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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와 슐라이어마허의 사색을 인도하는 별

by 【고동엽】 2011.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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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슐라이어마허는 바르트의 사색을 인도하는 별

 

 칼 바르트의 『로마서강해』(제2판)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 중의 하나는 종교비판이다. 왜냐하면 19세기 신프로테스탄트신학(또한 자유주의신학)에 나타난 특징, 즉 하늘과 땅의 연결을 가능케 하는 다리는 종교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 이 종교에 대해 학적인 차원에서 처음으로 다룬 인물은 슐라이어마허이다.

 

젊은 시절의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에게서 신프로테스탄트신학이 정초되었다고 생각하여 그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세계 안의 모든 사건들을 유일한 신의 행위라고 생각하는” 능력으로서 찬미하였다. 즉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는 인간의 생득적인 소질로서의 종교성, 또한 종교적 능력이 작용하였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종교를 창출해 내는” 무의미한 시도가 행해졌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1922년에 행한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강연에서 슐라이어마허와 결별할 것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계보는 키에르케고르를 거쳐 루터와 칼뱅에게로, 바울에게로, 예레미야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여기 소개된 계보에는 슐라이어마허의 이름이 제외되어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나는 슐라이어마허의 평생에 걸친 연구로써 나타난 천재적인 번뜩임에 당연히 존경심을 갖고는 있지만, 당분간 나는 그를 훌륭한 신학교수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한,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곤궁 속에, 그것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곤궁 속에 있다는 사실을 가장 치명적으로 불분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위 종교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곤궁상태에 있으며,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은 고양된 어조로 인간에 관해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불분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젊은 시기의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이 종교에 근거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와 결별함으로써 새롭게 자신의 신학적 노선을 구축해 가려고 하였다. 바르트가 이렇게 의도한 배경에는 ‘유한자는 무한자를 수용할 수 없다’는 신학적인 기본명제가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유한자의 생득적인 능력, 혹은 소질로써 무한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종교라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하나님 앞에서의 불신앙이며, 교만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신앙을 소유할 수 있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 즉 인간은 공동 그 자체이다. 신앙을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 편에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계시와 은혜에 근거할 뿐이다.

 

물론 바르트는 칼로 무를 자르듯이 슐라이어마허와의 관계를 청산한 것은 아니다. 그의 생애를 통해서 보면 그가 슐라이어마허와의 사상적인 관계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바르트는 베른대학에서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공부하고 있었던 신학생 시절에, 자기보다 약 백 년 전의 신학자요 철학자인 슐라이어마허를 사상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 당시 바르트는 특히 칸트와 슐라이어마허에게 심취하고 있었는데, 말년에 바르트의 비서였던 부쉬에 의하면, 이 때부터 “슐라이어마허는 오랫동안 바르트의 사색을 인도하는 별”이 되었다고 한다.

바르트는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계속하여 슐라이어마허의 저작들을 연구하고 강의함으로써, 슐라이어마허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신학적 방향을 확립해 갔던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에 반대하기도 하였지만,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의 업적, 탁월한 인간적 인격과 정신, 역사적 영향력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항상 경의를 표했음은 물론, 늘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바르트는 종교개혁시대이후 슐라이어마허보다 더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신학자는 없었다고 하면서, 19세기(신프로테스탄트)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자들도 그의 빵으로 양육되었을 정도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200년간의 신학적 사유의 주요한 흐름이 숙명적인 필연성으로 합류하여 떨어지는 나이아가라폭포라고 하였다(1924년의 「브룬너의 슐라이어마허론」을 참조하라). 부쉬는 바르트와 슐라이어마허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한다.

 

“바르트는 처음에는 슐라이어마허에게 감격하여 그 입장에 접근했으며, 그 다음에는 그를 맹렬히 비판했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더욱이 그에 대한 물음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를 계속 연구하는 가운데 슐라이어마허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를 이해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젊은 시절에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에 나오는 “우주의 직관과 감정”이라든가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 그리고 『신앙론』에 나오는 “절대의존의 감정” 등을 인간의 생득적인 종교적 소질로써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바르트는 그러한 내용들이 하나님의 근원적인 계시에 근거하는 것이며, 더욱이 슐라이어마허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은 그러한 내용들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임을 진술하려고 한 것이라고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슐라이어마허와의 관계에 대해서 고백한 「후기」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기를,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성령의 신학>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획기적인 언급이다. 즉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바르트가 초기에 생각했던 인간의 생득적인) 종교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음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바르트의 태도변화는 이미 그의 『교회교의학』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를 19세기 신프로테스탄트신학(또한 자유주의신학)과 구별하여 서술하기를, 신프로테스탄트신학(또한 자유주의신학)이 슐라이어마허로부터 현저하게 일탈하였으며, 심지어는 그의 사상을 왜곡시켰다고까지 한다. 또한 종교에 관한 언급에 있어서도 <종교개념>을 수용한다.

 

즉 『로마서강해』(제2판)에서처럼 종교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종교는 계시,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의가 되고 성화가 되는 경우 참 종교가 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종교의 긍정 가능성을 보였던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은 그 사상의 심층적인 흐름에는 변화가 없을지 모르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다소의 변천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신학세계를 여행할 때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점은, 때로는 굽이쳐 흐르는 그의 사상의 물줄기를 조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슐라이어마허에 대한 바르트의 해석만 보더라도 그렇다. 젊은 시기의 바르트가 슐라이어마허에게 가했던 비판만을 통해서, 슐라이어마허를 자유주의신학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만년의 바르트는 오히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노력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했으며, 결국 그를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 등과 더불어 프로테스탄트신학의 전통 속에서 빠져서는 안 될 거구로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1955년의 『모차르트에게 드리는 고백』을 참조하라). 어떻든 젊은 시기의 바르트는 너무나도 지나치게 종교(또는 종교개념)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대응하여 차츰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기에 이르게 된다.

최 홍덕(서울장신대학교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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