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른이해 〓/율법과 복음 바른이해

*율법과복음 바른이해

by 【고동엽】 2009. 8. 10.
 
 

 율법과 복음 바른이해     

                                                

복음의 능력은 그 자체로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재창조하는 힘을 가진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인간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되는 것이다.

 

율법이 복음 전에 먼저 와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종교개혁자들의 '구원 순서적' 논리대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 전.후에도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주의 자녀들에 주어진 규범이지 의의 길이 아니다.

 

율법은 구원의 전(前) 과정도 구원의 조건도 아닌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뿐이고 율법의 도덕법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규범이지 구원의 요건이 결코 되지 못한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회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서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언약 백성에게 생활 규범으로 주어진 율법을 지키게 된다. 주의 영이 그러한 힘을 주신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행할 힘을 얻게 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새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구약 성경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한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약과 신약의 통일이다. 그러므로 구약 전체의 증거이시며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적 권위를 가지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주요 창조주이시기에, 자신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시며, 안식일에도 병을 고쳐주시며, 죄를 사해 주시고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주셨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에서 말한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는 구원사적 관점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 구원의 중심이었다.

 

이 종말론적 구원의 중심점이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요 원리이다.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기록 하면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의롭다함을 얻었는데 다시 할례를 받고 율법의 의무인 날과 절기와 규례들을 지킨다는 것은 있을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허무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 배경은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고 돌아오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기는 믿어도 그러나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 얻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큰 혼란을 야기시켯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강권한 이유는 포로 귀환 후 에스라 서기관이 율법을 백성들에게 열심히 지켜야 구원을 이루고 메시야 도래를 앞 당긴다고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저들의 나라가 망한 이유도 율법을 못지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로 율법은 지킬 수도 없고 또 그것이 구원의 길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무거운 죄만 가중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사명은 온전히 율법을 지킬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오심을 열망하도록 하는 인도자밖에 되지 않는 다는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요지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라고 강변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도 율법으로서가 아니고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왜 율법이 아닌것은 하나님이 이미 믿음으로 세상을 구원 할 것을 율법이 오기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롭게 됐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들을 주신다고 하는것은  '많은 자손이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 곧 그리스도의 씨가' 자손이라는 것을 바로 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바울이 말한다.

 

 아브라함이 믿는 그 똑 같은 믿음을 우리가 가졌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었고, 우리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었다.  세상의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어서 동일한 믿음이다. 그래서  율법을 지나 믿음을 지키는 이방인들이 참 아브라함의 씨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백성이고,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우리가 받고  아브라함이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의에 이르고  성령도 받는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보내셔서 (갈4:5-6)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기 때문에 이방인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들이 된다고 갈라디아서 4장은 말한다.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은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 이었고 또 할례의 표를 받은 것도 할례 받기 전에 믿음의 의를 인친 것이었다. 그 이유는 할례 받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믿으면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 되어서 그들에게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셨다는 것이다(롬4:9-12).

 

그래서 아브라함은 율법의 유대인 뿐만 아니라 율법이 상관 없는 이방인 까지 조상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앞으로 내실 의의 길을 믿었기 때문에 바로 이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시고 그 의를 인치시기 위해 할례를 받게 하신 것이다.

 

바울이 구원의 방편으로 율법을 들어 말할 때 모세를 들어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들어 말한 이유도 구속사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면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인데도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 했을 때, 아브라함은 통상적인 동양인의 관념대로 하나님이 내게 한 씨를 주셔서 내 이름이 끊기지 않고 대를 잇게 하시는구나 하고 인간적인 혈통이 이어짐을 감사하고 믿은 것이 아니라 이삭을 주시기로 약속 하실때 그것도 다 젊은 시절 지나 인간적 가능성이 희박할때 특히 사래의 경수까지 다 끊겼는데도(창18:11) 한 아들을 주시겠다 하심은 혈통이 이어지는 복이 아니라 세상 구원섭리가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진리를 갈라디아 3장 6절-18절에서 밝힌다.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은 이것을 의로 정하셔서 '그런즉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것을 알아라'는 것이다.

 

믿지 않는 이방인일지라도 믿으면 의로 여기실 것을 성경이 그 내용을 알고 미리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이로 인하여 모든 이방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하여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걸3:6-9).

 

이 약속 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 하신 것인데 네 자손인 오직 하나 곧 그리스도인데 하나님께서 네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심은 이삭이 아니라 이삭의 씨를 통하여 세상의 구속주를 주시겠다는 섭리를 아브라함은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아브라함은 보고 기뻐하며 웃었다(요8:56).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에서 그리스도의 출생을 보았고 이 사실을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 하렸느니라' 라고 그리스도 자신이 증거하셨다(요8:56).

 

 그래서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과 약속은 430년 후에 생긴 율법도 폐하지 못했다(갈3:17). 그러니 처음부터 구원의 길은 430년 후에 율법이 와도 변경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율법 가운데서 살리라 했는가(갈3:12). 왜 하나님은 그 약속의 씨를 기다리게 하지 않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지키며 살라고 하셨는가?

 

 이 섭리는 율법 준수로 구원 됨이 가능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도저히 불가한 율법을 통하여 백성들을 죄아래 가두어 놓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만 나오는 의의길을 계시하시기 위해서이다.그런즉 율법이 무었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갈3:19).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법자가 되나니 '한 계명을 범하여도 전 율법을 범법함이 되는 것이다(약2:10). 그러나 이것은 오직 약속의 자손이 오시기 까지이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3:24-25). 바울은 율법의 기능을 몽학선생으로 기술한다.  

 

그래서 율법 자체로서는 완결되지 않고, 늘 불안해서 안식과 쉼이 없으나, 율법 전체가 다 그리스도를 목표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향해 달리고 결국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이루셨고 바로 그 동일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의를 이루셨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론의 율법과 제사직의 효능을 다루면서 구약의 짐승의 제사로는 사람의 죄가 속량되지 못하며 완전한 속죄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 구약의 제사 제도가 세워졌다고 한다.

 

짐승의 피가 완전한 구속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반복해서 속죄 제사를 드렸고, 제사장이 완전한 구속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제사장이 죽으면 계속하여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바뀌다는 것이다(히 7:23).

 

 율법은 아무도 온전하게 못하므로 그 율법 아래서 얻은 아론의 제사직도 온전한 속죄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로 대치되었고 한다(히 7:12,18,19; 8:7-13; 9:10; 10:9).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제사장이며 완전한 제사가 된다는 근거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개념에서 찾았다.

 

구약의 족보 개념에서 볼 때, 멜기세덱이 죽은 날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니 그들의 족보법에 따르면 지금도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으셨으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창조주이시면서(히 1:2,3: 2:10; 3:3; 4:14) 대제사장이시므로(히 2:10,17; 4:14)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전하고도 영원한 속죄가 되는 것이다(히 5:9; 7:25).

 

 옛 질서는 해소하고 전혀 새것이 생겼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지막이고 마침이다(롬 10:4).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키고 성취하므로 폐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모든 정죄를 다 담당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서 적용되지 않는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고, 그 율법의 저주를 다 받고, 또 다 성취 됐는데 누가 그것을 요구하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빚을 지고 살 때에 빚독촉을 받고 살지만 빚을 다 갚았으면 빚장이가 나에게 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를 그리스도가 다 담당하여 버리셨으니 내가 이제 더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구원의 길로서 율법이 정확히 끝났 버린 것이다.

 

 그러니 구원의 길은 더 이상 율법에서 나오지 않고 믿음에서 나온다.  모든 율법의 기능이 종결되고 그 세력이 파괴돼서  더 이상 그것이 나에게 구속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완전 무력화 돼 버렸다.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그 율법의 그 길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지금 돌아갔다.  예수를 믿어 세례받는 자들에게는 율법의 적용이 사라졌다는것이 사도행전 15장에 사도들의 공회의의 결정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방인 교인들이 구약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율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율법을 계속해서 지켜오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며 예수를 믿었는데 이방인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바울의 이해는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선포할 필요가 없다. 처음부터 예수  믿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만 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율법은 지킬수 없으니까 율법을 지킬 필요없이 예수만 믿으라고 전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분이 넘쳤다.  자기들의 신성한 종교에 율법을 지킬 필요없이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하니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또 그렇게 율법이 구원의 길로 일단 폐기 됐어도 '오직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을 정당화 한다.   의식법은 완전히 폐지되고 성취된 것으로 보고 그 다음에 도덕법은 더욱 강화되고 그리고 모든 예언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됐다고 본다. 그렇게 함과 동시에 구약을 그대로 받는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의식법과 제사법도 예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아들이라도 믿음의 때가 오기까지 율법은 사람을 얽어매는 노예의 가정교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가 바로 아들이이지만 또한 자유자이고 아버지의 상속자이고 그리고 모든 재산과 종들 위에 권세를 받아 가질 자이지만 아직 상속의 때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상속의 날을 정해서 아들에게 권한과 모든 재산을 다 양도해 주기까지는 노예 가정교사 밑에 있다.

 

 그래서 비록 주인이고 상급자이어도 노예 가정교사 밑에 있는 동안은 종들과 같다. 노예들이 사는 똑 같은 법도와 방식으로 산다. 주인의 아들이라고 우리처럼 주인 행세를 하고 특권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노예 가정교사하고 똑 같이 산다. 때가 차기까지 그 아들은  노예 가정교사의 매로 다스려 진다(갈 4:1-11).

 

그와 마찬가지로 율법 아래 사는 자들도 돌 위에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살고 절기를 지키며 살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때가 차매 보내사 여인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

 

우리가 아들이 되니 그 아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셨다. 로마인들은 아들에게 상속식 때에 자기 반지를 빼서 아들의 손에 끼워주므로 그가 주인인 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한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분명히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 이제 더 이상 종이 아니다. 이제 그 상속식을 한 후에는 종이 아니다. 그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의 유업을 잇는다. 우리가 이제까지 율법에 매여서 그렇게 살았는데 이젠 그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로 성령을 모시고 살게 됐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서 그 천하고 약한 그런 것들에 종노릇 할 필요가 없다.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이루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여인의 몸에 나게 하시고 우리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온후에는 믿음으로 사는데 이것은 전혀 율법의 지배를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루터는 이 복음의 도를 이해할 때에 아직도 율법 아래 사람을 가두어 두었다가 거기서 해방시켜 복음으로 자유롭게 해야 진정한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줄 알고 아직도 복음과 율법이 생명으로 마주 서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개신교로 하여금 바울의 복음의 이해를 잘못하게 한 근원이 된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정죄함이 없이 생명의 성령의 법안에서 우리는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롬8:2).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은신후 '다 이루시고 머리를 숙이시며 영혼이 돌아 가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엔 구원의 길로서 율법의 기능은 모두가 종결 되었다(요19:30).

 

 구약의 피제사는 죄를 절대 깨끗케 하지 못할 뿐만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제사에 비하면 그림자와 예표뿐이고 그리스도의 제사는 실체요, 그 원형이다. 율법은 아무것도 못하기 때문에 이에 더 좋은 소망으로 우리가 하나님게 가까이 나아간다(히7:19).그래서 히브리서는 모세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보았고 따라서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의 기능의 종결에 대하여 바울보다 더 과격하게 말한다.

 

 대 제사장들이 자기죄나 백성들의 죄 때문에 날마다 제사 드릴 필요가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이 모든 것을 다 해결 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히7:27). '전옛 계명이 연약하여 무익하므로 율법을 다 폐했기 때문에 더 이상 피 제사를 반복하지 않는다(히7:18). 그러나 세대론자들과 전 천년기론자들은 재림후 메시야 왕국때 구약의 모든 제사 복귀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고 완성인데도 옛 언약의 백성들은 제사제도를 계속 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이 제도를 하나님은 성전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고 자신의 심장을 내보이셔서 물리적 방법으로 폐지 하셨다.

 

그래도 성전이 있는 한 레위 제사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에 AD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을 들어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시켰다.그 후 성전 재건은 이뤄지지 못햇고 또 시온주의 결과로 유대인들이 2차 세계대전후 팔레스틴에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세웠어도 아직도 성전을 세울수 없는 것이다.

 

 성전만 아니라 제사장 가문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심으로 지금 까지도 사독의 뒤를 이은 제사장의 후예를 확인해 낼 길이 없다. 그들의 성씨가 코헨(כהן)이란 사람을 찾아 제사장으로 세울수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 코헨(כהן)은 제사장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헨(כהן)이란 성씨를 가진자도 찾을길이 없다.

 

그리고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미 성취됐지만 그 기능은 유효한 것은 의식법, 시민법, 윤리법 이 셋중 윤리법이라 하겠다.의식법이란 구약의 피 제사를 가르킴이요, 시민법이란 이스라엘의 재판법이다. 이스라엘의 재판법이 세계 각 나라의 법을 지배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공의는 살아 있다(공평하게 재판하는것). 윤리법이란 '살인치 말라' 의 뜻은 지금도 어느 나라에서나 살인 하면 법에 저촉을 받는다.

 

 이것을 더욱 깊게 하고 확대 해석한 것은 이웃을 미워하는 것을 예수님은 살인으로 보셨다. 이곳 윤리법이 그리스도의 법과 부합되기 때문에 사랑으로 받는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 언약 백성들의 생활규범으로 역사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거룩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 역할인데 율법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고 했다.

 

 구약 백성들을 일시적으로 심판할 때 그들이 율법을 범했다기 보다는 그들이 언약을 저 버렸기 때문이다.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있는 자들에게 말하는것으로서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있게 하려 함이고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9-20).

 

 초대 교회는 의식 제사법은 폐지되고 예언들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성취를 말하며 구약의 윤리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타당한 법으로 강화된 것으로 고백하였다. 초대 교회의 율법 이해가 종교개혁에 의해 계승되었다.허지만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사적으로 이해한 것에는 어둡게 하고 즉 행위로가 아니고 믿음으로만 이라는 진리만을 강조하므로 구원에 이르는 길에 아직도 율법이 구원의 길로서 세력을 행사하고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 이후에는 믿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율법은 아무런 주장과 요구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다음은 종교 개혁자들의 율법에 대한 각 신앙 고백서이다.

 

 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 우리는 율법을 도저히 연역해서 지킬 수 없으므로 율법의 마침이요 완성이신 그리스도만의 속량때문에  율법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영국교회 39개조 :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므로 의식과 예법들을 관계하는 율법은 그리스도인에게 아무 구속력이 없으나 도덕법까지 지킬 의무가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바울과 히브리서의 가르침을 잘 반영한다.

 

 3.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 율법이 구원의 길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인들을 얽어매지 않으나, 생활의 규칙으로 역사함을 말했다.

 

 4.제1서서 신앙고백서 :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귀속된다.

 

 5. 제2서서 신앙고백서 : 율법의 본래 전수 목적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임을 분명히 하고 구원의 길로서 준 법은 폐지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생활 규범으로 존재함을 밝혔다.

 

 6.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 : (종교개혁으로 나타난 최초의 신앙고백서) 모세의 의식들은 복음이 계시된 후에는 생략될 수 있다고 가르친 성경은 안식일을 폐지하였다. 단지 모임을 위해 한 날이 필요할 뿐이라고 하여 믿음만으로 구원얻고 율법이 구원이 길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7.일치 공식 : 일치 공식은 구원은 은혜로서 믿음뿐이요 율법은 생할 규범으로서 신자들에게 역사한다고 가르친다. 멜랑톤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신약의 가르침대로 이해하였고 구원사적 관점에서 율법의 역할을 이해했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 대로 죄의 자각도 복음의 전파로 이루어짐에는 미달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서 율법이 성취되었으므로 이방인에게 먼저 율법을 선포할 필요가 없고 복음만 선포하면 되기 때문이다.

 

 8. 불란서 신앙고백서 : 칼빈도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되며 율법은 생활 법칙으로만 역사한다고 가르쳤다.

 

 9. 화란 신앙고백서 : 화란 신앙고백서도 율법은 다 그리스도의 그림자여서 그의 오심에서 다 성취되고 그 사용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폐기되었으나, 우리 생활의 법칙으로는 역사한다고 가르친다.

 

   종교개혁 신경들을 보면, 그리스도 이후에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고 그 기능은 종결되었다. 의식법, 시민법(정치법), 윤리법 중에서 의식법은 폐지되었고 시민법은 지금 타당하지 않으며 윤리법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규범으로 타당하고 강화되었다는 가르침을 따랐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도 구원은 율법을 통해서 아니고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이 진리요, 이 구원을 위해 율법이 몽학선생으로 주어졌다는 진리에는 명확히 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구원사적 섭리에 근거해서 재창조에서는 첫 날이 하나님을 섬기는 날로 바뀌었다.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졌고 재창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부활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된 경배자들은 부활을 기념하여 예배드려지게 되었다.

 

구속사에 기초해 보면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부활이 안식일 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예배의 날도 안식일에서 주일로 이동되었음을 가능케 했다..

 

하나님은 안식일 준수를 성전처럼 물리적 방식으로 금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폐지하시고 '주의 날'을 예배드리는 날로 만드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주의 날은 1주일 전체이기도 하다. 부활의 날은 처음 창조의 첫날을 능가하며 재창조의 시작이다.

 

 다시 돌아가서 율법은 구원의 조건도 아니며 구원을 위한 전 단계도 아니고, 언약 백성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생활 규범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은  지금 폐지되었지만 역사적으로는 권위를 가지며, 지금 이 시대에 그 '정신'은 여전히 법칙이 아니라 규범적으로 남아있다고 볼수 있다. 위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율법을 의식법, 시민법, 윤리법으로 구분하여 율법이 갖는 의미를 구원사적 접근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1. 의식법 :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실현되어야 할 요구로 나타난다. 안식일을 구원의 필수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 얻은 백성으로 서 주의날을 혹은 1주 전체를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구약 백성들이 지킨 것보다 더 잘 지켜지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십일조와 성물들도 구원의 방편으로 바치지 않고 주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 구원의 도의 보존과 전파를 위해서 연보한다. 율법이 구원의 길로서가 아니라 영으로 사는 백성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를 가르치고 그대로 지켜지기를 요구한다.

 

 2. 시민법 : 옛 언약의 백성들의 국가 생활을 규정하고 제재한 시민법은 현대 사회에서 그 정신에 있어서는 법칙이라기보다 규범적이라고 할 것이다. 옛 이스라엘의 시민법을 지금 상황에서 법적으로 규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의식법들의 시행을 종결시키고 폐하셨으나 본질과 정신까지도 소실되게 하신 것이 아니다.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은 오늘날 그리스도들의 예배와 경건 생활의 규범이 되게 하셨다.

 

 구약 백성들의 예배 참석시 성결케 하는 외적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할 때 먼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정하게 하고서 또 마음을 바로하여 예배해야 할 것임을 깨우처 주고 가르쳐 주는 기능을 한다. 주일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는일로서 거룩함과 안식하는 날로  생각하면서 편하게 쉬는 날이다.  

 

 3. 윤리법 : 윤리법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법칙이다. 구약과 신약의 윤리법은 지금도 변함없이 지켜지기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이다. 7계명을 범하면 간음자요, 8계명을 범하면 도적이고, 6계명을 범하면 살인자이고 1계명을 범하면 우상숭배자이다.

 

신약은 구약보다 비교 불능의 높은 윤리적 표준을 제시한다. 신약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 법칙이고 법전이다. 그러나 신약은 구약과 별개의 윤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과 구약은 동일한 윤리를 가르치나 영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윤리가 더 과격해지고 신령해졌다. 윤리법 혹은 도덕법은 그리스도의 속죄 이후에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 더 강화되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그대로 실현되기를 요구한다.

 

  이처럼 율법은 언약 백성의 '생활규범' 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거룩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였다.  하나님이 구약의 백성들을 일시적으로 심판하실 때 그들이 율법을 범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언약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버렸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버렸다.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이다. 신약 시대에도 새 언약의 백성에게도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활의 규칙이요 규범이다. 이미 예루살렘 공회의에서 이 진리를 결정하고 분명히 했다.

 

 예루살렘 사도 공회의에서 베드로는 이방인들의 양심이 믿음으로 깨끗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행 15:9). 하나님이 옛 구원의 길을 폐하셨는데도 그것을 다시 도입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에 도전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길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증거했다. 이 사실을 결정적으로 선포한 사람은 야고보였다(행 15장). 바리새파 장로들의 수장인 야고보는 구원은 믿음으로 얻고, 율법은 언약 백성의 생활법칙이라고 선언했다. 새 언약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는 생활 규범을 준수해야 함을 말했고 율법의 무거운 짐을 이방인들에게 씌워서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율법이 새언약의 백성에게 주어진 생활 규범으로서 새언약의 백성인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영, 곧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로 율법을 지키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자는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다(롬 6:14-23). 영을 따라 사는 신령한 자들이 율법을 영의 능력으로 지키므로 율법의 요구 곧 의가 다 충족된다(롬 8: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왜냐하면 율법을 범한 자들을 정죄하는 모든 정죄 곧 모든 죄가 그리스도 예수의 육신에게 정죄되고 심판되어 율법의 요구가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대신 율법을 지키어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어 그의 영광이 되게 하신다(빌 1:6).

 

 이같이 신령한 자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지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므로 새언약의 백성은 구약 백성들이 못한 일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새언약의 백성에게 주어진 생활 규범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행동의 원리가 되는 생활 법칙이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은 사랑에서 출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으로 규정하셨기 때문에(마 22:36-40; 막 12:30,31; 눅 10:27,28) 주를 사랑하는 자는 그의 사랑의 계명을 꼭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힘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요 14:9,12).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의 계명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므로, 그리스도를 힘입어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게 된다(롬 13:8; 갈 5:14; 엡 5:2; 약 5:8; 요일 3:23; 4:10,11; 4:21).

  

구약과 신약 모두 구원의 길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받게 된다고 가르친다. 메시야 예언을 기록한 부분만이 아니라 모세 오경과 역사서와 시편과 선지서 모두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구약이 증거해 왔고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린 메시야는 예수 그리스도였다(행 13:16-41). 예수님도 구약이 자신을 증거한다고 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구약이 이처럼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면 구약은 그리스도의 책이다. 예수는 구약의 그리스도이다. 신약의 그리스도는 구약의 그리스도 없이 생각할 수 없다. 구약에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가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시고 자기의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증거와 신약의 증거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므로, 성경 해석은 반드시 양 성경의 증거를 함께 듣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과 신약이 통일되게 증거한 메시야이시며, 메시야로서의 권위를 갖고 계신다. 예수님 스스로도 공생애 사역의 첫 선포에서부터 이 땅에서 메시야로서 갖는 전권을 주장하셨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1-2)

 

이 말씀을 읽으시고 이 글이 백성들의 귀에 응했다고 하셨다(눅 4:18-21). 예수님 자신은 구약의 어떤 왕이나 선지자보다 더 크며(마 12:40-42; 눅 11:29-32), 모든 왕들과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보기를 원했던 그 메시야이심을 분명히 하셨다(마 13:16,17; 눅 10:23,24).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누구도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이것을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아시므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의를 이루고자 하는 본성이 있으므로, 하나님은 물리적으로라도 그 의도를 없애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행위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하지 말고, 예수를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의지해야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다. 자기 행위로 의를 쌓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신실성을 반역하는 행동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고 의지하며 주신 말씀을 따라 살 때,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실천될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의 의지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이는 복음적인 삶이라 할 수 없다. 구약과 신약이 모두 예수를 증거하기 때문에 성경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한다. 성경을 따라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과 행동도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한다. 이것이 곧 복음적인 삶이다.


댓글