. 


그런데 천국 가도 생명과가 있다. 생명수 강이 흐르는데 열 두 과일이 있어 가지고 달마다 매달 실과를 맺는다. 그래서 천국 가면 그 과일들을 다 따먹을 수 있게 되어서 매우 소망스럽다. 그런데 여기서 말할 수 있는 생명과는 우리가 사과를 따먹듯 배를 따먹듯 자두를 따먹듯 하는 방식의 과실을 따먹고 영생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과는 낙원에서 약속한 생명과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말한다. 그 신천신지에 과일들이, 12 과일들이 달마다 열매 맺는 그런 식이 아니고!  그런 과일이 달마다 주렁주렁 열리는 그런 생명과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낙원에서 인류에게 약속한 그 생명의 약속이 실현된 걸 뜻한다.


그리고 생명수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수의 강을 보이니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이것도 실제로 생명수의 강이 흘러서 넘친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낙원에서 약속하신, 이미 주신 생명의 약속의 실현이다. 그 낙원에 보면 낙원에서 부터 4개의 강이 흐른다. 그 낙원에서 강이 흘러나서 물이 생명의 근원이 흘러나서 온 지구를 적신다. 낙원을 돌며 적시면서 온 지구를 적시는데 하나님께서 그 낙원에서 약속하신 그 생명수가 종말에서 완성된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이지 우리가 지금 먹는 의미의 생수, 그런 것을 떠서 먹는 방식으로 생수의 약속이 아니다.


그런데 이 생수가 가운데로 흐른다. 이 가운데로! 하나님의 보좌의 어린 양 앞으로 길 가운데로 흐른다. 길 가운데가 길은 사람이 통행하는 곳  인류의 거소이며 삶의 터전이다. 그러니까 어린 양의 보좌 앞에서 모든 인류의 생명이 편만함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으로 부터 흐르는 생명이 모든 이류에게 편만함을 말한다.
그 생명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과 어린양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 부터!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다. 하나님께로 부터 나서 영생하는 생명이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거기는 죽음이 없다.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니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여기서 분명히 하나님의 보좌가 사람들 가운데 와 있다. 하나님의 거소가! 그런데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리라. 그때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산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더 이상 이와 같이 자연의 빛으로 사는게 아니라, 이 자연의 빛도 신비지만, 자연의 빛의 신비를 다 해명한 사람이  없다.


지금 이 자연의 빛도 신비이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만 그때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 의해 산다. 자연의 빛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된다. 그래 이 별들의 빛도 현 창조까지만 유효한 것이다.  여기 요한계시록 22장에 분명하게 써 있는 글들도 이것을 그냥 글자대로 해석하면 문제가 많다.  22:1절,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글자대로 해석해야 된다면 보좌에 앉으신 이 옷자락부터 젖어서 앉기가 어렵다. 지금 우리가 과도한 문자주의, 그것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그런 산문에 있어서는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해석하고, 이렇게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 부분에 와서는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또 미국의 복음주의 보수 교회들이! 그래 이걸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생명은 하나님께, 그리스도께 있음을 말한다. 그것이 그 약속이 실현되어서 생수와 생명과가 지금 낙원에서 성취된 것이다.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넘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 넘치기 때문에 거기에는 모든 인간에게 있는 어려움과 곤고가 다 없어진다.  21:3절,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는데 장막은 구약의 약속의 성취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구약 백성들에게 와서 계시하실 때에 장막에 계셨다. 그렇게 하나님이 와 계신 것을 ‘쉐키나’라, 장막이라고 했다. 천막을 치고, 장막, 성막이라고 했다. 우리 말에! 성막을 치시고 하나님이 거기 와서 계셨다.


그때는 하나님이 완전하게,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와 계신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에 와서 계실 때에는 장막에, 그 성전 때는 시은소에, 그러니까 법궤 위에 와 계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 계심이 유대인들이 생각하듯 기계적으로, 마력적으로 와 계신 것이 아니었다. 주권적으로 와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범죄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떠날 때 언제든지 철수하셨다. 그의 임재를! 그러니까 그때 쉐키나는 임시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장막이! 그러기 때문에 이 신구약 중간기 시대 때에 마지막 선지자가 전통적으로 말라기 선지자 후에는 구약의 랍비들이 이해하기를 성령이 그들을 떠났다고 했다. 성령이 구약 교회를 떠났다고 가르쳤다. 그래 성령이 직접적으로 백성들에게 역사하시지 않는 걸로 랍비들이 가르치고 이해를 했다. 중간기 기간에는! 그런데 성령이  마가복음 1장,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 때 성령이 다시 나타난다. 그런데 성령 오심의 궁극적인 목표가 능력을 행하고 여러가지 은사를 나타내는 그와 같은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전체적인 경륜에 의하면, 성령의 오심의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 혹은 처소, 하나님의 거소 만드는 것,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내주가 가장 큰 사역이다.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제일 큰 사역이 내주이다. 성령의 내주, 그것은 우리를 거룩한 백성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거소가 되게 만드시는 일이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임재가 저들 백성을 자기들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 중에 거하신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거주가 장막에 와서 거하셨지만 임시적이었다. 그것이 종말에 완성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 하나님의 저희와 함께 거하시니,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셨다. 그래 그때 마지막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것이 모든 구원 사역의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됨, 거룩한 백성됨, 그래서 하나님이 와서 거하신다.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근원에서 씻기신다. 모든 고통과 수고를 제하신다. 여기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모든 고통과 수고를 제하심을 말한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마지막 목표가 여기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과 그들과 함께 사시는 것, 그것이 모든 하나님의 사역의 목표이다.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는 것, 그것이 새 인류에게 와서 그의 거처를 정하시고 영구히 함께 거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하나님이 떠남으로 있었던 그 모든 문제가 완전히 다 해소된다. 우리가 생명수 샘물을 마음껏 마시듯이 생명으로 가득차서,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유업에, 하나님의 상속에, 하나님의 모든 거소에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하나님이 친히 와서 거하신다. 그것이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심이고 그것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목표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창조의 목표였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류 안에 와서 영원히 거하시며 사실려고 창조를 이루셨다.
다음에 10-11절을 보면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면 인류의 생은 이렇게 하나님 모시고 살기 때문에  예배와 묵상의 생활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 진행될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에 대해 영광에 대해 감사와 감탄으로 연속될것이다. 그래 아담이 삼중직을 진행할 때는 모든 것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것이 제사장직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21장 22절,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전이 필요가 없다.하나님이 친히 백성과 함께 거하시므로 성전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든  인류에게 편만히 거하시니까 성전이 왜 필요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다. 스가랴서에서 보면 거룩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니 성전이 따로 필요하지 않는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그 다음 26절에 같은 말을 반복했는데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그때 그 영광의 처소들이 인류가 아담부터 마지막까지 인류가 이룩한 문화업적들이 이 영광스러운 나라에 편입된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지금 여기 세상에서 다스리는 그런 영광과 존귀가 아니고 모든 민족이 이룩한 문화 업적들을 그때 가지고 온다.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고 그가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산다. 우리는 그곳에 가면 영원한 안식만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긴다. 사람의 생명이 바로 하나님을 섬김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영생에 이르런다. 거기 가서 하나님을 섬긴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류의 뜻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바울이 위의 면류관을 받는다고 했고, 베드로도 위에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란다고 했는데 우리가 어떤 상급을 받을 것이냐? 제일 큰 상급이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보고 사는 삶이이다. 모든 인류의 마지막 소원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목표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한 삶으로 살고 그리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상급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주시사 영원한 생명으로 살고 하나님을 모시고 그의 영광으로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셨다. 이렇게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그분께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바쳐 드려야 할 것이다. 아멘. (פרופסור  שְׂצְליוּ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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